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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6 외면 (4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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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오? "

 꽤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듯한 아이반을 보며 모로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물음에 이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아이반은 짧게 한숨을 쉬고선 평상시와 같은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 별 거 아니야. "

" …타린과 지기라 알고 있소. 결정을 후회하는 것이오? "

" 그럴 리가. "

 부정은 했으나 표정은 복잡 미묘했다. 모로우는 부채를 탁 접더니 칼같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 분명히 그대는 이 거지같은 금제를 없애는 것에 동의를 했소. 번복하는 것은 안 될 일이오. "

" ……걱정하지 마. 단지 타린이 이타라희와 계약한 사실에 조금 놀랐을 뿐. "

 사실 아이반은 조금이 아니라 많이 놀랐다. 역대 이타라희들 중에서도 삼군장과 계약을 맺은 경우는 손에 꼽았다. 자신만 하더라도 이타라희와 계약을 맺었던 적은 단 한번 뿐이었다. 당연히 자신의 몇 안남은 오래된 지기가 계약했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 잊지 마시오. 이번이 유일한 기회임을. "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바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과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은 이유였으니까. 알면서도 아이반은 찝찝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하나 있다는 방법 역시 마음에 차지 않았고, 그걸 수행하는 산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적이라는 상대마저도 오래된 지기였으니 어떻게 신경 쓰이지 않을까. 심지어 목표였던 여인마저 올곧은 성정을 가진 이로 보였으니 그야말로 악인이 된 기분이었다.

" 이거 참, 어렸을 때 산나들을 죽이고 다녔어도 이런 기분은 안 들었는데 말이야. "

" 쉽게 생각하시오, 쉽게. 이번 한번이면 산나하리와의 경계가 풀리는 셈 아니오? 더는 계약이니 뭐니 부탁 들어줄 필요가 없지 않겠소. 또 다른 우리들의 세상인 게지. "

 과연 그렇게 될까. 아이반은 금제를 부수는 것에 동의를 했지만 모로우의 생각에는 간단히 동의하지 못했다. 질서가 괜히 생기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에, 그는 조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딸아이가 유난히 더 보고 싶어졌다.

*

 회의를 파하고 이라프 주요 간부들이 느칸다로 움직이기 시작한 지 엿새 만에 알렘에게서 연통이 왔다.

" 알아온 것이 있느냐? "

" 보안이 아주 철통같아서, 대단한 것은 건지지 못했습니다. "

 알렘이 송구스럽다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 괜찮다. 헌데 부른 이유는 무엇이냐? "

" 이걸 좀 봐주십시오. "

 알렘이 나이시라의 앞에 펼쳐든 것은 작은 밀지였다. 돌돌 말려진 밀지를 풀어내자 안에 적힌 내용이 드러났다. 단 한 줄만 적혀있었다.

" 부족함, 이라. "

" 제가 알아본 바로는 은밀히 각지에서 넘겨받는 것이 있다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물건이 아닌 듯하여……. "

" 산 제물을 받는다는 소리로군. "

 나이시라가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크라힘은 자신에겐 원수였으나 제법 평이 괜찮은 왕이었다. 심하게 사치를 부리지도 않았고 일을 등한시 하거나 여색만 탐하는 그런 왕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산 제물을 받는다는 것이 사실일 경우 대대적인 비난이 일 것이다.

" 뭐야, 뭐야. 대단한 거 아니라면서 대박이네. 알렘 아저씨 고생 좀 했겠어요. "

 역시 미친놈은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을 줄 알았다며 타린이 깔깔거렸다. 나이시라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느칸다로 가기까지 못해도 엿새는 더 걸렸다. 혼자 움직이는 것이라면 수족들의 도움을 받아 며칠 만에 도착했겠으나 수하들을 데리고 움직이느라 이동이 더뎠다. 그러나 이동만 한다고 아까운 시간을 버릴 수는 없었다.

 나이시라는 결정한 듯 밀지를 접어 알렘에게 다시 넘겼다.

" 이걸 드러나게 만들어야겠다. "

" 예? "

" 필시 각지에서 실종자들이 대폭 늘었겠지. 의심을 피하려고 꽤나 넓은 범위에서 제물을 모았을 것이다. "

" 느칸다가 아닌 나라에서도 있을 수 있겠군요. "

" 소문을 퍼트리거라. 타국에서부터 자국으로, 느칸다의 중심에는 가장 늦게 퍼져야 한다. 그래야 손쓸 시간도 없이 당할 테니. "

 소문은 커지면 커질수록 알아서 불어날 것이다. 나이시라는 하나의 약점이라도 최대한 파장이 퍼지게 만들려 했다.

" 자칫하다간 나라간의 분쟁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

" 아니, 자국의 실종자들 역시 아크라힘의 소행이라는 것을 안다면 느칸다 역시 그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다. 다른 나라 수뇌부들도 역시 실종자 몇으로 분쟁을 일으키진 않아. 아크라힘을 고립시킬 수 있는 기회다. "

" 그래도 디칸타는 호전적이지 않습니까? "

" 아. "

 디칸타는 나라 안에서도 분쟁 자체가 잦은 편이라 오히려 실종자들이 발생해도 묻히기 쉬운 조건이었다. 분명 가장 가능성 있는 나라였지만, 알렘의 말 그대로 호전적이기 짝이 없다. 나이시라는 슬그머니 덧붙였다.

" ……일단 디칸타는 빼두도록. "

 이오렌이 말릴 수만 있다면 모를까, 위간은 무턱대고 싸우고 볼 사람이었다. 따로 만나서 얘기하는 수밖에.

" 디칸타 위간께 오늘 저녁에 찾아뵙겠다 서신을 넣거라. "

" 어쩌시려구요? 전쟁광한테서 싸우지 못하게 하는 건 좀 무리 아닐까요? 그냥 디칸타는 빼버리죠. "

" 가장 많은 실종자가 있을 곳이 디칸타니까. 게다가 네 말대로 디칸타 위간은 호전적이라고 정평이 나있는 인물이 아니더냐. 백성들을 자극시킬 가장 좋은 위협거리가 될 것이다. "

" 아하. "

 타린은 역시 이런 쪽은 제 분담이 아니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 이리아 언니한테 말해놓을게요. 오늘은 일신이랑 가는 게 낫겠죠? "

" 그러고 보니 여태 보고받는 것을 미루고 있었구나. "

" 대충 들어보니까 별다른 건 없다네요. 요새 드리슬란도 가뭄이니 뭐니 난리더만요. "

 귀를 후비적거리던 타린은 저만치서 멀리 훈련하고 있는 사하드를 보더니 버럭 소리를 지르며 창가에서 뛰어내렸다.

" 설렁설렁한다. 아주? 자세 봐라, 너도 난리 났네 그냥. "

 사하드는 그 뒤로 매일 특훈을 빙자한 타린의 괴롭힘을 받고 있었다. 그 대신 실력이 많이 느는 것은 사실이라 사하드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얌전히 훈련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오렌은 손에 들린 서신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별 다른 내용이 없었지만 이오렌은 그냥 한숨만 나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주인의 반응이 예상되는 터라 심적으로 벌써 지치는 듯싶었다.

" 아, 차라리 못 본척하고 지나갈 것을. "

 하늘에서 툭 떨어진 서신을 본능적으로 낚아챈 자신의 순발력을 원망하며 이오렌은 또 훈련장에서 미쳐 날뛰고 있을 위간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 그 여자가 온다고? "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지도 않은 채 위간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오렌은 저 의자를 버리기로 결심하고 조심스레 서신을 내밀었다.

" 오늘 밤에 찾아뵙겠다는 서신입니다. "

" 뭐야, 좀 있으면 오겠네. "

 그러면서도 꿈쩍을 안하는 위간을 보며 이오렌은 순간적으로 왕 앞에서 고개를 내저을 뻔했다. 심사가 뒤틀리면 앞뒤 안 가리고 검을 휘두르는 것을 잘 아는 그는 마음을 다스리며 공손하게 권유했다.

" 곧 오실 테니 일단 씻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

 이오렌의 걱정과는 달리 다행히 나이시라가 도착한 것은 위간이 단장을 끝낸 뒤였다. 위엄 있는 모습으로 그녀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고 이오렌은 한숨을 돌렸다. 외국의 사신이 올 때마다 치르는 또 다른 전쟁이었다.

" 내게 더는 볼일이 없는 걸로 아는데 의외의 방문이로군, 나이시라. "

" 왕가의 패, 돌려드리겠습니다. "

 이라프에게 진 빚을 대신해서 주었던 왕가의 패를 돌려주겠다는 말에 위간은 보통일이 아닌 것을 알고 뒷말을 기다렸다.

" 그 대신? "

" 곧 느칸다에 소란에 있을 것입니다. 제 뜻에 따라주셨으면 합니다. "

" 흠. 고작 그것으로 왕가의 패를 돌려주겠다? "

" 성공한다면 더는 쓸 일이 없을 것이고, 실패한다면 쓰고 싶어도 쓸 처지가 못 될 테니 말입니다. "

 위간은 어깨를 으쓱였다. 왕가의 패를 돌려받는 조건치곤 오히려 간단해서 별 무리가 없을 성 싶었다.

" 뭐, 좋아. 수락하지. "

" 서신으로 남겨주셨으면 합니다. "

 위간이 귀찮다는 듯 턱짓하자 이오렌은 옆에 준비된 비단서신에 조심히 글을 작성했다. 그리곤 투덜거렸다. 서신 남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저렇게 쉽게 응할 수 있는 거지.

" 느칸다 왕의 약점을 잡았고, 각 국에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소문으로부터 불거지기 시작했을 때 느칸다 왕을 요구해주셨으면 합니다. "

" 뭐? 전쟁에서 이긴 것도 아닌데 왕을 요구한다고?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

" 말이 안 되니까 하는 말입니다.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핑계처럼 대시면 됩니다. "

 이오렌은 이해력이 부족해 보이는 위간을 위해 덧붙였다.

" 디칸타가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주기 위해서겠지요. 그걸로 느칸다에 압박을 주실 셈입니까? "

"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려우나 백성들 역시 그에게서 등을 돌릴 것입니다. 거기서 디칸타를 비롯한 타국의 압박을 받게 된다면 왕을 버리기 십상이지요. "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이어붙이는 말에 위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약점인지는 몰라도 된통 걸린 듯싶었다. 하여간 무서운 여자였다.

" 그 정도야 쉽지. "

" 더불어, 그 빌미로 느칸다에 전쟁 선포를 하지 않는다고 약조해주십시오. "

" ……철저하네. 우리 쪽도 나름 재정상태가 안 좋아서 말이야. 그 조건도 수락하는 걸로 하지. 그럼, 용건은 끝난 건가? "

" 무례히 찾아왔는데도 흔쾌히 수락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

 흐트러짐 없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나이시라를 멍하니 보고 있던 위간은 혀를 내둘렀다.

" 진짜 무서운 여자라니까. 요새 좀 잊고 있었는데 여전하네. "

" 언제는 그런 점이 도움이 될 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

" 도움이 되기야 하겠지. 그래도 살벌하잖아. "

" 디칸타의 이름을 주고 싶어 하시더니, 마음이 바뀌셨나봅니다. "

" 그냥 디칸타에서 적당히 찾아서 왕비 시키련다. "

 이오렌은 참 다행이라며 한시름 놓은 듯 개운하게 웃어보였다.

" 좀 똑똑해서 나 대신 왕실 일 해주고 적당히 유해서 내 말도 잘 들어주면 될 것 같은데. 아, 밥도 맛있게 했으면 좋겠다. "

 왕비는 밥 짓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고 싶던 이오렌은 꼬투리 잡을 것이 한두 개가 아니라 입을 꾹 닫았다.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면 화병으로 죽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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