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5 외면 =========================================================================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나이시라 주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항상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위리든 수하들도 떠났고, 매일 아침 찾아오던 불청객도 떠났다. 정확히 이레 째, 샤나일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된 순간 바랐던 평화였다.
" 움직여보세요. "
" 이젠 괜찮다. 통증도 없고. "
순간적으로 끌어 쓴 힘 때문에 퉁퉁 부었던 사지의 근육들이 제법 안정을 되찾았다. 나이시라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멀쩡해진 몸 상태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저 아이 덕택이여요. 회복이 더디셔서 오래 걸리겠다 싶었는데 다행이지요? "
이리아가 목욕을 마치고 일어서는 나이시라의 몸을 찬찬히 닦으며 바깥에 대기 중인 사하드를 눈짓해보였다.
" 사하드도 회복 중인데 내게 기운을 끌어다 써도 되는 것이냐? "
" 헤우리니까요. 깊은 절상도 없는데다 애초에 근원이 생명인 아이니 걱정은 접으셔요. 어쩜 우리 궁주는 이렇게 천날만날 걱정만 하실까. "
늙은이가 따로 없다며 이리아가 한숨 쉬었다. 확실히 잔걱정이 많은 편인 나이시라는 대꾸 없이 미소만 지었다.
" …다들 모여 있을 거여요. 하루만 더 쉬는 건 어떠세요? "
" 이미 이레나 미뤄진 일이다. 기한을 늘릴수록 유리한 건 저쪽이겠지. "
나이시라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곤 어느 때보다 찬 얼굴로 회의실에 들어섰다. 그녀가 방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의자에 앉아있던 간부들이 일어나 수장을 맞이했다. 긴 탁자에 마주보고 앉아있는 수하들 중 상석 가까이에는 타린과 마찬가지로 지부장의 자리를 맡은 수족들이 있었다.
" 이렇게 모두 모인 것은 오랜만이군. "
" 그간 격조했습니다, 궁주. "
카디사 상단의 표면적 상단주인 알렘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투실투실한 뱃살을 두드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서운한 소리가 일시에 튀어나와 나이시라가 미안한 낯으로 서둘러 본론을 띄웠다.
" 이미 동 지부장에게 대강의 얘기는 들은 것으로 안다. "
" 그렇습니다. "
기르타카에 부부장으로 있는 킨자일이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눈치를 보며 조심히 질문했다.
" 저어, 진심이십니까 궁주? "
" 무슨 뜻이에요? 그럼 궁주께서 장난치려고 다들 불렀겠어요? "
타린이 사납게 대꾸하자 단박에 킨자일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어깨는 더 좁혀졌다.
" 아, 아, 아니 이 년 전에 이미 느칸다는 포기하신 걸로 알아서……. "
" 진정하시지요, 동 지부장. 그의 질문이 말도 안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알렘이 늘 그렇듯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중재에 나섰다. 나이시라는 눈짓으로 감사를 표하며 수하들이 기다리고 있을 대답을 위해 입을 열었다.
" 이라프는 옛날과 비교해 상당히 거대해졌다. 애초에 느칸다의 현 치세에 불만이 가진 자들을 모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일자리가 필요했던 인재들이 모여 이라프의 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으니까. "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이라프에 들어왔던 이들은 느칸다에 별 감정이 없을 것이다. 느칸다를 기반으로 한 본부와 다르게 다른 나라에 기반을 둔 지부들은 이런 상황 자체를 모를 수도 있었다. 이라프를 조직하기 이전부터 함께 했던 알렘이 손을 들었다.
" 악감정이 없다 해도 알고는 있습니다. 그것이 이라프에 들어오기 위한 조건이니까요. "
" 그렇다고 목숨이 오갈 전쟁에 끼라는 것은 너무한 처사가 아니겠느냐. "
나라와 맞서 싸우는 것이다. 당연히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고 수많은 인명피해가 예정되어 있는 길이었다. 전쟁의 참혹함을 잘 알고 있던 연륜 있는 이들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것을 핑계 삼아, 복수를 포기했었다. 평화가 지속되길 바랐던 것이지. 오랜 숙원을 가진 그대들에게는 미안할 따름이군. "
" 하하, 어디 궁주뿐이겠소. 나 또한 이를 갈며 살았다지만 이미 늙은 몸이라오. 배부르고 등 따숩게 지내니 증오가 다 부질없더이다. "
희끄무레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마윈이 시원스레 웃어보였다. 그와 함께 편히 웃어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킨자일은 아직 불안한 듯 눈치를 보았다.
" 저, 그러시면 전쟁은…. "
" 전쟁은 전쟁이되 소리 없는 전쟁이 될 것이다. "
무슨 뜻이냐는 눈빛에 나이시라는 조금 천천히, 고심해서 말을 골랐다.
" 일단은, 내가 느칸다의 옹주니 그 자와 부녀지간이지 않느냐. "
" 그렇군요. 민심이 돌아설 테니 금군을 움직이진 못하겠군요. "
" 하지만 이라프의 수장은 비밀로 부쳐지지 않았습니까? 그, 그 핑계를 대어 이라프 척살을 명령하기는 쉬운 일일 텐데…. "
눈치를 보는 것과는 다르게 머리는 충실히 잘 돌아가는 자였다.
" 그렇다면 정체를 밝히면 그만이다. 내가 표면적으로 나서면 곤란한 것은 그 자니까. 아직까지 드리슬란의 왕비 자리에 있으니 잘못 하다간 드리슬란과 부딪히겠지. "
처음에는 나이시라는 드리슬란과 느칸다가 맞붙을까 스스로 유배를 결정했었다. 어디까지나 아크라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자신이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무슨 수법을 쓴지는 모르지만 그의 편에 선 헤우리들이 있는 이상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 물 밑 싸움이 되겠군요. "
" 뭐 그렇다면 해볼 만하지요. "
" 세상 뜨기 전에 후련하게 복수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암. 난 찬성이오. "
상대가 일반 병사들이라면 은밀한 싸움에서 이라프가 한수 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는 간부들은 오랜만의 흥미로운 전투에 투지를 불태우며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만큼 쉬운 싸움이 아닌 것을 아는 나이시라는 가장 중요한 본론을 꺼내었다.
" 아크라힘은 금군이 아닌 병력을 움직일 것이다. "
" 사병을 키워왔다는 말씀입니까? "
" 일개 병사가 아니라, 여기 앞에 앉아있는 지부장들과 맞먹는 실력자들로 구성된 병력이다. "
순식간에 싸해졌다. 오랫동안 이라프에 몸담으면서 누구보다도 인간을 초월한 것을 잘 알고 있는 간부들이었다.
" ……어차피 이판사판입니다. 아크라힘은 궁주를 제거하자마자 이라프 역시 없애려 들 테니 말입니다. 제 용상에 위협될 만한 것은 뭐든 없애는 작자니까요. "
" 그나저나 그런 실력자들이라면 수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힘들겠소.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봤자 학살만 일어날 것이오. "
숱한 전투를 겪어왔던 마윈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심에 빠진 소리를 내었다. 생각보다 강한 상대의 전력에 다들 입을 다물자 나이시라가 타린에게 눈짓했다. 헤우리들과의 싸움은 헤우리가 가장 잘 아는 법이었다.
" 우리가 이레 동안 조사한 게 좀 있는데 말이죠. 느칸다에 신관 있는 거 아시죠들? "
" 도태되었던 신전을 부활시킨 것이 아크라힘이었죠. 잘 압니다. "
"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그 자식들이랑 작당을 해서 병력을 만든 것 같더라고요. 미친놈들이 글쎄. "
알렘이 조심스레 헤우리들을 바라보며 수년간 침묵하던 그들의 존재에 입을 떼었다.
" 제가 알기론… 함부로 오갈 수 있는 게 아닌 걸로 압니다만, 아크라힘에게 그런 이들이 어떻게……. "
" 우리한테 금제가 있거든요? 계약을 해야지만 왕래가 가능한데, 그 사기꾼 신관 놈들이 뭘 해가지고 이타라희와 맞먹게 불러냈더라고요? "
" 이타라희요? "
" 어, 대충 설명하자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게 많이많이 계약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건데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분명 그 놈들이 정상적으로 오진 않았을 거라는 거죠. "
" 수상쩍은 부분이 있다는 말씀이시지요? "
콕콕 잘 집어내는 알렘을 보며 타린이 속이 시원하다는 듯 웃었다.
" 되돌릴 방법만 있다면 걔네 다 자격 박탈당할 테고, 남는 건 그 왕만 남는다 이거죠. "
그럼 그야말로 종이호랑이나 다름없지 않겠냐며 타린이 어깨를 으쓱하자 간부들이 서로서로 눈을 빛내었다.
" 느칸다는 제 앞마당이나 다름없지요. "
" 뭐어, 나도 오랜만에 고국 땅이나 밟아 보고 좋소이다. "
" 일신한테 듣기론, 이년 전에 이라프를 나간 사람들이 꽤 된담서요? 그 사람들 부르는 거 괜찮지 않아요? "
이년 전 나이시라가 복수를 포기함과 동시에 이라프를 떠나간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남은 이들과는 다르게 원한을 잊지 못한 이들이었으니 타린의 말대로 연락만 닿는다면 전력이 될 수도 있었다. 꽤 괜찮은 생각에 킨자일이 손을 들었다.
" 저… 제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몇몇 연락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
" 신전 쪽 정보는 저희가 담당하겠습니다. "
" 그럼 나는 쓸 만한 놈들을 뽑아놔야 겠구만. "
일사분란하게 맡을 바가 정해지자 나이시라는 회의를 파했다. 남은 것은 꾸준한 준비와 때를 기다리는 것 뿐.
" 일이 착착 진행이 되네요, 궁주. "
복수전이 머지않았다며 흐흐 웃는 타린을 보며 나이시라는 회의 내내 걸렸던 점이 떠올라 머뭇거리며 물었다.
" 전하께선… 연락이 없으셨느냐? "
" 연락이요? "
타린이 난감하다는 듯 턱을 긁적거렸다.
" 뭐 이젠 궁주를 찾아오진 않을 걸요……. "
얼버무리듯 타린이 말끝을 흐렸다. 일단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샤나일은 더 이상 나이시라를 찾아올 생각이 없어보였으니까.
그 사고가 일어나고 난 사흘 후, 샤나일은 타린을 찾아왔었다. 정확히는 타린의 시야에 샤나일이 얼쩡거렸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새벽까지 사라지지 않는 인기척에 타린은 잠자다 일어난 부스스한 머리로 황태자를 맞이했다.
" 감사 인사 받으려고 오셨나 봐요. 아니 근데 왜 내 앞에서 얼쩡거린데. "
타린이 궁시렁거렸으나 샤나일은 장단 맞출 생각이 없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본론을 먼저 꺼내었다.
" 네 도움이 필요하다. "
" ……이건 또 뭔 소리래. 저기 전하, 뭘 잘못 드셨나 봐요. 한 번 도와준 걸로 내가 막, 어, 친절하게 대해줄 것같이 보이세요? "
" 선조가 너의 지기라 하였지. 내 능력, 너라면 잘 알 것 아니냐? "
모를 수가 없었다. 인간들 말로 하자면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였으니까. 그의 성장과정을 낱낱이 함께 했던 타린은 부정하지 못했다.
" 그래서요. "
" 먼젓번의 싸움으로 깨달았다. 내가 가진 힘이 너무 하잘 것 없더군. "
" 그걸 이제 아셨담. 그래서 도와 달라? 제가 왜요. "
" 나 역시 조사를 좀 해봤지. 아크라힘이라 했던가? 만만치 않은 상대겠지. "
입을 삐죽이며 얘기를 듣던 타린이 대충 짐작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 같이 싸워주시려나 본데, "
" 필요 없진 않을 텐데. "
" 그으……. "
확실히 범인보다야 혼혈인 샤나일이 나을 것이다. 잘만 가르치면 한 몫 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의 도움을 받는 것이 꺼려져 타린은 탐탁지 않았다.
" 이 일로 궁주한테 용서 좀 해달라고 하시게요? "
" 시라 앞에 나타나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
이 기회에 저번처럼 계속 얼굴을 비치겠거니 싶었는데 의외의 말이라 타린은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짐작가지가 않았지만 타린은 그저 한숨만 내쉬고 받아들였다. 조금 모자라긴 해도 헤우리에 버금가는 잠재력을 가진데다 명색이 황태자였다. 표면적으로 돕지는 못해도 위리든까지 합세한다 생각하면 꽤나 든든한 전력이었다.
" 속죄라도 하시려나 보죠. 뭐, 좋아요, 그렇게 하는 걸로 하죠. "
" 그래. "
샤나일은 속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공을 쌓아 죄책감을 덜고 싶지도, 덜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그녀가 안전했으면 싶었고, 평범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말을 덧붙이자니 계속 캐물을 것 같아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입을 닫았다.
" 근데 그 말 진심이에요? "
" 무얼 말하는 것이냐? "
" 다시는 궁주 앞에 안 나타나는 거요. 태자처럼 살겠다며요? "
물론 반은 거짓이었다. 나이시라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것은 진심이었으나 그는 자신이 말한 그대로 멀쩡하게 살 자신이 없었다. 황실에서 정해주는 여인을 다시 태자비로 맞이해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잘못된다면 바보 같은 그녀는 또 가슴에 돌을 하나 얹은 것처럼 스스로를 질책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살아야했다. 잊고 살라 얘기했지만 자신은 잊어선 안 되었다. 그렇게 매순간을 깨달으며 빈껍데기처럼 살아야했다. 생각만 해도 지옥 같은 나날들이었지만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리 할 것이다. "
자신이 어떻건 간에 이젠 나이시라와 별개의 일이었다. 정식으로 폐비 시키진 않았으나 그것도 곧이었다. 일이 해결되고 잠잠해지면 직접 처리할 사안이었다.
샤나일은 그때가 되어 황명을 건네는 자신의 손이 떨리지 않길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