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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4 직면 (4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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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이 드십니까? "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상태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시라는 무리하게 몸을 움직여 일어나는 것 대신 흐릿한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살폈다. 잿빛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굳은 얼굴. 일신이었다.

 그의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나서야 쓰러지기 전의 상황이 기억난 나이시라는 어지러움을 참고 기어이 상체를 일으켰다.

" 누우라 말씀드려도 듣지 않으시겠지요. "

" 일신, 타린은? 이리아는, 모두 무사한 것이냐? "

 다급히 수족들의 안위를 묻는 그녀의 눈빛에 담긴 간절함에 일신은 안심하라며 자신의 손목을 잡은 그녀의 손을 다독여 주었다.

" 안심하세요. 큰일이 났다면 저보다 궁주께서 먼저 알아차리셨을 겁니다. 두 번째 맹세, 잊지 않으셨잖습니까. "

 수족들이 죽었더라면 그 즉시 깨졌을 맹세였다. 그것을 기억해내곤 나이시라는 안도감에 힘이 풀려 축축한 동굴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 사이 돌아온 여인이 파리한 안색으로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복이 빠른 샤나일과 다르게 그녀의 몸 상태는 상당히 나빴다.

" 용케 앉아있군. 왜 눕지 않고 있는 거지? "

" 저희 궁주께선 순순히 눕지를 않으셔서 말입니다. "

 참 그것이 문제라며 일신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이시라는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안대를 쓰고 있는 여인에게 무릎을 꿇고 절했다.

" 은인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더라면 필히 죽을 목숨이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 ……똑같은 말을 하는군. "

" 예? "

" 일어나라. 환자가 찬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은 안 좋다. "

 기다렸다는 듯 일신이 뒤에서 그녀를 부축해 침상에다 앉혔다.

" 일신, 전하는……. "

" 너보다 멀쩡하니 네 걱정이나 해라. "

 냉랭한 여인의 말에도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나이시라는 다시 일신의 부축을 받아 맞은 편 침상에 누워 있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분명 은인의 말대로 환자치고는 핏기가 도는 것이 나빠 보이진 않았지만, 얼굴은 악몽을 꾸듯 일그러졌다. 심상치 않은 표정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자신의 차가운 손을 그의 뺨에 대어보아도 샤나일은 꿈쩍도 안했다.

 안대를 낀 여인은 앞이 보이듯 나이시라의 시선을 따라 샤나일을 보았다. 확실히 식은땀을 흘리며 잔뜩 찌푸려진 인상은 걱정될 만 했다.

" 내버려 두어라. "

" 하지만…. "

" 그저 알려준 것뿐이니까. "

 여인은 자신의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거리낌 없이 얘기했다.

" 네 눈으로 과거를 다시 보고 있겠지. 네가 무슨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여태껏 해왔는지를 말이다.  "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샤나일이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이시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저 괴로워 보이는 그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

 샤나일의 땀들을 자신의 소매 끝으로 닦아주면서 나이시라는 문득 자신이 그의 눈으로 과거를 본다면 어떨지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빤히 읽고 있던 여인은 못을 박았다.

" 너는 그럴 필요 없다. "

 제 생각을 읽었다는 것에 놀랄 법도 한데 나이시라는 담담히 물었다.

" 어째섭니까? "

" 쓸데없는 동정심은 오히려 너희들에게 독이 될 테니까. "

 동정심이 생길 정도로 가엾다는 뜻일까. 그녀는 순순히 은인의 말을 믿고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두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무엇으로 이 은혜를 갚으리까? "

" 필요 없다. "

" 은인께선…. "

" 지르가. "

 여인은 자꾸만 들리는 은인이란 소리가 싫어 툭하니 내뱉었다.

" 이름으로 불러라. "

" 지르가님께선 필요한 게 없으십니까? "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깊은 산 동굴에서 산다면 필요한 것이 많지 싶었다. 그러나 지르가는 곰곰이 생각해보는 듯하다 답했다.

" 몸이 회복되는 대로 나가주면 그것으로 족해. 소란스러운 것은 질색이니까. "

 나이시라는 그 말에 토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은혜를 갚겠다고 설쳐보았자 민폐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지르가는 물끄러미 동굴 밖을 내다보았다.

" 네 일행들이 뛰어오는군. 금방 도착할거다. "

" 다들 무사합니까? "

" 그들의 재생력은 인간을 훨씬 웃돌지. 깊지 않은 자상은 금세 아무니 걱정할 필욘 없다. "

 아무리 맹세가 깨지지 않았다곤 하나 상처투성이일까 염려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확답을 받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나이시라의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것을 보고 지르가는 여태와 다르게 조금 조심스런 기색으로 물었다.

" 이 일의 배후를 찾는다면 어쩔 셈이냐? "

" 저는 성인군자가 아닙니다. "

 나이시라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답했다. 마찰을 기꺼워하진 않지만 부딪혀야 할 상대라면 흔적도 없이 제거할 것이다.

 예상했던 답이었지만 지르가는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오래된 악우의 얼굴이 떠올라 씁쓸해졌다. 자신이 들여다본 나이시라의 성정은 자비롭다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제 사람만을 위하는 지극히 인간다운 이였다. 지르가는 문득 그런 그녀에게 매질을 시켰던 샤나일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그런데도 저 자는 내버려두는 건가. "

 분명 들었을 테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다. 지르가는 여태 보지 못했던 그녀의 숨겨진 감정들이 제멋대로 섞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참으로 순탄치 못한 인생을 가진 여인이었다.

" 그래, 그렇지. 쉬이 인정할 수 없겠지. "

 한없이 따스하고 다정했던 그와 지독하게 차가웠던 그가 동일 인물임을 어느 누가 손쉽게 인정할 수 있을까. 지르가가 본 나이시라는 충분히 명석했다. 단지 배신감과 원망으로 얼룩져 애써 부정하고 있었을 뿐이다. 차라리 인정하고 그 반편이 때의 모습마저 밀어냈더라면, 한 때의 추억처럼 여기고 잊고 살수도 있었을 텐데.

" 궁주! "

" …왔군. "

 흡사 멧돼지가 돌격하듯 빛의 속도로 헤우리들이 동굴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리저리 구른 흔적이 역력한 거렁뱅이 꼴로 그들은 자신의 주인들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 세상에, 세상에 무사하셨소! "

" 당연히 무사해야지 왜 거기서 놀라고 그래! 궁주, 괜찮으십니까? "

" 많이 다치셨습니까, 누님? 여기 붕대들이……. "

" 잠깐, 진정 좀 하거라. "

 옷에 넓게 퍼진 붉은 색 때문에 더 놀란 모양이다. 그녀는 차분히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똑같은 말을 다섯 번은 해야 했다.

" 타린, 어찌 되었느냐. "

" 일단 궁주의 행방을 파악 못했는지 후퇴를 하더라구요. 저희도 궁주 기척이 갑자기 사라지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때 저 자가 나서서 우리를 부르길래 단박에 달려왔죠. "

 타린은 지르가를 손가락질 해보였다.

" 그나저나 이리아는? 왜 보이지 않는 것이냐? "

 이리아의 다리가 부러졌다는 말이 기억난 나이시라가 조급히 묻자 타린이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 지금 전하 때문에 도시 내에 발칵 뒤집혔잖아요. 지금 위리든 소집되고 난리 났을 걸요. 이리아 언니가 그 뭐냐, 측근 놈들 데려오기로 했어요. 몸은 다 나았으니 걱정은 마시구. "

" 타린, 상황을 좀 듣고 싶습니다만. "

 드리슬란 황궁을 오간 탓에 뒤늦게 합류한 일신이 나이시라의 상처를 감싸고 있는 천을 보며 딱딱하게 물었다. 여태까지 이런 적은 단 한번 뿐이었다.

" 여기서는 아니다. 지르가님께 폐가 돼. 긴밀한 이야기는 여관으로 돌아가서 하는 게 나을 것이다. "

"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

 자연스럽게 팔로 안아들려고 하자 나이시라는 저도 모르게 그 팔을 막아섰다.

" 궁주? "

" 아직 위리든이 오지 않았지 않느냐. …적어도 깨어나는 것은 확인하고 가야지. "

 일신은 탐탁지 않았지만, 꽤나 심했을 상처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나이시라를 지키려 고군분투했을 거라 짐작되었다.

 타린은 기지개를 켜며 빠듯하게 움직였던 몸을 푼 뒤 말했다.

" 그럼 순찰이나 돌고 있죠. 두 명씩 해서 앞뒤로. "

" 가이한이랑 한은? "

" 걔넨 정신체잖아요, 아저씨. "

" 가이한은 완전한 정신체는 아니지 않소? "

" 아 그럼 댁도 죽어서 정신체 하던가! "

" 그런 게 어딨소! 나도 궁주 옆에 있을 테요! "

 등치가 산만한 호란태가 땡깡을 부렸다. 작시아는 노인처럼 혀를 끌끌 차더니 가뿐하게 커다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채고는 동굴 밖으로 나섰다.

" 저희가 앞 쪽을 맡죠. "

" 그럼 우리가 뒤. "

 일신과 타린마저 동굴을 빠져나가자 소란스러웠던 것이 언제였는지 금세 조용해졌다. 나이시라는 왜 지르가가 빨리 나가주기를 바라는 지 이해가 될 것 같아 작게 웃었다. 그러다 바짝 마른 입안 때문에 저도 모르게 작게 기침이 나왔다.

" 목이 마를 테지. 물을 좀 떠오겠다. "

" 아, 저……. "

" 이곳은 아무나 찾을 수 없으니 안심해라. "

" 그것이 아니라, 저도 갈 수 있을까 하고…. "

" 그 몸을 하고? 더 악화되었다간 네 일행들이 날뛸 것 같은데. "

 맞는 말이라 나이시라는 얌전히 있기로 했다. 굳은 듯한 몸은 상태가 완화되고 나서 풀어도 괜찮지 싶었다.

" 시라……. "

 작은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나이시라는 한쪽 팔로 조심히 몸을 일으켜 샤나일의 침상 앞에 무릎 꿇었다.

" 깨셨습니까? "

 잠결이었는지 그녀의 물음에 돌아오는 말이 없다. 나이시라는 침상에 걸터앉아 옆에 놓인 물통에 천을 적셔 맺힌 땀방울들을 다시 닦아주었다. 시원했는지 샤나일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하루 만에 수척해진 그의 모습에 나이시라는 저도 모르게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 …제가 어찌해야 될까요. "

 웃는 낯으로 그를 용서한다 말을 해주어야 할까. 그럼 이 질긴 인연도 끝이 나려나. 그럼 영영 다시는 안 볼 사이가 되는 건가. 그녀는 그가 보기 싫었다가 허한 마음에 다시금 반편이를 떠올리는 자신이 싫어 주먹을 꽉 쥐었다.

" 쉬라고 해도 말을 안 듣는군. "

 그의 땀을 닦아주고 있는 나이시라를 본 지르가가 물이 담긴 작은 통을 내밀었다. 시원하게 목을 축인 그녀는 혼잣말하듯 지르가에게 물었다.

" 언제 깨어나실까요? "

" 조금 있으면 일어나겠지. 모든 과거를 세세하게 훑어볼 순 없으니. "

 곧 일어난다는 지르가의 말과는 다르게 샤나일이 깨어난 것은 저녁이 다되어서였다. 이미 순찰을 두 번이나 돌고 온 수족들이 동굴에서 불평을 말하고 있었다.

" 궁주, 그냥 가면 안 되오? 그래도 태자인데 어련히 수하들이 찾으러 오겠지 않겠소? "

" 맞습니다. 가셔서 제대로 된 치료를 하셔야죠. "

" 시끄럽다. 다 나가. "

 계속해서 동굴을 울리는 목소리들에 짜증이 난 지르가가 딱 잘라 말했다. 주인의 은인이라 별 소리 못하고 수족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동굴 입구에서 조용히 주절거렸다.

 나이시라가 바깥에 쫓겨난 이들을 달래려고 동굴을 빠져나가기 직전, 악몽에서 일어나듯 샤나일의 입에서 숨이 터져 나왔다.

" 깨어났군. "

 지르가는 망설임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샤나일이 깨어났다는 소리에 다시 동굴로 들어오려는 수족들을 막아섰다. 심지어 타린마저도 눈치를 보며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포기했다.

" 괜찮으십니까? "

 멀리서 들리는 나이시라의 목소리에 샤나일은 눈을 번쩍 뜨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갑작스런 움직임으로 그의 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아찔한 통증에 그가 움찔하자 나이시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 무리하지 마십시오. 상처가 다 아문 것은 아니라 그러셨습니다. "

" ……시라? "

 헛것을 확인하듯 샤나일이 답 없는 그녀를 재촉했다.

" 시라, 너인 것이냐. "

" ……예. "

" 느껴지지 않아. 지금은… 현실인가. "

 샤나일이 횡설수설하며 그답지 않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 꿈을 꾸셨습니까? "

" 꿈, 꿈이라. 하하, 그렇지, 꿈을 꾸었다. "

 그 어떤 악몽보다도 잔혹한 꿈에 샤나일의 낯빛이 일그러졌다.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동굴 입구 쪽에서 나이시라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동굴 안 그림자가 그를 가리고 있었다.

 뼈마디가 튀어나올 정도로 쥐어진 주먹을 몰랐던 나이시라가 평소 그랬듯 담담히 말을 이었다.

" 빚을 졌습니다. 저 때문에 수하를 잃고 다치셨으니, "

" 너는 내가 밉지 않느냐. "

" 예? "

" 내가 원망스럽지 않는 것이야? "

 새삼스런 물음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를 대신하듯 샤나일이 바싹 마른입으로 소리쳤다.

" 왜! 왜 그리 모질지를 못해! 천하에 상종 못할 개자식이라며 욕을 하고 뒤돌아보지 말았어야지. 죽든지 말든지 버리고 갔어야지, 그랬어야지 왜… 왜 그리 너는…! "

 뭔가 반짝이는 것이 그의 떨군 고개 아래에 떨어지는 듯 했다. 그에 홀린 듯 나이시라가 멈춰있던 발을 한 걸음 내딛었다.

" 보지 마라! 보지 마……. "

 거의 삼켜진 제발이란 뒷말에 그녀는 동상처럼 멈추어 섰다. 한 걸음 다가서 본 그는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떨리는 입술은 볼 수 있었다.

" 가거라, 시라. "

 예상치 못한 말에 그녀는 뒤돌아 갈 생각을 못 했다.

" 네가 말한 대로 나는 잘 살 것이다. 태자답게, 호화로운 비단 보료에 앉아 매 끼를 진수성찬으로 먹겠지. 그리 잘 살 것이다. 네 생각도 하지 않고, 네 걱정 없이 나답게 그렇게 살 것이다. 그러니……. "

 눈을 가린 샤나일의 손바닥을 타고 물방울들이 떨어졌다.

" 그러니 가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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