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1 직면 =========================================================================
" 너는……. "
갑작스럽게 등장한 인물에 선녀가 안색을 굳혔다.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타린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에는 동지부의 수하들과 호란태와 작시아, 이리아 모두가 눈을 부라리며 서있었다.
" 이따위 막을 쳐둔다고 내가 모를 것 같아? "
타린은 코웃음을 치면서 상황을 살폈다. 자신의 소중하디 소중한 주인은 원수의 품에 안겨있었고 자세히 보니 어깨에 핏물이 베여 나오고 있었다. 원수 역시 몸이 성치 않아 보인데다 호위 몇몇이 처참하게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꼼짝없이 위기의 순간이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늦게 알아차렸다면 어찌되었을까. 타린은 오랜만에 느끼는 오싹함에 입술을 핥았다. 투쟁심이 들끓었다.
" 교관님! "
사하드가 화색을 띠며 떨어진 곳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타린은 백의의 인형들을 옭아매고 있는 나무뿌리를 보며 사하드의 능력인 것을 알아차렸다. 기특한 제자였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눈앞에서 오른손으로 부채를 살랑대는 선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에 이를 갈았다.
" 모로우, 네 놈은 여기 어떻게 와있는 거냐. 산나와의 계약 따윈 흥미 없을 텐데. "
" 뭐어, 이 몸이야 말로 놀랬다오. 이백 년만의 이타라희라지만, 그대와 계약을 했을 줄이야. 감탄스럽군. "
모로우라 불린 선녀는 새삼스런 눈으로 샤나일 품 안에 가려진 나이시라를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불쾌한 타린이 빈정거렸다.
" 난 원래 계약자주해. 몰랐냐? "
" 타린, 시답잖은 소린 그만하시오. 궁주의 치료가 우선 아니오? "
호란태가 안달복달하며 발을 구르자 옆에서 작시아가 기다리라는 손짓을 취해보였다. 누구보다 나이시라를 생각하는 타린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 너와 계약 맺은 산나(인간)가 도대체 누군지 정말 궁금한 걸. 얼마나 탐나는 염원이었으면 미친놈이 이렇게 나섰을까? "
" 글쎄올시다. 계약이라 하면 계약일 것이고, 아니라 하면 아니니 애매하구려. "
뜻 모를 말에 타린은 조금 초조해졌다.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사하드의 능력은 오래 쓸수록 타격이 크다. 자칫하다 주위 생명들을 빨아들일 위험이 있을 뿐더러, 유유자적한 모로우의 태도 역시 거슬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모로우의 계약자 존재가 거슬렸다.
" 사하드! 그만 풀어주고 다시 이리와! "
" 예? 하, 하지만……. "
" 얼른 안 와? "
스승의 닦달에 사하드가 조금 두려운 눈으로 나무뿌리에 넣고 있던 힘을 거둬들였다. 뿌리들은 점차 줄어들더니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갔고, 삐걱거리던 인형들은 다시 멀쩡하게 서서 모로우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타린의 속내를 어렴풋이 짐작하곤 입 꼬리를 작게 올렸다.
" 내게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보오? "
" 팔 한쪽 잃으신 분이 대단한 자신감이네, 그래. 날 상대로 그런 말이 나온다 이거지? "
타린의 투쟁심 어린 눈빛에 모로우는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 설마 그럴 리가. 삼군장 중 하나인 그대를 어찌 가벼이 여기겠소? 단지, 다 같이 노는 것이 즐거워 웃는 것이니 오해는 삼가주시오. "
무슨 소리냐 물어보려던 타린은 자신이 찢어놓은 막이 사라지는 느낌에 흠칫했다. 저 멀리서 사람 소리가 다시 흐릿하게 들려오는 걸로 보아선 확실히 사라진 것이 맞았다. 즉 퇴로가 열린 셈이다. 무슨 심산인가 싶어 앞을 바라보자, 웬 사내 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진한 갈색 머리에 이목구비마저 평범한 사내아이는 무채색처럼 존재감이 희미했다. 타린은 지금 사라진 막과 갑자기 나타난 아이를 연관 짓자 이름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 니페……. "
" 오, 이미 아는 사이오? "
" 걔를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냐? "
헤우리들끼리도 특출 난 이들은 유명하기 마련이었다. 그 중 니페는 공간을 단절시키는 것이 주특기인 헤우리였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단절시킨 공간을 비틀어 입구를 만들어 낸다는 점 때문에 유명했다.
타린은 아니길 빌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바람이 우습기라도 하듯, 니페의 옆에서 작게 균열이 일어났다.
" 같이 놀 친우들이 오는군. "
" 작시아! "
타린의 부름에 작시아가 허리춤에 매달린 검 두 자루를 꺼내들고 니페의 목을 노렸다. 모로우는 남은 팔로 부채를 들어 작시아의 검 하나를 걷어냈다. 하나 남은 검이 니페의 목에 닿기 직전, 작시아의 옆구리를 커다란 주먹이 강타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작시아가 나무 기둥에 부딪혔다.
" 오자마자 환영인사가 격한데. 창술사 작시아 아냐? "
작시아의 옆구릴 강타한 우람한 사내 하나가 손목을 풀며 한숨 같은 휘파람을 불었다. 곰 같은 사내를 뒤이어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 모로우를 보고 비웃었다.
" 어머, 모로우. 팔이 왜 그런데요? 칠칠맞긴. "
새로운 인물들이 튀어나왔지만 타린은 신경 쓰지도 않고 작시아가 만들어 놓은 틈을 파고들어 니페의 목을 낚아챘다. 벌어졌던 균열들이 순식간에 닫혔다. 타린은 사정없이 니페의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눈 깜박할 사이에 목을 분지를 자신이 있었다.
" 삼군장이 아이의 목을 조르면 쓰나. "
중년 여인이 웃으며 길게 자란 손톱을 목을 잡고 있는 타린의 팔에 휘둘렀다. 뒤로 물러난 틈에 여인이 니페를 안아 들고 뒤로 사라지려는 때, 귀신같은 몸놀림으로 타린이 여인의 뒤를 쫓아 손을 내뻗었지만 훨씬 더 커다란 주먹에 붙잡혔다. 타린은 사납게 이를 드러내었다.
" 어중이떠중이들이 귀찮게 하네, 진짜. "
목을 긁는 듯한 짐승 같은 소리에 커다란 덩치의 사내는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오싹한 느낌에 눈을 빛내었다. 삼군장의 진짜 실력을 눈앞에 본적이 없었는데 좋은 기회였다.
타린은 사정없이 자신의 손을 잡은 사내를 힘으로 땅에 매다 꽂았다. 그리곤 착실히 명한 그대로 서있는 동지부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 야! 너네는 인형 맡아서 데리고 놀아. 죽거나 지칠 것 같으면 미리 빠져. 호란태 아저씨! 모로우랑 힘겨루기 그만하고 이 곰이나 좀 데리고 노세요. 작시아 언니는 저 아줌마 좀 상대해 주시고. "
이리아에게는 나이시라와 샤나일을 데리고 피해있으라 할 참이었다. 막도 없어진 셈이니 이리아의 능력으로 주위 여관까지 날아가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다시 벌어진 균열에서 등장한 인물에 타린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 혹시나 했더니……. "
느칸다 왕 아크라힘이었다. 신관을 대동한 채 등장한 아크라힘은 냉혹한 검은 눈으로 슥 주위를 보더니 굳은 입매 사이로 혀를 찼다.
" 버러지들이 많군. "
" 삼군장이 있다고 얘기해주지 않은 그대의 잘못이니 나를 탓하진 마오. "
" 저 어린 계집년이 삼군장이라? "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모로우의 말에 아크라힘이 탐스러운 물건을 보듯 뱀 같은 시선으로 타린을 훑었다. 그 기분 나쁜 찝찝함에 당장이라도 그의 몸을 찢어발기고 싶던 타린은 속절없이 흔들리는 나이시라를 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 아버님이 어찌…! "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분명 들킬 것이라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대로 샤나일과 멀어지지 못했는데, 아비를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아비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것은 모조리 없애버리려 할 터였다.
타린은 아크라힘의 편에 선 듯한 모로우와 세 명의 헤우리들을 향해 질책했다.
" 너네 제정신이세요들? 계약 없이 산나하리를 오가는 게 무슨 뜻인지 아냐? 금제를 어길 생각이냐고! "
이년 전, 나이시라가 두 번째의 맹세로 타린과 이리아를 불렀던 그날, 아크라힘은 타린의 견습 제자들을 불러와 술법을 힘을 증폭시켜 싸우게 만들었다. 정당한 계약을 통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자격과 힘을 박탈당했다. 금제를 어겼으니 당연한 대가였고 헤우리들에겐 상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아크라힘은 당돌하기 짝이 없는 소녀의 말에 느긋하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 이 자들은 나와 계약을 맺었다. 금제에 걸릴 이유가 무어냐? "
" 뭐? 이 영감이 뭐라는 거야? "
타린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이시라를 보았다가 아크라힘을 보았다.
" 우리 궁주는 이타라희라고! 그런데 같은 핏줄 내에 계약자가 또 있다고? "
" 자세한 것은 알 것 없으니 순순히 나이시라를 내어 놓아라. 어차피 너희들 또한 곧 내 수하가 될 것이니. 진정한 주인의 말을 들어야 할 것 아니냐? "
오만하고도 뻔뻔한 말에 각각 대치중이던 나이시라의 수족들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말을 들은 것처럼 진저리마저 쳤다. 심지어 가이한 마저 검은 팔들을 부르르 떨며 분개해했다.
" 저 영감이 뭐라는 거요? "
" 몰라, 제정신이 아닌 가봐……. "
" 어머, 벌써 망령이 들었나 보네요! "
이리아가 해맑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리곤 샤나일과 나이시라에게 쪽으로 다가섰다. 잽싸게 둘을 데리고 빠지려고 손을 뻗었다. 방해하는 암기들만 아니었더라면 아마 안전하게 둘은 도시로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계속해서 날아오는 암기에 이리아는 뒤로 피하다가 결국 나이시라에게서 멀리 떨어져 버렸다. 안타까움에 이리아가 울상을 지었다.
" 약조한 것이 있어서, 데리고 가는 것은 곤란하군. "
마지막으로 균열 틈 사이에 나온 사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내가 빠져나오자마자 균열들은 메워지기 시작했고, 니페는 기력을 다 한 것인지 색색 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내는 그런 니페를 안아다가 잘려나간 나무 밑동 위에 두고서는 가볍게 손목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날렵하고 잘빠진 근육들이 유연하게 따라 움직였다.
타린은 조금 짙은 유약빛 피부색의 사내를 보고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사내 역시 마찬가지인지 반갑다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 굉장히 오랜만인걸, 타린. "
" …그러게, 아이반. 이렇게 볼 줄은 상상도 못했는걸. "
또 다른 오랜 지기를 눈앞에 둔 타린은 입맛이 썼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라도 갑자기 늘어난 적의 전력에 조금 초조해지기 까지 했다. 이리아를 힐끗 보자 그녀도 아이반 때문에 움직임이 여의치 않아보였다.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아이반 혼자라면 타린은 이길 자신이 있었다. 강한 상대지만 그녀의 실력이 조금 더 우세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다수의 대결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이반은 난전에서 강했고, 지킬 것이 있는 입장인 그녀는 불리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 저 여인을 두고 물러가줬으면 하지만, 음, 계약자니까 불가능하겠지. "
아이반이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웃었다. 여전히 성실하고 똑똑해 보이는 지기였다. 타린은 차분히 계산했다. 자신이 아이반을 상대한다 하더라도 모로우가 문제였다. 만만치 않은 미친놈을 이리아가 감당키는 어려울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사하드를 전력으로 치기엔, 헤우리들의 싸움에선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이리저리 답 안 나오는 계산에 타린이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때, 모로우가 부채를 탁탁거리며 지루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 언제까지 이리 간만 볼 것이오? 모였으면 응당 한 바탕 놀아야 하지 않겠소? "
" 그거 좋군. "
아크라힘의 비뚤어진 미소에 난전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