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0 직면 =========================================================================
마치 없던 것이 새로이 생기듯 기척 없이 튀어나온 이들은 온 몸이 백의에 휘감긴 채 눈조차 가려진 장님으로 보였다. 그 수상한 생김새에 너나할거 없이 나이시라를 둘러싼 호위들은 긴장했다. 지부장과 같이 사람이 아닐 것이 분명했으니 실력 또한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것은 그들뿐만 아닌지 샤나일도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 라한! 비를 지켜라. "
뒤에 숨죽인 채 따라오고 있던 샤나일의 호위가 새로운 명에 곤란한 듯 다가왔다.
" 전하, 저희는 태자 전하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
" 비를 지키는 것이 곧 나를 지키는 것이다. "
" ……명 받잡겠습니다. "
마치 방어벽처럼 나이시라를 중심으로 에워싼 호위들을 보며 선녀가 탐탁지 않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 내 아이들이 반갑지 않은가 보오. "
" 머릿수가 수배나 차이나는 데 어느 누가 달갑게 여기겠습니까? "
주위를 돌아보며 수를 대충 파악한 나이시라는 덤덤히 말했지만 속은 복잡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사하드 혼자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비록 자비 없이 그들은 목숨을 잃겠지만 탈출하는 것에 문제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헤우리라면, 일이 어떻게 될지 장담하지 못했다.
수족들이 가끔 얘기해주던 헤우리는 천차만별이라 하였다. 핏줄이 아닌 이상 수명부터 능력까지 어느 하나 겹치기 힘들다고. 열 살 먹은 아이가 노인의 모습을 할 수도 있고, 백 살이 넘어도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그런 종잡을 수 없는 이들이었다.
" 누님, 저들에게 제 능력이 통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
" 어찌하여? "
" 저들에게서…… 생명이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
설마 했더니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샤나일은 조급히 물었다.
" 호신술은? "
" 검술은 익혔습니다. "
" 그럼 시라와 함께 뒤로 빠지거라. 시간을 벌 테니 그동안 도망가! 타린이라는 그 자 옆이라면 괜찮겠지. "
뒷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샤나일이 재빠르게 사하드와 나이시라를 뒤편으로 밀어냈다. 부채를 살랑이며 지켜보고 있던 선녀가 탁, 하니 부채를 접었다.
" 도망가려나 보군. 기다려줬거늘 섭섭하구료. "
핏기하나 없이 창백한 이들이 선녀의 접힌 부채소리에 날카로운 검 날을 앞으로 내보였다. 샤나일은 침음을 삼켰다. 장난이 아니다. 전력은 정확히 모르지만 일단 머릿수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이쪽은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것에 비해 백의를 입은 인형 같은 자들은 스무 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무엇보다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 도망가는 것도 나쁘진 않지. 어차피 갈 수 없을 테니. "
가녀리게만 보이는 선녀였다.
" 이래봬도 이 몸은 몰이사냥을 좋아한다오. "
그 말이 신호가 되어 백의를 입은 자들이 달려들었다. 사하드는 샤나일의 말에 충실히 나이시라를 업고 재빠르게 달려갔다.
나이시라는 업힌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남겨진 자신의 일행들은 백의에 뒤덮인 채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수십 개의 예리한 검 날을 보며 나이시라는 갈등했다. 아무리 꾸준히 단련했다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다른 귀족 영양에 비해서다. 자신이 끼어드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짐만 안겨주는 꼴이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면서도 나이시라는 쉽게 눈을 돌리지 못했다.
한에게 부탁한다면…….
-불가합니다, 궁주.
' 한? '
-궁주의 몸은 이전부터 저로 인해 약해지셨습니다. 더 이상 한계를 넘나드시면 위험합니다.
여태껏 내내 묵묵히 잠들어있기만 하던 한의 목소리가 나이시라의 머릿속에 퍼졌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 한은 그녀의 몸을 움직여 상황을 모면했고 그때마다 조금씩 누적되고 있었을 것이다.
나이시라가 초조하게 이리저리 방도를 생각해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발길을 멈춘 사하드 때문에 그녀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 누님, 똑같은 곳을 걸어가는 느낌입니다. "
안색이 창백해진 사하드의 말에 나이시라는 본능적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분명 멀어져만 가던 백의를 입은 자들이 바로 지척에서 샤나일들과 싸우고 있었다.
" 마치 길이 막힌 것 같은, 계속 반복되는 것 같아서……. "
" 아주 정확하오. "
마지막 말은 나이시라의 귓가에 들린 말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선녀가 다시 부채를 살랑이며 나이시라의 옆에 착 붙어있었다. 그 순간 사하드가 예민하게 반응하며 둘을 떨어뜨려 놓았다.
" 물러서십시오. 다가오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
순한 사하드의 인상이 돌변하는 것을 보며 선녀가 씩 웃었다.
" 아직 어린놈이 당돌하기 짝이 없구나! 너 역시 나와 놀아보고 싶은 게로군. 헌데 어찌하누, 난 저 여인과 놀아보고 싶어서 말이다. "
" 가이한! "
나이시라는 재빠르게 사하드의 등에서 내려 그림자를 불러일으켰다. 여섯 개의 그림자들은 사람처럼 솟아올라 선녀를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그러나 오히려 선녀는 즐거운 기색이 만연했다.
" 과연 이타라희. 계약한 헤우리들의 수가 제법이군. "
선녀는 뒤를 힐끗 보더니 자신의 인형과 엉켜있던 나이시라의 일행을 보곤 조금 의아한지 부채로 접었다 폈다했다.
" 그래도 세 번의 맹세를 한 대가라기에는, 수가 많이 적은데…. 생각보다 염원이 약한가 보오? "
" 그렇다 답하면, 물러나 주실 겁니까? "
" 그것은 아니지. 이 몸의 귀한 발걸음을 헛되게 할 수는 없지 않겠소. "
선녀가 호탕하게 웃다가 달려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빛처럼 쏘아지는 그의 몸뚱이를 피한 것은, 순전히 한의 덕택이었다. 제 몸이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느낌은 여전히 기이했으나 나이시라는 그것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검은색으로 도배된 이들은 도발적으로 움직이는 선녀를 가로막으며 나이시라의 방패처럼 움직였다. 제법 위협적으로 대응하는 그들의 공격을 부채 하나로 걷어내던 선녀는 조금 이상한 느낌에 다시 나이시라의 머리를 노리고 부채를 내뻗었다.
쾅! 머리 대신 맞은 나무 기둥이 흠씬 파이는 소리가 퍼졌다. 어느새 자신의 등 뒤로 온 나이시라의 기척을 느끼며 선녀는 호기심이 해소된 듯 시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헤우리가 하나 더 있었구나! 정신체와 계약한 이를 얼마 만에 보는 겐지. 더더욱 흥미롭구료. 어디 한 번 신명나게 놀아봅시다. "
선녀의 움직임은 춤사위와 같았다. 크고 느릿하게 한 번 움직이는 것에 빠르게 다가오던 그림자 셋이 뒤로 밀렸다. 여인의 손목만치 가는 팔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몰랐다. 쐐기를 박듯 내리치는 부채의 힘에 칼날처럼 일어선 바람들이 앞으로 쏘여져 나갔다. 피하려는 순간 다리에 오는 감각들이 욱신거렸다.
-궁주, 장기전은 위험합니다. 이미 한계치는 멀지 않았습니다.
나이시라는 그 말에 품속의 단검을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살상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을지 모르나, 어쩔 수 없었다.
여태 방어적이었던 그녀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보고 선녀는 활짝 웃었다.
" 이제야 나와 놀아볼 마음이 든 게로군. "
선녀는 무너져 있던 백의를 입은 인형 여섯 개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삐걱거리며 일어선 인형들은 나이시라의 그림자 수족들에게 달라붙었다. 남은 것은 선녀와 나이시라뿐.
겨우겨우 수를 줄이고 있던 샤나일은 되살아나는 흰 인형을 보고 이를 갈았다. 그는 계속해서 날아오는 검들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 라한, 이래서는 끝이 없다! "
" 하지만 이것들을 끌고 왕비님이 계신 쪽으로 갈순 없습니다! "
열심히 숫자를 줄였다곤 하나, 여전히 떼거지같이 많았다. 게다가 샤나일과 호위들도 꼴이 좋지만은 못했다. 그 사이 입은 자잘한 자상들로 출혈이 제법 심했고, 무엇보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왼 다리를 심하게 다친 듯한 호위 중 하나는 이미 헐떡이고 있었다.
사하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능력을 쓴다면 잠시라도 그들을 붙잡을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멀쩡할까? 자신에게 생기를 빼앗겨 죽지는 않을까. 그는 갈등했으나 상황은 이미 최악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하드는 결심한 듯 샤나일에게 일렀다.
" 제가 막아보겠습니다. "
" 뭐? "
" 오래는 안 되겠지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저자를 잡을 수만 있다면……. "
" 잡을 것이다. "
잡지 못한다면 이쪽이 모조리 죽을 판이었다. 샤나일은 움직이면서 스쳐지나가듯 사하드를 보았다. 과연 저 자가 막을 수 있을까. 샤나일 역시 그림자 속박으로 몇몇을 묶을 순 있었다. 그러나 저렇게 많은 이들을 묶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하드는 땅 속 밑에서 올라오는 기운에 온 신경을 다 썼다. 제발, 제발 자신의 뜻대로 되길.
" 가세요, 지금! "
지진이 나듯 땅이 흔들렸다. 샤나일과 호위들은 날렵하게 흔들리는 땅 위에서 자리를 피했고, 백의의 인형들은 쫓아가려 했으나 곧 솟아나 나무뿌리에 엉켜 멈추고 말았다. 굵은 뿌리들은 계속해서 땅 이곳저곳에서 솟아나 인형들을 옭아매었다. 심지어 그 뿌리에서 난 잔털마저 그물처럼 촘촘히 자리 잡았다.
사하드는 신에게 비는 심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살아있길. 멀쩡한 주위 나무처럼, 누님도, 그들도 살아있기를.
그는 자신의 눈에 비치는 인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애송이주제에, 제법이로고. "
선녀는 희한한 것을 본 것처럼 중얼거렸다. 자신의 손놀림에 인형들이 까닥거리긴 하지만, 결국엔 그물에 걸린 것처럼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 이런 사태는 흠, 생각지도 않았는데. "
여유롭게 말하는 사이 나이시라의 단검이 급소를 향해 날아들었다. 끼익, 부채와 검이 부딪혔지만 금속이 긁히는 기괴한 소리가 났다. 미풍에 날아가듯 가볍게 뒤로 물러난 선녀의 등을 샤나일이 파고들었다. 선녀는 가뿐히 몸을 틀어 부채로 검을 막아섰다. 여전히 듣기 싫은 마찰음이 퍼졌다.
" 오라, 함께 놀자는 것이냐? "
" 아니, 죽이자는 것이지. "
" 네 놈이? "
감히, 란 말이 생략된 듯싶었다. 선녀의 얼굴은 비웃음 그 자체였지만 샤나일은 도리어 함께 비웃었다.
" 네 옷자락이 잘린 것처럼 네 목도 날아갈 것이다. "
선녀는 뒤에 펄럭이는 옷자락이 조금 찢어진 것을 보고 처음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지저분하고 추잡스러운 것은 딱 질색이었다.
" 고작 산나주제에 어떻게……! "
샤나일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 따위 흘리고 아까처럼 기회를 엿보았다. 그의 핏속에 잠재된 능력은 기척을 지우는데 아주 탁월했다. 비록 실전에서 써본 것은 아까 전이 처음이라 결국 들키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익숙해진다면 다른 사람이 시선을 끌 때 기회를 노리기 아주 적당했다.
선녀는 매혹적인 얼굴을 찌푸리며 날파리를 잡듯 부채를 펴 사방팔방에 바람을 날려 보냈다. 큰 움직임이었지만 범위가 상당히 넓어 결국 다리를 다쳐 움직임이 둔해졌던 호위가 종이가 찢어지듯 몸이 찢겨진 채로 구석에 처박혔다. 그 처참한 광경에 나이시라는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물었다.
' 한, 내 뜻대로 움직여줄 수 있겠느냐. '
-분부하신대로.
나이시라는 달려드는 호위에 맞서 신경질 내듯 움직이는 선녀의 주위를 끌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공격에 응했다. 여태까지는 장난이었던 것처럼 나이시라의 단검이 창살처럼 그의 급소를 향해 움직였다.
조금 놀란 기색의 선녀에게 그녀는 굳은 얼굴로 낮게 얘기했다.
" 저와 놀고 싶다 하셨지 않습니까. "
" 하하, 그래, 그랬지. 그대를 서운하게 할 뻔했소. "
다시 빙그레 웃어보이던 선녀는 다가오는 나이시라의 어깻죽지를 노려 부채를 앞으로 찔렀다. 당연히 피할 거라 여겼던 선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부채는 나이시라의 어깨를 스쳐지나갔고 단검은 선녀의 왼 팔을 내리쳤다. 그리고 동시에 핏물이 번졌다. 핏물은 그녀의 어깨와, 선녀의 잘려나간 왼팔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 ……담대하구료. 실로 이 몸의 실책이외다. "
샤나일은 땅에 툭 떨어진 팔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저 자가 사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람 팔이 쉽게 잘릴 수는 없었다. 건장한 사내가 도끼로 내리찍어도 자르기 힘든 것이 사람 뼈였다.
" 좋소. 장난은 끝내도록 하지. "
샤나일은 본능적으로 낌새를 눈치 채고 나이시라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그런 그의 움직임에 따라 라한 역시 샤나일의 앞으로 달려갔다. 그 순간 제일 앞에 있던 라한의 몸이 부지불식간에 잘렸다. 그 뒤에 있던 샤나일 역시 팔과 옆구리에 긴 상처를 입고 바위 밑으로 처박혔다. 부채의 살랑거림 한 번에 사내 둘이 나가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핏물이 튄 부채는 나이시라를 향해 펼쳐졌다.
피할 수 없다. 나이시라는 제 앞에 아무리 호위들이 둘러싸고 있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은 인형들을 처리하고 다가온 가이한 역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함부로 달려들지 않고 있었다.
" 약조를 어기게 될지라도, 그대에게 예를 다해야하지 않겠소? 잘 가시오. "
끝인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는 순간 나이시라는 앞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피 향기에 다시 눈을 떴다. 샤나일이 자신을 끌어안은 채 선녀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설마, 하는 느낌에 가슴이 철렁할 무렵 가장 반가울 만한 소리가 들렸다.
" 잘 가긴, 너나 잘 가 미친놈아. "
나이시라는 품속에서 얼굴을 떼어 명랑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타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