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38 직면 (3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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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사람답게 살자. 우리와 함께라면, 그럴 수 있다. 그리 살 수 있어. '

 케케묵은 과거에 자신의 손을 붙잡고 울던 여인의 말이 떠올랐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사리분별을 못했을 시절이었다. 그래서 예르민은 믿었다. 철석같이 그 말을 믿었다.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에게 새로운 성이 생겼다. 예르민 이칸타히. 어느 누가 지어줬는지도 모를 이름 자 뒤에 근본을 증명할 성이 생긴 것이다. 그 알량한 소속감에 도취되어 설레발을 쳤더래지.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꼴이라 예르민은 웃었다.

 이칸타히는 대대로 무녀 집안이었고,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자신과 같은 괴물들의 이능력이 통하지 않는 것.

 집 안에 틀어박혀야 했지만, 예르민은 행복했다. 그들 옆에 있으면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으니까. 더 이상 존재하는 것만으로 해를 끼치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지옥 속이었다.

" 사람답게라……. "

 여인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 집안 어느 누구도 자신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는 족족 자신을 꺼려하는 그 눈빛들은, 오히려 그를 괴물임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의 존재를 매시간, 잊지 않고 되새겨 주는 꼴이었다. 억울함에 사무쳐 여인을 따라갔는데 또 억울함이 생겼다. 왜 아무 짓도 하지 않는데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냐고, 더 이상 끔찍한 일도 만들지 않았는데 어째서냐고. 그 집안의 당대 가주였던, 그의 양아비였던 자는 냉담했다.

' 네 놈 때문에 여태 죽어나간 이들이 몇인 줄은 알고 그러는 건가? 살려둔 것을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

 어렸던 예르민은 죽죽 떨어지는 눈물방울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원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숨만 쉬는 것으로 해가 되는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차라리 자살을 하라 말하라며 소리쳐 보고 싶었던 그는 그저 고개만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양아비는 그 스스로 목숨 줄을 끊기를 은연중에 바라는 것이 틀림없었으니까. 그의 소리침에 칼같이 죽으라 말할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지옥 아닌 지옥에서 숨 죽여 살아야만 했다. 주위 사람들은 차츰 늙어가고 자신을 거둬주었던 가주의 아내 역시 병들어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 …나를 왜 거두셨습니까. '

' 그리 짐승처럼 살고 싶지 않을 테니까. '

' 이곳 사람들 역시 저를 짐승으로 보고 있습니다. 도대체 뭐가 다릅니까! '

' 적어도… 적어도 예전 같은 살육은 일어나지 않겠지. '

 예르민은 여인의 말을 들은 것이 저주스러웠다. 단지 사람들의 죽는 것을 막고자 자신을 불러들였단 말인가.

' 고작… 그것이 답니까? 내가 사람을 안 죽이는 것? '

' ……그래. 그게 우리 가문이 존재하는 이유다. 너와 같은 아이들을…, '

 여인은 뒷말을 잇는 게 힘겨워 보였다. 그런 그녀를 도와 예르민은 쏟아지는 눈물을 무시하고는 빈정거리듯 뒤를 이었다.

' 나와 같은 짐승만 골라서 입양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는다? 하하, 왜요, 돼지우리에라도 가둬두시지 그랬습니까! '

 여인은 고개를 저었지만 눈을 감고 분노를 터트리는 예르민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안쓰러운 여인은 몇 번 입을 달싹이다 힘든 숨만 가쁘게 쉬었다.

 곧 죽기 직전 사람을 앞에 두고 예르민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기어이 그녀의 목에 가져다 대었을 때, 장난처럼 여인의 숨이 멈추었다.

' 죽으신 겁니까? '

 예르민이 속삭였다.

' 죽으셨지요? '

 대답 없는 여인의 목을 조르던 그는 자신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 유일하게 제 손을 먼저 잡아주었던 여인은 죽은 것이다. 그는 부술 듯이 여인의 손을 잡고 울부짖었다.

'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며요! 그리 살 수 있다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아직 그렇게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짐승처럼 생활하고, 짐승처럼 취급당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그러니 일어나 보십시오. '

 예르민은 그녀의 옷깃에 얼굴을 파묻었다.

' 저를 두고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

 그렇게 예르민이 입양된 지 삼십 년 만에 세대가 바뀌었다. 또 다시 그는 혼자가 되었다. 양어미의 목을 졸라 죽인 죄에 대한 처분이 결정 날 때까지.

 예르민은 제 멋대로 살았다. 힘이 좀 난폭하게 일어날 것 같으면 다시 되돌아와 제어를 시키고, 가끔 짜증이 나면 그건 또 그것대로 힘을 쓰고. 영악해진 그는 자신의 짓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게 행동했고 이칸타히 가에서는 삼십 년이 넘게 바깥출입을 하지 않던 그를 의심하진 않았다.

 한참 물 만난 물고기마냥 쏘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조금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 던 때.

' 죽어, 죽으라고! '

' 내가 죽일 거야, 내가 죽일 거라고! '

 아수라장은 순식간이었다. 조금만 더 있어도 되겠지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조금 거칠어졌다 싶은 게 다 술 탓인 줄로만 알았는데 언제 또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화풀이 삼아 가지고 놀기에는 주위에 몰릴 사람이 너무 많았다. 예르민은 혀를 차며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그러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웬 소녀의 눈길에 멈추어 섰다. 아수라장 속 유일한 고요였다.

'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

' 무엇을요? '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했다. 속박도 없이, 거리낌도 없이 제 옆에 있어줄 사람이 있구나.

' 제가 어미가 되어드리면 되겠네요. '

' 예? '

 한가로이 둘만 있을 때였다. 막 여인으로 거듭나려는 듯 청초하고 아리따운 소녀의 입에서 돌발선언이 튀어나왔다.

' 어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

' 아니, 그래도 나이가……. '

 자신보다 십 년 넘게 어릴 소녀에게서 어머니를 찾고 싶지 않았던 예르민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소녀는 당차게 주장했다.

' 나이가 무슨 상관이랍니까. 사람이랑 다르시다며요. 지금도 어린 편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자, 어서요. 어머니, 하고 불러보세요. '

' 아무리 그래도, 브릴, 좀 그런데요……. '

' 이러시면 어미가 섭섭합니다, 아들. '

 어서 불러보라며 눈웃음 짓는 소녀의 얼굴에 예르민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 어머니께서 하란대로 합지요. '

' 어머, 듣기 좋네요 그 말. '

 그렇게 진짜 어머니가 생겼다. 농담처럼 한 말인 줄 알았던 그는 살뜰히 자신을 보살피는 소녀의 손길에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짜증이 난다고 사람들을 갖고 놀지 않았고, 밥 먹었냐 물어봐주는 어머니의 말에 안 먹던 밥까지 챙겨 먹었다. 남을 도와주고 호의를 베풀기 좋아하는 어미 옆에서 그는 몰래몰래 도와주곤 했다. 

 시간이 지나고 예르민에겐 새 양어미와 동생이 생겼고, 족보에 예르민이란 이름을 한 번 더 남겼다. 그 사이 소녀는 여인이 되어 황비가 되었고 자연스레 그는 거리를 벌렸다. 만에 하나, 자칫 어미에게 누를 끼칠까 조심스런 행보였다.

' 우리 아드님, 어제도 왔다 그냥 가셨지요? '

' 제가 오래 있어봤자 민폡니다. '

' 제게는 아닌데요. 아드님 얼굴을 자주 못 보니 속상한걸요. '

 낳아준 어미가 있다한들 이보다 더 애정이 깊으랴. 설령 이게 놀이라도 좋았다. 예르민은 이 소중한 시간들을 깨고 싶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서 지킬 자신이 있었다. 비록 죽어버린 여인의 옛 말처럼 완벽하게 사람다운 삶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행복했다. 어쩌면 어미가 대대손손 이어나가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며 평화롭게 자신도 잠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야말로 어쩌면, 이었다.

' 이게 다…… 이게, 이게 다 그놈 탓이에요, 전부 다…! '

 피폐해진 채로 갇힌 어미를 눈앞에 두고서 예르민은 황망히 물었다.

' 그냥 나와 함께 도망가서 살면 안 됩니까, 어머니? '

' 아아, 우리 아드님, 그럴 순 없어요, 그럴 수는 없지요. 아무렴요, 샤나일이, 그 놈이 망치지만 않았어도 빛날 제 인생이었습니다. 아시지요? 우리 아드님이라면, 아시잖아요. '

 나이를 먹었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어미는 예르민의 팔을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그는 어미가 자신을 따라 숨어살길 바랐지만, 그러지 않을 것을 잘 알았다. 그녀는 빛나는 윗자리에 앉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은, 제 옆자리는 어둡기만한 그런 자리였던 것을.

 그 날은,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살육을 일삼았던 날이었다. 황후 브릴티야가 극형에 처해지는 날.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날뛰었고, 곧이어 이칸타히 가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붙잡혀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예르민은 발악했다. 내 어머니를 보아야겠노라고.

' 이리…이리 허망하게 가실 거면 저와 함께 가셨어야지요, 어머니……. '

 밤에 몰래 빠져나온 예르민은 목이 잘려나간 채 버려진 어머니의 몸을 보며 울었다. 아무도 그녀의 시신을 수습해주지 않았다. 황손을 살해한 무거운 죄로, 섣불리 나섰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했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밤새 땅을 팠다. 그의 어미는 죽기 전까지 선행을 일삼았지만, 마지막을 도와주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 그 놈만 아니었더라면. '

 이렇게 험한 꼴로 가시지는 않았을 텐데.

" 그렇지? "

" 뭐가? "

 루시스는 혼자 눈감고 있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자연스레 되물었다. 감았던 눈을 번쩍 뜬 채 장난처럼 웃는 그를 보며 루시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종종 그의 형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혼자 즐거이 웃곤 했다.

" 그런데 짐은 왜 챙기냐? "

" 아까 말했잖아. 전하께서 부르셔서 나는 다시 가봐야 한다고. 예르민, 너는 어쩔래? 집에 돌아갈 거야? 밖에 있을 거면 집에서 사람을 불러줄게. "

 역시나 옛날과는 다르다. 그의 동생은 무럭무럭 자라 황실에 한 자리를 차지했고, 차기 가주와 맞먹는 권력을 얻었다. 루시스는 모르지만, 그의 집안에서 거는 기대는 굉장히 컸다. 자기네들 보기에는 장군감이었으니 오죽할까. 덕택에 제약 없이 밖을 나돌아 다녔으니 딱히 트집 잡고 싶지는 않았다.

" 오랜만인데, 집에 갈 거지? 어머니도 못 뵌 지 오래됐잖아. "

 루시스는 끈질겼다. 조용히 웃고 있던 입 꼬리가 삐뚜름해진 예르민은 다시 이내 활짝 웃었다.

" 아니, 안가. 볼거리가 있거든. "

" 볼거리? "

 근처에 축제가 있던가 하는 아우의 속내를 짐작한 예르민 웃기다는 듯 호쾌하게 웃었다. 아마 그의 동생은 보지 못할 광경이겠지.

" 응, 나만의 축제가 시작되거든. "

 자신을 위한 것이니, 자신이 빠져서는 말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겠다며 예르민은 상냥히 웃었다. 그의 어머니가 웃던 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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