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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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디르요? "

 질마의 표정이 해괴하게 변했다.

 사시사철 피는 꽃으로 영원을 뜻하는 르디르. 손에 이 꽃을 들고 썩지 않는 채로 시신이 발견된 르디르 일레세라의 이름을 본 딴 꽃이었다. 기후가 좋은 드리슬란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으며 남부 작은 지방에서는 마녀의 꽃이라며 주술의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 ……여긴 디칸타인데다 항구 도시입니다만. "

 습기와 염분이 많은 곳에서는 르디르가 자라기 힘든 기후 조건이었다. 디칸타 자체가 습기가 많기도 했거니와 바다가 보이는 항구 도시였으니 꽃을 구하기 어려웠다.

" 못 보기 힘들 정도는 아닐 것인데. "

 무역이 활발한 곳이니 찾다 보면 있을 것이다. 그러니 틀린 말은 아니나 가격이 꽃값이라 생각할 수 없이 비쌀 터였다. 드리슬란에는 흔한 꽃을 스무 배나 되는 가격을 얹어 사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나 했더니 다름 아닌 제 주인이다. 귀족 여식들의 향낭을 만드는데 들여오는 꽃을 생화로 사오라 시키는 황태자라…….

 힘든 꽃을 찾는 것보다 그가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 믿기지 않았다. 농담이었으면 좋으련만 당당하게 보고 있는 것이 얼른 가지 않고 뭐하냐는 눈빛이다. 질마는 한숨을 삼키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측근인 게 죄였다.

" 명 받들겠습니다. "

 샤나일은 누가 보면 황족으로서 조금 채신머리없다 할 정도로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그가 바라던 꽃이 손에 들려 있었는데, 올망졸망 모여 한껏 피어오른 것이 아무 여인이나 붙잡고 줘도 기뻐할 만큼 아름다웠다. 신경 써서 고른 티가 나는 꽃을 들고 그가 도착한 곳은 미리 찾아놓았던 여관이었다. 북적거리며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손에 꽃을 한 아름 든 사내를 신경 쓰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단 한 사람을 빼고.

" ……가지가지하시네요, 전하. "

 매섭게 밖을 살피던 타린이 샤나일의 손에 들린 꽃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딱 열 넷 치기어린 소년이, 가진 풋정 못 이겨 소녀에게 달려가는 짝이다.

" 네 주인은 어디 있나. "

" 머리가 좋다 들었는데, 나쁜가봐. 내가 곱게 알려줄 것처럼 생겼데요? "

 정신 나간 거 아냐……. 타린이 미쳤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샤나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 방 안에 있겠지, 낮 외출을 썩 좋아하던 편이 아니었으니. 게다가 몸 성한 주인이 돌아다니게 너희들이 내버려두진 않았을 것이고. 번잡스러운 일 층에 방을 마련할리는 없으니 위층인가. "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위치를 알아낸 샤나일에게 할 말이 똑 떨어진 타린은 그의 입을 때리고 싶단 생각을 가졌다. 어쩜 저렇게 쓸데없는 곳에만 머리를 잘 굴린담.

" 가면, 누가 환영해 준대요? "

" 나는 네 주인을 찾아가는 것이다. 환영을 받든, 문전박대를 받든 그녀가 할 일이지. "

 콱 그냥, 입을 묶어버리면 좋을 텐데. 타린이 짐승처럼 눈을 번뜩였다. 유하고 자상한 성정을 지녔던 자신의 오랜 지기와는 딴판이다.

 이래나 저래나 문전박대 당할 것이라 타린은 마음을 놓았다. 그녀의 옆에는 새로 교육시킨 충견이 있는데다가 나이시라가 어련히 알아서 잘 거절할 것이다. 나이시라는 미련스러웠지만 어리석지는 않았다.

 샤나일은 가장 커 보이는 방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녀의 영역 안이었으니 신처럼 모시던 수하들이 가장 좋은 곳에 머물게 했으리란 짐작이었다.

 조급하게 달려왔음에도 막상 문을 못 여는 것은 어찌 된 일일까. 마음속에서 은근히 방을 잘못 찾았길 바라는 것은 왜일까. 제 마음도 모르는 천치가 되었다며 자조하던 순간, 방 문 한쪽이 활짝 열렸다.

" 뉘기에 그 방에 있는 것이냐. "

 감도 잡히지 않던 감정이 부지불식간에 뚝 떨어졌다. 방문에서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문제는 이제 막 욕탕에서 나온 듯 허술히 걸친 옷차림이었다.

청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 누구십니까? 우리 방에 묵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제게 누구냐 묻습니까? "

 방을 잘못 찾은 건가. 차라리 그게 낫다며 샤나일이 사과하고 물러나려는 그 때, 보고 싶지 않은 인영이 보였다.

" 사하드, 누구 길래 문 앞에서…, 전하. "

" 시라……. "

" 전하? "

 나이시라는 미동도 없는 샤나일을 보고서 상황을 알아챘다. 또 오해를 하는 구나. 또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의심하고, 밀어붙이겠지. 이제 좀 편히 쉬어보려던 나이시라는 피곤함에 절로 안색이 나빠졌다.

" 들어오시지요. 무슨 용무이신지는 또 모르겠으나 바깥에서 소란스러울 필요는 없겠지요. 사하드."

" 예, 누님. "

" 잠시 자리 좀 비켜주려무나. "

 순순히 방 밖으로 사하드가 사라지고 난 뒤, 샤나일은 쉬이 따라주지 않는 몸을 억지로 끌고 그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보니 저 청년도 역시 같은 방에 묵는 것 같았다. 짐을 보아 둘만 지내는 것은 아닌 듯 했지만 그는 거슬리는 신경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 시라. "

" 일단은, 제가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까 그 아이는 제 일행입니다. "

 자제할 수가 없는데도 해야만 했다. 똑같이 상처 주지는 말아야지. 사과만 하지 말고 상처도 그만 주어야지. 새살은 못나더라도 아물게는 해줘야지. 끝임 없이 속으로 생각하며 그녀의 곧은 눈을 바라보았다. 짙은 바다를 담은 그 눈에 샤나일은 희미하게 웃었다. 진작 이리 한번 쯤 바라볼 것을. 반편이의 눈과 같은 감정으로 바라볼까 스쳐지나가듯 외면했던 것이 그는 아까워서 계속 마주보았다.

" 믿어. "

" ……예? "

" 믿는다 하였다. 그리고 네 말대로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지. 단지…… 단지 조금 놀랐을 뿐이다. "

 나이시라는 당혹스러웠다. 필히 억측으로 가만히 있는 자신을 들쑤시지 싶었는데 이렇게 나오니 뭐라 대꾸해야할지 몰라 멈칫했다. 또 무슨 비수를 꽂으려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나이시라는 조금 경계하듯 답했다.

" 의외십니다. "

" 그래, 그런 반응이 당연한 것이지. 내 과오이니 누굴 탓하겠느냐. "

 당연하다면서도 목으로 넘어가는 쓴 맛은 어쩔 수가 없어 침울해졌다. 그 표정이 흡사 옛 남편의 모습이라 나이시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가지고 놀려고 이러시는 건가. 고이 간직해두고 싶은 기억마저 부수려고 이러시나.

" 무슨 용건이냐 물었습니다. "

" 다시 한 번…… 사죄를 하러왔다. "

 더 차가울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나이시라가 더 시리게 굳었다. 샤나일은 마치 여기올 때처럼 조급한 마음이 되어 나이시라의 앞에서 마음 한 자락을 펼쳐보였다. 올망졸망 피어낸 꽃을 앞으로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 보이느냐? 네가 좋아했던 꽃이다. 겨울이 되어서도 꾸준히 살펴보던 꽃이 아니더냐. 디칸타에서는 보기 힘들 것 같아 구해왔다. "

 입을 꾹 다문 채 나이시라는 그가 내민 꽃을 아무 반응 없이 보고 있기만 했다. 밀어내지도, 받지도 않은 채 그저 보기만. 샤나일은 그녀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한 발자국 다가서서 담아내기도 힘든 말들을 꺼내었다.

" 용서를 해달라는 게 아니다. 그저, 그저 알아달라는 것이다. 네게 했던 말 모두가 내 잘못임을,   그저 그것만……. "

" 알아 달라? "

 나이시라는 우스웠다. 너무 우스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 기억나십니까? 독방에서 갇힌 지 둘째 날이었지요. 그때 제가 했던 말말입니다. "

' 전하께서 상상하시는 일을 꾸미려고 한 적도,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발…… 그것만이라도 알아주십시오. '

" 알아 달라 간곡히 청하는 제 말에 무어라 답하셨는지도 아십니까? "

' 그런 적 없다, 그럴 생각도 없다……. 흔히 간신배들이 하는 말이지. 알고 있나? '

 샤나일의 손은 힘없이 내려졌고 들고 있던 꽃들은 찬 바닥에 부딪혔다.

 나이시라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무너져가는 그를 보며 즐거워하려 애를 썼다. 애쓰는 것이 힘들어 올렸던 입 꼬리가 내려갈지언정 그만두지 않았다. 그녀는 발치에 내려앉은 꽃을 보며 혼잣말하듯 그를 향해 비수를 꽂았다.

" 르디르, 영원을 뜻하는 꽃이지요. 샨과 지내는 생활이 일생이 되기를 바라며 그 꽃을 보곤 했습니다. 참 어리석었지요, 참으로……. "

 자신의 남편이 선물해준 그림이 떠올랐다. 그는 때때로 가진 재주로 그녀를 그린 초상화나, 꽃들을 그려 선물을 하곤 했다. 그 중 가장 소중했던 것은, 눈이 쌓인 한 겨울 온 정성을 다해 그렸을 르디르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가장 처음 받은 선물이기도 했다.

나이시라는 눈을 감고 조소했다.

" 제 남편 흉내를 내려함이십니까? 곧 그림이라도 그려 들고 오시겠습니다. "

" 왜, 왜 그리 말을 해……. 어찌…. "

 바스락, 연약한 보랏빛 꽃잎들이 흩날렸다. 누군가의 발아래 짓이겨서.

" 시라! "

" 안녕히 가십시오. 불편한 몸이라 배웅은 못해드리는 것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길, 태자 전하. "

 샤나일은 황망히 그녀의 발아래 밟힌 꽃을 보았다. 유리가 깨진 것처럼 무참히 밟힌 연보라 꽃들은 마치 그 꿈속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제 심장들을 찔러댔다.

 아프다, 아파서 죽을 것 같다. 죽을 것 같은데 죽지 않는 게 신기하여 샤나일은 본능적으로 가슴에 손을 대었다. 피가 나오지는 않는 건가. 나올 리가 없지. 샤나일은 웃으려 했으나 대신 울컥 쏟아지려는 감정을 깨닫고 그녀에게서 등을 보였다. 동정 받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사죄를 하고 싶었다.

" 사죄는 필요 없으니, 먼젓번 말씀드렸던 얘기를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

 앞으로 볼일이 없기를 바라는…….

" 네겐 그것이 최고의 사죄겠지. 허나 어찌하느냐. 나는… 나는 그리는 못하겠다. "

 샤나일은 보고 싶어 했던 여인을 등 뒤에 둔 채 속삭였다. 그리고 이내 그런 그마저 쫓아내듯 음조 없는 말소리가 들렸다.

" 마음대로 하십시오. "

 상처를 보듬으러 왔던 사내는 상처를 입고 떠났다. 상처를 주려던 여인은 스스로 상처를 입고선 아파했다. 창밖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던 사하드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때 사하드의 머리 위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 붕어처럼 입은 왜 뻐끔거리니. "

" 교관님! "

" 궁주 옆에 잘 있으라 시켰더니 말 한마디에 쏙 빠지냐? 그래놓곤 창문에서 훔쳐봐? "

" 그것이……걱정이 되어. 근데 혹시 저 남자가 교관님이 말한 적입니까? "

 2층 지붕에 걸터앉은 타린은 보기보다 눈치 있는 제자의 대답에 그의 머리를 헝클었다.

" 이제 알았니? 여태 뭘했담. "

" 교관님은 적이 머리가 나쁘다 하셨습니다. 천하에 악당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구분합니까? "

" 투덜거리지 마라, 듣기 싫다. "

" 근데 정말 적입니까? "

 이 교관님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다며 크게 외치려고 했던 타린은 사하드의 참 말 뜻은 다른 것을 알고 눈을 가늘게 떴다.

" 왜? "

" 적이라기에는……, 모르겠습니다. 아는 단어가 부족합니다.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

" 적은 아닌 것 같다는 뜻이냐? "

" 제가 아는 적은 해치려고 하거나, 싸우는 상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남자도 그렇고 누님도 그렇고 힘들어 보입니다. 저런 관계 역시 적입니까? "

 그는 단순히 단어의 뜻을 정리하게 위해 물은 것이겠지만 타린은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만나지 않는 것이 나으나 자꾸 부딪히는 사이를 뭐라 정의해야할까.

" 어린이는 알 것 없다. 그럴 시간에 훈련이나 좀 해라. "

" 알겠습니다. 제가 빨리 배워야 누님이 안 아프신 것이지요? "

" 오랜만에 착한 소리하네. 그래, 그래 어서어서 자라서 궁주 몸보신이나 좀 시켜드려라. "

 타린은 하품을 쩍 하며 대충 대답했다. 사하드는 물끄러미 창 안에 혼자 남은 나이시라의 뒤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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