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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3 직면 (3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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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렬히 은애하여 부부지연을 맺는 이들이 어디 많겠나. 살다 보면 정이 드는 것이고, 정이 들다보면 이 사람이 내 사람인가보다, 하며 사는 것이지. "

 혼인하던 날 위룬이 했던 말이다. 열일곱, 적당한 나이에 적당한 가문의 여식과 인연을 맺는 것이 보통이라 신랑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샤나일은 그게 이해가 안 되었다. 자신의 옆자리에 올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사랑하고, 사랑해주는 그런 여인이어야 했다. 평생을 함께 손잡고 걸어갈 이를 저리 태평스럽게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친우의 이해하지 못한다는, 순진무구한 눈빛에 또래보다 성숙했던 위룬은 고개를 저었다.

"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

 그의 친우는 왕의 칭호를 받을 황자였으며, 황후의 후사가 없으니 자연스레 태자로 책봉될 권력의 중심인물이었다. 얼마 안 있어 줄줄이 황자비의 자리를 노리는 은밀한 전쟁이 시작될 것이 뻔했고, 끝내는 샤나일 역시 처음 보는 여식을 제 옆에 앉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샤나일은 환히 웃었다.

" 나를 물로 보는군, 위룬. 내 옆자리는, 폐하께서도 건들 수 없을 것이다. "

 실로 오만한 대답이었으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샤나일이 그렇게 순진무구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명석하기 이를 데 없어 외척의 배경까지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황제의 두터운 신임 속에서 줄서고 싶어 하는 자들이 널렸으니 누가 그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겠는가.

 맹수와 같은 집요함을 아는 친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과도 같은 부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 부디, 궁 안에서 분쟁은 일으키지는 마라. "

" 왜? 앉아서 모르는 이를 내 옆에 채우는 걸 보고만 있으란 소린가? "

" 그 모르는 사람이 천하에 다시는 없을 네 반쪽일수도 있잖아. "

 열일곱의 샤나일은 코웃음 쳤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 생각했다.

" 나이시라라고 합니다. "

" 나이시, 시라? 나이, 나이…. "

" 편히 시라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

" 내 새, 색시. "

 반편이의 눈으로 본 그녀는 처음 보는 날부터 그저 사랑스러웠다. 색시라는 단어에 어색한지 물끄러미 시선을 내리는 것조차 어여뻐 보였다. 반편이의 기억을 되짚을 때마다 엄습해왔던 고독감을, 나이시라가 제 옆자리에 있는 순간부터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왜 몰랐을까.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도 알 법한 것을 왜 몰랐을까. 단지 그녀와 혼인한 뒤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날이 늦어져서 위기감을 느꼈던 것일까.

"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

" 뭘 몰라? "

 부서진 인형처럼 늘어져있던 샤나일은 고개만 들어 캄캄한 방안에 들어온 침입자를 확인했다. 회상하고 있던 기억 속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여기 있기에는 의외의 인물이었지만 샤나일은 별 반응 없이 다시 널브러져 중얼거렸다.

" 위룬…. 시간을 되돌릴 방도를 모르겠다. "

" 그러게 내가 너 어리석은 짓을 한 거라 하지 않던. 이제 후회가 되냐? "

" 무얼,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사죄해야하는 것이냐. "

" 총명하다 자부했던 머리가 아니냐. 굴려보던지. "

 잘못에는 호되게 야단치는 성미답게 위로라곤 쥐뿔도 없는 친우의 태도였다.

 분명히 그랬다. 자신은 총명한 자였다. 다들 황태자의 재목이라 우러러 보았다. 역사에 성군이라 기록될 자로 스승은 칭찬하곤 했다. 그런데 도저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샤나일의 짧은 탄식에 위룬은 혀를 찼다.

" …너는 그런데 어인 일이냐. "

" 어느 잘나신 태자 전하가 꾸며낸 소문을 사실로 만들러 왔습죠. "

 밀약 협정이란 핑계를 대고 왔으니 결과물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위룬이 어깨를 으쓱거린다. 눈을 감은 채로 누워있던 샤나일은 어설픈 그의 말에 으레 그렇듯 지적 질을 했다.

" 증거를 대어라 요구할 만한 놈들이 없거늘, 사실로 만들러 왔다? 어째 가만히 있는다 싶더니 황제가 움직였던 건가. "

" 윗선에서 까라면 까는 것이 내 직책이잖아. "

" 언제부터 대장군이 일개 병사와 같아 진 것인지 모르겠군. "

 모욕적인 말이었으나 위룬은 그의 말버릇인 것을 알고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도 원치 않은 일이라 머쓱하니 머리만 긁적였다.

" 뭐, 네가 궁을 떠나고 얼마 후에 명이 내려오긴 했지. "

" 장군을 필요로 하는 명이라. "

" 전시도 아니고, 까고 말하면 노는 인력이었잖아. 알뜰하게 쓰시나 보지 뭐. "

" 네가 노는 인력이었다니, 남들이 들으면 경을 칠 말을 서슴없이 하는 구나. 다른 나라를 돌며 일 해온 것들을 전부 무로 만들 참이냐? "

 이리저리 에둘러 말해보려 했지만 역시나 사정 봐주지 않는 그의 친우는 딱 잘라 무시했다. 애초에 피하는 건 성미가 아닌지라 결국 위룬은 그의 마지막 말에 수긍했다.

" 나를 감시하라 보낸 게지. "

" 그래. "

" 네가 내 유일한 벗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니까. "

" 쑥스럽다만, 그렇지. "

" 왜? "

" ……걱정되어 와봤다. "

 황제의 명이라곤 하지만 위룬이 마음만 먹는다면 핑계를 대고 거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개국공신 가문의 차기 가주를 명을 받들지 않았다고 단칼에 목을 칠 정도로, 황제는 아둔한 자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위룬이 순순히 명을 받든 것은 단지, 그가 걱정된다는 이유뿐이었다.

" 너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굴었잖아. 왕비님을 매질한 것부터가 말이 안 되었어. 왕비님이 진짜 일을 꾸몄다고 할지언정, 그걸 이용해먹을 생각을 하는 게 너다웠지. "

" ……그래, 그녀가 느칸다의 첩자임을 밝히고 이용할 생각이었다. "

" 왕비님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네가, 매질을 해서 그걸 밝힐 셈이었다 할 거냐? "

 그것보단 더 수준 높게 악랄하지 않았냐고 위룬이 빈정거렸다.

" 아느냐, 위룬. 나는, 나는 모조리 지울 생각이었다. 어차피 다 똑같이 자리만을 바라고 다가올 거라면, 나에게 득이 될 만한 이를 골라 비에 앉힐 생각이었다. 그 병신 머저리 같은 모습을 모르는 이로……. "

" 그럼 나부터 지우지 그랬냐. "

" 뭐? "

 샤나일은 친우가 드물게 화가 난 음색으로 말하자 놀라 반쯤 눕혔던 상체를 일으켰다.

"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정신이 아닐 때도 네 옆에 있던 나다. 나도 지워야 말이 맞잖아? 먼 곳으로 보내버리던가, 추방시키던가 하라고. "

" 말이 되느냐, 너를 어찌 보내! "

" 왜? 왜 못 보내는 데. "

" 너마저 보내면……. "

" 왕비님은 보낼 수 있어서 그리 대했나 보구만. "

 샤나일은 입을 달싹였으나 말을 뱉진 못했다. 그는 보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화가 나고, 그녀를 재촉해 답을 들을 생각뿐이었다.

" …모지리도 이런 모지리가 따로 없군. "

" 잘 아네. "

" 그저 놓아 주어야 할까. 날 보는 것마저 싫어하던데, 그냥, 그냥 놓아주어야……. "

" 놓을 수는 있으시고? "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음성에 샤나일은 허탈이 웃음 지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뭘 놓고 보내줄 성정이 못 되었다. 자신의 것이라 인식하면 죽어도 놓을 수가 없었다.

" 솔직히 내가 네 벗만 아니었더라면 왕비님 편을 들며 꺼지라고 할 테지만……. "

 위룬은 한심하다는 듯이 고귀하신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딱 내가 어쩌다 이놈이랑 친해졌을까, 란 눈빛이었다.

" 그러면 네가 말라 죽게 생겼으니, 알아서 쫓아가서 싹싹 빌어봐. 정성 어린 선물도 갖다 바치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 "

 샤나일은 멍청히 누워있던 사람답지 않게 재빠르게 일어서서 나갈 준비에 바삐 움직였다. 부산스러운 그를 보며 위룬은 혀를 찼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도 안 되면, 아마 그를 말려야 할 것이다. 샤나일은 황태자였고 돌아봐야할 나라가 있었다. 말라 죽더라도, 끝까지 그의 편을 들 순 없었다. 그는 제발 그 전에 왕비가 용서해주기를 바랬다. 부디 자신이 황제의 명을 전부 수행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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