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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4 역행 (24/59)

00024  역행  =========================================================================

 디칸타의 새로운 관광지역으로 꼽히고 있는 네페르 백작 령-네페르 도시. 도심 안까지 연결된 작은 강과 분수대를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광장, 새로운 건물들. 변화하는 도시에 걸맞게 사람들 역시 꾸준히 늘어나며 관광지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 활기차고 북적거리는 도시에 조금은 초췌한 몰골로 도착한 일행을 맞이하는 이가 있었으니.

" 생각보다 늦었네요, 궁주! "

" 타린? "

 밝은 갈색 머리를 살랑이며 환히 웃어 보이는 얼굴에 나이시라는 조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동지부에서 바삐 있다는 소식만 들어 직접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 못했던 바였다.

" 어찌 여기 와있는 것이냐? 동지부는? "

" 무려 궁에서 영영 빠져 나왔담서요. 그런 기쁜 일을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야 있겠어요? 잠시 동안은 일신이 버틸 수 있을 걸요. "

 아님 말고, 하고 작게 덧붙이는 것이 영 믿을만해 보이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오래 떨어져있던 작은 소녀를 보는 게 기뻐 나이시라는 살짝 웃었다.

 타린은 말에서 내려 고삐를 이끄는 그녀의 일행들을 보고 혀를 찼다.

" 그나저나, 다들 꼴이 왜 이런데요? 특히 호란태 아저씨는 아주 기절하시것소? "

 살아온 세월이 갑절이 되는 타린은 으레 그렇듯 자신보다 어린 호란태에게 아저씨라 부르며 싱글거렸다.

" 거의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곧장 달려왔으니, 죽을 만 할 겁니다. 그나저나 미리 만나게 되서 다행이네요, 타린. 알려드릴 것도 있고 쉴 겸 얼른 여관이나 잡죠. "

 작시아가 부스스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걱정스런 눈초리로 나이시라를 바라보았다. 호란태는 단순히 잠이 오는 것이지 피로가 쏠린 것은 나이시라일 것이다. 안 그래도 기력이 쇠한 몸에 부작용까지 겹쳐 최악의 상태일 텐데도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걷는 게 여간 안쓰러운 것이 아니었다.

" 그런데… 일행이 더 있을 줄은 몰랐네요? "

 사람 무안할 정도로 빤히 그들을 쳐다보던 타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소녀 특유의 순수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이시라는 이 작은 소녀가 짧은 시간에 이미 다 훑어보았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 음, 난 방하나만 잡아뒀었는데, 일단 거기 아저씨들은 여기서 좀 기다려주시구, 궁주 이쪽으로 와요. "

 흡사 여관 주인이라도 된 양, 안내자를 자처하는 타린을 따라 이동했다. 2층에서 누가 봐도 제일 커 보이는 문에 깔끔한 것이 가장 좋은 방으로 보였다.

 호란태는 계단아래 힐끗 보이는 많은 사람들에 놀라워했다. 축제 기간이라지만 이렇게 호황일 줄이야.

" 못 본 사이 많이 번창했나보오? "

" 당연하지요, 아저씨. 동지부가 관리하는 가게가 한두 개도 아니구. "

 실질적인 지부장의 말씀에 호란태가 입을 삐죽거렸다. 자신도 한 곳 맡았더라면 분명 타린만큼 잘할 수 있는데.

 어깨에 메고 있던 짐들을 하나둘 풀고 푹신한 의자에 앉자 타린이 익숙하게 차를 내어왔다.

" 근데 진짜 몸 상태가 왜 이래요? "

 타린이 말은 나이시라에게 하며 눈으로는 호란태와 작시아를 빤히 바라본다. 예상치 못한 일행 때문에 돌려 말했던 그녀는 단순히 피곤이 쌓인 것을 넘어 보이는 주인의 안색이 못마땅했다.

" 한을 부르셔서…. "

" 한? 가이한이 아니라 한을 불렀다고요? "

 되묻는 질문을 질책으로 받아들인 작시아는 면구스러워 눈을 내리깔았다.

 실체화를 통해 주인을 보호하는 가이한이 아니라, 주인의 몸을 대신 움직여 직접적인 충격을 막는 한은 나머지 수족들이 미처 지키지 못할 때에만 움직이는 이였다. 신체적 능력을 억지로 최대한 끌어올리는 한을 불러냈다는 것은, 안 그래도 위태로운 그녀의 몸을 사지로 끌고 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함께 있는 와중에 그를 불렀다는 것은, 옆에 있는 수족들이 제 할일을 다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 그래요, 다른 사람이 있으니 눈치 보여서 제 실력을 발휘 못 할 수 있죠. 암요. "

" 타린…. "

 항상 생글거리거나 새침스런 표정을 짓던 소녀가 드물게 굳은 표정을 지었다.

" 솔직히 말할게요, 두 사람. 아주, 굉장히, 실망스러워요. "

" 그만하거라. 꽤 버틸 만 해. "

" 버터요? 버텨야 하는 상황까지 갔다는 거네. 그 재수 없는 느칸다 왕이랑 붙을 때도 궁주 털끝하나 못 건드리게 했담서, 지금 이 지경으로 만들어놔요? "

 우선순위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며 타린이 잔뜩 성을 내었다. 어떻게 다른 이 눈치를 본다고 제 주인을 못 지켜 한을 끌어내게 하느냐, 고작 이 정도였던 거냐, 끝도 없을 질책이 쏟아져 나왔다.

" 타린, 멋대로 한을 불러낸 내 잘못도 있다. "

" 어디 허투루 부를 분이에요? 필히 안 되겠다 싶으니 부르셨겠지! "

" 일반인의 행태가 아닌 듯싶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

 그게 무슨 말이냐는 눈빛에 나이시라는 조금 진정되어보이는 그녀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간략하게 이틀간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설명하자 뿔이 났던 타린의 표정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 사람을 조종한다? 말이 안 되는데? "

" 사실이오. 우리와 같은 것이 틀림없소이다. "

 동물적 감각만큼은 타고난 이의 호언장담에도 타린은 믿기지 않아서 그럴 리가, 하며 말끝을 흐렸다.

" 분명 그런 짓이 가능한 놈이 있긴 했는데… 육신이 찢겨져 사라진지 이십여 년은 족히 넘었다고…. "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 눈을 찌푸리다 타린이 고개를 저었다.

" …말이 안 돼요. 일단 그 일에 대해서는 나도 따로 조사해볼 테니 쉬고 있어요. 작시아 언니, 알죠? "

" 네. 약탕으로 준비하겠습니다. "

 조금 지친 기색으로 눈을 감고 있는 나이시라를 보며 타린은 속으로 혀를 찼다. 오랜만에 계약한 자신의 주인은 고집스럽고 미련스러워 쓸데없이 들러붙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저 누릴 것 다 누리며 편하게 살면 좋을 것을 왜 사서 고생을 하는지.

 타린은 마치 할아버지처럼 끌끌거리며 오래 기다리고 있을 남은 여행자들을 안내하러 내려갔다.

" 많이 기다리셨죠? 이쪽으로 오세요. "

 같은 2층의 맞은 편 방, 나이시라가 있는 방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두 명이 쓰기에는 충분히 쾌적하고 넓은 방이었다. 강행군이 끝나고 다가온 휴식의 시간에 질마가 신나하며 짐을 풀었다. 샤나일도 짐을 내려놓고 뭉친 근육을 풀며 가벼이 어깨를 돌리고 있을 때였다.

 철컥, 쇠고리가 걸리는 소리가 들려 두 사내가 문을 바라보았다. 타린은 문을 잠가두고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

" 문은 왜 잠그는 겁니까? "

" 뭐, 이른바 친목도모를 위해서라고 할까요. "

 씨알도 안 먹힐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도 타린은 부가설명 없이 질마에게로 다가갔다. 뜬금없이 가까이 온 소녀의 눈은 순진하기 짝이 없어 그를 더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마을 뒤편에서 뛰어놀 것 같은 명랑한 소녀는, 질마의 팔을 덥석 붙잡고 주물럭거렸다.

" 무,뭐하세요? "

" 계약자인줄 알았는데, 아닌가? "

 떡 주무르듯 알차게 질마의 팔을 농락하다가 타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옆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샤나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호란태 아저씨의 눈은 피할 수 있어도 내 눈은 못 피하죠. 진짜 약하긴 한데, 분명 우리랑 같은 느낌이 나요. 솔직히 말해 봐요, 사람 조종한 거 아저씨가 그런 거예요? "

 유력한 후보자는 이미 죽은 지 오래, 대신 새로운 인물 중 하나가 나이시라의 수족들과 같은 이능력자라니. 순식간에 용의자의 범위가 줄어들었다. 단지 옆에 있는 사람이 계약인이 아니라 의아스럽긴 하지만 의심의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전혀 알아듣지 못할 소리에 샤나일은 피곤함에 절로 눈이 감겼다.

"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

" 지금부터는 알게 될 걸요. "

 눈 한번 깜박일만한 찰나였다, 어린 소녀가 성인 남자의 목을 잡아채는 것은. 사람 머리통 하나 넘게 차이나는 신장이었지만, 타린은 가볍게 그의 목을 잡아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움직이는 것이 귀신이 곡할 정도라 질마는 가늠이 안 되는 실력자를 보고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 크,윽,이게 무슨…. "

" 좀 과격한가? 난 복잡한 건 질색이라 서요. 순순히 대답해주면 좀 좋아, 안 그래요? "

 샤나일은 숨쉬기 힘든 와중에 능력을 써보기도 전에 제압당한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암살자들을 상대로도 멀쩡히 살아남을 정도였는데….

 괴로운 듯한 소리에 질마가 눈치를 살피며 파고들 틈을 재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믿기지 않는 악력에 주인이 비명횡사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신중하게 기다렸다. 그런 그의 움직임과 생각이 뻔했던지라 타린은 웃으면서 충고해주었다.

" 가만히 있는 게 좋을 텐데? 나라면 인질이 잡혀있는데 굳이 자극하지는 않겠어요. 잠깐만 확인하고 놔줄 테니까 얌전히 있으라구요. "

 아니면 귀찮아서 죽일지도 모르잖아, 하고 태연히 덧붙이는 소리는 누가 봐도 진심이라 때를 기다리고 있던 질마의 검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 생각보다 제어를 잘하는데? 내가 가르친 놈들보다 훨씬 낫네 그래. "

 타린은 목을 조르면서도 순수하게 감탄했다.

 목숨의 위협이 다가올수록 가진 능력을 제어하기란 힘들다. 생존의 본능이 능력을 한계점까지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교육관 노릇을 하며 이렇게 참을성이 높은 인재는 보지 못했던 터라 타린은 궁금함에 좀 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젠 슬슬 사람을 조종한다던 그 능력이 튀어나오겠지, 하고 기다리던 그녀는 뜻밖의 모습에 당황했다.

" 어라, 뭐야, 일반인? 그냥 보통 사람이야? "

 분명히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던 것이 사라진 것이다. 당황한 그녀는 손을 놓았고, 풀려난 샤나일은 가리고 있던 천을 풀어헤치며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 아하하… 내가 착각했나 봐요 아저씨. 내가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닌데…. "

 애꿎은 사람만 쥐 잡듯 잡은 격이라 타린은 미안함에 우물쭈물했다. 진심이라며 호소하려던 타린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 세상에…. "

 흘러내린 천 사이로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은 잘게 부서질 것 같은 금발로, 갈색의 피부는 다른 사람들처럼 희게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옆에서 같이 그 광경을 본 질마는 이상함을 감지하고는 제 주인에게로 달려들었다.

" 전하, 괜찮으십니까! 전하! "

 잘못 본 것이라 여기자니 들려오는 호칭이 전하란다. 여기로 보고 저기로 보아도 우왕 샤나일이라 타린은 기가 찼다. 쓰레기 같은 것이 여기까지 기어왔구나. 차라리 잘 되었다며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굴러들어온 돌을 얌전히 보내줄 그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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