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18 그림자 (18/59)

00018  그림자  =========================================================================

 견고했던 벽 사이 작은 틈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어렵다. 그 밖을 빠져나가 새로운 발판을 만드는 것은 더 힘들다. 맹렬하게 머리를 굴려가며 펼쳐놓았던 세상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 다시금 목표를 잡고 나서야했다.

 처음으로 완성했던 세상을 포기했을 때는 힘들었으나 어려운 선택은 아니었다. 나이시라에게 있어 복수를 끝난 후의 세상과 그와 함께 지낼 세상, 둘 중에 고르는 일은 문제도 아니었으니까. 그와 함께 일생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 목표라고 하기도 힘든 꿈이 생겼으니 이전처럼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라프는 이미 자신이 없어도 스스로 돌아갈 만큼 거대하고 정교한 집단이 되었고, 고향인 느칸다로 돌아가는 순간 자신은 죽어야 할 목숨이 될 것이다. 자라면서 쌓아왔던 증오대신 선택했던 마음마저도 가라앉은 지 오래. 남은 것도 없고, 갈 곳도 없어진 비어버린 세상에서 그녀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 궁주, 국경선입니다. "

 작시아의 말에 나이시라는 고삐를 당겨 말의 걸음을 늦추었다. 궁을 떠난 지 일주일, 도망자라고 볼 수 없던 느린 움직임으로도 드리슬란의 끝이 보인 것이다.

 거대한 성벽 사이에는 디칸타로 가기 위한 상인들과 여행자들로 어마어마하게 붐볐고, 기다림에 지친 이들의 반항을 통제하는 경비병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 특별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존재했으니, 일반인들과 달리 구분 지은 한적한 입구가 보였다. 딱 보아도 귀족이상의 계급인 이들이 가벼운 절차를 통해 통과하는 곳이리라. 그 곳을 본 호란태는 잘 되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 우리에겐 디칸타 왕가의 패가 있지 않소? 이번에도 금방 갈 수 있겠구만. "

" 어휴, 멍청아 생각이란 걸 좀 해라…. "

 작시아의 한심하다는 눈빛에 호란태는 여지없이 발끈했고, 일상 같은 모습이라 나이시라는 별 말 없이 설명해 주었다.

" 왕가의 패를 사용하는 즉시 왕실 귀에 들어갈 것이다. 평소라면 위간에게 알려져도 상관은 없다만 당분간은 조용히 있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겠지. "

 항상 빠르게만 이동하던 입장이라 그 생각은 미처 못했다며 호란태가 머쓱히 머리를 긁적였다. 작시아는 조금 있으면 서서히 떨어질 해와 줄지 않는 사람들을 보다가 묵묵히 말 위에서 기다리는 주인의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과 호란태가 나이시라를 데리고 몰래 국경선을 넘어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결국 해가 밀려 넘어가고 노을빛마저 사그라질 무렵이 되어서야 디칸타의 땅에 발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국경선을 넘어 끌고 왔던 말에 다시 올라서려는 그 때,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빨리 지나가지 않는 사람에 대한 불평불만인 듯 했다.

" 타대륙 사람은 일반 통행이 불가합니다. 허가증을 신청하신 뒤 신분증과 함께 다시 와주십시오.  "

" 아니 엄연히 드리슬란의 신분증이 있지 않습니까? "

" 디칸타에서는 타대륙인에 한해 허가증 역시 필요합니다. "

 나이시라는 자신이 서있었던 옆쪽 줄에서 일어난 소란임을 깨닫고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위협스레 떡하니 입구를 막고 있는 경비병 앞에는 터번으로 꽁꽁 싸매다시피 얼굴을 가린 사내와 혼자 열심히 항의하는 자가 있었다. 터번 사이로 보이는 갈색피부와 새카만 눈동자가 누가 봐도 타지 사람이라 쉽게 통과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따지던 옆의 남자가 포기한 듯 인상 쓰면 물었다.

" 좋습니다. 허가증을 신청하고 받으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

" 절차부터 해서 넉넉잡아 나흘정도 걸리니 그 뒤에 오십시오. "

" 나흘이요? 아니 무슨 나흘이나 걸린답니까? "

" 따지려면 그렇게 정한 왕실에 직접 가셔서 따지시고, 아, 따지시려면 허가증부터 필요하시겠네요. 다음! "

 냉정하게 끊어내는 경비병과 기다리느라 불만을 토하는 뒷사람들에게 밀려 어쩔 수 없이 줄 옆으로 밀려난 두 남자는 오도 가도 못하고 덩그러니 있었다. 아마 다시 허가증을 받고 두 나라의 검문대를 지나치려면 시일이 제법 걸릴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제 일도 바빠 방해되는 그들을 밀치듯 앞서 움직였다.

 안쓰러워 보이는 두 남자를 보고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안장에서 내려와 칼같이 대답하던 경비병의 어깨를 톡톡 쳤다. 한창 바쁜 와중에 방해하는 작은 움직임에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 뭡니까? "

" 보증인이 있다면 허가증을 대신할 수 있다 들었네만. "

 분명 그런 조항이 있긴 했으나 못해도 귀족 이상인 신분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경비병은 말을 건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으나 딱히 특유의 사치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아 혀를 찼다. 게다가 그런 신분이었다면 일반 통행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뭘 모르는 평민인가 싶어 그는 귀찮다는 티가 여실히 드러나는 말투로 답했다.

" 보증인을 하시려면 가문의 패가 필요합니다. 없으시죠? 그러니까 바쁜 사람 부르지 마시고, "

" 이걸로 되겠지. "

 뭘 또 꺼내나 싶어 슬쩍 쳐다보았던 경비병은, 여인의 품속에 반짝이는 디칸타 왕가의 패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들고 있던 창을 떨어트리며 경악하는 경비병을 보고 호란태와 작시아는 저거 꺼내들 줄 알았다며 서로 소곤거렸다. 대신 줄에서 밀려난 채로 돌아가는 상황을 보던 사내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 추,추,충분합니다. 예! 그렇죠. 오시죠, 아니,아니지. 가시면 됩니다. "

 횡설수설하던 경비병이 모셔다드려야하나, 말아야하나 갈팡질팡 하는 것을 내버려 두고 나이시라는 떨어져 있는 사내 둘에게 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연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걸어오는 사내와, 느릿느릿 터번을 뒤집어쓴 채 움직이는 사내가 그녀의 앞에 딱 섰다. 전체적으로 얼굴 표정이 웃는 상인 남자가 감사의 인사를 하려는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꺼내려고 했었다.

" 아…! "

 그런데 어째 열린 입에서 인사 대신 나온 것은 감탄사다. 웃는 얼굴 그대로 딱 굳은 듯한 모습에 앞에 서있던 나이시라가 도리어 왜 저러나 싶었다. 흡사 돌 마냥 가만히 있는 태도에 진짜 뭐 문제라도 있는 건가 물어보려던 그 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감사의 인사가 들렸다. 유창한 말투였다.

" …감사를 표합니다. "

 입까지 막고 있는 터번 때문에 소리가 뭉개지긴 했지만, 정확한 발음이었다. 뜻밖의 감사를 받은 것은 나이시라인데 놀란 것은 일행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거의 펄쩍 뛰다시피 놀라더니 뒤늦게 그들을 향해 어색하게나마 인사했다.

" 덕택에 편히 입국했습니다, 예,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하, 하하…. "

"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그나저나 이 곳 언어가 굉장히 유창하시군요. "

 마지막 말은 이국의 남자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 옆의 사내는 피부나 머리색, 어디를 보아도 대륙인이었으니까.

 아까처럼 짤막한 말이라도 하려나 했으나 이번엔 철통같이 옆의 남자가 대신 답했다.

" 아, 그게, 드리슬란에서 오래 생활하셨던 분이라 서요. 이쪽 출신이나 다름없다고나 할까, 뭐 그런 거지요. "

 이쪽 출신과 다름없다고 보기에는 복장이 특이했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딱히 문제 일으킬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으니 특별히 당부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 나이시라는 짧게 작별을 고했다.

" 그럼, 즐거운 여행되시길. "

 훌쩍 말에 올라타 사라지는 그들의 뒤를 보며 못 다한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사람 하나 찾는다고 그 짧은 사이에 고생을 얼마나 했던가. 수소문끝에 겨우겨우 얻은 작은 단서와 추리로 여기까지 왔다. 이런 기회를 놓치다니!

 한마디 말이면 쫓아갈 기세인 옆의 사내와 다르게 꽁꽁 싸매고 있는 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답답함에 못 이겨 입을 여는 것은 언제나 그다.

" 안 쫓아갈 생각이십니까? "

 이런 천운이 어디 있다고요! 하고 소리치는 수하를 내버려두자니 시끄러워서 터번을 쓴 사내는 천천히 말 발자국을 따라 움직이며 말했다.

" 무엇이 그리 급하느냐. 이리 빨리 찾아냈는데. "

 그래서 천운이지 않습니까, 하고 조금 못마땅한 기색을 툭 터놓았지만 역시 제 주인은 그런 데 신경을 손톱만큼도 쓰지 않았다.

" 게다가 나를 못 알아본다라…. "

 사내는 조용히 웃었다. 신은 내 편인 게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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