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5 허상 =========================================================================
떨리는 손을 가다듬고 나이시라는 눈을 감았다. 텅 빈 방, 메말라가는 눈물 자국과는 다르게 쿵쾅거리는 심장은 가라앉을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꼭 상처받은 것 같은 표정으로 방을 못 떠나던 그의 모습이 얼핏 눈에 서렸다. 그러나 자신은 성공했다. 스스로를 야단치고 혼내면서 끝끝내 움직이지 않는 그의 발걸음을 돌리게 만들었다.
' 오늘 밤 출궁하겠습니다. '
뒷일은 그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당장 떠나겠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샤나일은 미동도 없던 몸을 머뭇거리며 움직였다. 가지 말라던 말도, 붙잡던 손도 놓고 다 포기했다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되돌아보지 않은 채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지는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눈을 감았었다. 이것으로 끝이구나. 모든 것이 드디어 매듭지어졌구나.
아마 다시는 샨에게 품었던 감정을 가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고 무뎌지고 잊힐 때쯤에는 새로 시작하기에 너무 늦을 것이다. 그래도 나이시라는 좋았다. 평생 겪지 못할 줄 알았던 감정들, 추억들, 그 느낄 수 있었던 모든 것들에 감사했다. 끝이 거짓이었다 해도 자신이 진실로 간직하면 그뿐이었다. 그렇게 말끔하게 정리했으니 나가면 된다. 나갈 일만 남은 것이다.
" 작시아. "
그녀의 작은 부름에 힘이 실리고 걱정스런 표정의 주황빛 여인이 나타났다. 항상 호명하기만 하면 다들 걱정이 한가득인 표정이었다. 그녀는 새삼 이렇게 주위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쳤나 싶어 쓰게 웃었다.
" 어찌 되셨습니까? "
" 오늘 밤 당장 궁을 나서야겠다. "
자초지종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는 짐작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일이었다. 한 없이 안타깝기만 하고 소중하던 주인이 미련을 떨치고 나서는 것. 자신뿐만 아니라 여덟 명의 수족들이 고대하던 일이다.
분명 잘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착잡한 표정이 가시지 않던 작시아는 옷자락 사이 언뜻 보기에 붉게 자국 난 팔이 보였다.
" 그 자국… 아니, 아닙니다. 어디로 가실 예정입니까? "
" 동지부에 일이 생겼다 들었다. "
" 아, 그것은, "
작시아가 드물게 당황한 눈치다. 나이시라는 빠짐없이 보고하던 그들이 일이 꽤 크게 벌어진 것 같으면서도 쉬쉬하는 상황을 눈치 채고 있었다. 곁에 있던 일신마저 불려간 것을 보면 소소한 일이 아닐 것이 분명한데도 일언반구도 없었다. 믿는 그들이기에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겠지라고 넘어가기에는, 그때처럼 무리하다 다칠까 두려웠다. 아직도 가끔 악몽처럼 그때의 참상이 그녀를 뒤덮곤 했다.
" 필히 내게 고하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 "
" 궁주…. "
" 그러나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느냐. 동지부에 갈 준비를 해주렴. "
드리슬란에 있는 동지부에 생긴 일을 해결하고 나서, 천천히 거처를 정해야겠다 생각이 든 나이시라는 어느새 비가 그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들면 아무 거리낌 없이 이 황궁을 나서리라.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닿지 않았어야 할 인연이었다만 배워가는 것이 있어 후회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기다렸다. 어둠이 찾아오고 사람들이 적어지길.
자박자박, 걷다보니 어느 새 설화궁 밖이다. 잠시 멈추어선 샤나일은 허망함 가운데 느껴지는 의구심에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저렇게 아파하는 이가 정녕 권력을 위해 살아온 사람인가.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한 제안을 거절하는 사람이, 부서지듯 힘들게 울음을 토하는 이가 황후의 자리를 위해 살아왔을까. 그는 믿기지 않았다. 여태 믿어왔던 사실들이 믿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자신의 어미처럼 완벽하다 못해 진짜 같은 연기를 펼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그 절절함에 자신마저 목이 메여왔다. 게다가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마당에 연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몰아치는 생각과 의문점 사이에 그가 찾은 곳은 친우의 방이었다.
" 뭐냐. "
방에서 빈둥거리며 뒹굴던 위룬은 태자가 납시었는데도 불충하게 누운 채로 퉁명스레 물었다. 그 일 이후로 영 살가운 태도가 아니었지만 샤나일은 그래서 위룬이 편했다. 있는 그대로를 표현해주는 그가 마음이 놓였다. 제 편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비도 아니고 그림자처럼 붙어있던 수하들도 아닌, 그를 꼽았을 것이다.
" 붙잡아보았다. 가지 말라 하였지, 내가. "
누워있는 자신의 옆에 주저앉은 친우가 앞뒤 설명 없이 얘기하는 말에 위룬은 잠잠히 듣고만 있었다.
" 다 주겠다고 말했다. 태자비의 자리,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황후로 봉해주겠다고도 했어. "
" ……. "
" 그런데도 가겠다는군. 되돌릴 수도, 그럴 생각도 없다고…. "
그 사이 발전이 있나했던 위룬은 친우의 한심함에 쯧쯧, 혀를 차보았다. 그리고 누웠던 몸을 벌떡 일으켜 머리통을 후려쳤다.
" 너는 병신이냐? 팔푼이가 되었어? "
" 아프잖느냐. "
" 네 맞은 머리통만 아프고, 왕비님은 안아프겠디? "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짐작이 간 샤나일은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그 침묵이 더 화가 난 위룬은 마주앉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 그래, 반 년 동안 나가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정확히 모르지. 몰라도 사람 볼 줄은 알아. 네가 반편이였을 때나 아닐 때나, 누구보다 너를 아끼며 곁에 있던 분이다. 그런 왕비님을 신문을 해? 그래놓고 붙잡으면, 어이구야 붙잡힐 줄 아셨어? "
" 아니하면? 그럼 자살하라 약을 건네란 말이냐? "
" 너 정말, "
" 그래. 네 놈 말대로 넌 모른다. 그 반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나이시라가 한 일을 네 놈이 믿을 수가 있을까. 미작왕과 안시왕은 이미 죽었다. 내년에 오기로 했던 석왕과 환마왕은 4년 뒤에 오기로 마음을 바꿨다는군. "
다른 후궁들이 낳은, 샤나일의 동생들에 대한 얘기에 위룬이 멈칫했다. 높은 순서의 황위 계승자들이 차례차례 죽거나, 드리슬란에 없다. 남은 것은 아직 어려 왕의 칭호조차 받지 못한 황자들이다. 단기간에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계획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황손들을 쉽게 처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치밀하고, 세력이 넓게 뻗어있어야 가능했다.
" 그래, 의심이 갈 수야 있겠지. 하지만 단정 지을 수 없잖아. "
" 이라프의 수장, 카디사 상단의 주인, 미날란과 디칸타의 동맹 관계. 어떻게 설명할 테냐. "
" 이라프? "
위룬은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세력이다. 분명 저 정도의 힘을 가진 자가 반편이란 소문난 그와 순순히 혼인한 것도 오히려 이상하다 할 수 있었다. 충분한 의심의 여지에 그는 도리어 샤나일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 그래서 왕비님이 자리를 노리고 너와 언약식을 맺은 거라 생각했냐? "
" 처음에는, 그래, 나 역시 믿지 않았다. "
항상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그녀를 폐위시키겠다 생각했던 그가, 어디서 그런 믿음이 나온 것인지 모른다. 그저 샤나일은 말이 되냐고, 무슨 소리냐고 일관했었다. 그런 그를 믿게 한 증거가 있었다.
" 친필 서신을 발견했다. "
" 서신? "
" 이안 공작에게 보내는 내용이었지. 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되어서도 잊지 않겠노라…, 뭐 그런 동맹에 답하는 내용이었다. "
그 서신을 발견했을 때의 충격은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컸다. 아닐 것이라, 조작 된 것이라 믿으며 보고 또 보아도 그 화법과 필체는 여지없이 나이시라의 것이었다. 제 눈이 망가진 거라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며 전문가를 불러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동일한 인물이라고.
배신을 깨달음과 동시에 밀려오는 것은 분노였다. 자신 역시 그녀를 속였음에도 자꾸 차오르는 분노가 이라프의 수장으로서 만났을 때 차갑게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어미와 같은 여자였다고. 어머니가 남기고 간 저주였다고.
" 그런데도 붙잡았단 말이지? "
" 억지로 밀어내도 안 된다면 붙잡으려 했다. 나만 괜찮으면 아무 상관없을 줄 알았으니까. 다 덮고, 원하는 것을 주면 곁에 남을 줄 알았어. "
어리석다 해도 좋았다. 본색을 드러내도 좋으니 곁에 남기를 바랐다. 그 동안 모질게 수 없이 밀어내 보았으니 분노에 가려졌던 진심을 받아들여도 괜찮을 줄 알았다. 버티다가 못내 옛날처럼 억지를 받아줄 줄 알았다.
나이시라는 울었다. 신문을 받을 때마저 차오르던 눈물을 쉬이 보여주지 않던 이가 자신의 말 한마디에 북받친 듯 담아두었던 울음을 꺼내었다. 떨리던 그 마른 손이 안타까워서, 멈출 줄 모르고 흐르던 눈물이 믿기지 않아서 그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 만약, 정말 만약 왕비님이 그런 사람이라고 쳐. 그렇다면 네 말에 떠나는 이유가 뭔데? 나는 이해 못하겠다. 나는, 난 왕비님 그런 사람이라고 못 믿어. "
샤나일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극진히 보살피던 사람이었다. 반편이가 되어서도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며 자신에게 감사를 표하던 사람이었다. 표정 변화가 많이 없지만 그의 곁에서는 환하게 미소 지을 줄 알던, 그냥 평범한 아내의 모습을 가진 이였다.
단호하게 자신의 눈을 믿는 그를 보며 샤나일은 씁쓸하게 입 꼬리를 올렸다.
" 나 역시 너처럼 생각했어야 했을까. "
곰곰이 혼자 생각에 빠진 위룬은 다시 벌러덩 누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헌데 말이다…, 그렇게 큰 세력을 가지고 손쉽게 황실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면 어째서 드리슬란에 온 걸까? "
" 아까 말하지 않았나. "
" 나라면 느칸다를 차지할 텐데. 제국은 아니더라도 강대국으로 손꼽히는 나라잖아. 게다가 비의 자리가 아닌, 왕의 자리에 직접 앉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
그는 얻어맞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고 오히려 말한 위룬은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샤나일이 멍하니 앞만 보고 있을 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본능적으로 그는 비춰지는 그림자를 보고 물었다.
" 무슨 일이냐, 질마. "
" 주군, 왕비 전하께서 떠나실 차비를 하셨습니다. "
벌써 밤이 되었나 싶어 샤나일이 고개를 획 돌렸다. 노을빛도 못 느낀 사이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졌다. 그는 이상하게 초조해졌다. 이젠 다 끝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가라앉는 머리는 차분히 입을 열게 만들었다.
" 여태 왕비의 정보를 모아오던 것이 누구였지. "
" 예? 수색대 3,4 분대입니다. 담당자는 루시스 이칸타히이고, 현재 미날란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 불러와라. 최대한 빠르게. "
샤나일은 문을 활짝 열었다. 밖에 있던 질마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는 선명해지려는 달을 보고 낮게 읊조렸다.
" 폐하를 뵈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