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4 허상 =========================================================================
샤나일은 누가 보면 저게 무슨 망측한 행동이냐고 손가락질을 할 정도로 빠르게 걷는 수준을 넘어서 뛰고 있었다. 수군덕거리는 궁인들과 경비병들을 지나치고 멀리 설화 궁의 모습이 보였다. 쿵쾅거리는 심장과 맞춰 발걸음이 더 빨라져만 갔다. 체통머리 없는 짓이라 욕을 먹어도 좋았고, 사정을 들으면 천하에 다시없을 멍청이란 소리를 들어도 좋았다. 인정하기 싫었던 욕심을 똑바로 보고 나니 시야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 비는, 왕비는 어디 있나. "
지나가는 궁인을 붙잡고 물어보자 아직 어린 소녀가 당황했다. 난데없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온 이가 황태자였으니 그럴 법도 하건만 샤나일은 재촉하기 바빴다. 얼떨결의 심정으로 방에 계신다고 고하자마자 그는 올 때마다 조금씩 내리는 빗방울을 무시하고 방 안으로 곧장 직행했다.
" 전하? "
" 고할 필요 없다. 물러가 있거라. "
왜 이렇게 조바심이 나는 것인지. 샤나일은 몰려들기 시작한 궁인들을 보고 짜증스런 눈짓으로 보내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심호흡을 하며 손수 방문을 열었다. 드르륵 거리는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만 들렸다.
소란스러운 바깥과 달리 왕비가 있는 방 안은 고요했다. 빗방울이 보이는 바깥문을 활짝 열어놓고 차분히 차를 마시고 있는 그녀는 문을 열어 놓고 들어오지 않은 샤나일을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천천히 상에 기대에 몸을 일으킨 그녀가 공손히 읍하며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인사 때문에 가만히 있던 것이 아닌데, 샤나일은 답답한 느낌에 일단 방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았다.
"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어쩐 일로 납시었는지요. "
오기만 하면 묻는 말에 딱히 용건이 있어 온 것이 아니었던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애꿎은 방만 두리번 살폈다. 뭔가 달리진가 싶었더니 그녀의 방이 어째 더 휑하게 변한 것 같았다. 그나마 몇 개 없던 장식품들도 사라지고 놓여있던 병풍마저도 사라졌다. 덩그러니 놓인 가구와 작은 상 하나가 다였다. 왜 다 치웠느냐고 물어보려던 샤나일은 그녀의 곁에 천으로 싸인 짐을 보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 벌써 짐을 싸둔 것이냐. "
" 곧 나갈 몸이니 편할 듯싶어 싸두었습니다. "
앉으라는 나이시라의 눈짓에도 샤나일은 서서 똑바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진심으로 그녀는 폐위가 되자마자 궁 밖을 나설 참이었다. 분명 자신이 얘기한 대로 따르는 것일 뿐인데 왜 그녀가 원망스러워지는 것인지.
" …이 후에 갈 곳이라도 있나. "
" 이 넓은 땅, 저 하나 몸 둘 곳이 없겠습니까. "
사는 대로 사는 게지요, 하며 그녀는 드디어 폐위를 시키러 온 것으로 알고 자신의 발치에 놓인 짐을 바라보았다. 이 작은 보따리 하나만 들면 이 궁에서의 흔적들은 남김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가 바랐고, 그가 원하는 대로.
어째 그가 먼저 물어놓고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나이시라는 혹시나 다른 소소한 부분을 걱정하나 싶어 자신이 먼저 얘기를 꺼내었다.
" 드리슬란을 떠날 생각이니, 걸릴 것은 없을 것입니다. "
" 가지마라. "
막아두었던 것이 새어나오듯 흘러들어온 말. 그 말은 나이시라 뿐만이 아니라 뱉은 샤나일까지 놀랐다. 놀라다 못해 당혹스러운 눈치의 그녀가 되물었다.
" 무어라…하셨는지요. "
" 가지마라 하였다. "
이미 뱉은 말, 샤나일은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었다. 서로서로 거짓이었다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이 먼저 진심을 고하고 싶었다. 샤나일은 드문드문 막히려는 입을 열어 조금씩 말을 꺼내보았다.
" 나는 네가, 내 곁에 있었으면 한다. "
그 서툰 말에 담긴 진심에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침착하게 답했다.
" 폐위시키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전하셨습니다. "
" 그랬지. 내가 그랬다. 너를 보낼 수 있을 줄 알았어. 네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아무 상관이 없을 줄 알았다. "
잠시 상상해본 것만으로도 컴컴하기만 하던 미래였다. 억지로 외면하던 고개를 똑바로 마주보게 할 만큼 겪지 않고 싶던 미래다.
샤나일은 배신감과 증오에 눈이 멀어 했던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한 짓들을 모두 저질렀지만 그는 묘한 자신감이 들었다. 샨과 있을 적에 단 한 번도 거짓이 없었다고 당당히 고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그 말에 티끌만한 진심이 있다면 힘들더라도 내 곁에 남아주지 않을까.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냉담한 눈길과 말이었다.
" 죄인이라 하신 것도 전하셨습니다. 당신의 곁에 죄인이 어울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분노도, 기쁨도 아닌 무미건조한 음성에 샤나일은 울컥했다. 더 이상 자신에게 미움조차 남지 않았다는 것일까. 차라리 화를 내며 노려보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차갑기만 한 태도에 그는 자신이 예전부터 상처받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빈정거리며 조롱했던 자신의 말에 대꾸하던 나이시라의 말 한마디에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아파하고 있었다. 진작 눈치 챘다면 조금 달라졌을까.
샤나일은 강경한 눈빛으로 나이시라를 바라보았다.
" 네가 죄인이라도 상관이 없다. 네가 내 형제들을 죽였어도, 권력을 위해 일했어도,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
" 상관이, 없다? "
" 그러니 내 곁에 있어라. "
나이시라는 머리가 멍해졌다가 가라앉았다. 모든 진실을 알았을 때 자신이 얘기해주고 싶었던 말을, 그가 먼저 꺼내고 있었다. 당신이 반편이든 아니든 내 남편이니 괜찮다고, 아무 상관없다고…. 힘들어할 그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다독이고 싶었던 그녀의 말들은 샨이 죽음으로써 깊숙이 묻어두었던 말이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나를 살리기 위한 일이었으니 이해한다고, 상관없다고.
" 듣고 싶었던, 말하고 싶었던 말이었지요. 이런 식으로 들을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습니다만…. "
그녀는 진창이 된 추억에서 눈을 떼고 현실의 그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 곁에 있으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요, 저는 그리 못합니다. "
" 비, 하지만. "
" 이미 깨진 사이입니다. 저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되돌릴 생각도 없어요. "
" 시라! "
작은 외침. 나이시라는 더듬거리지 않는 낮은 음색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스스로를 호되게 야단쳤다. 껍데기에 속는 머저리는 되지 말자며.
샤나일은 남을 보듯 꾹 다문 입매에 답답함과 애절함을 담아 소리쳤다. 제발 서툰 말 속에 자신의 마음을 좀 알아달라고. 힘들게 인정한 만큼 좀 이해해달라고.
" 덮어준다지 않아. 네가 죄인이든 아니든! 내 곁에 있어달라지 않느냐. 내가 더한 것을 바랐더냐. 그저, 이 궁에서 전처럼 있어주기를 원한 것인데…! "
" 전처럼이요? 어찌 전처럼 있을 수가 있답니까, 어찌요! "
결국 소리치고 만 자신의 두 팔이 잡혀 꼼짝없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서도 그녀는 헛된 희망을 품은 그가 정신 차리길 바랐다.
" 저를 속인 것도, 죄인이라 하신 것도, 고문하신 것도! 모든 것이 다 전하의 뜻이었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진 결과에 만족하셔야지요! "
" 아니 되는 것을 어찌하란 말이냐! "
샤나일은 붉어진 눈가를 가릴 생각도 없이 울분을 토했다.
" 나라고 노력하지 않은 줄 알아! 전처럼 외면하고, 너에게 억지로 상처를 줘도 아무렇지 않으려고 얼마나…얼마나 애를 썼는데. "
" ……. "
" 태자비의 자리, 황후의 자리를 원했었지. 주마. 다 주마. 네가 원하는 대로 권력을 쌓든 재물을 쌓든…내게 진실을 말하든 아니든 아무 간섭하지 않을 터이니, 그러니 내 곁에 남으란 말이다…. "
나이시라는 기어이 막으려고 했던 눈물을 떨구었다. 막을 새도 없이 솟구친 바닷물들이 그녀의 눈동자처럼 남색이 되었다. 그 오랜 시간 참아왔던 담벼락이 무너진 대가로 눈가에는 조금씩 거세지는 바깥 빗방울보다 더 거세게 흘러내렸다.
그녀는 닦을 생각도 없이 덜덜 떨리는 팔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 하…하하, 그래요, 제가 그 자리를 원한다 그러셨지요. "
" 시라? "
" 어찌… 사람이라면, 인간이라면 어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
목이 메어와 그녀의 목소리가 꺼질 듯 작아졌다.
" 탐이 났었냐고 물으셨지요. 그래요, 당신이 탐이 났었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셨지요. 맞습니다. 당신이 평생 웃으며 지내기를 바라 내 못된 심보로 태자의 자리에 올리려 했습니다. "
단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눈물이 폭포수마냥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에 샤나일은 바보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울 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다.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슬퍼하지 않을 줄 알았다. 자신의 속에 들어있던 어처구니없는 착각에 샤나일은 흘러내리는 저 눈물이 진짜인지 확인하듯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려 했다. 그러나 이내 탁, 소리 나게끔 얻어맞은 손이 뒤로 물러났다. 매섭게 그의 손을 쳐낸 나이시라는 그가 원했던 대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물방울로 젖은 바닥이 짙은 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 그리 잘못했습니까, 제가? 얼마 없을 시간동안 당신 곁에 있고자 한 것이 그리 잘못 되었습니까…! "
참기 힘든 듯 숨을 들이키며 끅끅거리는 소리에 샤나일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버둥거릴 힘도 없이 안긴 그녀의 온몸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강인하고 단단했던 그녀는 온데간데없었다. 이렇게 여린 사람이었나, 이렇게 아파하고 있었나. 샤나일은 혼란스러웠다. 반편이의 기억 속에서도 볼 수 없던 나이시라다. 그는 바보가 된 듯 작게 속삭였다.
" 내가, 내가 잘못한 것이다. 네가 아니라 내가…. "
속삭이는 그의 말에 나이시라는 약하게 그를 뒤로 밀었다. 의외로 순순히 뒤로 물러난 샤나일을 보며 그녀는 여전히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도 다시 담담하게 말할 수 있었다.
" 이미 끝난 인연입니다, 전하. 저는 예정대로 폐위될 것이고, 그러해야만 합니다. "
" 하지만, "
"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
떨어져있던 짐 보따리를 품에 안은 나이시라가 굳은 그를 보고 울며 웃었다. 애초에 닿았으면 안 되는 인연이다.
" 샨은, 제 남편은 죽었다고 말입니다. "
그녀가 궁에 있을 이유는 사라진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