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3 허상 =========================================================================
" 폐위를 시킨다? "
보고받은 내용에 황제는 기가 차다는 웃음을 지었다. 우왕이라 붙였더니 그에 걸맞은 놈이 되었다며 혀를 끌끌 차던 그는 팔걸이를 손으로 톡톡 치며 고민에 빠졌다. 나이시라 왕비의 폐위는 예상해본 적 있었으나 원치 않은 방향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한 번 폐위된 여인이 다시 태자의 비로 올라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타당함을 증명할 수 없다면 제 아무리 세력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태자비를 노리는 귀족들 사이에서 입지가 불안해질 것이 뻔했다.
" 태자를 불러오거라. "
" …직접 나서시려고 말입니까. "
믿기지 않는 듯한 이녹스의 음성에 황제가 샤나일과 비슷한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아예 웃음도 제대로 짓지 않는 그를 보고 이녹스는 제대로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도통 편안할 날이 없구나.
"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으니,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 "
자신이 원하는 바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이루었던 인물이다. 그것은 제 자식 일에도 예외가 없었다. 제 손에 모든 게 놀아나야 직성이 풀리는, 그야말로 비상식적인 성격이었으나 이녹스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조용히 태자를 부르기 위해 바깥으로 벗어났다. 보고를 하면서도 직접 대면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그는 생각보다 많이 찝찝했다. 그 왕비님은 어떻게 될는지.
" 부르셨습니까. "
단정한 옷차림의 우왕 샤나일이 황제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분명 공손히 인사를 했건만 말의 어투에서 무미건조함이 묻어난다. 어디를 보아도 아버지에게 하는 인사의 느낌은 아니라 어둠 속에서 지켜보던 이녹스는 허울뿐인 부자관계의 두 사람을 얌전히 지켜보았다.
황제는 마치 옛날의 젊었던 자신과 굉장히 흡사하면서도, 그의 아내였던 황비와 빼닮은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때의 자신은 지금의 아들처럼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었고, 그것을 이룰만한 능력과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황가 대대로 내려오는 힘의 발현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 힘으로 형제들을 죽이는 것 또한 사소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자신의 삶을 대물림한 듯한 아들은 어째서인지 조금 다른 모습이다.
" 왕비를 폐위한다 들었다. 사실인 게냐. "
" 그렇습니다. "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냐 물어보지도 않는다. 이럴 때는 참 영리한 아들이라며 황제는 턱을 괴었다.
" 덮는다 하지 않았더냐. 지금 상황에서 꺼내면 너 역시 타격받을 것은, 네가 더 잘 알 터인데? "
" 그 일은 덮을 것입니다. 다른 핑계거리야 만들어내면 그만이니까요. 아이가 없는 것을 문제 삼을 수도 있겠지요. "
황실의 일은 당신이 잘 알지 않냐고 똑바로 반문하는 그를 보며 황제는 가늘게 눈을 뜨며 웃었다. 별 볼일 없는 대화는 잘 파악하는 아들이었다. 얼른 본론을 꺼내라는 눈빛에 더 골려주고 싶은 황제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 왜? "
" …왜냐니요, 죄목은 소상히 보고 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
" 그래서? "
지금 말장난을 하는 건가 싶어 샤나일의 입매가 조금 내려갔다. 황제는 등받이에 편히 기대어 불성실해 보이는 자세로 바꾸었다. 마치 이 대화가 영양가 하나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겝니까. "
" 나는 네 놈이 왜 폐위시키겠다 하는 겐지 이해를 도통 못하겠구나. "
" 분명히 죄목에 대해 말씀드린, "
" 그래서, "
말을 뚝 끊어먹은 황제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빛냈다. 꽉 막힌 아들의 생각을 바꿔줄 차례였다.
" 그래서 그녀가 미우냐.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샤나일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아비에게 이런 질문을 받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간섭하는 것은 질색이던 황제에게서는 들을 수 없을만한 얘깃거리였다.
샤나일은 다물었던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그녀가 미우냐고? 당연히 미웠다. 비록 지우고 싶던 흔적이었으나 잔인하게 거짓으로 점철 된 흔적은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자신의 바람과는 무색 히도, 어머니와 같은 여자였다. 다시는 만나지 말기를 바라고 있던 사람이 제 곁에 있던 것이다.
" 묻는 의중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만. "
" 언제까지 눈을 막고 귀를 막을 참인 게냐. 애써 외면해보았자 포기하지 못할 것을, 인정하기 그리 힘든 겐지. "
한심하다는 어투에 샤나일이 맞서 빈정거렸다. 그렇게 쉽게 인정을 하는 사람이라 탐욕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을 옆에 두고 살았단 말인가.
" 그러면 폐하처럼 이십여 년을 당하고 살라는 말씀이십니까? 진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이 오로지 자리만을 바라고, 꿈꾸고, 그것을 위해 방해가 되는 자식을 병신으로 만들게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까? "
" 그게 무엇이 어때서 말이냐? "
황제는 마치 일상과도 같은 일처럼 여상히 대꾸했다.
" 물론 네게 약을 쓰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이 아쉽긴 하다만, 나는 그녀가 황후의 자리를 바란 것에 아무 불만이 없다. "
" …없으시다고요? "
" 황비로서 궁에 들어오는 이들 중에, 황후를 꿈꾸지 않는 자가 몇이나 될 것 같으냐. 꿈꾸는 것이 당연하고, 그를 이루려고 하는 것 또한 당연하지 않더냐. "
샤나일은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황제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미쳤다고는 하지만 제정신으로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떨리려는 입을 가다듬었다.
" 처음, 처음부터 알고 비로 들이셨던 겁니까. "
" 그래. "
" 도대체 무슨생각으로! "
" 그녀를 만났을 적에는 그 신통방통한 연기에 껌벅 속긴 했다만 알고 난 뒤도 상관이 없었다. "
자신의 탄생은 애초부터 불행으로 예정된 일이었나 보다. 그 사실에 억울함이 솟구쳤던 샤나일은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 자식을 아낄 줄 아는 멀쩡한 부모를 만났더라면, 호강하지는 못하더라도 환히 웃으며 지낼 수 있었을까. 짙은 한탄이 그를 끝까지 입 열게 했다.
" 어째서…. "
" 네 어미를 열렬히 은애했으니까. "
그 말에 샤나일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신이 잘못들은 것인가? 웃으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평범한 일상 같은 황제가 뱉은 단어를 제대로 들은 것인지 그는 믿을 수 없었다.
" 다른 비를 죽이고, 내 자식들을 죽였어도 넘어갈 만큼 그녀를 은애하고 아꼈기 때문이다. 죄목이 그리 중요하더냐. 죄를 지었음에도 곁에 두고 싶다면 두는 것이 무엇이 나빠. "
" …그러나 결국 죽이시지 않으셨습니까. "
당대의 유명한 여인이었던 황비 브릴티야는 다른 황손들을 해한 이유로 극형에 처해졌다. 자살 권유도 받지 못한 그녀의 죽음은 입소문을 퍼져나갔고, 자세한 상황이 전달되지 않았던 터라 사람들의 동정심을 얻었다. 아직도 바깥에 그녀에 대해 물으면 눈물로 죽음을 애도하는 이가 수백일 것이다.
" 너를 건드림으로 선을 넘었던 게지. 어쩔 수 없었느니. "
황가에 내려오는 힘의 발현은 직계 황손들 중 여러 명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아예 사라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 불완전하면서도 거대한 힘을 보존하기를 원했던 황제는 더딘 약효의 효과성에 기어이 아들을 살해하려고 한 황비를 죽음으로 내몰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황비를 바깥으로 보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브릴티야를 보내 주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 밉지는 않으셨습니까. 당신을 은애하지 않았다고 해도…. "
" 실제로도 내게 그런 감정은 없었을 게다. 정부도 여럿이 있었으니 말이다. "
어이없어하는 아들의 모습에 황제는 별일 아니라며 말을 이었다.
" 네 어미가 그런 여자였다고 해서 쉽사리 바뀔 마음이었다면 그게 어찌 진심이었겠느냐. 덕지덕지 눌어붙은 미련과 감정들을 낭비할 바에야 인정하는 것이 편한 것을. "
" 그저 상관없으신 것은 아닙니까. "
" 상관없기도 했지. 내가 은애한다는데 뉘가 무어라 할 것이야. "
이 내가 드리슬란의 지존인데 말이다. 낮게 퍼지는 그 우월감과 오만함에 샤나일은 두 손을 들었다. 저 이해 못할 논리와 감정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얘기에 이상하게도 답답했던 느낌이 싹 가시자 그는 회의감이 들었다. 황제와의 억지스러운 대화로 심경변화가 있었다면 언제나 분노와 짜증으로 일관되었던 것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 이상함에 속으로 의문을 품는 동안, 황제는 귀신같이 그것을 알아채고 씩 웃었다.
그는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쑥 앞으로 내밀고 아들을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 미련이 남았느냐? "
" ……. "
" 생각해보거라. 왕비가 없는 삶을, 네가 입으로만 얘기하던 그녀의 흔적이 모조리 사라진 날들을 말이다. "
바라마지 않은 일이라 답을 해야 하는데 어째 샤나일은 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설화 궁에 가서도 그녀가 없고 옛 궁마저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 지난 반편이의 마지막 흔적들이 사라지는 삶. 고작 그림하나 받고 남몰래 뒤에서 기뻐하는 여인도, 추운 날에 감기라도 걸릴까 더운 날에는 열병이라도 날까 걱정스레 말 걸어주는 여인도 사라질 것이다.
거짓이었던 모습이니 사라져도 후회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큰 착각이었던가. 거짓이라도 좋으니 다시금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멍청이처럼 굴었던 자신의 기억들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은 것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멍청이를 보고 수줍게 웃어주던 여인이 보고 싶은 것은 무슨 마음이련지.
샤나일은 모순된 생각에 망설여지는 마음 속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또 그 일을 겪을 셈인가. 진짜 반편이처럼 같은 상처를 되새길 것인가.
" 옛날과 지금의 너는 다르지 않더냐. 무력했던 옛날과는 달리 왕비를 통제할 힘도, 곁에 둘 지위마저 있으니. "
아무렴 그 전과 같을까, 하고 읊조리던 황제가 움직이려는 샤나일의 발걸음을 보고 웃었다.
" 무엇을 망설이느냐 아들아. "
그 말을 끝으로 샤나일은 마치 돌에 얻어맞은 것처럼 급히 움직였다.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대충하는 불경한 짓을 저지르고 사라지는 아들의 뒤를 보며 황제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뒤에서 상황을 다 지켜보던 이녹스가 대단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 참, 사람을 잘 가지고 노십니다. "
" 가지고 놀다니. 단지 깨닫게 해주었을 뿐이거늘. "
" 무얼요. "
우리 가문은 대대로 욕심이 많다는 것 말이다, 하며 황제가 경망스레 기뻐했다. 애초에 욕심을 부려서 나쁠 것 없는 자리다. 모든 것이 뒷받침해줄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이용하지 않는 것이 더 나쁘지 않은가.
황제는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며 뒷짐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