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10 허상 (10/59)

00010  허상  =========================================================================

 아침에도 불구하고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붉은 빛 용포를 입은 황제가 앞에 가득 쌓인 상소들을 훑으며 아무렇지 않게 여상히 입을 열었다.

" 태자가 다시 약을 찾는다고 들었다. "

" 네. 완치가 덜 된 것으로 보입니다. "

 방 안 어둠 속에서 어둠처럼 캄캄한 남자가 황제처럼 아무 일도 아닌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황제는 그의 대답에 관심도 없는 것처럼 글을 읽어 내리기 바빴다. 자신의 아들이 문제가 있다는 소리임에도 흥미 없어 보이자 남자는 묵묵히 있다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었다.

" 태의말로는 심리적 요인이 크다고 합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실 요량입니까? "

" 나서길 바라는 게냐. "

" 폐하의 뜻대로. "

 먼저 말을 꺼냈다고 해서 그 남자 역시 깊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앞으로 황태자에게서 문제가 있을 시 벌어질 상황들이 골치 아파서 꺼냈을 뿐, 충심이나 그런 마음으로 고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를 잘 알고 있는 황제는 비식거리며 웃었다.

" 주종관계가 이리 닮아서야…. "

"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닙니다만. "

 누가 들었으면 무엄하다 소리칠 만큼 남자의 태도는 수하라기엔 불경하기 그지없었다. 팔짱을 낀 채 미동도 없이 어둠 속에 가라앉은 그 남자를 힐끗 본 황제는 골치 아픈 생각을 덜어 주려는지 평온하게 이야기했다.

" 제대로 완치되긴 힘들 게다. 그래서 나이시라가 필요한 것이고. "

" …그 왕비님 말입니까? "

" 그래. 내 누이를 꼭 닮은 그 아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게야. "

 마치 진심으로 아낀다는 말투에 남자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 머리가 굴러다녀도 아랑곳하지 않을 황제였다. 사람 같지 않은 그가 사람다워 보이는 것에 남자가 떨떠름히 물었다.

" 그리 아끼시면서 왜 내버려 두셨습니까. 매질을 당했다 들었습니다. 왕비로는 치욕스런 대우가 아닙니까? "

" 진짜 죄인처럼 제대로 고문 받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라고 대답해주랴? "

" 답이 못됩니다. "

" 굳이 말하자면, 관여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

 생각이 있어서 관여를 안 한 것이 아닌, 단순히 왜 그래야하는지 느끼지를 못해서 관여치 않은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싶어 남자는 납득한 얼굴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이녹스. "

" 예. "

" 당분간 왕비의 동태를 살피고 오너라. "

" …아끼신다 며요? "

" 그것과는 별개지. "

 천연덕스런 황제의 말에 남자는 짧게 한숨 쉬었다. 그는 정작 자신도 그들처럼 비슷하면서, 부자지간에 사람 못 믿는 것은 똑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황제를 뒤로 두고 어둠 속으로 녹아내렸다.

 황자임에도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제대로 대접 받지 못했던 것처럼 모양새가 나빴던 궁은 태자의 이름에 걸맞게 화려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 궁 안에는 주인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 숙인 신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흰 머리와 여기저기 주름진 세월의 흔적과는 다르게 눈빛만큼은 매서운 신하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중히 고했다.

" 신 이안 공작, 감히 전하께 말씀 올리자면, 더 이상 태자비 자리를 비워두심은 불가하다고 사료됩니다. "

 야망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자이자 그 야망을 이룰 만큼 명석한 머리를 가진 귀족들의 수장이었다. 한 때 결왕의 지지자였고, 현재는 우왕을 지지하는 만큼 그는 자신의 충심을 증명할 길이 있으면 주저 없이 행하는 자였다. 그리고 여전히 꺼내는 말들은 틀린 것 하나가 없었다.

" 멀쩡히 왕비 전하께서 계신데도 태자비로 봉하지 않고 미루시는 것은, 작지만 분명히 트집거리가 될 것입니다. "

 오랜만에 거론되는 왕비란 말에 샤나일은 차갑게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입가만큼은 잔잔히 미소 짓는 것이 편안해보이기 짝이 없었다.

" 허면 어찌하오, 왕비가 아픈 것을. 아픈 이를 데리고 성대한 식을 올리는 것은 분명히 무리지 않소? "

" 그러시다면 식은 미루시고 자리에 먼저 봉해주심은 어떠합니까. "

" …법도에 어긋나는 일일 터인데. "

" 이미 뒷말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전하. 시간이 더 흐를수록 시끄러워질 것은 정해진 사실이지요. 불순한 생각을 가지는 자들도 생겨날 것입니다. "

 이안 공작은 진실을 고하고 있었다. 이미 출세를 노리는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황태자비로 어울리는 여인들을 물색하고 있었다. 난다 긴다 하는 드리슬란의 대가문들 역시 은밀히 준비 중임을 모르는 것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샤나일은 반겨야 했다. 드리슬란의 방대한 영토에서 힘 있는 가문의 여식을 태자비로 맞이한다면 한결 더 수월해질 것이고, 그것이 계획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는 잘되었다 말하지 못했다.

" 좀 더 생각해보겠소. "

 공손히 읍하고 사라지는 공작을 본체만체한 그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별것 아니라 생각했던 일에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드리슬란은 황제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겐 일부일처의 나라였다. 다른 여인을 황태자비로 맞이한다는 뜻은, 나이시라 왕비의 폐위를 뜻하는 것이다. 샤나일은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뇌었다. 이미 생각했던 일이다.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 전하 역시 아내를 잃으신 겁니다. '

" 닥치거라. 닥치란 말이다…! "

" 전하? "

 흠칫 놀란 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다시 깨질 것 같은 아픔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그는 놀란 듯 당황해하는 궁인들에게 일렀다.

" 설화궁으로 갈 것이니 채비하거라. "

 샤나일은 당당히 얘기한 것과 다르게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는 그 이후로 나흘 째 부러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시키지 않아도 왕비에 대해 떠들법한 질마는 친우의 마중으로 빈 자리였고, 그는 그 동안 더 바삐 지냈었다. 어느새 도망치듯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부딪쳐 보기로 했다. 이유 모를 미련 버리려 했으나 버려지지 않는 것이라면 왜 그런 것인지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 태자 전하 납시었습니다. "

 처음으로 정식 방문한 설화궁은 조금 달랐다. 궁인들의 재촉으로 입은 것인지 정갈하게 의복을 갖춰 입은 나이시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몇 십 명의 궁인들을 대동하고 나선 자리라 그런지 왕비로서의 행동에 어긋남이 없던 그녀는 가볍게 고개 숙임으로써 인사를 올렸다.

 간소하지만 하나하나가 값비싼 상을 내려놓은 뒤, 궁인들은 물러가고 넓은 방 안에는 그와 그녀 단 둘만이 남았다. 어떻게든 먼저 말문을 열어보려 하지만 딱히 할 말이 생기지 않아 샤나일은 물끄러미 자신의 앞에 놓인 여인을 바라보았다. 조금 수척해진 것 외에는 옛날과 크게 차이 없는 모습이다. 금방이라도 따뜻한 온기를 가진 손을 내밀어줄 것 같은 과거가 흐릿하게 겹쳐졌다. 며칠 전 꿈을 꾼 탓이라며 샤나일은 아무 말 없이 앞에 앉아 있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려 말을 걸었다.

" 어찌 해 아무 말이 없는 것이냐. "

" …태자께서 하실 말씀을 해주시면 답하겠습니다. "

 용무 외에는 일절 말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옛날 같았더라면 이 작은 도발에도 욱해서 난장판을 피웠을 것인데, 샤나일은 이상하게 자신의 입술만 깨물었다.

 깨문 입술에 작게 상처가 날 때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물어볼 것이 있다. "

" 하명하십시오. "

" 내게… 한번이라도 진실을 고할 생각은 없었느냐. "

 나이시라는 숨을 들이켰다. 더 이상 받을 상처는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생채기를 끊임없이 내는 그의 말에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진중하게 묻는 저 태도가 더 싫었다. 그에게 말했던 모든 것들을 거짓으로 만들어버리는 저 말이 싫었다.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심장이라도 꺼내보여야 진실이 되는 겁니까. 목 안에서 눈물처럼 차오르는 말들을 도로 삼키고 그녀는 태연히 대꾸했다.

" 고한다고 달라졌을까요. 전하,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제가 말한다고 달라질 것이 있었습니까? "

" 모르는 일이지 않느냐. 사람인데, 어찌 그리 단언을 할 수가 있어. "

" 사람이라 드리는 말씀입니다. "

" ……. "

" 전하께서 답을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그는 비뚤어진 미소만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자신에게 뭐라 한들 제대로 귀를 열고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증거를 가져오라 소리쳤을지도 몰랐다.

 샤나일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 태자비의 책봉식이 있을 것이다. "

 그는 기대했다. 무슨 기대인지 스스로는 몰라도 마음속에서 기대를 품었다. 자각하지 못한 채 생겨난 기대는 나이시라의 말 한마디에 깨졌다.

" 경하 드립니다. "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 축하인사말에 샤나일은 부서진 기대를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분히 따라 일어나는 그녀를 등지고 나서야 그는 마저 입을 열 수 있었다. 정해진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 폐위 이후에는 간섭하지 않으마.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