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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7 상실 (7/59)

00007  상실  =========================================================================

 모든 이들이 우러러보는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지도 한 달이 지났다. 비록 우왕이란 칭호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 외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쓸데없이 반편이 행세할 필요도 없어졌으며 자신의 세력들은 당당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미 중신들 중 결왕을 지지했던 옛 세력들은 잔챙이로 변한지 오래, 8년 전 받았어야 할 자리를 돌려받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더 없이 기뻐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분명 어떻게 보면 일생일대의 꿈을 이뤘건만 샤나일의 표정은 전과 같이 냉담했다.

" 태자비의 자리, 어쩔 것이냐. "

" …곧 정리하겠습니다. "

 무심히 술잔을 기울이며 묻는 황제의 말에 그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투로 답했다. 다른 나라와 내통한 왕비를 그대로 두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모든 일의 전말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한 황제는 오히려 고개 숙인 그를 비웃었다.

" 어리석긴….그러나 그것 또한 너의 선택일지니. "

 샤나일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이내 예를 갖춰 밖으로 빠져나왔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질마는 좋지 못한 표정을 보고선 긴장했다.

"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들으셨는지…. "

" 노인네야 여전하지. 잘난 척 하는 건 죽어서도 변함이 없을 듯해. "

 그는 황제의 그런 점을 제일 싫어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굴면서 정작 제대로 된 이야기는 하나 해주지 않는, 오만한 황제의 태도에 항상 찝찝함을 느껴야 했다. 여전히 그런 불쾌감을 느끼던 그는 생각을 바꾸려 애썼다.

" 이라프에 대해서는 어찌 되었느냐. "

" 저, 그것이 보안이 철통같아 여전히 제대로 된 정보가 없습니다. "

" 두 달 동안 건진 게 없다는 것이 말이 되나? "

 예상했던 질책에 질마는 죄송함에 고개를 숙였다. 느칸다에서 파생된 비밀 집단인 이라프는 그 존재 자체도 불분명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은밀하고도 방대한 규모를 지녔다. 대충 그 집단이 나타난 것이 십여 년전 임에도 알려진 정보가 없을 정도니, 두 달 만에 알아오라는 것은 분명 무리한 명령일 것이다.

 샤나일은 귀찮게 되었다 생각하며 혀를 차고선 뒷짐을 지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길고 넓은 소매가 펄럭이며 팔목을 스쳤다. 부드러운 비단으로 지어진 그 옷은 여름에 입기 좋게 서늘했다. 반편이란 소리를 들을 때는 고작 예식용으로 한 벌 가지고 있던 옷. 그러나 이제는 궁에 차고 넘칠 지경이다.

 그는 가늘게 눈을 뜨고 자신의 의복을 바라보았다.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을 때 마주쳤던 그녀의 표정을 기억할 수 있었다. 저 멀리서, 베일로 가렸지만 그는 볼 수 있었다. 가슴이 벅찬 듯 한 표정. 그녀는 보기 드물게 감격스러운 눈치였다. 마치 기쁘지 않은 자신 대신 기뻐해주듯….

" 질마. "

" 네. "

" 왕비를 보았을 때 어떠했나. "

 뜬금없는 질문에 질마는 바짝 긴장했다.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대답하기 꺼려하던 그는 머뭇거리다 결국 되물었다.

" 어떤 의미로 물으시는 것인지…. "

" 말 그대로다. 무슨 생각이 들었냔 말이다. "

 질마는 혼란에 빠졌다. 좋게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인지, 일부로 흉이라도 보아야 하는 것인지 갈등하던 그는 샤나일의 앞에서 솔직한 것이 최고라는 심정으로 답했다.

" 아, 저… 품행이 단정하시고 매사에 있어 차분하신 듯 합니다. 또, 궁인들의 평판도 굉장히 좋은 편이었습니다. 아랫사람들에게 인기 있으신 분이셨죠. "

 아랫사람들의 사정을 봐주는 융통성과 사리분별이 정확한 판단력으로 다른 왕비 궁에서 보필하던 궁인들은 나이시라 왕비의 시중드는 이들을 부러워했다. 은밀한 작업이 많던 그는 종종 그런 일꾼들의 뒷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대답이 성에 차지 않은지 샤나일이 재촉했다.

" 그리고? "

" 예? "

" 다른 것은 없나? 처음 보았을 때는? "

" 저, 눈매나 표정 때문인지 얼핏 보았을 때 인상이 차가워 보이셨습니다. "

" 그래, 그렇지. "

 만족한 답을 얻은 듯 보이는 그를 보고 질마는 눈에 띄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평소에는 까다롭지 않은 주인이었건만, 요새 들어 이상했다. 간신히 안심한 그와 다르게 샤나일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시라 느칸다는 감정이 풍부하지 못한 여자였다. 꼭꼭 다문 입술과 살짝 올라간 눈매 덕택에 그녀는 마치 철옹성과 같은 느낌을 풍겼다. 바늘 하나 찔러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무미건조한 여자. 그것이 샤나일이 언약식 때 본 그녀의 감상평이었다. 물론 그녀는 반편이 행세할 적의 자신에게는 의외의 면모를 많이 보여주곤 했다. 반편이 행세로 어설픈 장난을 치면 미미하게 눈을 접어 웃어주었고, 부인이라 부르면 그 딱딱했던 철옹성이 무너질 듯 한 표정으로 부끄러워했다.

" 거짓, 거짓이라…. "

 그들 사이에 있어 진실이란 한 조각도 없어야 했다. 모래성과 같았던 관계는 샤나일이 손을 놓음으로써 휩쓸려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나이시라 역시 손을 놓을 것이라 한 점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끝내 텅 빈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제 남편과의 관계는 거짓되지 않았노라. 단지 죽었을 뿐이다. 그런 그녀를 보고 어리석다 욕하던 샤나일은 겨우 일 년 반만에 생긴 사소한 습관들 때문에 그녀를 잊지 못했다.

" 머리를 묶을 줄 아느냐? "

" 예? "

 적갈색 머리를 뒤로 묶고 있던 질마는 오늘따라 뜬구름 잡는 주인의 말에 당황했다. 반면에 그의 반응은 신경도 안 쓰는 샤나일은 괜한 질문을 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발길을 잃은 자신의 걸음을 보고 그는 더 딱딱하게 물었다.

" 왕비가 설화궁으로 옮겼다 들었다. "

" 예. 폐하께서 직접 명하신 일이라…. 다른 곳으로 옮길까요? "

" 되었다. "

 겨울이 되면 장관이 펼쳐진다는 설화궁은 현 황제의 여동생이 살았던 곳으로, 그녀가 죽고 나서는 주인이 없는 빈궁이었다. 그런 곳에 죄인이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며 샤나일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곧 있으면 초가을이라 그런지 제법 더위가 사라지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설화궁으로 거리낌 없이 들어간 샤나일은 나이시라가 있을 방문을 앞에 두고 멈칫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궁을 옮기라 명을 하면 되는 것을, 왜 온 것일까. 자문을 해보지만 마음속에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이유 모를 미련, 버리면 되지 않냐고 당당했던 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찾아가는 발걸음에 또 다시 답 없을 질문을 반복했다. 쓸데없는 시간 싸움에 정신 차린 듯 다시 되돌아가려 하는 그 때 방문을 열고 나오는 그녀가 보였다.

" 나는…. "

" 미천한 죄인이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

 진짜 죄인처럼 나이시라는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두 손으로 이마를 받치는 일반 예가 아닌, 이마를 바닥에 닿게 하는 극상의 예이자 죄인들이 올리는 예의 방식이었다. 법도대로라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는 입이 막혔다.

" …왕비가 올릴 예가 아닐 텐데. "

" 태자 전하께서 그러셨지 않습니까. 죄인이라고요."

 그랬다. 그가 먼저 그녀를 죄인 취급했다. 맞는 말이었지만 드는 반발심에 샤나일은 주먹을 쥐었다.

" 이곳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

 독방에서 새로운 궁으로 옮긴 열흘 동안, 그는 의식적으로 그곳을 찾지 않았다. 그런 그가 다시 모습을 보이자 나이시라는 또 말로 괴롭히러 온 것인가 싶어 냉담하게 그를 보았다.

" 죄인이라 하면서 호사스런 삶을 누리고 있구나. "

" 그리 불쾌하시면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기꺼이 명 따르겠습니다. "

 별 것 아닌 것처럼 진흙탕에 구르겠다고 하는 나이시라의 목소리는 마치 다른 이를 대하는 것처럼 음조가 사라졌다. 자신에게만 보여주던 그 소소했던 감정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남아있는 감정의 찌꺼기를 찾고자 그녀의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그러나 별 다른 느낌을 얻지 못한 그는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 언제까지 세워둘 참이냐. "

" …태자 전하의 입에 맞는 차가 이곳에는 없습니다. "

 간접적인 거절에도 미동도 없는 그를 보고서 나이시라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로 찾아와서 손님 노릇을 하는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바깥에서 대기하던 궁인이 다담상을 놓고 사라진 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방에 앉아 있는 그를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 왜 그렇게 보는 거지? "

" 도대체 무슨 용무로 오신 겁니까. 제 자백을 받아내려 오셨습니까? 아니면 죄인을 데리고 조롱이라도 할 참이신지요. "

" 하, 건방지게 입을 놀리는 건 변하지 않는가 보군. 스스로 죄인 행세를 한다더니 네가 지금 나를 비꼬는 것이냐? "

" 이미 진창을 구를 각오를 하였는데 무엇이 무섭겠습니까. 애초에 꼴 보기 싫다 하시던 분은 전하가 아니십니까. 왜 굳이 그 귀한 발걸음, 이리로 오게 하신 겝니까. "

" 너는! "

 쥐고 있던 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샤나일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외쳤던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이내 낮은 어조로 사납게 말했다.

" 너는 왜 그리 독한 것이냐. 네 입장을 잊었나? 네가 꾸민 짓을 내가 다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건가. 내 발밑에서 빌어볼 생각은 안 들더냐! 살려달라고, 아무 일도 없던 것으로 덮어달라고! "

" 제가 빌기를 바라셨습니까? "

" 그래! "

" 빌었으면, 덮어주시기라도 하실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

 나이시라는 차게 웃었다. 진실을 말해도 구걸로 치부하던 이였다. 눈감고 빌었다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그녀는 장담할 수 있었다.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매한가지였으리라고.

 조롱의 웃음을 서슴지 않는 그녀의 반응에 그는 일그러뜨렸던 표정을 풀고 허탈하게 웃었다.

" 참, 독해. 어찌 이리 독할 수가 있어. "

 마치 놀란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 독하게 만드신 것은 전하가 아니십니까? "

 부왕에게 존재를 들킬 각오를 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갈 각오까지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냉대와 죄인의 낙인 뿐. 그의 눈에서는 경멸이 떠나지 않았고 입에서는 상처를 헤집는 말 뿐이었다. 그런 그가 독하다고 비난한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그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평소에 그렇게 짓고 싶었던 미소를 원 없이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가짜로 웃음 짓는 것이 이렇게도 쉬웠음을 왜 예전에는 몰랐던 것일까.

" 다 전하의 은덕입니다. 이, 모든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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