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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6 상실 (6/59)

00006  상실  =========================================================================

 모든 일들이 순풍에 돛을 단 듯 수월하게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미날란과 내통했다는 완벽한 증거를 가지고 결왕은 귀족들의 반발에 황태자 자리를 박탈당하고 죄인의 신세가 되었다. 도와줄 외척도,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도 없어진 그는 반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별궁에 갇혔다. 남은 것은 우왕 샤나일이 그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오로지 나이시라의 상황만이 나빴을 뿐.

" 몇 명이나 붙었더냐. "

" 공개적으로는 일곱입니다만, 숨은 놈들을 합하면 열 넷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는 위리든 소속이었던 자도 있었습니다. "

 나이시라는 궁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암살 위협을 받았다. 자신의 남편에게서. 실력자였던 암살자들이 허무하게 물러간 것에 의아했던 그녀는 다음 날이 되서 깨달을 수 있었다. 암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허울 좋은 구실을 이용해 호위를 가장한 감시를 공개적으로 붙인 것이다.

" 가실 것입니까? "

" 가야지. 내 남편의 책봉식이니 당연히 가야지. "

 고대하던 그의 책봉식 날, 그녀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방 안에 갇힌 셈이다. 암살의 충격으로 몸져누웠다는 것이 대외적인 변명거리였고, 사실상 그에게서는 이미 죄인취급이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보고 싶었다. 자신의 남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는 모습을, 웃는 모습을, 지존의 자리에 당당히 서는 모습을.

 얼굴을 가리기 위해 베일이 달린 모자를 눌러 쓴 그녀는 평범한 귀족 여식가로 둔갑했다. 수많은 귀족들이 새로운 황태자를 맞이하기 위해 궁 안으로 몰려들 것이다. 멀리서나마 모습을 훔쳐보면 들키진 않으리라.

" 가시지요. "

 사뿐히 그의 손을 잡고 선 나이시라는 좀처럼의 두근거림에 긴장까지 느꼈다. 안개처럼 소리 없이 흩어진 그들은 방 밖에 세워진 감시자들을 따돌리고 막 식이 끝나려는 궁 중앙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보내는 경외의 시선 끝에 서있는 그가 보였다. 금빛 찬란한 수가 새겨진 푸른 비단으로 몸을 휘감은 그는 더 없이 고결하고 깨끗해보였다. 홀로 빛나는 그 모습에 나이시라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핏 눈이 마주친 듯싶었다.

" 궁주? "

" 아니, 아니다. "

 착각한 것이겠거니 싶었던 나이시라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다시 샤나일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군중들 사이, 그저 스쳐지나가듯 마주친 거라며 속으로 되뇌었다. 그런 그녀를 비웃듯 그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얼굴을 가렸는데 그가 어떻게….

 그녀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작 눈이 마주친 것일 뿐인데도 그 작은 기대가 금방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커진 기대는 곧 설렘으로 변했고, 무참히 부서져 내렸다. 단 한조각도 남김없이.

 일신은 기어이 울었다. 온 몸 성한 곳 없이 매질 당하고, 고문당한 그녀의 모습에 참아야 했던 눈물을 보였다. 나머지 수족들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분개해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 고통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꿋꿋이 내민 손들을 거절하며 상황을 받아들였다.

" 무엇이 궁주를 이렇게 만드시는 겁니까? 도대체 무엇이요! 남편의 책봉식을 보러가겠다고 잠시 빠져나간 이유만으로 사람을 이리 만들 순 없습니다. 이리 만들 순 없어요. 제발… 제발 도망갑시다. "

" 애초에 명을 어긴 내 잘못이다, 일신. "

" 왜 그리 미련스러우십니까. 뭐가 더 남았길래… 얼마나 더 고통 받으시려고…. "

 다시금 눈물을 보일 것 같아 일신은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자신이 울어서는 안 된다. 눈물로 강을 이루어도 모자랄 것 같은 제 주인은 한 방울 보이지도 않는데 자신이 그럴 수는 없었다.

" 마음이 바뀌시면 주저 없이 불러주십시오. "

 그는 절대로 자신들을 부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불러주길 바래서 헛된 말을 남겨놓았다. 알았다고, 고맙다고 작게 인사하는 그녀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주인이고 명령이고 무시하고 데리고 도망치고 싶었기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던 그는 작별인사처럼 그녀의 행복을 기원했다. 웃을 수 있기를….

 독방에 홀로 남은 나이시라는 누군가에 말을 걸듯 이야기했다.

" 보이십니까? 곧 조상님 뵈러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우습게 되었지요. 기껏 힘도 보태주셨는데 복수는커녕 명줄도 짧아선. "

 그녀는 직감적으로 고문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알았다. 필히 느칸다와 관련시켜 첩자란 증거를 찾아낼 것이다.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던 그의 성미로 보아선 가만히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순식간에 드리슬란을 제 것으로 삼키고 느칸다까지 손에 넣으려 할 것이다.

 그런 그녀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명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시작된 고문은 변질되어 느칸다와 내통한 사실을 불라는 것에 이르렀다. 하루가 다르게 피말라가는 그녀는 고통스러운 육신보다도 옆에서 비참하게 만드는 샤나일 때문에 더 힘들어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작시아가 결국 답답함에 입을 열었다.

" 언제까지 당하고 있을 참이십니까? 이러다 정녕 죽겠습니다! "

" 언제는, 나보고 오래오래… 살 것이라 하더니. "

 버석거리며 메마른 그녀의 입술에 물통을 가져다준 작시아는 상처가 난 곳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받는 매질에 상처 곳곳이 더 벌어져 있었다.

" 이제라도 사실을 말하는 건 어떻습니까? "

" …모든 것을 얘기하란 말이냐. "

" 무엇이 문젭니까. 어차피 유배를 가장해서 떠날 몸이셨잖습니까. 오해를 풀고 몸 성히 떠나는 게 어때서요? 이런 꼴로 계속 있으시다간 정말 큰일 나겠습니다. "

 몸도 마음도 약해졌던 그녀는 부정하지 못했다. 오해를 풀지 않고 떠나면, 그가 홀가분히 자신을 보내 주리라 생각했었다. 모든 것을 다 말했다가 혹여 자신을 잡지는 않을까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매일 자신을 상처 주는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흔들렸다. 모든 것을 말한다면, 자신을 알아줄 것인가. 오히려 고맙다며 미안하다며 좋은 이별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신의 말대로 그녀는 정말 미련스러웠던 것인지 또 다시 찾아온 작은 기대 조각들을 그러모았다. 그러나 그러모은 조각들을 품에 안은 그녀를 본 샤나일은 냉담했다.

" 차라리 목숨을 구걸하는 게 어떻나. "

" 무슨…. "

" 왕비라는 자가 살기위해 구차하게 소설을 쓸 줄은 몰랐군. 그렇게도 태자비의 자리가 탐이 났나? 기가 막히는군. 날 살리기 위해서라? "

 조각들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고 그녀는 딱딱하게 굳었다. 뒤로 묶인 손이 가냘프게 떨렸다. 자신의 모든 결정을 부인하는 그가 남편처럼 보이지 않았다. 연유가 있어 반편이 행세를 했다고 힘들게나마 이해하려던 자신과는 달리 그는 칼날같이 그녀를 잘라내고 있었다.

 나이시라는 터진 입술을 또 깨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 하나, 하나만 묻겠습니다. "

 제발 아니기를, 그건 아니었다고 대답하기를.

" 모든 것이 거짓이었습니까? "

 샤나일이 웃었다.

" 당연한 것을 묻는군. "

 멍청하기까지 한 거냐, 작게 비웃으며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독방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본 나이시라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막힐 힘이 없어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나서야 그녀는 인정할 수 있었다. 자신의 남편은, 샨은 죽고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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