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2 상실 =========================================================================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네번째 황자였던 안시왕은 신년 사냥대회에서 낙마해 명을 달리했고, 미작왕 역시 지병이 악화되어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그 밑의 몇몇 황자들은 아직 유학 중에 있거나, 너무 어려 견제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자신의 남편이 황태자로 책봉됐음에도 불안함을 못떨쳐 제 손으로 무덤을 판 칸나 왕비는 소리소문 없이 수족들이 죽어나가는 기괴한 경험을 겪어야 했다.
" 어찌 해 아무 소식이 없는 게야! "
와장창하고 보랏빛 화병이 곱디고운 손에 밀쳐져 산산조각이 났다. 자신의 발치에 떨어져 늘어진 꽃을 보며 궁녀 하나가 벌벌거리며 입을 열었다.
" 비,비전하. 고정하십시오. 다시한번 연락을 해보심이, "
" 니깟 년이 무얼 안다고 조잘조잘 거리는 것이야! "
종이가 찢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칸나 왕비의 손에 뺨을 맞은 어린 궁녀는 마치 떨어져 나간 꽃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 지 그녀는 씩씩 거리며 방이 떠나가라 악을 썼다.
" 여태 보냈던 이들 이 뉜데! 천하에 다시는 없을 무인들이었다! 세상이 두 쪽이 나더라도 살아 돌아와야 하는 놈들이란 말이다! "
" 태자비전하께오서는 아직 모르셨나봅니다. "
급작스레 뒤에서 들려오는 냉담한 소리에, 칸나 왕비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 뒤에는 소리 없이 다가온 내가 있었다.
" 여,여긴 어쩐 일이오? 나이시라 왕비."
" 아직 비전하께서 모르고 계신듯 하여, 직접 고하러 왔나이다. "
그 뻣뻣한 태도 좀 고치라 손찌검을 해봐도 달라지지 않던 나의 나긋나긋한 모습에, 칸나 왕비는 본능적으로 몸을 잠시 움츠렸다. 그러다 이내 그 불같은 자존심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는지 다시 허리를 세우고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 이 내가 무얼 모르기에 무례하게 찾아왔단 말이오? "
" 열흘 전 쯤, 제가 기거하던 궁에 날벌레 몇 마리가 날아오더이다. 제법 날쌔기는 하였으나 잡는 데 무리는 없었지요. "
" 하, 그 추잡스런 담궁이라면 내 이해가 갑니다. 그러길래 진즉에, "
" 혹여. "
내가 살던 궁의 빈곤한 처지를 한탄하러 온 줄 알았던 칸나 왕비는 자신의 팔을 잡아채어 끌어당기는 내 무력에 얼떨결에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각인시키듯 작게 얘기했다.
" 혹여, 비 마마의 궁에 들어올까 걱정이 되어 찾아온 겝니다. 자신들이 천하제일 무인인 줄 아는 날벌레들이요. "
" 네…네 년이었구나. 네 년이! "
습관처럼 손을 드는 그녀의 작태에 한심한 눈길을 보내던 나는 가볍게 그 손목을 낚아챘다. 평생 운동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듯, 가냘픈데다 힘을 조금만 줘도 부러질 것 같은 손목이다.
나는 황후가 되기 위해 평생을 살아온 이에게 잔인하게 속삭였다.
" 네 세상은 이미 두 쪽 났다는 걸 알려주러 왔다, 칸나 왕비. 이 걸로 너와도 마지막이겠지. 네 두 손으로 판 무덤 속이니, 후회는 말아라. "
" 아니 된다! 아니… 아니 된단 말이다! "
뺨을 맞고 쓰러져있던 궁녀는 어느 새 멀쩡히 제 주인의 입과 손, 발목을 묶기 시작했다. 이제 열 넷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는 무섭도록 여인 하나를 가볍게 제압했고, 칭찬을 기다리는 듯 똘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후후 웃으며 소녀의 뺨을 쓰다듬는 것으로 감사를 표했다.
" 그 동안 수고했다, 타린. "
" 궁주, 나 그때 회의에 못 갔는데 맹세 깨졌담서요? "
" …여전히 직설적이구나. 그래, 알려준 건 이리아더냐. "
" 이리아 언니는 아직 상단일 때문에 드리슬란에 없구, 호란태 아저씨가 말해주던 걸요. 어쩌려고 그래요? 맹세는 이제 고작 한번 남았어요. "
세 번의 맹세와, 그 대가로 얻는 힘. 자신은 이미 두 번의 맹세를 깨트렸고 그 덕택에 남은 사슬은 고작 하나다. 꼭 양날의 검과 같지 않은가.
나는 어릴 적부터 내 일생의 목표를 복수로 삼고 살아왔다. 그러나 왕에게 버려진 자식이 어떻게 제대로 크겠는가. 친어미는 이미 그 냉대에 목숨이 바스라졌고 남은 것은 고작 나 하나였다. 홀로 남은 다섯 살짜리 아이가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왕을 이길 수 있을 리 없겠지 만은, 그 어렸던 나는 무슨 생각인지 마치 꿈을 꾸면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열렬히 증오심에 불타올랐다.
그렇게 힘은 없는 채 원대한 꿈만 꾸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채 일곱 살이 되기 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다른 공주와 왕자와는 다르게 허물어져가는 궁에서 살고 있었다. 그 궁 안은 낡아빠진 외관과는 다르게 매우 넓었는데, 시간이 남아돌았던 난 마치 탐험하듯 궁 내부를 뛰어다녔다.
그날따라 힘이 넘쳤던 것인지, 낮이건 밤이건 어두워서 좀체 가볼 생각 못했던 궁 뒤편 사당까지 늦은 시간에 쿵쾅거리며 뛰어다닐 때였다.
[시끄럽다 이눔아!]
벼락이 내려치듯 웅장한 소리에 사당이 다 뒤흔들릴 정도였다. 그때의 나는 천지분간을 못하는 터라 떨리는 와중에도 겁 없이 소리쳤다.
" 뉘, 뉘십니까! 사…산 사람이라면 모습을…. "
어린 계집아이의 소리가 울려 퍼지자 요란하게 웃어젖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작달만한 꼬마의 외침이 장히도 가소로운 모양이다. 나는 그 큰 웃음소리를 듣고 서야 이곳이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라는 것을 깨닫고 오들오들 떨었다. 설마 조상이 제 후손을 해하랴. 그것 하나만 믿고 떨리는 와중에 도망갈 생각을 놓았다. 아닌 척 복수심이 가득 차 보였다 해도, 외로움을 잔뜩 느끼는 아이였으니.
[그것 참 담대한 계집이렷다. 이 나를 깨웠으니 이름자나 물어보자.]
" 11대 손, 이실리아 후비 소생 나,나이시라라고 합니다. "
[ 흠. 아비의 이름은 어디 갔다 팔았누? ]
가장 앞에 나왔어야할 아비의 이름을 꿀꺽 삼켰던 나는, 도로 뱉어내라는 조상의 말에 어찌할 줄 모르고 눈동자만 흔들거렸다. 캐물을 생각이 없었던 조상님은 스스로가 뿌듯한지 자랑스레 자신을 소개했다.
[ 이 느칸다의 시조, 천왕 느칸다를 만난 것을 영광으로 여기거라, 꼬맹아! ]
" 예, 예? "
[ 보기보다 덜 떨어졌구만, 이 내가 느칸다란 말이렷다. ]
" 느칸다는… 우리나라 이름인데요? "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그 적막이 심상치 않아 안 그래도 쪼그라들었던 심장은 더 쪼그라들어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결국엔 그 적막을 순식간에 몰아칠 호통소리가 곧 들려왔다.
[ 공부는 하고 있는 게야! 어찌 옹주가 제 나라 시조가 누군지도 몰라! ]
" 자…잘못 했어요. "
애초에 교육 담당이 주어지지 않았으니 무지몽매했던 것은, 내 탓이 아니라고 아직까지도 못내 책임을 회피하고 만다. 낡아빠진 궁에 틀어박혀 사회와 단절이 되었는데 기본 상식이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말을 뗀 것만으로도 나는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훈육관들은 대체 무얼 하는 겐지…. ]
" 저… 훈육관이 뭐지요? "
[ 널 가르치는 사람! 너에게 하나하나 알려주는 이 말이다! ]
" 그런 사람… 없는데요? "
그게 인연이 되었다. 몇 백년 만에 깨어났다는 조상님은 박학다식하기 이를 데 없었고 백짓장 같았던 나는 그가 흘려주는 지식들을 담아내기 바빴다.
내가 궁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처음으로 내게 양어미란 존재가 생겼을 당시였다. 열 넷쯤 되었나.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부왕의 냉대와 위협 속에서 외줄타기 하듯 하루를 살아갈 시기였다. 나는 그렇게 신경이 닳을 듯한 하루를 이겨내면 꼭 사당에 가서 조상님과 담소를 나누곤 했다.
[ 네 아비는 왜 그런다냐. ]
그 날은 유난히 목이 조른 자국이 심했을 때였다. 속이 상한 듯 퉁명스레 말을 걸어주는 그의 한마디가 내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를 것이다. 나는 평소 그답지 않은 낮은 어조에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보였다.
" 내가 어찌 알리오. 그냥저냥 사는 게지요. "
그 말은 거짓이었다. 나는 정확히 아비가 미친 것처럼 나만 보면 죽이려드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음울한 과거사를 읊기엔 아직 나는 어렸고, 그 사실을 소리내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랬기에 항상 애써 모른 척 넘어가고만 있었다.
조상님은 아직 앳된 모습의 내가 애늙은이의 말을 할 때마다 그랬듯 이번에도 혀를 쯧쯧 찼다.
[ 열 넷짜리가 하는 말 하곤…. 복수하고 싶다더니, 요즘에는 어째 잠잠하구나. 이제는 포기했더냐? ]
당연히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복수라는 것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때부터 원했던 것이었고, 그 자체가 나를 삶으로 이끄는 원동력이었으니까. 복수를 하고 난뒤, 혹은 복수를 실패했을 경우를 애초에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지 않았을 정도다.
" 언제는 제가 포기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까. 나를 갉아먹는, 득 될 것 없는 일이라고 한사코 말리시더니. 이제는 하기를 바라십니까? "
[ 그래. ]
" …요새 들어 번번이 저를 놀라게 하십니다. "
그 옛날, 나라를 세우기 전 진창과도 같았을 삶을 살았던 느칸다는 내게 복수를 포기하라 틈만 나면 종용하곤 했다. 나는 들은 척도 안했지만, 오늘 같은 대답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결과다.
나는 평소 때보다 심한 상처에 그가 단순히 속이 상해서 그런 걸로만 알았다.
" 안타깝게 그럴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참 한심하지요. "
[ 내가 도와주마. ]
" …어찌요? 사당에 매인 몸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
[ 내가 내 힘으로만 나라를 세운 것 같더냐. ]
허풍이라고 무시하기에는 진중하기 짝이 없는 말투다. 내게 복수로 장난칠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 나는 이 길이 잘못 될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대외적으로 잠잠한 이 나라가 내 결정 하나로 망가질지도 모르지. 그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될 이유가 수십 가진데 그러고 싶다는 것은 결국 해야 하지 않겠느냐. ]
그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면, 왠지 씩하고 웃었을 것만 같다. 나는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복수를 잊지 못합니다. 그럴 성격이 못됩니다. 당신이 세운 나라, 내 욕심에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
[ 애초에 그리 무너질 나라였다면 진즉에 무너졌어야 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구나. 넌 세 번의 맹세로 세 번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한 번의 맹세를 할 때마다 네 힘이 되어줄 수족들이 깨어나겠지. 그러나 명심해라. 네가 한 맹세들이 모조리 깨진다면 네 육신도 부서져 내릴 것이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
장담컨대, 망설임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또래보다 성숙했다하나 나는 열 넷 치기어린 소녀였고, 무력한 자신을 단 한순간에 강하게 만들어줄 유혹적인 제안을 뿌리칠 성인이 되지 못하였다.
[ 네게 힘을 넘겨주기 위해 깨어난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과연! 종궁의 주인이 내 뒤를 이을 것이라 하더니, 이 말이렷다! ]
혼자 깨달음을 얻은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임을 알아챘고, 마치 혼자 작별인사를 하듯 조용히 말했다.
" 먼저 가서 기다려주십시오. "
[ 에비, 일찍 올 생각도 하지 마라. 내 쫓아낼 터이니. ]
저승 문턱에서 발로 걷어찰 거라며 투덜거리는 그는, 마지막까지 그다웠다. 그리고 나는 그와 헤어지는 그 순간 첫 번째로 맹세를, 내 육신에 남겨질 사슬을 아로새겼다.
절대 복수를 포기 하지 않으리라. 독주를 삼키듯 다짐했던 내 첫번째 맹세는 눈 앞의 진귀한 광경을 만들어내었다.
" 일신, 궁주를 뵙습니다. "
" 어잉, 여기가 어디다냐. "
" 앞에 궁주 계시잖아, 멍청아. 작시아라고 합니다, 궁주. "
" 이것 참, 신기한 일이군. 호란태라 하오. "
쏟아지듯 내 눈앞에서 옹기종기 모여든 여섯 명의 이들은 갑작스레 바뀐 풍경이 낯선지 어리둥절한 눈치다. 그 와중에도 몇몇은 깍듯이 인사를 해 올린다. 그들은 내가 누군지 알고나 이러는 것일까? 아무렴 어떠하랴. 난생 처음으로 내 사람이 생긴 나는 근심 없이 웃어 보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