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2/42)

3.

활짝 열린 통유리창 사이로 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온다. 하얀 시폰 커튼이 햇빛을 머금은 채 바람결을 따라 느리게 춤을 추었고 산뜻한 꽃내음이 기분 좋게 퍼졌다.

나는 푸르름을 머금은 야외 정원을 조용히 눈에 담았다. 얼마 만에 황궁에서 느껴보는 여유인지 모르겠다.

나와 애쉬는 일에 치여 살다가도 며칠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기면 곧장 짐을 챙기고 시중들 하인도 없이 수도를 떠났다.

무작정 떠난 우리의 목적지는 주로 내가 책이나 신문을 통해 보았던 곳들이었다. 관광지를 갈 때도 있었고, 총가구 수가 서른 가구가 안 되는 작은 외딴 마을에 갈 때도 있었다.

애쉬는 나와 여행 스타일부터 좋아하는 계절, 좋아하는 음식까지 신기할 정도로 잘 맞았기에 내 결정에 늘 만족해했다.

한 번은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극지방으로 떠난 적이 있었다. 마을 전체가 두꺼운 목화솜 이불을 덮고 있는 것 같은 풍경에, 밤엔 별이 쏟아질 것처럼 아름답고 장엄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서 애쉬와 함께 하루 종일 눈을 밟으면서 발자국을 만들었다. 딱히 모시는 신은 없지만, 이 하얀 마을을 보살피는 신의 신전도 가보고 고위도 지방에서만 볼 수 있다는 오로라를 보기 위해 밤새 걸어 다니기도 했다. 태어나서 가장 많이 걸었던 날이었다.

아쉽게도 오로라는 보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어서 후회는 없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황궁에 돌아온 후 쥬디퍼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폐하께선 추운 것도 질색하시고, 자연 풍경이든 명소든 구경하기 위해 걷는 것을 조금도 이해 못 하는 놈… 아니, 분이십니다. 감성이 메말랐다고 할 수 있죠. 같은 피를 타고 태어났지만 가끔 그 자식, 아니… 폐하의 몸속에는 쇳물이 흐르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기회가 되실 때 날카로운 것으로 한번 찔러 보…….”

쥬디퍼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애쉬는 관광차 걷는 것을 이해 못 하는 놈이니까 여기저기 데려가도 시간낭비라고만 생각할 거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 우리의 뒤를 따랐던 근위 기사 중 한 명이 종일 관광지나 돌아다니자고 무술을 갈고닦은 게 아니라며, 차라리 전장으로 보내 달라고 하더라. 라는 거였다.

나는 애쉬가 추운 것과 걷는 것을 싫어하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쉬에게 “여기서 부는 바람은 수도랑 다른 것 같아. 너무 좋다. 아닌가, 너무 춥나?”라고 물어보면 “좋아요. 저도 엄청 좋아요.”라고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답했기 때문이다.

걷는 것도 마찬가지였고. 게다가 난 근위 기사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만일 쥬디퍼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음 여행 때는 애쉬의 취향을 고려하여 일정을 짜야 했다. 애쉬에게 솔직히 얘기해 달라고 말하자, 애쉬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돌연 달라진 그의 분위기에 나도 잠시 멈칫했으나 애쉬는 평상시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어투로 말을 이었다.

“선배도 알다시피 제가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잖아요. 어렸을 때 형님은 밖에서 원숭이처럼 나무에 오르거나 밥보다 흙먼지를 더 많이 퍼먹고 살았지만 저는 도서관에서 얌전히 책 읽는 걸 더 좋아했어요.”

아카데미 시절 하고 다닌 꼬라지만 봐도 그가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주위에서 애쉬를 가만히 두지 않아서 난리였지, 정작 애쉬는 무언가 나서서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선배 덕에 책보다 더 재미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선배랑 같이 소금 평원에 간 것도 좋았고, 반딧불 동굴에 들어갔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라요.”

“그럼 다행이네. 나는 네가 나 때문에 억지로 좋아하는 척하는 줄 알았어.”

“저는 선배에게 언제나 진심이죠.”

“그래도 싫은 게 있으면 바로 얘기해. 날이 너무 춥다거나 그럴 때.”

“꼭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지금까지는 선배랑 같이 있던 모든 순간이 다 행복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역시 애쉬에게 직접 물어보길 잘했다. 괜히 혼자 찜찜해 할 뻔했네. 이 일 이후에도 우리는 시간이 맞으면 종종 여행을 갔고, 황궁으로 돌아가야 하는 전날 밤에는 아쉬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즐거웠다.

나와 애쉬 둘 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여행이건만, 이번 휴일은 황궁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동맹국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여 애쉬가 여러 가지로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많았고, 마도구의 보편화를 위한 연구 결과들이 매일같이 애쉬의 집무실 책상에 올라왔다. 거기에 해상 무역의 통로가 될 운하 건설까지 앞으로 한 걸음이 남은 시점이라 그쪽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애쉬는 작년부터 황제 자리를 쥬디퍼에게 넘겨주기 위한 절차를 밟아오고 있었다. 자기 선에서 해결해야 할 것들을 전부 정리한 후 대내외적으로 큰 파장 없이 황좌에서 내려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자는 시간도 모자랄 정도로 이래저래 바쁜 매일을 보내고 있어서, 이렇게 차를 마시며 노닥거릴 수 있는 시간도 겨우 하루 만들어낸 거다. 이 소중한 휴일만큼은 편안하게 황궁에서 쉬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갑자기 떠오른 기억들을 되짚어 보느라 내 앞에 애쉬가 앉아있다는 것을 잠깐 잊었다. 얼굴이 뚫릴 정도로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애쉬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꼬리를 접으며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그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꽃이 여기도 있네.”

“선배가 관심을 안 주셔서 말라 죽을 뻔했어요.”

“엄살은.”

“이제 황좌에서 내려오면 저는 종일 집에서 선배만 기다리는 신세가 될 텐데… 저를 너무 오래 혼자 두지 말아요.”

애쉬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내 손등을 검지로 가볍게 건드렸다. 나는 단정하게 정돈된 그의 손끝을 보다가 푸스스 웃었다.

“저는 진심이에요.”

“그래. 너는 항상 나한테 진심이라며.”

“흘려듣지 말아요.”

“내가 흘려들을 수도 있지.”

“그렇죠. 그래도 조금만 더 저를… 가여워해 주세요.”

사랑해 달라는 것도 아니라 가여워해 달란다. 가끔 애쉬는 우리가 갑을 관계가 아니라 부부 사이라는 것을 잊는 것 같기도 하다. 대체 저놈의 머릿속에 나는 어떤 존재로 자리하고 있는 걸까. 나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애쉬의 머릿속을 이해하기에 역부족이었다.

“혼자 있는 게 심심하면 부업이라도 해. 이제 나 혼자 널 먹여 살려야 하는데 내가 얼마나 부담이 크겠어? 인형 눈알을 오백 개쯤 붙이다 보면 얼추 내가 퇴근할 시간이랑 맞겠다.”

물론 돈이라면 단순히 ‘많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넘쳤다. 애쉬의 재산은 정확한 숫자로 표기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내가 알뜰살뜰 모은 재산도 적다고 할 순 없지만 애쉬가 바다라면 내 재산은 바다에 물 한 컵을 섞은 정도였다.

애쉬는 나와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황좌를 포기했지만 나는 극단을 그만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애쉬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일을 하면서 얻는 성취감과 사랑은 별개다.

백여 명의 하인이 거주하는 대저택에서 홀로 인형 눈알 붙이기를 하고 있을 애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애쉬는 가만히 눈을 뜬 채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인형 눈알은 왜요?”

“어?”

“가지고 싶은 인형이 있으세요? 당장 사람을 시켜서 500개를 사오라고 할게요. 아니, 지금 같이 나갈까요?”

“…….”

애쉬는 이 빈곤한 농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배?”

“…아니야. 그냥 너 이제 백수니까 놀리려고 한 말이었어.”

“아… 역시. 직업이 없는 남자는 한심하죠. 제가 그 생각을 미처 못했어요. 죄송해요.”

“네 경력으로는 이직도 힘들어. 재능을 살려서 마탑에 들어가면 좋겠지만, 마탑이 미쳤다고 상황제를 받아주겠어.”

“…맞는 말씀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백수인 너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집에만 있어도 좋아.”

“선배…….”

내가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얘기하자 애쉬가 감동받은 듯이 눈을 빛냈다. 애쉬도 내 말이 장난이라는 것을 알 텐데, 왜 저렇게까지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급기야 그의 커다란 두 눈이 촉촉해졌다.

“역시 저를 이만큼이나 사랑해주는 건 선배밖에 없어요.”

“그래, 그래. 나 아니면 누가 너를 데리고 살겠어.”

“없어요. 선배가 유일해요.”

애쉬는 사랑이 뚝뚝 흘러넘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슴처럼 빛나는 안광이 참 예쁘다고 생각하면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 그러고 보니까 요즘 안토니가 안 보이네.”

극단 일 때문에 황궁 밖으로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애쉬는 자신의 친위대를 내게 붙여주었다. 내 말이면 뭐든 “네, 네. 선배 말이 다 맞아요.” 하는 애쉬가 드물게 고집을 피운 일이기도 하다.

친위대의 은신 실력이 워낙 뛰어난 탓에 나조차 친위대가 붙어있다는 것을 종종 잊어버리곤 했다. 그만큼 존재가 크게 거슬리지 않았기에 이것만큼은 애쉬가 하자는 대로 하게 해주었다.

친위대와의 동행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니 나중에 가서는 ‘사라’와 ‘안토니’랑은 편하게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안토니가 보이지 않았다.

사라에게 물어도 “혀를 잘못 놀린 죄를 받으러 갔습니다.”라고만 답할 뿐이었다. 내가 끈질기게 추궁하면 “계속 물어보시면 저도 사라질지 몰라요.” 하면서 우울하게 말하길래 더는 묻지 못했었다.

“본인이 원하는 곳이 있길래 그쪽으로 보냈어요.”

“어디?”

“히헬로 광산이요.”

“거기… 마수가 득실거리는 곳 아니야? 정말 거길 원해서 갔다고?”

“평화로운 황성은 싫다나 봐요. 알아서 잘 죽겠죠. 그런 거에 관심주지 마요. 지금도 정원의 꽃을 다 불태우고, 그놈의 심장을 뽑아내서 치워버리고 싶으니까.”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새들이 푸드덕 날갯짓을 하면서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새 소리 때문에 애쉬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상체를 앞으로 빼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잘 못 들었어. 뭐?”

애쉬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내 손등을 살짝 건드리고 물러났던 그의 검지가 이번엔 내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른다. 입술이 아래로 벌어지면서 안쪽의 연한 살이 드러나는 게 느껴졌다.

“여기에 좆 비비고 싶다고요.”

* * *

“흐읍……! 아, 자, 잠깐만.”

급하게 벗어 던진 옷들이 침실 문에서부터 침대까지 뱀 허물처럼 길게 늘어졌다. 한가로이 티타임을 즐기던 애쉬가 갑자기 어느 부분에서 흥분한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애쉬가 분위기를 잡기가 무섭게 휘말려버린 나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넓은 창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온전히 애쉬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고개가 창 쪽으로 돌아가려 할 때마다 큼지막한 손이 내 턱을 우악스럽게 쥐어 고정했다. 양 볼을 누르는 손길 때문에 입이 강제로 벌어지고 그 안으로 거친 숨결과 함께 혓바닥이 밀려 들어왔다.

“하읍……. 아!”

“더 벌려요. 제가 핥아드릴 수 있게.”

“읍, 애쉬, 아파…….”

혀뿌리를 뽑아낼 것처럼 거칠게 빨아들이는 압력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아파하자 애쉬가 입술을 옮겨 내 뺨을 지분거렸다. 길게 이어진 타액이 입가 전체에 문질러지자 끈적한 열기를 더해갔다.

“하아, 하아…….”

무자비하게 씹히고 빨린 입술이 퉁퉁 부은 것이 느껴졌다. 입술에서 퍼지는 은근한 열감과 통각이 키스의 여운을 진하게 남기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모자랐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고 있는데, 예고도 없이 입과 질척한 다리 사이로 손가락이 동시에 파고들었다.

“우읍, 야, 애쉬… 아!”

날 선 쾌감이 불시에 머리끝까지 확 번져왔다. 놀라서 몸을 바르작 떨자 애쉬는 기꺼운 듯이 한껏 예민해진 내 귓가에 만족스러운 숨을 터뜨렸다.

“소리 내요.”

“우음, 아, 바, 밖에, 커, 튼.”

말을 할 때마다 혓바닥 사이로 길쭉한 손가락이 감겨들었다. 손가락을 피해 혀를 살짝 움직이자 단단한 손가락이 음핵을 콱 짓눌렀다.

“…아! 아, 흐으, 애쉬, 아!”

저릿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등골을 아찔하게 만든다. 순간적으로 놀란 몸이 뻣뻣하게 굳자 애쉬가 기다렸다는 듯이 질 안으로 손가락 개수를 늘렸다. 그의 팔뚝이 거칠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찔걱찔걱. 젖은 소리가 음란하게 퍼지면서 침실의 천장과 벽 그리고 창문 너머까지 튀어 나갔다.

“하윽, 아, 그만……! 그마안! 웁!”

몰아치는 쾌감에 허벅지 안쪽이 덜덜 떨려온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액이 흘러나와 엉덩이와 허벅지를 축축하게 적시는 게 느껴지고 머리는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나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애쉬의 팔뚝을 잡고 제발 멈춰달라고 사정했다.

“들려요? 선배 젖은 소리.”

“아흣, 제발, 아……!”

“야해요.”

“흐으으”

“더 크게 울어줘요. 선배 물소리 때문에 목소리가 안 들려.”

“니가 멈추면 되잖… 아!”

멈추라는 말에 애쉬는 오히려 손가락을 하나 더 넣었다. 그의 손이 빠듯하게 내벽을 벌리고 들어온 거로 모자라 음부 사이에 엄지를 밀어 넣고 손을 털듯이 움직인다. 음핵과 함께 질 안쪽이 자극되자 나도 모르게 정신을 놓을 것처럼 신음을 내뱉었다.

“갈 것, 같……. 아! 아!”

사납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쾌감에 울며 자지러지는 내 모습을 응시한다. 그리고 탐구하듯이 벌어진 내 볼 안쪽 살을 손끝으로 쓸고 혀를 툭툭 건드렸다.

애쉬는 내 입가로 흘러내린 타액을 손가락으로 쓸어오더니 자연스럽게 제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애쉬가 타액을 훔쳐 먹든 말든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창문이 활짝 열려있다는 것도 잊고 이성을 송두리째 덮쳐오는 감각에 몸부림쳤다.

돌연 애쉬가 상체를 세웠다. 아래를 가득 채우고 있던 손가락이 한꺼번에 빠져나가자 내 발가락이 전부 곱아들었다.

“흐윽, 하으으…….”

그는 힘이 바짝 들어간 내 아랫배부터 늑골까지 쓸어 올리고는 가슴을 쥐었다. 흥분 때문에 꼿꼿하게 솟아있는 유두 위로 그의 얼굴이 내려앉는다. 습하고 뜨거운 입 안으로 유두가 빨려 들어가자 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거친 쾌감의 파도에 휩쓸렸다.

애쉬는 일부러 쪽쪽 소리를 내며 젖꼭지를 빨았다.

“하윽… 너 진짜……!”

그가 물고 있던 젖꼭지를 혀로 밀어서 내뱉은 후에 나를 올려다보았다.

“싫으세요?”

애쉬는 물어놓고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혀를 길게 내어 혀끝으로 유두를 톡, 톡 건드렸다. 치아로 살살 깨물며 장난을 치다가 입을 크게 벌려서 살덩이를 집어삼켰다. 은근하게 가슴을 괴롭히면서, 다시 내 질 안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몇 개가 들어간 건지 내벽이 빠듯하게 벌어진다.

나는 밀려오는 고양감을 감당할 수 없었다. 시트를 손안 가득히 말아 쥐고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만, 으, 흐읏, 애쉬!”

머리 꼭대기에서 뜨거운 것이 터졌다. 절정의 순간, 발가락 끝까지 몸이 경직되더니 시야가 까맣게 점멸했다. 비명과도 같은 신음이 속절없이 흘러나오려는 찰나 애쉬가 고개를 들어 입맞춤을 했다. 그는 내가 내뱉는 모든 것을 전부 빨아들였다.

“하아, 하아…….”

나는 그의 입술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눈가에 고인 눈물이 콧대를 타고 아래로 느리게 흘러내린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절정의 여운에 취해 있는 사이, 애쉬가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주고, 입술로 눈물을 훔쳐 갔다.

나는 기진맥진한 음성으로 말했다.

“창문 닫아. 커튼도 치고.”

“어차피 꼭대기 층이라 아무도 못 봐요.”

“그래도…….”

“아, 방금 선배 소리는 들었을 수도 있겠다.”

애쉬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나는 그 모습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대낮에 섹스한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이놈은 수치심이라는 게 뭔지 모르는 걸까? 애쉬는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태연해 보였다.

“네가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사는 건 이해하겠지만, 나는 다르거든?”

애쉬가 내 입꼬리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몸을 일으켰다. 이때 바람이 침실 안으로 불어오며 내 몸 전체에 범벅이 된 체액들을 조금 씻겨 주었다. 피부가 바람에 닿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추위 때문이 아니라 개방된 곳에서 문란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잠깐, 지금 넣게? 창문 안 닫고?”

놈이 익숙하게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뜨거운 손이 내 허벅지 안쪽을 쓸어내리고는 무릎을 세웠다. 흉흉할 정도로 거대해진 귀두가 젖은 입구에 닿아 온다.

“미친, 야……!”

나는 황급히 상체를 반쯤 일으킨 후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밀었다. 그러나 내가 민다고 해서 밀려날 놈이 아니었다. 애쉬는 힘들이지 않고 내 골반을 끌어당겼다. 그가 하체를 가까이 붙이자 젖은 구멍 안으로 뭉툭한 것이 푸욱 파고들었다.

“아……!”

“황후를 상상하면서 자위하는 놈들을 어떻게 벌줄까요.”

“으, 뭐? 잠깐, 천천히 들어와. 아, 으으…….”

“황궁 벽에 귀를 대고 좆을 문지르고 있는 저놈들 말이에요.”

내벽을 가득 채우며 들어오는 성기 때문에 기껏 세웠던 상체를 다시 침대 위로 늘어뜨렸다. 나는 베개에 뒤통수를 비비며 진입하는 감각을 힘겹게 견뎌냈다.

“으흑, 아…….”

“선배의 목소리를 들은 귀를 자르고.”

“애쉬, 애쉬……!”

“음심을 품은 심장을 꺼내고.”

“밑에 깔린 선배를 상상한 뇌를 부수고, 좆은 개밥으로 던져줘야겠죠.”

애쉬가 내 오금을 한 손으로 틀어쥐고 제 어깨 위에 걸치게 했다. 하체가 들리면서 페니스가 들어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했다. 허리가 절로 퍼뜩 튀었다.

애쉬는 잠시 숨을 멈추는가 싶더니 내 몸이 크게 흔들릴 정도로 성기를 깊게 박아 넣었다.

“흐읏!”

“이렇게 박을 수 있는 건 내가 유일한데.”

강하게 치받는 힘에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애쉬를 끌어안았다.

퍼억― 퍽. 내벽을 가득 채우며 깊은 곳까지 박혀있던 성기가 길게 빠져나갔다가 음낭까지 집어넣을 기세로 밀려 들어온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내 몸이 점점 위로 밀렸다. 애쉬의 어깨 위에서 무력하게 달랑거리는 두 다리가 보였다.

“하으, 아! 무슨, 흐응, 아! 끔찍한 소리……!”

“농담이에요.”

“애쉬, 흣, 사, 살살! 너무 깊어. 아!”

애쉬의 어깨를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눈가에 열이 몰리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애쉬는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허리를 빠르게 들썩였다.

나는 애쉬의 악다문 듯 우지끈 힘이 들어간 턱과 코끝에 맺힌 땀방울을 바라보다가, 결국 항복하듯이 델 것처럼 뜨거운 그의 피부에 뺨을 문질러댔다.

“아, 하읏! 아, 애쉬, 제발, 흣, 아아……!”

그의 아래에 깔려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로 퍼부어지는 쾌감에 몸부림쳤다. 애쉬가 움직일 때마다 한계를 모르고 치미는 자극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미칠 것 같았다. 나는 도리질 치며 애쉬의 가슴을 밀었다. 끈적하게 땀이 배어 나온 봉긋한 가슴 위에서 손이 자꾸만 미끄러진다.

“흐읏! 아!”

“하아… 아파요?”

“아파, 흣, 애쉬, 아, 조금만, 처, 천천히……! 아!”

사실 통증은 쾌감 밑에 파묻힌 지 오래다. 하지만 아프다고 하지 않으면 애쉬가 멈추지 않을 것 같아서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애쉬가 안타깝다는 듯이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허리를 퍼억―!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밀어 붙였다.

“아……!”

내벽 깊숙한 곳이 강하게 짓눌렸다. 순식간에 사지말단까지 퍼지는 쾌감에 고개가 뒤로 넘어가고,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내 귀와 베개를 축축하게 적시는 것이 느껴졌다.

대비하지 못한 오르가슴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몸을 떨며 고양된 감각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숨을 고르기도 전에 잠시 멈췄던 애쉬가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흐으, 자, 잠깐, 나, 아직……! 아파, 아!”

“아직도 아파하면 어떻게 해요. 후우… 박을 때마다 너무 죄송해서.”

“그럼 빼!”

“안 뺄 거니까 죄송하다는 거예요, 선배.”

애쉬가 두 손으로 침대를 짚고 상체를 숙였다. 내 등허리가 위로 들리고 하체가 반으로 접힐 듯이 상체와 가까워졌다. 애쉬가 전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아래를 꽂아 넣으며 달뜬 숨을 내뱉었다.

“하아, 선배, 보여요? 선배 구멍이 제 좆을 물고 안 놔줘요.”

부풀어 있는 거대한 남근이 내 몸을 무자비하게 들쑤시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광경에 나는 일순 숨을 집어삼켰다.

“제대로, 후, 봐주세요. 저, 잘하고 있어요? 선배가 가르쳐준 거잖아요.”

“나는 이렇게까진, 아, 아! 가르친 적… 하으읏……!”

“이렇게 박으면 돼요? 아니면 더 강하게 하는 게 좋아요?”

“아냐, 읏! 아… 싫어, 살살!”

“질질 싸면서 싫다고 하지 마요. 나랑 이러고 있는 거 좋잖아요.”

“…아윽, 아! 미칠 거 같아!”

긴 남근이 뽑혀 나올 때마다 기포와 함께 투명한 체액이 같이 딸려 나왔다. 젖은 살이 철퍽철퍽 부딪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고막을 울리고, 애쉬의 숨소리 또한 그의 격렬한 움직임처럼 빨라졌다. 나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몰아치는 쾌감에 우는 듯한 신음을 내질렀다.

“좋다고 말해요, 선배. 하아, 아…….”

“좋아, 흐읏, 아아! 좋아, 애쉬, 아!”

“하아…….”

“아아, 아! 흐읏! 아, 애쉬, 나, 또 가, 갈 것… 아아!”

애쉬가 내 몸을 부서뜨릴 것처럼 강하게 페니스를 박아 넣었다. 살 부딪치는 소리가 가히 폭력적이었다. 땀에 젖은 그의 근육이 육감적으로 움직이고 두꺼운 팔뚝에 힘줄이 솟았다.

걷잡을 수 없이 퍼부어지는 감각이 이성을 모조리 씹어 삼켰다. 나와 애쉬는 발정하는 짐승처럼 쾌감을 좇아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하아, 아, 이벨린…….”

“아아, 아! 하읏! 애쉬, 애쉬!”

수직으로 내리꽂는 듯한 그의 하체가 제어를 상실한 것처럼 격렬하게 움직였다. 내 입에선 절제되지 못한 신음이 가파르게 터져 나왔고 동시에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점점 고양되어 가는 흥분감이 폭발하려는 순간, 애쉬가 내 다리를 풀어내린 후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 몸이 가벼운 솜인형처럼 들리며 그와 앉은 채로 끌어안은 자세가 되었다. 땀과 체액으로 범벅이 된 단단한 몸이 나를 힘주어 감싸 안는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면서 절정을 느꼈다. 내벽에 가득 들어차 있는 페니스가 꿀렁꿀렁 움직이며 액을 토해내는 것이 전부 느껴졌다.

“하으읏…….”

“하아, 이벨린.”

뜨거운 숨결이 내 귓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나는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댄 채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애쉬는 내가 절정의 여운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동안에도 내 몸 이곳저곳을 지분거렸다. 큼지막한 손으로 등허리를 쓸어 올리고, 귓불과 목덜미를 이로 지근지근 씹고 빨았으며 결정적으로 안에 박힌 성기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내벽을 찌르고 있었다.

나는 뺨을 비비적거리면서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힘들어.”

나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연신 만지작거리던 애쉬가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뜨겁게 맞붙었던 상체가 조금 떨어졌다. 그러곤 커다란 손이 내 뒤통수를 안락하게 감싸 쥐었다. 나는 익숙하게 몸에 힘을 풀고 그의 손바닥을 베개삼아 머리를 눕혔다.

걱정이 그득 담긴 푸른 눈동자가 내 얼굴을 꼼꼼하게 탐색하는 게 보인다. 그 모습에 피로한 와중에도 비식 웃음이 흘렀다.

“나 죽었을까 봐?”

“장난으로라도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런 소리가 뭔데.”

“제 입으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죽었다는 말?”

“선배.”

애쉬가 인상을 구기더니 불시에 허리를 쳐올렸다. 몇 차례의 절정으로 예민해진 몸이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흣……! 아, 알았어.”

나는 황급히 손을 뒤로 하여 그의 허벅지를 짚었다. 움직이지 말라는 뜻으로. 그러나 애쉬는 내 허리를 붙잡고 앞뒤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흐으읏!”

다급하게 그의 팔뚝을 부여잡아 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가득 찬 성기가 내부를 휘젓는 감각이 전류처럼 퍼지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턱을 치켜들었다.

“선배 안… 엄청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좋아요. 선배도 느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너도… 하아, 네 좆을 품어봤어야 했는데. 아읏, 불에달군 쇠 말뚝을 꽂고 있는 기분이라고.”

“죄송해요. 쇠 말뚝을 달고 태어나서.”

“알면 좀 적당히, 아! 으응……! 움직이지, 아, 애쉬……! 하읍!”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애쉬가 돌연 입술을 겹쳐왔다. 달뜬 신음과 뜨거운 숨이 모조리 그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입맞춤은 빠르게 농밀해졌다. 두 개의 혀가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방의 입 속으로 건너갔다. 질척한 타액이 서로의 살덩이에 짓이겨져 젖은 소리를 냈다. 애쉬가 내 혀를 깊게 빨아 당기자 맞물린 입술 사이로 울음소리 같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흐웁… 읏, 힘들, 아, 숨막혀, 애쉬, 읍!”

애쉬에게 뼈째 씹어 삼켜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입술은 내가 흘리는 한 점의 숨결마저 소유하려는 것처럼 깊게 맞물렸고, 푸른 눈동자는 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조차 없게 옭아맸다. 내가 느낄 수 있는 모든 신경은 그가 주는 자극에 신음을 내질렀고, 뇌는 사고하기를 거부하고 쾌감을 받아들이기에 급급했다.

애쉬에게 꼼짝없이 사로잡힌 채 사지를 떨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혓바닥이 내 눈가를 문지르고 있을 때, 드디어 나는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우읍… 하아!”

나는 힘 빠진 손으로 그의 어깨를 긁어내렸다. 애쉬가 낮게 신음하며 내 귓바퀴를 입술로 지분거린다.

“어떻게 해줄까요, 응?”

“아래, 흐읏, 너무, 깊어… 읏!”

커다란 손이 내 배와 늑골을 쓸고 올라와 내 가슴을 은근하게 주물렀다. 애쉬가 내 바짝 선 유두를 손가락 두 개로 빙글빙글 돌리듯이 만지면서 목을 깨물었다.

“지금 선배가 허리 움직이는 거 알아요?”

애쉬가 붉어져 있을 내 목에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그의 낮은 음성이 피부에 질척하게 들러붙는 것만 같았다.

“아! 아으읏, 제, 발, 흐읏, 아!”

“제 좆으로 자위하는 기분이 어때요?”

“아니, 으흣, 아…….”

그 말대로 애쉬는 한 팔로 내 허리를 감싸고 있기만 할 뿐, 허리를 위로 들썩이거나 앞뒤로 꿈질꿈질 움직이고 있는 건 나였다. 내 몸이 극한의 쾌감에 중독되어 버린 듯 본능적으로 그를 원하고 있었다.

열기를 품은 손이 내 허리를 크게 들어 올렸다. 내벽 안쪽에 단단히 파묻혀 있던 성기가 쑤욱 빠져나갔다가, 다시 단단한 귀두가 내벽 안쪽을 힘 있게 짓눌렀다. 갑작스러운 감각에 나는 진저리 치며 허리를 비틀었다.

“하윽, 아……!”

애쉬가 아래를 강하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페니스가 안쪽 깊은 곳까지 쑤시며 들어올 때마다 입이 속절없이 벌어지며 밭은 숨이 튀어나왔다. 몇 번이고 느꼈던 거대한 쾌감이 목 아래에서 일렁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지를 완전히 상실한 채 쾌감에 질식사할 것만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도리질을 쳐댔다.

“그만, 아흣, 그만해, 나, 못 할 것 같아. 히, 힘들어서, 더는…….”

“하아, 선배는 가만히 계세요. 제가 할게요.”

애쉬가 거친 숨을 눌러 삼키며 나를 침대 위에 눕혔다. 침대 끄트머리로 날아가 버렸던 베개를 내 머리 근처에 놓은 뒤, 절대 빼지 않을 것 같았던 페니스를 뒤로 물렸다.

“하으읏……!”

페니스가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가자 안쪽이 페니스를 잡아두려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 감각에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허리를 떨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페니스가 완전히 빠져나갔다. 깊숙한 곳에 고여있던 액이 엉덩이를 타고 꾸물꾸물 흘러나왔다.

나는 넋이 나간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때 긴 손가락 두 개가 엉덩이를 쓸어 올리며 질 안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아……! 뭐 해!”

애쉬가 손가락을 앞뒤로 느릿느릿 움직였다. 그러면서 내 몸을 한 손으로 가볍게 뒤집는다.

“흘리면 아깝잖아요.”

“으읏!”

“손가락으론 조금 새어나오네요.”

“뭐, 흐읏, 뭐가. 아! 손, 그만… 그만…….”

“선배, 싸는 거요.”

애쉬가 내 귓가에 짓눌린 음성으로 낮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가 귀에 닿자 등골이 저릿해졌다. 나는 손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이불을 세게 그러쥐며 더운 숨을 내뱉었다.

“이상한, 아흣! 소리, 하지 마… 아!!”

애쉬가 손을 빼내고는 내 골반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단번에 성기를 박아 넣었다. 순간적으로 억눌린 듯한 신음이 터져 나오며 발가락이 희게 곱아들었다. 단단한 남근이 내벽을 억지로 벌리며 깊은 곳까지 밀려 들어왔다.

거북스러울 정도로 꽉 차는 감각에 본능적으로 팔을 앞으로 뻗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겨우 움직여 기어 나가자 뿌리까지 박혀있던 남근이 조금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큼지막한 손에 허리가 붙잡혔다.

“아! 애쉬… 읏, 아, 하아, 아!”

“어디 가게요.”

애쉬가 내 허리를 아래로 당겼다. 나는 팔을 뻗은 채로 그가 당기는 대로 미끄러졌다. 퍼억. 살 치는 소리와 함께 아래가 틈도 없이 맞물렸다. 벌어진 입에선 소리 없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래가 움찔거리더니 경련하듯이 떨려왔다. 애쉬도 내 몸의 반응을 느꼈는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하… 조여.”

“아… 흐으, 읏.”

등 뒤로 땀에 젖은 그의 몸이 겹쳐졌다. 높은 체열이 전신을 뒤덮고 귓속으로 흥분에 취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미치게 좋아요”

“읏, 아! 아! 살살, 애쉬, 흐으… 아!”

애쉬가 예고도 없이 강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퍽, 퍽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 몸도 같이 세차게 흔들렸다. 무서울 정도로 강한 자극이 혈관을 타고 온몸을 내달렸다.

“자, 잠깐, 으, 너무 세. 아, 제발……!”

“하아, 이벨린. 하아, 하아…….”

애쉬의 긴 팔이 내 배와 가슴을 가로질러 턱을 붙잡았다. 그의 손힘에 이끌려 고개가 돌아가자마자 입술이 겹쳐졌다. 혀를 깊게 섞는 키스가 아닌, 입술을 빨아 당기고, 이로 씹고 턱과 뺨을 혀로 핥는 감촉이 이어졌다.

“후우… 이벨린, 윽.”

이성을 송두리째 뽑아내는 쾌감이 덮쳐왔다. 나는 거부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자극에 몸부림쳤다. 인간의 육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렬하고, 지독한 감각이었다.

“읏, 흐으, 애쉬, 아! 아!”

“하아… 좋아, 이벨린, 아…….”

애쉬가 짐승 같은 숨을 토하며 추삽질을 했고, 나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쾌감에 젖은 눈물만 흘려댔다.

“느껴져요? 후… 선배 안에 쑤셔박고 있는 게 누군지.”

“느껴져, 흐으응, 아, 느껴, 아, 아! 정신, 나갈 것 같… 하읏!”

애쉬의 거친 몸짓과 빠른 박자에 안간힘을 쓰고 따라가려 해봤으나 무리였다. 결국 나는 소리 내어 엉엉 울기만 했다.

“아, 으응, 아! 애쉬, 하아…….”

마주 본 푸른 눈동자 속에서 정염이 이글거렸다. 뜨거운 숨과 신음이 질서 없이 튀어나오는데도 우리는 서로를 눈에 담았다.

이때, 애쉬가 낮게 욕을 뱉으면서 크게 허리짓을 했다.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쾌감 때문에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그가 내 앞에서 욕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이 앞섰다. 순간 애쉬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읏, 아, 애쉬, 잠깐, 잠깐만…….”

“못 참겠어요. 너무 좋아요, 이벨린.”

그러나 날카로운 성감이 잠시 찾아들었던 상념을 찢어 없앴다. 이보다 더 빨라질 수 없을 것 같던 추삽질이 더 격렬해졌다. 나는 비명 같은 교성을 내지르며 애쉬에게 매달렸다. 몸을 부서뜨릴 듯 강하게 치고 들어오는 페니스에 결국 나는 무너져 내렸다.

“후우… 이벨린, 윽.”

“읏, 흐으, 아……. 조, 좋아. 아! 아!”

“하……. 좋아.”

“으, 흐앗, 아!”

근육질의 큰 몸이 내 몸을 압박하듯 누르고 마치 이 짓밖에 할 줄 모르는 짐승처럼 쾌감을 좇아 허리짓을 했다.

“자, 잠깐만, 나 갈 것 같아… 몸이, 흐윽, 하아아!”

내 애원에도 애쉬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아래에서 퍽! 퍽! 쳐올리는 힘만 더 강해질 뿐이었다. 결국 밀어닥치는 오르가슴에 굴복해 버렸다.

“애쉬, 아, 안 돼. 아아!”

“으윽……!”

애쉬가 내 허리를 쥐어짜듯 잡으며 성기를 음낭까지 박아 넣을 것처럼 깊게 찔렀다. 다물지 못한 입 밖으론 어떠한 호흡도, 신음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하얗게 탈색되었다. 사지가 달달 떨림과 동시에 힘이 빠져나갔다.

“흐읏, 아…….”

그러나 점멸했던 시야가 색을 찾기도 전에 애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안에 박혀있는 이 괴물 같은 페니스는 아직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애쉬는 내 귓가에 잘게 입맞춤을 남기며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금방 쌀게요.”

“이 미친……! 하윽!”

“선배, 안… 엄청 떨리고 있어요. 느껴져요? 제 좆을 씹어먹는 거.”

“몰라, 하, 아! 움직이지, 흐읏, 아직, 조금만, 이따… 아!”

애쉬의 호흡이 전보다 거칠어지고, 허리를 치는 움직임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하아, 좋아요, 아, 선배… 읏.”

“애쉬, 제발, 아, 아! 너무, 빠른 것, 같, 애쉬…….”

나조차도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는 애원이 입버릇처럼 튀어나왔다. 나를 지배하는 이 감각에서 벗어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다시 황홀한 쾌락을 느끼고 싶은 건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절정을 앞둔 애쉬의 하체는 난폭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그는 그러면서도 귓가에 끊임없이 사랑의 말을 속삭였다.

“아, 이벨린. 하아…….”

“나 또 갈 것 같. 애쉬, 애쉬……!”

“이벨린, 사랑해요. 사랑해…….”

“아, 알았어! 흐읏, 알았다고, 나 진짜, 아!!”

“크윽!”

눈앞에서 하얀 불꽃이 터졌다. 이성을 완전히 잡아먹은 지독한 쾌감이 몸 전체에 퍼져 나갔다. 꽉 맞물려 있는 남근이 움찔거리며 사출하는 게 전부 느껴졌다.

“하아…….”

단단한 몸이 나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으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나는 숨 쉬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호흡을 멈추었다. 손가락, 발가락이 부채꼴처럼 넓게 펴지고, 고개는 천장으로 치켜 올라갔다. 쾌감이 섞인 잔열이 퍼져나간다.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경련했다. 절정의 여운에 푹 절어있을 때, 애쉬가 허리를 조금 뒤로 물렸다가 깊은 곳에 페니스를 콱 박아 넣었다.

강하게 진입하는 힘에 위를 향해 있던 고개가 아래로 추락하듯 떨어졌다. 애쉬는 내 목과 어깨에 끊임없이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나는 말라버린 목구멍으로 침을 삼켜 넣고 크게 숨을 쉬었다.

“하아… 빼.”

페니스가 몇 번 추삽질을 하고는 내벽을 긁으며 쑤욱 빠졌다. 나는 어깨를 떨며 침대에 완전히 널브러졌다. 고여있던 액들이 엉덩이와 허벅지를 타고 아래로 느릿느릿 흘러내리는 게 느껴진다.

애쉬가 내 등허리에 쪽,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었다. 나는 탈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데, 긴 손가락이 내 허벅지를 쓸어 올려 액을 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철근처럼 무거워진 팔을 가까스로 움직여 애쉬를 밀었다. 그래 봤자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살짝 건드리는 정도였지만.

“…떨어져.”

“네.”

그러나 대답과 다르게 애쉬는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는 몸을 똑바로 눕혀 준다. 얼굴 위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정돈해주고, 물을 가지고 왔다.

큼지막한 손이 내 목 뒤를 받치고 입술에 차가운 컵의 표면이 닿았다. 건조하고, 뜨거운 입 속으로 찬물이 들어오자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 마셔야 하지 않을까요?”

걱정이 담긴 어투가 들려왔다. 내가 눈동자만 움직여서 녀석을 쳐다보자 애쉬가 이어 말했다.

“위, 아래 할 거 없이 너무 많이 흘리셨잖아요. 제가 선배 안에 여러 번 싸긴 했지만, 그렇다고 수분이 보충되는 건 아니니까…….”

“다물어.”

무슨 소리를 하나 했다. 나는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물컵을 손짓 한 번으로 치워버렸다. 애쉬가 물컵을 가져다 놓는 사이, 바람이 피부에 닿는 게 느껴졌다.

“아, 맞다… 창문.”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곧 기절할 것 같은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은 채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애쉬를 불렀다.

“…아니지?”

애쉬가 젖은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며 되물었다.

“뭐가요?”

“마법으로 가림막 같은 걸 쳐놨을 거야. 그렇지?”

애쉬는 말없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웃긴 왜 웃어! 우리의 정사는 치열한 난투극과 흡사했다. 살이 부딪치는 소리는 폭력적이었고, 내 입에선 비명과 울음소리가 절제 없이 터져 나왔다. 최고층이라는 사실이 곧 완벽한 방음을 뜻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이렇게 창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려있을 때는 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애쉬는 내 복잡한 속도 모르고 코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주무세요. 씻겨드릴게요.”

“야, 너 왜 대답 안 해.”

“피곤해 보이세요. 지금도 계속 눈이 감기려고 하잖아요.”

“내가 누구 때문에 피곤한데.”

부드러운 손끝이 내 눈꺼풀을 살살 어루만졌다. 졸음이 해일처럼 밀려오며 내 정신을 뒤덮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잠들 수는 없…….”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의식이 까맣게 점멸하기 직전, 애쉬가 내 손등에 입술을 묻은 채 낮게 속삭였다.

“죄송해요. 다 선배 때문이에요.”

…뭐라는 거야? 앞뒤가 안맞는 말에 의심을 품음과 동시에 까무룩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 * *

“적당히 해라 좀 진짜.”

“…죄송해요.”

포근한 새 침구에 엎드려 누운 채로 애쉬의 마사지를 받았다. 아무리 오랜만에 한 섹스라지만 사람 몸을 부숴놓을 정도로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애쉬는 사고 친 강아지처럼 연신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 허벅지를 주물거리는 손을 탁 쳐냈다. 돌아눕자 애쉬의 우울하게 처진 눈이 보였다.

“사람이 정도라는 게 있어야지. 너한테 박힌 채로 세상 하직할 뻔했다고.”

“아예 꽂고 지내야 할까 봐요. 그래야 선배도 덜 힘드실 테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만해. 사람이 24시간 발기하는 것도 나는 병이라고 본다. 성욕 감퇴제라도 먹어보든가.”

“…죄송해요. 저, 미우시죠.”

그가 내 눈치를 보며 초조하게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애쉬가 마사지를 시작했다. 아프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딱 시원할 정도의 악력이 느껴진다.

“선배…….”

녀석이 내게 대답을 재촉했다.

“기다려봐. 생각중이니까.”

“…….”

나는 마사지를 받으며, 요즘의 애쉬에 대해 생각했다.

“확실히… 예전의 순수함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

“…….”

지난 겨울 여행에선 새파랗게 어린애를 괴롭혀서 괜한 오해를 받질 않나, 이번엔 관계 도중에 욕까지 입에 담았다. 본인도 모르게 튀어나온 감탄사일 뿐일지라도, 내 앞에선 늘 예쁘고, 고운 말만 골라 쓰려고 노력하던 놈이다.

나는 애쉬에게 잡힌 손을 빼낸 후 몸을 모로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애쉬가 눈꼬리를 휘어 접으며 흐드러지게 웃어보였다. 그러나 입매는 불편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진짜 웃음이 아니었다.

“애쉬.”

“네.”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헤드에 등을 기댄 채로 애쉬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아슬아슬한 침묵이 내려 앉았다. 나는 조용히 손을 움직여 그의 오른쪽 눈꺼풀을 톡 하고 가볍게 건드렸다.

내 손길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이 그의 푸른 눈동자 위로 투명한 막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찰랑거릴 정도로 고인 눈물이 결국 매끈한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만다.

…이럴 줄 알았어.

애쉬는 제 감정을 감추고 싶었던 건지, 황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버렸다. 하지만 둑이 터진 것처럼 녀석의 눈에선 투명한 눈물방울이 끊임없이 솟아났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크게 오열하는 것보다, 애써 눈물을 참는 모습이 더 가엾게 느껴졌다. 지금의 애쉬처럼.

어린 장미꽃처럼 발긋하게 물든 애쉬의 눈가를 손으로 살살 문질러 주었다. 애쉬가 고개를 푸욱 숙인다. 나는 동그란 정수리를 보며 말했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떻게 해. 내가 심한 말 한 것도 아닌데, 진짜 나쁜 사람 된 것 같잖아.”

“죄송해요, 흐윽. 서, 선배가 나쁘다뇨.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왜? 내가 나쁠 수도 있지.”

“아… 맞아요. 선배는…… 나빠도 좋아요. 그렇다고 제, 제가 선배를 나쁘게 생각한다는 뜻은 절대… 아니고.”

“알았어, 알았어. 왜 이렇게 울어.”

턱밑을 살짝 쓰다듬자 애쉬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무표정일 때는 매서워 보이기만 하는 얼굴이 지금은 한없이 처연하고, 안쓰럽게 보인다.

“제가… 선배한테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서…….”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의 울음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우느라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에 심히 당황했다. 나는 침대 헤드에서 등을 떼고 애쉬의 어깨를 토닥였다. 녀석은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긴 속눈썹이 푸욱 젖을 정도로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저는, 나이 들었고, 끅, 순수하지 않으니까…….”

“어?”

“선배는 어린…….”

애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빠르게 헐떡이는 그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려주었다.

“그러니까… 윽, 어린 남자를 좋아하는데, 저느은, 선배를 처음 만났던 때에 비해 너무 늙었고, 끅, 속도 좁고, 이런 제 모습에 선배가 질려하시는 게 너무 무서워서…….”

“야, 그거 나 먹이려고 하는 말이야?”

“아니에요. 절대, 절대로 그런 게 아니라.”

애쉬는 울음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크게 당황해했다.

“네가 늙었으면 너보다 연상인 나는?”

“선배는 선배니까…….”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오네. 애쉬의 머릿속이 조금 독특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귀 뒤로 꽂아 넣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얘기나 들어보자. 왜 내가 젊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전에 마법의 호수에 빠졌을 때, 과거의 저와 섹스하셨잖아요.”

“그건 다 네 기억을 찾아주기 위해서…….”

“지금의 제가 아니라… 과거의 어린 저한테 박혀서 흥분하시는 모습을 다시 떠올리니까… 지금의 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

“야! 어차피 그것도 다 너였잖아!”

“아니예요. 달라요. 손바닥도 거칠거칠해졌고, 몸도 커져서 선배가 보시기에 예쁜 맛이 없어졌어요.”

네가 말하는 ‘예쁜 맛’이 가녀린 몸을 말하는 거니? 넌 아카데미 때도 여리여리한 체격은 아니었어.

애쉬는 살이 아닌 근육이 늘어서 체격이 커진 거였다. 내가 이놈의 두툼한 가슴 근육을 만지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타고난 피부는 딱히 관리를 하지 않아도 모공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끈했고, 목과 어깨선이 날렵해서 근육이 늘었다 하더라도 둔한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아카데미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어른의 근사한 몸이 되었다.

지금의 네 모습이 더 취향이라고 말하려는데, 애쉬는 할말이 더 남은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화가…….”

“아, 마일로?”

“이름, 다정하게, 이름 부르지 마요…….”

“알았어. 미안미안. 계속 말해.”

“분명히 저랑만 시간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셔 놓고, 그 어린 화가한테 제 것이었을 선배 시간을 나눠줬잖아요…….”

애쉬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상한다는 듯 치미는 서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떨어진 눈물방울마다 설움과 원망, 슬픔이 짙게 배어나왔다.

애가 이렇게 서운해 할 줄 알았으면, 마일로의 부탁을 그냥 거절할 걸 그랬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애쉬의 한 손을 포개어 잡았다.

“마일…… 아니, 그 화가 머리색 기억나?”

“떠올리고 싶지 않아요.”

“금색이었어. 눈도 푸른색이었고. 울먹이는 모습이 꼭 옛날 너 같아서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거뿐이야.”

“선배는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남자가 울면 그들을 전부 가여워하실 건가요?”

“당연히 아니지……. 그때는 호수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안 됐었잖아. 네 옛날 모습이 아른거려서 마음이 쓰였어.”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야겠어요.”

“왜 결론이 그렇게 나.”

나는 피식 웃으며 애쉬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애쉬가 가까이 다가온 내 손목을 휘어잡고는 나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녀석의 너른 품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녀석이 내 정수리에 뺨을 비비는 게 느껴졌다.

“불안했어요. 선배의 옆자리는 제 거라고 세상에 말하고 싶었어요. 선배한테 박을 수 있는 좆은 내 좆이 유일하다고…….”

“그, 그랬구나.”

“자꾸만 겁이 나요. 선배한테 버려지는 상상이 제 목을 졸라요. 그래서, 그래서… 선배가 싫어할 거 아는데도, 계속 못난 행동을 보였어요.”

마일로를 견제하고, 창문을 열어 뒀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애쉬의 이런 불안감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 이미 한번 그를 떠났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불안감이 평생 나아지지 않더라도 나는 끊임없이 애쉬를 달래고 사랑을 속삭여줄 거다. 나를 구원해준 내 사랑에게 이 정도의 수고는 일도 아니다.

나는 녀석의 등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려 놓았다. 애쉬가 거칠게 호흡하는 것이 느껴진다. 맞닿은 피부에서, 숨결에서, 작게 흐느끼는 목소리에서 맹목적인 애정이 느껴졌다. 나로선 흉내도 내지 못할 거대하고, 올곧은 마음이다.

“애쉬. 약속 하나 할까.”

“…….”

“우리는 앞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될 텐데. 오늘 같은 오해가 또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어. 오해가 아니더라도 다투는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나는 애쉬의 팔을 밀어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축축히 젖은 그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는 눈을 맞췄다.

푸른 눈동자 속에 초조함이 담겨있었다. 지금 애쉬의 머릿속은 내 입에서 떨어질 말이 무엇일지 예상하느라 난장판이 되어있을 거다.

“그래도 네가 나를 놓지 않는 한, 나도 널 떠나지 않을 거야.”

“…….”

“나는 네가 무덤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날 놓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이 맞아?”

“제가 선배보다 먼저 무덤에 들어가는 일은 절대 없어요. 제 삶의 마지막 목표는 반드시 선배보다 오래 살아서 순장되는 거니까요.”

그것참 대단한 삶의 목표구나. 나는 죽기 직전엔 네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노력해볼게.

애쉬는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지만, 나는 실소가 터졌다.

“아, 그래. 뭐, 말리지는 않을게. 네 목표가 그거라는데.”

“진심이에요.”

나는 붉게 짓무른 그의 눈가를 엄지로 한 번 쓸어주었다. 애쉬는 손타는 강아지처럼 얌전히 내게 얼굴을 맡겼다. 요즘엔 애쉬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웃음이 흐른다. 나는 피어오르는 미소를 감추지 않은 채 이어 말했다.

“내가 너를 떠나는 경우는 단 하나야. 네가 나를 놨을 때.”

“…….”

“우리 관계의 주도권은 너한테 달려있는 거야, 애쉬. 그러니까 내 반응 하나하나에 신경 쓰지 말고, 네 마음 간수 잘 하기로, 약속.”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참 내 얼굴을 바라보던 애쉬가 눈을 감았다. 맺혀있던 눈물이 떨어진다. 애쉬는 제 뺨을 감싼 내 손을 쥐고는 입술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 손바닥에 애쉬가 입술을 깊게 누르는 것이 느껴진다.

“너 달래려고 하는 말 아니야. 내가 널 믿고 있다고 부담주는 거야. 내 믿음을 영원히 지켜줘, 애쉬.”

애쉬가 내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흘러내린 눈물이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신다. 눈물의 온기가 손을 타고 심장까지 스며들었다.

지금의 어설픈 몇 마디가 우리가 걸었던 불행의 흔적들을 전부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과거는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우리의 미래에는 눈부신 사랑만이 가득할 것이다.

* * *

매일 같은 꿈을 꾼다.

이벨린은 이것을 악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애쉬는 이 꿈이 두렵지도, 끔찍하지도 않았다. 묘한 희열감은 느낄지언정 악몽과 어울릴 법한 감정은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꿈의 장소는 매번 다르다. 아카데미 교정, 배의 갑판 위, 황궁. 장소는 중요한 게 아니다. 눈앞에 내장을 쏟은 채 엎드려 있는 세레즈만이 애쉬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애쉬는 매일 밤 그를 죽이는 꿈을 꾼다. 전신의 살갗을 얇게 벗겨 낸 후 뜨거운 물을 처붓거나, 배를 조금 가른 후 창자를 줄에 묶어 천천히 꺼내 죽였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을 선사했다. 감히 자신에게서 이벨린을 빼앗아 간 시간만큼 벌을 주려면 수백, 수천 번을 죽여도 모자랐다.

이벨린은 애쉬가 악몽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애쉬는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 편이 그녀의 사랑스러운 동정을 얻는 데 더 효과적이니까.

하지만 요즘 꾸는 꿈은 조금씩 비틀리기 시작했다. 이런 것을 악몽이라고 하는 걸까. 애쉬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여전히 두려움이나 괴로움은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

애쉬는 이벨린과 겨울 여행을 다녀온 직후부터 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세레즈가 아닌 자신이 이벨린의 이복 오빠가 되어 이벨린을 저택에 가두는 꿈이다. 그는 세레즈보다 교묘하고, 철저하게 이벨린을 구속했다. 애쉬는 이 꿈이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추잡하고, 저열한 욕망을.

오늘도 이벨린의 이복 오빠가 된 그는 이벨린의 몸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목 뒤에 새겨진 이름을 발견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흥미로운 기다림이 아닐 수 없다.

애쉬는 이벨린이 직접 남매 사이의 금기를 깨도록 유인할 거다. 거부감을 줄여주기 위한 자신의 배려였다. 조금의 오차 없이 완벽히 만들어진 설계 도면처럼 그녀를 위한 계획이 준비되어 있었다. 애쉬는 세레즈처럼 아둔하고, 강압적인 방법으로는 이벨린을 온전히 손에 넣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고, 증오하는 세레즈에게 애쉬는 추악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꿈속의 애쉬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표출했다. 그녀의 얼굴을 향해 정액을 사출하고, 아직도 껄떡거리는 귀두로 부드러운 입술을 짓이겼다. 그리고 애쉬는 세레즈처럼, 세레즈보다 영리하게 그녀를 집어 삼킨다.

이벨린의 눈가에 들러붙은 정액이 콧대로 느리게 떨어질 때,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

애쉬는 새벽빛이 흘러 들어온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꿈에서 끄집어낸 원인을 손으로 감싸쥐었다. 이벨린의 팔이 자신 가슴 위를 가격한 것이었다.

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진짜 이벨린이다. 그녀의 체향, 피부의 감촉, 목소리, 눈빛, 숨결 하나까지 모든 게 지독히도 좋았다.

“…애쉬?”

이벨린이 눈을 힘겹게 떴다. 졸음을 이겨내려 애쓰는 모습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깨셨죠.”

“또 악몽 꿨어?”

“…네.”

“이리 와, 안아줄게.”

이벨린이 한 팔을 벌렸다. 그러나 체격 차이 때문에 이벨린이 애쉬의 품에 안긴 자세가 되었다. 이벨린은 몸을 꼬물꼬물 움직여 애쉬의 품 안으로 깊게 들어왔다. 애쉬는 그녀의 까만 머리에 입을 맞춘 후 팔에 힘을 주었다.

이벨린이 자신을 떠났던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불안감이 애쉬의 질 낮은 욕망을 자극한다.

하지만 애쉬는 멍청한 세레즈와 다르게 충동을 억제할 수 있었다. 애쉬는 이벨린의 육체만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품으로 스스로 들어오는 이 작은 몸짓과 다정함도 모두 제 것이어야 했다.

차가운 달빛이 이벨린과 애쉬의 몸을 비추었다. 어둠 속에 숨겨두었던 애쉬의 얼굴이 드러났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해진 소유욕, 광기에 가까운 집착. 그러나 이벨린은 그의 품에 안긴 채 편안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애쉬는 이 봄이 지나고 새로운 계절이 몇 번이고 찾아오더라도 철저하게 자신을 감출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놈을 책임져야 하는 이유 (특별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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