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겹게 내리던 눈이 거짓말처럼 그쳤다. 바닥에 두껍게 깔아두었던 카펫을 걷어낼 시기가 온 것이다. 마을의 청년들이 털 달린 외투 하나만을 껴입고 기다렸다는 듯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소복하게 쌓였던 눈이 녹기 전에 파묻혀 있는 동물들의 사체를 치워야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시린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머리 위로 우뚝 솟은 태양이 빛을 흩뿌렸다. 지붕, 여러 갈래로 뻗어난 나뭇가지 위, 천막을 덧대어 장작을 쌓아두었던 수레 위 구석구석까지. 마을을 뒤덮은 눈이 빛을 내며 주위를 환하게 비추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한 청년이 같은 자리를 왔다 갔다 하며 방황하고 있었다. 소년이라고 하기엔 골격이 굵직했고, 성인 남자라고 하기에는 얼굴에 앳됨이 남아있었다.
털이 수북한 큰 손이 청년의 어깨를 덥석 쥐었다. 청년이 크게 몸을 떨며 뒤를 돌았다.
“삼촌.”
“마일로, 오늘은 이만하고 들어가서 쉬어. 얼굴만 비쳤으면 됐어.”
셔츠를 세 장이나 껴입고, 가지고 있는 옷 중에 가장 두꺼운 외투를 꺼내입은 마일로와 다르게 그의 삼촌은 젖꼭지가 비칠 정도로 얇은 셔츠 한 장만을 달랑 걸치고 있었다. 그의 살집 있는 두꺼운 몸과 둥근 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겨울의 끝자락이라고 해도,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날이 추웠다.
마일로는 삼촌과 다르게 꼭꼭 껴입은 제 모습이 애 같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괜히 더운 척 손부채질을 하면서 외투의 단추를 풀어 내렸다.
“예? 아니에요. 저도 성년식을 치른 성인인데, 어린애들처럼 굴 수는 없죠.”
“고작 두 달 전에 성년식을 치러 놓고, 까분다. 쉬랄 때 쉬어. 메이슨이랑 로건은 벌써 돌아갔어.”
“저는 걔네들이랑 달라요.”
삼촌의 시선이 마일로의 어깨 쪽으로 향했다. 가방처럼 둘러맨 포대가 텅텅 비어있었다. 마일로는 시선을 느끼고 포대를 매단 줄을 양손으로 꽈악 쥐었다. 그리고 재빨리 변명하듯이 말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아서 그래요.”
삼촌이 픽 웃으며 마일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정돈되어 있던 금발이 민들레 홀씨처럼 덥수룩하게 변했다.
“네가 그렇게 나서서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되면 해야 할 일이 많아. 당장 다음 달에는 태양신께 올릴 봉헌 의식도 준비해야 하고.”
“삼촌이랑 다른 분들도 다 하는 건데요. 저도 할 수 있어요.”
“너는 매사에 의욕이 앞서서 탈이야. 그럼 적당히 눈만 헤집다가 들어가렴.”
삼촌이 마일로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 돌아섰다. 마일로는 삼촌이 자신을 배려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저를 아직 애로만 여기는 것 같아 서운함이 앞섰다.
“내가 포대를 가득 채우고 만다.”
그러나 포부와는 다르게 마일로는 또 한참을 쭈뼛거렸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흘린 듯한 토끼 사체를 발견했다.
얼어 죽은 토끼 사체를 집어 드는 그의 얼굴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이제 막 미성년자 꼬리표를 뗀 그는 성년식을 치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책임감 있고 근사한 남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취해 있었다.
“마일로―!”
“뭐……. 억! 퉤퉤퉤! ”
뒤를 돌자마자 안면에 차가운 눈이 쏟아졌다. 더러운 장갑 대신 소매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리처드가 눈물까지 흘리며 폭소하고 있었다. 같은 해에 성년식을 치른 친구지만 자신과 다르게 아직 철부지 시절에 머물러있는 것 같다.
“리처드, 네가 아직 애야?”
“푸하하! 목소리는 왜 깔아? 겉멋만 잔뜩 들어서는.”
마일로는 이 순간만큼은 의젓한 성인이기를 포기하고 싶었다. 인중을 길게 늘이며 얄미운 표정으로 알짱대는 리처드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마일로는 들고 있던 토끼 사체를 어른스럽게 집어 던졌다. 여기서 어른스럽다는 것은 토끼 사체를 집어 던지면서 욕설을 하지 않았다는 거다.
딱딱하게 굳은 토끼의 앞발이 리처드의 이마에 톡 닿았다가 떨어졌다. 리처드가 순발력 있게 몸을 피해서 다행이지, 만약 정통으로 맞았더라면 코피를 쏟았을 거다.
“이런 미친!”
“까불지 말고, 일이나 해. 너 빼고 다 일하는 거 안 보여?”
“장난 한번 친 거 가지고 되게 유난이네.”
“봉헌 의식 때도 이런 식으로 굴면 그땐 여기저기서 욕 얻어먹느라 아주 배부를 거다.”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
리처드는 대수롭지 않게 말한 뒤 바닥으로 떨어진 토끼 사체를 마일로의 포대에 넣어주었다.
“마일로, 너 성년식 치른 이후에 엄청 이상해진 건 알아? 목소리도 그렇고. 다들 뒤에서 정떨어진다고 수군거려. 성인은 너만 된 줄 아냐면서.”
“너희가 아직 어린 티를 못 벗은 거야.”
“내가 보기엔 잔뜩 겉멋만 든 너도 아직 한참 애다.”
리처드의 한마디가 마일로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처드가 자신을 ‘애’라고 칭하다니. 오늘 마일로는 리처드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일을 시작했으며, 장난도 안 쳤고 춥다고 징징거리지도 않았다.
리처드는 마일로의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을 보며 대놓고 킬킬거렸다. 그러곤 키가 큰 마일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키 차이 때문에 보는 사람이 다 불편한 자세였으나 리처드는 마일로를 골려주는 데 정신이 팔려서 힘든 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마일로, 너는 어른 행세하는 애송이고.”
“네가 뭘 알아? 나는 오늘 무려 두 시간이나 일찍…….”
“그런 걸 일일이 따지는 것부터가 아직 어리다는 거야.”
“…….”
마일로는 정곡을 찌르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근사한 남자는 치졸하게 계산하지 않는다. 책임감 있게 맡은 일을 하다 보면, 내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 주위에서 먼저 알아줘야 한다.
“그리고 너는 키만 컸지,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하잖아.”
“시끄러워.”
마일로는 계속 성질을 돋우는 리처드를 뿌리치듯 떼어냈다. 무시하고 일이나 해야지. 절대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애를 상대로 입씨름을 하는 건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마일로는 리처드를 피해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나 리처드는 마일로를 놓아주지 않고 뒤에서 쫑알쫑알 말을 붙였다.
“난 너같이 멋진 척 구는 얼뜨기 말고, 진짜 끝내주는 남자를 봤다고. 이번에 마을 외곽에 지어진 저택 기억나지? 누가 이 깡촌에 이사 오는 거냐고 다들 말이 많았었잖아. 나는 살면서 즐길 거 다 즐긴 노부부가 온다에 내기를 걸었어. 왜, 풍경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꿱― 하고 싶은 그런 사람들 있잖아.”
안 들린다. 안 들려. 마일로는 삽으로 눈을 푹푹 찔러 가며 사체를 찾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의지와 다르게 귀는 리처드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활짝 열려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화려하게 지어진 저택의 주인이 누군지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엄―청 젊은 부부라더라. 남편이 몸이 안 좋아서 요양차 잠깐 내려온 거래. 근데 그 남편이 지금껏 내가 본 그 어느 남자보다 잘생겼어. 남자가 뭐야? 인류를 넘어서 신의 경지였다니까. 여자애들이 좋다고 난리 치는 페트릭도 그 남자 옆에 서면 바싹 말린 멸치로밖에 안 보여. 아예 종족이 달라. 비교 불가야.”
리처드는 무엇을 말하든 과장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세드릭이 여자애 두 명한테 고백받는 걸 목격한 이후로 모든 여자애가 세드릭한테 빠져 사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너도 잘만 관리하면 여자 여럿 울리는 미남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 남자를 보니까 어림도 없더라. 수도엔 저런 사람들밖에 없는 걸까? 난 평생, 죽을 때까지 이 마을 안에서만 살아야지.”
리처드는 동물의 사체를 치우는 내내 마일로에게 들러 붙어선 그 저택에 이사 온 남편이 얼마나 잘생겼는지에 대해 늘어놓았다. 지치지도 않는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열성적으로 묘사했다.
“하 정말… 우연이라도 한 번 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정말 몸이 안 좋긴 한 건지 집 밖으로 나오질 않더라.”
“설마 집 앞에서 계속 기다린 건 아니지? 내 친구가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는 놈이 아니길 바란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좀 둘러본 것뿐이야.”
마일로는 겉으론 관심 없는 척했지만 실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수도에 사는 젊은 부부가 신문도 발행되지 않는 이 시골에 저택을 지으면서까지 이사 온 것도 신기했고, 자신을 애송이 취급한 리처드가 멋진 남자라고 인정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남자는 정말로 저택 안에서 요양만 하는지, 이 좁은 마을에서 한 번을 마주친 적이 없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젊은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잊혀갈 즈음 마일로는 만나게 되었다. 그 소문의 남편을.
* * *
마을은 태양신에게 올릴 봉헌 의식 준비로 한창 어수선했다. 봉헌 의식은 태양신이 가장 사랑했다던 인간 여자의 목상을 황소만큼 크게 만들어 노래와 함께 바치는 의식이다.
올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인 만큼 마을 사람 모두가 시간과 정성을 쏟아붓는다. 목상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있으면 아예 불로 태워버리고 다시 제작에 들어가기 때문에 목상을 조각하는 사람들의 신경이 벼린 날처럼 예민해져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마일로는 목상에 필요한 나무를 베는 것과 더불어 아주 어마어마하고 중차대한 직책을 맡았다. 바로 태양신이 사랑한 인간 여자, ‘엘테미시아’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마일로는 조각가들이 자신의 그림을 본떠서 조각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담감에 짓눌려 압사당할 지경이었다.
의식 때마다 엘테미시아를 그리던 ‘오스틴’이 작년 여름부터 “태양신은 없어. 인간은 어차피 다 뒈지게 되어있으니까 대충 살아!”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리처드를 끌고 와선 알테미시아가 부활했다면서 리처드를 태양신께 바치자고 난리를 피웠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하던지, 오죽하면 리처드가 자신이 정말 태양신께 바쳐지는 줄 알고 울고불고 법석을 떨었었다.
요즘 오스틴은 3년 전에 태양신의 곁으로 간 부인이 자신에게 자꾸만 찾아온다면서 매일같이 실실 웃고 있다. 오스틴이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인정한 마을 사람들은 급하게 그의 뒤를 이을 사람을 찾았고, 이 마을에서 엘테미시아를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그림에 소질이 있는 사람은 마일로 한 명뿐이었다.
“진짜 미치겠네. 묘사만 달랑 던져주고 그리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고. 내가 천재 화가도 아니고.”
정형화된 알테미시아의 모습은 있지만, 봉헌 의식에서 처음 붓을 잡는 마일로는 모든 게 다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자신의 그림이 태양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을에 흉년이 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잠까지 설쳤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고 눈은 퀭했다. 알테미시아에 관한 서적은 모조리 다 읽었고 중요하게 묘사되어야 하는 부분을 따로 기록까지 해두었다.
“하… 도망가고 싶다.”
의식 준비로 혼잡한 마을 중심에서 벗어나 홀로 언덕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마일로는 순간 욱하고 치미는 짜증에 알테미시아의 묘사를 적어두었던 수첩을 내던졌다. 그러나 수첩이 손을 떠나는 순간 곧장 후회했다. 이곳은 언덕 위였으며, 수첩은 비탈진 경사를 따라 데굴데굴 굴러갔다.
“안 돼!”
마일로는 허겁지겁 일어나 종이를 쫓았다. 시선을 땅에 고정한 채로 팔을 뻗어봤지만, 수첩은 마일로를 약 올리듯이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어…….”
이때 수첩이 누군가의 다리에 부딪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마일로는 수첩을 주워야 한다는 것도 잊고 앞에 선 사람에게 눈길을 빼앗겼다.
“…….”
반듯한 이마를 드러낸 화사한 금발 아래로 시원하게 뻗은 짙은 눈썹. 안광이 비치는 푸른 눈동자와 우뚝 선 콧대는 사람의 얼굴이 아닌 예술 작품 같았다.
마일로는 차분하게 다물어진 남자의 긴 입매를 눈으로 더듬으며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남자는 어디 하나 모난 곳 없는 이목구비를 가진 것으로도 모자라 피부에서 은은하게 빛이 감도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찬사를 붙여도 아깝지 않을 미남이었다.
마일로는 이 사람이 그 소문의 병약한 남편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런데 병약하다기엔 몸이 지나치게 다부졌다. 코트로 몸을 감싸고 있어도 큰 키와 쭉 뻗은 어깨는 숨겨지지 않았다.
남자의 유리알 같은 푸른 눈동자가 스르르 움직여 마일로에게 닿았다. 오싹. 시선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무서웠다.
바닥에 떨어진 수첩을 주워야 하는데 싸늘하게 닿는 시선에 온몸이 묶인 것만 같았다. 남자의 저 눈빛은 낯선 이를 향한 적의나 경계 따위가 아니었다.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마일로는 자신이 무생물이 된 것 같은 초라함을 느꼈다.
“……?”
순간 표정 없이 권태롭기만 하던 남자의 얼굴이 마법처럼 느슨해졌다. 남자를 둘러싼 위압적인 기운이 화악 풀어지면서 그의 입가엔 놀랍게도 옅은 미소까지 걸렸다.
마일로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나? 하고 의심했다.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에 변할 수 있지?
급기야 남자가 허리를 숙여 수첩을 주워들자마자 누군가가 남자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얗고 작은 손이 남자의 팔뚝을 툭툭 두드린다.
“뭐 하고 있었어?”
여자는 남자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사람을 찍어 누르던 푸른 눈동자는 어느새 꿀이 흐를 것처럼 달콤하게 변해있었다. 눈앞의 여자가 대뜸 주먹을 내지른다고 하더라도 하하하 웃으며 얼마든지 제 뺨을 내어줄 것 같았다.
대체 누구길래 이 남자가 속없는 사람처럼 실실대는 걸까. 마일로는 고개를 내려 하얀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아…….”
동시에 그는 거대한 쇳덩이가 자신의 머리를 후려치는 것 같은 충격에 빠졌다. 귀에 댕― 하고 거대한 종소리가 울리더니 남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와 차원이 다른 전율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퍼졌다.
‘알테미시아……?!’
마일로는 여자의 모습을 전부 눈에 담았다.
윤기가 도는 새까만 머리가 가느다랗고 하얀 목 언저리를 살랑살랑 스친다. 여자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도 살아 숨 쉬는 것처럼 하늘하늘 흔들렸다. 긴 속눈썹 아래로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빛을 내고, 입술은 흰 피부와 대비되어 더욱 붉게 느껴졌다.
알테미시아에 대한 묘사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생김새하며 묘하게 무심해 보이는 인상까지 전부.
마일로가 넋을 빼놓고 여자를 보고 있는 사이 거칠거칠한 것이 마일로의 손을 툭툭 건드렸다. 언덕 밑으로 굴러갔던 수첩이다.
“저분이 뭘 떨어뜨린 것 같아서 주워드리고 있었어요.”
“그랬어? 착하네.”
남자가 싱긋 미소 지으면서 얘기했다. 마일로는 할 말을 잃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여자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수첩이 떨어져 있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던 놈이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이다.
여자는 남자의 연기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당연했다. 마일로도 남자의 그 싸늘한 얼굴을 보지 못했더라면 저 해사한 미소에 끔뻑 넘어갔을 거다.
툭. 수첩이 한 번 더 마일로의 손등을 건드렸다. 멍하니 서있던 마일로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남자가 마일로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안 가져가요? 신문지 빼앗긴 노숙자처럼 뛰어오길래 당연히 그쪽 거인 줄 알았는데.”
남자는 산뜻한 어투로 겉멋이 잔뜩 들어있던 마일로의 심장을 후벼팠다.
“…고맙습니다.”
조금도 감사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감사 인사 없이 수첩만 달랑 받게 되면 도리어 자신이 무례하고 이상한 사람이 된다. 그건 억울하다.
마일로는 여자를 힐긋 쳐다보고는 남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말이 퉁명스럽게 나가는 건 자신도 어찌하지 못했다.
“어? 이거 봉헌 의식에 쓰이는 거 맞죠?”
마일로가 받아들기 전에 수첩이 옆으로 휙 사라졌다. 여자가 수첩을 쥔 남자의 손을 끌어당겨 제 눈앞에 가져다 댄 것이었다. 남자는 여자가 수첩 안의 내용을 읽기 편하도록 각도를 조절해 주었다.
여자의 관심에 마일로는 화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태양신이 사랑한 알테미시아의 묘사를 적어둔 거예요. 봉헌 의식은 어떻게 아셨어요?”
“여기에 있다 보니 모를 수가 없던데요.”
“하하… 1년에 딱 한 번 있는 의식이라 마을 사람들이 전부 봉헌 의식 준비에만 매달려있어요.”
여자는 시선을 종이에서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애…… 아니, 잭.”
“네?”
“여기에 적힌 묘사가 나랑 비슷하지 않아?”
여자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일로는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덕분에 저 남자의 이름이 잭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저 남자의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여자가 스스로 알테미시아와 닮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일로는 여자의 한마디에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무언가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잭은 “어디 봐요.” 하면서 여자가 가리키는 곳을 읽어나갔다.
여자가 온 이후로 저 잘난 얼굴에 미소가 걷히지 않았다. 알테미시아에 대한 관심은 생쥐의 항문 털만큼도 없으면서 여자가 보라고 하니까 집중하는 척하는 것이 마일로의 눈엔 훤히 다 보였다.
“어때?”
“머리랑 눈이 검다는 부분이요?”
“응. 머리 길이도 그렇고.”
“머리 색과 길이가 같다고 해서 선배와 비슷하다고 할 순 없어요. 선배는 선배인데, 감히 누구를 선배랑 비교할 수 있겠어요?”
“야, 뭘 그렇게 거창하게 얘기해. 그냥 흘려들어.”
“제가 어떻게 선배 말을 흘려듣죠? 전 선배가 시키는 거라면 뭐든지 해내려고 노력하지만… 보세요. 눈앞에서 바람이 불면 저절로 눈꺼풀이 감기잖아요. 그런 것처럼 이건 제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알았으니까 조용히 해.”
여자는 단호하게 잭의 말을 끊어냈다. 명백한 무시였다. 그러나 잭은 서운해하거나 화내는 기색 없이 그저 좋다고 근사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마일로는 그런 잭의 모습이 아니꼬웠다. 우연히 마주친 사이일 뿐이지만, 처음 남자와 눈을 마주쳤을 때와 지금의 태도가 확연하게 다른 탓이었다.
평소라면 이상한 사람들이네 하고 넘어갔을 텐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참견하고 싶은 충동이 온몸을 두드렸다. 봉헌 의식 때문에 며칠 밤을 꼬박 새워서일까, 알테미시아를 닮은 저 여자 때문일까. 어쩌면 성년식을 치른 후 자신의 내면에 무언가가 변화했을 수도 있다.
마일로는 티 나지 않게 숨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거,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가 흔치 않잖아요.”
마일로가 어설프게 웃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마일로를 마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마구잡이로 두근거린다.
“그렇긴 하죠.”
여자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짧은 대꾸에도 마일로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수 있을 만큼 기뻤다. 두근거리던 심장은 고삐 풀린 말처럼 질주하더니 이내 고막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마일로는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머리를 거치지 않고 마구 내뱉었다.
“머리 색만 닮은 게 아니에요. 세상만사 관심 없는 듯하면서 사람을 홀리는 긴 눈매랑 붉은 입술, 가는 어깨…….”
이때 큼지막한 손이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여자의 동그란 어깨뼈에 들러붙는 걸 본 순간 마일로는 찬물이 끼얹어지는 기분이었다.
잭이 여자의 머리에 뺨을 깊게 누르며 마일로를 향해 싱긋 웃었다.
“계속 얘기하세요.”
이건 모르는 척하려야 할 수 없는 영역 표시였다. 마일로는 열여덟 해를 살면서 오늘 본 사내에게 처절한 패배감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마일로의 속에선 오기가 차올랐다.
정말 성년식을 치르고 나니까 없던 용기가 생기기라도 한 걸까? 마일로는 이를 악물고는 눈에 힘을 주어 부릅떴다.
“그래서 말인데,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여자의 미간이 살짝 좁아진다. 마일로는 재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알테미시아의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글로 된 묘사만으로는 도저히 붓을 들 수가 없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 모델이 되어주겠어요?”
“제가 도움이 될까요?”
“저의 모든 것을 걸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음… 그러니까 레이디, 당신…….”
살면서 이 작은 마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마일로는 처음 본 젊은 여자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다. 우물쭈물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지려는 찰나 여자가 구원처럼 입을 열었다.
“‘벨’이요.”
“아, 네 감사합니다. 벨.”
벨. 입술이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어감이 부드러웠다. 벨은 차가운 인상과 다르게 따뜻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벨을 처음 보는 순간 알테미시아가 환생한 건 아닌가 하고 눈을 의심했어요……. 오래 붙잡고 있지 않겠습니다. 딱 사흘 동안, 하루 두 시간씩만 벨을 그릴 수 있게 해주세요.”
벨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잭은 벨이 당연히 마일로의 부탁을 거절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벨의 침묵이 길어지자 불안한 듯 그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선배…….”
마일로는 잭이 벨을 구워삶기 전에 쐐기를 박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잭의 말을 끊고 다급하게 벨의 이름을 외쳤다.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을의 1년이 달린 중요한 의식이에요. 오스틴 영감님이 하루아침에 노망이 나는 바람에 제 의지와 상관없이 붓을 쥐게 됐는데,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마을에 흉작이 들면 도안을 그렸던 제 탓을 할 테고, 저는 견디지 못할 겁니다. 사실 지금도 딱 죽고 싶어요. 서적 몇 개만 달랑 던져주고는 저보고 알아서 그리라는 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닌가요? 벌써 일주일째 잠을 못 자고 있어요. 사실 어제는 몰래 야반도주를 할까도 진지하게 고민했다고요.”
말을 하다 보니 정말 울컥하고 차오르는 게 있었다. 그간 쌓였던 설움이 폭포수처럼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숨이 가빠졌다.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의 처지가 불쌍해서 마음이 아려온다.
“…다들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그리라고 하지만 저 말의 진짜 뜻이 뭔지 알아요. 징징거리지 말고 훌륭한 결과물을 내라는 거죠. 매일같이 도안은 얼마나 진행됐냐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머리털이 한 움큼씩 빠진다고요”
“알았어요. 진정하고, 그만 뚝 그쳐요.”
“예? 누가 울기라도 합니… 아.”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마일로의 눈물에 벨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벨은 어깨를 감싼 잭의 팔을 귀찮다는 듯이 치워버렸다.
마일로는 벨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부끄러워졌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 옷으로 얼굴을 박박 닦아냈지만 빨갛게 부어있는 눈은 그대로였다. 마일로는 고개를 푸욱 숙인 채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해드릴게요.”
“네?”
마일로는 다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벨은 난감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고, 옆에 선 잭은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저, 정말이세요?”
“네. 대신 딱 사흘만이에요.”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벨은 마일로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옆에 선 잭을 살피며 한숨을 작게 내쉰다. 잭의 눈꼬리가 우울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놈의 실체를 알고 있는 마일로도 가슴이 뜨끔해질 만큼 가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정신 차려. 저놈은 지금 가증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마일로는 벨의 마음이 바뀔까 봐 서둘러 자신의 집 위치를 알려주었다. 벨은 받아 적는 시늉도 하지 않고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잭의 얼굴에 닿아있었다.
“저, 벨… 제 얘기 들으신 거 맞죠?”
“아, 네. 잊지 않고 찾아갈게요. 그럼 내일 봐요.”
벨은 잭을 데리고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화려했던 그 저택으로 가는 거겠지. 벨의 뒷모습이 손톱만큼 작아지고 나서야 마일로는 발을 움직였다.
충동적으로 용기를 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골치였던 알테미시아의 그림도 완성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벨을 더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마일로는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잭만 바라보았던 벨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선배라고 부르던데. 부부 사이에 그런 호칭을 쓰나? 만약 두 사람이 부부가 아니라면…….”
이날 마일로의 꿈속에는 벨이 나왔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벨을 빼앗아 가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잭도 함께.
* * *
“안 돼.”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너무 보고 싶어지면 찾아올지도 몰라요.”
마일로는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열 개를 꽉 쥐었다 펴보기도 했다. 무사히 잘 달려있군. 그렇다면 저들의 눈이 이상한 건가.
마일로는 벌써 한 시간째 이젤 앞에 앉아서 벨과 잭만 쳐다보고 있었다. 난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벨만 올 줄 알았는데 잭까지 같이 딸려 올 줄이야…….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함께 오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을 앉혀놓고 투명 인간 취급하는 건 너무하지 않는가?
하지만 가장 어처구니가 없는 건 저 두 사람이 마일로를 한 시간가량 방치해 놓고 옥신각신하게 된 이유다.
잭은 자신이 쿠션 역할을 자처하며 벨이 제 무릎 위에 앉기를 바랐다. 이게 무슨 눈꼴 사나운 발언인지……. 더 놀라운 건 잭의 이런 언행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익숙해하는 벨의 태도였다.
벨은 아주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했고 잭은 그런 벨에게 갖은 불쌍한 척을 다 해가며 애원하는 중이었다.
“그건 얌전히 기다리는 게 아니잖아, 애… 아니 잭.”
벨이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잭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벨의 허벅지에 뺨을 기댔다.
덜컹!
저건 과감한 걸 넘어서 무례할 정도의 접촉이었다. 놀란 마일로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묵직한 소음을 내자 벨이 마일로 쪽을 돌아본다. 하지만 벨의 고개가 돌아가기 무섭게 잭이 벨의 시선을 다시 잡아챘다.
“네. 거짓말했어요, 죄송해요. 사실 얌전히 기다리는 건 무리예요. 선배를 생각하면서 자위할 거예요. 선배의 옷에 얼굴을 파묻고, 선배의 체취를 제 정액 냄새로 덮을 거예요.”
“향수 때문에 이미 내 체취는 사라졌을걸. 그리고 너… 굳이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평소에 혼자 자주 하잖아.”
벨이 마일로의 눈치를 보며 소리를 죽였다. 하지만 마일로의 집은 숨소리 하나까지 다 들릴 정도로 지나치게 고요했다. 마일로는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음담패설에 귀는 물론이고 얼굴 전체가 홧홧해졌다.
“…보셨어요?”
“어떻게 안 봐. 네가 새벽에 내 이름 부르면서도 하고, 목욕 끝내고 침실로 들어가는데 하고 있고, 자는 동안 내 얼굴 앞에서 문지르고 있는데 모르는 게 바보지. ”
“몰랐어요.”
“그때마다 내가 못 본 척하고 자는 척하느라 얼마나 난감한 줄 알아?”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잭은 눈꼬리를 접어 해사하게 웃었다. 작정하고 꼬시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잭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마일로조차도 손가락이 움찔거릴 정도로 미소의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삭막한 마일로의 집에 꽃바람이 부는 것처럼 달콤한 느낌을 들게 했다.
‘저, 저 요망한……!’
저 자식, 분명히 벨이 보고 있는 줄 알고 일부러 그런 음란하고 더러운 행위를 했던 게 분명하다.
벨은 잭의 음흉한 속내도 모른 채 놈의 화사한 미모에 홀렸다. 그녀의 찡그린 얼굴이 사르르 풀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벨은 잭의 매끈한 뺨을 강아지 쓰다듬듯이 어루만졌다. 잭은 그녀의 손길이 익숙한 듯 살며시 눈을 내리감았다.
‘속눈썹 길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마일로는 잭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혼자 속으로 씨근거리고 있을 때 벨이 단호하게 얘기했다.
“예쁜 척 그만하고 얼른 나가.”
“상냥한 목소리로 매몰차게 말하지 말아주세요.”
“나 앞으로 한 시간은 더 앉아있어야 되는데, 벌써 허리 아프려고 그래.”
“죄송해요.”
잭이 미련이 뚝뚝 흐르는 눈을 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냥 나가기는 아쉬웠는지 벨의 목덜미를 감싸고 몸을 낮춘다.
마일로는 두 사람의 얼굴이 손 한 뼘 거리만큼 가까워져 가는 것을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이때, 벨이 잭의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밀어냈다.
“까불지.”
키스 시도가 불발된 잭은 억지로 밀어붙이는 대신에 우울한 얼굴로 물러났다. 벨이 손을 훠이훠이 내젓자 그제야 집 밖으로 향한다. 문이 쿵,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마일로는 무심코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 끌어서 미안해요.”
벨이 민망한 듯 뺨을 긁적였다. 마일로는 풀어져있던 몸을 뻣뻣하게 세우며 양손으로 손사래 쳤다.
“아니, 아닙니다. 저를 도와주시는 건데…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마일로는 자신의 공간에 벨과 단둘이 남겨졌다는 사실이 뒤늦게 실감되었다. 목이 바짝 타고, 입술이 말랐다. 태어나 처음 겪는 거친 두근거림에 사고가 마비될 것만 같았다.
‘진정하자… 진정해.’
벨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몸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마일로는 괜히 뒷머리를 거칠게 문지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따로 포즈를 취하실 필요는 없고, 앉아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네.”
마일로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연필을 쥐었다. 새하얀 캔버스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어 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무심하면서도 청초한 검은 눈동자와 정확히 시선이 마주쳤다.
“쿨럭!”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이 상태로는 캔버스에 선 하나도 못 긋겠어.
마일로는 몸 안에 감도는 열기라도 식히고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물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망할 손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파들파들 떨리는 바람에 물이 온 사방으로 다 튀어버렸다.
“괜찮아요?”
“네, 괘, 괜찮습니다. 제가 그… 원래 이렇게 실수를 하는 편은 아닌데, 오늘 왜 이러지…….”
젠장. 이게 무슨 추한 꼴이야. 마일로는 그대로 물 잔으로 머리를 깨서 죽고만 싶었다. 횡설수설하면서 황급히 쏟은 물을 닦고 있을 때 벨이 말을 걸었다.
“마을에서 가장 큰 의식이라면서요?”
“예?”
“봉헌 의식이요.”
“아, 네, 네…….”
“1년에 단 한 번밖에 없는 의식인 데다가 어린 나이에 급작스럽게 중요한 역할까지 맡았는데, 안 떨리는 게 이상하죠.”
벨이 나긋한 목소리로 마일로를 위로했다. 마일로는 물을 닦던 것도 잊고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갑자기 봉헌 의식 이야기를 왜 하는 거지? 아, 설마… 내가 봉헌 의식 준비 때문에 긴장한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벨은 마일로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아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저 눈치라면 잭의 가증스러운 연기를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네, 그래도 벨이 도와주신 덕에…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일로는 펄떡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꾸욱 누른 후에 다시 그림에 집중했다. 마일로를 도와주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낸 벨의 수고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게 쉬워 보여도 실제로 해보면 목부터 시작해서 골반까지 온몸이 아프고,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일로는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려 노력하며 캔버스에 선을 그었다.
사각사각― 연필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취향의 얼굴을 그리는 작업이라 그런지 마일로는 다른 그림을 그릴 때 보다 훨씬 즐겁게, 그리고 빠르게 작업할 수 있었다.
스케치가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벨과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아직 조금 남아있었다.
마일로는 내내 궁금했던 것을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 잭이랑 혼인하신 거죠? 다른 의미가 있어서 물어본 건 아니고요. 선배라고 부르시길래…….”
벨이 따져 묻지도 않았는데 마일로는 제발 저린 도둑처럼 황급히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같은 아카데미를 나왔거든요. 옛날 버릇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거예요.”
“아… 아카데미를 같이. 크흠, 그, 그래도 부부 관계에서 그런 호칭은 좀 어색하지 않나요? 저처럼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두 사람이 혹시 단순한 선후배 관계가 아닐까 하던 기대는 잭의 과한 스킨십으로 인해 이미 산산이 조각났다. 마일로는 두 번째 기대를 하는 중이었다. 바로 잭을 향한 벨의 마음이 깊지 않을 가능성을.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벨의 건조한 대답에 마일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연인들은 자고로 남들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티 내지 못해서 안달이기 마련이다. 궁금하지도 않은데 커플로 맞춘 악세서리를 보여준다든지, 일부러 닭살 돋는 애칭으로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벨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 말은 즉! 언제라도 잭을 뻥 차버릴 수 있을 정도로 미련이 없다는 뜻이다!
마일로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음 작전으로 넘어갔다.
“저희 마을에 오신 이유가, 잭의 병 때문이라던데…….”
바로 잭의 사악한 실체를 까발리는 작전. 벨은 잭이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에 그를 시원하게 차버릴 거다.
“좀 괜찮아지셨나요?”
마일로는 잭을 걱정하는 척하며 물었다. 마을에 알려진 소문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인 게 분명하다. 그놈이 병이라고? 드래곤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것 같은 놈이 무슨.
마일로의 물음에 벨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 안 해요.”
얼핏 보기에 그녀의 표정은 전과 다름없이 무심하기만 했으나, 내쉬는 숨, 눈빛 그리고 조용히 힘이 들어간 주먹 쥔 손에서 긴장을 억누르는 게 느껴졌다.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병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벨이 아무렇지 않은 척, 느릿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잭이 저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어요. 그 이후로 계속 악몽을 꿔요. 이건 어떤 의원도 고치지 못해요. 걔가 꾸는 악몽이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있는 건 오직 저밖에 없어요. 나 때문에 생긴 병이니까……. 내가 책임을 져야 해요.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래서 우리는 평생을 지옥 속에서 살아야 해요.”
덤덤하게 흐르던 목소리가 허공으로 종적을 감췄다. 마일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둘 사이엔 자신이 끼어들 공간 따위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사랑을 넘어선 무언가가 존재했다.
잭은 벨 때문에 지옥으로 처박혔고, 벨은 그런 잭에게 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과연 이게 사랑이라고 할 수는 있는 걸까?
* * *
‘지옥은 얼어 죽을! 지금 저 자식 표정을 보라고요, 벨! 제국을 손에 넣은 황제도 저렇게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진 않을 거예요!’
잭은 벨의 사소한 모든 행동에 유난스럽게 반응했다. 벨이 그의 팔을 툭툭 건들면 꿀이 흐를 것 같은 달콤한 눈으로 미소 짓고, 재채기 하나에도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저게 어디가 지옥에 살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란 말인가.
마일로는 생각했다. 눈치 없는 벨이 또 저놈에게 속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잭은 벨이 가여워할 만큼 안쓰러운 존재가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잭의 실체를 벨에게 알려야만 해.’
벨이 알테미시아의 모델을 약속한 두 번째 날이다. 그림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마일로는 자신이 그린 벨을 보고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쏟아질 것을 상상하며 이젤을 정리했다. 반토막 난 연필을 넣으면서 오늘 장이 열리는 날인 걸 상기했다.
마침 식재료도 사야 했기에 긴 고민 없이 바로 외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벨에게 “같이 시장 구경 가실래요?”라고 물은 건 순전히 충동이었다. 마일로의 제안에 벨은 호기심을 보였고 찰거머리처럼 잭이 따라붙었다.
대도시의 시장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작은 규모긴 하다. 하지만, 봉헌 의식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태양신을 본뜬 조각품들이나 장식, 구운 파이, 쿠키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잭은 시장으로 가는 내내 벨의 몸에 제 손이나 팔이 닿아있지 않으면 죽는 사람처럼 굴었다. 벨이 잡은 손을 빼내면 어깨를 감싸 안았고, 그것도 쳐내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몸은 아예 벨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마일로는 그런 잭을 보며 ‘그렇게 옆만 보고 걷다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하고 그가 우스꽝스럽게 넘어질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변했다. 저놈은 관자놀이에도 눈이 달렸나…….
“으헉!”
벨과 잭을 신경 쓰느라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건 마일로도 마찬가지였다. 길에 살짝 파인 홈을 발견하지 못하고 발이 걸린 것이다. 마일로의 몸이 벨 쪽으로 기울어지자 벨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벨이 잡아주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힘이 마일로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마일로는 강풍에 나부끼는 나뭇가지처럼 크게 휘청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윽……!”
차라리 넘어진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손목에서 느껴지는 악력이 무시무시했다. 뼈가 통째로 부서질 것만 같은 통증에 마일로가 아픈 신음을 토했다.
그러나 손목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도 잭의 싸늘한 눈빛이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을 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손목을 휘어잡은 큰 손이 빠져나갔다. 마일로는 쿵쿵 뛰는 심장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아프다고 한마디라도 했다간 잭이 소리 소문 없이 저를 없애버릴 것만 같은 위험한 상상이 침범했다.
벨은 여전히 걱정이 그득한 눈으로 마일로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표정이 안 좋은데……. 발목 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정말, 정말로 괜찮습니다.”
거듭 괜찮다는 말을 듣고서야 벨은 시선을 거두었다. 혹시 모르니 꼭 진료를 받아보라는 다정한 말을 잊지 않으면서. 마일로는 붉어져 있을 제 손목을 등 뒤로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내 옷.”
본격적으로 구경을 하기 전에 문제가 생겼다. 벨이 마일로의 집에 겉옷을 벗어둔 것을 시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추우시면 제 옷 벗어드릴게요.”
잭이 입고 있던 재킷을 빠르게 벗어서 건넸지만 벨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지금 내가 빨리 가지고 오면 돼.”
“제가 갔다 올게요.”
“아니야. 가까운데 뭘 둘씩이나 가. 너는 마일로랑 먼저 둘러보고 있어.”
잭이 더 말하기 전에 벨이 마일로의 집 쪽으로 달려갔다. 가면서 “쫓아오면 너랑 말 안 한다!”라고 엄포를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일로는 졸지에 잭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둘만 남는 건 좀 무서운데’
그나마 이곳이 꽉 막힌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시장이라서 다행이었다.
잭은 벨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두르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졌다. 푸른 눈동자는 언 호수처럼 차가운 빛을 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소풍 가기 전날의 아이처럼 들떠 있던 놈이 지금은 권태로움을 휘감고 있었다.
마일로는 맹수 앞에 선 생쥐가 된 기분이었다. 그를 곁눈질하며 한 발자국씩 거리를 벌렸다. 놈과 나란히 서있는 것만으로 위압감에 깔려 죽을 것만 같았다.
‘대체 언제 오시는 거지’
이제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초 단위로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더는 견디기 힘들어 직접 데리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잡화상이 수레를 끌고 잭의 앞에 섰다.
“봉헌 의식 기간에만 볼 수 있는 태양신 조각품입니다! 가정에 평안과 영원한 사랑이 깃들게 해주죠”
영원한 사랑이 깃든다는 말에 잭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이채를 띠었다. 그러나 상인이 내민 조각품을 받아들고는 눈썹이 불쾌하게 일그러진다.
태양신의 외형은 전형적인 미남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박처럼 땡땡하게 부푼 배와 축 흘러내린 가슴, 양쪽 유두엔 말 머리 장신구가 달려있었다.
태양신 조각품은 나체임에도 덩굴 숲처럼 수북한 음모가 성기를 완전히 가리고 있어서 외설적인 느낌은 없었다. 음모는 배를 타고 올라와 가슴골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당최 어디가 음모이고 어디가 가슴 털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콧속이 전부 들여다보일 거 같은 커다란 콧구멍과 하관의 반을 뒤덮는 두꺼운 입술, 부리부리하게 짙은 눈에선 신의 위엄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저렴하게 드리겠습니다.”
“이 흉물이 영원한 사랑을 깃들게 해준다고?”
잭의 발언에 떠들썩하던 주변이 일순 조용해졌다. 다들 겉으로 티는 안 내고 있었지만 외부에서 온 미남을 몰래 훔쳐보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가 마을의 수호신이라 할 수 있는 태양신을 흉물이라고 칭했다.
이건 신성 모독이자 마을의 자긍심을 건드린 행위였다. 상인이 장사꾼 특유의 웃음을 거둬들이고 태양신 조각품을 잭에게서 빼앗아 수레에 담았다.
“나도 댁 같은 손님은 필요 없수다!”
잭은 저한테 쏠리는 눈총에도 손수건을 꺼내어 조각품을 만졌던 손을 닦았다. 그는 제 행동이 타인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대놓고 수군거리지는 못했으나, 저마다 못마땅한 기색을 힐끔 내비쳤다. 잭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때, 잭이 대뜸 뒤를 돌았다. 멀리서부터 벨이 뛰어오고 있었다. 마일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점처럼 작은 벨을 겨우 발견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선배!”
잭은 햇살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벨을 항해 양팔을 벌렸다. 벨은 그에게 안기는 대신 그저 손을 한 번 꽈악 잡아주는 거로 그쳤지만.
“하아, 하아… 왜 아직 여기 있어? 구경 안 했어?”
“선배가 없으니까 구경할 기분이 안 나서요. 저는 선배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아시잖아요.”
잭이 눈꼬리를 예쁘게 접으며 말했다.
그는 자신의 미모가 주는 파괴력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할 줄 알았다. 그는 미소 한 번으로 ‘흉물’ 발언으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전부 잡아끌어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지만, 벨은 이런 잭의 미인계에도 가볍게 웃어주고 말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관심이 향한 건 상인의 수레에 담겨있던 태양신 조각품이었다.
“와. 이거 뭐야? 되게 귀엽다.”
벨이 조각품을 집어 들며 말했다. 상인이 화색을 띠며 맞장구치려 했으나, 잭이 끼어드는 게 더 빨랐다.
“태양신을 본떠 만든 조각품이래요. 기념품으로 사갈까요?”
“너 ‘오늘의 메뉴’ 기억나지? 나 아카데미 다녔을 때 자주 갔던 곳. 거기 주방장 클린 씨를 닮은 거 같아.”
“테이블에 화병 대신 장식품으로 두면 괜찮겠어요. 생긴 것도 귀엽고, 옛날에 선배랑 처음 데이트했던 때가 떠올라서 저도 좋아요.”
“뭐? 그게 왜 데이트야. 네가 그냥 억지로 따라온 거잖아.”
“선배가 처음으로 제게 밥을 사주신 날이기도 하죠.”
“그 얘기는 꺼내지도 마. 네가 아카데미 정문에 세운 그 황금상 때문에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벨과 잭이 다정하게 투닥거리는 동안 주위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일로는 벨이 오기 전 잭이 태양신 조각품을 흉물 취급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경멸이 긁고 지나간 눈동자, 냉랭하게 굳은 입매, 권태롭게 식어있던 낯빛까지 전부. 그런 그가 지금은 생일 선물 포장지를 뜯어보기 전의 아이처럼 설레하고 있었다. 가식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저놈의 병은 악몽이 아니라 다중인격 아니야……?’
결국 벨과 잭은 태양신 조각품을 하나도 아닌 두 개나 구입했다.
* * *
모델을 약속한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마일로는 오늘이 벨에게 잭의 정체를 낱낱이 까발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알테미시아 그림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게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다음 해부터는 새로 그림을 그릴 필요도 없이 이 그림 한 장으로 후대의 후대까지 알테미시아 조각상을 만들어도 될 정도로 완벽했다.
마일로가 붓을 내려놓자, 한 시간 동안 앉아있던 벨이 보는 사람이 시원할 정도로 크게 기지개를 켰다.
“죄송해요. 많이 피곤하시죠.”
벨은 개운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모델도 오늘로써 마지막이네요. 완성된 그림을 볼 수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요.”
마일로는 붕대를 칭칭 감아놓은 왼쪽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내일 벨은 긴 휴가를 끝내고 이 마을을 떠나 본집으로 돌아간다.
‘오늘이 아니면 안 돼. 주저할 시간은 없어.’
마일로는 망설임 때문에 평생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벨은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이다. 그녀를 사악하고 가증스러운 잭으로부터 반드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마일로는 욱신거리는 손목을 느끼며 힘주어 주먹을 쥐었다.
“저, 벨……!”
입을 열기가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며 잭이 벨의 곁으로 다가간다. 벨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겉옷을 잭에게 넘겼다. 마일로의 눈동자가 잭에게 닿았다가, 벨에게 닿는다.
‘마, 말해야 하는데……!’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고 있을 때, 어느 순간 벨과 정확히 시선이 맞물렸다.
“할 말 있어요?”
“아, 저, 그게, 시간을 좀 내주셨으면…….”
‘저놈이 말 걸면 죽인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어서 입을 못 열겠어!’
마일로는 당장 이 방을 뛰쳐나가 큰 소리로 울고 싶었다.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 관자놀이 아래로 느리게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일로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잭이 벨의 짧은 머리카락을 은근하게 어루만졌다.
“선배, 약속했던 시간은 끝났어요. 지금부터 선배의 시간은 모두 제 거예요.”
“…….”
“방치된 채로 기다리는 건 너무 힘들어요.”
잘 훈련받은 강아지처럼 굴던 잭이 처음으로 소유욕을 드러냈다. 벨은 고개를 올려 잭을 바라보았다.
“선배.”
잭이 간절함을 담아 속삭였다. 애정 속에 감춘 추잡한 집착이 그의 눈빛에, 코끝에, 입술에 매달려있었다. 벨이 그런 잭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더 시간을 내어드리는 건 힘들어요. 내일 바로 떠나야 해서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요.”
벨의 단호한 음성에 잭이 희미하게 웃었다. 반면 마일로는 조급해졌다. 벨이 잭과 함께 문 쪽으로 이동하자 불안하게 요동치는 심장이 굳어버린 혀를 재촉했다.
“꼭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요!”
잭이 문고리를 쥐었을 때 절로 큰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이것은 절박함이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벨이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일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혀가 움직이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두, 둘이서만요. 내일 떠나시면,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어려우시겠지만 제발 제게 조금만 더 시간을 내주세요. 그냥 제 얘기를 들어주시기만 하면 돼요. 부, 부탁드려요.”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펄떡펄떡 뛰었다. 벨에게 고백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눈가에 열이 오르고, 떨리는지 모르겠다.
벨이 마일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 알았어요. 울지 말고.”
“예? 아, 안 울어요.”
마일로는 허겁지겁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물기가 조금 묻어 나오자 일순 부끄럼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아니, 그러니까 이건…….”
마일로가 양손으로 눈가를 세게 비비며 눈물을 닦아냈다. 이때 작고, 말랑거리는 손이 온기를 품은 채 마일로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마일로는 이 사소한 접촉 하나로 딛고 선 땅이 심해 깊은 곳으로 침몰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불안하게 요동치던 심장과 안절부절못하던 몸이 물속에 잠겨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상념들이 모조리 가라앉았다. 그저 제 손을 쥔 이 작은 감각만이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알았어요. 그만하세요. 눈이 빨개요.”
“저, 진짜 운 거 아닌데…….”
벨이 힘 빠진 얼굴로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일로의 손목을 살포시 쥐고 있던 손이 빠져나간다. 마일로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찔 움직였다.
벨은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적이며 잭을 바라보았다. 잭은 벨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아차린 얼굴이다. 그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잭, 딱 10분만.”
“…….”
“그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잖아. 그렇지?”
잭은 조금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입을 다물고 서있었다. 하지만 벨이 손끝으로 그의 가슴팍을 툭 하고 밀자, 잭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10분이 지나면, 대화가 끝났든 아니든 간에 선배 안아 들고 갈 거예요.”
“알았어, 알았어.”
잭이 나가고 집 문이 닫혔다. 마일로는 막상 벨에게 모든 것을 폭로할 순간이 다가오자,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말이 쉽사리 나오질 않았다.
마일로는 작은 손의 부드러운 감촉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제, 제가 무례하게 굴면서까지 꼭 드리고 싶은 말은…….”
마일로가 오래도록 뜸을 들이는데도 벨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벨은 잭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네?”
“아뇨! 대답하지 마세요. 벨이 어떤 말을 하든 제가 아는 진실과 오천 광년 정도 떨어져 있을 게 분명하니까요.”
“무슨……”
마일로는 벨에게 큰 걸음으로 성큼 다가갔다. 주저했던 것과 다르게 한번 입이 떨어지니까 그간 억눌러 왔던 속내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벨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일로를 응시했다.
“벨은 아무것도 몰라요. 잭이 얼마나 냉혹하고, 속이 시커먼 인간인지!”
“…….”
“벨이 지난번에 샀던 그 태양신 조각품을 보면서 잭이 뭐라고 한 줄 아세요? 흉물이래요. 흉물. 태양신을 모시는 우리들 앞에서 그런 망언을 해놓고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었어요. 그러더니 벨이 나타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연기를 하던 꼴은 정말이지……!”
마일로는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린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벨이 없을 때 잭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신 적이 있나요? 저를 벌레 대하듯이 본다고요! 한마디라도 말을 걸었다간 그대로 짓눌러 죽여버릴 것 같은 표정이에요. 예, 상상이 안 가시겠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벨 앞에서의 잭만 봤더라면 무슨 개소리냐며 오히려 저를 정신 병원에 데려갔을 테니까요.”
“저기…….”
“하지만! 이걸 보면 제 말을 믿으실 겁니다!”
마일로는 제 왼손에 감긴 붕대를 거친 동작으로 풀었다. 붕대를 힘주어 움켜쥔 손에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마일로가 왼쪽 손목을 벨의 눈앞에 가져다 대자 벨의 입이 놀란 듯 살짝 벌어졌다. 마일로의 손목은 손자국 모양의 보라색 멍으로 뒤덮여 있었다.
“어제 잭이 제 손목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넘어지려는 저를 벨이 잡아주려 했을 뿐인데요!”
벨은 잭이 기다리고 있을 문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마일로는 답답한 듯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벨의 사과를 받으려고 보여드린 게 아닙니다! 놈의 실체를 알려드리려는 거예요. 전에, 잭의 악몽 때문에 휴양차 이곳에 오셨다고 하셨죠.”
“…….”
한 번 숨을 고른 마일로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벨은 잭이 정말로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보이세요? 제가 보기엔 전혀 아닙니다. 속고 계시는 거라고요. 동정심을 무기로 삼아서 벨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어요. 놈이 언제 본성을 드러낼지 몰라요. 놈에게서 벗어나실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는 잭처럼 가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벨에게 온 정성을 다 바칠 수 있어요!”
“…….”
“하아, 하아…….”
숨 쉴 틈도 없이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쏟아냈다. 마지막 문장을 얘기할 땐 악을 쓰듯이 언성이 높아지는 걸 느꼈다. 밖에 있을 잭이 분명히 제 목소리를 다 들었을 것이다.
마일로는 가빠진 호흡을 정리하며 벨의 얼굴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오늘처럼 큰 용기를 낸 건 처음이다. 폭로라는 이름의 고백. 마일로는 긴장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저를 생각해주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벨이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마일로의 폭로에도 그다지 경악스러워하지 않는 얼굴이 눈에 낀 먼지처럼 거슬렸다.
“저도 알아요.”
“믿기 어려우신 거 압니……. 예? 뭐라고요?”
마일로는 제 귀를 의심했다. 멍청한 목소리로 되묻자 벨이 머리카락을 양쪽 귀 뒤로 꽂아 넣은 뒤 이어 말했다.
“잭이 속이 시커먼 강아지인 거, 저도 안다고요.”
“아, 아신다고요? 아니, 그러면 당장 헤어지셔야지 왜 아직도…….”
“귀엽잖아요.”
“…….”
벨은 황당해하는 마일로에게 폭탄 같은 말을 던졌다. 마일로는 벨이 나직이 웃는 것을 보며 해일 같던 제 감정들이 한 번에 휩쓸려 나가는 것을 느꼈다. 몸속에 가득 차있던 열기가 전부 빠져나가고 허망함만이 감돌았다.
“그래도 그가 겪는 악몽이 거짓이라고 매도하지는 말아요. 전에 얘기했잖아요. 나랑 잭이 겪는 아픔은 서로 말고는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주제넘게 굴지 마요. 안 겪어 보셨잖아요.”
벨의 부드러운 음성에 마일로는 입을 다물었다. 잭이 찍어 누를듯한 위압감을 풍기는 반면, 벨은 자신만의 곧은 신념으로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진료비는 사람을 시켜서 보낼게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덕분에 즐거웠어요.”
벨이 미련 없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잭이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벨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칭얼거리듯 말한다.
“이제 더는 못 보내요. 저랑만 있어요. 저한테 무슨 협박을 하셔도 안 들을래요.”
“협박 안 해.”
잭이 벨을 끌어안은 채로 눈만 움직여 마일로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싸늘한 기운이 마일로의 등줄기를 긁어내렸다.
이 자리에 벨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내일 아침 해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거다. 잭은 여유작작한 얼굴로 입매를 부드럽게 풀었다.
잭의 미소에 마일로는 넋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집 밖으로 나가는 벨에게 손도 흔들어 주지 못했다.
“악몽은 거짓말이 맞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