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낭만이 부족한
연달아 터지는 겹경사로 평생 할 축하한다는 말을 일주일 사이에 쏟아부었다.
로제타와 쥬디퍼 사이에 쌍둥이 딸이 생겼다. 애쉬는 출산 기념 선물이라며 쥬디퍼의 머리를 돌려줬고 쥬디퍼는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로제타를 닮은 아기들은 어쩜 그리 천사 같고 예쁜지 꼬물꼬물 움직이는 손을 입속에 넣고 와라라랄 해주고 싶은 걸 몇백 번은 참았다. 문이 닳도록 쌍둥이 아가 방에 찾아가는 게 인생의 낙이 됐다.
처음엔 나를 따라 쌍둥이를 보러 다니던 애쉬가 서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전 이제 밀려난 거예요? 저는 귀엽지 않으세요?” 하고 되지도 않는 질투를 해대는 탓에 하루에 다섯 번에서 두 번으로 방문 횟수를 대폭 줄였다.
쌍둥이들이 태어난 지 딱 일주일째 되던 날 쟈스민과 포트 씨가 부부의 연을 맺었다. 포트 씨가 고백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턱이 땅 위로 떨어지는 줄 알았다. 며칠 고민하던 쟈스민은 포트 씨의 고백을 받아주었고 둘은 알콩달콩 연애하다가 1년 만에 초고속 결혼을 해버렸다.
극단에서 지지고 볶고 하며 알 거 다 아는 사이였기도 하고… 알고 지낸 기간이 10년이 넘으니 성급한 결혼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
둘은 신혼여행으로 길덴에 간다고 한다. 둘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라서 의미가 깊다나 뭐라나.
화려한 꽃으로 치장한 마차를 타고 가는 쟈스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쟈스민이 나를 보더니 눈을 찡긋한다.
아.
손든 자세 그대로 얼었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결혼 전날, 쟈스민은 뜬금없이 진지한 충고를 했다.
“너 그러다 뺏겨.”
“뭘?”
큼큼, 쟈스민은 헛기침을 삼키곤 아무도 없는 주위를 유난스레 둘러보다가 내 얼굴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 말이야.”
“폐하가 누구한테 뺏어지고 할 애가 아닌데…….”
“아니면 폐하께서 마음을 돌릴 수도 있지.”
“…그것도 상상 안 가.”
“야!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야. 언제까지 미적지근한 상태로 있을 거야? 어? 사람들이 널 두고 얼마나 수군대는지 알기나 해?”
알다마다. 혼인하지 않는 우리 둘을 두고 얼토당토않은 헛소문들이 떠돌아다녔다. 애쉬가 성 기능 불구자라서 2세를 출산하지 못하니 혼인을 미루는 거라는 둥, 사실 우리는 연인 관계가 아니라 사이비 교주와 신도 관계라는 둥(여기서 교주는 나다.), 귀족들이 서민을 황후로 맞이할 수 없다며 반기를 든다는 둥.
“신경 안 써.”
“너나 그렇지. 폐하 입장은 생각해 봤어?”
“폐하가 더 신경 안 쓸걸.”
우리가 혼인하지 않는 이유는 전적으로 나 때문이다.
나는 극단 일이 좋다. 포기하기도 싫고. 황후가 되면 극단 활동에 제약이 생기니 혼인하지 않은 거다. 애쉬는 내가 옆에만 있어준다면 뭐든 괜찮다고 했다. 나도 행복하고 애쉬도 행복한데 굳이 혼인이 필요할까.
“네 앞에서만 그러신 걸지도 몰라. 폐하께선 너 없음… 안 되는 분이시잖아. 관계를 확실히 하고 싶어 하시지 않겠어?”
“그야 그렇겠지.”
“너랑 폐하 나이를 생각해 봐. 서른이 넘도록 미혼인 황제는 폐하가 유일하고, 너도 결혼 적령기가 지나도 한참 지났잖아. 나야 곧 식을 올린다 치고. 흠 없이 완벽하던 황제 폐하의 이미지가 혼인 하나 때문에 엉망인 된 것도 알아야 해. 고자니 사이비 신도니 별별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다 떠돌잖아.”
평정심이 무너졌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애쉬의 경우 역사서에 영원토록 기록될 텐데 서른이 넘도록 미혼인 사실이 남겨지면 정말 고자 어쩌고 하는 헛소문이 후대에 이어질 것 같다.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 이건 남녀 사이에 사랑의 맹세를 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황후가 되는 문제다. 부담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겁먹을 정돈 아닌데.
나는 현재 애쉬와의 관계에 만족하고 있고 단순히 극단 일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혼인을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혼인이 미뤄짐으로써 애쉬에게 불이익이 있다고 하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극단과 애쉬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애쉬다. 게다가 혼인이 곧 극단과의 단절은 아니기도 하고.
“황후가 돼서 극단을 먹어야겠다.”
“뭐?”
“애쉬는 혼인해야 좋고, 난 극단 일을 포기하긴 싫으니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자는 거지.”
“대화의 방향이 틀어진 것 같은데.”
황실극단은 쥬디퍼의 관리 아래에 있었으나 아브모르나가 황실극단이 되면서(정확히는 내가) 권한이 애쉬에게 넘어갔다. 황후가 되면 넘겨받을 심산이다.
“혼인도 하고, 극단 일도 계속할 수 있고, 권력까지 쥐게 되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손가락을 딱 튕겼다.
“폐하를 이용해서 권력을 휘두르라는 게 아니라……. 아니, 됐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쟈스민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턱을 까닥이며 자신을 가리켰다.
“나도 친구 덕 좀 보자.”
역시. 쟈스민도 나와 별다를 게 없는 애다.
우리의 대화는 어떻게 하면 제 실속을 채울 수 있을지로 바뀌어갔다.
* * *
혼인의 필요성만 깨달았을 뿐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는 아는 바가 없다. 글도 모르는데 개인 희곡 전집을 발간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으, 막막해라. 이럴 줄 알았으면 쟈스민한테 자세히 물어볼걸.
쟈스민은 칠렐레 팔렐레 하는 얼굴로 포트 씨와 신혼여행을 갔다. 마땅히 조언을 구할 사람을 찾다가 로제타에게 상담했더니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칠 뻔했다.
“…폐, 폐하를 어떻게 하고 싶으시다고요?”
“애쉬를 제가 먹겠다고요.”
“…….”
“아, 아니지. 그러니까 애쉬는 이용만 하는 거고 내가 먹으려는 건 극단이에요.”
“이벨린.”
“죄송해요. 쟈스민이랑 계속 이런 식의 대화만 하다 보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폐하와 부부의 연을 맺고 싶다는 말이죠?”
“…네, 그거예요.”
남들 다 하는 일인데 왜 이렇게 민망한지 모르겠다.
쟈스민이랑 대화할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혼자 곰곰이 생각하고 또 고민하다 보니 ‘부부’, ‘혼인’ 따위의 글자가 심장을 덜컥하게 한다. 이제는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부끄럽다.
식을 올리면 애쉬랑 나는 정식으로 부부가 되고 여보, 당신 따위의 호칭을 써가며 대외적인 자리에서도 남편 혹은 부인이라고 소개하게 될 거다.
…낯간지러워.
평정심을 되찾은 로제타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포갰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로제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기가 영… 불편해서 하얀 손만 감상 없이 바라봤다.
“폐하께서 기뻐하시겠네요.”
“그렇겠죠?!”
쪼그라들었던 마음이 터질 듯 팽창했다. 고개를 번쩍 들어 로제타를 봤다.
그래! 부끄러울 게 뭐가 있어. 내가 좋고, 애쉬가 좋으면 그걸로 된 거지. 무지는 사람을 용감하게 만든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준비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밀어붙이면 되는 거 아니겠어?
“당장 애쉬한테 가서 말하겠어요.”
“잠깐, 잠깐만요. 설마 극단을 먹겠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죠?”
“안 돼요?”
“하아. 폐하께선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실 거예요.”
역시 그런가. 좀 부끄럽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결혼하자!’ 하고 말을 꺼내야겠다.
그다음은… 손잡고 관공서로 가면 되려나?
내 얼굴을 불안한 눈으로 보던 로제타가 고개를 저었다.
“막무가내로 통보하는 것도 추천하고 싶진 않아요.”
치솟았던 의욕이 반절 꺾였다.
“…그럼요?”
설마― 하는 가정들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인 프러포즈에 낭만이 빠지면 안 되죠.”
로제타는 드물게 눈을 접어가며 웃었고, 반대로 내 얼굴은 식은 촛농처럼 흘러내린 눈꼬리를 하고서 딱딱하게 굳었다.
* * *
프. 러. 포. 즈.
멜로드라마에 빠지지 않는 불가결한 소재다. 활자로 많이 접했고 공연으로도 많이 봤다.
하지만 이게 내 일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뭇 소설에 나오는 판타지적 상황이 하루아침에 내 일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로제타는 프러포즈라는 감당하지 못할 숙제를 떠안겨 주는 거로도 모자라 하등 도움 되지 않는 조언도 함께 해주었는데, 애쉬에게 선물을 줬을 때 가장 반응이 좋았던 때를 생각해 보고 그때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 보라는 거였다.
선물을 줘본 적이 있냐고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닐까.
애석하게도 없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침대 위를 뒹굴었다.
어쩌라는 거야! 설마 케이크 속에 반지 숨겨놓기, 풍선이랑 촛불로 이벤트 하기, 야경 좋은 레스토랑에 데려가서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 반지 건네기 이런 걸 해야 한다는 거야?
우선 세 번째를 실행하기엔 비용이 걱정이다. 그렇다고 첫 번째, 두 번째 방법은 진부해서 딱히 끌리지 않았다. 민망해 죽을 것 같기도 하고.
“으아아, 아아!”
천재까진 아니어도 스스로가 멍청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지금은 머리가 돌이라도 된 기분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하나의 깨달음은 건졌다는 거다. 어떤 식의 프러포즈든 반지는 꼭 필요하다는 것.
“차근차근 하는 거야. 차근차근.”
극단 일을 하면서 벌어둔 돈이 꽤 있다. 만약을 대비하여 모아 두었는데 이런 일에 쓰일 줄은 몰랐네.
사실 영영 쓰지 못하고 죽는 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나에게서 나가는 모든 지출 비용은 애쉬가 부담하고 있는 중이다. 숨 쉬듯 당연하게.
…잠깐, 쓰레기가 되는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애쉬가 자고 있는 틈을 타 머리끈으로 손가락 사이즈를 재고 있는 돈을 탈탈 털어 프러포즈용 반지를 샀다.
버건디색의 케이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허리 위에 팔을 척 올렸다. 싸우는 것도 아닌데 괜히 케이스를 노려봤다.
이걸 어떻게 준담.
거추장스럽지 않으면서도 기억에 남을 만한. 진부한 건 싫고 오글거리는 것도 사양. 적당히 담백한 듯하지만 임팩트 있는 그런 프러포즈.
“어렵네.”
“뭐가 어려워요?”
“……!”
목이 어깨에 파묻힐 정도로 깜짝 놀랐다! 안 돼, 반지!
주머니에 다시 넣을 겨를도 없어서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바짝 다가온 애쉬가 무릎을 구부리고 시선을 맞췄다. 애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디 아파요?”
“가끔 그럴 때 있지 않아? 이상한 자세가 편할 때.”
“선배 다리 후들거리는데요.”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법이야. 상체는 엄청 편해.”
애쉬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일그러졌다. 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는 눈치다.
이해 안 해도 돼. 이상한 거 나도 알아.
애쉬는 “그렇군요.” 하더니 의자를 가지고 와서 내 허리를 잡고 조심스레 내렸다.
“하체도 편하면 더 좋잖아요.”
“응. 그런데 너 씻으러 안 가?”
“선배 얼굴 조금만 보다 갈게요.”
“빨리 씻기나 해.”
“제가 옆에 있는 게 싫어요?”
…아, 또 삐뚤어지려고 하네.
녀석이 불안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전에 막아야 한다. 고개를 저으며 코를 막았다.
“냄새나.”
녀석의 짙푸른 색의 동공이 크게 부풀었다. 옷깃을 들치고 킁킁 냄새를 맡다가 이내 고개를 조금 숙인다. 드러난 귀 끝이 빨갛다.
“마법 걸어놔서 땀 안 흘린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냄새는 무슨, 거짓말이지. 늘 뿌리는 은은한 향수 냄새가 은은히 풍겨오고 있었다. 당장 품에 뛰어들어 코를 박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싶을 만큼 좋은 향기다.
“땀 흘릴 만한 일이 있었어?”
“사냥 대회 준비가 끝났다고 해서 운동 삼아 잠깐 다녀왔어요.”
“아, 사냥 대회.”
번뜩!
먼 우주서부터 반짝거리고 빛나는 것이 빠른 속도로 내려와 머릿속에 꽂혔다. 많은 위인이 증명하듯 깨달음은 언제나 불시에 찾아든다.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던 난제가 풀렸다.
사냥 대회! 그거야! 바로 그때 프러포즈를 하는 거야!
눈이 녹고, 날이 볕으로 따스해지는 봄이 오면 황궁에선 정기적으로 사냥 대회를 연다. 겨울의 완전한 끝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며 귀족들 간의 친목을 다지는 사교의 장이기도 하다. 겨울 내내 혹독한 날씨 탓에 집 안에만 박혀있어야 했던 귀족들이 부족한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사냥 대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말이다.
사냥 대회는 가장 난폭하거나 몸집이 큰 동물을 사냥해 오면 우승하는 단순한 대회라서 현직 기사로 활동 중인 귀족들이 매년 우승을 차지하고 있다.
우승한 사람은 활 모양이 새겨진 브로치를 하사받게 되는데, 우승자는 그 브로치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선물하는 것이 관례처럼 이어지고 있다. 브로치에 담긴 화살 모양이 큐피드의 것과 비슷하고 심장에 달아야 하는 브로치의 특성 때문에 사람들은 브로치를 건네주는 것에 낭만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내가 우승해서 브로치와 함께 반지를 애쉬에게 주면……? 완벽한 프러포즈잖아!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느라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빨리 씻고 올게요.”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반지를 쥐고 소리 없는 함성을 질렀다.
나도 사냥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얘기하자 애쉬가 못마땅한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산 전체를 관리하고 있지만 동물들의 야생성은 보존하고 있어요. 너무 위험해요, 선배.”
“아카데미 다닐 때 괜히 수석이었는 줄 알아? 궁술도 1등이었어.”
“그건 예전이잖아요.”
“해보면 금방 익숙해질걸? 아, ‘로벤스디’가 아니라서 참가 못 하나……?”
“아뇨, 그런 건 전혀 문제가 안 돼요. 선배가 다치기라도 하면…….”
“너무 걱정하지 마. 위험할 만한 짓은 안 할게. 엄…청 멀리서 활시위만 피융피융 당긴다니까?”
멀리서는 무슨, 눈에 불을 켜고 맹수들을 추격할 거다.
애쉬가 검지로 내 손바닥을 느리게 긁었다. 고민하는 모습에 녀석의 손가락을 콱 쥐어버렸다.
“그래서 참가 신청은 어디서 하면 돼?”
결정은 내가 한다. 넌 나를 도울 뿐.
단호하게 말하자 녀석은 말리고 싶어 하는 눈치임에도 하는 수 없이 내가 원하는 답을 꺼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그런 애쉬의 어깨를 끌어와 안아줬다.
“진짜 걱정 안 해도 돼. 머리카락 하나도 안 다칠게.”
“그럼 저도 참…….”
“너는 매년 그랬던 것처럼 관중석에 앉아서 구경만 해. 알았지?”
애쉬가 참가하면 우승은 보나 마나 녀석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프러포즈를 너 때문에 허망하게 망칠 순 없잖아. 녀석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으나 모른 척하고 등만 토닥여줬다.
* * *
휘익― 푹.
화살이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고 과녁판에 꽂혔다. 스무 발의 화살 중 네 개가 정가운데에 명중했다.
한두 개는 빗겨나갔고 나머지는 가운데 언저리. 나름 나쁘지 않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팔이 엄청 욱신거렸는데 프러포즈만 생각하면 없던 힘도 솟는다.
애쉬에게 말해서 얻어낸 빈 연무장은 근 일주일 사이 거의 내 전용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난 하루 종일 이 연무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해가 저물어 시야가 어둑어둑해질 즈음에야 지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침실로 돌아갔다. 늦은 저녁을 먹고, 씻고, 애쉬에게 뽀뽀해 준 후 바로 딥 슬립.
코를 골지 않는 편인데 몸이 너무 고단하여 요즘은 코까지 골았다. 애쉬가 말해 준 건 아니었고 내 코 고는 소리에 내가 놀라서 컥! 하며 일어나 알게 된 거다.
피나는 연습 끝에 가운데에 명중한 화살의 개수가 아홉 개가 될 즈음 사냥 대회가 시작됐다.
산의 초입은 사냥 대회를 관람하거나 참가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관람자들이 자리에 착석하자 붐볐던 주위가 정리된다.
참가자들은 형평성을 위해 모두 동일한 활과 화살을 지급받는다. 활통을 어깨에 메고 뒤를 돌았다. 단이 높은 상석에 애쉬가 보여 손을 들어 흔들었다.
녀석도 나를 발견했는지 따라서 손을 흔드는데 너무 멀어서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울상을 하고 있겠지. 허리춤에 단단히 매어놓은 주머니 속의 반지 케이스 무게가 느껴진다.
둥둥!
북소리가 두 번 울렸다. 준비된 말에 올라타니 시야가 급격히 높아졌다. 틈틈이 승마 연습도 했으나 긴장한 탓인지 고삐를 쥔 손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갔다.
후, 침착하자. 등을 펴고 다리를 안쪽으로…….
그래, 좋아.
같은 소리의 북이 세 번 울리자 참가자들이 기합 소리를 내며 말을 달렸다. 나를 지나쳐 가는 사람들에 당황했다가 재빨리 정신을 다잡고 나도 말의 옆구리를 압박했다.
“쉬이, 착하다. 너무 빨리 달리진 마. 빠르다고 이기는 대회가 아니니까.”
나에게 하는 건지, 말에게 하는 건지 모를 말을 연신 중얼거렸다.
산에 들어서자마자 참가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한 산속에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사냥감을 찾았다. 하지만 사박사박― 소리가 들려 고개를 휙 돌리면 작은 토끼거나 다람쥐들뿐이다.
더 깊숙이 들어가 봤으나 지대가 조금 높아졌다는 것 말고는 바뀐 게 하나도 없었다. 같은 자리를 뱅뱅 돌고 있는 건 아닌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이쯤 되니 긴장도 확 풀려버렸다. 제발 뭐라도 좀 나와 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야생성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했다더니 길이 나있지 않은 산은 말을 타고 다니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이다. 승마에 노련한 참가자들은 입장이 다를지도 모르나 초심자인 나의 경우는 그랬다.
낙마해서 크게 다칠 바에야 차라리 조금 힘들어도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게 낫다 싶었다. 말에서 엉금엉금 내려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 말을 묶어뒀다.
“곰이 튀어나오진 않겠지.”
그렇다면 팔다리를 내주는 거로도 모자라 목숨까지 잃게 될 거다.
“…설마.”
불현듯 끼쳐오는 두려움을 몸을 털어서 떨쳐냈다. 활을 꽉 쥐며 나뭇잎 그림자로 우거진 곳에 발을 디뎠다.
말에서 내렸다고 보이지 않던 게 보일 리가 없었다. 휘파람도 불어봤는데 내가 휘파람엔 재능이 없다는 것만 깨달았다.
“으… 다리야.”
내일 되면 퉁퉁 붓겠네.
땀으로 등이 흠뻑 젖은 건 오래전이고 이제 발바닥을 넘어서 종아리까지 아파왔다.
이대로 가다간 활 쏠 힘도 사라지겠다.
체력을 보충할까 싶어서 판판한 나무 하나를 골라 등을 기댔다. 이제 좀 쉬어 보려는데 짙은 고동색의 털 빛깔을 뽐내는 녀석이 나타났다. 긴 주둥이 사이로 드러나는 송곳니를 보아 저건 멧돼지가 틀림없다.
엉거주춤했던 다리를 곧게 폈다. 못해도 저 녀석의 시체를 들고 가려면 성인 남자 넷은 필요할 만큼 덩치가 큰 놈이다. 저놈을 사냥하면 우승은 떼놓은 당상이다.
저런 크기의 멧돼지를 발견한다면 곧바로 줄행랑쳐야 하지만 프러포즈에 눈이 먼 나는 활을 꺼내 들었다. 활을 걸고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다행히 저놈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멧돼지는 땅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지금 쏴야 해, 지금!
하지만 머리와는 다르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맞추지 못하면 앞으로 저렇게 큰 짐승은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고 오히려 멧돼지한테 공격당할 수도 있다.
다 아는데… 좀처럼 화살이 튀어 나가지 않는다. 내가 활시위를 놓지 않으니 당연한 거다.
과녁판을 맞힐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죄 없는 생명을 단순 유희를 위해서 내 손으로 죽인다는 게 이토록 끔찍한 기분을 들게 하는지 몰랐다.
팔이 아려오고 관자놀이 밑으로 땀방울이 흐르는 게 느껴진다. 결국 난 활시위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미안해, 애쉬. 도저히 못 쏘겠어.
고개가 땅으로 떨어진다. 주머니 속의 반지가 묵직하다.
쿠왜에엑!
“잡았다! 한 발 더 쏴!”
피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예리한 화살촉이 내가 겨냥했던 멧돼지의 살갗을 꿰뚫었다. 세 방의 화살을 맞은 멧돼지는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며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멈추세요!”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말을 탄 남자 셋이 다시 한번 멧돼지를 겨냥한다. 다시 한번 말리려는데 말이 튀어 나가기도 전에 화살이 먼저 튀어 나갔다. 다행히 멧돼지가 몸을 튼 덕에 화살은 빗나갔다.
“…다행인 건가?”
멧돼지의 눈이 정확히 나를 향한다.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고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이성을 잃은 놈은 나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어, 어?!”
멍청한 소리를 내며 몇 걸음 뒷걸음질 치다가 몸을 돌려서 있는 힘껏 내달렸다.
하지만 야생의 멧돼지를 이길 만큼 발이 빠르지 못했다. 뒤에서 들이박는 막대한 힘에 허리가 반으로 꺾이고 고통으로 눈앞이 까맣게 점멸했다.
“억…….”
볼품없이 처량한 신음을 끝으로 내 의식은 끊겨버렸다.
* * *
코 고는 소리가 아니라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억지로 숨을 크게 쉬는 것처럼 듣기 싫은 인위적인 소리다.
코가 아니라 입으로 내쉬고 있구나.
머릿속은 차분한데 몸은 거친 숨소리로도 모자라 미약한 앓는 소리마저 내고 있었다. 몸이 타는 것처럼 펄펄 끓었다. 등허리서부터 느껴지는 통증도 고약했다. 차가운 얼음물 속에 풍덩 빠지고 싶은 심정이다.
왜 이렇게 아픈가 싶었는데 멧돼지에게 치였던 게 곧바로 떠올랐다.
활은 다른 놈들이 쐈는데 다친 건 왜 내가 다치냐.
사냥 대회 우승도 못 하고, 몸까지 다치고 결국 프러포즈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억울하고, 서럽고, 한탄스러운 마음을 위로하고자 손을 꿈틀꿈틀 움직여 바지춤을 더듬었다.
그래, 나에겐 아직 반지가 있잖아. 전 재산을 탈탈 털어서 산.
하지만 매끄러운 옷감의 감촉만 느껴질 뿐 손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천근만근 한 눈꺼풀이 번쩍 뜨일 만큼 당황스럽다!
“선배.”
애쉬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찬다. 아무리 손을 더듬어도 잡히는 게 없다.
애쉬가 이마에 입을 맞춘 채로 속삭였다.
“놀라지 않아도 돼요, 이젠 괜찮아.”
‘여긴 안전하다’의 의미로 말한 것 같지만 내가 놀란 건 멧돼지 때문이 아니라고!
반지! 프러포즈 반지 어딨어!
“애쉬.”
소리가 걸걸했다. 수분기 없이 메마른 목 때문에 헛기침하자 애쉬가 목 뒤로 손을 넣어 고개를 든 뒤 따뜻한 물을 먹여주었다. 조금 나았지만 목소리가 단번에 나아지진 않았다.
“내 소지품들 어딨어?”
“피가 많이 묻어서 버리라고 했어요. 가져올까요?”
“주머니는…….”
“주머니?”
애쉬가 고개를 갸웃한다. 말이 다 이어지지 않아도 그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만큼 정신이 없지 않았다. 멧돼지한테 치이면서 주머니가 떨어져 나간 게 틀림없다.
되는 일이 없다 없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아……?
“하아, 미치겠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컥한 감정이 치솟았다. 몸이 아파서 그런지 감정 조절이 안 된다.
내 전 재산을 바친 반지와 사냥 대회를 위한 노력들, 볼품없이 다친 몸 그리고 프러포즈를 하지 못하게 됐다는 절망적인 현실.
“의원을 다시 불러올게요.”
눈가에 눈물이 고이다가 넘쳐흘렀다. 애쉬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저승사자라도 본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테이블 위의 종을 울리려는 애쉬를 고갯짓으로 막아 세웠다. 애쉬는 내 눈물이 떨어진 곳 위에 입을 맞추며 덩달아 울음기 어린 소리로 나를 달랬다.
“괜찮아요, 선배. 다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거든?
녀석의 말이 나를 더 울컥하게 만든다.
“괜찮긴, 흐윽. 뭐가 괜찮냐.”
프러포즈고 뭐고 다 망해 버렸는데.
“죄송해요, 선배. 죄송해요.”
녀석이 흘린 눈물이 내 뺨 위에 뚝뚝 흘렀다.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눈물방울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애쉬까지 펑펑 눈물을 쏟아대니 거기에 시너지를 받은 내 감정이 이성을 가볍게 억눌러 버리고 마구 쏟아져 나갔다.
“흐윽, 다 망했어. 씨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사과하지 마, 기분 더 엿 같아지니까. 크흡.”
“어떻게 할까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다 할게요, 뭐든.”
애쉬가 왜 나한테 용서를 구하는 꼴이 됐는지…….
하지만 감정이 머리를 지배해 버린 난 그런 것을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 뭐든 해. 뭐든! 네가 그냥 나한테 황실극단을 준다고 했으면 이런 일도 없는데, 흐엉.”
로제타가 절대 하지 말라고 했던 말이다. 슬퍼 죽겠는 와중에도 낯간지러운 말은 꺼내기 어려운가 보다.
아니, 오히려 본능에 충실한 말일지도.
“드릴게요.”
얘는 또 뭘 바로 준대. 바보같이 프러포즈 하나 제대로 성공 못 한 나를 맹목적으로 사랑해 주는 녀석의 모습에 내 자신이 더욱 한심하게 느껴졌다.
보기 싫은 건 한심한 내 자신인데 괜히 애쉬에게 화풀이했다. 모난 감정은 꼴사나운 행동을 만든다.
“이 황궁도 나 주지 그러냐?”
“가지세요.”
“뭐가 그렇게 쉬워. 흑, 그럼 돈도 다 나 줘.”
“알겠어요.”
“이 땅덩어리도 다 내 거 할래.”
“즉위식 준비하라고 일러둘게요.”
“…흐윽… 미친놈.”
녀석은 진짜로 즉위식을 준비시키고도 남을 위인이다. 내 감정의 깊이보다 녀석의 깊이가 훨씬 더 깊다는 걸 느끼고 나서야 점점 이성이 돌아왔다. 원래 상대적으로 덜 미친 사람이 일찍 제정신이 되는 법이다.
나는 코를 한 번 먹고는 이마를 맞대고 있는 애쉬를 바라봤다.
“너 그럼 가진 게 아무것도 없네?”
“전 선배 옆에만 있으면 돼요.”
깨달음은 예고 없이 불시에 찾아온다.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린 이 순간, 로맨틱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도 없는데… 지금 이 순간이 바로 프러포즈할 타이밍이라고 내면의 자아가 소리쳤다. 늘 하던 것처럼 내 식대로 막무가내로 밀어붙여도 애쉬는 기꺼워할 거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백수인 남자를 내가 왜 옆에 둬?”
애쉬가 고개를 내려 아랫입술을 가볍게 입술 살로 물었다가 놨다.
“잘생겼잖아요.”
부정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애쉬는 안도가 되었는지 얼굴에 긴장이 한풀 걷혔다. 하지만 여전히 눈가는 촉촉하다.
난 이렇게 착해빠진 놈을 두고 쓰레기 같은 발언이나 해대고 있다. 쓰레기… 한 번 되는 게 어렵지, 두 번 세 번 되는 건 일도 아니네.
“세상은 얼굴만으로 먹고살 순 없어.”
먹고살 수 있다. 애쉬 정도의 외모라면 먹고살다 못해 경국지색으로 나라를 망하게 할 게 아니라 손에 넣을 수도 있다.
“예쁜 짓 많이 할게요.”
얼마나 더 예뻐지려고 그러냐.
쿵쿵 뛰는 가슴을 숨기며 짐짓 고민하는 척했다.
“선배.”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에 고민하는 척은 채 5초도 버티지 못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야, 뭐… 데리고 살아줄게.”
“정말요?”
“내가 그렇게 좋아 죽겠다는데 책임져야지.”
애쉬가 하― 하고 낮은 숨을 터뜨리곤 가볍게 입을 맞췄다.
“와, 선배.”
“나 같은 여자 없어. 넌 꼭 나 잡아야 해. 가진 거 쥐뿔 없는 남자를 누가 데리고 살아주냐?”
“정말 감사해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긴 한 건가? 이건 마치 주종 관계의 느낌인데.
“네 입장에선 불안할 수도 있겠다. 우리 관계가 그… 구두로만 오갔을 뿐이니까.”
“아뇨, 하나도 불안하지 않아요. 전 정말 행복해요.”
“아, 아니, 불안할걸? 내가 갑자기 널 버리면 어떻게 해?”
“버려지지 않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서 노력…….”
“난 정말 괜찮지만 널 위해서 우리 관계를 좀 더 공식적으로 정확하게 명명해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선배?”
의도한 바를 따라주지 않는 녀석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횡설수설 늘어뜨렸다. 이상함을 느낀 애쉬가 엄지와 검지로 내 눈꺼풀과 밑을 잡고 크게 벌려본다. 초점이 맞는지 확인해 보는 거다.
…나 지극히 정상이거든.
한쪽 눈이 커다랗게 벌려진 상태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결혼하자.”
이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빙빙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 말 한마디는 널 위한 거고.
놀라움으로 물든 푸른 눈, 작게 벌어진 입 그리고 쏟아지는 키스.
“평생 책임질게, 애쉬.”
로맨틱한 프러포즈는 실패했다. 반지도 없고 몸은 엉망진창이고 심지어 삥 뜯기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녀석은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배부른 얼굴로 한껏 미소 지었다. 잠깐이나마 멈췄던 눈물이 기쁨을 매단 채 뚝뚝 떨어진다.
지금의 행복이, 우리의 사랑이 언젠간… 불행의 잔여물을 말끔히 밀어내 버릴 거라고 확신한다.
<그놈을 책임져야 하는 이유>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