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로즈가 쏘아 올린 작은 편지 (37/42)

목차

외전 1. 로즈가 쏘아 올린 작은 편지

외전 2. XX만 하다 돌아왔습니다

외전 3. 낭만이 부족한

외전 1. 로즈가 쏘아 올린 작은 편지

새근새근.

규칙적으로 내쉬는 숨소리를 들으며 애쉬는 조심스레 몸을 뒤척였다.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뜨나 감으나 별반 차이가 없는 컴컴한 방은 상념에 빠지는 데에 최적의 장소였다.

가슴을 콱콱 내리찍는 기분에 가만히 누워있기가 힘들어서 이불을 걷고 앉았다. 소설이든 일이든 활자라도 읽으면 조금 나을 것 같은데 이벨린이 깰까 봐 불을 켜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그렇다고 방 밖으로 나서기도 싫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숨만 내쉴지언정 이벨린의 옆에 붙어있는 것이 좋았다.

‘선배가 안아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애쉬는 익숙하게 이벨린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또 날 안 보고 자네. 섭섭하다.

조그맣고 까만 정수리에 입술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나흘 전 보았던 이벨린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날은 생명의 활기를 머금은 여름날처럼 화사하기만 했던 애쉬의 기분이 진흙밭 위로 내동댕이쳐진 날이기도 하다.

애쉬는 매일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이벨린과 나란히 앉아서 식사한다는 것 자체가 벅차고 얼떨떨했고 오밀조밀 작은 입에서 귀엽다, 예쁘다 하는 소리가 나올 때면 하루 종일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북대륙에서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적군의 목을 베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으로 충만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애쉬는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전날 밤은 벨린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무려 두 번이나 들었었다. 와, 꿈인가. 꿈이라면 죽을 때가 된 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을 꿈으로 보여주면서 저세상으로 데려간다고 하던데.

하지만 이벨린이 사랑한다고 무려 두 번씩이나 말해 준 지금 어디에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천사든 사신이든 보이기만 하면 일단 죽여놓고 봐야겠다. 그들에게도 죽음이라는 게 있는지는 미지수지만 중요한 건 애쉬는 지금 이벨린과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거다.

이벨린은 사랑한다고 두 번 말해 준 대가로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애쉬의 밑에서 신음해야 했다. “미친놈아, 작작 해!”. “씨팔, 읏. 사람을 살려놔야 또 사랑한다고 말해 줄 거 아니야!”. 거침없는 욕설에도 핀트가 나가 버린 애쉬는 연신 “사랑해요, 선배.”를 외치며 멈추지 못했다.

도중에 기절해 버린 이벨린의 몸을 씻기고, 하녀를 불러 시트를 갈게 한 뒤 애쉬는 잠 한숨 자지 않고 이벨린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마사지하지 않으면 다음 날 이벨린은 또각, 부러질 것처럼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벨린의 부드러운 살결을 느끼며 애쉬는 또 발기했다. 피곤해서 쓰러진 이벨린에게 넣을 순 없었으므로 그녀의 얼굴 앞에서 자위하는 것으로 성욕을 풀었다. 이벨린이 안다면 답도 없는 짐승 새끼라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

수면과는 별개로 애쉬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벨린에게서 무려 사랑한다는 말을 두 번이나 들었다. 이 사실을 천 번쯤 상기시켰는데 천 번 다 행복해서 미칠 것 같다.

정무를 마친 애쉬는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걸음을 빨리했다. 이벨린이 보고 싶어서 못 견디겠다. 애쉬의 뒤를 따르던 시종들은 긴 다리로 척척 앞서나가는 애쉬 때문에 졸지에 뛰는 모양새가 되었다.

시종들이 침실 근처에 다다르기도 전에 쿵! 문이 닫혔다. 시종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매로 땀을 닦아내야 했다.

“놀래라!”

씻고 나왔는지 이벨린의 머리끝이 젖어있었다. 애쉬는 이벨린을 보자마자 안겨들 생각이었는데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이벨린의 변화에 아주아주 민감한 그가 곧게 뻗은 눈썹을 찌푸렸다.

이벨린의 손엔 붉은 편지 봉투와 함께 몇 장의 종이가 들려있었다. 표정도 다른 때와 달리 멍해 보였다. 마치 다른 생각에 빠져든 사람처럼.

저 편지가 뭔지부터 알아내야겠다.

애쉬가 움직이자 이벨린이 들고 있던 것을 협탁에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일찍 왔네.”

“네, 처리해야 할 게 얼마 없어서. 이건 뭐예요?”

일은 발에 치일 만큼 많았다.

이벨린이 대답하기도 전에 애쉬가 편지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

“로즈가 별장에 놀러 오래. 기억나? 예전에 우리 갔었던 곳, 웨일턴에 있는.”

“네.”

가문으로 무사히 돌아간 로즈는 한동안 정신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로즈의 옛 연인인 솜씨 나쁜 주방장이 독수공방하며 로즈를 기다렸고 치료받는 내내 그녀의 곁에서 많은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올해 결혼한다고 한다.

로즈가 실종된 5년 동안 웨일턴에 있던 별장도 방치되었었다. 이번에 새로 보수 공사를 했는데 이벨린이 별장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놀러 오라고 편지를 보낸 것이다. 마음에 들면 별장을 주겠다고도 적혀있었다.

편지 내용은 담백했다. 이벨린이 멍하게 바라보던 것은 편지가 아닌 별장 앞의 바다 사진이었다.

애쉬의 기분이 거꾸로 뒤집혔다.

뒤에 앉아있는 이벨린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 만큼.

애쉬는 손 안에 든 사진을 구겨버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협탁에 올려두었다. 용기 내어 뒤를 보니 이벨린의 옆모습이 보였다. 검은 눈은 창문을 바라본다. 이벨린이 내다보는 건 매일 보던 야경 따위가 아니다.

바다.

이벨린이 감금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세레즈가 죽은 곳이다.

이벨린에게 바다는 영원토록 휴양지가 되지 못할 것을… 애쉬는 알고 있었다. 빈도는 줄어들었으나 이벨린은 세레즈의 악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땀에 푹 젖은 채로 헐떡이며 잠에서 깨어나는 이벨린을 몇 번이고 안아줬었다. 애쉬에게 의지한 채 안겨오는 이벨린은 좋았으나 허리를 붙잡은 작은 손이 세차게 떨리는 것을 볼 때면 지옥에서 세레즈를 꺼내다가 조각조각 찢어놓고 싶은 분노에 휩싸였다.

이번 한 달은 이벨린이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서 안도하고 있었건만… 애쉬는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험악하게 구겨지는 표정을 숨기며 이벨린 옆에 앉았다.

“가려고요?”

“어?”

이벨린은 애쉬가 옆자리에 앉은 줄도 모르고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현실로 끄집어내진 듯 당황해하는 이벨린을 보고 애쉬의 기분은 더 곤두박질쳤다.

“아, 아니. 못 가지. 이제 막 연습 시작해서 한창 바쁠 때라 며칠씩 시간 내는 건 어려워.”

이벨린의 말은 거짓 하나 없었으나 애쉬의 귀엔 전부 핑계로 들렸다. 좋지 않은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는 바다 따위는 쳐다보기도 싫을 것이다. 애쉬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연습 얘기를 꺼내는 거고.

애쉬는 부러 웃으며 말했다.

“그렇네요.”

애쉬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고 창문만 바라보던 이벨린이 몸을 돌렸다. 사랑스러운 얼굴이 눈앞에 다가오자 애쉬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꾸욱 눌렀다.

“이상해.”

“뭐가요?”

“네가 여기서 수긍할 애가 아닌데.”

“…….”

“‘선배 대신할 인력을 더 넣어줄게요. 그게 싫으시면 건국일 축제 날짜를 미뤄 버릴까요?’ 하는 헛소리도 없이.”

이벨린이 큰 눈을 깜빡거렸다.

이벨린이 숨기고 싶어 하는 아픔을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은 애쉬는 사실대로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미인계를 이용하기로 했다.

눈꼬리를 접으며 은은하게 미소 짓자 이벨린의 턱이 움찔거렸다. 이벨린은 애쉬의 얼굴에 약했다. 웃는 모습이나 우는 모습이나 잠들어있을 때나 삐쳐있을 때…….

그냥 모든 순간에서.

맥락 없는 웃음이었으나 이벨린은 애쉬의 얼굴이 개연성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더 파고들지 않았다. 큰일도 아니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이벨린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다행이라고 말하기엔 꺼림칙한 부분이 많았다. 이벨린이 시도 때도 없이 바다 사진을 만지작거린다는 것이 그랬고, 애쉬와 함께 있는데도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온 사람처럼 멍해질 때가 많았다는 것이 그랬으며 가장 큰 이유는 애쉬의 눈을 일부러 피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애쉬는 살인, 강간 등으로 끌려온 범죄자들을 직접 고문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이벨린은 전혀 모르는 일이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분노로 표출되었다가 이내 우울함으로 변했다. 한동안 느끼지 않았던 지독한 자기혐오가 공기 대신 몸속으로 파고든다.

한번 떠오른 좋지 않은 기억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기억들까지 송두리째 끄집어낸다. 선배를 믿지 못하던 자신의 죽어 마땅할 행동 또한 덩달아 떠올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차게 식었다.

편지를 받은 날로부터 나흘이 지난 지금, 애쉬는 이벨린에게 바다에 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로 온 신경이 바다에 쏠렸다. 이벨린은 자주 어두운 눈을 하고서 허공을 바라보았고 애쉬는 그런 이벨린의 모습을 지켜보며 주먹을 쥐었다.

불길한 침묵은 계속되었다.

“너 어디 아파?”

이벨린이 애쉬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혹시 무슨 걱정 있어?”

보고 있던 대본을 치우고 본격적으로 애쉬를 살폈다. 애쉬는 소파에 기댄 등을 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다크서클 내려온 거 알아? 신기하다. 너도 사람이긴 하구나.”

이벨린의 손가락이 애쉬의 눈 밑에 닿았다 떨어졌다. 하루에 한 시간도 못 잤으니 다크서클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보지 마세요.”

애쉬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벨린 앞에 놓인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벨린은 귀엽다고 생각하며 귓불을 잡곤 살짝 흔들었다.

“왜?”

“…못생겼잖아요, 저.”

“뭐?”

이벨린이 호탕하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애쉬의 귀가 폭발할 것처럼 진한 색으로 변했다.

“선배는 잘생긴 거 좋아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잠을 자볼 걸 그랬다. 가위에 눌리고 선배가 떠나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더라도. 그랬더라면 선배 앞에서 다크서클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애쉬는 과거의 자신을 탓하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나가 꼬이니 뭐가 이렇게 줄줄이 되는 일이 없냐. 지금 선배한테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다크서클이나 만들고.

“알면 잠 좀 푹 자. 새벽에 잠깐잠깐 깰 때마다 네가 안 자고 있어서 얼마나 놀라는데.”

“…죄송해요.”

“자, 이리 와. 오늘은 일찍 눕자.”

이벨린이 이끄는 대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리고 들춰진 이불 안으로 몸을 넣고 옆자리에 눕는 이벨린을 부둥켜안았다.

“딴생각하지 말고 바로 자.”

“…네.”

이대로 모르는 척하면 되는 건가.

가끔 제 시선을 피하긴 하지만 이벨린은 애쉬에게 언제나 그렇듯 다정했다.

나를 떠나지만 않는다면, 내 옆에만 있어준다면.

수면 아래에 고요히 파묻혀있는 불행의 조각을 굳이 꺼낼 필욘 없었다. 그 작은 조각이 이 평화로운 세계에 무슨 상처를 입힐지 모른다. 그래서 이벨린도 애쉬에게 말하지 않는 거겠지.

뒤흔들지 말자. 수면 아래에서 떠돌도록 내버려 두자.

다 괜찮은 척, 모르는 척 살다 보면 언젠가는 잊힐 것이다.

애쉬는 제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이벨린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지금의 행복을 담보로 걸고 싶지 않다.

“선배, 사랑해요.”

오늘도 잠에 빠져들지 못했다.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로 애쉬는 한껏 과민한 상태가 되었다. 덕분에 황성 안은 때아닌 칼바람이 불었다.

안토니는 폐하의 날카로운 기에 눌려 압사당할 것 같다며 사라를 붙들고 징징거렸다. 사라도 ‘엄살 그만 떨고 일이나 해.’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대신 안토니의 말에 공감해 주었다.

애쉬는 바쁜 정무에 몸이 피로해져도 이벨린만 보면 열 시간 푹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몸이 개운해지곤 했는데 요즘은 반대였다. 바다 사진을 멍하니 보고 있는 이벨린의 얼굴을 볼 때면 체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해지고 심한 뱃멀미를 겪는 것 같았다.

선배가 날 떠나면 어떡하지. 나만 보면 끔찍한 기억들이 생각나서 못 살겠다고 하면…….

…가둬도 괜찮을까? 궁 하나를 비워서 벽을 허물고 넓은 방 하나를 만들어야겠어. 선배는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황성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전부 가져와서 책장에 꽂아두고, 배고플 땐 언제라도 마음에 드는 걸 먹을 수 있게 주방장들도 상시 대기시켜 놔야지.

식사 후엔 꽃이나 나무를 보면서 산책도 해야 하니까 정원도 필요해. 씻겨주는 거나 옷 갈아입혀 주는 건 내가 하면 되니까 하녀를 따로 둘 필요는 없겠군.

…쇠문은 최대한 두껍게 마탑 꼭대기 층까지 세워둬야겠어. 수갑을 맨살 위에 차면 상처가 날 수도 있으니까 부드러운 천을 덧대놔야지. 아니, 그냥 마법으로 채워놓는 게 무리도 안 가고 더 나을지도.

애쉬는 이벨린이 들으면 기함할 계획을 세우며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일과를 끝내고 침실 안으로 돌아온 이벨린은 식은땀에 푹 절은 채로 안절부절못하는 애쉬를 보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의원 부를까?”

“선배 어디 아파요?”

애쉬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후우. 나 말고 너.”

“전 괜찮은데요? 아, 다크서클은 곧 사라질 거예요. 아마 내일이면 말끔하게.”

변명하듯 빠르게 말하곤 이벨린의 표정을 살폈다.

못생겼다고 하면 어떡하지…….

이벨린의 표정은 어두웠다. 선배는 친절하니까… 대놓고 못생겼다고 말하진 못할 거다.

이벨린을 붙잡아둘 수 있던 가장 큰 장점이 별 소용이 없게 되었다. 예리한 것으로 제 얼굴을 마구 그어놓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최악이다.

이벨린이 크게 상심한 애쉬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누워.”

잠들고 싶은 기분이 전혀 아니었으나 말도 듣지 않으면 정말 이벨린이 떠나버릴 것만 같아서 애쉬는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램프의 작은 불빛만 켜두고 방 안의 불을 모두 내린 이벨린은 의자를 끌고 와서 침대 옆에 놓았다.

“선배도 누워요.”

“너 잘 때까지 지켜보고 있을 거야.”

“…선배 자는 얼굴 보고 싶어요.”

“머리 굴리지 말고 자라.”

“…….”

“눈 감아.”

“잠이 안 와요.”

이벨린은 애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억지로라도 자.”

냉랭한 말과는 다르게 어투엔 애정이 듬뿍이다.

애쉬는 이 손길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눈을 감았다.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으나 오랫동안 자지 못한 탓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이벨린이 저를 걱정스레 지켜봐 주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워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애쉬가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든 지 막 두 시간이 넘을 즈음이었다. 애쉬는 이벨린이 매몰차게 등을 보이며 멀어지는 꿈에 시달리다가 겨우 깨어났다.

“허억, 선배.”

벌떡 일어나 곧바로 이벨린을 찾았다.

“괜찮아?”

“아뇨, 저 너무 무서웠어요. 선배가, 선배가…….”

“내가 무서웠다고? 좀 의외의 말이라 당황스러운데. 내가 평소에 널 못살게 굴었었나…….”

이벨린은 애쉬를 안아주는 대신 허벅지 위로 툭 떨어진 물수건을 치웠다. 애쉬의 시선이 이벨린 손에 들린 물수건에 향했다.

“저 아팠어요?”

“끙끙대면서 난리도 아니었지.”

그사이 의원이 다녀갔는지 이벨린이 물과 함께 알약을 내밀었다.

“…아프지 않은데.”

“네가 아무리 괴물 같은 몸을 가졌더라도 사람은 사람이야. 그만 떠들고 약 먹어.”

만약 진짜 아프다면 이깟 약으로 치료될 수 있는 게 아닌데. 애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벨린이 주는 약을 꿀꺽 받아먹었다.

애쉬가 약을 삼키는 걸 확인한 이벨린이 애쉬의 어깨를 눌렀다.

“더 자.”

애쉬는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새 물수건이 이마 위에 올려지고 이불이 가슴 위까지 덮인다. 몸이 조금 무거운 것뿐이지 아픈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벨린의 보살핌이 좋아서 힘없는 척 연기했다.

“선배…….”

“응, 나 어디 안 가. 푹 자, 애쉬.”

…정말, 정말 어디 안 갈 거죠? 선배, 나 무서워요.

이벨린의 손을 잡곤 감고 싶지 않은 눈을 감았다. 또 무서운 꿈을 꿀 것 같았으나 이벨린이 자라고 했으니 자야 했다. 얼굴도 못생겨진 지금, 더 이상 밉보이면 안 됐다. 눅눅한 수마가 몸을 뒤덮었다.

발작과 함께 오늘만 두 번째로 잠에서 깨어났을 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서 인상을 썼다. 방이고 밖이고 사위가 어두웠다.

잠들기 전에 이벨린의 손을 꽉 쥐고 있었는데…….

애쉬는 비어버린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상실감에 빠져들었다. 선배는 어디에 있지. 어지러움이 가시기도 전에 부지런히 눈을 굴려서 방을 살폈다.

은은한 램프 불빛에 이벨린의 얼굴이 담겨있었다. 이벨린은 의자에 앉아서 손바닥만 한 바다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쉬의 두통이 극심해졌다.

견딜 수가 없다. 아슬아슬하게 차오르던 불안이 흘러넘치고야 말았다. 왜 그런 얼굴을 해요. 왜…….

깨달은 직후부터 모르는 척 덮어둘 수 없는 문제였다. 수면 아래에 떠돌고 있던 불행의 흔적은 벌써부터 머리를 들이밀고 나와 애쉬와 이벨린을 상념에 젖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난다 한들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몸을 불려가며 평온한 세계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애쉬는 조급해졌다. 이불을 던지듯 걷고 맨발로 뛰어나와 이벨린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단단한 팔로 허리를 감싸며 배에 얼굴을 묻었다.

“악몽이라도 꿨어?”

애쉬는 고개를 저었다. 악몽이라는 게 상대적인 거라면, 조금 전에 꿨던 꿈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작금의 현실이 더 두려웠다.

“그럼 왜 이래, 아파서 그런가. 애도 아니고 정말.”

이벨린의 목소리는 여상했다. 그러면서도 바다 사진을 손에 쥐고 있다. 애쉬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는 불행의 흔적과 직면할 때가 온 것이다.

“선배, 죄송해요. 제가 더 잘할게요. 제발 떠나지 말아주세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만약 선배가 제 얼굴은 꼴도 보기 싫다고, 당장 꺼지라고 말씀하셔도… 전 못 가요. 갈 수가 없어요. 제가 너무 끔찍해서 참다못한 선배가 나가겠다고 하시면……. 하아, 안 돼. 그러지 말아요. 감금은 진짜 아닌 것 같아. 선배가 엄청 싫어하잖아요.”

“너 말 되게 이상한 거 알지?”

“죄송해요. 말이 이상해서 죄송해요.”

“뭐가 이상한지도 모르는 것 같네.”

이벨린이 애쉬의 어깨를 밀었다. 애쉬는 버티다가 아차 싶어 곧바로 떨어졌다.

“요즘 계속 잠도 못 자고 무슨 일이야.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안 물어보고 있었는데… 혼자 또 무슨 삽질 하고 있었어?”

애쉬는 이벨린을 마주 보지 못하고 손에 들린 바다 사진을 침울하게 보았다. 애쉬의 시선을 느낀 이벨린이 사진을 팔랑 흔들었다.

“가고 싶은데 같이 안 가줘서 그래?”

그게 그렇게 잠도 못 자고 끙끙댈 일인가.

애쉬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벨린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장소에 가고 싶을 리가 없었다.

“아니야? 그럼 왜 이러는데.”

“숨기지 않아도 돼요. 마음이 풀릴 때까지 욕하고 때리셔도 가만히 있을 테니까…….”

“…….”

“혼자 참고 있지 말아요.”

이벨린의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공포가 조금이나마 뽑혀나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었다. 그 해소의 끝이 죽음만 아니라면 말이다. 팔다리 몇 개쯤 날아간다고 하더라도 괜찮았다. 이벨린이 옆에 있어 준다는 전제하에.

이벨린은 말없이 애쉬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1초가 숨 막히게 길다. 갖은 잡념들로 가득 차있었던 애쉬의 머릿속이 탈색되었다. 다 부질없었다. 결정권은 이벨린에게 있다. 꺼지든, 잡지 못하든 애쉬는 저 작은 입술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무미건조한 태도를 고수하던 이벨린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놀란 애쉬가 그녀의 옷자락을 쥐었다가 덤덤한 시선 한 번에 손을 놓았다.

탁.

방 안이 환해졌다. 그림자로 얼룩덜룩했던 이벨린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차마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혼자 삽질하고 있던 거 맞네.”

이벨린이 애쉬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놀란 애쉬가 이벨린을 일으키려고 하자 손을 들어 막아 세웠다.

“왜 바닥에…….”

“내가 왜 널 떠날 거라고 생각했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애쉬는 어색하게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야… 바다 사진을 보고 계셨으니까요.”

“이게 왜? 알기 쉽게 설명해 봐.”

애쉬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참 덩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고 이벨린은 생각했다. 그게 또 귀여워 보여서 문제다.

“바다에 안 좋은 기억이 있으시잖아요. 그러니까 그… 그… 죽은 곳이기도 하고. 한창 악몽을 꾸실 땐 그 배경이 한 번도 빠짐없이 바다였고…….”

“세레즈 로벤스디?”

“……!”

애쉬는 눈을 크게 뜨고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세레즈의 이름은 둘 사이에서 금기어였다. 실수로라도 그날의 일을 상기시키고 싶지 않아서.

충격받은 애쉬와 다르게 이벨린은 태연하게 고개를 갸웃거린다.

“음… 내가 바다를 무서워하는 줄 알았다 이 말이네.”

“우울한 얼굴로 바다 사진을 계속 보셨잖아요.”

별안간 이벨린이 소리 내어 웃었다. 진지한 애쉬의 얼굴에 헛기침하며 웃음기를 지운다.

“내가 널 떠날 거라고 생각한 이유는?”

“…안 좋은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이니까요…….”

“고작 그거 하나로?”

애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것을 입 밖으로 꺼내야 했다.

“제 눈을 피하셨잖아요.”

이벨린이 처음으로 당혹감을 내비쳤다.

역시 선배는 내가 싫어진 거야. 내가 몹쓸 짓을 했기 때문에.

애쉬의 고개가 무릎 위로 떨어졌다. 눈물을 참기가 어려운데 이벨린한테 보이기는 싫었다. 뭘 잘했다고 울어.

“…티 났어?”

“…….”

“헉! 아니 잠깐, 너 울어?. 그, 그게 내 말은…….”

이벨린이 관자놀이를 긁으며 말을 버벅거렸다.

“죄송해요, 선배… 죄송해요.”

“어? 아니! 하나도 죄송할 거 없어. 그만 울어. 하, 미치겠네. 울지 마. 내가 미안해. 고개 들어봐. 응?”

선배는 나같이 나쁜 새끼한테 왜 사과하는 걸까.

내가 울어서?

…선배는 이렇게 친절한데 나는 왜…….

후두둑.

쏟아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이벨린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애쉬의 양 뺨을 쥐고 들어 올린다.

“오해야, 오해. 난 바다가 무섭지도 않고 네가 싫지도 않아.”

“거짓말 흐윽, 안 하셔도…….”

“거짓말 아니야! 바다 사진을 자주 들여다봤던 건 오히려 좋아서 그랬어.”

양 볼이 눌려서 입술이 붕어처럼 튀어나온 애쉬가 “예?” 하고 되물었다.

“너랑 바다에서 물놀이 했던 때가 생각나서. 그때 바다를 본 것도 처음이었고, 들어가 본 것도 처음이었어. 또 가보고 싶은데 언제쯤 시간이 날까… 아쉽기도 하고. 그래서 계속 본 거야. 그때가 참 좋았구나, 하고. 아, 물론 지금이 좋지 않다는 건 아니야.”

애쉬의 훌쩍임이 잦아들었다. 시들다 못해 썩어버린 마음이 박동을 재개했다.

“그럼 제 눈은 왜 피하셨어요?”

“…미안해서.”

애쉬의 볼을 누르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그날 우리 처음 잤잖아……. 난 아니지만 넌 첫 경험이었고. 순진한 애 술 먹여서 엉겁결에 해버린 것 같기도 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더라고.”

커다란 가시가 쑤욱 뽑혔다. 애쉬는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서 이벨린에게 몇 번이고 다시 말해 달라고 했다. 이벨린은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하다가 여섯 번째쯤엔 “그만해!” 하고 소리를 질렀다.

“…선배 말은. 저랑 함께 간 바다가 너무 좋아서 사진을 계속 봤던 거고 제 눈을 피한 이유는 첫 경험 때 선배가 저한테 잘해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라는 말인 거죠?”

“너 그 말 일곱 번째다.”

그것도 그만 물어.

펄펄 끓어올랐던 열이 마법처럼 식어 내렸다. 우울하던 마음은 날개 돋친 듯 훨훨 날아다녔고 컨디션도 단번에 최고를 찍었다.

다시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찢고, 씹어 먹고, 불태워 버리고 싶던 바다 사진이 너무도 소중해졌다.

설레는 가슴을 꾸욱 누르며 이벨린에게 안겨들었다. 애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벨린이 바닥 위로 쓰러졌다.

“전 진짜 한심하고, 바보예요. 혼내주세요.”

“혼내 달라는 놈이 윽, 왜 이렇게 웃어? 아, 무거워!”

바닥에 손을 짚어 무게를 던 애쉬가 눈물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우리 가요. 꼭 바다에 가요.”

“지금은 바쁘다니까.”

“선배가 갈 수 있을 때, 가고 싶을 때 가요.”

“알았어. 그만 얘기하고 나와.”

애쉬가 번쩍 들어 올리는 바람에 얕은 비명이 나왔다. 애쉬는 침대 위에 이벨린을 눕히곤 팔다리로 이벨린의 몸을 끌어안았다.

“오해해서 미안해요.”

애쉬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니 그가 이야기할 때마다 가슴의 진동이 느껴졌다.

“우리 약속 하나 하자.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는 거로. 이제 오해는 그만할 때도 됐잖아.”

“사소한 거라도요?”

“사소한 거라도.”

“네, 꼭 그렇게 해요.”

애쉬는 아주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두통이 이는 악몽도 없었다.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했을 때 품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이벨린을 보며 헤실헤실 웃다가 문득 이 기쁨이 너무 거짓말 같고 또 벅차서 눈물을 조금 흘렸다.

행복하다. 여기가 천국이 아니라면 어디가 천국이겠는가. 모든 사람이 애쉬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인간은 신 따위를 위해 신전을 짓지 않았을 거다. 건국일 축제만 아니었어도 오늘 당장 바다에 갈 수 있었을 텐데.

애쉬는 내년부터는 건국일 기념 행사를 모조리 취소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이벨린에게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물어보라고 했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내가 점심으로 콩을 몇 개 집어 먹었는지는 나도 몰라!”

애쉬는 미간을 찌푸렸다. 믿기 어렵다는 얼굴이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배가 먹은 건데…….”

“…내 입이 방정이다. 헛소리 그만하고 불이나 꺼. 사람이 잠은 자야 할 거 아냐.”

“알았어요. 그럼 선배, 이 질문엔 답해 주세요. 오늘 체프 크로이드랑 부쩍 대화를 많이 하시던데 무슨 내용이었어요?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얘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드라마트루기랑 배우가 왜 대화를 하겠어. 공연 때문이지! 너 나 스토킹해? 뭐, 별걸 다 알고 있네. 잠이나 자!”

‘내가 애쉬를 과소평가했구나.’

이벨린은 두 귀를 틀어막았다. 약속의 범위를 대폭 수정해야겠다.

―물어보지 않으면 혼자 질질 짤 것 같을 정도로.

그 결과 점심에 콩을 몇 개 집어 먹었는지에 대한 물음은 사라졌다. 하지만 잠잘 때 왜 등을 보이고 자는지와 같은, 이벨린은 자각하지도 못하는 유의 물음들은 막지 못했다.

애쉬가 눈물이 헤픈 녀석이라는 걸 이벨린은 언제나 그렇듯 뒤늦게 상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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