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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뒤늦은 약속 (2) (36/42)

14. 뒤늦은 약속 (2)

가지 않겠다는 건 아닌데… 바로 오늘 출발하는 건 조금 이르지 않을까? 나 마음의 준비도 아직 안 되어있단 말이야.

점심을 먹은 직후 바로 떠나자는 애쉬에게 내가 했던 말이다. 이불 속으로 파고든 애쉬가 내 몸을 제 품 안에 가두었다.

“6년을 기다렸는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요?”

“또 그 소리.”

애쉬의 가슴에 이마를 댄 채로 숨을 골랐다. 녀석이 주는 편안함이 좋았다.

“오늘 가요.”

“뭐가 그렇게 급해?”

“오늘 가야겠어요.”

뭐에 꽂힌 건지… 애쉬는 꼭! 오늘 가고야 말겠다고 의지를 보였다. 녀석의 추진력에 세레즈 생각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났다. 더 이상 몸이 떨리지도 않았다. 녀석과 함께 내가 살던 집에 가야 한다는 복잡한 두근거림만이 남아있게 됐다.

우리의 출발은 얘기했던 것과 다르게 조금 늦춰지게 되었다. 황제가 직접 처리해야 할 정무가 생각보다 시간을 오래 잡아먹은 탓이었다.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외투를 집어 드는 애쉬를 억지로 집무실 안에 넣어놨다. 문이 닫히기 전 “선배!”라고 외치는 소리가 꽤 절절하게 들렸다.

아주 오랜만에 본 얼굴이 살았다는 얼굴을 하고선 나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그 여자였다.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던.

로벤스디가가 운영하던 고아원을 처리하느라고 꽤 고생 많았다고 얘기를 전해 들었었다. 수도에 온 직후 몇 번 얼굴을 마주치긴 했으나 그때마다 애쉬가 함께 있었고 애쉬는 내가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할 시간 같은 건 주지 않았다. 여자와 이렇게 단둘이 남아있게 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잊고 있었는데… 오늘이야말로 이름을 물어봐야겠다.

“사라!”

“어?”

“왜?”

나와 여자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몇 번 본 적 있는 남자가 당황하여 주춤거렸다.

이름이… 안토니라고 했던가.

“어… 내가 찾은 사라는 이쪽인데.”

안토니가 여자를 가리켰다. 덩달아 내 고개도 따라 움직였다. 여자는 나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제야 알려주네. 내 이름은 사라 마쉬클레프야.”

“아… 사라.”

불리기만 하다가 내가 직접 부르려니 어색하기 그지없다.

“처음엔 그쪽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불쾌해서 말 안 했었어. 가명이긴 했어도.”

사라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안토니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치자 사라는 날 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기분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제 그쪽이 사라라고 불릴 일은 없을 거 아니야?”

맞는 말이다. 극단 내에서도 내 이름이 사라가 아니라 이벨린 로벤스디였다는 것이 공공연히 퍼졌다. 애쉬에게 부탁해서 ‘로벤스디’라는 가문명은 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극단 사람들은 이벨린이라는 이름이 입에 붙지 않는지 사라라고 부를 때도 많았다. 이벨린이라고 불리건 사라라고 불리건 그 두 이름 다 나를 찾는 이름이었다.

“네, 그렇죠.”

나는 이벨린이라는 이름을 되찾아가고 있다. 훗날의 나는 두 개의 이름이 아닌 이벨린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 * *

마차를 타고 역까지 가서 기차를 두 번 갈아탄 다음 해가 저무는 걸 볼 때까지 걸었다. 흙과 돌이 굴러다니는 길목 위에 나와 애쉬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고층 건물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수도와 다르게 집과 집 사이가 굉장히 넓었다. 이웃집이라 하더라도 족히 5분은 걸어야 할 정도다. 가꾸지 않은 들판 위에 이름 모를 꽃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먼 길을 걸어왔음에도 애쉬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주변 풍경을 살폈다. 마주 잡은 두 손이 걸음에 따라 흔들린다.

“이 언덕만 넘으면 돼.”

“선배는 기억력도 좋고. 부족한 게 뭐예요?”

“없어.”

애쉬의 무조건적인 찬양을 듣는 건 이골이 났다. 부끄럼 없이 답하자 애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놈들이 선배한테 반할까 봐 겁나요.”

“내가 아니라 널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네?”

“아니야, 됐어.”

언덕을 오르는 내내 애쉬는 몇 번이고 날 좋아하는 녀석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어필했다. “나만큼 선배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선배도 날 사랑해야 해요. 그래 주실 거죠?”

…네가 그렇게 말 안 해도 충분히 그러고 있다고 타일러 봤는데도 애쉬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결국 내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서른 번쯤 듣고 나서야 방긋 웃었다.

아. 피곤하다, 피곤해.

무성히 자란 잡초 뒤에 낡은 오두막이 보였다. 어머니가 매일 공을 들여 가꿔놓았던 정원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술병과 쓰레기들이 주변을 굴러다녔다. 낡고 허름한 천 따위가 곳곳에 널려 있었는데 노숙자들의 쉼터라도 되었나 보다.

애쉬가 잡초를 헤치며 길을 만들었다. 잠시 놓았던 손을 다시 나에게로 뻗는다. 나는 녀석이 만들어놓은 길을 밟고 손을 맞잡은 채로 낡은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폐허가 따로 없네.”

아닌 게 아니라 이곳이 폐허다. 뽀얗게 쌓인 먼지 위에 발자국이 찍혔다. 창문을 열자 먼지 뭉텅이가 팍 튀어 올랐다.

에퉤퉤퉤!

애쉬가 소매로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먼지 때문인지 아니면 살살 닦아내는 소매 탓인지는 몰라도 재채기가 연달아 튀어 나왔다. 콧물이 삐죽 흐르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내 콧물까지 닦아주려는 애쉬를 밀어내고 집 안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어머니의 생일을 맞아 음식을 한가득 차려놨었던 테이블이 조각나 있었다. 누군가가 테이블을 부러뜨리고 잘라 장작으로 써버린 것 같다.

내가 썼던 작은 침대 위엔 벌레들이 걸려든 거미줄 범벅이었다. 추억에 젖어들기도 힘들 만큼 집은 엉망이 되어있었다.

“신기해요.”

애쉬가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침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 사람이 누워있는 게 아니라 벌레들이 누워있어서?”

굴러다니는 막대기를 들고 앞을 가리는 거미줄들을 치워냈다.

“선배가 이 작은 침대에서 잠들었다는 거잖아요.”

“다리 길다고 자랑하는 거야? 보통은 이 정도면 충분해.”

“숨 막히게 귀여웠을 거야.”

“참나. 네가 봤어?”

“못 봐서 울고 싶어요.”

뒤를 돌아보니 녀석은 정말로 울상이 되어있었다.

집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에는 애쉬의 긴 다리로 열 걸음이면 충분했다. 눈으로 보는 건 3초면 된다.

애쉬는 작은 침대부터 책상, 낮은 천장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나는 그런 애쉬의 얼굴을 보았다.

어린 시절의 나와 어머니를 지켜주었던 이 집은 이젠 안락한 보금자리가 아니게 됐다. 몇 번은 찾아왔어야 했나. 내 불행의 최고점이자 시작점인 그날의 두려움 때문에 너무 긴 시간을 외면하고 있었다.

애쉬가 먼저 말을 꺼내주지 않았더라면, 녀석과 함께가 아니었더라면 외면은 더욱 길어졌을 거다.

애쉬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빠져나왔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구름 한 점 끼어있지 않는 하늘엔 커다란 보름달이 떴다.

나와 어머니가 떠난 이곳을 외로이 지키고 있던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애쉬, 불을 만들어내는 마법도 할 줄 알아?”

애쉬는 대답 대신 손바닥 위에 불꽃을 만들어냈다.

“그럼 태워줄래? 이 집.”

녀석은 말리는 말 한마디 없이 손바닥 위에서 타오르고 있던 불꽃을 오두막으로 던졌다. 작은 불씨가 오두막에 닿자 순식간에 몸집을 불려가며 전체를 감싼다. 검은 연기가 달을 향해 일렁였다.

오두막에 붙은 열기가 내 미련을 함께 태워갔다. 마주하지 못했던 나약함, 어린 날의 두려움, 공포로 아둔해진 머리와 그에 따른 후회들이 재가 되어 날아간다.

숨이, 숨이 차올랐다.

“아…….”

줄곧 덤덤했던 마음이 바스러졌다. 사무치는 서러움과 슬픔 그리고 이제는 추억하지도 못하게 퇴색되어 버린 그리움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흐윽, 아…….”

불길에 휩싸인 오두막을 보며 한참을 울었다. 아이처럼 엉엉. 어머니도 불러보고, 욕도 하고, 신을 원망도 했다. 꾹꾹 쌓아왔던 감정들이 모조리 터져 나왔다.

다 쏟아내고 났을 땐 불길이 사그라져 있었다. 탈진하듯 몸이 무너졌다. 내 등을 토닥이는 애쉬의 손은 아직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 * *

여름이 돌아왔다. 애쉬의 호화스러운 침대 위에서 눈뜨는 것도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해졌다. 하녀들이 몰려와 나를 씻기고 옷을 입히고 빗질해 주는 것도 차츰 적응되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찌푸리자 드르륵 소리와 함께 햇빛이 거두어졌다.

“조금 더 주무실래요?”

응, 이라고 백 번은 말하고 싶다.

“아니, 오늘 극장에 가봐야 해.”

황실 소속의 극단이 된 아브모르나는 하루가 다르게 유명해졌고 그만큼 더 바빠졌다. 명예가 따르면서 극단에 쌓이는 재화도 눈처럼 불어났다.

그것은 곧 공연의 퀄리티가 껑충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버렸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이번에 들어갈 새 작품은 건국일 기념 축제 때 초연할 작품으로 극단원 모두가 혼을 갈아 넣으며 준비하는 중이었다. 극단원인 나도 마찬가지다.

“선배 지금 눈도 못 뜨는 거 알아요?”

그럼 모르겠냐. 내 눈인데.

“피곤해 죽겠어.”

웅얼거리며 말하자 크고 따뜻한 손이 뺨에 닿았다.

“이 상태로 무슨 일을 해. 오늘은 그냥 쉬어요.”

심히 안쓰럽다는 듯 얘기하는 말투를 듣자 하니 어이가 없었다.

“네가 적당히만 했어도…….”

으윽. 욱신거려 죽겠네. 어제 몇 번을 한 거지. 네 번? 다섯 번? 관계 도중에 잠깐 의식이 날아가기도 했었다.

저놈은 나 몰래 무슨 약이라도 챙겨 먹나.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거야. 앞으로는 하기 전에 몇 번 사정하고 끝낼 건지 협의 후에 해야겠다.

이불이 들춰졌다. 침대가 무게감 있게 흔들리더니 등 뒤로 포근한 체온이 닿는다.

애쉬가 내 팔뚝을 아기 재우듯 반복적으로 쓰다듬었다. 아, 일어나야 한다니까. 유혹을 털어내려 팔을 움직였다. 물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팔은 마음만큼 크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살짝 들썩인 정도다.

“걱정 말고 그냥 자요. 극단엔 인력을 더 보충해 놓을게요.”

“우음.”

쟈스민의 숨통이 트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일손이 부족해서 매번 우는소리를 하다가 최근에는 애쉬에게 부탁해 볼 수 없겠냐며 은밀한 뒷거래까지 제안했던 그녀였다. 쟈스민은 연출진들끼리 논의가 있을 때마다 무조건 내 의견에 힘을 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쟈스민이 이런 태도로 나오지 않아도 나 또한 애쉬에게 일할 사람을 더 붙여줄 수 없겠냐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극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숨 돌릴 틈도 없이 이곳저곳 불려가며 일하는 게 벅차다 못해 한계에 다다랐다. 너무한 거 아니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단원의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나는 좀 살 만했던 게… 애쉬가 나 없이는 저녁 식사를 하지 않은 탓에 난 저녁 식사 시간 전에 일찌감치 퇴근할 수 있었다. 단원들의 부러움 섞인 눈초리가 처음에는 부담스럽고 미안했으나 이제는 나부터 살자는 마음이 더 강했다. 간혹가다 이러다 사람 한 명 죽어나겠다 싶을 만큼 일이 많을 때는 식사 후 들러붙는 애쉬를 떨어뜨리고 극장에 되돌아가기도 했다.

극단 내에서도 입김이 센 쟈스민이 내 편을 들어준다니. 내 의견이 적극 반영된 장치들이 무대 위에 올라가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포트 씨한테 허락을 받고 최종으론 극단주 놈에게 확인받아야 할 사항이지만 포트 씨와 내 의견은 대부분 통하는 구석이 많았고 문제는 극단주였다.

쟈스민은 지금 나 대신 그 극단주 놈과 싸워 주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히 이득인 제안이다.

손해 볼 것 없군.

대답이 늦어지자 쟈스민은 내가 거절할 거라고 지레짐작했는지 초조한 얼굴로 첨언했다.

‘이번 건국일 공연이 끝나면 네 급료 인상을 추진하는 여론을 만들어 볼게.’

‘넌 뛰어난 협상가야.’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황성에서 지내면서 의식주로 돈 나갈 일이 없긴 했다. 그러나 돈 들어올 일도 없었다. 애쉬는 내가 필요한 거라면 뭐든 가져다주었지만 그게 돈은 아니었다.

말하면 주긴 할 것 같은데… 그 돈으로 뭘 할 건데요? 하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진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닌가. 돈은 있으면 좋고 많으면 더 좋은 거다. 주머니가 두둑해야 마음도 넓어지고 아량도 베풀고 뭐 그런 거 아니겠어.

쟈스민과 대화한 게 어제 점심쯤이었으니 하루 만에 인력 보충이 이루어진 것이다. 난 인력 보충에 관해 입 한번 뻥긋하지 않았다. 기회 봐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저녁 식사 도중 달려든 애쉬 때문에 서두도 못 꺼내 보고 아침을 맞이했던 거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애쉬 입으로 인력 보충을 해준다는 소리가 나왔으니 다 잘된 거지 싶다. 새로 올 사람들 때문에 정신없을 게 분명하니 오늘은 조금 늦어도 티 안 나겠지. 만약 한 소리 한다면 인력 보충에 기여한 공을 방패로 요령 있게 피해 가면 되고.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의식을 놓아버렸다.

조금 늦잠 잔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손등으로 눈을 벅벅 비벼봐도 똑같다.

허. 부스스한 상태로 멍하니 침대에 앉았다. 족히 열두 시간은 넘게 잔 것 같네.

애쉬가 돌아왔다. 시중드는 이들을 내보내고 성큼성큼 다가와 입을 맞췄다. 차가운 입술이 맞닿으니 갈증이 났다. 애쉬의 목을 끌어안으며 혀를 깊게 섞었다. 비몽사몽했던 정신이 다른 색으로 옅어졌다.

애쉬가 침대에 무릎을 대고 앉은 자세였기에 아무리 목을 끌어안았다고 해도 높이 차이가 많이 났다. 내 목이 뒤로 완전히 꺾여버릴 것만 같았다.

뻐근하고 불편한 자세와는 별개로 혀를 감싸는 축축한 타액이 달콤했다. 쭉쭉 빠는 소리가 외설적으로 들렸으나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손바닥 밑에 닿은 녀석의 등근육들이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스가 길어지면서 호흡도 가빠져 온다. 색욕이 짙은 입김을 퍼부으면서 애쉬가 몸을 밀착해 왔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침대 위로 드러눕고 말았다.

“읏!”

내 목에서 터진 신음이 아니었다. 혀 위로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놀라서 애쉬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아, 잠, 잠깐.”

애쉬는 멈추지 않고 골반을 느리게 움직이면서 입술을 맞대는 데에 급급했다. 녀석의 야릇한 몸짓에 허벅지 안쪽이 떨려왔다. 진하게 느껴지는 피 맛에도 몸은 착실히 흥분된다.

아, 미친 것 같다.

이대로 애쉬의 입술을 조금 더 탐하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피의 양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녀석의 이마를 밀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하아, 선배, 왜요. 네?”

애쉬가 가라앉은 소리로 투정하며 내 얼굴 방향을 따라와 고개를 내렸다.

“피, 읏, 진정해. 봐. 피가 나잖아.”

“괜찮아요. 제 피예요.”

“뭐가 괜찮, 읏, 읍.”

피 양이 심상치가 않았다. 도무지 말을 처들어 먹지 않은 애쉬의 등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얼굴 좀 보게!”

애쉬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한숨을 연달아 쉬더니 내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녀석의 양 뺨을 잡고 멀찍이 떼어냈다.

“미친…….”

입가가 온통 피범벅이었다. 혹시나 해서 내 입술 주변도 쓸어보았다. 타액과 섞인 묽은 피가 흥건히 묻어 나온다.

“선배, 너무 야해요.”

녀석이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덧그리듯 쓸어갔다. 쾌락을 좇는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애쉬가 혼몽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내 피를 묻히고 있는 모습이…….”

“…….”

“하아…….”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애쉬를 필사적으로 막아 세웠다.

“진정해!”

“아, 선배… 진짜…….”

“닥치고 입이나 벌려.”

양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막아 세웠다. 애쉬가 정욕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닥치고 입을 어떻게 벌려요.”

진지하게 물어오는 애쉬를 피해 옆으로 몸을 굴렸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자 애쉬가 애 옆으로 쪼르르 다가와 앉는다.

“나 봐.”

애쉬가 몸을 틀어 앉았다.

“입 벌려.”

“아.”

혀끝에서부터 응어리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윽. 아팠겠다.

얼굴이 절로 찌푸려진다. 침대에 가만히 앉아서 피가 멈추기만을 기다리기엔 깊은 상처였다. 입을 헹구게 한 뒤 의원을 불러 힐링을 받도록 했다.

처음 의원이 방 안에 들어섰을 때 피범벅인 내 얼굴을 보고 놀라며 나에게 힐링을 시전하려 했었다. 당황하여 손사래 친 뒤 애쉬를 가리켰다.

의원이 물러간 뒤 애쉬의 혀를 오랫동안 관찰했다. 상처가 말끔히 나은 매끈한 혀를 보자 안도가 되었다.

“저는 더 다쳐도 괜찮은데요.”

“내가 안 괜찮아.”

“선배가 걱정해 주니까 오히려 더 좋은 거 같기도 하고.”

나는 속상해 죽겠는데 녀석은 헤실헤실 웃고 있기나 한다.

“내 허락 없이는 함부로 다치지 마. 알았어?”

“…….”

“…….”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상태에서 눈만 깜빡거렸다.

…굉장히 오글거리는 말이 내 입으로 나온 것 같은데 말이지. 심지어 이번 유혈 사태는 내가 애쉬의 혀를 깨물어서 일어난 것이었다.

애쉬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내 귀가 터질 듯이 화끈거린다. 아, 미친! 쏟아버린 말을 다시 주워 담는 마법은 없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아니… 그게.”

순진한 어린 애인을 구속하려 드는 말투는 내가 생각해도 저질이었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어버버거리고 있는데 녀석이 대뜸 목에 얼굴을 비비며 안겨왔다.

“와, 선배. 방금 그 말 뭐예요?”

“어?”

“심장 터져서 죽는 줄 알았어요.”

“…….”

“선배 엄청… 내 주인님 같았어.”

“…….”

아, 얘 나보다 한술 더 뜨는 놈이었지.

애쉬와 늦은 저녁을 함께하고 침대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내가 떠들고 애쉬는 들어주는 편이어서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레 건국일에 초연될 공연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모르고 있던 내용이 애쉬의 입에서 나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짜야?”

“제가 선배한테 어떻게 거짓말을 해요.”

“멀쩡한 황성극장을 놔두고 왜 황립아카데미에서 초연하는데?”

“축제잖아요. 황성극장에서 공연을 올리게 되면 매번 보던 사람들만 보고 끝나게 되니까요.”

“확실히 접근성은 황성보다는 아카데미 쪽이 낫긴 하지…….”

아카데미 학생들을 전부 수용할 수 있어야 했기에 극장도 컸고 무대도 넓었다. 여러모로 황실극장보다는 아카데미 극장에 공연을 올리는 것이 타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황실극장에서 공연한다고 알고 있던 이유는 배우들 동선이나 무대 세트를 황실극장 무대를 기준으로 연습하고 있어서였다.

그렇다면 포트 씨도 몰랐다는 건가?

“건국일에 연극 공연을 하는 게 처음이니까 극단원들도 잘 몰랐을 거예요. 오늘 극장 대관이 확정되었다고 하니 아마 내일이면 극단 사람들도 알게 되지 않을까요?”

내 궁금증을 읽은 애쉬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그렇구나. 그런데 너… 할 일 없어?”

“네?”

“네가 내 앞에서나 귀엽고 강아지 같은 녀석이지, 네 자리가 아무래도 좀… 만만한 자리는 아니잖아?”

애쉬가 고개를 갸웃했다. 황제와 애쉬 사리의 괴리감은 여전히 내 안에 존재했기 때문에 입 밖으로 “너 황제잖아.” 하고 직접 꺼내는 것이 영 껄끄러웠다.

“극단 일 같은 건 네 아랫선에서 다 처리할 텐데 말이야.”

한번 고개를 내민 의심은 뒷받침할 근거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사를 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건 그냥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용 아니야?”

“극단 일은 선배가 하고 있으니까 제가 당연히 신경…….”

“길덴에 오래 머무르고 있을 때도 수상했는데 역시 맞았어. 어쩐지 잠도 안 자고 그 짓을 해대더라. 넌 낮에 집무실에서 낮잠 자고 나만 죽어라 일하다가 온 것 같은 억울한 기분이 드는데?”

가늘게 뜬 눈으로 애쉬를 흘겨보았다. 애쉬가 허둥대며 내 손을 붙잡았다가 뺨에 입을 맞춘다. 손은 왜 잡고 입은 왜 맞췄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굉장히 난처해 보였다.

“오해예요. 제가 시간이 남아돌았더라면 선배랑 같이 있지 왜 혼자 낮잠이나 자는 짓을 해요.”

“…….”

“믿어주세요. 그렇게 나쁜 짓 할 만큼 담이 크지 못해요…….”

애인 몰래 낮잠 자는 게 언제부터 담력이 필요할 만큼의 나쁜 짓이 된 건지……. 전쟁은 창, 검 대신 가위바위보로 했냐.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웃어버리고 말았다.

“알아, 바보야. 장난친 거야.”

아주 잠깐은 녀석이 진심으로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있는 일도 뒤로 미루고 내 옆에 딱 붙어있고 싶어 하는 녀석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내가 점심에 뭘 먹었는지까지 보고 받는 녀석이 극단 일이라고 무관심할까.

“아, 뭐예요.”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애쉬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며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유난 떨기는.”

“진짜예요. 저는 선배랑 저 사이에 또 오해가 생길까 봐…….”

아까부터 만지고 싶었던 애쉬의 금발을 흩뜨렸다. 애쉬가 내 손을 따라 머리를 기울였고 몸도 함께 기울어졌다. 커다란 몸이 힘을 쭉 빼고 나에게 기대오자 버티지 못하고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금발 속에 파묻혀있던 손을 꺼내어 녀석의 등에 둘렀다. 애쉬가 나에게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제가 잘할게요.”

피식. 장난은 내가 쳤는데 왜 그런 반응이 나오냐.

“그래.”

“진짜 잘할 테니까 저 미워하지 말아요. 떠나지도 말고 떠날 생각도 하지 말고.”

사람 관계라는 게 언제까지고 하하 호호, 꽃밭일 수만은 없는데 가끔은 생각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말하려다가 관뒀다. 애쉬가 정말 울 것 같았다.

“응.”

토닥토닥. 등을 쓸어주자 애쉬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품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나보다 키도 덩치도 한참이나 큰 거구를 안고 있으려니 슬슬 허리도 아프고 팔도 뻐근하다. 달라붙는 온기와 명치를 간질이는 체 향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버티고 있지도 않았을 거다.

“선배.”

“으어!”

돌연 고개를 쳐든 애쉬 때문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자세가 무너져 버렸다. 침대 위로 쓰러져 버렸다. 애쉬가 빠르게 내 얼굴 옆을 짚으며 무게를 덜어주었다.

“힘들면 걷어차 버리지.”

“…별로 안 힘들었거든.”

“얼굴은 빨개 가지고.”

애쉬의 표정이 미묘했다. 눈은 걱정스럽다는 듯 일그러져 있는데 입꼬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자꾸만 씰룩댄다.

애쉬가 참지 못하고 내 위로 완전히 몸을 겹치며 목에 얼굴을 묻었다.

“아, 나 진짜 나쁜 사람인가 봐요.”

“윽, 무거워!”

“선배, 왜 버티고 있었어요? 네? 무거웠잖아요. 그런데 왜 계속 안아 주셨어요?”

…진짜 몰라서 묻는 거냐

“왜 말이 없어요. 제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는 거예요?”

해석할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야, 숨 막혀!”

날 가루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이 팔 좀 풀어!

“선배는 힘들어서 얼굴까지 빨개졌는데 전 발기나 하고.”

“뭐?”

“전 진짜 나쁜 새끼예요.”

이 자식은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목을 잘근잘근 씹는 녀석의 머리를 밀어냈다.

“정신 좀 차리지?”

애쉬가 숨을 몰아쉬었다. 등으로 손을 돌려 옷을 잡아당기자 녀석이 떨어졌다. 붉은 입술이 타액으로 번들거린다. 애쉬는 더 이상 달려들지 않고 긴 속눈썹을 느리게 팔랑거리며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죄송해요.”

“더워, 비켜.”

쪽.

비킬 땐 비키더라도 입맞춤은 하고 비키겠다는 건지… 애쉬는 입술을 짧게 머금고 나서야 내 몸 위에서 물러났다. 옆자리가 무게감 있게 출렁거렸다.

애쉬가 팔을 뻗었고 난 베개 대신 녀석의 팔 위로 익숙하게 머리를 올렸다. 긴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살살 머리를 어루만지는 감각에 몸이 나른해졌다. 하루 종일 잤음에도 불구하고 수마가 밀려든다. 너무 게으른 하루를 보낸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드는 것과 반대로 몸에 힘이 빠졌다.

“선배.”

조용히 부르는 소리에 감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낮은 웃음을 터뜨린 애쉬가 손으로 눈을 감겨준다.

“아카데미에 가볼까요? 오랜만에.”

“…왜?”

“극장 답사도 할 겸.”

그걸 우리가 왜 해? 나는 그렇다 쳐도 네가 왜?

희미해지는 의식을 붙잡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억지로 눈을 떴다.

“가서 뭐 하게?”

“선배랑 둘러보는 거죠.”

“…너 정말로 할 일 없어?”

“또 서운한 말.”

“굳이 네가 안 가도 되니까 그렇지.”

애쉬가 내 코를 아프지 않게 쥐었다가 놓았다.

“핑계예요.”

“…….”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요, 선배랑.”

참 감성도 풍부하고 낭만도 많은 녀석이다. 지나간 기억들을 되짚어보는 것이 우리에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행인 건 방학 기간이라 학생들이 많지 않았다는 거다.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황금 동상을 앞에 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애쉬는 황금상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그날을 회상했다. 내가 애쉬의 점심값을 대신 내줬던 날을.

“사이즈를 더 크게 제작할 걸 그랬어요.”

“이 흉물을 여기서 더 키우겠다고?”

미친 소리 마.

“흉물이라뇨.”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거 철거하자.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30루덴 대신 내준 것 가지고 황금 동상까지 세우는 건 너무너무 과해. 당사자인 입장으로서… 보기 부끄럽다고.”

“…부끄러워요?”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니까…….”

“그럼 하찮은 일이에요?”

“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애쉬의 입이 조그맣게 벌어졌다.

“아…….”

그리고 나에게서 한 발 물러선다. 상처받은 게 틀림없다. 예상했던 거라 당황하지 않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두 발 다가섰다.

“정 황금 동상이 만들고 싶으면 손바닥만 한 사이즈로 제작하자. 보고 싶을 때마다 언제든 꺼내 볼 수 있게.”

“부끄럽고 하찮은 일…이라는 거죠?”

더 다가서려 하자 애쉬가 손으로 날 막아 세웠다.

“잠시만요. 저 지금… 마음이 아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음이 아플 게 뭐가 있어.”

그냥 이 엿 같은 황금 동상을 미니 사이즈로 제작하자는 건데.

“선배는 저와의 추억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

“전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는데, 이 황금상도 마찬가지고요.”

애쉬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설마.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 많이 힘들었잖아요……. 그래서 몇 없는 좋은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어요. 선배도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선배는… 하찮고 부끄러운 거로만 치부하니까…….”

끝내 눈물방울이 푸석한 잔디 위로 떨어졌다.

“마음이 아파요.”

우는 네 얼굴을 보는 내 마음만큼 아플까. 하아, 또 애쉬를 울려버렸다. 나는 진짜 몹쓸 애인이다.

하찮고 부끄럽다니. 그건 내가 한 행동에 비해 황금 동상이 너무 과분하다는 뜻이었지… 절대 우리의 추억에 빗대어 한 말이 아니다.

손가락 끝으로 애쉬의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애쉬가 손을 뒤로 물린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으나 나에겐 마른하늘에 번개가 내리치는 것만큼이나 놀랍고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울지 마. 봐, 미안해.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사과하지 마요. 그게 더 싫어요.”

“하아. 내가 말실수했어.”

“어떤 거요?”

“부끄럽고 대단하지도 않은 일이었다고 한 거.”

“그럼요?”

“네가 우리의 추억을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나도 그래.”

물기 어린 벽안이 조심스럽게 나를 본다.

“선배 황금상… 그래도 둬도 되는 거죠?”

“…….”

“우리의 소중한 추억이잖아요.”

눈물을 얼룩덜룩 묻힌 얼굴로 애써 미소짓는 녀석을 보고 나는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그래, 네가 하자고 하면 하는 거지.

녀석을 또 울리는 것보다 조금 창피한 게 나았다. 내 마음은 하루가 다르게 물렁물렁해지고 있다.

“재주도 좋다.”

박수까지 쳐주자 애쉬가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웃었다. 커다란 손바닥 위를 차지하고 있던 작은 돌들이 창문에 부딪혀 다시 땅 위를 구른다.

애쉬는 가벼운 동작으로 돌을 던졌고 손에서 벗어난 돌은 시원하게 쭉쭉 뻗어 나가며 내가 살던 기숙사 방 창문에 부딪혔다.

나도 호기심에 돌을 던져보았다. 그러나 창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맥없이 떨어져 버린다. 오기가 생겨 몇 번 더 던졌으나 팔만 아파왔다.

“마법 쓴 건 아니지?”

“설마요.”

“차라리 마법을 썼다고 해. 내가 뭐가 돼.”

“그건 거짓말이잖아요.”

방긋방긋 웃으며 속을 뒤집는 것이 노련하다.

애쉬의 손바닥 위에 쌓인 돌들을 전부 치워내 버리고 손을 탁탁 털었다. 내가 머물던 방에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주인이 바뀐 방을 구경하는 건 민폐인지라 포기했다.

몰랐었는데, 기본 예절이라든가 도의적인 사고가 조금 부족한 애쉬는 평소 하던 대로 눈치 보지 않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녀석을 잡고 끌고 나온 후 건물 밖에서 돌로 창문을 두드리는 거로 만족했다.

“옛날 생각나요. 창문 밖에서 선배 보던 때요.”

“응. 처음에 네가 돌 던져서 나 깨웠을 때…….”

“선배 되게 예뻤었는데.”

“진짜 미친놈인 줄 알았지.”

“네?”

“뭐?”

“저 미친놈 같았어요?”

“아니, 잘못 들은 거야.”

아이 씨, 이놈의 주둥이.

애쉬가 더 캐묻기 전에 걸음을 옮겼다.

자. 가자, 가자. 극장 봐야지.

“잠깐만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네. 찌푸려지는 미간을 펴기 위해 노력했다. 우려했던 것과 다르게 애쉬는 웃고 있었다.

“그 전에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따가운 햇볕, 쌉싸름한 풀 향기, 발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사박거림. 사소한 감각들이 나를 떨리게 만들었다.

밑동만 남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 앞에서 잠도 잤고, 멍하니 앉아있기도 했고, 어머니를 떠올리기도 했다. 늘 혼자서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단 한 번 누군가와 함께 이곳에 있던 적이 있다.

그 사람, 애쉬는 분홍 잎이 만발한 벚꽃과 푸르른 초록 잎, 알록달록한 가을의 단풍, 깨끗한 눈. 사계절의 시간을 보여주며 과거의 고통 속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음을 주었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한 번의 기억이 너무도 커다랗게 자리를 잡아서 이 공간을 떠올릴 때면 마음이 세차게 떨렸다.

“여기 오랜만이네.”

“선배랑 꼭 여기에 다시 와보고 싶었어요.”

애쉬가 나무 밑동을 등받이 삼아 앉았다. 내가 옆에 앉으려고 하자 녀석이 허리를 감싸 안더니 허벅지 위로 끌어당겼다.

나는 녀석의 가슴을 등받이 삼아 편히 앉았다.

“왜?”

그날의 고백이 녀석에게도 어지간히 인상 깊긴 했었나 보다.

“선배가 저한테 반한 곳이니까요.”

애쉬가 내 볼을 콕 하고 찔렀다.

“…내가 그때 반했었는지 안 반했었는지 어떻게 알아?”

“저한테서 눈을 못 뗐잖아요.”

“너한테서 눈을 못 떼면 다 너한테 반한 거냐?”

“그렇던데요?”

…그래, 그렇겠구나.

잘생긴 얼굴로 웃기까지 하니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를 수도 있잖아.”

“저랑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어요.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눈.”

“내가?”

“선배 심장 뛰는 소리가 제 귀에까지 들렸어요.”

“네 심장 소리가 아니고?”

애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내 눈이 그렇게 보였구나. 심장 소리가 기어코 애쉬의 귀에까지 들렸었구나. 아닌 척 시치미 떼고 있었지만 다 들켜버렸다.

“지금도.”

애쉬가 내 허리에 단단히 팔을 감았다.

“지금도 쿵, 쿵, 거려요. 선배 심장 소리… 엄청 커요. 기분 좋다.”

“그거 네 거라니까.”

내 심장이 북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혹시나 해서 가슴 위에 손을 얹어보았다. 놀래라. 손바닥이 울릴 정도로 빠르고 강하게 뛴다.

“맨날 이랬으면 좋겠다.

“그건 병이야.”

어깨 위에 파묻힌 애쉬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선배가 맨날 날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꿈이 야무지네.”

“안 놓아줄 거예요.”

“참나.”

“그러니까 선배도 날 놓지 말아요.”

“…….”

“사랑해요.”

우리는 먼 길을 돌아와서야 사랑한다는 말을 해줄 수 있게 되었다. 서로에게 조금 더 솔직했더라면 천 번은 더 속삭여줄 수도 있는 말이다.

불시에 찾아드는 후회는 지금도 어쩔 수 없다. 괴롭히는 게 후회뿐일까. 나는 아직도 세레즈의 꿈을 꾸고, 애쉬 또한 내가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말끔히 씻겨나가지 못한 불행의 상처들이 통증을 일으킬 때마다 우리는 땅굴을 파고 숨어드는 대신 서로를 찾았다.

나는 녀석에게, 녀석은 나에게 기대어 불안정함을 공유한다. 미친 소리같이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우리는 서로의 나약함을 어루만지며 가슴이 뻐근해질 만큼의 충족감을 만끽했다.

나에게 애쉬가 없으면 안 되듯이 녀석에게도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거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 세계의 전부, 공기, 햇살, 물.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유일한.

“응.”

필사적이고도 절박한 온기가 몸을 감싼다. 불온함을 담은 익숙한 온기다.

애쉬의 손등을 토닥거리며 미소 지었다.

“나도 사랑해.”

<그놈을 책임져야 하는 이유>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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