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뒤늦은 약속 (1)
센터를 비추고 있던 탑이 서서히 옅어지고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는 완벽한 어둠이 찾아왔다. 잔잔하게 연주하던 음악이 경쾌한 리듬으로 바뀌고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며 쩌렁쩌렁 퍼졌다.
팟!
무대 전체가 환히 보이도록 조명이 밝게 켜지자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배우들이 재등장하며 인사하고 막이 내려올 때까지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4개월 가까이 공연을 올리면서 그 횟수도 세 자릿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많은 공연 회차 가운데에 단언컨대 오늘처럼 완벽한 공연은 없었다. 늘 배우 혹은 스텝적인 부분에서 자잘한 실수가 일어나곤 했었는데 오늘은 그 자잘한 실수마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배우와 스텝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몰입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은 다른 공연도 아니고 무려 펜테리온 황실극장에서 올리는 공연이었다.
극단주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가며 연신 ‘브라보!’를 외쳐댔다. 공연의 퀄리티에 만족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창창할 미래에 대한 환호성 같았다.
그 속이 빤히 보였지만 나 또한 아브모르나가 황실극장에서 공연한다는 점에 감격하고 있었기에 그마저도 나름 귀엽게 느껴졌다. 오늘 공연은 정말 훌륭했다.
손바닥이 부서져라 박수를 쳤다. 1층 객석 가장 뒷자리에 앉은 내가 무대에 선 배우들에겐 보이지 않아도 박수 소리만은 그들에게 들리길 바라면서.
객석 조명이 켜지고 극장 안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공연의 여운에 취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귀를 열어 그 소리들을 빠짐없이 새겨들었다.
공연이 끝났다는 안내가 들려오자마자 난 굳게 닫혀있던 극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마음 같아선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대기실로 질주하고 싶었으나 길덴의 아브모르나 극장도 아니고 그런 개념 없는 추태를 보일 순 없었다. 들었던 칭찬들을 전달해 주고 싶은 마음으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런데 금칠 된 황실 바닥 위를 달리며 대기실로 통하는 문을 열려는 순간 손목이 잡혔다.
“읍?”
딱딱한 벽의 냉기가 등 뒤로 전해 오는가 싶더니 따뜻한 것이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 위의 물음표가 사라지기도 전에 아랫입술이 씹혔다. 찌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하아, 선배.”
갈증 난 사람처럼 무작정 입술부터 들이민 불한당 같은 놈은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입술 박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얼굴은 제대로 못 봤어도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녀석의 체 향과 닿아오는 피부의 감촉이 애쉬임을 대신 얘기해 주었다.
쪽쪽거리며 다급하게 입술을 머금다가 뺨을 타고 눈꺼풀 위까지 빨아대는 바람에 윙크하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평소의 다정한 입맞춤이라기보다는 심통 난 듯 투정 어린 입맞춤이다.
“자, 잠깐. 왜 그래?”
애쉬의 어깨를 밀었다. 입맞춤이 싫다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사방이 뻥 뚫린 복도 한가운데에서 이러고 있을 만큼 얼굴이 두껍지 못했다.
…라는 건 내 입장이고 애쉬는 시선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오히려 내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 고개를 돌려 피하니 입술이 목으로 내려앉았다.
흠칫. 야릇한 소름에 어깨를 떨었다.
“짜증 나요.”
“뭐가… 읏, 아파!”
발꿈치가 들릴 정도로 목이 아프게 깨물렸다. 애쉬가 큰 손으로 등을 느리게 쓰다듬으며 깨문 부위를 입술로 꾸욱 누른다.
“우리 얼마 만에 만난 건지는 알아요?”
애쉬가 말할 때마다 뜨끈한 숨결과 함께 약한 진동이 목을 자극시켰다. 알고서 그러는 건지… 옅은 흥분감이 몰려와 입술을 축였다.
“좀 떨어져서, 말해, 하아.”
“전 오늘만을 기다리면서…….”
“읏, 야?!”
애쉬가 하반신을 바짝 붙이며 안겨들었다. 단단히 선 녀석의 중심이 밑에 닿았다.
언제 이렇게 커진 거야?!
물러설 곳도 없이 발꿈치가 굳건한 뒷벽만을 긁어댔다.
“잠도 못 자고 미치는 줄 알았는데.”
애쉬는 보란 듯이 허리를 움직이며 낮은 신음을 귓가에 퍼부었다. 본인이 흥분한 것도 맞지만 날 자극시키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담긴 몸짓이었다.
그걸 알면 이성적으로 녀석을 밀어내야 하는데 몸이 착실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여기서 무슨 짓이야. 미치겠네.
“야, 이따, 읏, 이따가…….”
“이따가, 언제요? 네?”
“하으…….”
“6년을 기다렸는데.”
애쉬가 말꼬리를 늘이며 처연하게 얘기했다. 진득한 허리 놀림은 멈추지 않고 있어서 어투와 몸짓의 분위기가 상극이었다.
녀석의 눈이 쓸쓸한 빛을 띠며 나를 바라보았다. 윽. 무정한 연인의 태도에 상처받은 눈이다. 애쉬가 불쌍하다 못해 죄책감마저 들었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내가 6년 만에 수도로 돌아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6년 동안 애쉬를 만나지 못한 건 절대 아니다.
우선 애쉬와의 재회는 1년 전 길덴에서 이루어졌다. 뭐, 그때야 오해도 많았고 솔직하지 못한 부분도 있어서 서로 밀어내기에 급급했었지만.
나와 애쉬의 관계가 다시 정립된 건 세레즈가 죽고 난 직후부터다.
내 세계의 절대 악이었던 세레즈가 사라지고 나니 애쉬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서로가 없던 시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조금은 강박적일 정도로 숨김없이 마음을 표현했다.
밤새 사랑을 속삭이며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던 것도 잠시, 의외의 부분에서 갈등이 생긴 나와 애쉬는 언성 높여 말다툼했다. 하지 못했던 만큼 사랑한다는 말을 채우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말이다.
그날 나는… 정말 오랜만에 애쉬가 오열하는 걸 보았다. 원래도 눈물이 많던 녀석이지만 숨을 헐떡거리는 거로도 모자라 뒤로 넘어갈 것처럼 울어대는 건, 5년 전에 그만 쫓아다니라고 녀석을 내칠 때 이후론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눈가가 시뻘게지도록 오열하고 있는 애쉬를 두고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안 돼. 수도로 돌아가는 건 너 혼자야, 애쉬.”
애쉬는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처럼 절망에 찬 얼굴을 하더니 내 말을 부정하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같이 가요, 흐윽. 이제 그만 떨어져 있고 싶어요.”
“영원히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이번 작품이 끝날 때까지만이야.”
“저보다 그깟 공연이 더 중요해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
…라는 대화를 한 열 번쯤 반복한 것 같다.
갈등의 원인은 내가 애쉬와 함께 수도로 돌아가느냐 마느냐 하는 거였다. 애쉬는 아―주 당연하게도 나와 함께 수도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수도로 돌아가면 나와 이것저것 해볼 것이 많다며 잔뜩 들떠있던 애쉬는 나에게 출항 시간을 언제로 하면 좋을지 물어본 직후, 한껏 행복으로 젖어있던 기분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네 출항 시각도 내가 정해 줘야 해?’라는 나의 말 때문이었다. 너는 너, 나는 나. 냉정하게 선을 그어버린 답변에 애쉬는 몇 초간 벙쪄 있었다.
아차.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아서 나는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 아브모르나에서 새 작품이 들어가는데 황실에서 공연할 목적으로 만드는 작품이라 스케일이 커. 제작비도 저번 작품보다 두 배는 더 들어가고. 포트 씨가 이번 작품의 드라마트루기로 나를 추천했어. 극작부터 참여하게 될 것 같은데… 나한테는 엄청 좋은 기회거든.
함께 가지 못한다는 말에 애쉬가 반기를 들었다.
“안 돼요. 안 돼! 안 하겠다고 해요, 네? 제발요.”
매번 동화 읊어주기 수준으로 아역 배우들 뒤치다꺼리만 했던 나에게 이번 기회는 정말 황금 같은 기회였다. 직급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 봉급도 몇 배는 뛸 것이고 배포되는 포스터에도 내 이름이 들어가게 된다. 생사에 연연하지 않고 내 능력을 발휘하는 게 처음이었기에 욕심이 생겼다.
“극단에서 주는 돈의 백 배를 더 드릴게요. 그냥 저랑 같이 가요.”
재수 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내 손을 양손으로 붙잡으며 애쉬가 애원했다. 돈을 준다니 마다하지는 않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애쉬도 이미 너무 오랜 기간 동안 수도를 비워놓았고 로벤스디와 관련된 일을 처리해야 해서 길덴에 남아있기엔 무리였다.
오히려 난 애쉬가 바쁜 것이 잘됐다고 판단했다. 녀석은 녀석대로 일하고 나도 나대로 일하다가 마무리를 짓고 난 후 만나면 좋지 않은가. 게다가 이 공연은 황실극장에서 공연하는 것이어서 굳이 애쉬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필연적으로 수도에 가야 했다.
“공연이 끝나면 네가 싫다고 해도 네 옆에 붙어있을 거야.”
“지금부터 있어주면 되잖아요.”
애쉬가 몸을 와락 껴안았다. 녀석의 떨림이 느껴진다.
후우.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해 봐도, 왜 이렇게 애처럼 구냐고 소리쳐 봐도 소용없다.
나는 애쉬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애쉬,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부터 운명에 끌려가면서 살아왔어. 무엇 하나 내 뜻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었지.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도, 널 떠난 것도, 이름을 버린 것도 다.”
애쉬의 훌쩍임이 어깨 위로 파묻혀 들어간다.
“그리고 이제야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된 거야. 극단보다 네가 훨씬 소중한 건 맞아. 비교도 못 하지. 하지만 지금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 인정받고 싶어. 나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알리고 싶어, 애쉬.”
곧 죽어도 안 돼요, 를 외치던 애쉬가 울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혼자 갈 수 있지?’ 하고 한 번 더 묻자 몸 위에 감겨있는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으윽. 숨이 턱 막힐 만큼 강한 힘이었다.
애쉬는 ‘죽을 만큼 싫어요. 너무 싫은데…….’ 하고 우울하게 웅얼거렸다.
“…빨리 와야 해요.”
선배한테 미움받는 건 더 싫으니까.
애쉬가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을 풀고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은 여전히 도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고마움에 녀석의 양 뺨을 잡고 진한 입맞춤을 해주었다. 고마워, 사랑해. 내 입으로 ‘사랑해’라는 말을 내뱉는 건 역시나 어색한 일이지만… 사랑해, 라는 말을 대신할 다른 말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애쉬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내 입속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날의 섹스는 하는 내내 애쉬가 정액과 눈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 짜내며 흘려댄 탓에 탈수 증상이 오진 않을까 진지하게 걱정해야 했다. 아주 배부른 고민이었다. 먼저 쓰러진 건 언제나처럼 나였다.
우리는 떨어져 있는 기간 동안 각자의 일을 착실하게 해나갔다. 아브모르나의 공연은 성황리에 진행되었고 애쉬 쪽도 수월하게 상황이 정리되어 갔다.
휴겐트 로벤스디가 순수한 봉사의 의미로 세웠던 고아원이 세레즈 로벤스디에 의해 세뇌 마법이 자행된 범죄 현장으로 탈바꿈된 사실은 대륙을 들썩이게 할 정도로 큰 화제가 되었다. 죄 없는 세레즈를 왜 수배하냐고 황실에 이의를 제기했던 귀족들은 꼬리를 말고 숨어들었다.
세뇌되었던 로벤스디가의 시종들은 마법이 풀렸음에도 오랫동안 정신을 지배받고 있던 터라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게 익숙지 않았다. 잠들고 깨어나는 것조차 세레즈가 정해 놓은 시간에 취침하고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제국은 그들의 치료 비용을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으나 빠른 시일 내에 정상으로 돌아오기란 어려워 보인다는 게 의원들의 소견이다.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자 애쉬는 틈만 나면 길덴에서 시간을 보냈다. 한 달 내내 머물고 간 적도 있었다. 아니, 일이 마무리되지 않아도 열흘에 한 번씩은 꼭 나를 보러 왔다.
드디어 나도, 애쉬도 고대하던 황실 공연 일정이 잡혔고(예상보다 두 달은 일찍 잡혀서 포트 씨가 난감해했다.) 내가 수도에 도착하는 날, 항구에서부터 기다리고 있던 애쉬 때문에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황제가 직접 맞이한 극단이라니……. 하며 귀족들 사이에서의 기대감이 엄청 높아졌다.
공연이 있기 일주일 전부터 애쉬는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난 황실에서 제공한 극단원들의 숙소를 구경도 못 해보고 황제궁에서 일주일 밤낮으로 시달려야 했다.
…공연 날 하루 전인 어제도 말이다. 그러니 애쉬가 6년을 기다렸네 마네 하는 투정은 지나친 감이 있다.
“어젯밤 내내 너랑 침대에서 뒹군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 비꼼에도 애쉬는 귓불을 잘근잘근 씹기만 했다.
“비켜. 누가 보겠어.”
“제가 창피해요?”
“뭐? 말이 왜 그렇게 돼.”
애쉬는 상처받은 눈을 하고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압박하던 몸이 사라지니 휑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렇게 빨리 떨어질 줄이야.
마침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애쉬가 평소와 다르게 고집을 쉽게 꺾은 건 안도해야 할 일이다.
그래. 근데 왜 아쉬워하는 거야, 심장 놈아.
얼토당토않은 말을 던져놓고 혼자 풀이 죽은 애쉬는 뚱한 입꼬리를 끌어 내렸다. 무슨 말이 이어질지 몰라 잠시간 기다렸으나 예쁜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창피하다니 도대체 누가. 오히려 가는 사람 붙잡고 자랑하고 싶을 만큼 예쁘고, 귀엽고, 잘생기고, 똑똑한 데다가 마법까지 잘 쓰는 녀석이다. 가끔(자주) 고집을 부리긴 하지만 툭툭 내뱉는 투정조차도 깜찍하기가 이를 데가 없는데!
애쉬가 나를 놀리려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됐다. 하지만 시무룩해진 얼굴은 낯빛마저 어두워 보였다. 심장이 죄어오는 느낌에 건조하게 마른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잖아.”
“…제가 선배를 좋아하는 만큼은 아니란 건 알아요.”
“왜 또 비뚤게 나오실까? 응?”
“전 선배랑 계속 붙어있고 싶은데 선배는 웬 놈들 시선 신경 쓰느라 붙어있지도 못하게 하고.”
“…그건 네 자리가 자리니까.”
“역시 제가 창피한 거 맞잖아요.”
녀석을 앞에 앉혀두고 네가 얼마나 예쁜지 하루 종일 읊어주고 싶었다. 귀에 피가 나도록 말이다. 그래야 저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안 하지.
어디부터 이야기해 줘야 하나. 깐 달걀 같은 매끄러운 피부? 영롱한 눈동자? 숱 많고 결 좋은 머리카락?
외모 이야기만으로 하루가 훌쩍 지날 것 같다. 성격이랑 능력 얘기를 하려면 일주일 밤낮을 쉬지 않고 떠들어대도 부족하다.
애쉬의 장점이 마구잡이로 터져 오르는 동안 우리 사이엔 의도치 않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것을 침묵으로 느끼지 못했다. 왜냐면 아직까지도 입에 옮겨야 할 장점이 머릿속에서 마구마구 흘러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쉬의 걷잡을 수 없이 침울해진 얼굴을 보고서야 아차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말릴 틈도 없이 애쉬의 코가 찡긋 올라갔다. 시큰해진 눈물을 참아내는 사람처럼.
멀리서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여기서 애쉬가 울기라도 하면… 하, 낭패다.
나는 슬쩍 몸을 옆으로 빼내어 애쉬의 뒤를 주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얼굴들이 재잘재잘 떠들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애쉬, 우선 자리를 조금 옮길까?”
“제 몸만 취하고 버리는 거예요?”
“…….”
“그러고 보니 선배는 맨날 제 얼굴만 예쁘다 예쁘다 하셨잖아요. 제가 가지고 놀기에는 좋은데 남들 앞에서 사랑한다고 알리기에는 역시 창피한 거죠? 제가 너무 어린애 같아서요?”
소름 끼치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적막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건 오직 나 혼자뿐.
애쉬는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였다. 나는 녀석을 달래줘야 할지, 아니면 애쉬의 말을 전부 들었을 아브모르나 극단 사람들 그러니까 쟈스민, 포트 씨, 극단주에게 해명이라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상체를 빼내어 뒤를 보니 쟈스민이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손바닥 밑으로 꾹꾹 누르면서.
아브모르나 극단원들 대부분은 나와 애쉬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었다. 아브모르나뿐만 아니라 제국신문에도 애쉬와의 스캔들에 내 이름이 몇 번이나 거론되며 6년간 공석이었던 황후 자리에 앉게 될 유력한 후보라고까지 설명을 덧붙였었다.
하지만 황실 측에서도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이 없고 나 또한 지나가는 말로도 애쉬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 아브모르나 극단원들은 암묵적으로 나와 애쉬의 관계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구태여 수면 위로 끄집어내진 않았다. 극단주의 양녀 소리를 매일 아침 인사로 들어야 하는 건 별개다.
즉, 지금처럼 직접적으로 애쉬와 내가 친근하게 붙어있는 모습은 저들도 처음 보는 거라는 거다. 보통의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는 그러한 장면도 아닌, 연인을 단순 잠자리 상대로밖에 보지 않는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급 ‘나’와 상처받은 가련한 ‘애쉬’로서.
…저기요, 이건 오해입니다. 왜 뒷걸음질 치는데요. 쟈스민, 너 그 눈빛 뭐야!
상종도 못 할 개차반.
온갖 심한 욕을 눈으로 퍼부은 쟈스민이 포트 씨와 극단주를 데리고 복도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텅 비어버린 복도가 속 깊은 한숨으로 채워졌다. 내일, 아니 당장 10분 뒤부터 극단 내에서 무슨 소문이 돌지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쟈스민과 포트 씨의 입은 눈치가 있는 편인 반해 극단주 놈은 없는 일까지 만들어서 수다를 떨어댈 정도로 가십거리에 환장하고 그 가십거리를 남들과 공유하는 데에 쾌락을 느끼는 부류였다. 어쩌면 내일 아침 신문 기사에 ‘황제를 농락한 비정한 여인’이라는 타이틀 옆으로 내 이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아, 너 어디 가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왜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잖아.”
“오해?”
“…그러니까. 나는 절대로 네 몸이나 얼굴만 보고 만나는 게 아니라, 물론 네 얼굴이랑 몸이 엄청나게 취향인 건 부정하지 못… 여하튼! 남들이 봤을 땐 내가 굉장히 나쁜 사람처럼 보이잖아.”
“다행이네요.”
“뭐?”
애쉬가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이 무게감 있게 떨어져 내린다. 그러나 울상이었던 얼굴이 봄철의 꽃처럼 환하게 펴있어서 좀 전에 느꼈던 안쓰러운 감정이 들진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거예요. 선배 나쁜 사람 되라고.”
어이없어서 헛숨을 뱉었다.
“그런 짓을 왜 해?”
“모든 사람이 다 선배를 욕했으면 좋겠어요. 어딜 가든 대륙을 벗어나도 잔뜩 욕만 먹고 다녔으면 해요.”
“야, 너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야.”
“선배한테 다정한 말을 해주는 건 나밖에 없었으면 좋겠어요. 혹시나 선배가 또 나를 떠나게 된다면 다정함이 그리워서라도 결국 다시 돌아오지 않겠어요?”
하며 애쉬가 싱긋 웃었다. 기가 찼다. 그 미소를 보며 나도 따라 웃었다. 아주 어이가 없어서.
“선배의 행복은 나에게서만 찾아요.”
“…….”
“이딴 연극 놀음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애쉬가 내 양어깨를 감싸 잡으며 허리를 굽혔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애쉬의 눈을 바라볼 수 있는 자세다. 말갛게 미소 짓고 있는 녀석이 보인다.
“얻어맞을래?”
“아프지 않게 부탁해요.”
“까불기는.”
세레즈가 죽었다고 해서 나와 애쉬가 6년 전의 그날처럼 마냥 무구하고 해맑은 면모만 보여주던 관계로 돌아간 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입혔고, 쉽게 잊히지 않을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결핍이 자리 잡아 버렸다.
애쉬와의 차이가 있다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욕구가 급격히 불어났고, 애쉬는 나를 반드시 제 옆에 끼고 살아야 안정이 되는 유였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에 한발씩 물러나서 양보했다. 내가 길덴에서 극단 생활하는 것을 받아들여 준 것이 애쉬의 양보였고, 이제는 내가 해야 할 차례다.
애쉬의 미소 뒤에 숨은 집착을 읽어냈다. 불시에 튀어나오려는 그 지독하고도 끔찍한 욕망을 숨기려 애쉬가 더 짙게 웃었다.
* * *
“선배, 소리 참지 말아요.”
참는 게 아니라, 그만하라는 말도 못 할 만큼 힘이 빠져버린 거라고 외쳐주고 싶다.
극단원들에게 관객 반응을 알려주려던 것을 포기하고 애쉬와 둘이서만 저녁을 먹었다. 소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다가 키스하게 됐다.
수도에 온 후로부터는 매일 이 패턴이다. 저녁 먹고 키스한 다음 섹스하기. 어쩔 땐 아침 먹고 이어질 때도 있었다.
애쉬의 정력을 감당하기 벅찬 날에는 섹스를 건너뛰려고 정신을 다잡기도 했다. 키스만 안 하면 돼.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애쉬와 입술을 비비며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오늘은 어쩌다 이렇게 됐더라…….
아, 맞다, 길덴에서 가장 고기가 많이 낚인다는 명소가 어딘지 얘기해 주고 있었지. 그곳에서 애쉬의 팔뚝만 한 고기를 낚았다고 자랑했고 애쉬는 눈을 크게 뜨며 대단하다고 박수까지 쳐줬다.
“선배는 고기도 잘 잡고 못 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내가 안 해서 그렇지 배우면 뭐든 잘해.”
“고기가 제 팔뚝만 한 건 어떻게 알았어요?”
“사이즈야 딱 보면 알지. 한… 이 정도잖아. 봐봐. 맞지?”
양 손바닥을 세워 애쉬의 팔 길이를 가늠해 보았다. 조금 오차가 있긴 했으나 비교적 맞아떨어지는 사이즈에 애쉬는 더 놀란 눈을 했다.
“대단해요, 선배. 그럼 다른 곳도 알 수 있어요?”
“장담은 못 하지만 대부분?”
애쉬의 손, 발은 물론이고 머리둘레, 어깨너비 심지어 목 길이까지도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다. 내가 변태 스토커라서는 결단코 아니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녀석을 시간이 될 때마다 바라보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 것이다.
애쉬는 못 믿겠다는 말로 나를 부추겼다. 오기가 생겼다.
“어디 뭐, 말만 해봐.”
“제 성기요.”
“뭐?”
“못 알아들으셨나. 좆요, 좆.”
서슴없는 입과는 달리 애쉬의 눈은 어린아이 같은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부, 불순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겠지? 쟤는 그냥 단순히 궁금해서…….
혼내야 할지 말지 정하지도 못했는데 손이 자연스레 올라갔다. 한… 이 정도 되려나?
애쉬가 내 손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대볼 필요도 없겠네요. 너무…….”
작잖아요.
화들짝.
불순한 형태를 만들고 있던 손을 재빨리 내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이게 작다고? 야, 아무리 네가 커도 그렇지 그 말은 조금 너무하지 않냐? 따져 물으려는데 애쉬가 눈꼬리가 휘게 웃으며 속삭였다.
“저 지금 발기했단 말이에요.”
…우리는 낚시터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 * *
‘기다릴게.’
초점을 잃은 검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비추었다. 섬뜩한 입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죽었음을 몇 번이고 확인했음에도 나는 손에 잡힌 단검을 놓지 못했다. 정돈되지 않은 손톱이 엉망으로 망가지고 손끝이 희게 변하도록 단검을 꽉 쥐었다.
그의 살갗은 강철로 만들어진 줄 알았다. 혈관 속엔 붉은 피 대신 쌍둥이들을 죽게 만들었던 염산이 채워져 있는 줄 알았다. 내가 쥐고 있는 쇠붙이가 세레즈의 몸에 박힐 수 있는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강철로 된 살갗이 쇠붙이를 가볍게 튕겨버릴 것 같았고, 운이 좋아서 몸 안으로 찔러 넣었다 하더라도 그의 몸에 흐르는 염산이 단검을 흔적도 없이 녹여버릴 것 같았다.
그랬던 그가 죽었다.
이토록 허무하게.
나는 이 한 번을 찌르지 못해서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오랜 시간 동안 지켜봐야 했다.
이 한 번을 못 해서. 이 한 번을.
세레즈가 죽었는데도 나의 지옥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나를 무력하고 또 비참하게 만들었다.
기다린다는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죽음 뒤에 군림하고 있을 세레즈가 그려진다. 나는 평생을… 죽음을 그리고 세레즈를 두려워하며 살아가게 될 것 같았다.
세레즈는 그러하기를 원했다. 내가 죽기 직전까지도 그를 잊을 수 없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세레즈와는 반대로 내 몸은 펄펄 끓어올랐다.
이렇게 쉽게 죽어선 안 돼. 일어나. 당장 일어나.
끝까지 놓지 못할 것 같던 단검에서 손을 떼고 세레즈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두드렸다.
무릎 꿇고 나한테 사과해. 눈물 콧물 줄줄 쏟는 얼굴로 양손을 싹싹 비비면서 다시는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란 말이야.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고통받으면서 외롭게 죽어. 밤마다 네가 죽인 사람들이 꿈에 나와서 널 괴롭히는 악몽에 시달리고 눈을 떠서는 끊이질 않는 환각, 환청 때문에 비명을 질러대다가 망가져 버려. 구멍 뚫린 낡은 집에서 공포에 젖은 채로 쓸쓸하게 죽어 버리라고. 네 더러운 시신 위에 비가 내리고, 눈이 쌓이고, 먼지가 덮일 즈음이면 나도 너한테서 영원히 해방될 수 있을 테니까.
주먹 쥔 손에 멍이 들 때까지 세레즈의 몸을 두드렸으나 한번 식어버린 온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 * *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감각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쿵. 쿵. 쿵.
심장의 고동이 크게 들렸다. 정밀한 조각이 아름답게 새겨진 호화로운 천장이 익숙하다.
“선배.”
목 바로 아래까지 덮여있던 이불이 걷혔다. 후끈한 열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자 시원하다 못해 서늘했다.
옆으로 누워 몸을 말았다. 지금은 아직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애쉬는 씻고 나왔는지 축축한 머리를 다 말리지도 않고 침대 옆에 앉았다. 그러곤 거두었던 이불을 내 허리 위까지 다시 덮어주었다.
“식사는요?”
애쉬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하나하나 떼어주며 물었다. 쿵. 쿵. 심장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태연한 척 베개에 얼굴을 비볐다.
“오늘은 늦잠 잘래.”
“이따가 다시 준비하라고 일러둘게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았다.
뺨 위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애쉬의 손을 거둬내고 베개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으며 엎드려 버렸다.
수도에 온 이후로는 한동안 꾸지 않았던 꿈인데… 어제 공연이 끝난 탓일까. 정신없이 바쁘던 것도 사라지고 긴장이 풀린 뒤라 다시 세레즈 꿈을 꾸기 시작한 것 같다. 바빠지면 또 잠잠하겠지. 오늘이라도 극단에 들러서 다음 공연 일정 준비를 미리 해둬야겠다.
애쉬가 내 오른손가락을 하나씩 어루만지는 걸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무식하게 부러졌던 손가락뼈는 사흘 내내 쏟아붓는 힐링 덕에 단단히 붙었다. 흔적도 찾을 수 없게끔 완벽하게 치료됐다.
일상생활하는 데에도 전혀 무리가 없고 무거운 것도 척척 드는데 애쉬는 간혹 내 오른손을 보면서 표정을 굳힐 때가 있었다. 아니면 지금처럼 만지작거린다거나.
“선배.”
“응.”
목소리가 베개에 눌려서 웅웅거렸다.
“예전에… 선배 살던 집에 저 데려가 주기로 했던 거 기억해요?”
“아…….”
기억을 더듬어볼 필요도 없었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일 때, 애쉬가 제국사 시험 만점을 받으면 소원 하나를 들어주기로 했었는데 그때의 애쉬 소원이 내가 예전에 어머니랑 살던 집에 가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애쉬는 당당히 만점을 받아왔고 난… 길덴으로 도망쳤다.
손가락뼈 하나하나까지 느리게 훑어가는 손길이 떨리는 몸을 나른하게 만들어줬다. 애쉬의 목소리와 마주 잡은 손의 감촉에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서운할 뻔했어요.”
애쉬의 손이 손바닥 밑으로 파고들더니 손가락 사이사이에 얽혀들었다.
“가보고 싶어?”
발음이 뭉개졌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못 알아들었나 싶어서 파묻고 있던 고개를 애쉬 쪽으로 돌렸다. 애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미소 짓고 있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