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독과 해독 (8)
말을 잇지 못하고 망연자실한 채 로즈만을 바라보았다. 불안한 침묵이 이어지자 로즈가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며 내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서, 설마 탈출 방법이 벽을 뚫고 나간다는 건 아니지? 우리를 구해 줄 사람한테 신호를 보낸다든가 할 순 없는 거야?”
뼛속까지 아리게 잦아드는 막막함을 벗겨내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도와줄 사람 같은 건 없어. 예전부터 없었던 게 이제 와서 생길 리가 없잖아.
로즈가 상실된 희망을 눈꺼풀 밑으로 욱여넣으며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했다.
“괘, 괜찮아. 이벨린 넌 아팠고, 여기는 파도도 잠잠했고 배는 같은 자리만 아주 천천히 움직였을 뿐이니까 모를 수도 있어.”
난 로즈의 손을 떼어내고 등을 밀었다. 로즈가 얼떨결에 문 쪽으로 걸음 하며 의문을 가지고 내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다시 생각해 볼게. 우선 넌 여기서 나가. 뒷벽이 뜯긴 상태로 우리가 같이 있는 게 발각되면 그땐 정말 끝장이야.”
“…응, 알았어.”
“숨 쉬어. 표정 관리 잘하고. 떨지 마. 괜찮을 거야.”
두 팔로 로즈의 등을 감싸 안았다. 쿵쿵쿵. 두려움에 요동치는 심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쩌면 내 심장 소리일지도 모른다.
“진정 되면 그때 문을 열고 나가.”
마음 같아선 로즈를 문밖까지 배웅해 주고 싶었으나, 나는 묶인 척하며 의자에 앉아있어야 했으므로 밧줄을 손목에 걸고 마찬가지로 발목과 의자 다리를 같이 묶어두었다.
로즈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녀의 떨림이 점차 줄어들며 표정 위에 드러나 있던 두려움도 한풀 꺾였다.
로즈가 크게 숨을 쉬더니 결단이 선 듯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
“뭐야?”
“아악!”
신의 농간인가. 한참이나 마음 정리를 한 뒤에 겨우 문을 열었더니 그 앞에 세레즈가 서있었다. 머리채가 휘어 잡힌 로즈가 고통에 새된 비명을 질렀다.
덜컹.
하마터면 묶여있던 척하려는 것도 잊고 자리를 박차고 튀어 나갈 뻔했다.
“쥐새끼 같은 것들이 내 신경을 야금야금 갉아먹는군.”
퍼억.
로즈가 바닥에 내쳐졌다. 세레즈가 뒤에 서있던 우락부락한 남자 앞으로 성큼 걸어가 그의 허리춤에 달린 검을 뽑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으로 검을 잡아채곤 로즈의 몸 위로 휘둘렀다. 예리한 날이 정확히 로즈의 목 위를 향했다.
“미친!”
밧줄을 벗어 던지고 세레즈를 향해 돌진했다. 세레즈가 멈칫한 틈을 타 그의 허리를 잡고 바닥을 굴렀다. 동시에 우악스러운 손이 내 팔과 등을 잡아 쓰레기 던지듯이 무참히 던져버렸다.
“크억!”
머리를 잘못 맞았는지 눈앞이 까맣게 오염되고 바닥과 천장이 열 바퀴 정도 빙빙 돌았다.
초점이 맞아 들어갔을 땐 세레즈가 오금을 접은 채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오빠가 기분이 좋지 않아서 놀아주기 힘들어. 그러니까 오늘은 얌전히 있자.”
세레즈의 시선이 자유로운 내 손에 닿았다가 느린 움직임으로 얼굴 위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누가 풀어도 좋다고 했지?”
“…….”
“벽도 다 뚫어놓고.”
서늘한 땀 한 줄기가 등 밑으로 미끄러져 가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세레즈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귀 언저리에 뜨뜻한 숨결이 닿았다.
“또 도망가려고?”
겨드랑이 밑으로 손이 들어오더니 내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봐주는 건 끝났어, 이벨린.”
사형 선고와 같은 말에 나도 모르게 세레즈의 소매를 붙잡았다. 막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이 다급해지니 안 하던 행동을 하게 된다. 내 손등을 전부 뒤덮는 세레즈의 손은 부드러웠다. 단호한 힘으로 잡아떼는 손길은 전혀 그렇지 못했지만.
나를 등지고 돌아선 세레즈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었다.
“윽!”
자비 없는 구둣발이 로즈의 가슴 위를 무참히 밟고 섰다. 말릴 새도 없이 검이 내리꽂혔다.
“……!”
차가운 은색의 쇠붙이 위로 피가 젖어들어 갔다.
“사, 살려…….”
뚝.
검 끝으로 붉은 핏방울이 떨어진다. 매서운 칼날은 로즈의 목 위에 아슬아슬하게 닿아있을 뿐 관통하진 못했다. 로즈가 내리치는 검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하지만 막아 세운 것도 얼마 가진 못했다. 힘의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검이 로즈의 살갗을 기어코 헤집었다.
“물러서. 로즈가 잘못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
“크흑…….”
“진심이야. 바닥에 머리를 쳐서 죽든, 혀 깨물고 죽든 어떻게 해서든 죽을 거니까 그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물러서.”
짧게 혀를 찬 세레즈가 검을 길게 빼 올렸다. 손바닥 살이 베여나가는 아픔에 로즈가 연이어 신음을 내질렀다. 재빨리 손을 뗐지만 이미 벌어진 상처 사이로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왔다.
“이벨린, 이런 것들은 네 인생에 있어 하등 쓸모도 없는 것들이야. 오빠가 누누이 말해 줬잖니, 넌 나만 있으면 된다고.”
“그건 내가 판단해.”
“네 발목을 잡는다는 걸 왜 몰라. 차라리 죽여버리는 게 나았던 거라고 생각하게 될걸.”
“…….”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네가 저거랑 함께 도망친다고 해도 저건 살지 못해. 내 말 한마디면 머리가 터져서 죽게 될 거니까.”
“무슨 소리야?”
“언령을 걸어뒀어. 정신 마법은 성인이 되고 난 후에 시전했던 거라 금방 풀려 버렸어도 언령은 아직 유효하거든.”
정신 마법……?
로즈가 무감정하게 변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구나.
적응도 못 하게끔 날이 갈수록 괴이해지는 세레즈의 횡포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어쩌면 로벤스디가의 시종들 또한 정신 마법에 걸려 세레즈의 명을 무조건적으로 따랐을지도 모른다. 로벤스디 가문에 소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목숨을 바쳐서까지 주인을 섬기는 건 지금 생각해도 많이 이상했다.
“저걸 죽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알겠지, 이벨린?”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와중에 그나마 위안이 된 건 세레즈의 심기를 어지럽혀 놨다는 거다.
그 대가로 조금 두들겨 맞긴 했다. 옆구리, 허벅지, 등, 팔뚝 할 거 없이 몸 곳곳에 시퍼렇다 못해 까만 멍이 들었다. 살덩이가 죽어버린 것 같다.
내가 도망치지 못할 거라는 걸 확신한 세레즈는 전처럼 손발을 묶어두거나 하지 않았다.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옷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필사적으로 숨겼던 단검이 잡히자 안도가 된다. 이거 때문에 발로 밟히는 등이 아파 죽겠는데도 엎드린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냥 죽을 생각이다.
나와 로즈 둘 다 세레즈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바에야 목숨을 끊는 것만은 내 의지로 하고 싶다. 분명 로즈도 내 의견에 동의해 줄 거라 믿는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로즈가 다시 이 방에 찾아오면 난 이 단도로 로즈의 심장을 찌른 후 마찬가지로 따라 죽을 거다. 오른쪽 손가락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꺾여있는 상태라 왼손으로 단도를 쥐어야 하는데 힘이 제대로 실릴지 의문이다.
결심하고 나니 한결 편해졌다. 왜 나는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따위의 억울함도 씻겨나간다. 억울함을 갖고 호소할 만큼의 기력이 남아있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잠에 빠져드는 것 같은 편안한 죽음이었으면 더 좋으련만. 욱신거리는 피부의 통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을 놓아 버렸으면서 왜 애쉬 얼굴은 잊히지도 않고 떠오르는 걸까. 연회장에서의 만남이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상냥하게 대해 줄걸. 예쁘다고 칭찬도 해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늦은 후회에 한탄했다.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워있으니 바다가 물결치는 것이 느껴진다. 아니, 내 몸이 발작하고 있는 건가? 모르겠다. 눈꺼풀 안쪽이 정신 사납게 빙글 돌았다. 검은 소용돌이 안으로 몸이 빨려들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세레즈와는 별개로 너무 아프니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다. 이 어지럼증이 죽음으로 향하는 관문을 통과하고 있는 거면 좋았을 텐데 거친 호흡과 함께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입 탓에 멀어지려던 의식도 되돌아왔다.
로즈를 홀로 남겨두고 가면 안 된다는 내 마지막 이성의 외침일지도 모른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고 눈만 내리감은 채 허덕이고 있는데 문득 뺨 언저리에 냉기가 닿았다. 시원한 바깥 냄새가 났다. 뚫어놓은 구멍 사이로 바람이 부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머리칼은 잠잠하기만 했다. 피딱지가 들러붙어서 움직이지 않은 걸지도.
텁텁한 나무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공간에 청량한 바깥 냄새가 이질적으로 찾아드니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욱신거리는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눈을 떴다.
“진짜 죽을 때가 됐나 보다.”
보일 리가 없는 게 보였다. 흐릿한 것도 아니고 아주 선명하게. 마치 바로 코앞에 있는 것 같다. 결 좋은 금발 하며 시원하게 뻗은 눈썹 아래에 보석처럼 박힌 푸른 눈동자, 굳게 다물린 붉은 입술.
애쉬의 얼굴이다.
“진짜 같아.”
무심코 오른팔을 들었다가 뇌까지 찌르르 울리는 강한 통증에 악 소리가 났다. 나무 바닥에 뺨을 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통이 잦아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피처럼 왈칵 쏟아졌다.
“제가…….”
푹 잠긴 저음이 곧 점멸할 듯 위태하게 들렸다.
“제가, 이것밖에 안 돼서 죄송해요.”
느닷없는 사과 그리고 젖어가는 목소리. 몸을 장악했던 고통보다 더한 두려움이 나를 뒤덮었다.
환영이라고 생각했던 애쉬를 다시 보았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 위에 투명한 막이 생기더니 물이 되어 매끈한 뺨 아래로 툭 떨어진다.
환영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연했다.
손끝, 발끝으로 다 빠져나가 버렸던 힘이 기적같이 되돌아왔다. 활기가 돈다. 그다지 좋은 의미는 아니다.
왼쪽 팔꿈치로 바닥을 짚자 애쉬의 손이 등 뒤로 들어왔다. 애쉬의 단단하고 우직한 몸과 맞닿으니 정신이 한층 또렷해졌다.
“애쉬?”
“네, 저예요.”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손가락의 뼈마디가 부러졌을 때보다 지금이 더 공포스럽고 충격적이다. 내가 세레즈와 너를 엮이게 하지 않으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데……! 그걸 저 멍청이가 다 수포로 만들어 놔버렸다.
“네가 어떻게 여길…….”
“데리러 왔어요.”
애쉬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들어 올리려는 듯한 행동에 이마로 애쉬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당장 돌아가.”
“맞아요, 우리 돌아가요. 빨리 가서 치료받아야죠.”
“난 못 가.”
눈물로 얼룩진 애쉬의 얼굴이 다른 감정을 가지고 일그러졌다.
“세레즈 로벤스디 때문에 그래요? 그런 거라면 걱정 마요.”
“너…….”
“저 이제 다 알아요. 선배가 저한테 말하지 못했던 것들도 전부. 혼자 안고 갈 생각하지 말고 저랑 같이 가요.”
애쉬가 또다시 안아들려 하기에 이번엔 팔꿈치로 세게 밀어냈다.
다 알아? 네가 뭘 아는데. 지금 내가 얼마나 미치고 환장하겠는지는 알아?
“너까지 왜 이래!”
“선배, 무리하게 움직이면 안 돼요.”
“닥쳐. 그만 나불대고 꺼지라고!”
“선배.”
“나는 알아달라고 한 적도 없고,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어. 그런데 꼭 너 같은 애들이 자기가 무슨 꼴을 당할지도 모르고 동정심 때문에 끼어드니까 정말 미치겠거든? 그러니까 나 좀 내버려 둬, 제발.”
“전 달라요.”
“맞아, 넌 달라. 내 인생에 너무 크게 박혀버렸어. 그런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난… 진짜로 무너져.”
“…….”
다가오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애쉬의 어깨를 힘주어 밀었다.
“평생을 자책하면서 감히 죽지도 못하고 세레즈 발이나 핥으면서 살게 될 거야.”
“…그럼 저보고 그냥 가라고요, 여기에 선배 두고요?”
끔찍한 것을 마주한 사람처럼 괴롭게 일그러진 애쉬의 얼굴 위로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래.”
덤덤하게 말하려 했는데 목소리가 흉하게 떨린다.
“이대로 죽게 놔두라고요?”
“…어.”
“어느 곳 하나 멀쩡한 데가 없는 선배를 보고도 모른 척하고 가라고요? 정말?”
“가.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
차오르는 눈물을 참아내려 눈에 힘을 줬는데 결국 그러지 못했다.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커다란 눈물방울들이 손등을 때리며 내려앉았다.
애쉬와 처음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날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단호하게 거절할걸. 함께 로즈네 별장에도 가지 말고 음식값도 대신 내주지 말걸. 그 터무니없이 비싼 과외를… 시작도 하지 말걸.
즐거웠던 추억들이 날카롭게 조각나 내 가슴을 후벼 팠다.
“혼자 돌아갈 거면 오지도 않았어.”
“…애쉬.”
“저, 선배한테 보호받아야 할 만큼 약하지 않아요.”
“…….”
“선배 찾으려고 3년 동안 무리하게 전쟁만 했어요. 한 번도 패한 적 없고요. 마법도 웬만큼 다룰 줄 알아요. 마음 같아선 여기 있는 것들 전부 죽여버리고 싶은데… 그게 싫으시면 조용히 빠져나갈 수도 있어요.”
“…….”
“힘들 거라는 건 알지만 저 한 번만 믿어주면 안 돼요?”
한 번만요.
애쉬의 나직한 음성이 내 형편없는 흐느낌에 묻혀들어 갔다.
뺨 위에 부드러운 손이 닿았다. 떨쳐내려 마음먹었던 것이 우습게도 전해지는 온기가 좋아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아늑한 훈풍이 부는 것 같았다.
…맞아, 너는 강해. 난 그 사실을 늦게 깨달아 버렸어. 황제와 애쉬를 마치 두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내 스스로가 만든 틀 안에 애쉬 너를 집어넣고는 멋대로 판단해 버렸지.
하지만,
“…넌 강하지 않아.”
오히려 물러 터졌어. 미련한 것도 정도가 있지, 5년 동안이나 날 찾아다닌 게 말이 돼? 게다가 여길 오긴 왜 와.
“애쉬 넌… 나를 절대 못 놓잖아.”
“…….”
“그러니까 세레즈한테 이길 수 없는 거야.”
아무리 네가 마법의 귀재로 불리고 서대륙을 통일한 황제라고 한들 말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로즈가 살아있어. 세레즈가 로즈한테 언령을 걸어뒀는데 내가 도망치면 언령으로 로즈를 죽일 거야.”
“선배…….”
“내가 로즈를 버릴 수 없듯이 너도 날 못 버리잖아. 날 미끼 삼아서 세레즈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러니까… 제발 좀 가줘. 날 위해서.”
…만약, 아주 만약에… 내가 5년 전의 애쉬에게 거짓말하지도 않고 숨어 버리지도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보다는 덜 비극적이지 않았을까.
애쉬에게서 금방 잊힐 줄로만 알았던 나에 대한 감정은 5년 동안 새어 나가지도 못하고 고여있기만 했다. 고여있던 감정은 금세 썩어들어 갔고 애쉬의 천진하고 맑은 모습을 잠식시켰다.
더군다나 5년의 숨바꼭질이 무색하게도 결국은 애쉬도 세레즈와 나의 일을 다 알게 되었고, 나는 세레즈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애쉬 또한 위험을 자처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나아진 게 없다.
나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상처 입었다. 탄탄하고 드넓었던 대지 위에 거대한 폭탄 하나를 떨어뜨려 놨으면서 나는 숨어버린 것이다. 뻥 뚫려버린 속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말해 주지도 않은 채.
애쉬에게 너무 미안하다. 내가 입힌 상처는 어떠한 것으로도 보상해 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애쉬는 성정이 모질지도 못하는지 이런 나를 구하겠다고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왔다. 아픈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같이 가자고 어깨를 감싸 안기도 했다.
막연하게 느껴졌던 죽음의 순간이 도래하니 살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은 유혹이 순간 찾아왔었으나 이런 애쉬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더욱 굳건해졌다. 애쉬를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이기적이고 싶지는 않다.
“괜찮아요, 선배. 그 언령은…….”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눅눅하던 공기를 매섭게 갈랐다.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애쉬를 내 뒤로 밀어 넣었다. 웬만한 남자들보다도 장신인 애쉬가 가려질 리는 만무했다.
“이것 참…….”
꿀꺽.
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진 목 안으로 침이 넘어갔다. 세레즈의 등장은 한 번도 빠짐없이 날 긴장하게 만들었으나 지금처럼 낯선 느낌은 아니었다.
애쉬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따라붙어서인가.
분명 그 점도 영향이 없진 않겠지만… 무엇보다 세레즈가 이상했다.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놈은 거칠 것도 없다는 듯 황제 앞에서도 마땅히 갖춰야 할 예를 표하지 않았다. 나와 애쉬를 번갈아 보던 세레즈가 양쪽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려 웃었다. 검은 안광이 불길하게 일렁였다.
세레즈의 수많은 면모를 확인했었다.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해 가증스럽게 치장한 거짓 미소와 폭력과 살인이 낭자한 저택에서 짓는 미소를 확연히 구분해 낼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걱정을 담은 얼굴, 절대자의 나른한 여유, 참지 않고 터뜨리는 분노, 간간이 내게 노골적으로 표현했던 정염까지 모두 다.
하지만 앞에 서있는 세레즈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도자기 인형 같던 세레즈가 한 꺼풀 벗겨진 것 같다.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고 아랫것들을 시켜 나를 두드려 패거나 말로써 회유하여 혹은 협박하여 세레즈가 원하는 일을 결국 내 스스로가 선택하게끔 만드는 것이 이전까지의 놈의 수법이었다면 지금은 본인이 소매를 걷어붙인 느낌이다.
그는 조급한 것이다. 애쉬가 그렇게 만들었다. 세레즈가 쌓아 올린 많은 것들을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권력자가 나타난 거다.
그 세레즈가… 위협을 느끼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전신에 쾌감이 몰아쳤다. 털이 삐쭉 설 정도로 통쾌한 감각이었다.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이 체감됐다. 신이 나를 불쌍히 여기긴 했는지 진짜 죽을 때가 되니까 이런 것도 보여주네.
찰나의 쾌감을 잊고 난 품속의 단도를 꺼내 들었다. 이젠 정말 애쉬를 보내야 할 때다. 한계까지 다다른 저 미친 새끼가 나를 이용해 애쉬에게 무슨 기괴한 짓을 하기 전에.
단도를 목에 가져다 대었다. 금속의 냉기가 아찔하게 느껴지기보다는 오히려 편안했다.
“선배!”
옆으로 다가온 애쉬가 나를 제지시키려 팔을 움찔했다. 칼날로 목 위를 그어버리자 얇은 생채기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경악한 애쉬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부풀어진 동공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애쉬는 보내줘.”
“이벨린, 위험하잖니.”
타이르는 말투가 역겨웠다. 들고 있는 칼을 세레즈의 입안에 쑤셔놓고 싶은 심정이다.
치미는 충동을 참으며 곁눈질로 애쉬를 보았다.
“너 빨리 가.”
“그거 내려놔요.”
“나 죽는 거 구경하고 싶은 거였어?”
“선배, 진정하고 내 말 들어봐요.”
쿠우웅―
선체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내내 잠잠하던 파도가 돌연 몰아치기라도 한 건가. 뒤이어 생전 처음 듣는 언어로 고함쳐대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락부락한 남자 한 명이 나타나 세레즈에게 말을 걸었다. 조도가 낮은 조명 아래에서도 남자의 피부가 땀으로 번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남자의 말을 듣던 세레즈는 역시 나로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언가 지시했다.
머리 위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려댔다. 수십 명의 사람이 갑판 위를 맹렬히 뛰어다니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꺄아아악!”
“로즈?!”
세레즈의 지시를 받고 사라졌던 거구의 남자가 로즈를 어깨에 둘러메고 돌아왔다. 허공에 발길질하던 로즈가 바닥으로 떨어지자마자 세레즈는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채 끌어 올렸다.
“이건 쓸모없어진 거지?”
“로즈한테 허튼짓하기만 해봐!”
“틀렸잖아, 이벨린. 이럴 땐 떼쓰는 게 아니라 부탁해야지.”
“…….”
“칼 버리고 이리 와.”
로즈는 두려움에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도리질 쳤다. 세레즈가 뒷덜미를 확 끌어당기자 로즈가 아픈 기침을 토했다.
의식하지 않고 내쉬던 숨이 어느 순간부터 귓가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들렸다.
애쉬가 빠져나갈 때까지 시간을 벌어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어서.”
단검을 쥔 팔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세레즈가 칭찬하듯 미소 지었다. 세레즈의 옆에 서있던 남자가 힐끗 뒤를 돌아보더니 다급하게 말을 걸었다. 세레즈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짧게 답했고 남자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이벨린. 조용한 곳으로 떠나자. 여긴 너무 시끄럽지?”
나는 이를 악물며 꾸역꾸역 한 발을 움직였다.
“애쉬, 같이 돌아가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또다시 한 발을 내디디려는데 애쉬가 뒤에서 날 강하게 안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가지 말아요.”
이 따뜻한 품을 느낄 수 있는 게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하니 설움이 복받쳤다.
“나도… 흐윽, 가기 싫어.”
“가지 않아도 돼요.”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그래도 될 것 같잖아.
하지만 세레즈에게 붙들려있는 창백한 로즈의 모습은 눈뜨면 사라질 악몽 같은 게 아니었다.
애쉬가 느낄 수 있도록 크게 고개를 저었다. 한숨 같은 숨이 정수리 위에 퍼부어졌다.
“언령은 진작에 해제됐어요. 세레즈 로벤스디의 말 한마디에 사람이 죽을 일은 없어요.”
나직이 속삭이는 애쉬의 말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개를 사선으로 올려 녀석을 바라보자 애쉬가 슬픈 눈을 하면서도 달래듯 옅게 미소지었다.
“날 믿어요. 이제부턴 내가 선배를 지켜줄게.”
“…….”
“그동안 말도 못 하고 혼자서 끙끙 앓느라 얼마나 힘들었어.”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지금처럼 나만 바라보면 돼요.
애쉬의 큰 손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지금 상황에서 퍽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으나 녀석의 손짓에 말투에 눈빛에 목소리에 가슴이 희망과 설렘으로 고동쳤다.
“이벨린!”
깜짝.
세레즈의 고함에 머리부터 냉수가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몸이 떨렸다. 하지만 시선은 애쉬에게서 뗄 수가 없었다. 녀석의 눈동자가 전에 없던 싸늘한 빛을 내며 세레즈를 바라보았다.
툭.
비교적 멀쩡한 오른발로 까치발을 들어 머리로 녀석의 턱을 쳤다. 살기를 지운 벽안이 내 얼굴을 담았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난 로즈에게 언령이 걸려있는 줄도 몰랐는데 애쉬는 그것을 알고 있던 것으로도 모자라 해제까지 해두었다고 한다.
내가 미련하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이에 너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거야?
하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질문이나 주고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아직도 두렵고 불안했으나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벽안에 기대고 싶어졌다. 저 예쁜 눈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싫었다.
잔잔한 침묵이 길어진다고 생각될 즈음 입을 열었다.
“믿을게. 그럼 로즈를 구해 줘.”
애쉬가 전처럼 웃었다. 기쁨을 숨기지 않는 화사한 미소다.
“고마워요.”
자각할 틈도 없이 입술 위로 물컹한 것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얼떨떨한 눈으로 애쉬를 좇았다. 녀석은 나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고 힘차게 앞으로 도약했다.
콰앙!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간 애쉬는 순식간에 세레즈의 면전에 다가섰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쏘아 올랐다. 애쉬의 손 아래에서 머리가 터져버린 근육질 남자는 춤추듯 비틀대다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애쉬는 세레즈의 머리를 터뜨려버릴 생각이었으나 세레즈가 빠르게 움직여 남자를 방패로 쓴 것이다. 덕분에 세레즈에게서 풀려난 로즈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기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다수의 사람이 악을 써가며 몰려오는 소리가 났다. 세레즈가 뒤를 확인하더니 한 발 물러섰다. 동시다발적으로 거구의 남자들이 좁은 방 안으로 몸을 우겨가며 들어왔고 세레즈는 그 틈을 타 자리를 벗어났다.
퍽! 퍽!
머리채만 한 도끼며 날 선 검을 들고 선 남자들이 일제히 애쉬를 향해 달려들었다. 자신 있게 외친 기합이 뻘쭘하게도 그들은 애쉬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못하고 전의 남자처럼 머리가 터진 채로 풀썩풀썩 쓰러졌다.
로즈가 헛구역질하다가 이내 오바이트를 했다. 뼈와 살이 으깨지며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살벌했다. 난 로즈의 눈을 가려 주면서도 그 모습을 한 장면도 빠뜨리지도 않고 눈에 담았다.
순식간에 남자 일곱의 머리를 터뜨린 애쉬가 핏방울이 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혼날까 봐, 싫은 소리를 들을까 봐 겁내는 얼굴이 방금 전 무차별하게 살육했던 사람의 얼굴이라곤 상상할 수도 없게 매치가 되지 않았다.
녀석의 초조함을 읽은 나는 괜찮아, 하며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애쉬는 그제야 미소 지으며 바닥에 흩뿌려진 살점을 무신경하게 밟고는 세레즈를 쫓았다.
“이, 이벨린. 그냥 여기에 있으면 안 돼?”
로즈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걱정돼서 가봐야겠어.”
로즈는 누가 누굴 걱정하냐며 나를 뜯어말렸다. 다친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냐고 설득하는 말엔 일리가 있었다.
그래도…….
“역시 가야겠어.”
절뚝거리는 다리로 난간을 짚어가며 계단을 올랐다. 끝이 보이나 싶었는데 또 다른 계단이 있고 이제는 진짜 끝인가 싶다가도 또다시 원형 계단이 나타났을 땐 거친 욕을 주야장천 뱉으며 한 계단씩 올랐다.
갑판 위에 서자 밤바람이 흠뻑 젖은 땀을 시원하게 씻겨주었다. 상쾌한 기분도 잠시,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톡 쐈다. 더불어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그리고 무게 있는 것이 넘어지는 우당탕탕 소음까지. 갑판 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수염을 가슴 위까지 길게 기른 우락부락한 남자들과 제국의 금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갑판 위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혼잡한 갑판 위에서 애쉬와 세레즈를 찾으려고 눈에 힘을 주고 정신을 차렸다.
부웅!
묵직한 바람이 얼굴 위로 확 끼쳐오는가 싶더니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내 쪽으로 날아왔다. 황급히 몸을 굴려 남자를 피했다. 내가 열고 닫지 않은 나무 문이 남자에게 가격당해 덜렁거리다가 떨어졌다.
…뒤질 뻔했네.
조금 더 주의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허공을 가르는 검과 도끼, 창 들을 피하기 위해 허리를 숙인 채로 난간을 잡고 걸었다.
달과 별을 품속에 담고 있어야 할 밤바다는 정체불명의 난파선들과 그 난파선에서 튀어나온 게 분명한 부속품들을 둥실둥실 떠올린 채였다.
처참하게 침몰해 가는 난파선들을 뚫고 구름에 숨어 배 한 척이 항해하고 있었다. 크기는 작은 물고기들을 낚아 올리는 어선처럼 작았는데 노 젓는 이가 없는 동력선이었다. 앞머리는 북부의 얼음 바다에서나 쓰일 법한 뾰족한 모양새였다. 그 배는 거대한 범선들과는 다르게 아주 빠르게 달빛을 헤치고 이 배 근처로 접근했다.
치열한 칼부림이 한창이 이 배에 특정 집단의 조력이 되기 위해서 달려오는 건 아닌 듯싶다.
마치 혼잡한 틈을 타 도망가려는 느낌의…….
“세레즈.”
확신이 들었다. 세레즈가 저 배에 올라타기 전에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울려댔다. 갑판 위로 시선을 돌리자 구름 사이로 비친 빛 아래에 익숙한 금발이 바람결에 나부끼는 것이 보였다.
푸욱.
애쉬가 팔을 빼내자 녀석의 검에 박혀있던 남자가 힘없이 고꾸라졌다. 피와 살이 난자한 곳에서도 애쉬만은 고고해 보였다. 폭풍 한가운데에서 홀로 여유로운 느낌이다.
“애쉬!”
아픈 목 탓에 마음처럼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목 상태가 좋았어도 잡다한 소음이 섞여들어 간 이곳에선 분명 내 소리는 전달되지 않았을 거다.
저 동력선의 존재를 알리려면 애쉬가 서있는 폭풍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내가 한 발을 떼면 날 선 무기를 든 남자가 애쉬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절뚝거리는 한 발을 또 떼기 전에 애쉬가 가볍게 남자를 쓰러뜨린다. 벌써 열한 명째다.
애쉬는 힘들다는 기색보다는 몹시 귀찮다는 얼굴이었다. 이것들을 한 번에 다 날려버려? 하는 갈등이 스치는 것 같아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도 나거니와 이 배엔 로즈도 있고 제국군들이 너무 많았다. 다행히 애쉬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일일이, 번거롭게 남자들을 죽여나갔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창과 검을 피해 애쉬의 근처까지 다가왔을 때쯤 기적처럼 세레즈를 발견했다. 두꺼운 밧줄을 타고 배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때마침 애쉬의 시선을 돌리려는 듯 한두 명씩 덤벼들던 남자들이 무리를 지어 애쉬에게 달려들었다.
그 상황을 모조리 보고 있던 나는 우선 세레즈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세레즈가 애쉬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더니 옆에 서있던 남자의 검을 빼앗아 애쉬를 향해 달려갔다.
앞에서 몰아치는 남자들 때문에 애쉬의 등 뒤는 무방비했다. 나는 다리뼈가 산산조각 나는 고통을 느끼면서 세레즈를 쫓아 미친 듯이 달렸다.
세레즈가 애쉬의 등을 찌르는 게 더 빠를까? 아니야. 내가 조금 더, 속도를 내면… 조금만 더!
이를 악물고 괴성 같은 비명을 지르며 발을 빨리 굴렸다. 애쉬의 사정거리까지 들어온 세레즈가 팔을 크게 휘저을 즈음 내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푸욱.
언제 봐도 섬뜩한 검은 눈동자가 날 바라보았다. 잘 사용하지 않는 왼손으로 세레즈의 가슴에 단도를 찔러 넣었으나 깊은 상처를 내지 못했다.
광기에 사로잡힌 세레즈의 눈동자가 제 가슴을 한 번 그리고 내 손을 한 번, 마지막으로 다시 내 얼굴을 본다.
세레즈는 충분히 나에게 검을 휘두를 수 있었음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고 있기만 할 뿐.
그 시선을 이겨내고자 왼손에 힘을 주며 단도를 더욱 깊게 찔러넣었다. 칼날이 살갗 안으로 파고드는 감각이 손 아래에 선연히 느껴졌다.
하지만 왼손만으로 심장을 뚫기란 역부족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식은땀으로 범벅되어 가는 같다. 이 순간이 마치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
커다란 손이 다정하게 내 손을 감싸 쥐었다. 등 뒤로 따스한 것이 맞닿는다.
“도와줄게요.”
애쉬가 낮은 음성으로 차분히 속삭였다. 이 목소리 하나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몸이 마법처럼 느슨해졌다.
애쉬가 감싸 쥔 손에 힘을 주고 검을 세게 밀어 넣었다. 칼날이 깊숙이 박히며 세레즈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애쉬가 손을 뗐는데도 나는 검을 놓을 수 없었다.
털썩.
세레즈가 뒤로 쓰러졌고 난 그의 몸 위에 올라타 체중을 실으며 검을 꾸욱 박아 넣었다. 마음 같아선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난도질하고 싶었으나 도저히 꽂힌 검을 뽑아낼 기력이 되지 않았다. 세레즈의 가슴 위로 땀인지 눈물인지 하는 것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온기를 잃은 손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놈을 보니 세레즈는 죽어가는 눈을 하면서도 미친놈처럼 웃었다.
그리고 완전히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놈이 나에게 입 모양으로만 얘기했다. 난 잠시 풀었던 힘을 다시 주어 녀석의 심장을 아주 깊게 찔렀다.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