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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독과 해독 (6) (32/42)

13. 독과 해독 (6)

세 시간 뒤 무표정한 로즈가 찾아왔을 때는 희망이 처참히 산산조각 남을 느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얌전히 약을 받아먹었다.

몇 번의 ‘세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이 망가져 간다. 이따금씩 환 대신 맹맹한 수프와 물이 몸 안으로 들어갔으나 전부 게워냈다. 덕분에 내 옷은 엉망진창이었다. 코를 찌르는 냄새가 진동하고 축축하고 진득한 것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세레즈가 다시 찾아왔다. 수프에 생수를 콸콸 들이붓더니 그것을 로즈에게 건넸고 로즈는 환을 먹일 때처럼 내 입을 억지로 벌려 그것을 마시게 만들었다. 몸이 음식을 거부했다. 목구멍을 통해 들어갔던 것이 역류한다.

“막아.”

세레즈가 나지막이 명하자 로즈의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양 볼이 땡땡하게 당겨올 만큼 불룩해졌다. 막힌 입으로 역류한 음식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중에도 속은 끊임없이 게워내기를 반복했다.

콧구멍이 시큰해지더니 그 아래로 무언가 주르륵 흘렀다. 피는 아니었다. 목과 코가 따갑다 못해 눈까지 터져버릴 것 같았다. 고역의 시간 끝에 나는 입안에 가득 들어찬 것을 다시 삼켜냈다.

세레즈가 손수건을 가지고 와 내 얼굴을 닦았다. 조심, 조심 움직이는 손길이 끔찍하여 눈을 감았다. 미친 새끼.

“맛없어도 먹어야 해. 몸이 좋지 않아서 육류나 자극적인 건 아직 무리야.”

“…….”

“또 올게, 이벨린.”

딱딱한 의자에 한 자세로 묶여있으니 몸이 저리다 못해 아려왔고 이제는 그 경지를 넘어서서 아무 감각도 없었다. 이대로 칼로 썰려버린다 해도 통증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다.

무의식으로 도피할 수도 없게 환은 세 시간마다 꼬박꼬박 들어왔다. 수프와 물이 제공되는 주기를 세는 건 포기했다. 아니, 시도도 하지 않았다. 몸이 너무 지쳐있었고 정신은 그보다 더 피폐해져 갔다.

차라리 그냥 죽여.

환을 먹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해 입을 꾸욱 다물었다. 로즈가 포기하고 방을 나갔다. 몸에 열이 오르고 잔기침이 터져 나왔다. 침과 함께 피가 뱉어졌다.

기침이 더욱 심해지려 할 때 처음 보는 사람들이 들어섰다. 초면인 둘은 척 보기에도 체격이 좋은 자들이었는데 그들만의 유행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다.

그들이 나에게 다가올 때마다 땅이 쿵쿵 울려댔다.

“윽!”

투박한 손이 뺨을 내려쳤다. 곧바로 입가가 찢어져 버렸다.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데 두툼한 손가락이 입안을 가르고 들어왔다. 정리되지 않은 손톱이 여린 잇몸을 무자비하게 찔러댄다.

아윽, 찌릿한 아픔에 잇새가 절로 벌어졌고 손가락은 내 입을 잡아 벌렸다. 로즈가 환을 목구멍 안쪽까지 깊숙이 밀어 넣었다. 꿀꺽.

그것을 삼키자 로즈와 두 남자는 다시 사라졌다.

“…고작 뺨 한 대 칠 거면서 왜 저딴 놈을 둘씩이나 데리고 와.”

인력 낭비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위협적으로 보이기 위함인 것 같았으나 전혀,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내가 환이나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는다거나, 순간 정신을 놓아버려 혀를 깨물고 죽으려 할 때마다 남자들이 찾아와 나를 때렸다. 차라리 죽을 만큼 팼으면 상관없겠는데 그들은 참 이성적이게도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달성하면 손을 멈추었다.

세레즈는 나를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았다. 처음 로벤스디가에 입적됐을 당시부터 그랬던 것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여기저기 얻어맞고 불어터진 얼굴을 하고 있으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서글픈 표정을 짓는데 나에겐 폭력보다 그 얼굴을 보는 게 더 괴로웠다.

아, 내 눈.

* * *

퐁!

샴페인 뚜껑이 열린 것도 아닌데 경쾌한 소리가 애쉬의 귀를 시원하게 울렸다.

하지만 실상은 샴페인을 터뜨릴 만한 경사스러운 자리가 아니었다. 아니, 분위기가 아니었다.

수하인 안토니는 고아원장의 팔을 잡아 뜯는 애쉬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절대 편히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연히 보인다.

안토니는 걸을 때마다 쩌억쩌억거리며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피를 긁어내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 위엔 도륙된 시신들이 깔려있었고 그나마 시체가 널브러져 있지 않은 곳엔 안토니의 신발 밑창에 붙어있는 것과 동일한 피가 웅덩이져 있었다.

피를 닦아내는 걸 포기하고 허리 위에 팔을 올렸다. 한숨이 푸욱 쉬어졌다.

아동들에게 정신 마법을 거는 로벤스디가의 고아원을 몰살시켜서가 아니다. 광기로 날뛰고 있는 애쉬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다.

아군보다 적군이 배로 많은 전장에서도 겁먹은 적이 없었는데… 졸보 다 됐군.

하지만 누가 황제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겠어.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으나 한숨은 다시 한번 터졌다.

“으아악!”

푸욱.

고아원장의 머리가 날아갔다. 정확히는 입 윗부분부터 칼로 베어낸 듯 깔끔하게 절단되었다.

“다 처리되었습니다.”

“술식은 깨버렸으니 정신 나간 놈들도 서서히 자아를 찾을 거다.”

고아원에 새겨진 술식은 마법사들이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든 것으로 절대 단신으론 해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섣부르게 건드렸다간 오히려 역풍을 맞고 제 마력을 전부 토해 내야 할지도 몰랐다.

이것을 숨 쉬듯 쉽게 깨부숴 버리는 건 애쉬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안토니는 애쉬의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도 언령이 걸려있는 줄 안다면 자아를 찾는다고 해도 세레즈 로벤스디의 명에 따를 텐데요.”

“개중 용감한 놈이 있다면 스스로 깨닫고 빠져나오겠지.”

애쉬가 손을 털었다.

안토니는 자신을 향해 선 애쉬의 모습을 보고 숨을 멈추었다. 피와 살점이 그득한 살육의 현장에서 애쉬는 고작 피 몇 방울만이 점처럼 튀어있을 뿐이었다.

그의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피는 그로테스크하다기보다는 애쉬의 아름다움을 퇴폐적으로 부각시켜 보이는 효과밖에 되지 않았다. 마침내 악마의 제단을 밟고 선 고고한 신 같기도 했다.

“보고는?”

아차.

애쉬의 냉랭한 음성에 정신을 차리자마자 안토니는 난색을 표했다. 이틀 전 먼저 라비엔으로 떠난 동료로부터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고 그 소식을 애쉬에게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라비엔의 철광산에 산사태가 일어난 것은 맞으나 그곳에 세레즈 로벤스디는 없었다고 합니다.”

애쉬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안토니는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목이 움츠러들었다.

“라비엔에 숨어있는 것을 찾지 못했을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기사들을 라비엔 전역에 배치시켰고 황명으로 세레즈 로벤스디를 수배해 봤지만 들려오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라비엔의 영주 또한 황명을 어기고 세레즈 로벤스디를 숨겨줄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닐뿐더러 대담하지도 못합니다.”

애쉬는 말이 없었다. 차라리 욕이라도 하시지.

안토니는 이 무거운 침묵이 더 공포스러웠다.

돌연 애쉬가 비릿한 웃음을 터뜨렸다. 핏발 선 눈동자가 정확히 안토니를 향했다.

“……!”

“고아원 일은 밖에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수배 범위를 서대륙 전체로 늘려. 쥐구멍 하나 놓치지 말고 전부 들여다봐.”

“예,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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