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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독과 해독 (5) (31/42)

13. 독과 해독 (5)

여느 날에 비해 햇빛이 유난히 강렬한 때에 추모식이 진행되었다.

유람선 침몰 사고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열두 명의 희생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귀족이었다. 평생 궂은일 한번 해보지 않았던 족속들이라 재난을 버텨내지 못하고 바다에 휩쓸려 버렸다는 무정한 뒷말도 떠돌았다.

열두 명의 서민들이었다면 길덴의 신전에 안치되지도 못했을 거다. 추모식 자체가 진행되지 않았겠지.

살이 아려올 정도로 따가운 햇빛을 받으며 한참 동안이나 신전 앞에 서있었다. 서민인 나는 추모식이 진행되는 신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오는 길에 국화 한 송이를 샀다. 가진 돈을 탈탈 털었는데도 2루덴이 부족해서 몹시 난처했다. 꽃잎이 상해서 어두운 얼룩이 박힌 국화가 눈에 들어왔다. 미관상으로 좋지 않았기에 판매하지 못하는 국화였다.

이 국화라도 달라고 하자 주인은 어차피 버릴 거라며 공짜로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나는 가지고 있는 돈을 전부 주인에게 건네고 시들한 국화를 챙겼다.

새하얀 외벽 앞에 국화를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눈을 감았으나 어떤 신을 찾아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기도를 올릴 수조차 없었다. 그들의 영혼을 잘 살피어 주시라는 흔한 기도문도 말하지 못했다.

햇빛을 맞고 서있었다. 피부가 붉게 타들어 가고, 각질이 일어남에도 추모식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유난히 햇빛이 강렬한 때였다.

* * *

추모식이 끝난 지 딱 사흘째 되던 날 유람선에 폭발을 일으켰던 범인의 형이 진행되었다. 길덴의 광장은 단두대에 선 범인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터질 듯이 북적거렸다.

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범인의 목이 잘려나가는 순간 그 많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목이 잘린 채로 발작하는 범인, 서서히 사라져 가는 생명의 시간. 괴기스러운 죽음 앞에서 싸한 침묵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날의 나는 하루 내내 기숙사에 박혀 조금은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광장에 다녀온 쟈스민이 처형의 순간을 생생하게 말해 줄 때는 조금 곤혹스러웠다. 흘러나온 피가 대용량 토마토 수프 같았다든가, 몸이 수압 높은 샤워기 호스처럼 요동쳤다는 얘긴 정말이지 알고 싶지 않았다.

폴과 유진 선생님은 수도로 이송되었다. 어떤 형벌을 받을지 정해지지 않았기에 그전까진 황궁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다고 한다.

크라우 가문의 재산은 말할 것도 없이 전부 몰수당했다. 가문명은 유지되고 있으나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엔 폴 크라우가 ‘반역’을 도모했다는 인식이 박혀 있는지라, 반역자 가문이라는 명패를 지고 살아갈 바에는 차라리 없애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크라우’ 가문 사람이라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돌팔매질당해 죽진 않을 테니 말이다.

추모식도 형의 집행도 모두 끝난 지금 길덴은 다시 일상을 마주했다. 몇 날 며칠을 유람선 침몰 사건 이야기로 가득 채웠던 신문도 해가 주춤한다는 날씨 이야기나, 본격적으로 쌀쌀해지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숨은 꽃놀이 명소가 어디인지 따위의 글을 싣기 시작했고 쟈스민의 수다 또한 곧 들어갈 새 작품 얘기로 가득 채워졌다.

거센 파란을 몰고 왔던 유람선 침몰 사고도 시간이 지나니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무뎌져 버렸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 그래, 이게 당연한 건데.

‘선배 모습이 어땠는 줄 알아? 폴 크라우를 구해 내려고 발악하는 모습으로밖에 안 보였어.’

난 어째 날이 갈수록 생경해지고 또렷해지는지 모르겠다. 애쉬가 짓던 표정, 말투, 손등을 흠뻑 적신 피 하나하나가 눈 감고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다.

문득 울음이 터지기도 했다. 이유는 모른다. 추상적이고 막연한 두려움이 가슴 위를 내리눌렀다. 어두운 방 안에서 원인 모를 눈물을 흘리며 먹먹한 두려움에 이불 시트를 꽉 쥐었다.

그간 겪어왔던 감금과 고문, 수십 차례 목도한 살인, 어머니와 쌍둥이, 레드릭의 죽음, 로즈의 실종은 나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내 자신이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탈출구는 없다고.

정말이지 아득했다. 아득하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을 정도로 아득했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추락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계속, 계속, 계속. 내쉬는 숨마다 불행이 흘러나왔다. 끝이 없다.

이것을 깨달은 직후엔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머리에 쥐가 나고, 숨통은 조여오고.

내 안을 구축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버린 가운데에서도 하나만은 지키고 싶었다. 검은 물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내가 내쉬는 불행의 숨이 닿지 않도록.

애쉬, 넌 그래야만 했다.

내가 쳐놓은 울타리에 남아있던 유일한 존재이니 넌 그 울타리를 나가야 했다. 너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는 맞이하고 싶지 않은 파멸의 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기다림의 중간에 다시 네가 나타났다. 가슴이 뻥 뚫려있는 채로. 여전히 내 울타리 안에 남아서.

애쉬는 절벽 위를 내디디고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바람 한 점에 몸이 균형을 잃고 추락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꺾이다 못해 동강 나버린 내가 그 손을 마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갈등과 두려움에 맞서야 했는지 애쉬는 모를 것이다. 단지 애쉬와 함께 있고 싶다는 갈망 하나만으로 그간 겪었던 숱한 불행들을 다시 마주 볼 각오를 했다.

이미 겪었던 절망 탓에 세레즈만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퍽퍽 쳐가며 참았다. 애쉬가 있으니까.

그러나,

‘거짓말하려면 좀 철저히 하지 그랬어요.’

애쉬는 나를 쉽게 끌어올려 놔놓고 쉽게 떨어뜨렸다.

모든 것을 태워 겨우 다잡았던 각오가 너무도 헛되이 무너져서일까. 난 아직도 그 상실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 또 눈물이.

휑한 발목을 이불 속에 집어넣고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축축한 것이 묻어 나오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그랬다. 눈 주위가 따끔따끔해졌는데도 눈물이 자꾸만 묻어 나와서 신경질이 났다.

우울한 마음을 달래지 못한 채로 또다시 시간이 흐르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나아진 게 있다면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던 눈물이 잦아졌다는 거다.

눈물샘이 말라 버렸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사소한 버릇처럼 애쉬 생각이 났다. 의식하지 않았는데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과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번 충돌했다.

그 격렬한 내적 싸움의 결판이 나지 않았는데…….

아… 애쉬를 만나야 하는 위기가 닥쳐왔다.

“…진심이야?”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표정 관리고 뭐고 다 때려치웠다.

“역시 놀랄 줄 알았어. 막 꿈만 같고 믿기지 않지?!”

쟈스민이 호쾌하게 웃으며 등을 퍽퍽 때렸다.

내 기분을 좋을 대로 판단하지 말아주련? 너랑 같이 하하 호호 웃을 게 아니라 당장 이 문을 박차고 나가서 극단주 놈 목을 졸라주고 싶으니까!

내가 부글거리건 말건 쟈스민은 싱글벙글 웃으며 한껏 들뜬 음성으로 조잘거렸다.

“지금쯤이면 우리가 황성에서 공연한다는 소문이 델베스에도 퍼졌을 거야. 배 아파서 죽으려고 할걸? 우린 어쩌면 황실 소속의 극단이 될지도 몰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황성에서 공연을 올린 극단들은 예외 없이 황실 소속 극단이 되었대.”

“근거 있는 이야기야?”

“당연하지! 19년 전에 한 번, 40년 전에 한 번.”

“그거참 엄청나게 신빙성 있는 이야기네.”

내 비아냥에도 쟈스민은 기죽지 않고 도리어 목청을 높였다.

“그만큼! 외부 극단이 황성에서 공연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소리지!”

그래, 그 어려운 일이 하필 왜! 우리 극단이 해내냐 이 말이야.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고 침대 위로 누워버렸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우리 극단에서 제일 쓸모없는 인간이 극단주인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은 길게 봐야 하나 봐.”

아니, 제일 쓸모없는 거 맞아. 소리 내어 되받아치지도 못할 말을 속으로만 꿍하게 중얼거렸다.

황실 소속이 되면 수도에 가야 하는 거잖아.

하아아… 한숨이 끊일 날이 없네, 정말.

이 엿 같은 상황이 어떻게 일어나게 된 거냐 하면, 시간을 거슬러 추모식 때로 돌아가야 한다.

추모식이 진행되는 신전엔 귀족들은 물론이고 황족인 로제타와 쥬디퍼도 참석해 자리를 지켰다. 참 별일이게도 남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극단주도 있었더랬다.

모든 의례가 끝나고 한산해진 틈을 타 극단주는 쥬디퍼와 로제타 근처를 서성였다. 그럼 그렇지. 이기적이고 저밖에 모르는 극단주가 순수한 마음으로 타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극단주는 눈물을 찍어내는 척하며 은근슬쩍 혼잣말을 흘렸다.

“내가 사라랑 함께 배에 탔었어야 했는데…….”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로제타의 시선이 극단주에게 닿자 극단주는 과장된 액션을 취하며 놀라워했다. 그러곤 묻지도 않았는데 사라가 대공비마마를 목숨 바쳐 구했던 것처럼 저도 다른 이들을 구할 수 있었더라면 죄책감이 덜했을 것 같다는 둥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떠들어댔다.

그러나 예상외로 쥬디퍼는 크게 감동하여 나와 극단주를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극단주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다가, 유람선에서 공연을 보여드리지 못한 게 아쉽다는 속내를 은근히 꺼내 놓았고 쥬디퍼는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이후로 얘기는 착착 진행되었다. 극단주는 새 작품을 준비 중에 있는데 이 공연을 대공 전하께 바치고 싶다고 아첨했다. 희곡의 내용을 귀담아듣던 쥬디퍼는 흥미를 보였고 공연 준비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고까지 물어보았다. 극단주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최대한 공연을 빨리 만들어 본다고 하더라도 대공 전하께서 황성으로 돌아가는 시점까지는 끝내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타까워하면서 난색을 표했다. 쥬디퍼는 호탕하게 웃고는 무엇이 걱정이냐며 아브모르나가 황성에 와서 직접 공연할 것을 명했다.

짜잔! 이렇게 황성 공연이라는 엿 같은 업적이 달성되게 된 것이다.

“제기랄!”

“놀래라!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지금 딴생각할 때야? 들어봐…….”

극단을 관둬야 하나. 앞길이 막막했다. 벌이는 일정하지 않지만 그래도 무료로 기숙사를 제공해 주지 않는가. 길덴을 아무리 뒤져도 이런 일자리는 찾아보기 어려울 거다. 아브모르나를 나와야 한다니. 최악이다.

수도로는 죽어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애쉬와의 사이가 이 정도까진 아니었더라면 생각을 달리해 볼 순 있겠으나… 지금으로선 가망성이 없어 보인다. 황성에서 애쉬를 마주치는 것도 싫고 혹여나 아브모르나 극단 사람들이 세레즈에게 험한 짓을 당할까 봐 걱정도 된다.

환장하시겠네.

“사라! 듣고 있어?!”

쟈스민이 내 양 손목을 잡아 내리며 외쳤다. 귀가 얼얼했다. 동공을 부풀린 채로 쟈스민을 바라보자 그녀가 짜증 어린 투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대놓고 무시하기야?”

쟈스민의 들뜬 감상은 사양이었으나 쟈스민은 내 속내를 모르니 서운해하는 게 당연했다. 빠르게 사과하자 쟈스민이 손의 힘을 풀어주었다.

“됐어. 그 낡아빠진 원피스나 어떻게 좀 해봐.”

“옷은 왜?”

“너 정말 내 말 하나도 안 들었구나.”

“…….”

“후우… 대공 전하께서 우리 극단 사람들 전부를 영주 성으로 초대하셨어. 그러니까 이 낡아빠진 옷은 찢어 버리라고.”

난 누운 채로 눈만 끔뻑거리다가 못 들을 것을 들은 양 등을 돌려 누워버렸다. 쟈스민이 어깨를 흔들어 댔는데 모르는 척했다.

“말해 두지만 난 안 갈 거야. 그런 자리 어색하고 불편해.”

“뭐? 네 덕에 성사된 자리인데 네가 안 오면 어떻게 해. 명을 어길 셈이야?”

“한 명쯤 빠져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실 거야. 자애로운 분이시잖아.”

애쉬를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단 말이야! 마주치면 분명히 싸우게 될 텐데…….

쟈스민이 끈질기게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녀보다 내가 조금 더 끈질겼던 탓에 쟈스민은 백기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날 줄 알았던 쟈스민이 극단주를 데리고 와서 똑같은 말을 반복했고 포트 씨, 배우들, 아역들까지 전부 동원하여 잠도 못 자게 새벽까지 “가자, 가자.”를 앵무새처럼 외쳤다.

퀭한 눈으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고 내 침대 맡에는 극단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네가 꼭 가야 해!”를 외쳐댔다.

난 수분이 빠져 버석해진 입술로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야 말았다.

* * *

“믿기지 않는다.”

쟈스민이 꿈결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나도 믿기지 않아.”

내가 영주 성에 들어와 있다니.

쥬디퍼는 작은 홀을 개방하여 아브모르나 극단원들을 초대했다. 연회라고 하기엔 협소하고 티타임이라고 하기엔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극단원들만 해도 50명이 넘었으니 말이다.

“다 네 덕이야!”

쟈스민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 자리가 끝날 때까지 애쉬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공사가 다망한 황제 폐하신데, 설마 여기까지 행차하시겠어? 하며 합리화를 했다.

“우리 아브모르나의 자랑이자 샛별! 사라 양 아닌가?!”

극장 앞에서 이미 한 번 마주쳐놓고 이제 와 처음 보는 것처럼 유난을 떠는 극단주의 장단을 대충 맞춰주었다.

“붉은색 타이가 잘 어울리시네요.”

유람선 침몰 사고 직후, 그러니까 내가 영지를 하사받게 될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을 때 말이다. 극단주는 질리도록 양녀 소리를 해대며 사람을 귀찮게 할 땐 언제고 시일이 지나도 황실 측에서 영지와 관련된 말을 일절 하지 않으니 내가 영지를 하사받는 게 요원해졌다고 판단했는지 그 이후로부턴 나를 향한 관심을 끊었다.

그런데 대뜸 내 이름을 팔아먹어 황성 공연을 성사시키질 않나, 지금처럼 자랑 어쩌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지 않나.

허허, 그의 뻔뻔함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다.

극단주는 배에 힘을 잔뜩 주고 목을 울려가며 부러 큰소리를 내었다. 나와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티 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쥬디퍼거나 로제타거나 혹은 둘 다겠지.

극단주와 어울려주고 있는 사이에 쟈스민은 배가 아프다며 은근슬쩍 운을 뗐다. 나는 황급히 쟈스민을 바라보며 눈에 힘을 줬다. 배신자!

쟈스민이 눈썹을 팔자로 만들더니 고개를 한 번 젓는다. ‘시간 낭비하기 싫어, 미안.’ 이를 바득바득 갈며 쟈스민을 향해 눈으로 온갖 욕을 퍼부었으나 쟈스민은 타격감이 전혀 없는 얼굴로 배 아픈 척 연기했다.

쟈스민이 있든 없든 그다지 관심 없는 극단주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화장실에 가는 성의라도 보여야 할 거 아니야!

쟈스민은 출구로 나가는 척하더니 몸을 빙그르르 돌려 다이닝 홀에 머물렀다. 새하얀 접시를 집어 드는 쟈스민의 표정이 밉살스러웠다.

그래, 많이 먹고 급체나 해라.

난 허리가 저릿하게 아파올 때까지 극단주의 말을 들으며 서있어야 했다. 그의 대화 중 10할은 영양가가 없는 개소리였다. 극단주가 내쉬는 숨 하나하나가 그랬다.

그때 구원처럼 격식 있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나와 극단주 사이를 파고들었다.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

구원자는 체프 크로에드였다. 아만의 횡포로 인해 비어버린 주연 자리를 당당히 꿰찬 아브모르나의 주연 배우다. 아만과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모든 단원에게 예의 바르고 연기에 대한 열정도 남다르며 실력도, 마스크도 출중한 이른바 보석 같은 배우.

극단주는 체프 크로에드에게 관심이 많았는데 그가 배우로서의 자질이 뛰어나서는 아니고(이런 쪽에는 관심도 없다.), 유서 깊은 크로에드 백작 가문의 막내아들이어서다.

“아닐세, 크로에드 군. 크로에드 군이 나에게 직접 말을 걸 정도면 아주 중요한 문제가 생겼나 보군.”

“연출님은 새 작품 준비 때문에 잠도 못 주무시고 계셔서요.”

“저런.”

체프 크로에드가 극단주에게 할 중요한 말이라는 건 공연과 관련된 것이었다. 2막 1장에서 극단주가 지시한 동선에 타당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극단주 입장에서는 지루하고 의미 없는 이야기다. 방금 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체프 크로에드도 참 대단하네, 여기까지 와서 공연 얘기라니.

어쨌거나 귀찮은 극단주를 체프 크로에드가 데려가 준 덕에 나는 자유를 얻었다.

배신자 쟈스민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할지 고민하며 그녀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넓은 다이닝 홀을 다 뒤졌는데도 쟈스민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싶어서 홀을 빠져나왔다. 금장식들로 빼곡하게 치장되어 있는 복도는 언제 봐도 적응되지 않는다.

돈을 처발랐군.

천장이 높고 끝도 없이 긴 복도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금장식들을 눈에 익히며 걷고 있을 때였다.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려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조아린 채 서있었다. 극단원들은 모두 홀에 있으니 맞은편에서 오는 이들은 귀족 혹은 황족일 게 틀림없었다.

또각, 또각.

짙은 향수 냄새와 함께 구두 굽 치는 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규칙적으로 울리던 구두 소리가 지척에서 멈췄다. 그들이 내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렸으나, 숙인 고개 탓에 드러난 목덜미가 민망해질 때까지 구두의 주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람.

미묘한 분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내 쪽에서 먼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 대공비마마를 뵙습니다. 아브모르나의 극단원 사라라고 합니다.”

로제타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내 얼굴을 주시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살짝 고개를 피하자 로제타의 입매가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있다가 이제야 돌아온 것 같다.

로제타는 뒤를 따르던 시종들을 물렸다. 결과적으로 넓은 복도에 로제타와 둘만 남아있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처음 보네요.”

로제타가 말한 그날은 유람선 침몰 사건 날이리라.

체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타이트한 드레스를 입은 로제타는 예쁜 도자기 인형 같았다. 꼿꼿한 허리, 균형 잡힌 어깨가 도드라지게 드러나서인가.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기만 한 모습이 로제타에겐 퍽 잘 어울리면서도 이질적이다.

“아직도 꿈을 꾸십니까?”

문득 궁금해졌다. 로제타의 꿈대로라면 그날 로제타는 바다에 빠져 시신으로 떠올라야 했다. 그러나 꿈은 실현되지 않았고 로제타는 내 앞에 올곧은 자세로 서있다.

그녀의 도자기같이 무감정한 얼굴에 금이 갔다.

“이후로 한 번도 꿈을 꾸지 못했어요.”

“기분은 어떠십니까?”

“모르겠어요.”

“…….”

“아무것도.”

“…….”

마음 같아선 죽지 않고 살아있는 로제타를 향해 한껏 비아냥거리고 싶었다. 거봐, 내 말이 맞지? 필연은 개뿔! 잠잘 때 꾸는 꿈 같은 건 언제든 바뀔 수 있어. 본인이 얼마나 한심한 말을 해왔는지 조금은 후회되나?

신랄하게 조롱해 주고 싶다는 속과 다르게 내 입은 단정하기만 했다. 로제타의 얼굴을 가르는 실금 사이로 혼란이 엿보였다.

“전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무책임하네요. 꿈도 못 꾸는 전 이제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예요?”

“마마, 마마를 제외한 대륙의 모든 사람이 예지몽 같은 거 꾸지 않고도 잘만 살아가고 있답니다.”

“전 그 방법을 몰라요. 처음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꿈에서 신탁을 받았고 전 신의 뜻대로만 살아왔어요. 저에게 신탁이 내려지지 않는다는 건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하루하루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신세나 다름없어요.”

“아니죠, 마마. 주인이 주는 사료만 뻐끔뻐끔 받아먹는 어항 속 물고기가 어떻게 지금의 마마랑 똑같을 수 있습니까? 마마께선 비로소 넓은 곳으로 헤엄쳐 나오신 겁니다. 신이 내리는 신탁을 받아먹기만 하는 신세에서 탈출하신 거죠.”

무례한 언사에도 로제타는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무례하다는 인식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알기에 꿋꿋이 얘기했다. 로제타는 생전 처음 겪는 ‘꿈이 없는’ 현실에 당황스러워하고 있을 뿐이다.

“…어항에서만 길러지다가 넓은 바다로 나간 물고기는 죽어요.”

로제타가 목소리를 낮추며 얘기했다.

“죽지 않으려면 빨리 적응하셔야겠네요. 먹이 구하는 법도 익히고, 친구들도 사귀고…….”

장난기 어린 소리에도 로제타의 얼굴은 쌀쌀맞기만 하다. 분위기를 읽고 냉큼 입을 다물었다.

“무서워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예요.”

조금, 희열을 느꼈다.

로제타가 주체하지 못하고 나약함을 내비치자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그녀는 겉만 화려한 포장지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었을 뿐이다. 텅 빈 내면은 초라하고 보잘것없다. 지금도 보면 황국의 대공비씩이나 되는 사람이 일개 극단원한테 투정을 부리고 있지 않은가.

로제타가 틀리고 내가 맞았다.

로제타에게 필연이라는 절대적 진리가 무너져 버리니 그녀도 빈껍데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로써 무언가 보상받았다는 쾌감에 젖어들었다.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5년간의 노력이 헛수고가 아님을 증명받는 순간이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진정시켰다.

“대부분이 미래를 모르고 그렇게 살아요. 무서운 건 당연한 겁니다. 밤에 잠도 못 자고 끙끙 앓아대며 다가올 불행을 예측하는 일이 하루의 마무리인 사람들도 얼마나 많다고요.”

“그렇게 평생 불안에 떨면서 살 바에야 신탁에 따라 그냥 죽는 게 낫겠어요.”

“마마, 너무 비뚤게 생각하지 마세요. 마마께선 자유를 찾으셨잖아요. 억지로 죽지 않아도 되고, 싫은 일은 피해 가도 되고, 음…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어도 대륙이 두 쪽 나진 않죠.”

“…….”

“뭐, 이도 저도 다 불만이시면 지금이라도 신탁대로 하셔도 제가 감히 말릴 처지는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마께서는 살아 계시잖아요? 살고 싶으시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깟 신탁보다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으실 테니까요.”

* * *

로제타는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쌀쌀맞기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는 거로 로제타와의 일을 털어버리고 쟈스민을 찾아 나섰다. 쟈스민을 다시 만나면 욕이라도 퍼부어 주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치솟았던 서운함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길이 엇갈렸었는지 화장실에서도 보이지 않던 쟈스민은 홀에서 샴페인 잔을 한 손에 세 개씩 들고 열심히 들이켜고 있었다.

다가서자 쟈스민이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제 손에 놓인 샴페인을 내게 건넸다. 아니, 건네려 하다가 “네가 취하면 내가 귀찮아져.” 하며 팔을 다시 뺀다.

딱히 마실 생각은 없었으나 쟈스민의 태도에 오기가 생겨 잔을 빼앗았다.

“배신한 벌이야. 고생 좀 해봐라.”

쟈스민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난 웃으며 샴페인 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상큼한 과일 향과 함께 은근한 알코올 향이 코를 쏜다. 마시진 않고 입술만 축였다. 술을 잘 마시는 편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영주 성에서 추태를 부리고 싶지 않아서 참았다.

그때,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은은한 선율로 홀을 채웠던 연주가 끊긴 줄도 몰랐다. 연미복을 차려입은 지휘자가 허리를 깊이 숙여 한 번 인사하더니 다시 지휘봉을 움직였다.

홀을 관리하던 집사 중 한 명이 쥬디퍼와 로제타의 존재를 알렸다. 홀에 있던 모든 단원이 허리를 숙여 격식을 차렸다.

앞에 선 사람을 가림막 삼아 눈을 들었다. 쥬디퍼의 머리는 5년 전에 봤던 것과 비슷한, 색이 탁한 금발이었다. 저런, 아직도……. 처음으로 애쉬의 성격이 고약한 편인가 하는 진지한 고민을 해봤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뭐라고?!

숙였던 허리를 들어 홀의 입구를 확인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애쉬를 찾는 건 금방이었다. 장대한 어깨 너머로 붉은 케이프가 걸려있었다. 애쉬의 긴 다리가 홀 안을 디딜 때마다 케이프가 풀럭거리며 바닥 위로 길게 늘어졌다.

녀석의 모습에 잠시 넋이 나가 있는 동안 서늘한 벽안이 나를 향했다. 서둘러 고개를 숙이려는데 벽안이 나를 외면하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심장이 찌릿하게 아파왔다.

단이 높은 상석에 애쉬가 먼저 자리를 잡고 이어서 쥬디퍼와 로제타가 착석했다. 얼마간 정적이 흘렀다. 한가하게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하고 싶었으나 숨 막힐 듯한 분위기에 음악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늘은 격식을 차리자고 자리를 만든 게 아닌 만큼, 이만 고개를 들라 할까요?”

쥬디퍼의 목소리였다. 쥬디퍼가 말을 높여야 할 상대는 이 자리에 단 한 사람뿐이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또다시 불편한 침묵.

“이만 고개를 들라. 폐하께서도 그대들을 만나보고 싶어 여기까지 행차하신 게 아니겠는가.”

고개를 드는 순간 딸꾹질이 터져 나올 뻔했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손등에 턱을 괸 애쉬가 비딱한 자세로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게 헛기침한 후 시선을 돌려 쥬디퍼를 바라보았다. 쥬디퍼의 목이 붉게 변해 있었다. 아마… 조금 짜증이 난 것 같다. 표정은 잘 갈무리했지만 피부색까지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과거를 되뇌게 하고, 현시대의 부정을 가감 없이 비판할 줄 아는 그대, 창조자들은 무대 위에서 화려한 만큼이나 무대 밖에서의 인성 또한 훌륭하다. 이번 안타까운 사고로 나의 사랑스러운 비가 위험에 처했을 때 용기 있게 바다로 뛰어든 단원이 있다고 들었다. 내 친히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은데, 이 자리에 와있는가?”

수많은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해 꽂혔다. 아, 젠장.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빼꼼 몸을 모으니 쥬디퍼가 가까이 오라 턱짓했다. 의식적으로 애쉬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세 황족 앞에 섰다.

영광도 이런 영광이 없네.

“오랜만이군.”

쥬디퍼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쥬디퍼는 나를 세워두고 그대의 용기와 충성심에 감탄했다는 말을 장황하고 길―게 애기했다.

대놓고 하는 칭찬에도 나는 쥬디퍼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옆얼굴이 타다 못해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애쉬의 시선은 집요하리만치 나에게 닿아있었다.

“충성심?”

피식.

쥬디퍼의 말을 가르고 애쉬가 한마디 내뱉었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신경이 애쉬에게 쏠려버렸다. 심지어 말하고 있던 쥬디퍼마저도 그랬다. 녀석의 존재감은 실로 대단했다. 가볍게 툭 던진 한마디로 분위기를 장악해 버렸다.

애쉬가 삐딱한 고개를 바로 세우며 물었다.

“그대는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분위기를 봐서라도 ‘대공비마마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다른 것은 생각할 틈도 없었습니다.’라고 둘러대면 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오랜 침묵 속에서도 애쉬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기다려줄 수 있다는 듯이 녀석의 눈동자는 필요도 없는 자비를 베풀고 있었다.

아, 왜 대답하고 싶지 않나 했더니……. 녀석의 질문이 로제타를 구하러 바다에 뛰어든 나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같이 들렸다. 비난하는 게 맞을 것이다.

‘남이 바다에 빠지든 불에 타죽든 신경 쓰지 말란 말이에요. 선배가 거길 왜 뛰어 들어가는데.’

여기서 ‘네, 맞습니다. 제 목숨 따위 안중에도 없었어요.’라는 식의 대답을 하는 건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까워 죽겠습니다. 저도 제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아마 극단주는 뒷목을 잡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 광경을 보는 건 재밌겠지만 잔뜩 들떠있던 만큼 크게 실망한 극단원들의 눈초리를 받는 건 사양이다.

당장에 애쉬의 멱살을 부여잡고 유치한 짓 좀 그만해, 이 자식아! 하고 소리치고 싶다.

하아, 힘없는 소시민의 인생이여.

애쉬는 시험하듯 내 대답을 기다렸다.

“세상에 자기 목숨 귀한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로제타였다. 흔들림 없이 나에게 닿아있던 벽안이 일순 짜증스레 변했다. 나 대신 대답한 로제타가 애쉬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빠르게 입을 다문다. 쥬디퍼가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말을 거들었다.

“맞는 말이에요. 그러니 저자의 충성심이 더 빛을 발하는 거지.”

탁, 탁, 탁.

애쉬의 손가락이 의자 팔걸이를 두드렸다. 묘한 나른함을 풍김과 동시에 뒤틀린 심기가 뾰족하게 담겨있었다.

손 다 나았구나. 다행이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진 손을 확인하니 이런 상황에서 속도 없이 안도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 속에서 로제타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애쉬한테 한 소리 듣기라도 한 건가. 애쉬의 반응에 유독 예민한 티를 내는 게… 조금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니, 아니지. 여기서 가장 불쌍한 건 나야. 누가 누굴 걱정해.

애쉬를 마주 보고 있기가 버거워서 자리를 피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 연회의 취지에 맞게 어울려주자 싶었다.

나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던 턱을 벌렸다.

“그래. 충성심 강한 그대에게 상을 하나 내리지.”

애쉬의 뜻밖의 말에 다시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상을 내리겠다고 말한 것치고는 불쾌해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대가 충성해 마지않던 대공비를 수장시킬 뻔한 장본인 폴 크라우…….”

당사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 수장이라니. 애쉬의 무례함에 놀라 눈이 절로 크게 떠졌다. 반면 로제타는 덤덤하기만 했다. 애쉬가 또 무슨 엄청난 소리를 할지에만 신경이 쏠린 것 같다.

“그 죄인의 처분을 그대에게 맡기지.”

“……!”

“폐하!”

쥬디퍼의 부름에도 애쉬는 나만을 바라보았다. 장내가 술렁이며 등 뒤가 어수선해졌다. 폴은 대외적으로 반역죄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반역죄인의 처분은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만이 내릴 수 있다. 애쉬는 황제의 특권을 서민인 나에게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이건 상이 아니다.

애쉬는 내가 ‘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나에게 폴의 형벌을 결정하라는 것은 절대 상일 수가 없다.

“폴 크라우의 혈족은 물론이고 크라우 가문의 피가 섞인 자들을 모조리 잡아다 교수형에 처할 생각인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애쉬가 내린 형벌은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반역자 가문이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크라우’라는 성을 쓰지 않고 인척 관계만 되어도 모조리 잡아다가 참수시키는 게 보편적이다.

하지만 폴 크라우는 반역자가 아니다.

“왜 대답이 없지? 혹… 반역자를 살리고 싶나?”

“폐하, 무슨 그런 농담을…….”

쥬디퍼가 당황해하며 끼어들었다. 그러나 나도, 애쉬도 쥬디퍼의 말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애쉬는 내 대답이 미뤄질수록 얼굴을 딱딱하게 굳혀갔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폴을 살려달라고 말할까 봐. 애쉬를 버리고 폴과 함께 도망갔다는 끔찍한 상상을 재차 확인하게 될까 봐.

“제 뜻이 폴 크라우를 석방시키고자 하는 거면, 이런 것도 들어주십니까?”

누군가 내 이름을 다급하게 불렀다. 애쉬는 겉보기엔 한 치의 동요도 없어 보였지만 집요하던 백안을 물리고 서서히 내려앉는 눈꺼풀이 조금 떨린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주제를 모르고 실언했습니다. 제가 감히 폐하의 권한에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원하시는 게 곧 제가 원하는 겁니다.”

드러난 애쉬의 눈동자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소매에 있는 단추를 일부러 뜯어 바닥에 뿌리곤 그걸 줍는 척하며 애쉬 곁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내가 반역 아니라고 말했잖아.”

“…….”

“죽일 거면 폴 크라우만 죽여.”

로제타와 쥬디퍼는 내 말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굳이 내숭을 떨지 않아도 저들은 나와 애쉬의 관계를 다 알고 있으니까.

애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죄 없는 크라우 가문 사람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다. 나 때문에 죽어나갈 사람들이 보기 싫어서다. 그런 경험은 질릴 만큼 충분히 했다.

쥬디퍼가 과장되게 웃으며 상황을 마무리했다. 단상에서 내려가도 좋다는 명이 떨어지자마자 등을 돌렸다. 아주 찰나였지만 상처받은 녀석의 얼굴이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처럼 통증을 불러일으켰다. 차라리 나를 향한 독기를 품었다면 이렇게 아프진 않았을 거다.

“난,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했어.”

“지극히 정상이야.”

“폐하 표정 못 봤어? 얼마나 무섭던지. 몸 곳곳마다 소름 끼쳐서 추울 지경이었다니까.”

“오버하기는.”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라. 나만 그랬는지!”

“그런 짓을 귀찮게 왜 해?”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데 자꾸만 애쉬 얘기를 꺼내서 속을 뒤집는 쟈스민을 떨쳐내었다. 속이 좋지 않아서 화장실에 간다고 하자 “거봐! 너도 무서워서 토할 것 같지?!” 하길래 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나는 화장실에 가는 대신 홀에 딸린 테라스로 나갔다. 두꺼운 커튼을 치자 소란스러운 홀과 완벽히 차단되는 기분이라 긴장이 화악 풀렸다.

테라스에 양팔을 기댄 채 오른쪽 발 앞코를 바닥에 콩콩 찧었다.

“…죄인의 처분을 그대에게 맡기지. 참나.”

애쉬가 했던 말을 흉내 내며 코웃음 쳤다.

“겁먹은 표정으로 그런 말 해봤자 하나도 안 무섭거든.”

기분만 더럽게 나빴다. 내 말을 전혀 믿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당연하지.

…뭐, 애쉬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그날은…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는 건 나도 안다. 그래. 내가 감정적으로 격했던 것도 반성.

하지만 먼저 화낸 것도 애쉬고, 내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판단해 버린 것도 애쉬다.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애쉬가 포크로 제 손등을 찍은 순간부터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었다.

“네 손가락 하나 다치는 것도 보기 싫다고… 분명히 얘기했는데.”

한번 물꼬를 튼 그날의 서운함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떠올랐다. 땅 밑으로 푸욱 꺼져버릴 것 같이 우울해진다. 이 답답한 오해를 풀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 단지 용기가 나지 않을 뿐이다. 녀석이 내 말을 믿어줄 준비가 되어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으아아.”

테라스 난간에 머리를 퍽퍽 박아댔다. 체한 것처럼 명치 부근에 얹혀있는 애쉬와의 문제를 쓸어내리려 크게 심호흡했다. 부러 딴생각하기 위해 시선을 이곳저곳에 옮기기도 했다.

멀리서 검은색 의복을 차려입은 영주 성의 시종들이 홀이 있는 본관 쪽으로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딱히 일손이 더 필요하진 않은 것 같은데… 디너에는 다이닝 홀에 있는 음식이 전부 교체된다더니 그것 때문인가. 쟈스민이 해줬던 말을 상기시키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해결되지 않는 애쉬 생각을 미뤄내기 위해 걸어오는 시종들을 일부러 더 유심히 관찰했다. 검은 점으로만 보이던 사람들의 윤곽이 서서히 눈에 잡히고, 머리 색이 보이고,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바닥을 콩콩 찧어대던 발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인상을 쓰고 있던 것도 잊고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로즈?”

근육이 경직됨과 동시에 심장 박동이 폭주했다.

검은 의복을 입은 시종들 중에 로즈가 있다! 하나로 묶어 망을 한 머리는 붉은색이었고 그 아래에 드러난 얼굴은 로즈가 틀림없었다. 숙인 고개 탓에 얼굴 전면이 보인 건 아니었지만 내 마음은 이미 그녀가 로즈라고 확정지었다. 5년 만에 만난 로즈에게서 풍겼던 오싹한 음침함이 똑같이 느껴졌다.

테라스의 커튼을 거둬내고 밖으로 나섰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마구 비틀리는 건지, 내 다리가 이상한 건지. 생각처럼 속도감이 나지 않는데도 심장은 거칠게 요동쳤다.

“꺄악!”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우당탕.

누군가와 부딪쳤다. 어깨와 팔뚝을 치고 가는 게 한두 명이 아니다. 어쩌면 멀쩡히 세워져 있던 테이블일지도 모른다. 테이블에 사과한 우스운 꼴이 되었어도 지금은 민망함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홀 밖으로 빠져나갔다. 구불거리는 뱀의 몸통 속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복도는 길고 또 어지러웠다. 피부 위로 인공 조명이 아닌 햇빛이 닿고 녹음의 잔디가 아스라이 느껴진다.

마침 홀의 정문 쪽으로 오고 있는 시종들의 무리 속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앗!”

“로즈!”

시종들을 한 명 한 명 붙잡고 얼굴을 확인했으나 로즈는 없었다.

아닌데, 분명히 봤는데! 그럴 리가 없어.

어지러운 눈 위를 손바닥으로 퍽퍽 내리친 후 다시 시종들을 살폈다. 당황과 불쾌가 섞여든 눈빛들이 나를 향해 있었다. 그 적대적인 얼굴들 중에 붉은 머리가 있는지 열심히 눈을 굴려보았다. 머리 망을 한 주황 머리의 시종은 있었으나 로즈는 없었다.

“아…….”

투욱.

의식을 조이고 있었던 긴장이 손끝으로 빠져나갔다.

“…그대들과 같이 훌륭한 예술가들이 길덴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비상해야 할 새를 가둬버린 것이나 다름없네. 내일 해가 떠오르는 즉시 나와 함께 바다를 건너 펜테리온의 가장 큰 무대 위에서 그대들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 보도록 하라!”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잔을 높게 들어 올린 쥬디퍼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샴페인을 마셨다. 애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쥬디퍼를 따라 샴페인을 머금었다.

나 또한 분위기상 딱 한 모금만 마실 생각으로 연둣빛을 띠는 샴페인을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혀 전체로 쌉쌀한 맛이 확 퍼져오는 바람에 인상을 썼다. 재빨리 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겨버렸다. 우웩. 맛없어.

이어 쥬디퍼가 애쉬에게 말을 걸었다. 나와 단상과의 거리가 워낙 멀기도 하고 쥬디퍼가 속삭이다시피 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한 건지는 알기 어려웠다. 다만 애쉬가 쥬디퍼를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고 쥬디퍼는 못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극단주가 극단의 무용수 다섯을 데리고 단상 앞에 섰다. 쥬디퍼가 착석하자 극단주가 무용수들에게 신호를 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잔잔한 선율과 함께 무용수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고 쥬디퍼는 흥미롭게 공연을 감상했다. 애쉬의 무심한 눈이 무용수들에게 닿았으나 제대로 공연을 보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지금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배 속부터 식도까지 타들어 가는 느낌에 허리가 굽어졌다. 전조도 없이 찾아온 통증은 당황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잔기침을 뱉어내게 했다.

“세상에, 괜찮아?”

“콜록, 으, 응.”

내장이 쥐어 짜이고 있었다. 머리에 열이 확 끼치고 거대한 가시가 박힌 것같이 목이 아프다. 숨을 내쉬기조차 어려운데 기침은 괴롭게도 계속 터졌다.

몸이 이상해.

‘내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게 해요. 그게 먼저예요. 방금처럼 곧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보이지 말란 말이에요.’

신경 쓰이지 않게 하라는 말을 들은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또 이런 꼴을 보이긴 싫었다.

우선 여기서 나가자.

안간힘을 다해 한 발을 내디뎠다.

“콜록! 컥!”

뿜듯이 입에서부터 피가 터져 나왔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기침이 나올 때마다 묵직한 피가 쏟아져 나온다. 붉은 것이 턱과 옷을 흠뻑 적셔갔다.

기겁한 비명이 근처에서 들려왔다. 애쉬가 보면 안 되는데, 큰일 났다.

풀썩. 힘을 잃고 자리에 주저앉는 와중에도 눈은 재빠르게 애쉬를 찾았다.

애쉬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잔뜩 놀란 얼굴을 하고선. 나는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보았다. 그러나 피의 양이 너무 많은 탓에 손가락 사이로 자꾸만 흘러나온다.

“콜록, 콜록!”

몸이 뒤로 기울어갔다. 눈두덩이마저도 힘을 잃고 서서히 감긴다.

“선배!”

나를 향해 뻗어오는 애쉬의 손을 마주 잡아주지 못했다.

* * *

쥬디퍼가 주최한 예술가들을 위한 연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애쉬는 피범벅이 된 이벨린의 몸을 안고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의원을 불러! 당장!”

애쉬는 덜덜 떠는 손으로 이벨린의 입과 코에 들어찬 피를 빼내었다. 가슴팍 위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벨린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댔다.

홀 안에는 경악스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뜸 피를 쏟으며 쓰러진 이벨린과 그런 그녀를 소중히 품에 안은 채로 떨고 있는 황제라니.

사람들은 헛것이라도 보고 있는 것처럼 눈을 비벼댔다. 수많은 전장을 휩쓸며 단 3년 만에 서대륙을 통일한 황제가 의식을 잃은 서민 하나에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미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란 상태인데, 애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피 칠갑을 한 이벨린의 입에 직접 입을 맞추어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벨린이 쓰러졌다는 것보다 황제의 모습에 거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넋이 빠진 채로 애쉬를 응시했다.

“선배, 눈 좀 떠봐요. 선배, 선배!”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냉혈한 황제가 눈물을 흘렸다. 맺힌 정도가 아니라 황제의 입가와 뺨에 묻은 이벨린의 피를 씻어낼 정도로 펑펑 쏟아냈다.

“의원은 대체 언제 오는 것이냐!”

애절하게 오열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노기 가득한 흉흉한 음성이 터졌다. 정신을 흩트리고 있던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어깨를 굳혔다.

“폐하! 의원이 도착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폐하가 급히 부르고 있다는 말만을 듣고 달려온 의원은 숨도 고르지 못하고 이벨린을 살폈다. 바닥이 질척하게 젖을 정도로 많은 피를 쏟아낸 모습에 질겁했으나 티 내지 않고 손바닥 밑으로 마력을 흘려보냈다.

“어떤 상태인가?”

갈무리하지 못한 불안이 애쉬의 음성에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강한 독에 중독되었습니다. 이미 모든 장기에 스며든지라 회복하기에는 어려움이…….”

“살려라. 무조건 살려. 살리지 못하면 네놈이 죽는다.”

“…….”

피부를 파고드는 살기에 의원은 식은땀을 흘렸다. 제 실력으론 치유 불가능한 상태였으나 사실대로 말하면 이 자리에서 목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의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억지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우선 독의 진행을 막아야 하니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

의원이 이벨린을 안아들기도 전에 애쉬가 먼저 몸을 움직였다. 축 늘어진 이벨린을 친히 안은 채로 홀을 빠져나갔다. 의원이 당황해하며 재빨리 뒤를 쫓았다.

홀 안에 남은 사람들은 얼토당토않은 꿈을 꾼 것처럼 멍해져 있었다. 바닥 위로 서서히 굳어가는 핏자국만이 시간의 흐름을 인지시켜 주었다.

* * *

“폐하! 그만 좀 하십시오. 의원들 손 떨리는 거 안 보이십니까?!”

보다 못한 쥬디퍼가 소리쳤다.

이벨린이 음독한 지 사흘째. 애쉬는 식사는커녕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이벨린 곁을 지켰다.

영주 성에 중독에 해박한 의원이 있어서 다행히 독의 진행은 막았으나 그뿐이었다. 이벨린은 여전히 의식 불명이었고 신체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애쉬는 이벨린이 잘못될까 봐 극한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참기 어려운 공포는 분노로 변질되어 의원들에게 꽂혔다. 벌써 여섯 명의 의원이 애쉬가 휘두른 검에 맞아 다리를 절어야 했다. 죽어 버리거나 손을 쓰지 못하면 이벨린을 치료하지 못하니 다리만 다치게 한 것이다.

결국 애쉬의 검에 찔린 여섯 번째 의원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고 쥬디퍼가 참지 못하고 소리친 것이다.

“폐하께서 이렇게 지키고 선다 한들 나아지는 건 없습니다!”

애쉬에게는 쥬디퍼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창백해진 이벨린의 얼굴만이 끔찍하게 눈에 차있었다.

두려움에 덜덜 떨던 의원이 손을 멈추자 애쉬의 서늘한 시선이 닿았다. 깜짝 놀란 의원은 힐링에 집중하려 노력했으나 짙게 퍼져오는 살기 때문에 자꾸만 정신이 먹혀들어 갔다.

“애쉬!”

애쉬가 황제로 즉위한 후 쥬디퍼는 애쉬와 둘만 있을 때를 제외하곤 꼬박꼬박 경어를 썼었으나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황제가 아닌 동생으로 애쉬를 바라봐야 할 때였다.

“눈 똑바로 뜨고 봐. 네가 이벨린의 치료를 막고 있는 거야. 네가 여기에서 죽치고 앉아있어 봤자 좋아질 건 하나도 없어. 의원들이 집중하고 치료할 수 있게 비켜줘야 한다고!”

애쉬가 고개를 위로 움직여 의원들을 살폈다. 광기 어린 백안이 닿을 때마다 의원들이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금발을 정리하지 않은 채 다시 이벨린을 바라보았다. 핏기 없는 얼굴을 보니 또다시 속에서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그러나 쥬디퍼의 말이 맞았다. 스무 명의 의원들이 힐링을 쏟아부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몇 명은 아예 힐링을 시전하지도 못했다.

애쉬는 치미는 분노를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가 죽으면… 너네도 다 죽는다.”

그리고 나도.

싸늘한 한마디를 남긴 채 애쉬는 사흘 만에 방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하루 만에 후회했다. 제 혀와 눈알을 뽑고 뼈를 갈아버리고 싶을 만큼 처절한 후회를. 그 방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끝까지 지켰어야 했는데.

이벨린이 사라졌다.

* * *

분노에 차 정신을 놓아버린 애쉬는 이벨린을 치료했던 의원들을 모조리 잡아다 화형대에 매달아 놓았다.

놀란 쥬디퍼가 애쉬를 뜯어말렸다.

“죄 없는 의원들한테 뭐 하는 짓이야!”

“죄가 없어?”

애쉬의 입술이 섬뜩하게 올라갔다. 광기 어린 미소에 쥬디퍼는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 버러지 같은 놈들이 내 선배를 못 지켰는데 죄가 없다고?”

“저들도 피해자야. 수면초가 피어오르는데 괴물이 아닌 이상 어떻게 버티겠어!”

애쉬가 방을 비운 그날 새벽, 그 방에 수면초 하나가 타올랐다. 사흘 밤낮으로 힐링을 퍼붓느라 지칠 대로 지쳐있던 의원들은 수면초의 낌새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바닥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의원들이 모두 잠든 사이 이벨린이 사라졌다.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찾아온 애쉬가 그 장면을 처음으로 목격했고, 잠에서 채 깨어나지도 못한 의원들은 의식이 없는 상태로 화형대에 묶이게 된 것이다.

“내가 저딴 새끼들을 믿고… 선배를…….”

“이성적으로 생각해. 의원들이 무언가를 봤을 수도 있어. 이벨린을 찾으려면 작은 거라도 단서가 필요할 거 아니야.”

안다. 애쉬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화나서 미쳐 버리겠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애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참담한 눈물이 흘러내린다.

다행히 애쉬는 직접 화형대에 불을 붙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반나절의 시간이 지난 후 깨어난 의원들이 당황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애쉬는 의원 중 한 명의 목을 거칠게 틀어잡았다.

“어제 새벽에 본 거, 빠짐없이 얘기해.”

목이 잡혀서 꺼이꺼이대는 의원 말고 다른 의원이 겁에 질려 입을 열었다.

“어제…….”

검은 의복의 시종이 폐하께서 하사하신 거라며 밤참을 가지고 방에 들어왔다고 한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의원들은 시종을 진심으로 반기었고 한 치의 의심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종이 트레이 위의 뚜껑을 연 순간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 뚜껑 안에 있던 것은 음식이 아니라 수면초였으리라.

누군가 계획적으로 이벨린을 납치해 간 것이다.

애쉬의 머릿속에 두 사람이 동시에 떠올랐다.

세레즈 로벤스디, 폴 크라우.

정황만으론 폴 크라우가 더 유력해 보인다. 이벨린에게 청혼해 온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 때문에 유람선에 폭발을 일으킨 장본인 아닌가.

그러나 세레즈 로벤스디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알려진 대외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교묘하고 꾸준히 뒤가 구린 짓을 해온 작자이다.

이벨린과의 이렇다 할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최근 놈이 길덴에 온 것을 보고 받은 기억이 났다. 여느 다른 귀족처럼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길덴에 온 거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얼굴을 비춰야 하는 게 맞았다.

로벤스디가의 사생아에 대해 물으니 시종장의 머리가 터져 버렸다는 것도 꺼림칙했다.

애쉬는 급히 배를 타고 수도로 향했다. 우선 폴 크라우를 족쳐 놈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들을 생각이다.

* * *

쿵. 쿵. 쿵.

고막을 울리는 심장 소리, 쥐어 짜인 것처럼 축 늘어진 몸 그리고 일렁이는 시야 너머로 보이는 검은 인영만이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의 전부다.

머리가 둔해졌다. 의문을 제기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은 채 그저 숨만 뿜어내고 있었을 뿐이다. 유일하게 인식되는 검은 인영은… 그게 누구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 어느 틈에 잠들었고 다시 눈을 뜨면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맘에 들……. 조금… 내버려……. 곧 도착…….”

다시 눈을 떴을 땐 무언가 바뀌어 있었다. 귀를 때리는 심장 소리도, 손가락 까딱할 수 없는 몸뚱이도 똑같았는데 검은 인영의 모습이 달라졌다.

아니, 내가 달라진 건가.

검은 인영의 실루엣은 여전했다. 단지 뉘어있던 것이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쓰러진 이후 처음 자각이라는 것을 했다. 내 자세가 변했구나 하고.

자각의 순간. 알을 깨고 나온 작은 생명체처럼 방대한 양의 빛이 피부 위로 쏟아져 왔다.

몽롱했던 정신이 또렷해지기 전에 오감이 먼저 반응했다. 쾌쾌하고 습한 냄새, 내장이 타들어 가는 엄청난 통증, 혀끝부터 목구멍 안쪽까지 퍼지는 쌉쌀하고 역겨운 맛까지 전부 느껴졌다.

“쿨럭!”

폭발하듯 잠긴 목구멍에서부터 뜨거운 기침이 터져 나왔다. 턱밑으로 점도 높은 무언가가 흘렀다.

“저런, 아무리 써도 약은 꼭꼭 삼켜야지.”

목소리만으로도 피가 격렬하게 들끓었다. 오한이 듦과 동시에 살기가 역류했다. 공포와 분노가 한데 섞여 요동치는 심장을 더욱 빠르게 뛰게 만든다. 이러다 어느 순간 멎어버려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빠르게.

턱 밑으로 흐르는 것이 피가 아니라는 것을 안 건 부드러운 질감의 천이 점도 높은 그것을 닦아 다시 입안으로 넣어줬을 때다.

“우욱!”

“애도 아니고 약을 자꾸 뱉어내면 못써.”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졌던 역겨운 맛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리라.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눈앞의 남자, 세레즈를 눈에 담았다. 세레즈는 검은 가죽 장갑과 대비되는 새하얀 천을 들고서 가증스럽게도…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 잘 안 들린단다, 이벨린.”

끄흑, 차오르는 숨과 역한 비린 맛을 겨우 목구멍으로 눌러 삼킨 후 있는 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세레즈가 내 뒤의 등받이를 짚고 가까이 다가오자 내가 의자에 앉혀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으윽…….”

“다시 말해 보렴.”

“이… 씹새끼야…….”

내 욕설이 세레즈의 귓구멍에 정확히 꽂혀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발음했다.

세레즈가 여상히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로 내 뺨을 쓸었다. 가죽 장갑의 축축한 질감에 닭살이 돋는다.

“걱정 마. 여기는 아무도 못 와. 네가 내 곁을 떠나서 길을 잃고 헤맬 일도 없고 다른 놈이 널 데려가지도 못해.”

세레즈는 묻지도 않는 말을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읊어댔다. 누가 보면 내가 여기에 있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보이겠어. 욕이라도 한 번 더 먹여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읍!”

내 호흡을 읽은 세레즈가 입을 틀어막았다. 안 그래도 숨쉬기가 버거웠는데 입과 코가 막히자 온몸의 혈관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목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건 물론이고 얼굴 위는 보랏빛을 띠고 있을 거다.

세레즈를 떼어내기 위해 발버둥 쳐봤으나 손발이 결박되어 있는지라 쉽지 않았다.

“윽! 읍!”

“얌전히 쉬고 있어. 때가 되면 꽃구경도 가고 향 좋은 차도 마시자.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게 할게. 폐하께서도 곧 포기하실 거야, 걱정 마.”

“으읍! 읍!”

“그때까지 너는 얌전히… 네 처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면 돼. 왜 오빠가 굳이 폐하께서 참석해 계신 연회 때 날 데려갔을까… 하는 거?”

드득, 드드득.

내 거친 몸부림에 의자 바닥이 긁혔다. 그러나 입과 코를 막고 있는 장갑은 조금의 틈도 벌어지지 않고 거칠게 나를 누르고 있었다. 눈알마저 터져버릴 것처럼 산소가 부족했다.

“푸하! 허어억!”

손이 떨어지자 본능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목을 긁는 소리와 함께 온 구멍이 거칠게 산소를 빨아들인다. 불쾌한 온기를 머금은 웃음이 이마 위에 닿았다.

“그걸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끝나있을 거야. 상황도, 네 마음 정리도.”

주르륵 흐르는 타액을 닦지도 못하고 눈만 들어 세레즈를 노려보았다. 모자란 숨 탓에 상체의 움직임이 과장되어 보이는 나에 비해 세레즈는 견고하게 쌓아 올린 첨탑처럼 대칭을 이룬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아, 약도 꼬박꼬박 먹어야지. 진짜로 죽어버리면 안 되잖아?”

숨을 고르기도 전에 입안으로 엄지손가락만 한 환이 들어왔다. 향만으로도 먹은 것을 전부 토해 낼 수 있을 만큼 역겨웠다.

내가 뱉어내지 못하도록 세레즈는 입안에서 그것을 으깼다. 톡― 하고 묽은 것이 터져 나왔다. 입안으로 확 퍼져오는 비린 맛에 발작하듯 몸이 떨렸다.

세레즈는 내 턱을 들어 올린 후 손가락으로 그것들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꿀꺽.

아랫니에 손가락 두 개를 걸어 입을 벌리게 한 세레즈는 내 입안에 약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곤 칭찬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놈의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약효는 세 시간까지야.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진짜 죽어 버리니까 마다하지 말고 제때 챙겨 먹으렴. 먹기 싫다고 투정 부려도 안 봐줘. 알겠지?”

“…….”

이 미친놈은 제 할 말만 하고선 몇 번이고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못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래 못 있어줘서 미안해. 곧 다시 올게.”

훅 다가오는 얼굴에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뺐다.

코끝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던 세레즈는 짧게 웃곤 천천히 멀어졌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난 쓴 물이 올라오는 입안을 다시며 주위를 살폈다. 천장에 달린 작은 등 하나만이 주위를 밝히고 있는지라 사위가 어두웠다. 원목의 방은 사방이 곰팡이로 뒤덮여있는 것처럼 습했고 또 퀴퀴한 냄새가 났다.

무슨 창문 하나 안 달렸냐.

세레즈 놈답게 사이코 같은 방이었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헤아릴 수 없는 방. 사면의 모서리가 검게 드리워진 방.

이곳에서 작은 불 하나에 의지한 채 손과 발목이 묶여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동시에 세레즈가 던져놓고 간 의문이 떠올랐다.

“굳이 폐하께서 참석해 계신 연회 때 날 데려간 이유는 뭘까.”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세레즈는 내가 완벽한 절망을 느끼길 바랐을 거다. 서대륙의 황제도 날 구해 주진 못해, 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더 이상의 도피는 불가능하고 누구든 이 상황을 타개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을 거다.

그러나 잘못 생각했다. 난 애초에 애쉬에게 구원을 바라지 않았다. 좌절? 절망? 그것은 진즉에 겪은 것들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제 와서 뭐.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쉬에게 세레즈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확신이 든다. 만일 세레즈 얘기를 했다면 이 일에 분명 애쉬가 휘말렸을 거다. 어쩌면 독을 먹은 게 내가 아니라 애쉬였을지도 모르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여 얼른 고개를 털어버렸다.

애쉬가 나와 세레즈의 일에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인 거고, 이제 문제는 나다.

난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꼼짝없이 잡혀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세레즈의 말을 정보로 유추해 보자면 나는 아직 독에 중독된 상태이고 세레즈가 주는 약을 세 시간마다 먹어야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아주 운 좋게 이곳에서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내 탈출 시간은 고작해야 세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세레즈에게 잡히지 않고 대도시로 나가 의원을 찾은 후 해독제를 먹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위험 요소가 너무 많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하아…….

나는 우선 동태를 더 살펴보기로 했다. 꾀를 내어 약의 여분을 얻는 쪽으로 생각을 마쳤다.

그리고 세 시간이 지났다. 약을 가지고 온 사람은 놀랍게도 세레즈가 아니라 로즈였다.

* * *

“로벤스디 공작은 길덴에 정착한 지 하루 만에 다시 배를 타고 라비엔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거래 중이던 철광산에 산사태가 일어나서 새벽에 급하게 떠난지라 폐하께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뻥 뚫린 동굴을 가져다 놓은 것처럼 지하 감옥의 길은 어둡고 넓었다. 양 벽에 놓인 횃불만이 음습한 감옥 내부를 아스라이 비춰주고 있을 뿐이다.

아무 죄가 없는 사람도 지하 감옥에 발을 내딛는 순간 죄지은 사람처럼 겁먹게 만드는 곳인데도 애쉬의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애쉬는 친위대장인 여자가 보고하는 말을 빠짐없이 새겨들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간간이 대꾸했다.

“…다른 문제이긴 하나, 로벤스디 공작이 운영하고 있는 고아원 쪽에서 일이 터졌습니다. 안토니가 보고서를 올렸는데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애쉬가 손을 내밀자 여자가 재빨리 개봉된 적 없는 새하얀 봉투를 건네주었다. 애쉬는 깔끔하고 빠른 동작으로 안에 있는 서류를 읽어 내려가면서 여자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듣기론, 고아원 내부에서 주마다 정기적으로 정신 마법을 시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신 마법에 취약한 15세 미만의 아동들이 그 대상자이며,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꾸준히 마법을 걸어 자의식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는다고 합니다. 술식이 워낙 어렵고 강하여 안토니로선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했습니다.”

애쉬는 보고서를 빠르게 훑어갔다. 정신 마법이 행해진 구체적인 시간, 장소, 시전자들의 수, 대상자들의 수 등 세세한 것이 적혀있었다.

정신 마법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어렸을 적부터 꾸준히 시전한다고 하더라도 연 단위로 시간이 지나면 풀리기 마련이다. 마법이 풀린다고 하더라도 정상적인 사고는 어려울지언정 시전자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먼 옛날 야만인들의 전쟁 시에 노예나 포로들에게 정신 마법을 걸어 순간의 살육에 몰두하는 전쟁 용병으로서 사용하기도 했었는데, 로벤스디 공작의 경우 그러한 전쟁 용병이 필요한 처지도 아닐 것이다.

“저번에 머리가 터져 죽은 로벤스디 공작가의 시종장이 몇 살이라고 했지?”

“62세입니다, 폐하.”

어렸을 적부터 꾸준히 정신 마법에 세뇌당하고, 성년이 된 후 바로 로벤스디 공작 저택으로 옮겨졌다면 세뇌의 시간은 길어봤자 10년 정도였을 터다.

그러나 시종장과 더불어 많은 로벤스디가의 시종들이 30세가 넘은 시점에도 로벤스디가에 충성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세뇌 외에도 언령 하나가 폭탄처럼 붙어있기 때문이다. 세레즈 로벤스디의 이면에 대해 발설하거나 혹은 그의 여동생인 이벨린 로벤스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뻥― 하고 머리가 터져버리는 언령이.

그러나 확정 짓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세레즈의 비인도적인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었으나, 공작 정도 되는 귀족이 서민 혹은 노예의 아이를 잡아다가 정신 마법을 쓰는 것 정도야 큰 엄벌에 처하진 않는다. 끽해야 벌금 몇만 루덴 정도.

다만 그 행위가 반역을 위한 군사적 조짐으로 보일 시에는 사형당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나 몇십 년 동안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이 오로지 이벨린 한 사람을 향한 것이라고 하기에도 시간적인 오차가 있다. 그러나 마냥 손 놓고 있기엔 찝찝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다.

“우선 세레즈 로벤스디도 잡아놓고 봐야겠군.”

“예? 하지만 폐하, 무슨 죄명으로…….”

“일전에 휴간트 로벤스디가 어떤 식으로 살해당했다고 했지?”

“신원 불명의 한 정신병자가……. 설마.”

“그쪽으로 엮어보지.”

애쉬가 걸음을 멈추자 따르고 있던 기사 두 명이 간결한 동작으로 무거운 쇠문을 열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피 웅덩이 위에 마찬가지로 피를 뒤집어쓴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폴 크라우는 잔뜩 불어터진 눈을 하고서 힘겹게 숨만 내쉬고 있었다.

애쉬가 안으로 들어서자 여자가 따라 들어왔고 다시금 등 뒤의 쇠문이 굳게 닫혔다. 여자가 푹신한 쿠션이 달린 의자를 가지고 왔음에도 애쉬는 앉지 않았다. 검은 구둣발이 바닥에 깔린 피를 짓이기며 폴과의 거리를 좁혔다.

“이벨린 로벤스디는 어디에 있지?”

폴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애쉬의 질문을 피하고자 그런 게 아니라 힘에 부쳐서 고개를 떨군 것이다. 갖은 고문을 당했는지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다.

조금의 동정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대화가 되지 않는 건 곤란했다.

“회복 약을 써라.”

뒤에 서있던 여자는 주머니를 열어 푸른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폴의 입에 강제적으로 가져다 대었다. 폴의 목울대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타박으로 인한 내상과 외상을 치료해 주는 회복 약은 몸에 빠르게 흡수되었다.

완벽하다고 할 순 없어도 의식이 돌아올 정도로 회복된 폴이 그제야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시 묻지, 이벨린 로벤스디는 어디에 있나.”

분노로 점철된 싸늘한 음성에 폴은 지하 감옥에 끌려온 직후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풍겨오는 위압감에 목소리조차 내기 어려웠다.

“약이 부족한가?”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가 애쉬의 말에 곧바로 움직였다. 본의 아니게 그 비싸다는 회복 약을 두 번이나 마시게 된 폴은 점점 정신이 또렷해져 왔다. 차라리 취한 듯이 몽롱한 상태였으면 애쉬를 상대하기 더욱 편했을 텐데… 제 무덤을 팠다는 생각을 했다.

폴은 애쉬가 다시 하문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

“…사라에 관한 걸… 왜 저에게 묻습니까?”

이벨린에게 마음을 고백했고 거절당했다. 잔꾀를 부리다가 결국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데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폴은 무서운 와중에도 조금 짜증이 났다.

“이벨린이다.”

스쳐 지나가는 미세한 짜증마저도 깨끗이 씻겨나가 버렸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벽안이 살기를 숨기지 않고 흉흉한 빛을 내고 있었다. 아니, 광기로 반쯤 돌아가 버린 것 같다.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짐승의 것도 아니고… 살인귀의 그것과도 같았다.

“네, 이벨린 로벤스디…….”

폴은 의아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하 감옥에 처박아둔 장본인이 대뜸 사라… 아니 이벨린의 거취를 묻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자신이 수도의 지하 감옥으로 이송되는 중에도 애쉬는 길덴에 있었으니 이벨린의 최근 행적은 자신보다는 애쉬가 더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자신을 놀리기 위하여 이곳까지 발걸음 하진 않았을 테고…….

별안간 좋지 않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속이려고 하면 안 돼.”

다가온 애쉬의 몸이 유독 커 보였다. 그나마 빛을 내고 있던 불을 건장한 등이 가려버리자 그림자가 폴의 얼굴 위를 덮었다. 그 위압감에 폴은 하려던 말도 잊어버리고 마른 입술만 달싹거렸다.

“네가 감시 목적으로 쓰레기 같은 상담가를 이벨린 옆에 붙여둔 거, 이벨린을 겁주기 위해 배를 폭발시켜 버린 거. 참 기괴한 짓들을 잘도 벌여놨더군.”

“…….”

“이번엔 무슨 짓을 한 거지? 네놈이 풀려날 줄 알고 미리 밑밥이라도 깔아놨나? 영주 성의 시종들을 매수해서 이벨린을 납치한 게 맞냐 이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바른대로 말해.”

애쉬가 폴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 올렸다. 덜컹. 상체가 위로 빠지고 발이 들릴 만큼 강한 힘이었다.

폴은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몸을 두드리는 죽음을 피하고자 열심히 입을 움직였다.

“푸, 으윽. 풀려나다뇨, 당치도 않…….”

손아귀의 힘이 더 가해졌다. 우둑, 위험한 소리가 들렸다. 턱뼈가 으스러져 버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마, 말을, 손 좀…….”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손이 가볍게 뺨을 툭 치더니 멀어졌다. 잠깐 심술을 부린 것 같은 태도였다.

그 잠깐의 심술에 폴은 얼얼한 턱을 감싸 쥐지도 못하고 고통에 의한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통증에 무뎌지기도 전에 애쉬가 뒷머리를 잡아 꺾었다.

“이제 말해 보지?”

“저는… 모릅니다. 풀려날 수 있을 거라고 크흑,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너와 이벨린의 유대가 생각 이상으로 눈물겹던데.”

“커헉.”

“네놈이 배를 터뜨린 이유가 반역 때문이 아니라는 걸 이벨린이 말해 주더군.”

“이벨린이 어떻, 큭, 케…….”

“말하라니까 왜 나한테 질문을 해.”

폴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자신이 벌인 추악한 행태를 이벨린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걸 애쉬한테 얘기했다니. 장난은 이제 끝이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애쉬의 얼굴은 더욱 험악해졌다.

폴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고는 애쉬가 던진 말들을 이해해 보기로 했다.

추측해 보자면 이벨린이 애쉬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고 애쉬는 폴을 의심하고 있다. 의심의 전제는 이벨린이 폴이 반역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애쉬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선처의 뉘앙스였겠지.

이벨린이 폴의 죄를 덜어주기 위하여 그런 짓을 했다곤 차마 상상이 가지 않았으나 애쉬의 말을 정리해 보자면 여하튼 그렇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벨린의 행동은 접어두고 우선 실종에 초점을 맞춰보자면 자신은 애쉬가 의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도 이벨린을 숨기거나 다른 장치를 마련해 놓지 않았다.

황제의 눈을 피해 그런 짓을 할 만한 인간은, 그럴 이유가 충분히 있는 인간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세레즈.”

애쉬의 눈이 가늘어졌다.

“크흑, 세레즈 로벤스디가 그랬을 겁니다. 전 모르는 일입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이 와중에도 미약한 승리감이 폴을 휘감았다. 미소가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애쉬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 표정을 보니 더욱 좋았다.

네가 이벨린에 대해 모르는 걸 나는 알고 있어.

그 사실 하나만으로 온갖 고문이 자행됐던 지하 감옥 생활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짜릿하다.

폴은 나른해진 입술을 들어 올렸다.

“세레즈 로벤스디는 여동생에 집착하는 것을 넘어 소유하고 싶어 하는 성도착증 환자입니다. 이벨린은 세레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일생을 바치고 있고요…….”

폴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이벨린의 모든 것, 세레즈의 모든 것을 애쉬에게 털어놓았다. 마음 같아선 평생 궁금해하며 살아라, 하고 입을 꾹 다물고 싶었다만 그랬다간 이 자리에서 목이 떨어졌을 거다.

게다가… 이벨린이 세레즈의 인형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반역죄인이 아니라고 저를 변호해 준 것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세레즈에게서 이벨린을 구해 낼 사람은 애쉬밖에 없다는 것을 폴은 잘 알고 있었다. 잠깐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입을 다물어 버리면 여러 가지로 손해 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이벨린에게 저지른 세레즈의 끔찍한 만행들, 처참히 죽어나간 주변인들을 보고 정신을 놓아버린 이벨린이 울며불며 폴에게 살려달라고 부탁했던 일, 남은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세레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위장 자살, 믿었던 폴마저 세레즈의 명을 받고 움직였다는 것까지 전부 얘기했다.

애쉬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매 순간마다 무너져갔다.

툭.

폴의 머리를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그러니 이번에도 세레즈 로벤스디가 이벨린을 데려간 게 분명합니다. 그자 아니면 이런 짓을 벌일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벨린에게 묘한 친근감 그 이상의 감정을 품지 않았던 여자마저도 이벨린의 숨 막히는 생애에 할 말을 잃고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애쉬는 처참하고 참담한 기분에 손을 잘게 떨었다.

왜 몰랐을까. 어째서 미리 알지 못했을까.

끝없는 후회의 반복. 이벨린에게 했던 모진 말들이 가슴을 콱콱 내리찍었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부터 느꼈던 이벨린의 지나치게 방어적인 태도와 돈을 많이 모아 아무도 찾지 않는 섬에서 홀로 살아가겠다던 꿈은 세레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애쉬는 그런 이벨린의 처절한 날갯짓을 불만스러워하고 이내 꺾어내려 한 것이다.

스스로가 일궈놓은 서대륙의 땅덩어리에 짓눌려 피와 내장이 터진 것 같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기혐오에 토악질이 나왔다.

“폐하.”

여자가 조심스레 애쉬를 불렀다. 반응하지 않고 서있던 애쉬가 폴을 등지고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그의 걸음걸음마다 넘치도록 차오른 분노와 혐오가 떨어져 길 위를 나뒹굴었다. 그것을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면 썩은 시체보다도 더한 악취가 풍길 것이다.

“당장 세레즈 로벤스디를 잡아 와.”

“죄명은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딴 건 필요 없어.”

“예, 폐하. 제가 라비엔으로 직접 가도록 하겠습니다.”

여자는 애쉬의 침묵이 곧 긍정임을 알아챘다.

* * *

애쉬의 앞에 로제타가 나타났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집무실 앞에 서있었는데, 애쉬는 지금 차분히 의자에 앉아 서류 따위를 보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여자는 낭패감을 씹어 삼켰다.

“폐하.”

여자는 애쉬의 대각선 뒤에서 걷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 주군의 표정이 어떤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창백하게 질린 로제타의 얼굴을 보니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고도 목 뒤의 털이 바짝 솟았다.

“할 말 있나?”

“…저, 그게.”

상대가 누구건 첨언을 아끼지 않았던 로제타는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애쉬의 기세에 눌려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 외에도 다른 문제가 있어 보였다. 말을 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평소의 애쉬라면 로제타의 이 망설임을 기다려 줄지도 몰랐으나 지금은 아니다. 애쉬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로제타를 무심히 지나쳐 버렸다.

여자가 뒤를 돌자 로제타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쉬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로제타에게 짧게 묵례함으로써 최선의 예를 표했다.

“하명하실 것이 없으시다면 지금 바로 라비엔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래.”

“폐하께선…….”

“안토니와 합류할 거다. 고아원을 먼저 부숴 놔야겠어.”

* * *

“로즈, 머리 묶는 게 많이 익숙해졌나 봐. 너 예전엔 빗질할 때마다 팔 아프다고 난리 쳤었잖아. 지금은 좀 괜찮아?”

“…….”

“아, 나 약 먹기 싫어.”

“…….”

“로즈, 우욱……!”

로즈가 내 양 볼을 한 손으로 잡고 힘을 주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세레즈 옆에 있으면서 따로 운동이라도 한 건지 악력이 장난 아니었다.

환이 입에 들어가자마자 반은 깨물고 반은 혀 밑으로 숨겼다. 우웨엑. 진짜 더럽게도 맛없네. 아니, 맛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거친 파도 위에서 통통배를 타고 있는 것 같은 구역감을 들게 했다.

나는 혀 위에 있던 반쯤의 약을 짓이긴 후 입 밖으로 흘려버렸다. 로즈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손에 든 바구니에서 다시 환을 꺼내 입에 밀어 넣는다. 이번엔 그것을 착실히 삼켰다.

“…먹었어.”

혀 밑에 둔 환 때문에 발음이 조금 어눌했으나 의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로즈는 몇 초간 나를 응시하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난 익숙하게 신발을 벗고 그 안에 환을 퉤! 뱉어냈다. 발에 의해 짓이겨지고 환과 환끼리 뭉개진 탓에 외관은 썩 엉망이었어도… 웬만큼 환이 모여있었다. 약을 감추려는 시도 중 몇 번은 실패하고 몇 번은 성공했던지라 걱정이 많았는데 이 정도면 하루 정도는 버틸 것 같았다.

그럼 이제 탈출이 문젠데…….

손과 다리에 묶여있는 이 줄을 풀어야 했다. 애석하게도 날카로운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주황 조명이 일렁이는 원목의 방엔 정말 나 혼자만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세 시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로즈를 빼곤 눈앞의 풍경은 질리도록 똑같았다.

난 로즈에게 희망을 품고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처음엔 미안하다, 잘못했다고 사과했고 다음엔 일부러 이렇게까지 사과하는데 안 받아주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하며 신경을 건드려도 봤고 지금은 추억을 상기시키는 옛날 일들을 꺼내는 중이었다.

로즈는 대부분 무표정으로 일관했지만 딱 한 번 반응이 있었다.

로즈가 키우던 햄스터 마리 이야기를 할 때였다. 로즈가 실종되고 나도 정신이 나간 상태로 허겁지겁 길덴으로 도망가 버린 탓에 마리 혼자만이 쓸쓸한 기숙사 방에 남아 있었는데 그 작은 아이가 걱정된다고 운을 떼니 로즈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던 것이다.

그것이 마리 이야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에겐 한 줄기의 빛과 같았다. 이후에도 꾸준히 마리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다시 로즈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잘못 본 건가.

또 문이 열렸다. 로즈가 들어온다.

벌써 세 시간이 지났군.

로즈가 환을 입에 들이밀었다.

“그거 알아? 세레즈 진짜 나쁜 새끼야. 아카데미 다닐 때부터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얼마나 입이 근질거렸다고.”

“…….”

“아, 먹을 거야. 먹을 건데, 이거 먹으면 너 바로 가버릴 거잖아. 난 로즈, 너랑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우리 5년 동안이나 못 만났잖아?”

“…….”

“세레즈 그 나쁜 새끼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도울 수는 없어? 물론 팔다리 묶여있는 애가 그런 말 해봤자 신용이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뭔가 묘수가 떠오르지 않겠냐는 거지.”

로즈의 반응을 살펴가며 입이 움직이는 대로 떠들었다. 나의 발악을 보고 신이 동정이라도 해준 건가? 로즈의 눈동자가 다른 빛을 띠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살피면서도 입은 쉬지 않았다. 로즈가 천천히 눈을 감고 다시 떴을 땐 딱딱하기만 했던 얼굴에 다른 표정이 덧입혀져 있었다. 당황, 두려움. 비슷한 것이 잔잔하게 깔린 채로.

“로즈?”

“…….”

“맙소사, 로즈. 나야 사… 아니, 이벨린.”

꿀꺽. 내 이름을 말하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다. 내뱉어선 안 될 금기어를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

로즈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잘못 듣지 않았어. 정말, 정말 로즈의 목소리라고! 철렁 내려앉았던 심장이 격렬한 소리를 내며 머리 위까지 치솟아갔다.

“로즈, 날 봐봐. 날 기억해?”

로즈의 동공이 한 군데에 머물러있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튀어 다녔다.

“로즈!”

힘주어 부르자 그제야 나를 바라본다.

“…이벨린.”

“그래, 나야. 나라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거야?”

로즈가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하얀 천 아래에 감춰져 있던 환 몇 알이 바닥을 굴렀다.

“하, 나 머리가…….”

“당황스럽지? 나도 알아. 일단 침착하고 심호흡해 봐. 그렇지. 그래.”

로즈의 눈이 눈물로 글썽였다. 혼란스러움이 주체가 되지 않아 보였다. 말로 달래주니 로즈가 눈꺼풀 아래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진정돼 보인다.

“우선,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워서 날 먹여줘.”

“…….”

“내가 독에 중독됐어. 세 시간마다 저 환을 먹지 않으면 죽는데 지금이 딱 세 시간째거든. 벌써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하고 있어.”

로즈는 정신없어하면서도 손을 덜덜 떨면서 입에 환을 넣어주었다.

“우욱. 아, 괜찮아. 이거 맛이 좀 구려서. 그리고 멀쩡한 건 여기에.”

신발을 내밀자 환이 우르르 쏟아졌다.

“너무 많이 없어지면 티 나니까 두 개만 넣어줘.”

로즈가 다시 몇 개를 집어 빼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정신이 돌아오는 듯 로즈의 숨이 다시 가빠지면서 사람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나, 머리가… 막 뒤죽박죽이야.”

“어떻게?”

“계속 목소리가 들려. 죽을 거라고…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다 죽는다고…….”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기억은 나?”

로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저었다.

“뒤죽박죽… 전부 다. 수면 아래에 내가 가라앉고 있는 기분…….”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아.”

할 수만 있다면 로즈의 등을 토닥여주고 싶었다.

“로즈, 우선은 날 풀어줘. 우리 여기서 도망치자.”

로즈가 여전히 가쁜 숨소리를 내며 내 손을 단단히 묶고 있는 끈을 만졌다. 그러나 달달 떨리는 손으로 매듭을 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말로써 로즈를 북돋아 줬다. 매듭을 잡다가도 미끌, 매듭의 고리를 힘주어 풀어야 하는데 힘준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인다.

나는 절대로 로즈를 채근하지 않았다. 우선 잡는 것부터 다시 하자며 천천히 그녀를 다독였다.

“이거 실망인데.”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아니다. 말했듯이 난 절대로 로즈를 채근하지 않았다.

“마법이 제대로 먹히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불량품일 줄이야.”

“…세레즈.”

세레즈의 구둣발이 나무 바닥을 괴기스럽게 울려댔다. 로즈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내 다리에 완전히 몸을 기댄 채로 덜덜 떨었다.

“아악!”

세레즈가 로즈의 멱살을 잡아채곤 손을 날렸다.

퍼억!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로즈의 몸이 나가떨어졌다.

“그만해!”

덜컹!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 나갔다. 의자가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바람에 얼굴을 바닥에 그대로 내리찍어야 했다.

로즈를 다시 잡아채던 세레즈는 내가 넘어지자마자 로즈를 내던지고 내 쪽으로 오더니 의자를 일으켰다. 세레즈의 손이 코 아래를 훔치고 지나간다.

“피 나잖아. 조심해야지, 응?”

“로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서운하려고 하네. 그런 표정 짓지 마. 널 위해 죽이지 않고 일부러 살려둔 거니까.”

“우애 좋은 남매 놀이에 어울려줄 생각 없거든?”

“진짜야. 나중에 네가 저 아이를 봤을 때 얼마나 깜짝 놀라 할까… 그 생각 하면서 죽이지도 않았어.”

“날 엿 먹일 궁리하는 게 그렇게 재밌냐?”

세레즈가 싱긋 웃으면서 코를 한 번 더 훔쳤다.

“엿 먹일 궁리는 내가 아니라… 우리 동생이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세레즈가 내 신발을 들어 올리더니 모아두었던 환을 탈탈 털어 바닥에 흩뿌렸다. 아까 벗어놓고 다시 신지 않은 탓에 들켜버린 거다.

“이 씹…….”

단전 밑에서부터 욕지거리가 뜨겁게 차올랐다. 세레즈를 향한 것이기도 하면서 나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탓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리광 부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저 아이는 죽이지 않을게.”

로즈가 두 손으로 뺨을 부여잡으며 흐느꼈다.

“잔수작도 안 통해. 다시 여기를 멈춰놓을 거야.”

세레즈가 검지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성인이 된 후라서 마법이 제대로 걸리지는 않지만 이대로 건방지게 굴게 하는 것보단 낫지. 아, 시전 도중에 죽어버리는 건 내 탓이 아니야. 저 아이 나이가 너무 많은 탓이지.”

“마법?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얘기해!”

“이벨린, 넌 약속만 하면 돼. 어리광 부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그렇지 않으면…….”

“…로즈를 죽일 거라고?”

“똑똑해서 참 좋아.”

세레즈가 무릎을 접어 앉은 채로 손등에 턱을 기댔다. 웃고 있는 면상을 갈아주고 싶은 충동에 비해 묶여있는 손발은 무력했다.

내 대답이 길어지자 세레즈가 읏챠, 소리를 내며 일어나더니 로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질질 끌어왔다.

“여기서 죽일까? 응? 이벨린, 말을 해야 알지. 어?”

머리를 내리쳤던 살기가 다급함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니, 안 돼.”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고?”

“…어리광 부리지 않겠습니다.”

세레즈가 로즈를 놓아주었다.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속이 빈 신발을 신겨준다.

“잘했어.”

그리고 세레즈는 로즈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어 억지로 일으키더니 부축하는 모양새로 끌고 나갔다. 로즈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과도 같이 느껴졌다.

쿵. 문이 닫혔다.

약은 빼앗겼고 내 손발은 여전히 묶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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