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독과 해독 (3)
그 크기는 거대하나 낡고 허름하여 아무리 페인트를 덧바른다고 하더라도 볼품없기 짝이 없는 아브모르나 극장의 건물 앞을 기골이 장대한 여자가 지키고 섰다.
하지만 극장 따위야, 누군가의 방화로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린다고 하더라도 여자에게선 일말의 동정도 사지 못할 것이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여자가 빠르고 정갈하게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곤 미련 없이 극장을 등지고 나섰다. 바람이 바다의 짠내를 머금고 한 번 불어닥쳤을 뿐인데도 여자는 미세한 기류를 읽어낸 것이다.
머지않아 텅 빈 공간에 금빛 아지랑이가 일렁이더니 형체를 만들어냈다. 그 기이한 현상에도 여자는 동요의 기색 없이 묵묵히 남자의 뒤를 따랐다. 여자가 지키고 섰던 것은 극장 따위가 아니었다.
“이틀 뒤면 로벤스디 공작이 탄 배가 길덴에 정박하게 됩니다.”
“…….”
남자가 들어서자 영주의 성 앞을 지키고 선 기사들이 창과 검을 거두고 머리를 조아렸다. 언제나 제 주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문이 남자의 걸음걸음마다 겹겹이 열리며 속을 드러냈다.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집무실 의자에 앉은 남자는 생각에 잠긴 듯 건조한 손으로 책상 위를 툭툭 두드렸다.
시선을 끄는 우아한 손짓에도 여자의 눈은 답답함으로 탁하기만 했다.
어젯밤, 애쉬는 쥬디퍼와 로제타의 방문을 환영하는 파티에서도 줄곧 심기 불편한 낯으로 좌중을 불안케 하더니 평소엔 입에도 대지 않는 술을 한 번에 들이켜기까지 했다.
이때부터 여자는 애쉬가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거하게 취한 애쉬는 파티장을 빠져나왔고,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아브모르나 극단원 기숙사 앞이었다. 재빠르게 쫓아 나온 여자가 애쉬를 부축하며 외진 골목 안으로 데려갔다. 불경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보고 싶어.”
여자는 애쉬가 말하는 대상을 떠올렸다. 눈에 띄게 아름다운 미인은 아니었으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꾸만 눈이 가게 만드는 묘한 여자를. 신체적인 폭력은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굳게 참아내지만 애쉬와 관련된 일이라면 파도 한 번에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처럼 연약해지는 여자를.
애쉬라고 해서 이벨린과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즉위 5년 만에 서대륙을 통일시킨 애쉬는 그 권위를 다 내려놓고 사랑에 목을 매고 있었다. 막연히 하늘 위의 존재라 치부하고 있었던 여자는 애쉬의 인간적인 면모에 당혹을 금치 못했으나 대펜테리온 제국에 충성을 바친 기사답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제국에서 폐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애쉬가 금발을 이마 위로 늘어뜨린 채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번져왔다. 여자는 이 술 냄새에, 애쉬의 미모에 취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래. 분명 그래야 하는 게 맞는데. 왜 선배는 내 마음대로 안 되지? 고백해 놓고 좋아하지 말라고 마음을 막아 세우는데 나보고 어쩌란 거야!”
“…….”
“마음을 끊어내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어. 몸통에 칼을 박아 넣어도 그것만은 안 되는데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지?”
애쉬가 울음을 참아내며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얼굴로 복수하라고 말하면, 내 머릿속에 박혀있던 미약한 복수심마저 사그라져 버리잖아.”
“…이 제국에 있는 모든 것들이 폐하의 것입니다. 마음이 시킨 일을 행하십시오. 모든 걸 다 해봤는데도 폐하의 속이 편치 않으시면, 그땐… 놓으셔야 합니다.”
애쉬의 푸른 안광이 번쩍였다. 급작스레 퍼져오는 살기에 여자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목 위로 조금 끌어당겼다. 목이 잘리는 것 같은 싸늘한 죽음이 스쳐 지나갔다.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살기를 거둬들인 애쉬가 비틀대며 골목 밖으로 빠져나갔다. 금빛이 애쉬의 몸 위에서 발화하더니 이내 형체를 집어삼켰다.
여자는 순간 느낀 아찔함에 이마 위의 식은땀을 닦아 내렸다. 그리고 이벨린과의 만남이 애쉬의 정신을 더욱이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벨린은 애쉬의 기폭제였다. 그의 광기 어린 사랑을 이벨린이 잘 받아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여자는 상상도 하기 싫어 고개를 털어버렸다.
“시종장의 동태는?”
날카로운 저음이 여자의 초점을 꿰뚫었다. 이지적이고 싸늘한 눈이 어느 틈에 여자를 향해 있었다.
여자는 얼을 빼는 대신 능숙하게 애쉬가 원할 만한 답을 찾아내었다.
“안토니의 말에 따르면 로벤스디 공작이 길덴행 배를 타서 자리를 비운지라 납치는 수월했다고 합니다.”
“납치는?”
애쉬의 한쪽 눈썹이 조금 치켜 올라갔다. 그 미세한 변화에 여자의 다음 보고가 천근만근 무겁게 혀 위를 굴렀다.
“로벤스디 공작가의 사생아에 관해 물으니 오랫동안 저택에서 본 일이 없어 잘 모르겠다고 앵무새처럼 대답하다가 아무리 봐도 숨기는 게 역력한 태도에 안토니가 무리하게 심문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안토니의 고문은 펜테리온 최고라 일컬어도 모자람이 없음을 폐하께서도 잘 아실 거라 사료됩니다. 고문 후에도 시종장이 입을 열지 않자 안토니가 도박하는… 셈 치고, 로벤스디 공작이 여동생을 만나러 길덴까지 가는 이유는 뭐냐고 물었습니다. 시종장이 크게 동요하며 그 사생아는 죽었다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댔답니다.”
“그리고.”
보고를 올리던 여자가 잠시 입을 축였다.
“머리가 터져서 죽었다고 합니다.”
* * *
“우웨에엑!”
“불쌍한 쟈스민.”
난간을 붙잡고 연신 오바이트해 대고 있는 쟈스민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뷔페를 어쩌고 어째? 물 한 모금이라도 제대로 삼킬 수 있으면 말을 않겠다, 내가.
“뷔, 뷔페를…….”
난간에서 한 발 떼는 순간 또다시 들려오는 오바이트 소리에 나까지 헛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쟈스민의 등을 퉁퉁 두드려 주면서 바닷물과 하나로 어우러져 가는 토사물을 보지 않으려 시선을 멀리 던졌다.
“뱃멀미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예상했어야지.”
“입… 다물어. 그냥 속이 조금 안 좋은 거뿐이야.”
“그게 그거지.”
배가 항구에 다시 정착하려면 적어도 반나절은 지나야 할 텐데. 쟈스민의 울렁거리는 미래에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더 이상 쏟아낼 것도 없는지 쟈스민은 묽은 타액만 줄줄이 뱉어냈다.
빨래처럼 난간에 걸려있는 쟈스민을 부축하여 선실에 데려다주었다. 2등급 선실인데도 운치가 좋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전면이 통유리창으로 되어있어서 구태여 갑판 위로 올라가 있지 않아도 아름다운 경관을 구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쟈스민은 잔잔한 물결조차 보기 버거운지 침대에 누워 등을 돌려버렸다.
“공연 시작하면 불러줘. 나는 좀 자야겠어.”
“그래. 멀미엔 잠이 약이라더라.”
발치에 굴러다니는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려준 뒤 밖으로 나섰다.
기왕 초호화 유람선에 탑승한 거 제대로 만끽해 보자 하여 우선은 식당으로 향했다. 눈이 휘둥그레 돌아갈 정도로 갖가지 산해진미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깨끗하고 반듯한 백색 접시에 음식을 탑처럼 쌓았다.
혼자 먹어서 미안해, 쟈스민.
턱뼈가 아려올 정도로 맛있다.
접시를 깨끗하게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위가 잔뜩 불어나 거동이 불편할 지경이 되었다. 우욱. 음식물이 역류해 올 것 같음에 서둘러 물을 마셔버렸다.
“와, 이틀은 굶어도 될 것 같아.”
소화도 시킬 겸 거대한 유람선의 내부를 천천히 거닐었다. 내 처지로는 꿈도 못 꿀 금액대의 물건들을 판매하는 경매장도 있었고, 모 디자이너가 선보이는 의복들을 전시해 놓은 곳도 있었다. 하나같이 처음 보는 것들이라 신기함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세트업은 잘 끝났나.”
한껏 들떠있었던 기분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마냥 놀러 온 것만은 아니니까 확인은 한번 해봐야겠지. 어련히 연출이 알아서 잘하겠냐마는 혼자선 아무래도 정신이 없을 것이다. 조연출인 쟈스민도 멀미 때문에 쓰러져 있으니 나라도 가봐야지.
공연이 이루어지는 극장은 유람선의 최하층에 있다. 이 바닥이 뚫리면 바로 바닷속으로 풍덩 빠지게 되는구나. 수영을 못 하는 나로선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심해 공포증이라는 것도 있다던데 나도 그런 건가.
인부들이 망치를 두드리며 무대를 세우고 배경 막을 달고 있었다. 세트업이 끝나진 않았어도 얼추 모양이 잡혀갔다. 밤늦게 이루어지는 공연이니 리허설 시간까지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사라! 잘 와줬어. 쟈스민은?”
연출인 포트 씨가 고유의 흑갈색 콧수염을 나부끼며 뛰어왔다. 저 콧수염만 없어도 인상이 버터 덩어리처럼 느글거려 보이진 않을 텐데. 늘 하던 감상을 습관처럼 하고선 의례적으로 묵례했다.
“뱃멀미가 심해서 선실에서 쉬고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 건 없나요?”
“왜 없겠어. 세트업 인부들 통솔 좀 부탁해. 아무래도 우리 극장보다 무대 폭이 좁아서 위치 잡기가 애매한가 봐. 도면을 줄 테니까 참고하면 돼. 쉽지? 나는 조명이 말썽이라 그쪽을 좀 봐야 할 것 같아.”
“알겠어요. 대신 최종 점검은 꼭 연출님께서 해주셔야 해요.”
“그거야 당연하지.”
인부들 중 한 명이 조명 라인이 이상하다며 포트 씨를 열렬히 불러대는 통해 그는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조명이 정말 말썽이긴 한가 보군.
도면을 들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도면에 표시된 대로 세션을 나누고 대도구를 위치할 곳에 테이핑했다.
“아! 단상은 완전히 못으로 박아두진 마세요. 연출님 오시면 수정할 수도 있어요.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고정해 놓고 센터만 테이핑하면 될 것 같아요.”
포트 씨가 지시한 대로 무대 구조를 잡아가고 있는데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인부들의 거친 말소리와는 사뭇 다른 부류였다.
“오늘 공연을 보시게 될 극장이 바로 여기입니다!”
목청이 큰 남자의 소리에 뒤를 돌았다가 기겁하고 말았다. 화려한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은 귀족들이 극장 문 앞쪽에 고고하게 서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로제타와 쥬디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부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불행 중 다행이게도 내 앞에 반 틈 정도 샤막이 쳐져 있던 덕에 재빠르게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무대 앞으로 점점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에 백 스테이지까지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앗!”
“허억!”
뒷걸음질 치다가 뒤 허벅지에 둔탁한 것이 걸려 나도 모르게 악 소리를 냈다. 황급히 입을 막고 잠시 귀를 기울였다가 선상 내 극장의 위대함을 강조하며 열변을 토하는 목소리에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인부 중 한 명이 쪼그려 앉아서는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내가 부주의한 건 맞지만 그렇게 세게 부딪친 것도 아닌데……. 그러나 손까지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니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저, 괜찮으세요?”
“예, 옙. 괘, 괜찮…….”
무대 작업 진행상 백 스테이지에서 해야 할 일은 끝났다. 이 인부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처럼 무대 밖에 보기 껄끄러운 사람이 있거나, 아니면 일을 하기 싫어서 농땡이를 피우는 거거나.
아무래도 후자가 더 일리 있는 것 같다.
“이쪽에선 작업할 게 없으니 저 귀족 나리들 가시면 나뭇잎 만드는 걸 좀 도와주세요. 매 공연마다 새로 제작해도 배우들이 연기하다 보면 떨어뜨려 버리기 일쑤라서 늘 부족하거든요.”
“예엡, 그, 그럽죠.”
인부는 적잖이 당황해하는 모습이었다. 극단주가 농땡이를 피우다가 걸리면 봉급을 주지 않겠다고 단단히 일렀던 게 최근이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일했던 마당에 잠깐의 농땡이 때문에 봉급을 받지 못하게 되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됐다.
선상 극장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하던 가이드가 “이번엔 간단한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정원으로 모시겠습니다.” 하고 정중히 안내했다. 배에 정원을 가져다 놓으리라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길덴의 영주가 평소에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고상한 취미 어쩌고저쩌고를 부연 설명하며 멀어져 갔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엎어져 있는 인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다시 등을 돌렸다. 그런데 신발 밑창에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나무 틈 사이가 넓게 패어선 그 가운데에 붉은 원통 하나가 툭 박혀있었다.
“암전 때 누가 걸려 넘어지면 어쩌려고.”
손으로 잡아 빼려 했지만 워낙 단단하게 박혀있어서 쉽지 않았다. 이걸 빼내려면 나무판자 하나는 통째로 들어내야 했다. 인부들이 미쳤다고 이것을 일부러 박아 넣은 건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선상 극장 자체에 붙어있는 것 같았다.
함부로 손댔다가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물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얼른 손을 거둬들였다.
포트 씨한테 미리 얘기만 해둬야겠어.
“우우욱!”
간신히 기력을 회복했던 쟈스민이 세차게 흔들리는 배의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금 오바이트했다. 바닥에 손을 짚고 철퍼덕 주저앉아 있는 쟈스민의 머리 위로 벽에 장식되어 있던 액자 하나가 떨어졌다.
내가 쟈스민의 몸을 밀어내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머리를 몇 바늘이나 꿰매야 했을지도 모른다. 쟈스민은 머리에 구멍이 나지 않은 대신 자신이 뱉어놓은 토사물 위를 뒹굴어야 했지만 말이다.
“우욱, 더러워!”
“네 거잖아.”
안색이 파랗게 변한 쟈스민이 제 옷에 묻은 토사물을 툭툭 털어냈다.
쿵!
그 와중에 선체는 한 번 더 기울었다. 사소한 해프닝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부디 내 감이 틀리길 간절히 바라기도 하면서.
갑판 위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에 쟈스민을 부축하고 선실 문을 열었다. 승객들이 공포 어린 소리를 질러대며 복도를 뛰어다니는 탓에 부딪히지 않게 주의해야 했다.
“빙산에 부딪힌 거 아냐?”
“혹한의 겨울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길덴에 빙산은 안 생겨. 게다가 지금은 아직 여름인걸.”
희곡을 지나치게 많이 읽은 쟈스민은 뻗어 나가려던 상상의 나래를 단박에 접었다.
“그럼 왜 배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거냐고!”
“내가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이렇게 당황하지도 않았겠지.”
“승객들을 위한 깜짝 이벤트일 확률은?”
“무엇을 기대하고 벌인 이벤트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획자는 아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거야.”
갑판으로 향하는 통로에 승객들이 개미 떼처럼 모여있었다. 초조한 마음과 다르게 많은 인파 때문에 발걸음이 느려지자 거친 욕설이 곳곳에서 들려오는 건 예삿일도 아니었다.
질서를 지켜 차례대로 대피하라는 선원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에 선원도 겁에 질려있는 기색이었는데 누가 누굴 진정시킨단 말인가.
콰아앙!
또다시 들려오는 굉음에 선체가 눈에 띄게 한쪽으로 기울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람들을 통솔하던 선원이 패닉에 빠져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나마 대열을 유지하던 승객들도 혼비백산하여 앞사람을 마구 밀치며 나아갔다.
“아악!”
누군가에게 부딪힌 쟈스민이 내 팔을 놓치고 복도 바닥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매정한 구둣발이 쟈스민의 손을 밟고 지나가려 할 때에 얼른 팔을 잡아 들어 올렸다.
“괜찮아?!”
“어깨가 욱신거리는 것 빼곤.”
쟈스민과 부딪친 사람은 뒤를 따르던 행렬이 아니라 반대 방향에서부터 뛰어오고 있었다. 그 사람도 뒤로 엎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일면식이 있다고 말하기엔 조금 민망하지만 어쨌든 초면은 아닌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극장 백 스테이지에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던 그 인부다.
인부는 턱을 빼놓고 당황해하더니 다시금 쟈스민을 밀치며 뒤로 뛰어가 버렸다.
“그쪽이 아니에요!”
인부를 잡으려 몸이 조금 튀어 나갔다. 손끝에 옷깃이 스치기 전에 묵직한 것이 밟혔다.
“이건…….”
극장과 식당 바닥에 박혀있었던 원통이었다. 이번엔 어딘가에 박혀있는 모양은 아니었다.
그것을 집어 들자마자 인파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인부가 날렵하게 그것을 채갔다.
“그쪽 거예요?”
“아, 아닙…….”
우물쭈물.
인부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사방을 튀어 다닌다. 대놓고 ‘나 수상해요…….’ 하고 광고라도 하는 모습에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줘요.”
“…….”
“주라니까요?”
말과는 다르게 인부는 원통을 품속 깊은 곳으로 밀어 넣기 바빴다.
“저기요.”
쿠우웅!
뒤에서부터 굉음이 다시 한번 터졌다. 깜짝 놀라 귀를 막고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이명과 함께 섞여 들어간 비명은 무분별하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틈을 타 인부가 사람들을 헤집어가며 내빼었다.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에 곧바로 인부의 뒤를 쫓았다. 뒤에서 쟈스민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린 것 같았는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갑판으로 나가려는 행렬의 끝을 지나 인적이 사라진 복도 깊숙한 곳에 다다르니 인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막다른 벽을 짚고 서있었다.
“하아, 왜 도망가요?”
“저, 저리 가!”
“말투가 바뀌었네.”
지금의 이 소동이 인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에 확신이 든 순간이었다.
인부는 턱 밑으로 땀을 뚝뚝 흘리며 뒷걸음질 칠 곳 없는 벽을 발뒤꿈치로 계속 비벼댔다.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다 터뜨려버릴 줄 알아!”
“…이 배를요? 그런 미련한 짓을 왜 해요!”
“시, 시끄러워!”
황족이 타고 있는 배를 침몰시키려고 하는 의도는 현 황권에 대한 반역임이 틀림없었다. 내가 말한 미련한 짓의 범위는 함께 배를 타고 있는 인부의 안전도 보장이 안 될뿐더러, 만일 운 좋게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차라리 그때 죽는 게 나았을 거라며 후회스러운 고문을 당하게 될 것을 포함한 것이다.
한 발자국 다가서자 인부…는 아니지, 남자가 몸서리치게 놀라며 품에 감싸고 있던 원통을 떨어뜨렸다.
뭐 이렇게 허술한 반역자가 다 있어.
화들짝 놀란 남자가 그것을 주우려고 했으나 내가 빨랐다.
“내놔! 함부로 만지지 마!”
남자가 내 손목을 잡아채며 원통을 힘으로 빼앗으려 들었다. 뺏기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버텼으나 남자의 힘을 이기기란 어려웠다.
원통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찰나 그것을 천장 위로 높게 던져버렸다. 재빠르게 튀어 나가 주울 심산이었다. 그 순간 남자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더니 살기 어린 눈이 정확히 나를 향했다.
“…….”
“건드리지 말랬지!!”
일순 남자의 눈이 붉게 변했다. 동시에 내 뒤로 날아갔던 원통이 발열하듯 빛을 뿜어대더니 콰앙! 거친 굉음이 터졌다.
“……!”
머리 위로 재와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원통이 닿았던 천장 위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폭탄이 던져진 천장, 즉 바로 위층에 있던 승객 중 한 명이 폭발에 휘말려 버렸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잔해들 사이에 피와 살점이 엉켜들어 있었다.
“…다, 당신. 이게 뭐야?”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남자는 아연실색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 이럴 생각은 아니었…….”
“뭐 한 거냐고!”
주저앉은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묻자 급기야 남자는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겁에 질린 모습으로 오열하는 작태를 보였다.
“그냥 겁만 주면 된다고 해서……. 아무도 다치는 사람 없이 다 무사히 구조될 거라고 해, 했는데…….”
“뭐?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마, 말 못 해. 무사히 일을 끝마치고 돌아가면… 마탑에 들어갈 수 있는데…….”
“…….”
“그래… 내가 언제 마탑에 들어가서 일해 보겠어.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되지. 안 돼.”
남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징조가 좋은 것만은 아니라 남자의 뺨을 내리쳤다. 그러나 남자는 내가 멱살을 흔들면 흔들리는 대로 두었고, 때리면 맞았다. 잠잠하던 눈동자가 다시금 붉게 변하게 되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니었다.
쾅! 쾅! 쾅! 쾅!
폭발음과 함께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댔다. 전에 없을 세찬 강도로 선체가 마구 흔들린다. 유람선의 자랑이었던, 경관이 훤히 내다보이는 통유리창은 날카로운 조각이 되어 바다 위로 흩뿌려졌고 그 너머로 바닷물이 넘실대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이 정도 속도라면 배가 침몰하게 되는 건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남자를 붙잡아둔 채로 입씨름이나 할 수만은 없었다! 바닷물에 잠겨 익사하기 전에 갑판 위로 올라가는 게 먼저였다.
남자를 끌어 올리려 했으나… 뭐 이리 무거워!
“뒤지기 싫으면 움직여요!”
“주, 죽긴 왜 죽어. 황족이 타고 있는 배라서 금방 구조대가 올 건데!”
“그러니까! 구조대가 오기 전까진 버텨야 할 거 아니야!”
선악의 구분이 없는 투철한 정의감 때문에 남자를 데리고 나가려는 것이 아니었다. 뒤에서 지시를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선 남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요지부동, 움직일 생각이 없는 남자에게 오랫동안 힘을 쓰고 있을 만큼 배 안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욱하는 마음에 남자의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후려쳤다. 이대로 보내줘야 한다는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혼자 뒤지든지 말든지!”
물이 허리께까지 차오른지라 갑판 위로 내달리는 다리가 생각처럼 빠르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신발 안으로 물이 스며들면서 화상 자국이 다시 쓰라려 온다. 젠장.
우여곡절 끝에 갑판 위로 올라섰을 땐 이미 선체의 반이 기울어 바다 아래로 처박혀 있는 시점이었다. 사람들은 바다 밑으로 떠밀려 가지 않으려 품위도 잊은 채 온 힘을 다하여 난간 위에 간신히 매달렸다.
기우뚱―
무언가를 잡지 않고선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의 경사가 급해졌다. 나도 황급히 가까이에 있는 난간을 붙잡았다.
콰앙!
이때 다시 한번 폭발음이 들렸다.
“그 미친놈이!”
난간을 붙잡지 못했거나, 폭발음에 놀라 손을 놓친 사람들은 모래시계 안의 작은 알갱이처럼 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아래로 쓸려 내려갔다.
“허억!”
하체가 부웅 떠오르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그 아찔함에 손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난간을 꽉 쥐었다.
하늘은 속도 없이 맑았다. 구름이 자리를 비켜주어 수많은 별이 제 빛을 바다 위에 흩뿌릴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여유롭게 난간에 기대어 샴페인 한 잔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는 정취를 즐겨야 했으나 지금은 잔잔한 하늘이 얄밉기만 하다.
“으어억!”
데굴.
둔탁한 것이 정확히 내 몸을 향해 굴러왔다. 충격에 대비하여 눈을 질끈 감았으나 시간이 지나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발목에서 느껴지는 억센 무게에 하마터면 손을 놓칠 뻔했다.
“마마……?!”
내 발목을 생명줄처럼 잡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로제타였다. 로제타의 가는 팔목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위태해 보여서 도저히 손을 뻗지 않을 수 없었다.
“잡아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힘을 주고 있던 로제타의 눈이 일순 크게 뜨였다.
휘청!
배가 빠르게 가라앉으며 몸이 허공에 부웅 떠올랐을 때 로제타가 황급히 내 손을 잡아챘다. 우리의 몸은 난간을 사이에 두고 갑판 밖으로 튕겨 나갔다.
저 멀리서 구조선의 불빛이 희망처럼 번쩍였다. 안도감이 찾아들면서도 구조선이 이곳까지 올 동안 내가 로제타를 매단 채 버틸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함께 들었다.
“으윽!”
발밑으로 별의 부스러기와 깨진 유리창이 번쩍거렸다. 바다 밑으로 떨어진 몸을 난도질할 것 같은 예리함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손에 힘이 풀려간다.
안 돼!
의지를 발휘하여 난간을 붙잡은 손에 거듭 힘을 주었지만 현저히 떨어져 가는 체력을 당해 내진 못했다. 어깨가 빠진 채로 바다에 집어삼켜질 미래가 그려진다.
조금만 버티자. 이제 곧이야. 제발, 조금만!
“반짝반짝.”
“윽, 뭐라고요?”
로제타가 큰 소리로 말했다.
“꿈에 나온 장소요! 여기였어요! 당신은 여기서 죽을 운명이 아니니 나 혼자 이 바닷속에 뛰어드는 게 맞아요. 그래야 꿈과 일치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5년 전에요! 반짝반짝거리는 밤하늘 아래로 뛰어드는 꿈을 꿨다고 했었잖아요!”
아, 이 기시감이 어디서부터 느껴지나 했더니, 5년 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긴 있었다. 아카데미 축제 날에 돌연 창문 밖으로 뛰어드는 로제타를 겨우겨우 구해 냈었지, 참.
“제 손을 놔요!”
“…미쳤어요?!”
그깟 꿈 하나 때문에 죽겠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로제타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놔요! 같이 떨어지기 싫으면!”
“싫다니까요!”
“당신은 이곳에서 죽을 목숨이 아니에요! 계속 저를 붙잡고 있다간 꼼짝없이 바다 아래로 떨어져 버린다고요! 여기서 죽는 건 저 혼자면 돼요!”
“으윽, 헛, 소리 좀 하지 말아요! 꿈이 뭐라고 죽으라 마라야. 그건 다 개꿈이라고요!”
“놔요, 이벨린.”
정말이지 죽기보다 놓기 싫었다. 그놈의 꿈꿈꿈.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운명이 누군가에 의해서 미리 정해져 있었다는 것도 엿 같고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그리고 치려고 하는 지금 내 모습이 다 부질없는 것이라 폄하되는 것도 싫었다.
필연이라고? 그런 건 다 배부른 자들이 배곯는 자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개소리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쓰이다가 죽는 소모품이 아니다. 그러니까 절대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마마께선, 지금 당장, 윽, 눈을 감으셔도 괜찮으세요? 곁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그 빌어먹을 운명이 만족스러우시냐고요!”
“…….”
“전 아니에요! 다른 것도 아니고 눈만 뜨면 사라질, 고작 그런 꿈에 휘둘리는 건 질색이라고요!”
“…….”
“그러니까 마마께서도… 악!”
절대로 손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것이 허무하게 일그러져 버렸다. 손등 위로 퍼지는 강렬한 통각과 손을 놓아 버렸다는 낭패감에 일순 머리가 멈춰 섰다.
검은 바다 위로 내던져지는 로제타는 마치 짐승에게 바쳐진 제물 같았다. 손등 위에 꽂아 넣은 브로치 핀이 그녀가 남기는 마지막 유품이라도 되는 듯이 아연하게만 느껴진다.
안 돼…….
이성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로제타를 살려내야 한다는 생각만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난간에서 손을 떼고 반짝거리는 바다 위로 몸을 내던졌다. 풍덩― 검은 물, 차단된 소음. 멀어져 가는 로제타. 팔다리를 미친 듯이 움직여 로제타에게 다가갔다.
로제타는 저항하지 않고 몸을 늘어뜨리고만 있었다. 로제타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자꾸 비켜 나가기에 크게 발을 휘저어 앞으로 나아갔다.
드디어 로제타의 손을 마주 잡았을 때 이성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고 나는 수영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와 로제타는 함께 가라앉고 있었다.
커다란 달이 보이는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검은 바다를 뿌리칠 순 없었다. 고통스레 숨이 막혀왔다. 몸의 혈관들이 다 터져서 너덜거리는 것만 같다. 이토록 죽음이 가까이 드리운 적은 없었는데, 이런 기분이구나. 고요하고 또 괴로워.
시야가 어둠으로 물드는 와중에도 로제타와 맞잡은 손은 절대로 놓지 않으려 했다. 내 의식의 마지막, 내 신경의 마지막을 손에 집중했다.
출렁―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는 검은 물이 눈 위를 덮었다.
‘애쉬.’
이곳이 바닷속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관자놀이 옆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녀석이 보고 싶다.
의지도, 체력도 모두 사라져서 집어삼켜지고 있는 몸을 내버려 두었는데 돌연 거센 힘이 내 등을 떠받치고 부유하는 느낌이 들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건가.
몽롱한 정신 속으로 찬란한 금빛 하나가 파고들었다.
* * *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살았다. 그것도 사지 멀쩡하게. 정신도 온전하고 컨디션도 괜찮다.
처음 눈을 떴을 땐 천국에 있는 줄 알았다. 예쁜 금발을 가진 천사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 눈이 황홀했다. 그래, 살아생전 개고생만 했는데 신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지옥으로 보내진 않아야지.
천사는 애쉬를 닮았다. 만지면 매끈한 표면이 느껴질 것 같은 푸른 눈 하며 살짝 말려 올라간 붉은 입꼬리, 울림 있는 낮은 목소리까지. 잘생긴 얼굴을 더 보고 싶었는데 몸에 점점 힘이 빠졌고 눈이 감겨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곳은 익숙한 곳이었다. 머릿속에 깔려있었던 자욱한 안개가 확 걷히고 산뜻한 기분마저 들었다.
또렷한 눈으로 기숙사 방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웬 남자가 폭발을 일으켰고 난 자살하려던 로제타를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그러길 1분이나 지났을까. 복도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이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주려 몸을 일으켰는데 시야가 한 번 뒤집혔다.
아고, 머리야.
엎드린 채로 이마를 베개에 묻고 있다가 침대 헤드를 잡아 몸을 일으켰다. 벽을 지지대 삼아 걸으며 문을 여니 멀어져 가는 쟈스민의 뒷모습이 보였다.
인기척에 쟈스민이 고개를 돌렸다.
“깨어났구나!”
그뿐만 아니라 극단주, 포트 씨, 출연 배우들까지 우글우글 모여있었다.
“예, 제가 살아있긴 한가 보네요. 그런데 다들 여긴 어쩐 일로…….”
극단주가 쟈스민을 어깨로 밀치곤 내 앞에 섰다. 옆으로 엎어진 쟈스민이 씨근덕거리며 극단주를 노려보다가 나를 향해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저 새끼 말 듣지 마.’
“사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침몰하는 배 속에서 얼마나 무서웠니. 그곳에 어린 네가 아니라 내가 갔어야 한다는 후회가 들어서 앓아눕기까지 했단다.”
극단에 입단한 5년 동안 극단주에게 걱정 비슷한 것도 받아본 적이 없던지라 지금 상황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후회는 무슨, 다행이라고 생각했겠지.
“아, 예, 뭐.”
얼버무리며 답하자 극단주가 내 두 손을 꼬옥 포개어 잡았다. 히익! 부담스러움과 불편함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왜, 왜 이래?! 독감에 걸려서 끙끙 앓았을 때 그 사실조차 몰랐던 사람이!
“아무래도 걱정돼서 안 되겠어. 이제부터 내가 널 직접 돌봐주겠다. 내 양녀가 되어라!”
“예에?!”
쟈스민이 사레들린 것처럼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끄억, 기침해 대었다.
나는 잡힌 손을 힘들게 빼내어 손사래 쳤다.
“저 성인인데요! 괜찮습니다.”
“걱정돼서 그렇다니까.”
“그게 양녀가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인지…….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극단주는 포기를 몰랐다. 여차하면 강제로 관공서로 끌고 갈 기세였다. 이때 쟈스민이 끼어들었다.
“어? 사라, 왜 그래. 아파? 머리가? 저런, 정신 좀 차려봐!”
멀쩡히 서있던 나는 쟈스민의 의도를 파악하고 재빠르게 이마를 짚었다. 비틀, 비틀, 쟈스민에게 기대어 쓰러졌다.
“극단주님, 아무래도 오늘 사라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으니 다음에 얘기하심이 나을 것 같으세요.”
“아니, 그래도…….”
“지금은 사라의 건강 상태에 유의해야 할 때예요. 폐하께서 명하신 걸 불충스럽게도 잊으신 건 아니죠?”
폐하 소리가 나오자 극단주는 단번에 꼬리를 감추고 물러났다.
쟈스민이 나를 간호한다는 핑계로 모두를 보내버리고 방에는 나와 쟈스민 둘만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살아남게 된 거, 극단주가 미쳐버린 거, 폐하께서 널 극진히 간호하라고 명한 것 중에 뭐가 궁금한데?”
“전부.”
쟈스민은 방문 앞에 쌓여있는 신문 중 몇 개를 골라 건넸다.
“그걸 읽으면 웬만한 궁금증은 다 해결되겠지만 설명해 줄 수도 있어.”
“듣고 싶어.”
신문엔 사진 한 장이 크게 박혀 있었는데, 침몰하던 유람선이 하늘 위로 둥실 떠오르고 있는 신비한 모습이었다.
쟈스민이 해준 이야기는 이랬다. 배가 완전히 가라앉기 직전 다행히 구조선이 도착하여 구조 작업을 시작했으나 워낙에 큰 유람선이라 최대한 신속하게 구조를 진행한다 한들 배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것을 막기는 어려웠다.
유람선에 갇힌 사람들이 사경을 헤맬 즈음 기적처럼 배가 떠올랐다고 한다. 바다에 빠졌던 사람들도 전부 다.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얘기했다. 신이 인간을 구원해 주기 위해 강림한 것이라고. 신의 정체는 서대륙의 황제 애쉬였고. 구조하던 이들은 넋을 놓고 바다 위를 걷는 애쉬를 구경만 했다고 한다.
나는 바보같이 “황제 폐하께서? 그러니까 배를 통째로 건져 올린 게 폐하셨단 말이야? 펜테리온의 황제가 둘은 아니지?” 하고 물었다가 기억과 관련된 뇌의 어느 부분에 손상이 간 것 아니냐며 쟈스민의 진지한 걱정을 받아야 했다.
“폐하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마법을 쓸 수 있겠어.”
아카데미 재학 시절 교수들이 입을 모아 애쉬의 마법 실력을 칭송했던 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애쉬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능동적으로 일을 해결했다는 말을 들으니 영 매치가 되지 않아서 조금 곤혹스러웠다.
이것은 서대륙을 통일시킨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서대륙 통일은 솔직히… 너무도 큰 스케일이라 소시민인 나에겐 막연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히비카는 펜테리온과의 전쟁을 피하고 흡수된 나라이기 때문에 나는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채 신문에서 퍼다 나르는 것만 눈으로 읽었을 뿐 아무것도 체감되는 것이 없었다. ‘애쉬’가 이뤄 냈다기보다는 ‘펜테리온’이 이룬 통일이라 하는 게 더 적합한 주체 같았다.
하지만 이번 유람선 침몰 사건 같은 경우는 내가 그 배에 타고 있었던 당사자이기도 하고 실제로 죽음의 문턱에 발을 찍고 오기까지 했으니 현실성을 따지자면 이쪽이 더 와닿았다.
“그… 마법이라는 게 말이야. 유람선 한 척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고 하는 게 흔한 걸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여길 읽어봐, 현 대마법사이신 우디멜 님께서도 단 몇 초 만에 유람선을 바닷속에서 끄집어내는 마법을 시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시잖아.”
“대마법사님이 사실은 뒷돈 주고 칭호를… 아니지. 그래, 내가 헛소리했다.”
애쉬는 내가 마냥 보호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님을 이제 와 조금… 깨달아 버렸다. 고정관념이라는 게 이렇게나 무서운 거구나.
그러고 보니 5년 전에도, 지금도 애쉬는 지금의 나보다 무엇 하나 뒤떨어지는 게 없었다. 아, 내가 나이는 세 살 더 많다. 제국사도 더 잘 알고. 지금은 거의 잊어버렸지만.
여하튼 나이가 많다는 것과 교과목 중 하나를 조금 더 잘 안다고 해서 그것이 대마법사를 능가하는 마법 천재 황제를 보호할 위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먹이 사슬로 따지자면 애쉬가 여러 방면으로 정점에 있다는 건 알겠는데… 여전히 매치가 되지 않는다.
“헛소리라는 걸 알아서 다행이네. 무튼 중요한 건 우리 폐하께서 무려 널 안고 있으셨다는 거야!”
쟈스민의 목소리가 조금 들떠있었다. 그게 뭐? 라고 대꾸하려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의식을 잃은 대공비마마를 안고 계셨는데 네가 대공비마마의 손을 놓지 않아서 폐하의 한쪽 팔에 안겨보기도 하고. 출세했다, 너!”
“그다음엔 어떻게 됐어?”
내 미적지근한 반응에 실망했는지 쟈스민이 “놀랍지 않아?”라고 물으며 반응을 강요했다. 의식이 없어서 실감 나지 않는다고 둘러대는 것으로 쟈스민을 납득시키니 그녀는 “그건 또 조금 안타깝네…….” 하며 연민을 표했다.
“대공 전하께서 마마를 데려가시고 너도 폐하와 함께 영주 성으로 갔어. 다음 날 신문이 발간되기도 전에 네가 대공비마마를 구하러 바다에 뛰어들었단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네 충심에 감동한 폐하께서 손수 간호해 주셨다고 하니 말 다 했지, 뭐. 다들 네가 곧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어. 아예 길덴의 영주가 될지도 모른다고까지 이야기가 돌고 있다니까?”
“뭐? 말도 안 돼.”
“이번에 유람선 관람을 주최한 게 영주님이잖아. 안전 상황 대비에 미흡해서 황족을 수장시켜 버릴 뻔했는데 그냥 넘어가겠어? 작위는 사고 당일날 바로 박탈당했고 이후 처분을 기다리는 중이래. 사형을 피하진 못할 거라고 하더라. 어떻게 죽느냐가 관건이겠지. 폐하의 분노가 극에 달해서 곱게 죽진 못할 거야.”
비어버린 길덴 성 영주 자리에 로제타를 구하러 바다에 뛰어든 날 앉힐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3년 만에 내 이름을 겨우 외웠던 극단주가 양녀 어쩌고 운운하던 것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가만, 폐하께서 날 영주 성으로 데리고 가셨다며.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쟈스민이 신문 귀퉁이에 난 기사 몇 줄을 가리켰다. 대공비마마를 위해 망설임 없이 바다로 뛰어든 성신 어쩌고―로 시작된 기사는 나도 모르던 내 건강 상태에 대해 줄줄이 읊어놓았다.
간추려 얘기하자면, 몸에는 전혀 이상이 없으나 재난 트라우마를 겪을 가능성이 다분하므로 영주 성에 있는 것보단 익숙한 곳에서 잘 자고, 잘 먹고, 푹― 쉬는 게 낫다 이거다.
사건 날부터 하루 하고도 반나절 동안 영주 성에서 힐링을 받던 나는 그다음 날 아침 이곳으로 옮겨졌고 반나절 더 잠을 자다가 깨어난 게 지금 이 상황이라는 거지…….
덧붙여 난 의원들이 우려하던 재난 트라우마 같은 건 생기지 않은 듯싶다. 온갖 불행을 다 겪고 살아서 그런가. 공포와 불안은 물론이고 그 비슷한 것도 생기지 않았다.
“몸은 진짜 괜찮은 거야?”
“처음 눈 떴을 땐 머리가 조금 어지럽긴 했는데 지금은 괜찮아.”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어서 그랬을 거야. 그래도 우리 둘 다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네가 갑자기 선실 복도로 뛰어가 버렸을 땐 얼마나 놀랐는데.”
“아……!”
범인! 상황이 급박했던지라 결국 선실 복도에 두고 나와 버렸는데… 죽었을까? 애쉬가 배고 사람이고 전부 건져 올렸다고 하니 죽었더라도 시체는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신문 기사를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사고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폭발형 아티팩트가 배 곳곳에 설치되었던 흔적을 발견했고 그 시전자는 끝끝내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유람선에 승선했던 승객들의 신원 조사를 진행하여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자를 간추려 보았으나 이들 모두 사고 당시의 알리바이가 확실하고, 애당초 승선 시에 신원 검사가 까다롭지 않았기 때문에 명단에 미등록된 사람이 저지른 범행일 가능성도 있었다.
이번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현 황권에 대한 반역임이 틀림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루라도 빨리 범인을 잡아야 하는 게 맞으나 현재로선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는 글을 마지막으로 범인에 대한 기사는 끝났다.
살아있는 게 분명해.
마법사들은 모두 알리바이가 있었다, 라고만 했지 사망한 자들 중에 마법사가 있다는 내용은 없었다.
남자는 명단에 미등록된 사람일 거야.
이거, 목격자가 나 하나뿐인 것 같은데…….
“왜 그래?”
“나 이번 사건의 범인을 봤거든.”
“뭐?!”
쟈스민이 흥분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는 “누군데?!”를 반복해 말했다.
“누구라고 물어봐야 말해 줄 것도 없어. 얼굴 본 게 전부인걸.”
백 스테이지에서 처음 만난 일, 복도 선실에서 만난 일까지 전부 털어놓자 쟈스민이 자리에 일어서서는 내 손목을 강하게 쥐었다.
“당장 영주 성으로 가자!”
“갑자기?”
“범인을 봤다고 얘기해야 할 거 아니야.”
“아. 뭐, 그래야지.”
물론 말할 생각이었으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따로 애쉬를 만나 얘기하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애쉬를 언제 만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굳이 애쉬에게 직접 전달해야 하는 이야기도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