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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독과 해독 (1) (27/42)

13. 독과 해독 (1)

황제의 자존감을 훔쳐서 달아난 주인공은 기대했던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훨―씬 별 볼 일 없었다.

말라비틀어진 남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싹싹 빌고 있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다. 예쁘장하긴 하다만 폐하 옆에 서면 그마저도 빛을 잃어버릴 게 분명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미색이었고, 과연 얼마나 콧대가 높길래 감히 폐하를 뻥 하고 차버렸을까 했는데.

‘이, 이거 놔. 안 놔? 어디 거지 같은 게!’

‘맞아요. 저 거지 맞습니다!’

‘자존심도 없냐! 떨어지라고!’

‘거지가 거지라고 불리는데 자존심이 왜 필요합니까.’

라고 애걸복걸하는 꼴이라니.

여자는 이벨린을 찾기 위해 로벤스디 공작의 행적을 5년 동안이나 조사했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저자가 아니라고 해주십시오. 흑발이 흔치는 않지만 아예 없진 않으니 단순히 머리 색만 같은, 전혀 관계없는 인간이라고 하고 무시해 주십시오.

그렇다고 하기엔… 얼음 가면을 뒤집어쓴 듯 냉랭하기만 했던 애쉬의 얼굴에 극심한 동요가 드러나 있었다. 애쉬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건 여자를 포함해 눈치를 말아 먹은 길덴 성의 영주 또한 알아챌 정도였다.

눈 깜빡임 한 번에 이벨린이 사라질까, 애쉬는 이벨린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 하얀 손, 작고 둥근 어깨 모두를 빠짐없이 눈동자 속에 새겼다.

집착 어린 눈동자에 사로잡혀 있던 여자는 경악에 차 소리를 지를 뻔했다. 살과 뼈가 나뒹구는 전장에서도 덤덤하기만 했던 벽안이 축축해져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회의 기쁨인가. 아니, 그것보다는 복잡해 보인다. 그렇다면 분노에 찬 눈물? 이편이 더 가까울 수 있겠으나 또 마냥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애처롭다.

애쉬의 눈은 점점 벅차오르고 있었다. 그것이 아슬아슬한 경계를 지나 정점에 다다랐을 때 눈꺼풀이 감정을 내리눌렀다. 다시 느리게 뜨인 눈은 이전과 같은 싸늘함이 담겨있었다.

여러 갈래로 찢겨 분출해 나온 감정을 하나로 통일시킨 애쉬가 이벨린을 향해 걸어갔다. 걸음걸음마다 분노가 떨어져 땅 위를 구른다. 이벨린에게 다가갈수록 애쉬가 무뎌지고 있음을 여자는 눈치챘다.

그러나,

“웬 잡귀가 하나 있구나.”

낮게 내뱉어진 목소리엔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 만큼의 분노가 깊숙이 깔려 있었다.

여자는 애쉬가 이대로 이벨린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벨린을 기절시켜 영주 성에 데려와 집무실 소파에 눕혀 놓기까지 할 줄이야. 집무실엔 여자와 애쉬 그리고 이벨린까지 셋뿐이었다.

여자는 안토니가 로벤스디 공작가가 설립한 고아원의 봉사자로 위장 잠입했다는 내용을 상세히 보고했다.

“…경계가 심하여 위장에 난항을 겪었으나, 고아 출신의 서민이라는 점과 뒷골목 용병단에 속해 일하면서 매춘에 쓰일 사람들을 납치하고 넘기는 일을 하며 돈을 벌어왔다고 거짓말했답니다. 지난날의 일을 반성하는 취지로 봉사하게 해달라고 하니 그제야 받아 주었답니다.”

고아 출신이라는 문서를 새로 만들어 증명하고, 뒷골목 사정에 대해 줄줄이 읊은 후에야 고아원 사람들은 안토니를 받아주었다. 그렇다고 경계를 푸는 건 아니었지만.

참 웃기는 일이다. 신원이 분명하고 행적이 청렴한 사람은 받지 않는 고아원이라니. 안토니의 말로는 외부 사람이 봉사자로 들어온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라며 그 어려운 것을 자신이 해낸 거라고 떵떵거렸다.

여자가 봤을 땐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귀족이나, 살기 바쁜 서민이나 신전에서 운영하는 것도 아닌 고아원에 봉사하러 간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일뿐더러 하물며 안토니가 꾸며낸 정도의 서사를 가진 사람이 봉사를 자원한다는 건 모르긴 몰라도 안토니가 최초일 것이다.

애쉬는 특이 사항을 발견하는 즉시 보고할 것을 명하고 소파 위를 응시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애쉬의 마음을 읽어보려 머리를 굴리던 여자는 애쉬가 전조도 없이 벌떡 일어서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애쉬는 자신의 허리춤에 달려있던 검을 뽑으며 이벨린을 향해 걸었다. 서슬 퍼런 칼날이 이벨린의 여린 피부 위에 놓였다.

“죽여버릴까. 죽이면 좀 나아질까.”

여자에게 묻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여자는 답하지 않았다.

애쉬의 싸늘한 목소리와 다르게 그의 검은 이벨린의 피부 위를 스치지도 못했다. 그뿐인가. 하얀 목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배 아래가 욱신거린다. 보기에도 마른 저 몸을 품에 안아 가둬버리고 싶고, 부드러운 피부에 입을 맞추고, 코를 묻어 냄새를 맡고 싶다.

핥아 올리면 몸을 바르작 떠는 귀에 대고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벨린을 찾아다녔는지, 지독한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텨왔는지 속삭이고 싶다. 죄책감으로 미안하다 울부짖는 이벨린을 본다면 그땐 이 구역감도 퍽 상쾌하게 느껴질 것 같다.

얌전히 누워있던 이벨린이 인상을 쓰며 몸을 틀었다. 날카로운 검 끝에 뺨 위가 긁힐 뻔하여 애쉬는 황급히 검을 거두어들였다. 솜털 하나 다치게 하지 않았음에도 애쉬는 몇 번이고 이벨린의 뺨을 살폈다.

그러다 자신의 미련한 행동에 환멸을 느꼈다.

5년을 절망 속에서 죽지도 못하게 한 여자다. 그를 외면하고, 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꾸며내 나락의 끝으로 떨어뜨린 여자다.

…그러니 분노해야 마땅한 것인데 왜 이렇게 애틋하게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바보처럼 제 감정을 다 건네주었다가 또다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애쉬는 무서워졌다.

버릴 수 없게 만들자. 그의 손에 들어왔으니 이제 애쉬의 것이다. 제 마음은 하나도 건네지 않은 채 이벨린의 전부를 갖겠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라.”

이벨린을 보고 있다 보면 단단하게 걸어두었던 문 너머로 빛의 부스러기 같은 감정들이 새어나갈 것 같았다. 한번 터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끝을 모르고 크기를 부풀려갈 것이 빤했고, 그것을 주워 담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애쉬는 문밖으로 내동댕이쳐져선 다신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절대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어놓도록 해.”

단단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다시 버려지지 않기 위해선 감정의 나약한 속살을 숨겨야만 한다.

* * *

여자가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용기가 없어서 실행하지 못했을 뿐이다. 시선이 발목에 매여있는 족쇄로 떨어졌다가 길게 늘어진 사슬로 옮겨졌다.

애쉬가 정말로 나를 철저하게 외면할 생각이었으면 이 족쇄도 풀어버려야 했다. 애쉬가 나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분에 넘치는 희망이 차올랐다.

여자에게 인사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족쇄에 이어진 사슬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점차 빨라져서 종내에는 폴에게서 멀어지려 달음박질했던 것보다 더욱 빠르게 뛰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목이 따가워서 피를 토해 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에 다다랐을 때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사슬의 길이가 한눈에 다 담길 정도로 짧아져 있는 게 보였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았으나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렇게도 잘 뛰어다녔던 발에 가시가 박힌 듯 따끔거렸다.

시선을 발끝에 고정한 채로 가쁜 호흡만 핑계처럼 내뱉고 있는데 짧아졌던 사슬이 무심하게도 다시 길어지고 있었다.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입가에 맴돌고 있던 말들 중 하나가 혀끝에 걸려 튀어나온다.

“나 때문에 상처받지 마…요.”

아차 싶어서 구차하게 어미를 바꾸었다. 볼이 화끈거린다.

용기 내어 꺼낸 첫마디가 내가 느끼기에도 너무나 뻔뻔한 것이라 입을 내리치고 싶었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상처받지 말라니. 받는 상처를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하물며 황제라 하더라도. 한 짓에 대해 반성하기보다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말에 자괴감이 들었다.

“제 말은… 저 같은 거한테 마음 쓰지 마시라구요. 5년 전의 저는 빨리 잊으시고 폐하께서 상처받지 않았으면 해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뭐든…….”

촤르륵―

절대 좁혀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사슬의 간극이 순식간에 짧아졌다. 검은 구둣발의 앞코가 스치듯 닿아왔다. 머리 위에 달을 가린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네가 누군데.”

“…….”

무거운 음성이 날카롭게 심장을 파고들어 갔다. 5년 전 깊게 베였던 상처는 아물지 못했고 꾸준히 그 크기와 깊이를 더해 가다가 툭 건드렸을 뿐인데도 그 안에 뭉쳐있던 고름이 끝도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애쉬를 위하여 결정했던 선택은 절대로 애쉬를 위한 게 아니었으며 그것은 흉하게 나약해진 과거의 내가 고상한 핑계를 가지고 도망치기 위한 비겁함이었을 뿐이었다는걸.

만일 이 모든 것을 알고 5년 전의 그날로 돌아간다고 한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떤 방향으로든 애쉬를 상처 입히는 데에는 변함없을 것이다. 나 같은 걸 아예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아파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후회는 시간을 거스를수록 층층이 쌓여갔다.

“죄송합니다.”

“왜 사과하지?”

“…….”

“말해.”

“폐하께서 아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왜!”

애쉬가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고 제 품 쪽으로 끌어당겼다. 누군가 보았다면 포옹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런 다정한 의미는 아니었다. 어쩌면 더 로맨틱하고 어쩌면 텅 빈 밑바닥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낸 절박한 몸짓 같기도 했다.

애쉬의 목소리에는 거짓이 없었다. 내 존재를 부정하며 몰아세우는 말을 하곤 있지만 내가 다시 다가와 주길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그러면 못 이기는 척 혹은 지난 5년의 상처를 덮어 두고라도 다시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도 분명해서 마음이 아려왔다. 제발 한 발자국만 다가와 달라고 엉엉 울부짖는 것처럼 보였다.

애쉬의 마음을 고스란히 눈치챈 나는…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들 정도로 비겁해졌다. 진심으로 기쁘고 설레는 이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폴을 만나 푸닥거리했던 일마저 전부 잊을 정도로 공허했던 내면이 틈도 없이 메워졌다.

그러나 말했듯이 나는 비겁하다.

“좋아하니까.”

“…….”

애쉬의 떨림이 어깨 위에서 느껴지자 부풀었던 마음이 빠르게 쪼그라들어 갔다.

고개를 들어 황제가 아닌 애쉬의 눈을 마주 보았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늘 공격적인 모습을 위장했던 벽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안에 숨겨진 작은 기대감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널 내가 많이 좋아해. 5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

“그런데 넌 그러지 마. 좋아하는 건 나 혼자 할게.”

애쉬의 벽안이 색을 잃는 건 순식간이었다.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녀석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질이야.”

“아마… 아니 장담컨대 평생 동안 널 좋아할 거야. 네가 수도로 떠나버려도 내 밤에는 늘 네가 있을 거고, 허공에 손을 뻗어가면서 널 끌어안아 보기도 하겠지. 이 미련한 짓은 나 혼자만 할 테니까. 넌 날 잊어.”

잡힌 어깨가 욱신 아파왔다. 녀석이 느끼는 혼란을 비롯한 복합적인 감정들이 빠짐없이 전해진다.

“고작 이딴 소리나 지껄이려고 여길 찾아온 거야?”

“너도 날 기다렸잖아. 호위 기사 한 명 없이 이 언덕에 오도카니 서서. 많이 기다렸어? 너무 늦게 왔지, 미안해. 그런데 이제 이런 것도 하지 마.”

“…….”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지? 하나만 알려줄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죽어. 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게 미안해서라도 더 이상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않기로 했거든. 특히 너처럼 과분하고 큰 사랑은 더욱 안 돼.”

“그만 얘기해.”

“갑자기 고백해 놓고 발 빼는 거 진짜 비겁하지. 그런데 기왕 비겁한 김에 조금 더 비겁해져 보려고 해.”

“입 다물어.”

“네가 길덴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좋아한다고 몇 번이고 고백해도 될까? 네가 질려서 나를 버리고 수도로 떠나는 그 순간까지 말이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

“우리의 입장이 반대가 되는 거야. 혹시 나에게 품은 감정이 애증이라면 증오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버려. 체증이 다 가라앉혀지도록 복수할 기회를 줄게. 내 마음은 진심이고, 네가 날 모질게 버리면 엄청나게 상처받을 테니까. 나에게 복수해, 애쉬.”

널 위한답시고 멋대로 행동해 버렸던 지난날 나에 대한 최악의 형벌이자, 트라우마로 남은 너의 갈망을 해소시켜 줄 유일한 사죄는 이것뿐이야.

<그놈을 책임져야 하는 이유>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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