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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불안정한 서로는 서로를 망가뜨릴 뿐이다 (2) (25/42)

11. 불안정한 서로는 서로를 망가뜨릴 뿐이다 (2)

애쉬가 발기했던 해프닝 이후로는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긴 한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심장 부근을 몇 차례 두드려 팼다.

아, 그러고 보니.

유진 선생님과 약속했던 상담일이 바로 내일이다.

꼭 시간을 비워두기로 했는데.

창문을 열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또 넘어가 볼까.

다친 발목과 그 발목 위에 묶인 족쇄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단호히 막아 세우는 것 같다.

역시 무리겠지.

창문을 포기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늘 감시하는 사람이 있긴 했었으나 내가 한동안 잠잠했으니 지금쯤이면 소홀해졌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건 것이다.

“들어가.”

“…아, 반갑습니다. 일주일 만인가요?”

나를 이곳까지 잡아 온 그 여자가 허리에 손을 척 올린 채로 서있었다. 엄포를 놓는 여자의 말에도 문을 닫지 않았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않겠어?

“억지로 끌고 들어가기 전에 문 닫아.”

“오늘 날씨 너무 좋지 않아요? 같이 산책이라도 할까요? 아, 자, 잠깐. 농담이에요, 농담.”

여자가 팔짱을 풀고 무섭게 다가오길래 크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아이 씨. 무는 무슨. 휘두르지도 못했다.

시무룩해져서는 방문을 닫았다.

“폐하께 여쭤봐.”

“네?!”

잠금이 맞물리기 전에 여자가 말했다. 다시 문을 벌컥 여니 인상을 팍 쓰며 내 어깨를 밀어버린다. 그리고 손수 문까지 닫아준다.

잘못 들었나? 양쪽 귀에 대고 검지와 엄지를 딱딱 튕겨봤다. 귀는 멀쩡한데? 여자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폐하께 여쭤보라고.

여자는 확신을 가지고서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별 의미 없이 툭 던진 말에도 내가 크게 반응을 보인 이유는 여자가 내 말을 무시하지 않고 조금은 귀 기울여 줬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별일이네.”

나쁜 기분은 아니다.

* * *

정공법으로 나가기로 했다. 여자의 조언을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서였다. 폴을 한 방에 쓰러뜨린 여자를 무력으로 당해 낼 수도 없었고 창문 밖으로 도망치는 것도 안 된다. 벽을 뚫고 나가는 건 애쉬 정도는 돼야지 가능하다. 즉, 나는 불가능!

애쉬가 방에 돌아오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제가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음…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지금 유진 선생님의 집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와, 잘됐다, 이거. 정말 다행인걸?!

…이라고 말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아, 폐하. 여기입니다.”

애쉬와 함께 외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나면…….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난 애쉬에게 당당히 요구했고 애쉬는 예상했던 바대로 개무시했다. 그냥 개무시가 아니라 사슬의 길이를 바짝 당겨서는 침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볼일만 끝내고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이번엔 도망 안 가고 솔직히 얘기하잖아요.”

“못 가는 걸 잘도 포장하는군.”

“으윽. 만약 도망쳤다 하더라도 어차피 금방 잡힐 걸 알아서 그런 미련한 짓은 두 번 다시 안 해요.”

“이미 두 번 넘었어.”

“…아, 죄송합니다. 그런데요! 저 진짜 중요한 약속이거든요.”

애쉬가 사슬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다리가 밑으로 쑤욱 빠지며 침대에 눕는 자세가 되었다.

“이번엔 동대륙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또 나를 얼마나 미치게 만들 셈이야. 내가 말했지. 질릴 때까지 안 놔준다고. 동대륙이라고 해서 널 못 잡을 것 같아?”

“상담받으러 가요.”

“뭐?”

“정신과 상담요. 어디가 안 좋은 건 아니고요. 그냥 요즘은… 다들 스트레스 하나씩은 가지고 있잖아요. 그거예요. 상담이 거의 다 끝나갈 분위긴데, 이번에 안 가면 다시 길어질 것 같아서요.”

“…….”

“못 믿으시겠으면 같이 가실래요?”

…해서 같이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말은 하지 말걸.

애쉬에게 유진 선생님의 집을 양손으로 정중히 가리켰다. 얇은 스카프를 콧등 위까지 길게 둘러맨 애쉬가 미간을 찌푸린다.

“호칭, 그렇게 할 거면 내가 왜 이 꼴로 있을까.”

“그렇죠. 그럼… 음, 제가 워낙 발이 좁은 걸 유진 선생님도 알아서요.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하면 안 믿으실 것 같은데, 아브모르나 극단원이라고 소개해도 될까요? 폐하께서 동생이고 제가 누나인 걸로.”

애쉬의 미간이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 싫으시구나. 그럼 제가 동생… 하죠, 뭐. 권력 앞에서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하하.”

어찌어찌 ‘제임스’라는 가명까지 지은 후에 유진 선생님 댁으로 들어갔다. 애쉬는 여전히 불만인 것 같았지만 의견을 정확하게 피력하지 않으니 내가 그 속을 알 수 있나. 사소한 불만 정도는 무시하기로 했다.

“세상에, 사라! 안 올까 봐 걱정했어요. 폴한테 얘기 들었어요. 다친 곳은… 어머, 뒤에 혹시?!”

유진 선생님이 입을 가리며 놀라워했다. 스카프로 얼굴을 절반 이상 가렸다 쳐도 역시 황제의 아우라는 숨길 수 없었나 보다. 제임스라고 이름까지 지었던 것이 다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뭐라고 설명드려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채업자분?!”

“……?”

“…아, 맞아요! 그 사채업자… 끈질기죠. 요즘은 화장실 가는 것까지 감시하더라고요. 떼어놓고 올 수가 없었어요. 죄송해요, 유진 선생님.”

“아무리 돈이 급해도 그렇지. 사라, 어쩌자고 그런 돈까지 손을 댄 거예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애쉬가 등에 문을 기댄 채 삐딱하게 서서는 나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따가운 시선에 뒤통수가 타버릴 것만 같다.

“그러게요. 사채라니. 내 뒤에 있는 사람이 사채업자라니. 하하, 하.”

“사라도 지금 이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나 보군요. 이해해요. 우선 앉아서 이야기 좀 할까요?”

유진 선생님은 떨떠름하게 애쉬에게도 앉을 자리를 권했다. 사라를 괴롭히는 불한당에게 의자를 주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숨김없이 드러났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건지 애쉬는 유진 선생님의 나름의 배려를 무시해 버렸다. 선생님은 거기서 또 기분이 나빠 보였다. 기껏 생각해 줬더니 무시라니.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기 전에 냉큼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둘 사이라고 해봤자 애쉬는 유진 선생님의 노골적인 반감을 날파리가 윙윙대며 날아다니는구나― 정도의 취급만 했을 뿐이다.

유진 선생님의 팔을 잡아 정중히 의자에 앉혔다.

“선생님, 저 사채업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제 지인도 아니고 어차피 돈 때문에 감시차 있는 거니까요.”

“후우, 없는 사람 취급하라 이건가요?”

유진 선생님이 붉은 안경을 추켜올렸다.

어, 없는 사람……. 그래도 그렇지, 서대륙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께 그런 불충한 표현은 아니지 않습니까. 애쉬 입장에서는 졸지에 사채업자가 돼버린 것도 황당함이 이를 데가 없을 텐데 말이죠.

“그렇다기보다는 마네킹이라고 생각하심이…….”

타악.

등 뒤에서 신발 굽이 바닥을 세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았다. 팔짱을 낀 애쉬가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손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입술 아래가 파르르 떨려왔다.

“마네킹요?”

“그냥 마네킹이 아니라 되게 엄청 잘생긴 마네킹요. 박학다식하며 무예도 출중하고 거시기도 엄청 큰… 아, 이건 아니고.”

유진 선생님이 인상을 쓰며 내 손을 포갰다.

“사라, 지금 많이 혼란스러워 보이네요. 우리 빨리 대화를 시작하죠.”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어찌 됐든 유진 선생님은 애쉬의 존재를 잊기로 한 모양이다.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유진 선생님은 정말 애쉬를 마네킹 혹은 없는 사람 취급했다. 우리의 상담은 5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레 흘러갔다. 유진 선생님이 내 근황에 대해 세세히 물으면 나는 답변을 한다.

그러나 오늘의 상담은 지난 5년간의 상담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가장 크게 웃었던 일이 뭐였죠?”

웃은 기억. 잠자는 애쉬의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헬렐레 미소 지은 일은 있었지…….

유진 선생님이 의도한 질문에 맞는 대답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황제 폐하의 잠든 얼굴을 보고 넋이 나갔다는 말을 함부로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상담을 빨리 끝내기 위해선 뭐라도 하나 짜내야 하는데, 뭐라고 한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와중에 유진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붉은 테 안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하고 뺨을 긁적였다.

“쟈스민이 옷을 또 거꾸로 입은 거요. 바보도 아니고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했다니까요.”

유진 선생님이 웃으며 되물었다.

“그게 언제였죠?”

“이틀 전요.”

“어디서요, 연습실?”

“네, 새 작품에 대해 논의 중이었는데 쟈스민의 원피스 지퍼가 목 아래에 있다는 걸 제가 제일 먼저 발견했어요. 몰래 귀띔해 주니까 ‘원래 이런 옷이야!’ 하면서 펄펄 뛰던 게 생각나네요. 엄청 웃겼는데.”

박수까지 쳐가며 억지로 하하 웃었다. 유진 선생님이 같이 소리 내어 웃어주니 안심이 되었다. 거짓말이 통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쟈스민은 이번 주 내내 휴가라고 하던데요.”

유진 선생님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으나 그 웃음이 내 이야기가 우스워서 그런 것이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아, 쟈스민이 아니라 샤를이었다. 제가 잠깐 착각했어요.”

“기획 팀, 연출 팀 전부 휴가를 떠났어요. 아브모르나는 다음 주까지 공연이 잡혀있지 않는 상황이고요. 이틀 전에 연습실에서 본 사람은 누구죠?”

“…….”

“사라, 나한테 거짓말하면 안 돼요. 우린 친구잖아요.”

“…….”

파일 위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유진 선생님이 눈을 들어 다시 나를 보았다. 뜨끔. 놀란 나머지 혀끝을 조금 씹었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죄송해요.”

“혹시 또 감정이 느껴지지 않나요?”

“아니에요.”

그러나 유진 선생님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하더라도 슬프지도, 무섭지도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에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다.

분노도 슬픔도 확실하게 느껴지는데 죽음이라는 글자 앞에서는 덤덤해진다. 세레즈의 굴레 안에 있으면서 수없이 많은 죽음을 목도했다. 그것으로부터 받는 상실감과 공포는 내 안의 심지를 처참히 부숴놓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타인의 죽음이 아닌 나의 죽음이라면 어떨까.

잠깐 생각해 보았다. 다양한 죽음의 방법 중에서도 세레즈 앞에서 보란 듯이 내 목에 칼을 박아 넣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순간 전율을 느꼈다. 지독한 희열과 해방감이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후에는 못내 아쉽기까지 했다.

칼을 박아 넣었던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올 거고 세레즈는 과다 출혈을 막기 위해 더러운 손으로 내 목을 압박할 것이다. 그럼 난 보란 듯이 반대편 목에다가도 한 번 더 칼을 쑤셔 넣을 거다.

세레즈는 나를 구속하지 못한다는 괴로움으로 악을 쓰겠지. 그를 향해 비웃어줄 것이다. 내 뜨거운 피가 온 바닥을 적시고 몸을 잠기게 할 정도로 철철 흘러나오면 좋겠다. 세레즈가 그 피 위에서 허우적대면서 발버둥 치는 꼴은 꽤 볼만할 테니까.

“가자.”

“…….”

어깨를 감싸오는 손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굴을 삼킨 것 같은 저음이 피로 얼룩졌던 붉은 머릿속을 말끔히 씻어냈다.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위로 끌어올리는 힘에 자연스레 엉덩이가 떨어졌다.

“아직 상담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유진 선생님이 내 손을 잡아왔다. 얼떨떨했던 머리를 털어내고 애쉬를 보았다. 애쉬는 유진 선생님의 손에 잡혀있는 내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라도 있는지 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내담자를 궁지에 몰아가는 것도 상담인가?”

“뭐요?”

“심리 상태를 더 악화시키는 상담은 또 처음 보는군.”

“선량한 사람을 등쳐먹기나 하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내담자를 대놓고 평가하는 저 파일이나 집어치워.”

애쉬는 유진 선생님의 손을 거칠게 떼어냈다. 답지 않게 상스러운 욕까지 섞어 쓰며 소리를 질러대는 유진 선생님을 뒤로하고 우리는 집 밖으로 나갔다.

애쉬가 어깨에서 손을 떼고 앞서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이 빨랐다. 어딘가 화난 것처럼 보이긴 했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여기서 갈등했다. 유진 선생님한테 가야 할지, 애쉬를 쫓아야 할지.

오도카니 서서 무엇이 더 합리적인가를 생각하고 있는데 저 멀리 앞서 나갔던 애쉬가 뛰듯이 돌아오더니 손목을 덥석 잡았다.

“왜 안 와.”

“고민하고 있었어요. 어딜 가야 할지. 폐하를 따라가면 유진 선생님의 상담이 다시 길어질 것 같고, 그렇다고 유진 선생님한테 다시 가자니 폐하가 화낼 것 같고. 저에겐 둘 다 별로인 상황이라 차악이 뭔지 생각했어요.”

애쉬가 스카프를 풀어냈다. 땀에 흠뻑 젖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피부는 보송보송해 보이기만 한다.

아, 맞다. 쟤 마법 쓰지. 5년 전 여름, 작열하는 햇빛에도 서늘함을 유지시켜 주는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전했던 것이 떠올랐다.

때아닌 회상을 하고 있느라 애쉬의 표정이 험악해진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내가 얘기한 거 못 들었어? 저딴 상담은 앞으로 받지 마. 황실 소속의 더 좋은 상담사를 구해 줄게.”

어이없음에 헛웃음이 터졌다.

“전 필요하다고 한 적 없어요. 유진 선생님한테 상담받을 거예요.”

“저딴 돌팔이한테 상담은 무슨 상담!”

화내는 애쉬의 태도가 의아하기만 했다. 내가 괜찮다는데 왜 저러는 거야.

애쉬가 소리를 지르니 시선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애쉬에게 스카프를 둘러주었다.

“유진 선생님이 돌팔이더라도 괜찮아요. 저는 그냥 됐다고 할 때까지 상담을 끝내기만 하면 되니까요.”

“무슨 소리야, 누가 됐다고 해주는데.”

“그거야 당연히 유진 선생님이죠.”

“그러니까 왜 ‘됐다.’에 매여있는 건데.”

또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는 애쉬의 모습이 믿기지 않아서 설마 진짜 마네킹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 없이 큭큭 웃기만 하는 내가 답답했는지 애쉬는 숨을 크게 몰아쉬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참는 듯한 모습에도 웃음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애쉬는 내가 웃음이 멈출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아, 죄송, 죄송해요. 흠흠.”

조금 민망했다. 하지만 웃긴 걸 어떻게 해.

유진 선생님의 상담이 지금 일 이후였다면 최근에 웃었던 일을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 아깝다.

애쉬가 물었던 ‘됐다.’의 의미에 대해선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물음을 잊은 척 딴청을 피웠다.

“돌아갈까요?”

또다시 물어오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애쉬는 그러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한발 앞서 걸어 나가 버렸다. 그 뒷모습에 안도하며 조용히 뒤를 따랐다.

* * *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검은 바다에서 길을 잃고 표류했다. 빈약한 나무판자 하나만이 나를 검은 물 밑으로 가라앉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곧 끊어질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검은 물이 넘실거리며 나무판자 위로 파고들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소리쳐도 검은 망망대해엔 새 한 마리 날아가지 않았다.

잠기기 일보 직전인 나무판자만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스스로 헤엄치기로 했다. 검은 물 아래에 조심히 발을 담근 순간 무언가가 발목을 잡고 나를 쑤욱 끌어당겼다.

아악!

꼬르륵.

물속에 잠긴 목소리는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내 발목을 잡은 것을 떨쳐내려 거침없이 발길질하다가 어느 순간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엄마.

엄마였다. 떼어내려던 행동을 멈췄다. 오히려 가라앉아 가는 엄마의 손을 잡기 위해 물 밑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있는 힘껏 손을 뻗어 엄마를 잡으려는데 엄마의 머리가 동강 났다. 검붉은 피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아, 안 돼!

설상가상으로 물살이 거세졌다. 엄마의 몸은 검은 물살을 피하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허탈함과 절망이 동시에 나를 집어삼켰다.

이번엔 쌍둥이들이 나타났다. 히죽 웃는 둘은 입과 목구멍 그리고 가슴이 모조리 녹아내려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끔찍하여 고개를 돌리자 칼에 찔리고 관절이 꺾이고 눈이 뽑힌 시종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뿐만 아니라 레드릭과 로즈도 그들 사이에 섞여있었다. 그들은 검은 물살에 밀려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쳐야 돼!

위를 향해 헤엄치자 폴과 유진 선생님이 나타나 내 발목을 나란히 잡고 끌어당겼다.

으윽!

폴과 유진 선생님의 얼굴을 짓밟아 가며 죽을힘을 다해 그것들을 떼어냈다. 검은 물 위로 빈약한 나무판자가 보인다.

저기까지만 가면 돼!

나무판자가 있는 곳에서부터 하얀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마주 잡았다.

얼굴이 검은 물 밖으로 나오자 손의 주인이 애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 손 놓치지 말고, 올라와요.

온통 검은 물을 뒤집어쓴 나와 다르게 애쉬는 태양 아래에서 찬란하고 순결하게 빛났다. 나에게로부터 묻은 검은 물이 깨끗한 손에 옮겨붙어 간다.

그것이 죄악처럼 느껴져 망설였다. 애쉬는 그런 내 마음과 다르게 나를 힘껏 끄집어 올렸다. 상체가 나무판자 위로 올라가고 젖은 두 다리도 판자 위에 걸쳐지려는데,

쑤욱―

발목이 다시 잡혀버렸다. 그 힘이 너무 거세어 속절없이 판자 아래로 떨어졌다.

풍덩.

나와 손을 마주 잡고 있던 애쉬까지 검은 물 아래로 잠겨버렸다.

* * *

“애쉬!”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고 온몸은 축축했다. 사방이 까맸다.

난 아직도 검은 물 아래에 있는 건가. 애쉬는 어디에 있지?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애쉬, 애쉬!”

목청껏 녀석의 이름을 외쳤다. 눈물이 쏟아지고 목이 자꾸만 막혀서 답답했다.

“애쉬, 어디 있어! 애…….”

따뜻하고 단단한 품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아도 나를 감싸 안아주고 있는 게 애쉬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녀석의 등을 꽈악 껴안으며 울부짖었다.

“너까지……. 내가 미안해, 애쉬. 정말 미안해.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마. 그냥 가. 너까지 잃고 싶진 않아. 제발. 제발.”

혹여나 검은 물이 애쉬를 데려갈까 봐. 그 안에 있던 것들이 애쉬의 발목을 붙잡을까 봐. 몸이 부서져라 애쉬를 끌어안았다.

나의 절박함과는 사뭇 다른 느릿하고 다정한 손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에 머리끝까지 솟아있었던 불안감이 차츰 옅어졌다. 서서히 몸에 힘이 빠진다. 이제는 애쉬를 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기대어 쓰러져 버린 모습이 되었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려 녀석의 옷자락을 적셔갔다.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애쉬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잔잔하게 울렸다.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그냥 가.”

내 몸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억센 힘에도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비틀지 않았다. 그 압박감이 좋았다.

애쉬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주위가 캄캄한 탓에 지금 애쉬의 표정이 어떤지 확인할 수 없었다. 대신 손으로 어루만져 보기로 했다. 그러다 조금 놀랐다. 손가락 끝에 뜨거운 눈물방울이 걸려 있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고 내 손을 타고 흘러내려 갔다.

“왜 울어.”

내가 울고 있는 것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

“울지 마. 그만 울어.”

깨끗한 뺨 위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주었다. 눈물 젖은 손은 이미 너무도 축축하여 닦아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묻혀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몸을 틀어 애쉬의 어깨를 잡고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녀석의 눈물을 입술에 옮겨 담았다. 눈가는 물론이고 뺨이며 턱이며 할 것 없이 머금었다.

눈물에 중독된 사람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입을 움직였다. 그러다 커다란 손에 부드럽게 뺨이 잡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온통 까만 세상에서 녀석의 온기만을 느꼈다. 수순처럼 뜨거운 입술이 살포시 포개졌다.

첫 입맞춤처럼 조심스러운 뽀뽀에 잔잔한 설렘을 느꼈다. 녀석의 입술을 조금 더 깊게 느끼고자 고개를 틀려고 하는 찰나에 애쉬가 멀어졌다. 내 허리에 닿아있는 애쉬의 손이 움찔거린다.

녀석은 당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멀어진 애쉬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별 저항 없이 나에게 끌려왔고 또다시 입이 맞닿았다. 두 번째 입맞춤은 처음의 풋내를 완전히 잊게 만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에 파고들어서는 혀를 섞었다.

타액이라는 것이 이렇게 달콤한 건지 몰랐다. 혀가 비벼지면서 전해지는 타액에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다.

조금 더 깊게 맛을 보고 싶어서 고개를 틀었다. 그러나 애쉬의 입이 다물어지며 내 아랫입술만을 머금었다. 그것이 불만스러워서 낮게 신음하니 날카로운 이가 입술을 살짝 물어버린다. 뜨끈한 통증과 함께 애쉬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해져 간다.

애쉬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몸을 움직였다. 내 목덜미를 단단하게 잡으며 몸을 누이곤 그 위로 올라탔다. 애쉬는 무게를 싣지 않기 위해 내 얼굴 옆에 팔을 놓고 몸을 지탱했다.

키스하는 각도가 바뀌면서 자꾸만 애쉬의 팔에 뺨이 닿았다. 애쉬의 입술이 잠깐 멀어졌다가 다시 다가오려는 찰나 녀석의 팔을 아프게 베어 물었다. 내 아랫입술을 깨문 복수였다. 애쉬의 입술은 자연스레 목선으로 떨어졌다.

“읏.”

혀와 이를 사용해 목을 지분거리는 애쉬 때문에 팔을 깨물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신음을 터뜨렸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애쉬의 무릎이 들어왔다. 노골적으로 은밀한 곳을 비벼대면서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아랫배와 갈비뼈를 쑤욱 훑더니 가슴을 쥐었다.

“하읏!”

목이며 가슴 그리고 아래까지 어느 곳 하나 자극당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열기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다시 애쉬의 팔을 입에 물었다. 츄읍. 단단한 근육이 자리하고 있어서 이가 박힐 것 같지도 않다.

“으읏, 잠, 깐!”

몸이 바르작거렸다. 애쉬가 가슴을 베어 물었기 때문이다. 혀로 유두를 꾹꾹 누를 때마다 발끝에서 전기가 팟 튀었다.

그것이 참기 어려워 침대 시트를 발꿈치로 밀었다. 애쉬는 멈추지 않고 혀로 주변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아, 간지, 흐, 러…….”

쪽, 쪽쪽…….

유두를 살짝 머금었다 뺀 애쉬가 가슴부터 배꼽까지 입술을 찍으며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바지춤까지 입술이 닿았으나 녀석은 계속해서 옷 위로 입술을 움직였다. 종아리를 들어 올리고 허벅지 안쪽에 질척한 타액의 흔적을 만들어갔다. 습한 기운이 점점 은밀한 곳을 향해 다가간다.

“자, 잠깐…….”

부끄러웠다. 차라리 나체인 채로 애무를 받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아흣!”

뜨거운 입김이 아래에 정확히 닿았다. 이미 충분히 젖어있었던 속옷의 상태를 들켜 버렸겠지. 애쉬는 종아리를 어깨에 걸고 바지째로 아래를 빨아들였다.

“읏, 그거 하지……. 아!”

투둑.

이가 바지를 긁어내렸다. 자잘한 진동이 자극적이었다. 허리가 움찔대며 발가락이 곱아든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골반과 허리를 잡은 채 아래에 얼굴을 파묻는 녀석 때문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쾌락에 취해서 말이다.

투둑, 툭.

“아, 긁지, 마, 으읏!”

의지와 상관없이 골반이 자꾸만 들썩거리고 내뱉은 호흡이 가빠져 갔다. 몸을 도저히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참지 못하고 다리로 애쉬의 등을 쳤다. 그러나 애쉬는 더 깊숙이 아래를 빨아들일 뿐 멈추지 않았다.

“아, 아! 아읏, 애쉬!”

높게 뜬 허리가 공중에서 바르작거렸다. 옷 하나 벗지 않은 채로 오르가슴을 느껴버린 것이다.

애쉬는 그제야 나를 풀어주었다.

쪼옥.

애쉬의 것인지 내 것인지 모를 액으로 잔뜩 축축해진 그곳 위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멀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옷이 비벼지는 소리가 들린다. 바지춤에 애쉬의 손가락이 걸리더니 이내 속옷과 함께 쑤욱 내려갔다. 상의라고 다를 건 없었다. 애쉬는 내 목 위까지 말려 올라간 옷을 잡고 한 번에 뜯어버렸다.

녀석의 불덩이 같은 맨몸이 닿아왔다.

어둠 속을 헤매는 건 나뿐인지 애쉬는 내 몸을 자유자재로 어루만졌다. 그것이 억울했다.

“나도, 흣, 만지게, 해 줘.”

“어딜?”

열기로 푹 잠긴 애쉬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들렸다.

나는 대답 대신 손을 더듬더듬 움직여갔다. 잘 짜인 근육이 울퉁불퉁한 길을 만들고 있었다.

복근을 쓸며 아래로 손을 내리자 빳빳하게 고개를 든 페니스가 잡혔다. 내 귓바퀴를 잘근거렸던 애쉬가 낮은 숨을 터뜨렸다.

“여기.”

기둥을 천천히 쓸어 올리자 애쉬의 호흡이 짙어져 간다. 녀석의 숨김없는 욕망이 흥미로웠다.

귀두 끝을 손톱으로 살짝 누르자 몸을 움찔거린다. 아팠을 게 분명한데도 짓궂은 물음을 했다.

“좋아?”

“크읏.”

그러곤 입술이 먹혔다. 여유를 잃은 혀가 다급하게 입안을 뚫고 들어와서는 내가 느끼는 곳만을 찾아 자극해 갔다.

“아, 읍, 읏!”

빠르게 고양되는 흥분감에 애쉬의 페니스를 쥔 손도 덩달아 속도를 내었다.

“하아, 읍.”

녀석의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끊겨갔다. 페니스를 쥔 손을 가로로 뭉근하게 돌리자 가만히 입술을 맞댄 채로 애쉬가 신음을 흘렸다.

뜨겁고 질척한 것이 손아래에 퍼졌다.

“하아, 하아.”

잠시 숨을 몰아쉬던 애쉬가 다시 쪽쪽거리며 입을 맞춰왔다. 그러곤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긴 손가락이 아랫배부터 쓸어내려 가면서 음핵을 찾아 꾸욱 눌렀다. 강한 자극에 상체가 펄쩍 뛴다.

“잠깐.”

애쉬는 내 둥근 어깨를 머금으며 다시 음핵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앉은 채로 다리를 덜덜 떨면서 녀석의 팔뚝을 강하게 쥐고만 있었다.

“나 또 갈 것, 아, 아!”

오르가슴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애쉬가 어깨를 앙 깨물고는 손과 함께 멀어져 갔다.

이것이 무슨 상황인가 싶어 잠시 멀뚱히 있는 동안 몸이 다시 눕혀졌다. 갑작스레 녀석의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왔다.

“읏.”

찌걱찌걱.

충분히 젖은 아래가 애쉬의 손 아래에서 야한 물소리를 내었다. 손가락은 아주 익숙하게 내가 느끼는 부분을 찾아냈다.

“아, 으으! 그냥, 그냥 넣어.”

갈증이 났다. 날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건 따로 있었다.

“다쳐.”

그러나 애쉬는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을 뿐이다. 이미 아래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녀석은 고집스럽게 아래를 애무했다.

“넣으라고, 으, 흣, 좀.”

애가 탔다. 신경질적으로 발을 차니 애쉬의 몸 어딘가에 맞았다. 쑤욱. 손가락이 빠지자 질척한 것이 함께 흘러내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거대한 부피의 그것이 구멍 위에 비벼졌다.

“아프다고 울지 마. 안 뺄 거니까.”

“너나 잘… 하악! 아! 자, 잠깐!”

너나 잘하라고 말해 주려던 것이 쏘옥 들어갔다. 5년 만에 받아들이는 애쉬의 페니스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버거웠다. 빠듯하게 차고 들어오는 부피감에 시트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아래가 충분히 젖어있지 않았더라면 절대 넣지 못했을 것이다.

“아읏, 너, 이거… 흣, 너무.”

“후우, 거의 다, 넣었, 어.”

거의 다 넣었다는 말만 듣고 꾹 참고 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녀석은 끊임없이 밀려 들어왔다.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까지, 들어올, 아아! 아!”

그 순간 애쉬가 허리를 움직이며 안으로 푹, 푹! 페니스를 밀고 들어왔다.

“숨 쉬어.”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애쉬의 손길을 따라 귀 뒤로 넘어갔다. 녀석은 내가 페니스에 적응할 수 있을 때까지 입과 눈가에 입을 맞추고만 있었다.

애쉬의 오랜 기다림 끝에 어느덧 숨 쉬는 것이 편안해지고 찢어질 듯한 아래의 고통이 무뎌졌다. 대신 그 자리에 열감이 찾아들었다.

“나 몸이 뜨거워.”

이 말을 신호로 애쉬가 아주 얕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에 들어있는 페니스가 워낙 큰지라 그 얕은 동작에도 몸이 쿵쿵 울린다.

“으, 읏, 아.”

애쉬의 움직임으로 열기가 더욱 거세졌다. 몸은 더한 쾌감을 원하고 있었다.

“더, 더 세게 해도 돼.”

“후우.”

녀석의 허리 짓이 전에 없이 거세졌다. 세기고 속도고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거칠어서 나를 금방 절정까지 몰고 갔다. 내가 느끼는 부분만을 집요하게 눌러대는 탓에 더욱 빠르게 흥분해 버린 것이다.

“아, 아아! 잠깐, 너무, 이건, 너무 빨… 읏!”

애쉬의 목을 끌어안았다.

퍽퍽!

살 부딪치는 소리마저 자극적이었다. 애쉬가 귀두가 입구에 걸릴 정도로 허리를 뒤로 빼더니 한 번에 끝까지 치고 들어온다.

“아아!”

눈앞이 아찔해졌다. 녀석의 페니스를 깊게 묻은 채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폭주하듯 움직이던 애쉬도 잠시 멈춰 섰다.

“너무, 빠르다고 했잖아.”

항의했다.

“참은 거야.”

라는 해괴한 답변이 돌아왔다.

“하윽!”

그러곤 다시 허리를 움직인다. 절정을 느낀 지 얼마 안 돼서 몸이 극도로 예민했다.

“히, 힘들어! 읏, 이게 어떻게, 참은, 거, 아읏!”

“널 보자마자, 후우, 얼마나, 이러고 싶었는지, 알아?”

“아, 아, 애쉬! 흐읏!”

“내 몸은 너한테, 길들여져 버려서, 너 아니면 세우지도 못해.”

애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또다시 찾아드는 해일 같은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눈물이 터졌다. 고통이 아닌 오직 쾌감에 의한 눈물이.

“아, 으, 빨라, 아! 아!”

“난, 너 아니면, 안 돼.”

“으읏, 애쉬!”

“네가 날 그렇게 만들었어.”

온통 까맣게만 보였던 세상이 새하얀 물감으로 도배되었다. 몸이 떨림과 동시에 힘이 빠져갔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 * *

물기를 머금은 초록 잎사귀들이 반짝거렸다. 한낮에 불꽃이 터지는 것같이 화려한 즐거움을 주는 광경이다. 전면이 유리로 된 창으로 따스한 채광이 넘어 들어왔다. 여름의 생기를 머금은 평화로움 속에서 폴은 이런 감상을 내놓았다.

폭풍 전야.

달칵.

가볍게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에 폴은 어깨를 경직시켰다.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상대방이 눈치채고 주의를 준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딴생각한 스스로의 태만에 쓴 신음을 삼켰다. 아니, 태만 같은 게 아니다. 일종의 도피였다. 이 불편한 대화 속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저도 모르게 작용한 것이다.

긴장으로 메어오는 목을 가다듬었다.

“아직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본인의 생활에 안정을 느끼지 못하고 불시의 상황에 대비한 도망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찾아가시게 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릅니다.”

저 남자 앞에서 거짓말하는 건 목숨을 내놓은 도박과 다를 게 없다. 폴은 긴장으로 축축해진 손을 감아쥐었다. 그리고 초조하게 남자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제발 남자가 뜻을 거둬주기를 바라면서.

남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라는 말에 반응을 보였다. 기껏해야 숨을 더 오래 내쉬었다는 것뿐인 사소한 반응일지라도 폴은 거기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렇겐 안 둬. 준비되는 대로 당장 길덴으로 떠난다.”

기대로 부풀었던 마음이 곧바로 추락했다. 폴은 다급해졌다. 자신의 무릎이 테이블을 건드려 남자의 찻잔이 불안하게 흔들렸다는 것도 모르고 남자를 회유하는 데에 정신이 팔렸다.

“로벤스디 각하, 지금 가시면 역효과만 낳을 뿐입니다. 5년간의 기다림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겁니다.”

남자, 세레즈는 잔잔하게 물결치는 찻잔에 시선을 두었다. 일렁이는 표면 위로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자신의 이복동생이랑 똑같은.

“제가 더 많이 찾아가 보겠습니다. 이벨린이 완전히 안심하고 길덴에 정착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마음을 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쉽게 결정하지 못할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여유를…….”

세레즈가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 작은 몸짓 하나에 폴은 말하던 것도 잊고 시선을 빼앗겼다. 어렸을 적부터 귀족으로서의 품행을 교육받고 자란 폴이었지만 세레즈 앞에서는 길거리에서 가축의 고기를 썰어 파는 백정이 되는 기분이다. 태생부터가 다르다. 저 남자는 타고나기를 사람의 우위에 선 남자다.

우아한 몸짓에서부터 받는 들끓는 열등감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여유를 가지시고 우선은 지켜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끊겼던 말을 겨우 이어 붙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대답이 아니었다.

퍼억!

둔탁한 파열음이 울렸다. 폴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어보았다. 차가운 차의 물기와 함께 붉은 선혈이 묻어나왔다.

두 눈을 뜨고 있었으면서도 세레즈가 찻잔을 자신의 머리에 내려치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굴복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절의 표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신사다운 모습으로 이런 짓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한두 번 보아온 것이 아님에도 그랬다.

“길덴으로 넘어간 황제가 황궁을 한 달 넘게 비워두고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

“서대륙 통일을 일궈냈으니 속 편하게 휴가라도 떠났다고 생각하나?”

세레즈는 시종이 가져다준 깨끗한 천으로 손을 꼼꼼히 닦으며 말했다.

“황제는 내 동생을 찾아낸 거야. 그놈은 나랑 같은 부류거든.”

“…….”

“뺏기기 전에 되찾아 와야지 않겠어?”

폴의 손등 위로 세레즈가 손을 닦았던 천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핏방울이 똑똑 떨어지며 붉은 꽃잎같이 모양을 내어갔다.

세레즈가 자신을 지나쳐 가자 폴은 천을 찢어발기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절대 깨지지 않을 이 상하 관계가 지긋지긋하다.

로벤스디가의 저택에서 나와 마차에 몸을 실음과 동시에 천을 찢어버렸다.

일주일 전, 자신의 프러포즈에 난색을 보이던 이벨린의 얼굴이 떠오른다. 프러포즈 사실이 세레즈의 귀에 들어갔으면 자신의 머리가 잘리게 됨은 물론이거니와 로벤스디가의 지대한 원조를 받고 있던 크로우가는 하루아침에 귀족의 반열에서 내려와야 했을 것이다.

프러포즈 사실이 들키지 않아 안도하면서도 자신의 무력한 처지에 스스로가 만든 모멸감에 빠져들었다.

“내가 크로우가 아니었다면…….”

그러나 고위 귀족으로서 누리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벨린을 사랑하는 마음이 진심이긴 하나 사랑 때문에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릴 만큼 지고지순하진 않았다.

“이벨린.”

둘 다 손에 넣고 싶었다. 이벨린의 마음도, 귀족으로서의 위치도.

* * *

폴은 저택에서 찢어진 이마를 치료받자마자 길덴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마음이 불안하여 이벨린의 얼굴을 보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길덴에서 수도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다시 길덴으로 떠나는 배를 탄 폴은 자신의 행동에 일순 회의감을 느꼈다. 오늘은 약혼자와 저녁 식사 약속이 잡혀있던 날이기도 했다.

“내가 어쩌다.”

그러면서도 이벨린의 얼굴을 보면 자신의 충동이 정당화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폴이 이벨린을 알게 된 건 스무 살이 될 무렵이었다. 이벨린의 존재를 안 것은 그보다 더 일찍이긴 했으나 그때에는 큰 관심이 없었기에 ‘로벤스디가에 입적된 버림받은 사생아’라는 꼬리표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의 전부였다. 한 번 들었던 이름은 그날 저녁이 되기 전에 잊어버렸다. 그러니 알았다고 정의하기가 민망할 수밖에 없다.

로벤스디가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랑받는 영애였더라면 이름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무관심하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극진히 모셨을 수도.

그렇게 영영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은 채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던 폴과 이벨린의 관계에 이변이 생겼다.

크로우가의 가주이자 폴의 아버지인 데만 크로우보다 가문 내의 입김이 센 로벤스디 공작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데만 크로우는 자신의 장남이 세레즈에게 필요의 존재가 된 것만으로도 날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폴의 입장은 달랐다. 자신에게 내려진 명이 터무니없는 탓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세레즈의 유흥을 위한 장기 말이 된 것 같았다.

‘자기 여동생이랑 연애하라는 게 무슨 뜻이야.’

데만 크로우는 크로우가와 로벤스디가가 사돈의 연을 맺는 건 아닌가 지레짐작하여 허황된 꿈을 부풀렸다. 그런 데만을 향해 ‘이벨린 걔는 버려진 사생아라니까요?’ 하고 말려봤지만 이미 막대한 지참금을 상상한 데만은 폴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기숙사로 돌아간 폴은 세레즈의 기이한 명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았다.

자신의 여동생과 연애해라. 그러나 스킨십은 일절 금지. 다른 남학생들이 접근하는 것을 모조리 차단시키고 연애할 때의 이벨린은 어떤 모습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이 무슨 변태 같은…….’

…취미가 아닐 수 없다. 우선 폴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벨린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사교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집착처럼 공부에만 매진하는 이벨린에게 호감을 주기란 몹시도 어려운 일이었다. 얼굴을 마주한 상태로 말이라도 한마디 주고받으면 그날은 정말 큰 실적을 올린 날이었다.

이런 애랑 어떻게 연애를 시작해.

폴은 이벨린의 동태를 면밀히 파악한 뒤 스토커처럼 쫓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보이지 않았던, 아니 보려고 하지 않았던 의외의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책을 넘기는 손가락이 희고 가늘다는 것과 무언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게 있으면 아랫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있었다.

시험 기간엔 꾸벅꾸벅 졸면서도 교수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는데 그때마다 입술이 붕어처럼 튀어나오는 게 귀여웠다.

‘저러다 부딪칠 것 같은데.’

욕심이 많은 건가.

제대로 들지도 못할 거면서 책으로 탑을 쌓아놓고 걷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이벨린이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폴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우려하던 일은 생기지 않았다. 요령이 좋은 이벨린은 아슬아슬한 책 탑을 들고 기숙사로 무사히 들어갔다.

이벨린은 묘했다.

살뜰히 보살펴 주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다가도 남의 도움은 전혀 필요치 않다는 듯이 스스로 척척 해결하는 모습이 의젓해 보이기도,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탐탁지 않기만 했던 세레즈의 명이 생각 외로 흥미로워지는 순간이었다.

폴은 본격적으로 이벨린에게 접근했다. 이벨린을 좋아한다고 아카데미 내에 소문을 퍼뜨렸고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벨린이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 느낀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이벨린과 연애를 시작한 후 매일매일이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만인에게 공평하게 무관심한 이벨린이 자신만은 특별한 눈으로 바라봐 준다는 것이 이토록 전율을 느끼게 하는 건 줄 몰랐다.

세레즈의 명은 이제 뒷전이 되었다. 스킨십은 일절 하지 말라고 했던 부속 사항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내 애인인데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갈수록 커져가는 이벨린에 대한 폴의 마음에 비해 이벨린은 버석 마른 풀처럼 건조해져만 갔다. 그래도 괜찮았다. 남자 친구 자리만 내어준다면 무엇이든 다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소소한 연애를 지속하고 있는데 세레즈가 자신을 호출했다. 낭만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현실로 끌어당겨진 순간이었다.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마음이 차게 가라앉았다.

세레즈 앞에서 이벨린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보고했다. 폴은 몇 번이고 말을 더듬었다. 비현실적인 상황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벨린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주로 얘기하고 이벨린은 들어주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이따금씩 추임새를 넣어줍니다.”

“어떻게, 자세히 말해, 봐.”

“별다를 건 없습니다. 그래서? 응, 힘들었겠네, 듣고 있어. 이 정도.”

세레즈는 간헐적으로 신음을 뱉었다. 폴은 고개를 돌려 세레즈를 외면하고 싶었다.

아무리 이복동생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여동생을 대상으로 자위하는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다. 세레즈는 이벨린과 연애하는 상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힘껏 솟은 페니스를 폴 앞에서 꺼내었다. 시종이 와서 익숙하게 그것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고 폴은 그 앞에서 이벨린의 이야기를 해야 했다. 세레즈가 사정하고 나서야 폴은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욱!”

역겨움에 끝도 없이 헛구역질이 나왔다. 전부 쏟아낸 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누군가 등을 두드렸다.

이벨린이었다.

“어디 아파?”

하고 묻는데 울렁거렸던 속이 단번에 상쾌해졌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구토하고 있었더라면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았을 테지.

폴은 이벨린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우리… 잘까?”

스스로가 말해 놓고도 놀랐다. 뒤늦게 머릿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충동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건조하기만 하던 이벨린의 눈이 조금 커진 것을 본 폴은 한 번 더 용기 내어 말했다.

“네가 싫지 않다면 말이야.”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

이벨린이 허락했다. 믿기지 않아서 입만 벌리고 어버버거렸다. 진심으로 그녀가 허락할 줄은 몰랐다.

“내, 내가 말한 건 그냥 한 이불 덮고 잠만 자자는 게 아니야.”

“섹스하자고.”

“…….”

“사랑하는 사람이랑 섹스하면 온 세상이 꽃밭같이 느껴진대. 로즈의 말이 맞는지 한번 해보자.”

이벨린의 말에 폴은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해 준 것에 대한 벅차오름과 더 깊은 관계를 원해서가 아닌 그냥 섹스가 궁금해서― 라는 의도가 분명한 말에 대한 서운함.

폴은 우선은 이 싱숭생숭한 감정은 숨기기로 했다.

그날 밤, 폴과 이벨린은 아침이 될 때까지 함께 있었다. 이벨린과 몸을 섞으면서 폴은 쾌락과 동시에 짜릿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세레즈는 여동생 상상을 하면서 자위나 하는데 나는 이벨린과 직접 관계를 맺고 있다. 내가 더 낫다. 이벨린에게는 세레즈보다 폴이 더 소중하다.

그러나 그 쾌락과 승리감은 사정의 여운이 끝난 후 진흙탕으로 나뒹굴었다.

“어디가 꽃밭이라는 거야.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 건가.”

옷을 갖춰 입은 이벨린이 무심하게 한 말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벨린은 폴을 남겨둔 채 먼저 밖으로 나갔다. 오전 수업이 있어서 준비해야 한다는 말만을 남기고선.

홀로 남겨진 폴은 생전 처음 비참함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이벨린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일까. 텅 비어버린 옆자리가 유독 차게 느껴졌다.

갈수록 자신에게 소홀해져 가는 이벨린과 상처뿐인 연애를 계속하고 있는데 세레즈로부터 이만 이벨린한테서 떨어지라는 명이 내려왔다.

이벨린과 자신, 둘만의 이야기를 세레즈에게 얘기하기 싫어서 시시하게 둘러댄 것 때문인지 세레즈는 이제 그런 밋밋한 이야기로는 사정하지 못했다.

딱히 시시하게 둘러댈 것도 없이 실제로 이벨린과의 만남은 일주일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줄어든지라 할 이야기도 없었다.

세레즈의 결단으로 인해 이벨린과의 관계는 끝을 맺었다. 이벨린은 폴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고 폴만이 그녀를 의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폴은 이벨린을 잊지 못했다. 세레즈의 철저한 감시가 이어진 탓에 이벨린에게 제 마음을 다시 고백하지 못한 것이 답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세레즈가 이벨린과 애쉬의 관계에 대해 알아오라고 새로운 명을 내렸다. 폴은 그것을 핑계 삼아 조금 더 자유롭게 이벨린에게 접근했다.

확실히 이벨린과 애쉬의 관계는 단순히 친한 선후배로는 보이지 않았다.

황자임에도 불구하고 깍듯이 선배들한테 예의를 지키는 애쉬이나 그 내면에 숨겨져 있는 발톱이 얼마나 거대하고 날카로운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황자님이 이벨린 앞에서는 말 잘 듣는 애완 사자가 되어 꼬리를 살랑거리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벨린도 마찬가지였다. 사귈 당시에 한 번도 다정하게 웃어준 적 없던 그녀가 애쉬에게만은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화가 났다. 세레즈만 끼어들지 않았어도 애쉬를 향한 저 웃음은 자신에게 오는 거였는데.

폴은 애쉬와 이벨린의 사이를 떨어드리기 위해 세레즈를 적극 활용하였다. 둘의 밀접한 사이를 착실히 세레즈에게 보고하여 손 안 대고 코를 풀 심산이었다.

그러나 방향이 어긋났다. 폴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도래해 버렸다. 레드릭이 사망하고, 이벨린이 미치고, 로즈가 실종되었다.

‘…난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 그냥 이벨린이 나를 향해서만 웃어주길 바랐는데.’

폴은 혼란스러웠다.

이벨린은 전에 없던 나약한 모습으로 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폴은 이벨린의 눈물을 보며 휩싸였던 충격을 털어내기로 했다.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마음. 자신만을 바라보는 이벨린이 좋았다.

세레즈에게 가서 조금 뻗대는 마음으로 얘기했다.

“이벨린이 저하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합니다. 지금은 놓아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런 불안정한 이벨린이 믿고 있는 건 오직 폴 크로우, 자신밖에 없다는 것도 얘기했다. 세레즈는 얼마간 말이 없더니 이벨린이 자살하는 것만은 막아야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이벨린은 폴을 구원자처럼 절대적으로 믿고 따랐다.

세레즈에겐 이벨린이 죽음이 두려워지는 그 순간에 데려가는 게 좋다고 일러두었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녀의 두려움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레즈의 시선이 닿지 않는 길덴에선 이벨린에게 정신과 상담사를 붙여놓았다. 상담의 목적보다는 감시의 목적이 더 컸긴 했지만 이벨린의 마음과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인 건 맞으니 하루빨리 치료되었으면 했다. 그래야 애쉬에게 보여주었던 그 다정한 웃음을 자신에게도 내어줄 여유가 생길 테니까.

이벨린이 완전히 낫게 되면 그녀에게 정식으로 프러포즈할 것이고, 건강한 정신인 그녀를 첩으로 들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세레즈는 화나서 길길이 날뛸 게 분명하나 어차피 여동생을 부인으로 들이진 못한다. 세레즈에겐 대외적으로만 자신의 첩으로 맞이한다고 얘기해 두면 될 것이다. 로벤스디가와 사돈을 맺고 싶어서 찾아드는 수많은 혼처를 쉽게 거절할 수 있는 핑곗거리 아니냐며 덧붙이면 된다.

온전한 정신인 이벨린은 세레즈가 아무리 미친 짓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곁에 있어줄 것이다.

나의 첩으로. 나의 사랑스러운 연인으로.

그래, 온전한 정신일 때의 이벨린이라면.

그러나 세레즈가 생각보다 빨리 길덴으로 향하려고 한다. 세레즈와 이벨린. 불안정한 서로는 서로를 망가뜨릴 뿐이다.

내가 어떻게 보살펴 왔는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지도 모른다. 둘을 만나게 해선 안 된다. 폴은 길덴으로 향하는 물살이 자신의 마음만큼이나 거세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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