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불안정한 서로는 서로를 망가뜨릴 뿐이다 (1)
비밀은 없다. 관객들을 기만한 유명 배우 하만 드레이프의 몰락!
헤드라인은 아니었어도 일주일이 넘도록 꾸준히 실리고 있는 기사다. 하만이 출연하기로 했던 작품들은 줄줄이 취소되고 하만은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주느라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앉아버렸다.
평소 기넬의 신문이라면 하만의 횡포는 충분히 헤드라인에 걸릴 만한 이슈였으나 그보다 더 큰 화젯거리가 기넬을 떠나고 있지 않았기에 헤드라인 자리는 양보되어야 했다. 사흘만 머무르기로 했던 황제가 열흘이 넘도록 기넬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기넬은 때아닌 호황에 어딜 가나 웃음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기 위하여 외부 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고 상인들의 주머니가 줄어들 틈도 없이 배를 불리고 있었다.
게다가 일정을 칼같이 지켜왔던 황제가 오직 기넬에서만 일정을 연장시키니 기넬 사람들은 생전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자긍심으로 어깨가 한껏 위로 올라갔다.
특히 델베스의 경우 자신들의 공연이 황제 폐하의 마음에 쏘옥 든 게 분명하다며 이러한 멘트로 홍보하기 시작했고 그 효과는 델베스의 티켓 판매량을 껑충 뛰게 만들어 주었다.
아브모르나는 하만의 몰락으로 인해 끝끝내 막을 올리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아브모르나의 사정을 낱낱이 알게 된 대중들이 우리 극단에 동정을 표하기 시작했고 희곡을 다른 극단에 팔려고 했던 극작가는 대중들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아브모르나에 희곡을 남기기로 한 것이다. 하만의 자리를 대신할 주연을 새로 뽑고 연습한 뒤에 공연을 재개하기로 한 아브모르나는 그 어느 때보다 바빠 보였다.
아브모르나의 극단원 소속인 나를 빼고 말이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있을까요?”
침대 시트를 갈아주던 하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시선 한번 건네지 않고 묵묵히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이 하녀가 나에게 악감정을 품고 부러 대꾸하지 않는 게 아니란 걸 안다. 게다가 오늘 처음 본 사람인걸.
시계도 달력도 없는 이 방에서 일곱 번의 달을 보았다. 화장실에 가는 것과 세면을 할 때 빼고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거나 앉아있기만 했다. 식사도 침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침대 시트를 갈아주는 하녀처럼 간혹가다 이 방에 사람들이 오고 가긴 했는데 한 번 본 사람은 두 번 다시 이 방에 오지 않았다. 매일, 매 순간 다른 사람들이 와서 식사와 갈아입을 옷을 주거나 청소하고 나갔다.
나는 마구간에 묶였을 때처럼 탈출을 감행하진 않았다. 이 방을 나간다고 해도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어서다. 아브모르나가 공연 준비를 재개한다고 하더라도 주연만 바뀔 뿐이지 다른 것들은 동일하니 아역 담당, 드라마트루기가 해야 할 건 없었다. 즉 나는 할 일이 생길 때까지 시간만 보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구태여 나갈 필욘 없지. 아직은.
지루하고 무료한 것만 빼면 이 공간은 나쁘지 않았다. 아브모르나의 낡은 기숙사처럼 옆방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됐고, 주먹만 한 바퀴벌레가 기어 나와서 잠을 방해할 일도 없었다.
“오늘 점심은 뭐예요? 가능하다면 생선 요리가 먹고 싶은데. 아, 절대 연못에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고요.”
답이 없는 하녀를 향해 횡설수설했다. 그녀에게서 대답을 바라고 건넨 말은 아니었다.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되었고 식사는 토마토 스튜가 전부였다. 시종들이 단순히 대꾸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 말이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는 게 확인된 순간이었다.
내가 진짜 귀신이라도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래, 착각이다. 귀신한테 토마토 스튜를 가져다줄 사람은 없으니까.
또 일곱 번의 달을 보았다. 무관심 속에서 나는 충동적으로 며칠은 아예 음식을 먹지 않아보았다. 배고프다고 악을 질러대는 배를 붙잡고도 고집스레 스푼을 집지 않았다.
혹시나 했건만 왜 음식을 먹지 않았냐고 꾸중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안다, 괜한 객기를 부렸다는걸. 먹지 않으니 힘이 빠지고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먹은 것도 없는데 헛구역질까지 나왔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내일 아침은 반드시 음식을 먹으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웬걸, 아침 식사가 나오지 않았다.
“저, 식사는요?”
처음 보는 시종은 답이 없었다.
내 꾀에 내가 넘어가는구나. 으레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배고파서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괜한 짓을 했어. 얌전히 주는 밥이나 먹을걸.
내가 자초한 짓인데 못 견디게 서럽고 우울해서 눈물이 흘렀다. 잠이라도 오면 좋으련만 배고픔은 쉬이 잠도 들지 못하게 했다.
초라한 적막이 흐르는 와중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누군가 내 앞에 섰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인기척의 주인이 애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배고파.”
“…….”
“잘못했어. 안 그럴게. 먹을 것 좀 줘.”
애쉬의 발이 멀어져 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게 손을 뻗었으나 마음과 다르게 손가락 하나만 까딱거려질 뿐이다. 애쉬를 잡지 못했다. 그러니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릴 수밖에.
기적처럼 아침 식사가 나왔다. 가시가 발라진 생선 요리가 눈앞에 나타나자마자 주책맞게도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포크와 스푼의 존재도 잊고 생선 살을 손가락으로 퍼서 입에 가져다 넣었다.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음식물이 온전히 입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생선 살 하나도 아까워서 떨어진 것도 모조리 주워 먹었다.
식사가 끝나니 그릇은 새것처럼 깨끗해졌다.
점심, 저녁을 거치자 몸에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 새까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 반말했네. 그 자리에서 목이 잘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왜 반말했는데도 그냥 넘어가 준 거지? 반말로 예의 없이 말했는데도 심지어 애쉬는 내 부탁을 들어준 건가? 배고프다고 하니 다음 날 아침 식사가 나왔잖아. 이건 명백히…….
순간 벅차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가슴이 풍선이 된 것처럼 빵빵해지고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내 말을, 내 말을 들어줬어. 난 귀신 따위가 아니었어.
그리고 또 일곱 번의 달을 보는 동안 애쉬는 매일 새벽마다 내 방에 들렀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서 침대맡에 서있다가 일정 시간이 되면 나간다.
나는 애쉬가 무슨 표정으로 침대맡에 서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불 꺼진 방은 한 치 앞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캄캄했으며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애쉬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방 밖으로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쉬가 들어올 때면 가만히 잠든 척했다. 그래야 누군가가 나를 지켜봐 주니까.
두 번의 달을 더 보았다. 이젠 나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듯 오늘 밤은 아주 커다란 보름달이 떴다.
터벅, 터벅.
방문 너머로 아스라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달을 보고 있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나는 커튼을 닫고 뛰듯이 침대 위로 날아올라 이불을 목 아래까지 덮었다.
간발의 차이로 애쉬가 들어왔다. 놀란 나머지 심장이 세게 쿵쿵 뛴다. 또 나가 버리면 어쩌지. 자는 척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숨을 꾹꾹 참으며 느리게 내뱉었다.
애쉬는 오늘도 한마디의 말도 없이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 목을 조르는 상상이라도 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조금 슬플 것 같긴 하지만… 이내 내 업보려니 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움찔.
바보같이 몸을 일으킬 뻔했다. 애쉬의 차가운 손끝이 턱 아래에 닿았기 때문이다. 상처가 아물어 붕대를 푼 지 한참이나 된 그 부위였다.
진짜로 목을 조르려는 건가. 안 되는데, 내일은 약속이……. 기미가 보이면 있는 힘껏 발버둥 쳐서 창문 밖으로 뛰어나가야겠다. 방의 위치가 고층이라 잘못 떨어지면 머리가 깨져서 죽거나 어디 한 곳이 부러질지도 모르지만 어찌 됐든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지 않은가.
아찔한 탈출 계획을 세우고 있던 게 민망하게도 애쉬는 목을 졸라 숨통을 끊어 놓으려는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내 뜨끈한 체온이 시린 애쉬의 손끝에 옮겨붙을 때까지 애쉬는 가만히 손가락을 올려놓기만 했다.
맞닿아 있는 느낌이 좋았다. 누군가와 교류하고 있다는 생각에 공허했던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다. 충만할 정돈 아니었으나 그래도 이게 어딘가. 이 접촉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간절히 속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신은 내 편이 아니기 때문에 애쉬의 손가락은 금세 떨어져 나갔다. 이윽고 문이 닫혔다.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턱 아래에 닿았던 감촉을 상기시키며 손으로 소중하게 쓸어보았다. 오늘은 쉽게 잠이 올 것 같진 않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으나 피곤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체로 활기가 돈다.
아침 식사가 오기 전에 나는 창문을 타고 넘었다. 한 달간 이 방에 머물면서 외벽을 꼼꼼하게 살핀지라 어디에 홈이 나있고 어디를 짚으면 되는지가 완벽히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래도 높이가 높이인지라 겁이 나는 건 사실이었다. 조심조심 발을 움직여갔다.
3층 높이까지 다다를 즈음 어디선가 “이봐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마음이 급해져서는 그냥 뛰어내렸다.
우둑.
발목에서부터 좋지 않은 소리가 들려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절뚝거리는 발로 열심히 뛰어 담벼락을 찾았다. 10년도 더 전이긴 하지만 로벤스디가의 높은 담벼락도 혼자 넘었던 나이다. 이곳이라고 못 할 게 어디 있겠어.
다행히 담벼락은 높지 않았다. 손을 쭉 뻗으면 손끝이 턱에 걸릴 정도였다. 힘을 주어 상체를 일으키고 다리를 걸었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문제였으나 이것도 눈을 꽉 감고 그냥 뛰어내렸다.
으윽.
통증이 머리를 울린다. 이를 악물고 뛰었다. 쫓아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 *
우선 유진 선생님의 집으로 찾아갔다. 오늘은 상담이 있는 날이었다. 겨우 끝나가려던 상담을 무단결석으로 인해 수포로 되돌리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유진 선생님 집에 도착했음에도 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선생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5년 전에 처음 나를 봤던 그 표정과 비슷했다.
유진 선생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찌 됐든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오해라고 운을 띄웠다.
“꼴이 이렇지만 전 아주 멀쩡해요. 늦잠 자는 바람에 신발 신는 것도 잊고 뛰어왔어요. 그러다가 몇 번 넘어지고 그래서 발이 조금 다친 것뿐이에요.”
“이해해요, 사라. 우선… 그래요, 의원을 부르도록 하죠. 대화는 그 후에…….”
“안 돼요. 죄송하지만 오늘은 상담을 오래 할 수가 없어요. 폴이 오는 날이거든요.”
나는 조금 시무룩하게 말했던 것 같다. 상담 시간이 즐거웠던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유독 그랬다. 나에겐 대화가, 나에 대한 아주 많은 대화가 필요했다.
유진 선생님이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물었다.
“좋아요. 그럼 대화는 다음으로 미루고 치료부터 해요.”
턱 아래의 상처가 나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엔 오른쪽 발목에 부목을 덧댄 붕대가 칭칭 감아져 버렸다.
“치료비는 꼭 갚을게요. 이번 달엔 일을 못 해서… 다음 달에 새 작품 들어가면 그땐 드릴 수 있어요.”
“폴에게 청구할게요. 괜찮아요.”
사실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치료비를 왜 폴한테. 유진 선생님께 사정해 가며 시간은 늦어도 제가 꼭 드릴 테니 폴한테는 아무 말 말아 달라고 했다. 유진 선생님은 늘 그렇듯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대신 다음 주에는 꼭 대화할 수 있게 시간을 빼놓으셔야 해요. 알겠죠?”
“걱정 마세요. 저 약속은 잘 지키잖아요. 오늘은 좀… 여러 가지로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이렇게 돼버렸지만.”
“알아요. 전 사라를 믿어요.”
치료비로도 모자라 유진 선생님의 신발까지 빌려 신어버렸다. 계속 신세만 져선 안 되는데.
월급이 나오면 사과잼이라도 만들어서 가져다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폴과 만나는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작은 부둣가 근처의 호프집이었는데 이곳은 계절과 시간에 상관없이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 * *
절뚝거리는 다리로 호프집 문을 여니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나를 용케도 발견한 폴이 화들짝 놀라며 부축했다.
폴이 의자를 빼주고 나를 앉혔다. 테이블 위에는 치즈 파이와 맥주가 놓여 있었는데 한 입도 먹지 않은 치즈 파이는 다 식어있었다.
“언제 온 거야?”
“방금. 그것보다 너 다리가 왜 그래?”
누가 봐도 방금 온 모습이 아니었건만 폴이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더 묻진 않았다.
“오다가 넘어졌어.”
나도 말하고 싶지 않은 걸 말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곧이곧대로 믿은 폴은 걱정 어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듣는 것이 힘들어 화제를 돌려버렸다.
“후계자 수업은 할 만해? 저번 달에는 계속 다 죽어가는 소리를 했잖아.”
“힘들어도 적응해야지. 어쩔 수 없어. 가주가 되려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사라…….”
폴의 머뭇거림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나 결혼해.”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축하해.”
내가 아브모르나에 취직한 이후 일주일에 한 번에서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찾아오던 폴이 작년부터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오기 시작했다. 적령기가 지났음에도 애인을 만들지 않은 폴이기에 그런 부분에선 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건 축하해 줘야 할 일이다.
하지만 폴은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정략결혼을 피할 수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닥쳐보니 당황스럽더라. 상대는 페로시 후작가의 장녀인데 금 광산을 몇 개나 가지고 있다고 해. 우리 가문의 미래를 생각하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혼담이었어.”
“그쪽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난 잘 몰라. 그냥 네가 행복하길 바라.”
굳은 입술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던 폴은 맥주를 들이켰다. 싸구려 맛이 나는 맥주를 잘 마시지 않던 폴이었다. 지금의 행동은 이례적인 거라고 할 수 있다.
“사라, 내가 생각해 봤는데… 페로시와의 식이 끝나면 널 우리 가문으로 데리고 갈까 해.”
“뭐, 날? 거기서 네 시중이라도 들라는 소리야? 못 할 건 없지만 난 아브모르나에 있는 편이 더 좋아.”
…게다가 거긴 황성이, 로벤스디 저택이 있는 수도잖아. 두 번 다시 펜테리온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 다짐은 황제가 서대륙을 통일하면서 어그러졌다 치지만 그래도 그렇지, 대뜸 수도에 가는 건 여전히 위험하다.
폴은 고개를 저었다.
“능력이 된다면 말이야, 가주들은 부인을 한 명만 두지 않아. 정실이 따로 있을 뿐이지 대부분은 첩을… 거느려.”
폴의 말에 인상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목소리도 조금 커졌다.
“지금 네가 말한 첩이 혹시 날 뜻하는 거야?”
침묵은 곧 긍정을 뜻했다.
한 달 만에 만나서는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며 화라도 내주고 싶었으나 그간 폴에게 받은 도움이 너무도 많은지라 차마 그러지 못했다.
폴은 나의 이런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
“어감이 조금 그렇긴 한데… 실상은 나쁜 자리가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아. 서민 중에서 귀족의 첩이 되는 게 일생일대의 꿈인 사람들도 흔한데.”
짙게 찾아드는 거부감을 이성적으로 표현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의자를 앞으로 당기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난 지금의 삶에 만족해. 적긴 하지만 돈도 벌고 있고 동료들도 생겼고, 날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서 기뻐. 그리고 수도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아.”
완고한 의사가 전달되었을까. 폴은 말이 없었다. 차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평가당하고 있는 것만 같은 시선에 목 뒤가 불편해졌다. 움츠러들고 싶은 마음을 어깨를 내려 꿋꿋이 참았다.
이곳은 동화 속 세상이 아니라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이러한 일방적인 관계는 단순히 호의만으론 지속될 수 없다. 명백한 갑을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을은 당연히 나고.
폴은 지금 내 대답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기대하고 있던 기준치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그렇게 얘기할 줄 알았어. 그럼 이건 어때, 길덴에 남아있는 채로 혼인하는 건? 나는 가문 때문에 수도로 가야 하겠지만 일이 없을 때는 지금처럼 길덴에 내려와서 너랑 시간을 보내고 싶어. 오랫동안.”
여기서 내가 ‘네놈 첩살이를 하라고? 더워서 뇌가 녹아내렸나 본데, 바다에 죽지 않을 정도로만 잠겨있어 볼래?’라고 한다면 폴이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다.
즉 난 5년 동안 폴의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거다. 폴과의 사이가 틀어지면 최악의 경우엔… 나를 잡아다 세레즈에게 넘겨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폴은 내 약점을 쥐고 있는 완벽한 갑이다.
“…….”
“길덴에선 로벤스디 공작 저하를 만나게 될 일도 없잖아. 혼인만 나랑 하는 거야. 그러면 그 낡은 기숙사에서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돼. 더 좋아질 뿐이지 너에게 나쁠 건 하나도 없어.”
폴이 나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난 5년간 몇 번의 고백을 해오기도 했었고. 그때마다 내 심리 상태가 편치 않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했었다. 핑계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유진 선생님이 내 상태를 또 폴에게 보고했구나. 저번 달의 상담 결과가 좋았던 것을 유진 선생님이 폴에게 전달했고 폴은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결혼이라니.
사랑하는 사람이랑 한다고 쳐도 여러 가지 재고 따져봐야 할 것이 많은 게 결혼인데 하물며 마음도 없는 폴과의 결혼은 어떻겠는가. 내 인생을 바꿔준 고마운 은인이긴 하나 이건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달콤하게 속삭인다 한들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폴이 협박이라도 해 오면 그땐 어쩔 수 없겠지만.
“폴, 그래도…….”
어렵게 입을 떼자 폴이 금세 태세를 전환했다. 눈동자가 퍽 다정한 빛을 띤다.
“미안해. 내가 너무 성급했지? 천천히 생각해도 좋아. 난 너한테 다 맞춰줄 수 있으니까. 그냥 우리 관계가… 조금 더 정확해지면 어떨까 해서 말해 본 것뿐이야.”
천천히 생각하라니. 죽고 나서 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생각해 봐야겠다.
비록 첩의 자리이긴 하나 프러포즈하고 거절한 사람들의 대화치고는 담백한 이야기가 오갔다. 수다스러운 폴의 후계자 수업에 대한 이야기가 9할이었고 간혹가다 내 한 달간의 근황에 대해 묻는 질문이 나머지를 차지했다.
“아, 폐하께서 길덴에 오래 머무신다는 얘기는 들었어. 혹시 마주치거나 한 건 아니지?”
“괜찮아.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어.”
말하기가 무섭게 우리가 앉아있는 테이블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폴이 “뭡니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안의 동물적인 감각이 위험을 감지했다.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한 채 다 식은 치즈 파이가 담겨있는 접시만 바라보다가 기회를 노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목덜미가 잡혀버렸다. 잽싸게 도망가려던 허술한 계획은 처참히 실패했다.
“뭐 하는 짓입니까!”
폴이 당황해 외쳤다.
목덜미가 잡힌 후에야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마구간에서 빈 그릇을 가져다주던 그 여자다. 키가 큰 건 알고 있었는데 폴과 비등할 정도로 장신이었다. 덕분에 목이 졸린 나는 켁켁 하는 불쌍한 기침 소리를 내어야 했다.
여자는 폴의 말을 무시한 채 날 향해 얘기했다.
“버릇을 고쳐 놔야겠군.”
“버릇은 무슨……!”
네 말버릇이나 고쳐라!
가축을 끌고 가듯이 나를 질질 끄는 여자를 막아선 건 폴이었다.
“비켜라.”
“그 손 놓으십시오.”
퍼억.
용맹하게 여자의 길을 막아선 것에 비해 결과는 초라했다. 복부를 강타당한 폴이 배를 잡고 바닥에 풀썩 쓰러져 버린 것이다. 여자의 무력에 놀란 나는 반항하던 것도 잊고 두 눈만 끔뻑거렸다.
“난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다.”
…눈이 있다면 보세요. 당신이 친 사람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잖아요.
더 이상의 반항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여자에게 얌전히 몸을 맡겼다. 폴에게서 멀어져 가는 와중에 태연하게 소리치면서.
“미안해, 폴! 내가 사채를 끌어다 쓰는 바람에 너까지 피해를 입을 줄이야. 사는 게 너무 쪼들려서 어쩔 수 없었어! 원금보다 이자가 더 많아서 내가 다 갚을 수 있을진 모르겠다! 난 평생 쫓겨 다녀야 할 것 같아. 이 사람 완전 끈질겨! 내 인생은 끝났어!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
다급함에 아무 말이나 내뱉긴 했으나 참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름 머리를 굴려서 한 말이긴 했다.
우선 폴에게 애쉬와 마주쳤단 사실을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재회라고 표현하기엔 말이 주는 느낌이 쓸데없이 낭만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더 이상 나에 대한 그 어떤 것도 폴의 귀에 들어가길 원하지 않는다. 폴의 도움 혹은 간섭은 부담이자 내가 갚아야 할 빚이고 또 나를 쥐고 흔들 목줄이 된다.
내가 그어놓은 선을 자꾸만 넘으려는 폴은 확실히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많고 많은 핑계 중에 굳이 사채를 선택한 이유는 첩 자리를 제안한 폴의 마음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갚아야 할 돈이 산더미처럼 불어나는 사람을 누가 첩으로 맞이하고 싶겠는가.
* * *
여자는 내가 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차에 구겨 넣어버렸다. 쿵! 창문에 머리를 찍었는데 아파할 틈도 없이 여자가 바짝 내 옆자리에 붙어서는 문을 닫아버린다.
“날 보고 사채업자라니. 뒷골목 건달들이나 하는 짓을 들먹이는 건 나를 향한 모욕이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정말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마구간에 묶어놓는다거나 다짜고짜 목덜미를 잡아채서 끌고 가는 행동이 뒷골목 건달이 아니면 뭐냐?!
하지만 신분의 벽이 뭐라고. 나는 웅얼거리며 사과의 말을 내뱉어야 했다. 아, 소시민이여.
그러나 표정만은 숨기지 못했는지 여자가 언짢은 낯을 했다.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면 거짓말 연습을 하는 게 좋을 거야.”
아, 실수했다. 이 상황에서 감정을 내보이는 건 좋지 않은데.
여자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뜻깊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속도 없군.”
하라는 대로 했는데도 난리야. 일그러지려는 미간 사이를 억지로 넓힌 채 “제가 그런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하고 비굴하게 말했다. 여자는 이후 말이 없었다.
나와 여자를 실은 마차는 애쉬가 머물고 있는 영주의 성으로 힘차게 달려갔다.
* * *
한 달 가까이 감금당했던 방 앞에 서자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방문을 열고 선 여자는 날 보며 턱짓했다. 안으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나는 또 귀신이 되는 걸까.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밉상으로 보이기만 했던 여자의 존재가 간절해졌다. 선뜻 방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통성명이나 할까요? 전 사라예요.”
“들어가라.”
“아브모르나에서 일하고 있어요. 제 이름을 대고 찾아오시면 좋은 자리의 티켓을 구하실 수 있을 거예요. 특등석까지는 조금 어려울지도 모르는데… 최선을 다해 볼게요.”
“…….”
“전 이름을 말씀해 드렸는데, 안 알려주실 거예요? 가르쳐주기 싫으시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제가 혹시나 실수할까 봐 그래요. 성이라도 알아야 예의를 갖출 수 있으니까요.”
“네가 날 부를 일은 없을 거다.”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조금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저 방에 들어가면 나 혼자만 다른 차원에 뚝 떨어진 것 같은 고독함에 집어삼켜질 거라는 걸 저 여자는 알고 있는 것이다.
“…전 폐하께 벌 받고 있는 거죠?”
“…….”
“말 안 해주셔도 알아요.”
아는데. 나는 참 영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 벌을 받기 위한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나의 색은 잿빛으로 변할 것이다. 그대로 바스러져 재가 되어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괜찮아, 나쁘지 않아.
피할 수 없으니 스스로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이미 부서져 버린 세계가 조금 더 바스러진다 한들 더 처량해지진 않을 테니까. 괜찮아.
마음을 다스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거센 힘이 팔뚝을 잡고 방 안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반사적으로 뒤를 바라보았다. 닫히는 문 사이로 여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보였다. 시선을 돌려 팔뚝을 보았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꼭 넝쿨같이 붙어있다.
애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새벽도 아니었고 어둡지도 않았다. 햇빛이 드리우는 고독한 방 안에서 애쉬가 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
그러나 나의 들뜬 감상과 다르게 애쉬의 눈은 건조했다. 잡초가 무성히 자라난 것처럼.
“죄송합니… 앗.”
어깨가 뒤로 밀렸다. 갑자기 침대에 주저앉게 된 것보다 애쉬가 대뜸 무릎을 꿇고 붕대가 감긴 내 발을 들어 올려서 더 놀랐다. 잡힌 발을 빼내려 힘을 주자 이번엔 종아리가 잡혔다.
“놔주세요.”
“…….”
애쉬의 손아래서부터 금색 빛이 일렁였다. 퍼져나간 빛이 발목을 감싸며 원형의 고리로 변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고리는 또 다른 고리를 만들더니 이내 기다랗게 연결되었다. 사슬처럼 길게 늘어진 그것의 종착지는 애쉬의 발목이었다.
금빛 족쇄가 채워진 것이다. 나와 애쉬 사이에.
“의원을 불러줄 테니 치료를 받아.”
“자, 잠깐. 이건 뭐예요?”
길게 늘어진 사슬을 잡으려 했으나 손은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분명히 눈에 보이는데…….
“윽!”
나에겐 환영 같던 사슬이 애쉬에게만은 정확히 실재했다. 애쉬가 사슬을 끌어당기자 몸이 따라붙었다. 다친 발목이 시큰거린다.
“내 시선 밖으로 벗어날 생각 마.”
* * *
애쉬가 채워놓은 족쇄는 오로지 애쉬에게만 반응했다. 나는 만지지도 못하는 것을 애쉬는 자유자재로 조절하니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애쉬가 원할 때면 이것은 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길게 늘어나기도 했고 한 뼘 정도로 줄어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발목의 붕대를 갈아주던 의원에게 물었다.
“제 발목 어때요?”
멍이 들고 퉁퉁 부은 발목을 의원이 눈앞까지 들어 올리니 웬 미친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답한다.
“아파 보이네요.”
의원의 손은 족쇄를 통과해 가며 새 부목과 붕대를 감아갔다.
치료가 다 끝나자 의원이 가방을 정리했다.
“벌써 가시게요?”
다급하게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의원은 난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치워냈다. 그러곤 인사말도 없이 방을 나가 버린다.
유일한 대화 상대가 사라지자 또다시 방 안이 잿빛으로 변해 버렸다. 이 방에 드나드는 하녀들은 전과 같이 나에게 침묵했으며 의원과는 환자의 상태를 알아야 하니 몇 가지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치료가 끝나면 방금처럼 쌩하니 나가 버리는 게 아쉽다면 아쉬웠다.
무릎을 모으고 앉아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붕대로 칭칭 감긴 발목 위의 족쇄를 만져보았다. 실제로 만져지는 건 딱딱한 부목의 감촉뿐이다. 할 수만 있다면 길게 늘어진 사슬을 잡아당기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슬은 내 손 안에 잡혀주지 않았다.
해가 자취를 감추면 애쉬가 찾아왔다. 태양보다 눈부신 금발은 여름의 열기만큼이나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 주었다. 길게 늘어져 있던 사슬이 팔 하나의 길이로 짧게 줄어든 것을 보면 안심이 된다.
이제는 애쉬가 찾아와도 자는 척하지 않아도 되었다. 애쉬는 나와 함께 이 방에서 밤을 보냈다. 내가 눈을 뜨건, 잠결에 뒤척이건 상관없이 말이다.
족쇄가 채워진 날 밤, 밤사이 찾아온 애쉬가 이불을 들추고 침대 위로 올라왔을 땐 나도 모르게 “뭐야, 너!” 하고 외쳐버렸다. 그만큼 당황했다는 뜻이다. 재빨리 실수를 깨닫고 사과했으나 애쉬는 등을 돌려 눕기만 했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느껴질 리 없는 족쇄의 감촉이 유독 차갑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여기엔 왜 온 거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려는 건가. 이렇게 손수 감시할 거면 족쇄는 왜 채워놓은 거람.
애쉬의 돌발 행동은 많은 의문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 의문들보다 더 나를 당황시킨 건 주책맞게도 가슴이 콩닥거린다는 거였다. 5년 전의 그 애쉬가 아님을 아는데도 심장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렇게 내 옆에 얌전히 누워있는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아, 미쳤다. 미쳤어.
영양가 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밤을 지새우다가 새벽 늦게 앉은 채로 잠이 들어버렸다.
눈을 떴을 땐 하녀가 식사를 가지고 온 직후였고 옆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찾아들었다. 허기인가 싶어서 그날 아침은 빵 한 조각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다 먹어버렸다.
또 밤이 찾아왔고 그날은 애쉬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황궁으로는 언제 돌아가세요?”
“…….”
“혹시 길덴이 마음에 드신 건가요? 진짜 델베스 공연 때문은 아니죠? 델베스 쪽 무대가 화려하긴 해도 그 번지르르한 외관에 속으시면 안 돼요. 작품성은 아브모르나가 더 뛰어나다고요. 배우들 연기도 우리 쪽이 훨씬 낫고요.”
“…….”
“아역 배우들도 어찌나 작품 분석이 훌륭하게 되어있는지 연기가 기성 배우들 못지않아요. 제가 꼭 아역 배우 담당이라서 말씀드리는 건 아니고요……. 아, 신문에서 보니까 폐하께서 수도를 길덴으로 옮기는 거 아니냐고 뜬구름 잡던데, 아니시죠? 그래도 수도를 어떻게 하루아침에 옮겨요.”
“…….”
“그래서 수도는 언제 가실 계획이세요?”
애쉬는 답이 없었다. 조금 무안하긴 했으나 사람을 옆에 두고 떠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 상대가 애쉬여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애쉬는 자고 있는 걸까. 방 안이 어두컴컴해서 확인이 어려웠다. 애쉬의 너른 어깨가 희미하게만 보여서 혹시 애쉬가 옆에 누워있는 게 내 망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만져보면 알 수 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손이 절로 움직였다. 손끝이 애쉬의 어깨에 닿으려는 찰나―
“빨리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화들짝.
황급히 손을 내렸다. 밤과 어우러지는 저음이 생생했다.
“네?”
“흥미도 재미도 다 떨어져서 옛날에 버린 어린놈이 갑자기 황제랍시고 찾아와서 속박하니까 신경질 나고 귀찮아 죽겠지.”
“갑자기 그게 무슨…….”
애쉬가 내 어깨를 잡아 침대에 눌렀다. 어두워서 애쉬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목소리는 덤덤했는데 어깨를 쥔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도망칠 때마다 끈질기게 잡아 오는 내가 짜증스럽게 느껴지나? 이 작은 머리통으론 어떻게 하면 저 황제 놈을 떨쳐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겉으론 죄스러운 척, 불쌍한 척.”
“…….”
“이젠 안 속아.”
“폐하.”
“그 가증스러운 노력을 봐서 돈이라도 쥐여줄까?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어. 돈으로 작위를 사든 집을 사든 섬을 사든 마음대로 해. 단, 내 옆에서 떠날 생각은 마. 내가 질릴 때까지 한 발자국도 못 떠나.”
애쉬의 겁박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안쓰러워 보였다. 예전의 나였더라면 애쉬의 넓은 등을 안아주고 토닥여 주면서 뭐가 그렇게 무서울까― 하며 달래주었을 것이다.
“…폐하께 받는 돈은 필요 없어요.”
어깨에 맞닿은 애쉬의 손이 꿈틀 움직였다.
“…….”
“예전에 과외비로 주셨던 것도 결국은 한 푼도 못 썼어요. 생활고가 심해질 때면 그때 아카데미에 남겨두고 온 돈이 아까워서 죽을 것 같다가도 폐하만 생각하면 돈에 대한 미련 같은 건 말끔히 털어지더라고요. 저도 양심은 있나 봐요.”
“…….”
“그러니까 돈은 됐어요. 어차피 줘도 못 써요.”
“…날, 생각했다고?”
애쉬가 믿기 어렵다는 투로 얘기했다. 돈 얘기를 하다가 왜 핀트가 그쪽으로 튀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은 하나 더 있었다. 내가 이 상황에서 부끄러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 환장하시겠네. 아무래도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 이상한 부끄러움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고 있을 때 애쉬의 손이 떨어졌다.
팽팽하게 당겨있었던 사슬이 늘어남을 느꼈다. 애쉬가 방 밖으로 나가려는 것이었다.
“아직 대답을…….”
“하지 마.”
애쉬가 나가고 방문이 닫혔다. 사슬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다음 날, 밤늦도록 애쉬는 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말걸. 씁쓸하게 눈을 감았다.
애쉬가 오지 않았기 때문일까. 잠에 깊게 빠져들지 못하고 애매할 때에 깨버렸다. 커튼 너머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그러나 여명의 활기를 띤 빛은 아니었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사이의 푸르스름한 빛이었다.
할 것도 없는데 더 자자.
빛을 등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애쉬가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를 보고 있는 채로!
애쉬를 깨우지 않기 위해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끅― 하는 이상한 소리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혹시 애쉬가 깨는 거 아닌가 하고 바짝 긴장되었다.
애쉬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보고서야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언제 온 거지?
그나마 남아있었던 잠도 모조리 달아나 버렸다. 이런 상황에선 절대로 잠들지 못할 게 분명했다.
입을 막은 손을 천천히 내리며 애쉬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예쁘네.’
금발에 살짝 가려진 이마와 숱이 많은 긴 속눈썹. 그리고 작게 벌어진 입술까지. 무엇 하나 빠짐없이 아름다웠다. 5년 전에 비하면 얼굴선이 확실히 굵어지긴 했으나 유려한 미색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얼굴 뜯어먹고 산다는 게 무슨 말인 줄 알겠다.
숨죽여 애쉬의 얼굴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이 찾아들고 피로가 가시며 웃음이 튀어나온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손을 들어 올렸다. 손끝을 아주 조심스럽게 애쉬의 이마로 옮겨갔다. 흐트러진 금발을 정리해 주고 싶었다. 살랑거리는 금발의 감촉이 손끝에 닿을 때까지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만 같다.
검지로 금발을 쓸어주니 반듯한 이마가 훤히 드러난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조금 대담해진 손가락이 이마를 타고 콧대를 어루만졌다.
아, 안 돼!
이성이 뜯어말렸으나 손가락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검지가 애쉬의 입술에 닿았을 때는 조금 놀랐다. 근래에 만난 애쉬의 몸은 늘 차갑기만 했는데 입술은 불덩이를 삼킨 듯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기하여 아랫입술을 꾸욱 눌러보았다. 건조하지만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손가락에 넓게 파고든다.
재미있다.
누르면 눌러지고, 떼면 도톰하게 올라오는 입술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아, 내가 진짜 미쳤나 보다.
오랫동안 만지작거리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손을 떼려는 찰나, 손이 붙잡혔다. 눈이 커지고 딸꾹질이 튀어나온 건 바로 다음이었다.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려 애쉬를 보았다. 긴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애쉬가 눈을 깜빡인다. 그러나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상태는 아닌 것 같다. 눈동자에 투명한 막이라도 씌워져 있는 듯 몽롱해 보였다.
애쉬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내 얼굴이 마음에 들어?”
“……!”
그러고선 입술에 머물러 있던 손을 잡아끌어 제 뺨 위에 얹어놓는다. 심장이 쿵쿵 거세게 울렸다.
이러다 몸 밖으로 튀어나오는 거 아니야?
참을 수 없는 화끈거림에 당장이라도 침대를 벗어나고 싶은데 내 마음을 모르는 애쉬의 목소린 한없이 나른하기만 했다.
“다행이다. 얼굴이라도 좋아해 줘서.”
“…….”
“다 가져. 대신, 또 버리지만 말아줘요.”
애쉬가 뺨 위에 얹어진 내 손에 애교를 부리듯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온몸이 간질간질거렸다.
어쩌지. 손을 빼내야 하는데 애쉬가 단단히 붙잡고 있는 터라 여의치 않았다.
…사실 핑계다. 힘줘서 빼면 뺄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내가 싫은 거다. 손을 빼기가.
또 버리지 말아 달라는 말에 가슴이 저려왔다. 애쉬는 아마 5년 전의 꿈을 꾸고 있나 보다. 그래서인지 나도 사라가 아닌 이벨린이 된 기분에 빠져들었다. 나를 억누르는 모든 제약이 사라지고 오로지 애쉬와 나 단둘뿐인 세계에 있는 것 같다. 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이상했다.
대뜸 용기가 생겼다. 엄지손가락으로 애쉬의 뺨을 천천히 쓸어가며 그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보았다.
“애쉬.”
“…….”
‘……!’
아, 또 실수했다.
꿈결을 헤매던 애쉬의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들릴 리 없는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무언가가 조각났다.
뺨 위에 얹어진 손을 빼버렸다. 애쉬가 한발 늦게 제 손을 움찔거렸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 어떡하지. 아이 씨.
거기서 이름을 부르긴 왜 부르냐며 머릿속의 내가 나를 꾸짖었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 거야, 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하여 기지를 발휘했다.
“에, 에취.”
“……?”
“에취. 아, 감기가. 잘 안 떨어지네.”
울고 싶다. 너무 구질구질해. 애쉬의 미간이 좁아질수록 수치심이 찾아들었다. 겨우 생각해 낸 게 재채기냐.
“아이고, 일어나셨네요? 아침에 뵙는 건 오랜… 아니, 처음이네요. 저는 재채기 때문에 자다가 깬 거라서요. 이만 더 자보도록 하겠습니다.”
애쉬에게서 등을 돌려 누웠다.
아. 죽고 싶어, 진짜.
눈을 질끈 감고는 온 신경을 등 뒤로 집중시켰다. 애쉬가 느릿하게 일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팽팽하던 사슬이 느슨해졌다.
“…의원을 불러주겠다.”
짧게 한마디만 남기고선 애쉬가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날 점심쯤에 의원이 도착했는데 감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아침에 코가 가려워서 재채기한 것뿐이라고 둘러댔다.
의원은 “분명 감기라고 하셨는데…….”라고 중얼거리다가 정말 내 몸에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진찰을 끝냈다.
창가에 기대어 저무는 태양을 보면서 생각했다. 언제까지 애쉬와 같은 침대를 써야 하는 걸까.
애쉬와 같이 밤을 보내는 건 여러모로 나에게 좋지 않았다. 이성으로 제어가 안 되는 감정이 퐁퐁 솟아올라 나를 당혹시키고 그것은 곧 몸으로 옮겨붙어서 상황을 난처하게 만든다. 벌을 받고 있으니 그에 합당한 반성적인 태도를 보여야 하는데 잠든 애쉬를 보면 오히려 입가엔 미소가 걸린다.
내가 진정 미쳤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애쉬의 화는 풀리긴 하는 걸까.
애쉬가 수도로 돌아가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으면 좋겠다. 내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등 뒤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침대에 눕지 않았다. 이젠 자는 척하지 않아도 애쉬는 내일 아침까진 이 방에 머무니 괜찮았다.
별이 총총 박혀있는 하늘 구경이나 오래 하다가 애쉬가 일어날 때쯤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침대에 누워있으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으앗?!”
몸이 부웅 떠올랐다. 어느 틈에 다가온 애쉬가 내 몸을 안아 들어 올려 버린 것이다.
화악.
얼굴에 열이 오른다. 빨개졌을 것이 안 봐도 뻔하여 서둘러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내려주세요!”
발버둥 쳤음에도 애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어코 침대 위까지 올라가서 나를 조심스레 눕혀놓았다.
쿵, 쿵, 쿵.
아, 안 돼, 심장이 또.
상체를 벌떡 일으킨 순간 방을 환하게 비추던 조명이 꺼졌다. 그리고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침대 밖으로 나갈 수도 없게 말이다.
“…저 안 졸려요.”
소심한 외침은 암흑 속으로 먹혀들어 갔다.
하아.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위치를 조금 잘못 잡아 팔뚝과 애쉬의 등이 닿았다. 사소한 접촉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재빨리 몸을 옆으로 옮겼다.
“……!”
사슬이 더욱 팽팽해져 버렸다. 몸을 움직였던 것이 무색하게도 다시 끌려오고 말았다. 내 팔뚝과 은근하게 맞닿아 있는 등의 감촉이 엄청 신경 쓰여 죽을 것 같다. 왼쪽 팔만 살아있는 것처럼 맥박이 거세게 날뛴다.
아, 맙소사. 제발 진정 좀 하자.
눈을 꽉 감고는 숫자를 세었다. 빨리 잠에 빠져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신께서 웬일로 내 기도를 들어주셨나 했다. 세 자릿수를 넘어가기도 전에 내가 잠에 곯아떨어지는 은혜를 내려 주시다니.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빌어먹을…….”
신은 날 도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곤경에 빠뜨리기만 했다. 차라리 잠을 자지 말았어야 했는데… 애쉬를 부둥켜안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애쉬의 가슴팍에 안긴 채로 등 뒤로 손까지 둘렀다.
얼씨구, 난리 났네.
게다가 서로의 다리가 얽혀 들어가 틈도 없이 맞붙어있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나만 애쉬를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애쉬의 팔도 내 몸을 감싸 안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침착하자.
애쉬가 깨지 않도록 유의해 가며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곤 서서히 몸을 뒤로 빼려는 찰나 애쉬가 낮은 숨을 뱉으며 몸을 세게 끌어안아 버렸다.
아, 젠장! 환장하시겠네!
애쉬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눈썹이 움찔하고 움직였다. 아, 망했다. 자는 척할까, 어쩌지.
고민하는 사이 애쉬가 눈을 떴다. 그는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 품 안에 안겨있는 나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뜨거운 시선에 허허 웃으며 멋쩍게 말했다.
“사, 상냥하신 폐하. 제가 감기에 걸렸다고 이렇게 안아 주기까지 하시다뇨. (네가 안은 거임. 난 잘못 없음.)”
애쉬를 안았던 내 팔은 거둬들였으므로 모른 척 발뺌했다.
“…….”
내 말을 듣고도 애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는지 눈만 깜빡인다. 그러다 녀석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눈에 띄게 목덜미부터 귀가 붉어져 간다.
그리고…….
“아.”
뭉툭하고 딱딱한 것이 내 아랫배를 공격적으로 찌르고 있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감촉이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크기를 더욱 부풀려갔다.
“뭐가… 절 자꾸 찌르는데요……?”
손을 내려 아랫배에 눌려있는 그것을 슬쩍 밀었다. 그러자 애쉬가 발작하듯 몸을 튕기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아, 잠깐……!”
사슬을 풀 생각도 못 했는지 길이가 짧은 사슬째로 튀어 나가니 자연스레 내 몸도 딸려갔다.
우당탕!
침대에서 한 번 구르고 애쉬와 몸이 세게 부딪친 다음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니, 바닥이라고 하기엔 조금 지대가 높다.
“아윽, 사슬은 좀 풀고 당황해하시지 그랬…….”
“…….”
“어…요.”
신은 없다. 그래, 없어. 길덴에만 해도 수많은 신전이 있고 간증한 이들이 있고 실제로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제들이 있지만 여하튼 없다. 아무튼 없음.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깔고 앉은 게 애쉬고 하필이면 그 부위일 리가 없지 않은가. 다리 사이에 느껴지는 그 녀석의 존재감이 어마어마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애쉬가 팔목으로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좀, 비켜.”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가 야했다.
아, 놀려주고 싶어.
못된 마음이 찾아들었으나 지금만큼은 이성이 이겼다.
“잠시만요.”
“큿.”
엉덩이를 들어 올리자 솟아오른 페니스가 다리 사이에 비벼졌다. 애쉬가 앓는 소리를 내다가 황급히 입을 꾸욱 누른다.
“사슬 좀.”
금빛이 방 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광활하게 퍼져나갔다. 사슬이 끝도 없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좀 과한데.
애쉬에게서 완전히 비켜섰다. 얼굴만 보면 허둥지둥할 것 같았는데 그는 멀끔한 자세로 일어나더니 이내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목덜미에 드러난 붉은 살갗은 숨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다 변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네.”
무심코 목 뒤를 쓸어 보았다가 손바닥에 닿는 홧홧한 열기에 깜짝 놀랐다.
붉어진 건 비단 애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