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10. 비밀은 없다 (1) (21/42)

[2부]

10. 비밀은 없다 (1)

밑바닥을 내달렸다. 더 이상 침체될 곳 같은 건 없으리라고 생각했건만 음습하고 질척한 밑바닥이 발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마른 흙을 파 그 안에 몸을 누인다 한들 이것보다 캄캄하진 않을 것이다.

더욱 비참한 것은 머리 위를 검게 드리우는 벽을 뚫고 나갈 의지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애쉬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그쳐가던 비가 돌연 폭우가 되어 쏟아지고 급기야 강이 불어 넘쳤다. 견고하게 짜인 댐을 무너뜨려 버릴 정도로 강한 물살이 대지 위를 휩쓸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아카데미 근처를 조금만 벗어나면 비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자로 그어 놓은 것처럼 경계선이 확실했다. 먹구름이 끊긴 하늘은 햇빛을 고스란히 통과시켰다.

아카데미가 통째로 잠겨버릴 듯한 홍수는 애쉬의 폭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벨린의 유서가 발견되고 그 근처에서 늘 보아왔던 애달픈 낡은 구두 한 쌍이 발견되었다.

거짓말, 거짓말.

시신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절대 믿을 수 없었다. 이벨린의 갑작스러운 자살 앞에서 모두가 불편한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와중에도 애쉬는 흥분에 눈이 뒤집힌 채로 소리쳤다.

이 모든 게 다 거짓말이라고. 자기가 귀찮게 질척거리니까 선배가 화나서 벌주는 거라고.

날뛰는 애쉬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폭주하는 애쉬의 몸에선 가공할 만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마탑의 원로들도 감당하지 못하고 손가락만 쪽쪽 빨며 허둥지둥했고, 애쉬의 아버지이자 제국의 황제라고 다를 건 없었다.

아카데미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학생들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로 서둘러 가문으로 돌아가 버렸다. 긴 평화를 유지하던 펜테리온에 때아닌 재앙이 들이닥쳤다.

불어난 강 속에 이벨린의 시신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애쉬는 온 마력을 집중하여 강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 올렸다.

거친 물줄기의 끝은 바다로 이어지고 있었기에 시신 또한 떠밀려 갔을 거라 생각하며 모두가 찾기 어려울 거라고 고개를 저었는데도 애쉬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법으로도 찾지 못한 것을 무슨 수로 찾을 수 있을까. 애쉬는 차가운 물속에 수차례 몸을 던졌다. 체온을 빼앗는 물의 냉기 말고는 잡히는 게 없었다. 익사하기 직전에서야 끌어 올려지는 것을 반복했다.

폭우는 끝을 모르고 쏟아졌고 아카데미 인근을 벗어난 지역까지도 물이 넘쳐 흘러갔다. 펜테리온의 수도는 빠르게 잠겨가고 있었다.

세간은 황자의 광적인 폭주에 집중하면서도 애쉬를 제지하지 못한 마탑의 원로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탑의 원로들이 전부 힘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애쉬를 이길 만큼의 마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쉬의 마력이 고갈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만 있을 뿐이었다.

온 세상이 떠들썩한 와중에도 애쉬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거친 물살 아래에 이벨린이 잠겨있다는 생각만 하면 속이 뜨겁게 타오르고, 머리가 핑 울리면서 어떠한 것으로도 해소할 수 없는 슬픔이 몰아쳤다.

“선배, 죄송해요. 죄송해요.”

애쉬는 끊임없이 용서를 빌었다. 저에겐 너무 가혹한 벌이에요, 하면 이벨린이 짠 하고 나타나서 앞으론 까불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아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애타게 그리던 이벨린의 모습은 환영으로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상실감과 허망함에 애쉬는 또다시 폭주했다.

이벨린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직후부터 스스로의 존재 이유가 이벨린을 만나기 위함이었다고 맹신하던 애쉬였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 다음엔 선망이었다.

방학 중에는 이벨린이 과외해 주는 그 시간만큼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애쉬는 시체처럼 시계만 바라보면서 이벨린이 오는 과외 시간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하루라도 얼굴을 보지 않으면 초조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고, 손을 잡고, 키스하고, 맨살의 감촉을 느낀 이후에는 세계가 뒤집혔다.

스스로가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애쉬의 세계에 이벨린이 들어섰다. 자신은 그녀의 발아래에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사랑을 인지하고 고백한 이후에는 욕심이 생겨났고 그것은 집착으로 변모했다. 집착은 사랑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타일러 봤지만 날뛰는 감정을 자제하기란 펄펄 끓는 기름 속에 손을 집어넣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참기 힘든 일이었다.

몇 번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벨린에게 못난 모습을 보였다. 질투에 눈이 먼 남자의 추한 모습을. 그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이벨린은 애쉬를 향해 쌀쌀맞은 태도를 고수했으며 질려 버렸다는 말과 함께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게 했다.

울며불며 매달려도 이벨린은 돌아봐 주지 않았다. 그때도 무척이나 아팠다. 생살을 후벼 파고 그 위에 불쏘시개를 비벼 넣는 것만 같았다. 눈을 떠도, 감아도 애쉬는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고통은 참을 만했다는 것을 지금에야 깨달아 버렸다. 버려지고 내쳐져도 그때에는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이벨린이라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한 줌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홀로 남겨진 애쉬는 모든 것이 어둡기만 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비일상적인 공간에 영원토록 갇혀버린 것만 같았다.

이대로 가다간 펜테리온의 수도가 떠내려가 버릴 것이라며 드물게는 황자를 죽여야만 이 재앙이 끝나지 않나, 하는 불경스러운 말까지 은밀하게 오갔다.

그 속닥거림을 들은 사내 한 명이 푹 젖은 장화를 움직여 아카데미 인근의 강 쪽으로 향했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발목 근처에서 찰랑거리던 물이 어느새 허리 위까지 들어찼다. 이쯤 되면 걷는 것인지 수영하고 있는 것인지 콕 집어 정의를 내릴 수 없을 지경이다.

그 사내, 데니안은 바다의 신 아르메니안의 현신처럼 고고한 자태로 불어난 강 위에 둥둥 떠있는 애쉬를 바라보았다.

이게 잘하는 짓일까.

일주일 전, 배를 타고 떠나는 이벨린을 발견했었다. 이름을 부르니 이벨린도 데니안을 바라보았지만 아는 척하지도 않고 다급하게 배 위에 올라타 버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별 과제까지 함께 했던 사이인데.

서운한 마음이 찾아들려는 찰나에 폴이 불쑥 나타났다. 폴은 다짜고짜 이벨린을 보았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자세한 건 이야기해 줄 수 없지만 이벨린이 펜테리온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스스로가 배를 탄 거라고 말했다.

폴이 워낙에 다그치듯 무섭게 함구하길 강요했고 그 모습이 절박해 보여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날, 이벨린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벨린, 너 무슨 짓을 저지르고 떠난 거야.

뜬금없는 위장 자살에 어안이 벙벙해질 틈도 없이 이번엔 애쉬가 난리였다. 애쉬가 목이 터져라 오열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눈 깜빡임도 잊을 만큼 놀랐다.

처음엔 그뿐이었다. 그러나 사태가 심각해지고 재산 피해를 넘어 인명 피해까지 발생하는 이 시점에서 자신이 끝까지 이벨린의 위장 자살을 함구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판단했다.

“이벨린은 죽지 않았어.”

그래서 이야기했다. 폴에게 들었던 것을 전부 다. 그리고 이벨린이 타고 간 배가 서대륙을 횡단하는 배였다는 것도.

유서를 발견한 폴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까진 발설하지 않았다. 혹여나 폴에게 피해가 갈까 봐.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애쉬가 눈을 느리게 깜빡이더니 아무 표정도 없이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았다. 초점이 나가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비가 그쳤다.

애쉬는 제 발로 걸어서 황궁으로 돌아갔고 자신의 궁에서 한동안이나 나오지 않았다. 유리창이 깨지고 집기가 부서지고 분노에 찬 악소리가 드문드문 새어 나왔다.

“…나를 버리고 섬으로 떠난 거야.”

이렇게 나를 망가뜨리고, 날 버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내주었다. 한 톨의 마음도 남기지 않고 전부 건네주었다. 그러나 이벨린에게 자신은 그저 심심풀이 땅콩, 가볍게 가지고 놀다가 쉽게 버리는 그저 그런 하찮은 존재였을 뿐이었다는 사실이 잔인하게 심장을 찔러댔다.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었던 것도, 자신만이 특별한 것처럼 쓰다듬어 주고 밤을 같이 보냈던 것도 다 그저 잠깐의 유흥에 불과한 것이었다니.

사무치는 배신감과 바닥으로 내리꽂힌 자존감이 애쉬를 좀먹어갔다. 단물 빠진 껌. 자신의 처지는 딱 그 꼴이다. 가혹하게 내쳐진 현실에도 차마 끊어내지 못한 애정이 애쉬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

이 문장 하나가 머리에 박히면 배신감을 느꼈을 때보다 더한 좌절이 몰려들어 괴롭게 했다. 정신병이라고밖에는 명명할 수 없는 발작적인 행동들에 황제는 시간이 약이다, 하며 애쉬를 타일렀다.

그러나 시간은 약이 되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감정이 중첩되는 역할만을 착실히 수행했다. 한 달, 반년, 해가 바뀌어도 애쉬는 이벨린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 오랜 감정의 고역 속에서 지칠 대로 지쳐버린 애쉬는 자신을 지키기로 했다. 어긋나 버린 애정의 방향을 분노로 바꾸어갔다.

되갚아 주리라. 그토록 원하던 그녀만의 섬에서 끄집어낸 뒤 제 앞에서 이벨린이 후회하며 울부짖게 만들 거라고. 그렇게 되면 자신도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애쉬는 곧장 황제, 헤밀턴 6세의 궁에 찾아갔다. 헤밀턴 6세는 하던 집무도 내팽개치고 애쉬를 맞이했다. 애쉬는 아버지께, 황제 폐하께 올리는 예도 갖추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황제가 되고 싶습니다. 아니, 돼야겠습니다.”

* * *

“요즘도 감정을 느끼지 못하나요?”

“아뇨. 훨씬 좋아졌어요. 윈터랑 톰이 공놀이하다가 텃밭을 다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을 땐 짜증도 났고요. 음… 아, 맞다. 쟈스민이 하루 종일 원피스를 거꾸로 입고 다녔을 땐 깔깔거리면서 웃기도 했어요. 등에 있어야 할 지퍼가 앞으로 가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목이 돌아간 거로 보였거든요.”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웃음이 났다. 나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을 파일에 무언가를 적어 내린 유진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었다.

“확실히 좋아졌네요. 아이들을 지도하는 일은 사라 양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요.”

“음… 그래서 말인데요. 이제 괜찮아진 것 같은데 상담은 이만해도 될까요?”

“아직은 일러요. 전 사라 양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답니다.”

부드러운 어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단호했다. 기가 죽어서 “네.”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외에 몇 가지 대화를 더 나눈 뒤에야 유진 선생님의 상담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히익,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났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은 날이다. 일에 지쳐서 곤해진 쟈스민의 얼굴이 떠오른다.

“한 소리 듣겠네.”

벌써부터 귀가 아려온다. 기사 헤드라인이 폭염으로 줄을 잇는 요즘 같은 날씨에 뜀박질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지만 나는 신발을 고쳐 신었다.

쟈스민의 손에 죽나, 더위에 쪄 죽나 죽는 건 매한가지다. 다만 후자의 경우엔 쟈스민까지 과로로 쓰러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희생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선 역시나 내가 뛰는 것이 맞았다.

* * *

치열한 전쟁 통의 한복판도 이보다는 고요할 것이라고 조심스레 확언해 본다. 빼액 소리를 질러대며 죽음의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십수 명의 아이들과 재단한 의상을 아이들에게 입혀보려 뛰어다니는 스태프들 그리고 그런 스태프들을 약 올리며 도망가는 녀석들까지.

널브러져 있는 소품들과 대도구들을 피해 가며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무대 세트를 수리하던 인부의 굽힌 허리에 부딪힐 뻔했다. 겨우 허리를 꺾어 피했더니 뒤에서 천방지축 꼬마 아이 하나가 친구랑 깔깔거리며 등을 치고 지나간다.

“톰! 조심해야지!”

“네에……!”

건성으로 대답한 말소리에는 웃음기가 남아있었다.

저놈, 엉덩이라도 때려 줘야겠어.

지금 당장 훈계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더 급한 것이 있었다.

버럭 소리를 질러대며 대화하는 사람들을 뚫고 무대 위까지 겨우 다다랐다. 다들 화나서 소리를 지른 것은 아니었고 워낙 주위가 소란스러운 탓에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쟈스민!”

“사라,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 온 대륙의 신이란 신은 죄다 찾아 기도했다고!”

“미안해. 볼일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많이 바빴어?”

“말이라고 하니?! 애새끼들은 여기가 운동장인 줄 알고 뛰어다니지, 셋업을 막 시작하려는데 극단주 놈이 와서는 갑자기 무대 도안을 뜯어고치질 않나! 배우들 동선까지 완전히 엉켜버려서 다들 패닉이라고. 덕분에 셋업 시간이 두 시간이나 늦춰졌어. 게다가 더 끔찍한 건 뭔 줄 알아? 연출이 동선 수정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니까 예민한 배우 놈 하나가 못 하겠다고 대본까지 집어 던졌다고!”

“설마 하만?”

“그래! 그 도도하고 콧대 높은 하만 드레이프 놈! 공연이 코앞인데 주연 배우가 못 하겠다고 하는 건 뭐야. 찾아주는 극작가들이 많다고 으스대는 거야, 뭐야? 하여간 재수 없어!”

생각보다 큰일이었다. 애들이 말을 안 듣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으며 세트와 동선이 바뀌어 버리는 건… 좀 타격이 크긴 하지만 아예 공연을 올리지 못할 정도로 수습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공연을 열흘 앞두고 주연 배우가 못 하겠다고 해버리는 건 정말이지 최악의 상황이었다. 배포한 포스터를 전부 거둬들여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만이 입버릇처럼 내뱉던 “싫어요, 전 못 해요.”가 들리는 기분이다. 아, 끔찍한 환청이야.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속이 타는 건 쟈스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몇 마디 더 덧붙였다.

“그 새끼 일부러 그러는 거야. 사실 바뀐 동선 같은 건 아무 상관도 없을 놈이라고. 원래도 상대 배우 배려 안 하고 제멋대로 하던 놈이었잖아. 델베스 극단에서 하만 놈을 영입하려고 뒤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 델베스야 우리보다 자본이 훨씬 많으니 극장도 좋고, 홍보도 빵빵하게 해주니까 당연히 그쪽으로 넘어가고 싶겠지. 이번을 기회 삼아서 아예 우리랑 연을 끊으려고 하는 거라고.”

쟈스민의 말에는 나도 동감했다.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자인 하만이 델베스의 유혹을 뿌리칠 리가 없었다.

하, 진짜 의리도 없는 새끼.

“하아, 이제 어떻게 해?”

“그래서 말인데, 사라.”

쟈스민이 내 양어깨를 붙잡았다. 결연한 표정이 몹시 불안하게 느껴졌다.

난 은근슬쩍 눈을 옆으로 돌려 시선을 피했다. 아니야, 난 몰라. 싫어, 안 해!

“네가 하만을 좀 만나고 와야겠어.”

역시나! 황당함에 양손을 펼쳐가며 항의했다.

“왜 또 나야! 그 까탈스러운 남배우님을 상대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게다가 이번 공연의 내 담당은 아역 배우들이라고. *드라마트루기(Dramaturgy)가 언제부터 남배우 비위 맞추는 직업으로 바뀐 거야? 어?!”

* * *

*드라마트루기 :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의도, 시대적 상황, 맥락 등을 파악하고 설정했던 의도대로 공연이 올라갈 수 있도록 객관적인 눈을 가지고 조언하는 역할.

* * *

하만과의 마찰이 있을 때면 해결은 늘 내 몫이었다. 언제부터였냐 하면, 이 극단에 들어온 5년 전의 그 순간부터.

그날도 까탈스러운 하만은 불만에 가득 차있었고 의상 하나를 두고 레이스가 있는 게 낫니 마니 하면서 언성을 높인 채였다. 하만은 레이스를 더 치렁치렁 달기를 원했고 의상 팀은 너무 밝은색 레이스를 많이 달면 조명을 비췄을 때 상대적으로 배우의 얼굴이 어둡게 나오니 자제하라는 입장이었다.

하만은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단원인 나를 콕 집어서 “야! 거기 우울하게 생긴 애, 누구 말이 맞아?!” 하고 물었다.

그때 당시의 나는 화나는 것도, 슬픈 것도, 모욕을 받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정한 상태였으므로 하만의 무례한 어투에는 별다른 악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내뱉을 한마디가 의상 팀에게는 손에 땀을 쥘 만큼 중요하다는 건 알았다.

“레이스를 등 뒤에 집중적으로 달면 예쁠 것 같아요. 마치 천사의 날개 같을 거예요. 관객들과 언론도 입을 모아 찬양할 게 분명해요.”

내 대답은 하만과 의상 팀 전부가 만족할 만한 답변이었다. 극 중 배우가 등을 보이는 일은 드물었으므로 의상에 비친 조명으로 인해 배우의 얼굴이 어두워질 염려도 없었고, 하만은 ‘천사 같을 것이다. 언론이 찬양할 것이다.’라는 말에 혹하여 목 아래에 구름처럼 달려있던 레이스를 등 뒤로 모조리 옮겨 달았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등을 돌려 무대 안쪽으로 고고하게 걸어가는 하만의 뒷모습은, 점점 어두워지는 조명 속에서도 반짝 빛을 발하는 레이스 때문에 천사가 천계로 돌아가는 것처럼 신비로워 보였다. 하만은 우리 극단 아브모르나의 천사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하만의 비위 맞춰주기 담당은 내가 되었다. 빌어먹을. 모두가 유쾌한 결말을 맞이했지만 나만은 비극의 한 페이지 속에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쟈스민, 네가 뭐라고 해도 못 해. 이번만은 이 일에서 빼줘.”

“반년 동안 준비한 공연을 망치기라도 할 거야?”

“내가 망치는 게 아니잖아! 하만을 달래려면 세트를 무작정 바꿔버린 극단주님께서 직접 하시라고 해!”

“극단주도 하만은 껄끄러워해. 차라리 공연을 망쳐서 돈을 날리는 게 낫다고 하는 사람인 거 몰라? 돈 많은 귀족 놈들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고. 그러니까 사라…….”

“싫어.”

쟈스민이 후우― 하며 깊은 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다시 눈을 치켜뜬다.

“너, 매주 개인 볼일 때문에 시간 빼주는 게 누구라고 생각해? 응? 가족도 지인도, 심지어 경력도 없는 너를 이 극단에 들어오게 해준 건 누구지? 추천서가 있어야지만 들어갈 수 있는 극단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준 건 또 누구일까?”

뜨끔. 진저리치며 거절하던 음성이 한풀 꺾여버렸다.

“…쟈스민 너.”

“난, 나의 친구 사라가 은혜를 저버리고 실속만 냉큼 챙겨서 도망가는 하만 같은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

“하지만……!”

“앞으로 열흘 남았어, 그때까지 잘 부탁해. 공연은 취소되지 않을 거야. 그렇지?”

타이밍 좋게도 어디선가 “쟈스민! 이것 좀 봐줘!” 하는 소리가 들렸다. 쟈스민은 윙크를 해 보이곤 자리를 떴다.

“아,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뛰어오지나 말걸.

차라리 인부들 틈에 섞여 들어가서 셋업을 도와주는 편이 낫겠다. 나르시시즘의 결정체며 오만하고 예의 없기론 대륙 탑을 찍고도 남을 하만을 상대하라는 건 학대 수준의 업무이다. 이런 일까지 시키려면 일당이라도 올려 줘라! 합당한 노동의 가치를 지불하려면 아마도 지금 주는 거에 두 배는 얹어줘야 할 거다, 이놈들아!

울며 겨자 먹기로 하만의 개인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왜!” 하는 신경질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겨우 몸 하나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게 문을 연 뒤 욱여넣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고장 난 거냐고? 아니. 그럼 멀쩡한 문을 다 열지도 않고 왜 이런 기이한 행동을 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이것도 일화가 있다.

한 후배 배우가 하만의 대기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하만이 큰 인기척에 놀랐다며 그날 공연을 하지 않겠다고 난동을 부린 일이 있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날 공연은 취소되었다. 하, 맙소사.

여하튼 그 사건 이후로 하만의 대기실에 방문할 때는 이렇게 몸만 간신히 통과할 정도로만 문을 열어야 했다.

밖은 난장판인데 하만의 대기실만은 봄날의 여유로운 꽃밭 같았다.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드는 그런 평화로운 공기 있지 않은가. 딱 그 느낌이다.

한가로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은 하만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귀찮다는 듯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꼬리를 말고 물러나야 함이 맞지만 쟈스민에게 받은 미션이 있었으므로 못 본 척 하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가. 피곤해.”

“세상에! 혹시 잠을 못 주무신 건 아니시죠? 아무리 완벽한 연기를 관객들에게 선사하시기 위해 매일같이 대본 분석에, 연습하시고 있다는 건 알지만… 수면 부족은 아름다운 피부의 적이랍니다. 하만 님의 국보급 피부에 해가 될까 염려스럽네요.”

하만의 비위 맞추기에는 도가 텄다. 정해진 대본이라도 있는 것처럼 나는 한마디도 버벅거리지 않고 줄줄 내뱉었다. 진심으로 존경하지만, 걱정된다는 듯 감정도 실어서 말이다.

배우는 내가 해야겠어. 연습에 대본 분석은 무슨. 저 하만 놈의 대본은 새거나 다름없다. 공연을 열흘 앞둔 지금도 프롬프터 없으면 제대로 대사도 못 치는 주제에. 아니, 대본은 고사하고 글 자체를 읽는 꼴을 못 봤지.

“내 피부가 너네랑 같은 줄 알아?”

“아닙니다! 당연히 다르죠. 태생 자체가 저 같은 사람하고는 급이 다르시잖아요.”

“주제 파악을 잘하는군. 그래서 난 네가 마음에 들어.”

하만이 매끄럽게 웃으며 검지로 내 얼굴을 콕 가리켰다.

이거 참 영광입니다. 오늘 일을 기록으로 남기고 대대손손 자랑에 또 자랑질해야겠어요! 동네 사람들 다 불러 모아놓고 잔치라도 벌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군요!

“저따위를 좋게 봐주시다니… 부끄럽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래서 여긴 왜 온 거야?”

적당히 기분이 좋아질 만한 아부는 충분히 들었으니 이만 꺼지라는 뉘앙스였다. 하하, 이 새끼 봐라.

“저… 하만 님께서 이번 공연을 못 하시겠다고 했다는 소문을 듣고 너무 놀라서요.”

“아… 그거. 소문대로야.”

“절대 안 됩니다. 하만 님이 없으면 이 공연은 망해요. 그 누구도 하만 님의 자리를 대신할 순 없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런데… 제멋대로인 극단주 밑에서 도저히 연기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배우로서의 자존심도 상하고.”

퉤! 옘병! 가장 제멋대로인 건 지금 네놈이잖아!

당장 멱살을 쥐고 탈탈 흔들고 싶었다. 최대한 불쌍한 척 지어 보였던 표정이 점점 혐오로 바뀌어 갔다.

아, 안 되지. 안 돼.

고개를 한 번 흔들고 다시 가면을 썼다.

“노고가 크셨겠어요. 그래도 하만 님의 연기를 기다리는 관객분들을 생각해서라도…….”

“관객들에겐 연기를 보여줄 거야. 단, 이 공연은 아니라는 거지.”

말하면서 하만이 신문을 펼쳐 들었다.

정말 놀랐다! 하만이 글이라는 걸 읽다니.

“그게 무슨…….”

“너도 다 알면서 왜 모르는 척해. 나 델베스에서 스카우트 제의 들어왔잖아.”

소리치고 싶었다.

누가 자꾸 이딴 놈한테 일거리를 주냐?!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하만의 스타성은 알아줘야 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유독 빛을 발했고 뛰어난 마스크와 감정의 폭이 다양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건조한 대사도 하만이 읊조릴 때면 장황한 서사가 그려지는 것 같은 아련함이 풍겼다. 대중들은 그의 무대 뒤 인성을 모르니 당연히 하만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하만 님, 설마 델베스로 가시는 거예요? 당장 열흘 뒤가 공연이라고요. 그렇게 되면 위약금은…….”

“위약금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얼마든지 물어낼 수 있어.”

“미래를 위한 투자라니요. 배우가 돌연 공연을 취소하면 아무리 하만 님이라도 대중들의 뭇매를 피하긴 어려우실 거예요.”

“상관없어. 그마저도 묻힐 테니까. 내 일생일대의 최고의 커리어가 쌓일 거거든.”

“네?”

하만은 읽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 위에 턱 하니 내려놓으며 아주 친절하게도 내가 읽을 수 있도록 돌려 주기까지 했다.

“자, 여기를 잘 읽어봐.”

기사의 첫 줄을 읽자마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의식적으로 갈무리하고 있던 표정도 싸늘하게 굳어졌다.

아니, 어쩌면 당장에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이 형편없이 구겨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몇 번이고 보고 또 들어서 아는 내용이었는데도 이 반응은 매번 똑같았다. 겨우 찾았던 감정이… 다시 사라지려 한다.

“황제 폐하께서 서대륙 전체를 통치하시게 된 것을 기념하면서 각 영지에 직접 행차하시는 건 알고 있겠지?”

“…네.”

“그 마지막 방문지가 바로 여기 기넬이잖아. 델베스에서 폐하를 위한 공연을 준비하는 중이야. 그곳의 주연은 다름 아닌 바로 나고.”

“예? 하지만 황제 폐하의 방문도 고작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반년 동안 희곡 하나를 채 못 외운 그가 일주일 만에 무슨 수로 대사를 다 외우겠는가.

하지만 하만은 여유 있게 웃으며 검지를 흔들었다.

“대사가 딱 한 줄이라서 괜찮아. 남자 주인공이긴 하지만 맨 마지막 장에만 나오고 등장하지 않거든. 주된 내용이 여자 주인공의 성장기라서 말이야.”

신데렐라, 백설공주의 왕자 같은 존재라 이 말이지. 짧지만 임펙트 강한. 알겠어? 하고 하만이 덧붙였다.

역시나 바뀐 동선이니 세트니 하던 말들은 핑계가 맞았다.

하, 다른 것도 아니고 황제가 직접 관람하는 공연의 주연이라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실리를 가장 우선시하는 하만에게 그보다 더 달콤한 제안은 없다.

“하만 님, 그래도 반년 동안 준비해 온 단원들을 위해서 조금만 더 생각을…….”

“할 말 없어. 그 입 그만 나불거리고 나가.”

축객령에 고개를 푹 숙이고 대기실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닫힌 문 위로 주먹질과 발길질 그리고 소리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저 싸가지 없는 놈.

“후우.”

혼자 분을 터뜨린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진 않는다. 어쩌면 좋지. 하만의 분량이 단역 수준인 델베스와 우리 공연은 사정이 달랐다. 하만의 모노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비중이 하만에게 쏠려있었다.

인간 영웅 역을 맡은 하만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있던 요정의 아이들을 데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 3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라 들인 공이 어마어마하다.

“왜 하필 황제가 관람하는 연극이야.”

신문에서 보았던 젊고 유능한 황제의 사진이 잔상으로 남았다. 잊어보려 발버둥 쳐도 의식 한편에 줄곧 자리하고 있었던 녀석의 얼굴이었다. 이제는 소리 내어 부르지도 못할 그 이름 애쉬.

마른세수한 뒤 대기실 복도를 거닐었다. 난 이벨린이 아니야. 과거에 연연하지 마. 검게 드리우는 불안함을 의식적으로 억눌렀다. 지금은 하만의 일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프다.

그래. 빨리 쟈스민에게 이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 줘야지.

* * *

5년 전, 처음 히비카의 항구 도시 기넬에 도착했을 때의 나는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겨우 숨만 내쉴 수 있을 정도로 먹고 마시고, 그 외에는 가만히 누워있거나 초점 없는 눈으로 앉아있기만 했다.

고요하다 못해 주검 같은 겉모습과 달리 머릿속은 날것의 비명들이 자꾸만 들려와서 나를 괴롭게 했다. 숱한 죽음들이 어깨 위에 얹어져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어김없이 나를 만나러 오는 폴은 나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유해 주었다.

상담 첫날을 기억한다. 유진 선생님은 하얀 가운을 입고 붉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건조한 색상에 비해 안경만이 유독 진한 색채를 띠고 있어서 자연스레 눈으로 시선이 쏠렸다.

첫인사와 함께 날씨 이야기를 하고 간간이 화제가 되는 이슈에 대해 생각을 나누었다. 과거의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러다 유진 선생님은 혹시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것도요. 분노도 기쁨도 못 느끼겠고. 이제는 슬프지도 않아요. 그냥 이대로 죽어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아요. 괜찮아요.”

“사라, 그건 괜찮은 게 아니에요. 감정이 죽은 거예요. 본인 스스로가 위험한 상태라는 걸 인지해야 합니다.”

유진 선생님은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성과를 내는 것을 목표로 활동적인 일을 찾아보라고 권했다. 마침 나도 폴의 지원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싶지 않았기에 일거리를 찾아보려던 참이었다. 폴에겐 미안하지만 과거의 인연을 모두 끊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일자리를 마련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며칠째 허탕만 쳤다.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녀 봐도 소득 없이 시간만 보냈다.

해가 기울어지고 구직 자리를 알아보기에 늦은 시각이 되자 후미진 펍에 자리를 하나 꿰차고 앉아 맥주를 한 잔 시켰다. 기넬에 와서 나아진 거라곤 술이 조금 늘었다는 것 정도일까. 예전에는 주량이 몇 모금이라고 마지노선을 정했었는데, 요즘엔 반 잔까지는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살다 살다가 그렇게 무식한 연출은 처음 봤어! 극작가의 생전 시대 상황도 모르면서 뭐? 주인공이 사람들을 죽이는 건 너무 잔인하니까 단순 기절로 바꾸자고? 참나!”

“쟈스민, 진정해. 누가 듣겠어.”

“들으라고 해! 지가 극단주 사촌이면 다야?! 아니, 귀족이면 다냐고! 만들어 내지도 못할 거면서 그 시대의 잔혹극은 왜 고른 건데! 아오, 열불 나. 진짜.”

옆 테이블에 앉은 이들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듣고 싶지 않아도 저들의 수다 혹은 뒷담화를 듣게 되었다.

저들은 극단원인데 새로 들어온 연출의 무식함에 열을 내는 중이었다. 연출을 제외한 모두가 극의 흐름이 잘못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다들 평민 출신이라 가방끈이 길지 않은 탓에 희곡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고 조언해 줄 역량은 없어서 애만 태우고 있는 상황인 듯 보인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건가. 굽어있던 등허리가 꼿꼿하게 펴졌다. 저들이 말하고 있는 희곡은 문학 시간에 공부했던 고전 문학의 한 작품이었다. 희곡 자체를 달달 외웠던 이력이 있었기에 지금도 시켜주기만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읊어줄 수도 있다.

“아드리안 연출가님 다시 데려와! 그 어린 양아치 놈이랑은 못 해 먹겠다고!”

헛기침하며 옆 테이블을 두드렸다. 잔뜩 성나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쏠린다.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곤란해 보이시는데, 취직시켜 주시면 도와드릴게요.”

웬 미친 사람 취급하던 단원들이 작품과 작가 그리고 그 시대 상황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걸 듣자 눈빛이 달라졌다. 나는 바로 다음 날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쟈스민은 나에게서 들었던 설명을 연출가에게 전달했고 치열한 실랑이 끝에 작품은 다시 제 방향을 찾아갔다.

내가 모든 희곡을 다 알고 있진 못해서 처음 들어왔을 때에 비해 직책은 내려갔다. 허울만 드라마트루기이지 실제로 내가 하는 일은 아역 배우들의 대본 분석을 도와주는 것이다. 괴리감이 있지만… 어찌 됐든 일을 구했다는 게 어디야.

그러기를 1년. 기넬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있을 때 큰 뉴스가 잇따라 터졌다. 하나는 펜테리온의 황제가 황위를 장남이 아닌 차남에게 물려주었다는 것과 둘은 그 차남이 유례없는 강압적인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펜테리온이 손꼽히는 강대국이라 한들 서대륙 전체를 통합시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는 그것을 일궈냈다. 단 3년이라는 시간 만에. 황제의 군대가 서쪽으로 전진했고 이를 막아 세우는 나라는 협상 없이 전쟁으로써 다스렸다. 펜테리온의 군사력을 안 영리한 왕들은 자발적으로 국기를 내어주었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곳, 서대륙의 끝인 히비카도 피를 흘리지 않고 펜테리온에 흡수당했다.

펜테리온으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고 했건만. 나는 또다시 펜테리온의 백성이 되었다.

신화 속에나 나올 법한 역사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라를 빼앗겼다는 원통함에 울부짖는 이들도 있었으나 권위자의 폐단으로 고혈을 짜내던 많은 나라의 백성들은 오히려 잘되었다며 환호를 내지르기도 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황위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던 그 무구한 애쉬가 서대륙을 통합시킨 황제와 동일 인물이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내가 어떻게 생각하건 신문에는 애쉬의 풀네임과 함께 황제 폐하라는 명칭이 따라붙었고 녀석의 사진도 늘 함께였다.

이벨린이 사라가 되어버린 것처럼 애쉬도 귀여운 후배가 아니라 예를 갖춰야 할 까마득하게 높으신 분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착실히 다른 길을 걸었다.

애써 덤덤한 척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또 한 번 난리가 났다. 다망하신 폐하께서 서대륙의 끝인 기넬에 행차하신다는 뜻을 전했다.

기넬은 황제를 맞이하기 위하여 자원을 아끼지 않고 거리를 치장하기 시작했다. 처음 이 소문을 들었을 때는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다. 쟈스민 앞에서 다리 힘이 풀려 쓰러지기까지 했다.

그러다 황제 폐하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이 개미 떼처럼 많을 텐데 나를 알아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에 도달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는 일부러 황제가 다닐 거리에는 가지 않을 테니 더더욱 괜찮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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