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놈이 시험을 잘 봐야 하는 이유 (1)
“으, 음…….”
몸이 갑갑했다. 짜증스레 뒤척여 보았으나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커다란 산이 등 뒤에서 버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불편함이 피곤함을 이기고 끝내 눈을 뜨게 만들었다. 커튼이 뜯어져 나간 창문 너머로 햇살이 쏟아져 온다.
부신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꽉 붙들려있는 허리에 손을 뻗었다. 밤사이 애쉬가 입혀준 건지 익숙한 가운이 꼼꼼하게 입혀져 있었고 그 위로 단단한 팔이 옴짝달싹 못 하도록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한참을 뒤척여 보았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애쉬의 규칙적인 숨소리는 흐트러짐이 없고 팔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애쉬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애쉬, 애쉬.”
건조한 목소리가 나왔다. 여러 번 부르니 틈도 없이 달라붙어 있던 애쉬의 몸이 꿈틀거리는 게 등 뒤로 느껴졌다.
이제 좀 풀려날 수 있으려나, 생각할 때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애쉬의 얼굴이 닿았다. 한숨처럼 길게 내뿜는 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깼어요?”
어깨 위로 잔잔한 진동이 전해졌다. 아직 잠에 취해 있는지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몽롱하기만 하다.
“좀 풀어봐.”
다시 몸을 뒤척여 보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잠에 빠진 듯한 숨소리뿐이었다. 드러나 있는 단단한 팔을 세게 꼬집어 버렸다. 잘 짜여있는 근육 탓에 살이 얼마 집히지 않아서 꽤 아플 것이다.
“어디서 자는 척이야.”
“안 통하네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팔이 풀어졌다. 상체를 일으키려는 찰나, 애쉬가 어깨를 눌러버리는 바람에 천장을 보고 누워야만 했다. 이번엔 가슴 아래에 팔이 살포시 올라오고 뺨에는 입술이 닿았다.
“떨어져.”
“조금만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안 돼요.”
팔꿈치로 툭 치자 아쉬워하면서도 쉽게 물러난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시무룩해 있는 모습이 훤했다.
조금 달래줄까 하는 마음에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금발이 손가락에 감겨온다. 살랑거리는 감촉이 좋아서 생각보다 오래 녀석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제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거 되게 오랜만인 거 아세요?”
“머릿결 좋다.”
“저 뒤통수도 되게 예뻐요. 조금 더 만져주세요.”
큰 손이 내 손을 겹쳐 잡고는 뒤통수로 손을 끄집어내렸다. 자세가 조금 불편하여 애쉬를 향해 몸을 돌렸다. 포근하게 웃고 있는 애쉬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동글동글하네.”
모양이 예쁜 머리통을 몇 번이고 어루만졌다.
안 예쁜 구석이 있기나 할까. 긴 속눈썹 하며 하얗고 고른 치아, 적당히 볼록한 이마와 반듯한 눈썹까지. 어디 하나 모난 구석 없이 완벽한 외양이었다.
“왜 그렇게 뚫어져라 봐요? 설레게.”
“어디서 이런 애가 튀어나왔을까 하고.”
쪽. 애쉬가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코가 스칠 정도로 가깝게 붙어선 더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뭐야.”
애쉬의 손이 내 뺨을 덮었다. 전해져 오는 나른한 온기가 기분 좋았다.
“어디서 이렇게 사랑스러운 선배가 내 앞에 나타났을까.”
“…….”
화악. 얼굴이 달아올랐다.
유리알 같은 영롱한 벽안이 진실로써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너무도 소중하여 함부로 손대지도 못한다는 것처럼, 내 존재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어버린 사람처럼.
가볍게 웃으며 넘어갈 수도 없게 만드는 거대한 감정이었다. 조금… 벅차다고 생각될 정도로.
“얼굴 빨개졌어요.”
“더워.”
뺨을 감싸고 있는 손을 쳐내고 몸을 세웠다. 애쉬가 곧바로 따라 일어서며 손부채질을 해준다.
“창문 좀 열까요?”
“응.”
부쩍 상쾌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애쉬가 멀어져 갔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녀석의 뒷모습을 의문이 나올 정도로 오래 바라보았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애쉬가 몸을 돌리는 순간에야 번뜩 정신이 차려졌다.
재빨리 고개를 돌렸으나 내가 느끼기에도 어색한 행동이었다. 녀석이 봤을지도 모르겠다. 왜 그랬지.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보고 있는 게 더 나았을 건데.
멍청한 행동을 속으로 자책하고 있을 때 물이 가득 담긴 컵이 불쑥 나타났다.
“드세요.”
“…목 안 말라.”
“목소리 계속 갈라지잖아요.”
보지 못한 건가. 눈이 살짝 마주친 것 같기도 한데.
그러나 애쉬는 어떠한 내색도 없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만약 봤다면 ‘방금 제 시선 피한 거 맞죠? 왜 피하셨어요?’라면서 민망할 정도로 캐물었을 것이다. 별다를 것 없는 녀석의 행동에 뒤늦게 안심이 되었다.
“누구 때문인데.”
“그렇게 좋았어요? 울면서 소리 지를 만큼?”
인정하기 민망하지만 좋았던 건 사실이다. 다만 그 쾌감의 정도가 너무 커서 이대로 가다간 머리가 터져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번져버려서 문제지.
“무슨 말을 못 해.”
애쉬가 내민 컵을 받아 들었다. 내뱉었던 말이 무안하게도 물은 꿀꺽꿀꺽 잘도 넘어갔다. 몇 모금 남지 않은 물컵을 애쉬가 받아들고 마저 마셔버렸다.
“옷 줘.”
“입고 계시잖아요.”
“나보고 황가의 가운을 입고 밖엘 나가라고?”
“가시게요?”
대단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애쉬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날도 밝았으니 이제 가봐야지 평생 여기에 있냐, 그럼. 당연한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 다음 날이라 수업 없으시잖아요.”
“아르바이트 가야 돼. 붕대 풀자마자 바로 가겠다고 말씀드려 놨단 말이야.”
그러니까 빨리 옷 줘.
말끔해진 오른손을 내밀어 애쉬를 재촉했다. 녀석은 거하게 충격을 받은 얼굴로 서있기만 했다.
“말도 안 돼요.”
애쉬가 침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 옆자리로 파고들더니 허리를 양팔로 감싸 안아버린다.
“오늘은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아이고, 유감이네. 좀 떨어져.”
“…싫어요.”
“네가 싫으면 어쩔 건데.”
“평생 이렇게 붙어 있을래요.”
애쉬가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버렸다. 안겨있던 내 몸까지 덩달아 넘어가게 되었다. 애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내 몸 위로 겹쳐 올라오면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안 비켜? 나 잘리면 네가 책임질 거야?”
“영광이에요. 정말 감사해요, 선배.”
그러곤 입술에 쪽.
일순 혈압이 올랐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잖아.
녀석의 양 뺨을 잡고 꾸욱 눌러버렸다. 입술이 붕어처럼 튀어나온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녀석의 태도가 짜증 나서 한 짓이었는데 반대로 내 쪽이 뜨끔하게 되었다. 어제 내가 씹어버렸던 입술 상처가 도드라져 보였기 때문이다.
아랫입술에 멈춰 선 내 시선을 읽은 애쉬가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가리켰다.
“아파요.”
황급히 뺨을 놓아주었다. 애쉬의 눈썹이 팔자로 기울어졌다. 정말 많이 아픈지 차마 만지지도 못하는 모습이 가여웠다. 상처 위로 검지를 가져다 대니 살짝 닿자마자 녀석의 몸이 움찔 떨린다.
“연고 바르자.”
“싫어요. 연고 발라 주신다고 해놓고 가버릴 거잖아요.”
“안 가.”
계속 여기 있겠다는 뜻은 아니고 연고만 바르고 바로 나가긴 할 거다.
“거짓말.”
“비켜봐.”
“싫어요, 싫어.”
애쉬가 목 위로 얼굴을 대고 도리질 쳤다. 부들부들한 머리칼이 뺨에 닿으며 은은한 향을 풍겼다.
“왜 이렇게 어리광이야. 너 진짜 간만에 혼나볼래?”
“…네. 혼내주세요.”
“읏, 야.”
날카로운 이가 목을 살살 긁어내렸다. 잘게 퍼져오는 간질거림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저 요즘 복습도 잘 안 하고 수업 시간에도 딴짓해요.”
“미쳤어? 곧 시험인 거 몰라?”
“선배가 없으니까 그래요, 선배가 안 가르쳐 주시니까.”
“핑계는. 교재 가져와 봐, 빨리.”
손을 내려 애쉬의 엉덩이를 팡 때렸다. 녀석이 앓는 소리를 내며 은근슬쩍 가슴을 쥐어 온다.
“어허.”
엉덩이를 한 번 더 쳤다.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세게 때리니 녀석이 끄응 소리를 내면서 하체를 들썩였다. 그러면서도 느릿하게 가슴을 주물럭거리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알았어요. 대신 절대 가면 안 돼요?”
“빨리.”
미련 같은 입맞춤을 남기고 애쉬가 몸을 일으켰다. 맞은 엉덩이를 문지르면서 교재를 가지러 가는 모습이 조금 귀여웠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연고도 같이 가져와!”
녀석을 보고 웃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지금 내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애쉬는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연신 내 눈치를 보았다.
“…선배.”
뼈마디가 두꺼운 긴 손가락이 내 무릎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녀석의 손끝이 닿자마자 교재에 머물러있던 냉랭한 시선이 애쉬를 향했다. 무릎 위를 기어 다니던 손가락이 재빨리 떨어진다.
“이 새 책은 뭐죠? 아… 관상용인가요? 황자님, 말씀 좀 해보세요.”
“…죄송해요.”
당당하게 혼내 달라고 했던 배짱은 어디로 다 사라진 건지 애쉬의 어깨는 축 처져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밑줄 하나 없이 빳빳하기만 한 교재는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학비가, 교잿값이 얼마인 줄이나 알아? 제국사 1등 하겠다고 큰소리 떵떵 치던 과거의 애쉬는 집에 갔니? 내 귀한 시간 쪼개가면서 과외해 줬던 게 다 쓸모없게 되어 버렸잖아! (물론 과외비는 착실히 받아 챙겼다.)
안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심각한 애쉬의 교재 상태에 결국 잔소리가 폭발했다. 애쉬의 고개가 점점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예 한 몸이 될 기세다.
“…이 상태면서 만점은 무슨 만점이야?”
“만점은 꼭 맞아 올게요.”
“당장 시험이 코앞인데 무슨 수로?”
“할 수 있어요. 남들보다 배는 더 열심히 하면…….”
저도 자신이 썩 있진 않은지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갔다. 더 볼 것도 없는 교재를 탁 덮어두고 귀 뒤로 머리를 넘겼다.
“어휴. 시험은 너만 치르는 게 아니라서 나도 더 이상은 못 가르쳐준단 말이야.”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그랬으면 좋겠다. 집중적으로 봐야 할 부분 체크해 둘 테니까 꼭 확인해.”
내가 왜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의문이 들었지만 몸이 절로 움직였다.
새 책 같은 교재를 가지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려 했다. 우드득. 불안한 뼈 소리와 비명을 질러대는 근육통이 아니었다면.
“아, 죽겠네.”
어느 틈에 다가온 애쉬가 내 다리와 등 뒤에 팔을 끼워 넣고는 번쩍 들어 올렸다.
“어디로 가면 돼요?”
아, 깜짝이야.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반사적으로 이야기했다.
“펜 가지러.”
애쉬가 곧장 다리를 움직였다. 아무리 방이 넓기로서니 이곳이 운동장도 아니고 안겨 가야 할 정도는 아닌데. 상황이 조금 민망하여 볼을 긁적였다.
애쉬는 나를 받쳐 들고 있으면서도 용케도 팔을 뻗어 펜을 가져다주었다. 워낙 내용이 많은 과목이라 알아둬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교재에 중요한 부분을 모두 체크하고 있을 동안 미동도 하지 않는 애쉬 덕에 순간 내가 안겨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교재를 덮고 나서야 아차 했다.
“다 했어. 꼭 확인해.”
워낙 장신인 녀석에게 안겨있는 탓에 책상 위까지 손을 뻗기가 어려웠다. 결국 던지듯이 교재를 내려놓아야 했다.
“역시 선배밖에 없어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니야? 헛웃음이 흘렀다. 이만 내려줘. 녀석의 어깨를 툭툭 치자 애쉬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침대 위에 나를 앉혀주었다. 여든 먹은 노인이 손자한테 간호받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선배, 저 만점 받으면 소원 들어주세요.”
“만점은 네가 받는데 내가 왜 소원을 들어줘?”
웃기는 놈일세.
그러나 애쉬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긋방긋 웃으며 얼굴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제가 만점 받으면 선배도 기쁠 거라고 했잖아요. 선배를 기쁘게 해드릴게요.”
이전에 그런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긴 있었다. 기억력도 좋아. 그러나 소원을 들어줄 정도로 격한 기쁨을 말한 건 아닌데. 내 과외를 받은 후배가 성적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잘 나오는 게, 기왕이면 1등 하는 게 당연히 좋은 거 아니겠어?
애쉬의 말을 거절하려면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자꾸만 살랑거리면서 웃는 게 귀여워서 봐주기로 했다.
“들어보고. 돈 드는 건 안 돼.”
“선배 집에 데려가 주세요.”
…잘못 들었나? 긴장 없이 푹 풀어져 있던 머리가 대앵― 울렸다. 녀석은 아직도 웃는 낯이다.
“로벤스디가 저택에?”
세레즈가 있는 그곳에 너를 데려가라고?
미치지 않고서야. 아니, 미쳐 돌아버린다 해도 그건 정말로 있어선 안 될 일이다.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아뇨.”
따스한 손가락이 얽혀들어 왔다.
“예전에 선배가 어머님이랑 같이 살던 집요.”
“…….”
“소원이에요.”
“…거긴 왜.”
“그 집엔 제가 모르는 선배의 흔적이 잔뜩 있을 테니까요.”
* * *
언제였더라. 그 집에서 잠들 수 있었던 마지막 날이.
어머니가 살해당한 바로 그다음 날 아버지가 찾아왔으니 벌써 7년이 넘었구나.
한순간에 뒤집혀버린 삶에 적응하느라 가 봐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간혹 다시 그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가 혀가 델 정도로 뜨거운 감자를 쪄놓고 나를 반겨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그것이 헛된 망상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날의 비릿한 피 향, 내 손을 벗어난 꽃다발, 잘려나간 머리와 어머니의 감지 못한 눈. 조금 전의 일처럼 생생한 그 기억을 두고서 망상을 덧입히는 건 불가능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몇 번은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에 찾아가 보려 했었다. 그러나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혹여나 세레즈와 마주칠까 봐. 두 번째에는 그날의 기억이 선연해질까 봐 두려움에. 다음엔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내 삶이 더욱 비참하게 느껴질까 봐.
지금으로선… 도저히 그 집을 찾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론 잊으려 노력하면서 살았다. 어머니의 치아도 두 번 다시 꺼내 보지 않았고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성공해야지. 돈을 많이 벌어서 이곳을 떠나야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자유롭게 살아야지. 내 영혼을 지탱해 주는 유일한 열망만 바라보면서 버텼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애써 잊으려 했던 과거가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에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한 애쉬는,
“옹알이하는 선배, 미운 일곱 살인 선배는 아직 거기에 있잖아요.”
하면서 내 기억 너머의 추억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함께 잠들었던 침대와 겨울이면 꼭 붙어 앉아서 몸을 지폈던 작은 화덕. 연기 때문에 질식사할 것 같았어도 추위 때문에 창문도 제대로 열지 못하고 매운 눈물을 줄줄 흘려야 했었지.
그런데도 늘 즐거웠다. 좁은 집과 열악한 환경은 나와 어머니의 행복을 방해할 만한 것들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두려움에 몸을 사리면서 그 소중한 것들조차 외면하고 있었다.
문득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하고 고수익의 직책을 얻어서 돈을 번 다음에는 두 번 다시 이곳을, 이 나라에 발걸음하지 않을 테니까.
“꼭 데려가 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쉬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와 어머니의 발자취를 마지막으로 짚어보기 위해서였다.
* * *
폭풍 같던 개교기념 파티가 끝난 이후 학생들은 놀랍도록 빠르게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곧 닥쳐올 시험을 생각하면 파티의 여흥에 취해 있을 시간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참 놀기도 잘 놀고, 성실하기도 성실한 놈들.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동안 엉망이 되었던 기숙사 방도 말끔히 원상 복귀되어 있었다. 파티 이후 간간이 터지는 스캔들을 제외하고는 광란했던 파티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내 일상도 제자리를 찾았다. 애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르바이트도 다시 나가기 시작했고, 수면 시간을 줄이는 대신 공부량을 늘려서 시험 대비도 착실하게 해나가는 중이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달 외워버릴 정도로 파고들었던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고 나서야 큰 산을 하나 넘었구나, 하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벽돌같이 두꺼운 책을 반납했음에도 내 양팔에는 전 것보다 두 배 두꺼운 다른 책이 들려있었다.
오늘은 이걸 조져놔야지.
강의에서 쓰이는 교재가 따로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동일한 범위의 내용이 담겨있는 책이라면 모조리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이 안심되었다. 로즈는 강박증이라고 혀를 내둘렀는데 ‘설마 이런 곳에서까지 문제가 나오겠어?’ 하다가 봉변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강박증인 게 나았다.
실제로 교재에 담겨있지 않는 문제가 나온 시험도 있었다. 교수님이 말로만 언급하고 넘어갔던 거라 수업 시간에 제대로 집중하지 않은 학생들은 100% 오답률을 기록했다. 교수님 말씀도 기억나고, 다른 책을 통해 내용을 한 번 더 살폈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답을 적어냈었다.
요즘 들어 늘 달고 다니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을 때 레드릭과 눈이 마주쳤다. 찢어져라 벌리고 있던 입을 단번에 다물곤 레드릭에게 다가갔다.
“파티 이후로 처음 보네. 데니안이 너 요즘 수업도 잘 안 나온다고 투덜대더라.”
“…좀 아파서.”
정말 아프긴 한 건지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고유의 능글거리는 말투가 싹 사라지니 다른 사람 같았다.
많이 아픈가.
얼굴을 좀 자세히 보려고 목을 더 뒤로 꺾었다. 레드릭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이 노골적인 거부는 뭐지. 지금 나 까인 건가.
“혹시 파티 때 나 계속 기다렸어?”
레드릭의 볼이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기다렸구나. 들고 있는 책만 아니었더라면 머리라도 벅벅 긁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안해. 얼결에 취해버려서 가지 못했어. 혹시 많이 기다렸어? 출석은… 괜찮아?”
“괜찮아. 조금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갔어.”
전혀 괜찮아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나랑 함께 있는 것도 불편한지 레드릭의 발끝이 나를 향해 서있지 않았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마음 같아선 레드릭을 붙잡아 두고 화가 풀릴 때까지 몇 번이고 사과하고 싶었다. 정작 레드릭은 사과는 고사하고 나랑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모습이라… 차마 그럴 순 없었다.
“하아, 진짜 미안해. 한 대 치고 싶으면 쳐도 좋아.”
“그런 거 아냐.”
차라리 욕을 해라. 말로만 괜찮다고 하면서 표정은 꼭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한다. 보통의 귀족들과 다르게 화내는 것이 익숙하지 못한 모양이다.
참 별종이네. 그러고 보니 애쉬도 화를 잘 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칭얼거리거나 그 정도가 조금 심할 땐 앞뒤 재지 않고 떼쓰긴 했지만 끝은 결국 애원과 호소다.
“머, 먼저 가도 될까? 나도 시험 공부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레드릭이 머뭇거리며 이야기했다. 전조 없이 들어찼던 애쉬 생각을 날려버리고 눈앞의 레드릭에게 집중했다.
“당연하지. 나중에라도 한 소리 하고 싶으면 언제든 불러.”
알았어,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지 않았다. 레드릭이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나도 책을 추켜올렸다.
“이벨린.”
그때, 몇 발자국 떨어진 레드릭에게서 불쑥 이름이 불렸다.
“어?”
“…공부 열심히 해.”
그러곤 다시 제 갈 길을 가버린다. 놀린 건가, 비꼬는 건가.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응원이었다.
* * *
“고마워요. 저한텐 선배밖에 없어요.”
간지러운 입맞춤이 잘게 쏟아졌다.
저리 비켜, 하며 이마를 밀어내는데도 애쉬는 방긋방긋 웃으며 꽉 붙잡은 허리를 놓지 않았다.
내 공부할 시간도 없어 죽겠는데 왜 애쉬의 제국사 과외를 해주고 있어야 하는지. 하루가 48시간이면 좋겠다.
“오늘 보충해 주신 건 꼭 제대로 지불할게요.”
그래, 이 과외비까지 없었더라면 지독한 자괴감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른다.
사건의 발단은 두 시간 전이었다. 한창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신경을 거스르는 소음이 창문 밖에서부터 울렸다. 차마 무시할 수도 없는 소음이었다. 방학 동안 질리도록 들었던, 내 기숙사 방 창문을 두드리는 바로 그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애쉬가 품 안 가득 돌멩이를 모아들고는 창문을 향해 하나하나 정확히 던져대고 있었다.
거친 발걸음으로 건물 밖을 나섰다. 왜 방해하고 난리야! 버럭 소리 지를 준비가 만반이었는데 날 발견한 애쉬가 돌멩이를 우두두― 떨어뜨리더니 닭똥 같은 눈물도 뚝뚝 흘려대기 시작했다.
“왜, 왜 울어?”
엉엉 울면서 어린아이처럼 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품을 내줘버렸다. 짜증이 어느덧 당혹으로 바뀌어갔다. 한마디 쏘아주려던 입은 어느새 녀석을 달래기 바빴다.
“왜 그러는데, 응? 말을 해줘야 알지.”
훌쩍. 코 먹는 소리가 들렸다.
“전 진짜 멍청이예요. 하나도 모르겠어요.”
“네가 왜 멍청이야.”
이건 위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차기 대마법사 후보를 누가 멍청이라고 해?
“선배가 체크해 주신 부분을 백 번 봤는데 그래도 이해가 잘 안 가요.”
“제국사? 모르겠으면 이해하지 마. 그냥 외워버려.”
“전 선배처럼 똑똑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저 어떡하면 좋아요.”
또다시 훌쩍. 젖은 목소리가 점점 더 심해져 갔다.
방학 때에는 분명 공부 때문에 이 정도로 스트레스 받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시험 기간이다 보니 애가 예민해졌나 보다.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어. 나 붙들고 울 시간에 한 자라도 더 보면 돼.”
“선배가 없으면 안 돼요. 아무것도 머리에 안 들어온단 말이에요.”
“그거 버릇되면 큰일 난다, 너. 자, 가서 빨리 공부, 윽……!”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애쉬가 힘주어 몸을 안아버렸다.
“못 하겠단 말이에요.”
아윽, 숨 막혀.
녀석의 등을 때렸다. 힘이 풀린 팔에서 빠져나와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애쉬가 긴 속눈썹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다가오려 하자 “스읍!” 소리 냈다.
내 단호함에 가로막혀 버린 허망한 발걸음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언제까지고 네 공부를 봐줄 수는 없어. 나도 시험이야. 오늘 끝내야 할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고. 울어도 소용없어. 뚝, 그만 울라니까.”
애쉬는 입을 꾹 다물고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러나 한번 터진 눈물이 쉽게 멎어들지 않는지 끅끅거리는 애달픈 소리가 자꾸만 새어 나오고 소매가 축축이 젖어 오는데도 눈물방울은 눈치도 없이 흘러내렸다.
“과, 과외비 흑, 드릴게요.”
아, 얘가 진짜. 말이 안 통하는구만?
“두 배. 흐윽.”
애쉬가 검지와 중지를 나란히 들어 보였다. 그냥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모습에 조금 난감해졌다.
“그럼… 세 배요.”
뭐,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다. 시간만 아까운 짓이다.
“교재 가지고 나와.”
내 한마디에 언제 울었냐는 듯 애쉬의 얼굴에 꽃 같은 미소가 만발했다.
* * *
애쉬의 기숙사 방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그랬다간 엄한 분위기에 휩쓸려 갈 위험이 있어서 교내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할 수 있는 최대의 능률을 발휘하여 녀석의 시험 범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설명했다. 질문 하나 건네는 것 없이 설명만 이어지는 탓에 애쉬의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걱정했었는데 녀석의 눈은 초롱초롱하기만 했다.
“이제야 이해가 가요! 정말 대단해요, 선배.”
“잊어버리지 말고 잘 기억해.”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아, 목이야.
펼쳐놓았던 교재를 애쉬에게 돌려주고 이만 일어서려는데 손목이 잡혔다. 아주 당연한 수순처럼 입술이 겹쳐왔다. 건조한 입에 젖은 살덩이가 들어오더니 입안 이곳저곳을 부드럽게 쓸어갔다…….
“목마르시죠.”
또다시 입술이 겹쳐왔다. 쪽. 가볍게 맞닿았다가 고개를 살짝 튼 애쉬가 아랫입술을 빨았다. 반쯤 깔린 눈꺼풀 아래로 녀석의 푸른 눈이 내 입술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을 느릿하게 머금어가던 애쉬가 조금 더 깊게 입을 맞춰왔다. 순간 고개가 조금 뒤로 넘어갔다.
“이벨린.”
화들짝. 황급히 애쉬의 어깨를 밀어버렸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애쉬는 아쉬움에 자신의 입술을 혀로 쓸어보았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로즈였다. 늘 생기발랄하던 로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잠깐 얘기 좀 해.”
로즈는 짧게 한마디만을 던지고선 기숙사 건물 쪽으로 걸어가 버린다.
아, 망했다.
멍하니 로즈의 뒷모습을 보다가 뒤늦게 마른세수를 했다.
“음… 제가 가서 말해 볼게요.”
“네가 무슨 말을 해. 됐어.”
가서 또 무슨 엉뚱한 소릴 하려고.
게다가 로즈는 애쉬를 좋게 보지 않고 있었다. 키스하고 있던 상대가 애쉬가 아니었다면 로즈의 반응이 이렇게 쌀쌀맞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방해되지 않도록 숨죽여 지켜본 뒤 기숙사 방에서 어떻게 된 거냐고 흥미롭게 수다를 이어나갔을 거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가서 마저 공부해.”
다음엔 오늘처럼 울면서 찾아와도 절대 시간 못 내줘.
애쉬를 돌려보낸 후 기숙사로 향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뭐라고 설명하지. 로제타 이야기까지 나온다면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로즈.”
잠시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기숙사 방 복도에서 로즈를 마주쳐야 했다. 내 방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는 폼이 예사롭지가 않다.
“여기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들어가자.”
수 초간 아무 말도 없이 멀거니 서있기만 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급하게 나가느라 잠겨있지 않은 문을 열었다.
“시험 공부까지 내팽개치고 걔를 만나러 간 거야?”
로즈가 공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책상을 발견했다. 시험에 목을 매는 이벨린 네가? 기가 차 헛웃음까지 섞인 비아냥이 들려왔다.
“모르는 게 있다고 해서 잠깐 알려주러 나간 거야.”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입학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수석을 놓치지 않은 너한테 공부 좀 알려달라고 하는 애들이 어디 한둘이었어? 그때마다 없는 사람 취급하던 네가 왜 애쉬한테만 관대하게 구느냐는 거야.”
엄연히 과분할 정도의 과외비를 받아 챙긴지라 관대하다는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그러나 또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애쉬가 아닌 다른 학생들이 창문을 두드리거나 울면서 도와달라고 해도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욕이나 퍼부어주고 다신 찾아오지 말라면서 소리칠지도 모르겠다.
“이번 여름 방학 때 좀… 친해져서 그래. 내가 다른 애들을 대할 때랑 로즈, 널 대할 때가 다른 것처럼.”
“지금 5년 내내 붙어있었던 나랑 고작 두 달 같이 지낸 애쉬가 동급이라는 소리야?”
“여기서 동급이 왜 나와.”
애 같은 소리에 표정을 숨길 새도 없이 미간이 좁아졌다.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로즈는 더욱 목소리를 키워가며 본격적으로 따지기 시작했다.
“내가 틀린 말 했어? 요즘 들어 나보다 애쉬 카인드로퍼랑 지내는 시간이 더 많고, 내 충고는 귀담아듣지도 않았잖아! 그 녀석이랑 가까이 지내지 마!”
날카롭게 내지르는 소리에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최대한 침착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려 했던 마음에 균열이 생길 정도였다. 크게 심호흡했다.
“애쉬는 나한테 해를 끼칠 만한 애가 아니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 녀석이 다 연기하고 있는 거라면.”
“이 나라의 황자씩이나 되는 애가 왜 굳이 연기까지 하면서 나한테 접근하는데. 마음만 먹으면 나 같은 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도 있어.”
내 입으로 말했지만 속이 썼다. 예고 없이 상기된 존재의 나약함에 쌉쌀한 입맛을 다셔야 했다.
나조차도 ‘그건 그렇군.’ 하고 깨닫게 되는 발언이었는데 로즈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애쉬가 마법으로 온갖 난리를 쳤다고 하더라도 애쉬를 싫어하는 정도가 지나쳐 보인다.
“이벨린, 애쉬 카인드로퍼는 그저 놀이하고 있는 거야. 넌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제발 정신 좀 차려.”
“뭐?”
듣던 중 가장 어이없는 헛소리였다. 정말 로즈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의심까지 든다.
누가 누구를 가지고 놀아, 애쉬 카인드로퍼가 나를?
내 앞에서 애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다. 엉엉 울거나, 수줍어하거나, 애원하거나. 마조히스트가 아닌 이상 누가 이런 걸 놀이로서 즐긴단 말인가. (잠자리를 같이할 때의 애쉬는 나를 몰아붙이면 몰아붙였지 욕을 먹고 좋아하진 않았다.)
“네 반응이 재미있으니까 가지고 노는 것뿐이야. 더 이상 애쉬 카인드로퍼에게 말려들어 가지 마, 이벨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로즈, 너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하고 있어. 애쉬는…….”
“제발 내 말 좀 들어! 걘 미치광이 사이코일 뿐이야!”
“로즈!”
결국 나까지 언성이 높아지고 말았다.
로즈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줄은 몰랐다. 무엇에 꽂힌 건지 전혀 대화가 통하질 않는다. 내가 생각해도 애쉬가 남들과 조금 다른 면이 있다고 한들 미치광이에 사이코 소리까지 들을 애는 아니었다. 단지 화폐 개념이 좀 남다르고 나를 유독 좋아하고 있을 뿐인 평범한 애다.
“왜, 그 사이코 편이라도 들려고?”
“적당히 해. 애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잘 알지도 못하는 건 너야, 이벨린. 너의 유일한 친구인 내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면 좀 생각이라도 해주면 안 돼? 다 널 위해서…….”
“그런 건 날 위한 게 아니야.”
“…….”
로즈의 근거 없는 비난을 언제까지고 받아줄 수만은 없었다. 확연히 가라앉은 목소리에 로즈가 경악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얼핏 설움과 원망이 섞여 들어간 모습이었다.
“난 누구한테 챙김을 받아야 할 정도로 얼빠지지 않았고, 앞뒤 분간 못 하고 거짓 호의에 빠져들 정도로 순탄한 삶을 살지도 않았어. 내 주변은 내가 관리해.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도 날 구속할 수는 없어.”
“…구속이 아니야. 네가 속고 있는 게 안타까워서 그래. 애쉬 카인드로퍼가 널 놀잇감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게 너무 싫어서!”
“난 누구의 놀잇감도 되지 않았어! 로즈, 말해 두는데 네가 하고 있는 건 주제넘은 참견이야.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오지랖이라고. 더 이상 애쉬 일로 이런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로즈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이 얼굴을 구겼다. 상처받은 눈동자가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파들거릴 정도로 세게 짓씹고 있었다.
뜨거웠던 머리가 차게 식어갔다.
“로즈.”
말이 너무 심했다. 솟아오르는 원망과 눈물을 애써 참고 있는 로즈의 모습이 가련했다. 내가 베어낸 상처가 짙어져 가고 있었다.
로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의도를 두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로즈가 시선을 피해 버리며 몸을 물린다.
“난 너의 행복을 바랄 뿐이었어.”
물기 어린 말을 던져두고 로즈는 나를 지나쳐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쿵.
등 뒤로 닫히는 문소리가 심장을 아프게 울렸다.
“하아, 젠장.”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다. 로즈의 마음이 여린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런 식으로밖에 말하지 못했지, 하는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온다. 괜히 나까지 흥분해서는.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다.
덩그러니 펼쳐진 교재는 날이 밝도록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 수면 시간이 는 것도 아니었다.
* * *
내 마음이 편치 않건, 계획했던 공부량이 다 채워지지 않았건 간에 시간은 자비 없이 착실하게 흘러갔다.
혼곤한 마음을 다잡고 억지로 펜을 쥐며 공부에만 몰두했다. 로즈는 물론이거니와 애쉬와도 만나지 않았고 레드릭은 계속해서 수업에 나오지 않는지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간혹가다 데니안이 몇 마디 말을 붙여올 때 빼고는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적막이었다.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듯한 쓸쓸하고도 익숙한 적막. 싫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시험 공부뿐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시험은 잘 봤다. 학년별로 전교 10등까지 표기해 놓은 교내 게시판엔 내 이름이 가장 상위에 적혀있었다. 됐다. 이걸로 한시름 덜었다.
게시판 앞에 서서 묵혔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벨린 로벤스디가 또 1등이야?”
“쟤 진짜 독하다.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애를 무슨 수로 이겨.”
나를 두고 수군대는 소리를 무시하는 것은 이골이 났다. 면전에 대고 욕해도 듣지 못한 척할 수 있었다.
등수를 확인했으니 게시판 앞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기숙사에서 한 시간 정도 자다가 아르바이트를 가면 딱 알맞을 시간이었다. 차디찬 돌바닥에서도 머리만 누이면 잠들 수 있을 정도로 피곤한 상태였기에 기숙사로 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선배!”
이것도 듣지 못한 척할까. 익숙한 목소리에 갈등이 일었다. 결단이 서기도 전, 손목이 붙잡혔다.
그냥 무시하고 뛰어갈걸.
“왜.”
“하아.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네.”
애쉬가 대뜸 몸을 껴안았다. 너른 가슴팍에 뺨이 비벼진다.
“으윽! 놔!”
“조금만 안고 있으면 안 돼요?”
“사람들이 봐!”
“마법 걸어 놓을게요.”
“안 돼!”
퍼억!
끝끝내 정강이를 차게 만든다. 애쉬가 한 발로 콩콩 뛰며 오른쪽 정강이를 문질렀다. 아파하면서도 얼굴의 미소는 걷히질 않았다.
“너무해요.”
“맞을 짓을 하지 마.”
여전히 끙끙대는 애쉬를 내버려 두고 앞서 걸었다. 다급하게 쫓아온 애쉬가 보폭을 맞췄다.
“오늘 성적 나온 거 보셨어요?”
“응.”
“저도 오늘 성적 나왔어요.”
“잘 봤어?”
애쉬의 미소가 깊어졌다. 얼굴만 보고도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제국사 만점이에요. 1등.”
“그래? 이리 가까이 와봐.”
애쉬가 의심 없이 내 쪽으로 허리를 숙였을 때 짧게 입을 맞추곤 떨어졌다. 주위에 사람이 없었기에 할 수 있는 짓이었다.
애쉬는 넋 빠진 얼굴을 하고선 굽힌 허리를 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의 귀가 지나치게 붉다.
“와아… 선배. 저 지금 심장 엄청 뛰어요.”
“잘했어. 방학 동안에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네.”
“한 번만 더 해주시면 안 돼요?”
“욕심이 과하다.”
“제발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기억이 안 나요.”
“굳이 기억할 필욘 없어.”
“어떻게 그래요. 제발, 선배. 네?”
그깟 뽀뽀가 뭐라고. 귀가 따갑도록 졸라대는 통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코앞에 놓인 얼굴에 입술을 맞대었다.
“읍!”
녀석의 손에 양 뺨이 잡혔다. 떨어지려고 했으나 녀석이 집요하게 따라온다. 주춤. 발이 뒤를 짚고 허리가 반대로 꺾이는데도 애쉬는 입을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꽈당.
엉덩이가 바닥에 닿고서야 입술이 살짝 떨어진다. 그러나 뺨 위에 놓인 손은 여전했다.
“죽을래?”
쪽.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입맞춤에 하!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이제 내 말은 무섭지도 않지?
쓴소리 한번 해줄까 하고 생각할 즈음 애쉬가 해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경외감이 들 정도로 맑고 예쁜 미소다. 차라리 정오의 태양 빛을 보는 것이 덜 눈부실 것이다.
차마 그 웃음을 깨뜨리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녀석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은, 매혹적인 파급력을 지닌 얼굴이었다.
“저 1등 했으니까 소원 들어주세요.”
녀석과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안 그래도 조만간 갈 계획이었으니 못 들어줄 것도 없다. 게다가 이렇게 마음먹게 해준 것도 따지고 보면 애쉬 덕분이다. 녀석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다.
“…언제 갈까?”
“선배 시간 괜찮을 때요.”
“아르바이트 쉴 수 있는 날에 가자. 확인해 보고 따로 얘기해 줄게.”
“네.”
원하는 대답을 들어서인지 애쉬가 물러났다. 손을 잡아 내 몸을 일으켜 주고 또다시 시험 얘기를 한창 이어나간다. 내용은 자세히 듣지 않아도 비슷했다. ‘선배가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틀렸을 문제예요!’ 하는.
그러나 따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재잘거림을 들으면서 기숙사 앞까지 걸어갔다. 정문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우리가 여태 손을 잡고 걸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 * *
레드릭은 앞에 앉아있는 상대가 잘 빚어놓은 석상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고고하게 꼰 발끝이 까딱까딱 움직이기 시작한 덕이었다. 이마를 덮은 단정한 흑발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벨린의 것과 다름없는 칠흑색이었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같은 밤이라 할지라도 낮의 고단함을 씻어주는 안락한 밤이 있다면 불륜과 배신, 온갖 범죄가 자행되고 서늘한 죽음의 기운이 지척에 깔린 스산한 밤이 있는 것처럼.
눈앞의 남자 세레즈는 후자에 가까운 느낌을 주었다.
“이걸 이벨린이 전해 주라고 하던가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맥락을 파악하지 않았더라면 질문인지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고저가 없었다.
레드릭은 고민했다.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이벨린을 위한 방향일지에 대해 생각하느라 침묵이 꽤 오래도록 흘렀다.
세레즈는 참을성이 있었다. 재촉하지 않고 레드릭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은 쉼 없이 까딱거렸다. 사냥감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놓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것 같은 포식자의 눈을 하고선.
“그건 아닙니다. 다만 자존심 때문인지… 공작 저하랑 화해하고 싶어도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친우인 제가 대신 찾아뵙게 된 겁니다.”
“화해, 화해라…….”
세레즈가 은색 테이블 위에 펼쳐진 치아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그것을 굴리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라?”
깜짝.
집어삼킬 듯한 어두운 눈동자가 레드릭을 향했다. 자꾸만 목이 타서 차를 들이켜려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분위기만으로도 압도당할 것 같았다. 물결치는 찻잔을 내려놓고 레드릭은 허벅지 위에 양손을 깍지 껴 잡았다.
“…맞습니다, 용서. 저하께 용서받고 싶어 했어요.”
탁!
들고 있던 치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세레즈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소파에 깊게 몸을 뉘었다. 소파 가죽이 비벼지는 소리가 꼭 비명 소리 같았다.
그러나 아플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있던 공기는 어느 틈엔가 확연히 풀어져 있었다. 세레즈가 진심으로 미소 지어 보인 그 순간부터인 것 같다.
레드릭은 목전까지 차올랐던 답답한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자각하지 못했었는데 자신이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마워요, 호엔슈프 군. 덕분에 여동생의 진심을 알았네요.”
“친우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사이가 좋은가 봐요?”
세레즈가 긍정적으로 받아주어서 다행이었다.
묵직했던 가슴을 쓸어내린 레드릭은 이벨린과 사이가 좋냐는 질문에는 뜸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으로 말을 트기 시작한 것은 몇 개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의 길이가 관계의 돈독함과 비례하는 건 아니지. 실제로 이벨린은 자기에게 가정사까지 모두 털어놓지 않았는가. 레드릭은 스스로 합리화했다.
“네… 뭐. 이번 개교기념 파티에도 파트너로 같이 가기도 했고요.”
“많이 친한가 보네요.”
세레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풀어진 공기가 무색하게도 칼날이 피부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예리한 빛이었다.
오싹.
등골이 서늘해졌다. 혹시 말실수라도 한 건가 싶었는데 세레즈의 얼굴은 평온해 보이기만 했다. 여동생의 학교생활이 어떤지 궁금해하는 보통의 인자한 오빠의 모습이었다.
‘내가 너무 예민했나.’
레드릭은 식은땀이 축축하게 흐르고 있는 등줄기를 느끼면서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버렸다.
“앞으로도 더 좋은 관계가 되어보려고 합니다.”
세레즈가 턱을 매만졌다.
“앞으로도 더… 재미있는 말이네요.”
그 밖의 다른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레드릭은 차를 조금 홀짝이다가 등 떠밀리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객령이 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여기서 이만 물러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마음은 홀가분했다. 이벨린의 진심은 세레즈에게 충분히 닿았으리라. 레드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로벤스디가의 시종이 가져다준 코트를 입고 세레즈를 향해 인사했다. 호화스러운 로벤스디가의 응접실을 빠져나가려는 찰나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가엽게도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온 노력을 봐서 말해 주는 건데…….”
세레즈는 여전히 꼰 다리를 풀지 않은 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이벨린은 친우가 필요 없어요.”
“…….”
“나만 있으면 되거든요.”
살갗을 뚫고 나온 선혈처럼 붉은 입술이 느리게 호선을 그렸다. 비린내가 풍기는 미소였다.
세레즈의 말뜻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로벤스디가의 시종이 레드릭을 재촉했다.
“마차를 대기시켜 놨습니다.”
“아, 예. 그럼.”
레드릭은 마차를 타고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친우가 필요 없다는 말은 무엇일까. 동생에게 질투라도 느끼는 건가? 팔불출? 만약 그렇다면 세간에 알려졌던 것보단 로벤스디가의 남매애가 썩 나쁘진 않은 모양이다. 단순히 남매애라고 치부하기에는 세레즈로부터 흘러나온 적의가 꺼림칙하긴 했다.
기분 탓이겠지.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의문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을 때 어느새 마차는 아카데미 정문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 * *
로즈와 화해하기 위해 몇 번을 연습하고 또 시도했는지 모른다.
로즈, 미안해. 그땐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 아니아니, 애초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평소처럼 대해 볼까? 로즈! 밥 먹으러 갈래? 내가 살게. 30루덴 이상이어도 괜찮아! 후우, 이것도 아닌 것 같다.
으으, 도대체 어떻게 해야 돼.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려 봐도 불시에 떠오르는 무패의 화해의 기술 같은 건 없었다.
“누구랑 화해해 본 경험이 있어야지…….”
“로즈 말하는 거야?”
“……?!”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움츠려있던 어깨가 빳빳하게 펴졌다.
“뭘 그렇게 놀라. 죄라도 졌어?”
데니안이 양손을 펼치며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아아, 너였냐.
머릿속이 온통 로즈 생각으로 꽉 차있어서 로즈라도 나타난 줄 알았다. 다시 어깨가 말려들어 갔다.
타들어 가는 내 속도 모르고 데니안이 킬킬 웃어댄다.
“로즈랑 싸운 거 맞지?”
“티 많이 나?”
“엄청. 너네 둘이 요즘 같이 다니지도 않잖아.”
“하아.”
“무슨 일인데.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도와줄게.”
자신감 있게 손을 내미는 데니안이… 달라 보였다.
자식, 원래 이렇게 멋진 놈이었나?
등 뒤로 후광이 쏟아져 눈을 찔러댔다. 평소에 내일이 없는 한량이라고 생각해서 미안. 진중함이라곤 1%도 없는 가벼운 놈이라고 생각해서 정말 미안!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인생 선배의 아우라를 뿜고 있는 손을 조심스럽게 마주 잡았다.
“제발 도와줘.”
“하하. 네 입에서 도와달라는 말을 듣는 날도 오다니.”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말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내 반응에 데니안의 인중이 길어졌다. 잔뜩 부풀어진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오빠만 믿어!” 하는 폼이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아냐. 의심하지 말자. 인생 선배의 조언을 새겨들어야지.
뻗대는 꼴은 참 없어 보였으나 속에 있는 말을 꺼내서 데니안의 상승된 기분에 초를 치진 않았다. 녀석에게 맞춰주기 위해 “정말 고마워!” 하고 외치기까지 했다.
8. 그놈이 시험을 잘 봐야 하는 이유 (2)
우리는 조금 더 이야기하기 편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한동안 데니안의 ‘화해 가이드’가 구구절절 이어졌다.
…뭐, 소득은 있었다. 하는 말의 90%가 데니안이 얼마나 교우 관계가 좋은지에 대한 자랑이어서 경청하던 영혼이 도중에 어딘가로 도망가긴 했었지만. 빈껍데기인 몸만 “응, 그래서?”를 기계처럼 말했을 뿐이다.
나머지 10%의 조언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타이밍만 놓치지 않으면 화해는 생각처럼 어렵지 않다는 것. 단 다툰 둘의 관계가 절친했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상대방을 엿 먹이기 위해 다툰 것은 화해가 아니라 재판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랑 로즈는 서로를 엿 먹이기 위해 눈에 불을 켜는 사이는 아니었으므로 다행히 재판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우리는 둘 중 한 사람이라도 먼저 손을 내밀면 금방 풀릴 수 있는 관계다.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어려울 뿐이지. 지레 겁먹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관계는 오히려 더 악화된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나중에야 응어리를 풀려고 하면 그땐 이미 늦은 것이다. 깊어진 감정의 골이 그대로 굳어버리고 나서는 어떻게 손을 써본다 한들 절대 예전의 관계로는 돌아갈 수 없다.
각설하고… 더 늦기 전에 먼저 다가가라, 이 말이다.
“나의 값진 조언을 들었으니 내일은 너랑 로즈가 정답게 강의실에 들어오는 모습을 기대해도 되겠지?”라고 말하는 데니안에게 확답을 주기가 어려웠다.
“노력은 해볼게.”
무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세상일이 마음처럼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로즈의 입에서 애쉬 이야기가 나오면 또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다. 최대한… 침착해야지.
* * *
로즈에 대한 상념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음에도 아르바이트는 실수 없이 끝마쳤다. 막 설거지를 끝낸 젖은 손을 닦아내고 앞치마를 풀었다.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땐 평소 퇴근 시간보다 10분 정도 늦은 시각이었다. 일이 늦게 끝나서는 아니었고 정말 이례적이게도 무려 빵을 사느라 늦어진 것이다. 사장님도 퍽 놀라 하는 눈치였다. 없는 형편이라 값비싼 것들은 사지 못하였고 바게트를 하나 포장하였다. 빈손으로 로즈의 방에 찾아가기가 껄끄러워서였다.
겨울로 들어서는 계절에 해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방학 때만 해도 퇴근 후 거리가 이렇게 어둑어둑하지 않았는데. 찬 공기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발걸음은 빨라지지 않았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탓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느려터진 발이 이제는 아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 신은 정말이지 내 편이 아니다.
그렇게 얼굴 보기가 어려웠던 로즈가 하필이면 아카데미 정문 근처에 떡하니 서있을 게 뭐람. 이대로 가면 로즈와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데면데면한 채로 기숙사 방까지 나란히 올라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 지금은 잠시 숨어있다가 로즈가 먼저 들어가고 나면 나중에 가자.
구차한 판단을 끝내고 하릴없이 주위를 서성였다. 그러나 내 초조한 마음을 까맣게 모르는 로즈는 쉽게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있었다.
정문 앞에 오도카니 서있는 모습이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무료하게만 보이던 로즈의 얼굴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이때 물건을 나르던 삯 마차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서는 바람에 로즈의 모습이 가려졌다.
누굴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사소한 의문이 들었지만 괜한 호기심 때문에 몸을 빼고 살펴보는 등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진 않았다.
삯 마차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멈춰서 있었다. 땅거미가 진 거리는 한층 더 빛을 잃어갔다.
이제 들어갔으려나.
마부가 고삐를 당겨 말을 움직였다. 내 앞에서부터 천천히 비껴 나가는 마차 너머로 시야가 트인다.
맙소사. 로즈는 아직까지도 정문에 서있었다. 낭패네.
그러나 로즈는 혼자가 아니었다. 당황하여 관자놀이를 긁어내리는 것도 잠시,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나와 같은 머리 색인 흑발의 사내가 로즈 앞에 서있었다.
세레즈……!
어둠 속에서도 확실히 알아챌 수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매일같이 놈의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하루에도 백 번은 저 간악한 머리를 터뜨려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뱀 같은 눈이 정확히 로즈를 향해 있었다. 먹이의 크기를 가늠해 보는 듯이. 순진한 먹잇감인 로즈는 눈앞의 위험을 모르고 계속해서 입을 움직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로즈. 왜 저놈이랑 같이 있는 거야!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야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세레즈의 모습만은 선명히 보였다. 쥐고 있던 바게트가 뭉개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세레즈는 로즈의 어깨를 두드린 뒤 무언가 짧게 이야기했다. 그러곤 기다렸다는 듯이 로벤스디가의 마차가 나타났다. 마차에 올라타는 세레즈를 향해 로즈가 짧게 묵례한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쿵. 쿵. 쿵. 쿵.
온몸의 맥박이 거세게 뛰었다. 고막이 웅웅 울리고 있었다. 분노와 혼란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거북함에 정신이 삼켜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며 로즈에게 걸어갔다. 로벤스디가의 마차는 깊은 어둠의 밤거리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이벨린?”
“말해. 바른대로 전부 말해! 왜 세레즈 로벤스디랑 같이 있었던 거야?!”
“봤어?”
의외의 대답에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봤냐니. 그게 무슨 소리야.”
“비밀이라고 했는데…….”
“비밀? 알아듣게 좀 얘기해!”
로즈의 양팔을 잡아챘다. 갑작스럽게 팔이 잡힌 로즈가 팔을 빼려 힘을 주었으나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붙잡았다.
“왜 이렇게 흥분했어? 일단 이것 좀 놔, 이벨린.”
“로즈, 난 지금 침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더 지랄맞게 굴지 않도록 네가 도와줘야 해. 왜 세레즈랑 같이 있었던 거야.”
넘쳐 오르는 감정의 동요를 꾹꾹 눌러 담으며 얘기했다. 로즈의 안색이 어두워져 갔다.
“날 협박하는 거야?”
“협박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난…….”
“내가 말 안 하면 어떻게 할 건데.”
로즈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커다랗게 뜨인 동그란 눈이 비원함을 품은 채 내 얼굴을 담고 있었다.
“욕이라도 할 거니? 또 저번처럼 주제넘은 참견이라고 힐난이라도 할 거야?”
설움에 북받친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난 지금의 로즈가 안쓰럽게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엔 위험이라는 붉은 메시지가 온통 떠돌아다녔다.
“너랑 입씨름하고 있을 여유 없어. 그 자식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그 자식이라니, 네 유일한 가족이야. 이벨린 너의 오빠라고!”
퍼엉.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것들 중 무언가가 터져버렸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보니 분노인 것 같다. 로즈의 입에서 세레즈를 두둔하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로즈가 너무도 낯설었다.
“…그래. 그 빌어먹을 내 오빠는 너한테 무슨 볼일이 있었던 건데.”
로즈가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엉엉 소리 내어 울지만 않을 뿐이지 눈 아래로 쉼 없이 눈물이 떨어진다.
“로벤스디 공작 저하랑 네 험담이라도 했을 것 같니?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해! 다 널 위해서 그런 거야. 네가 다시 로벤스디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그런 건 날 위한 게 아니야! 말했잖아, 난 로벤스디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그런 건 합리화일 뿐이야. 과중되는 학업에 아르바이트, 끼니도 변변치 않고 옷차림도 늘 남루한 네 모습을 봐. 공작 저하께서도 그런 너에게 지원해 주고 싶다고 하셨어. 다만 여동생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고 계셨을 뿐이야. 행여나 네 자존심에 상처가 될까 봐. 그래서 내가 조금 도움을 준 거야.”
“…로즈, 그게 무슨…….”
“넌 몰랐겠지만 저하는 늘 네 근처에 계셨어. 다가가고 싶었는데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멀리서만 지켜보신 거지. 그래서 내가 조금 도와드린 거야. 그런데 모든 걸 애쉬 카인드로퍼가 망쳤어. 저번 방학 때 내 별장에서도 저하와의 만남을 일부러 어그러뜨렸다면서.”
지독한 악몽의 한가운데에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로즈가 내뱉고 있는 말은 도무지 현실성이 없었다.
로즈가 내 두 손을 잡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니까 별장에 초대한 것도 나와 세레즈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였단 말이야?”
“그래! 근데 애쉬 카인드로퍼가 막아버린 거야. 그놈은 너를 고립시키려고 하고 있어. 쉽게 가지고 놀기 편하려고. 친구도 가족도 없는 넌 죽거나 망가져도 아무런 탈이 없을 테니까!”
“그것도 세레즈가 이야기한 거고?”
“애쉬 카인드로퍼는 황실 내에선 이미 소문난 미치광이랬어.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어. 네가 괴한에게 습격을 받아서 쓰러지고 난 후에야 알 수 있었지. 아카데미 안에 온갖 재해를 퍼붓고 있으면서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더라. 그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야. 사이코야. 넌 그런 애쉬한테 지금 속고 있는 거야.”
로즈가 마주 잡고 있는 내 손을 들어 올려서 제 뺨에 가져다 대었다. 축축한 물기가 스며들었다.
“제발 이벨린, 널 걱정하는 내 마음을 알아줘.”
“세레즈가 나한테서 애쉬를 떼어 놓으라고 했구나.”
“널 위해서.”
“…날 위하는 게 도대체 뭔지.”
로즈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화가 났다. 가문이 필요 없다는 내 말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세레즈의 말은 교리처럼 따르는 로즈의 행동에 화났고, 뒤에서 로즈를 조종하는 것도 모자라 나를 감시하고 있던 세레즈 그놈한테도 마찬가지였으며 마지막으로 가장 화나는 건 세레즈의 눈과 손길이 내가 머무는 곳 깊숙이까지 퍼져 오는데도 전혀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이었다.
“이벨린, 이제 모든 걸 알았으니 애쉬와는 가까이 지내지 마. 그리고 공작 저하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줘. 좋으신 분이야.”
까마득한 높이의 벼랑 끝에서 발끝으로만 서있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조금만 흐트러지면 추락하여 뼈가 바스러지고 머리가 꺾여버릴 것 같았다.
“…미치광이 사이코는 애쉬가 아니라 세레즈야.”
눈꺼풀을 닫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나 앞코가 닿을 정도로 가깝게 붙어있던 로즈의 귀에도 소리가 들렸나 보다.
“저하께 무슨 소리야!”
아아, 그렇지 여동생을 대단히 배려하시는 자애로운 로벤스디 공작 저하께 내가 실언을.
실성한 빈 웃음이 입술 새로 흘렀다.
“다시는 세레즈를 만나지 마. 나를 위해서 하는 모든 행동을 멈춰. 난 네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이벨린……!”
내가 바보였다. 어리석었다. 정을 주는 게 아니었는데. 관계를 만들지 말았어야 했는데. 용암처럼 들끓었던 감정들이 밖으로 터져 나오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세레즈가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무시해. 나 같은, 가문에서 버려진 애랑은 더 이상 상종 안 한다고 얘기해. 오늘 이후로 세레즈와의 만남은 없는 거야. 절대 안 돼. 절대.”
“…….”
“그리고 앞으로 내 걱정도 그만해. 남루한 옷이나 변변치 않은 끼니 같은 거로 일일이 신경 쓰이게 하지 않을게. 내다 버린 음식 쓰레기통을 쥐새끼처럼 뒤지고 있어도 넌 그냥 지나치면 돼.”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알아서 나가떨어져 준다는 소리야.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없어. 난 우정보다 자존심이 센 애라 너의 호의인지 오지랖인지를 받아들여 줄 수가 없거든. 넌 헛수고한 거야, 로즈.”
내가 듣기에도 평온할 정도로 목소리가 덤덤했다. 지금 눈물이 흐르는 건 슬퍼서가 아니라 내 자신이 너무도 한심해서다.
* * *
이름을 부르며 소매를 붙잡는 로즈를 뿌리치고 기숙사로 들어와 버렸다. 로즈의 표정이 어땠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세레즈가 이미 애쉬를 경계하고 있고 로즈까지 이용하고 있었다니. 미처 끊어내지 못했던 불행이 목전까지 치고 들어왔음에도 머저리처럼 알아채지 못한 내가 미치도록 한심했다.
기숙사 방문을 닫고 그대로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만약 애쉬나 로즈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때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을 것이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로벤스디가의 저택에 있었을 때 세레즈가 세뇌하듯 얘기하던 것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이벨린, 넌 목을 쭉 빼놓고 온종일 나만 기다리며 살게 될 거야.”
“내 관심이 없으면 말라 죽어 버리겠지, 가엾게도.”
그 말이 어떤 마법의 언령이라도 되었던 걸까. 나와 관계를 맺은 이들은 모두 죽어간다. 그들의 죽음을 막으려면 난… 그 누구와도 친분을 쌓아선 안 된다.
즉, 어찌 되었건 나는 혼자여야 한다는 소리다. 끔찍하게도. 이 드넓은 대륙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세레즈밖에 없게 될 것이다.
절망적인 실소가 터졌다.
“하… 엄마.”
나 너무 힘들어요.
무서운 꿈을 꾼 아이처럼 ‘엄마’라고 불러보았다. 그러나 이불을 여며주고 가슴을 토닥여줄 어머니는 이곳에 없었다.
무릎을 끌어모아 그 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직후 많은 것들을 포기했었다. 남들은 당연하게 누리는 것을 탐내지 않아 했다. 내가 쥐고 있던 것이라곤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단 한 명의 친구, 뜻하지 않게 인연을 맺게 된 세상 물정 모르는 후배.
이들마저도 내 속내를 전부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그저 내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시켜 주는 최소한의 유대를 가진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가져선 안 되는 거였다. 나에게 주어진 삶이 너무 잔인하고 가혹하게 여겨졌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사무치는 그리움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탈색되고 변질되어 갈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뿐이다.
그런다 한들 집채만 한 포탄이 뚫고 간 듯 뻥 뚫려버린 가슴의 허망함은 충족되지 않았다.
침대로 기어가 매트리스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줄곧 꺼내 보지 않았던 어머니의 치아라도 품속에 안고 싶었다. 더듬더듬, 손을 짚어가는데 손끝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더 집중하여 매트리스 윗부분부터 아랫부분까지 꼼꼼하게 훑었으나 치아가 담긴 주머니의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까지 끌어당겨졌던 마음 위에 철퇴가 내리찍힌 기분이었다.
섬뜩함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매트리스를 잡아 통째로 들어냈는데도 어머니의 치아는 보이지 않았다.
“…로즈!”
너 도대체 무슨 짓까지 한 거야!
스트레스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 방은 또 언제 뒤진 거지? 이것도 세레즈가 시킨 건가?
따져 물을 생각으로 로즈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로즈는 나오지 않았다.
아직 방으로 들어오지 않은 건가.
외투를 걸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찬바람이 이는 정문으로 튀어 나갔다.
“하, 젠장.”
정문에도 로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밤이 늦었는데 얘는 또 어딜 간 거야! 불안함에 질식할 것 같다. 요동치는 심장 때문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어서 정문 밖으로 조금 더 걸어 나갔다.
“이벨린?”
부르는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레드릭이었다.
녀석이라면 로즈를 봤을지도 몰라.
바닥을 거칠게 누르며 레드릭에게 달려갔다.
“이 밤중엔 웬일이야, 외투도 안 입고. 안 추워?”
재킷을 벗어 내 등에 둘러주는 레드릭의 손길을 무시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혹시 로즈 못 봤어?”
“로즈? 난 이제 막 아카데미로 돌아오는 길이야.”
“그러니까 오는 길에 보지 못했냐고.”
“전혀.”
“…하아.”
“무슨 일이라도 있어?”
“별일 아냐.”
레드릭에게서의 볼일은 끝났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나서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곧바로 등을 돌리려는 찰나 손목이 붙잡혔다.
“할 얘기가 있어.”
“미안, 나 지금은 좀 바빠.”
“아주 중요한 얘기야. 마침 만났으니까 지금 할게. 지금 아니면 용기가 안 생길 것 같아서 그래.”
다들 왜 이렇게 날 귀찮게 하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치미는 짜증을 숨기지 않고 레드릭에게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단호하게 말했다.
…말하려고 했다.
“네 아버지, 그러니까 휴겐트 로벤스디 전 공작 저하의 유품에 관한 얘기야.”
…라는 개소리만 없었더라면.
“뭐?”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는데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어. 아주 잘됐다고도 볼 수 있지.”
“무슨 결과……?”
“네 아버지 유품을 로벤스디 공작 저하께 되돌려 줬거든.”
…이 어이없는 소리를 듣고도 웃음 한번 튀어나오지 않았다. 멍청하게 눈과 입을 확장시킨 채 서있을 뿐이었다. 돌려주다니. 애초에 내가 훔쳐서 달아난 유품 같은 건 있지도 않은데.
“그 유품이라는 게…….”
“…네 아버지의 치아 말이야.”
“이런 미친놈!”
욕지거리와 함께 레드릭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레드릭은 당황하면서도 내 손을 쳐내진 않았다. 자신이 한 짓이 떳떳하지 못함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나 네놈이 생각하는 거의 백배 천배는 더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건 알지 못하고 있다.
“저하는 흔쾌히 유품을 받아주셨어. 너에 대해서도 나쁘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셔.”
“시팔, 세레즈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말고는 문제가 될 게 아니란 말이야.”
네놈 목숨이 위험하다고!
로즈로 인해 이미 거하게 한 방 얻어맞은 머리가 이제는 젤리처럼 흐물거릴 지경이다.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어머니의 마지막 유품도 내 손을 떠나가게 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몰려드는 상실감에 멱살을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들 나한테 왜 이래!”
내던지듯 레드릭을 풀어주었다. 잠시 휘청하던 레드릭이 옷깃을 정돈하곤 나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선다.
“멋대로 가져간 건 미안해. 개교기념 파티 때 방이 비었길래……. 아니, 이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 저하께서 너의 진심을 알았다고 하면서 엄청 기분 좋게 웃으셨어. 분명 너한테도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기분 좋게 웃었다고? 그래, 웃음이 나오셨겠지.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들이 자기 손 아래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참 우습기도 했겠다.
“두 번 다시 세레즈를 만나지 마.”
오늘 이 말을 몇 번이나 하는 줄 모르겠다. 레드릭은 내 속도 모르고 양손을 펼쳐가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사춘기는 예전에 지났어. 치기 어린 반항은 접어두고 저하께 찾아가 보는 건 어때?”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좀……!”
“맙소사, 이벨린. 순간의 자존심 때문에 더 큰 걸 놓치지는 마. 공작 저하는 너의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야.”
“가족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다들 내 일에 참견 못 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어? 본인이 됐다는데 왜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쓸데없는 짓이라니. 너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런 거야. 너무 안타까워서.”
자조적인 웃음이 흘렀다.
“시팔, 내가 얼마나 지지리 궁상맞았으면 이곳저곳에서 다 오지랖질이야.”
읊조리듯 중얼거린 말을 들은 레드릭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갔다.
“말이 과해. 네 방에 함부로 들어간 것 때문에 이렇게 화내는 거라면 다시 사과할게. 미안해. 그런데 이거 하나만은 알아줘. 나도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런 결단을 내린 건 아니야. 진심으로 너를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쫑알쫑알. 웅얼웅얼. 듣지 않아도 되는 말들이었다.
밤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어깨에 걸쳐져 있던 레드릭의 재킷이 바람을 타고 휘익 날아가 버렸다. 레드릭의 항변과 바람 소리가 어우러져 귀를 때렸다.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도 들려왔다. 소음의 극치였다. 당장 귀를 틀어막고 입 좀 닥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지금은 당황스러워서 그렇겠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내가 왜 그랬는지 너도 이해할… 거야. 가문의 지원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편리한 건지 깨닫는 건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하지 않아.”
그만, 그만 말해. 제발.
“내일이라도 당장 저하께 찾아가서 용서를 빌어. 맹세컨대 문전박대당하는 일은 없을 거야.”
레드릭의 말소리,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 말발굽 소리.
안 그래도 혼란한 머리를 날카롭게 헤집어대는 소음에 인내가 끊겨버렸다.
“…내가 찾아갔을 때 저하의 반응이 어땠는지 상세히 얘기해 줄게. 이 말을 들으면 너도 좀 안심될 거야. 우선 들어가자. 바람이 많이 차다. 감기라도 걸리면 내일 저하께…….”
레드릭의 말이 일순 뚝 끊겼다.
닥치라고 소리치려 했었던 건 맞다. 그러나 내 입안에서 터져 나오진 않았다. 내가 말해 놓고도 착각한 건가 싶었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 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다.
솨아아―
얼굴 위가 뜨거워졌다. 바람의 냉기에 코와 뺨이 얼어붙을 것 같았는데 얼굴 위에 질척한 온기가 퍼부어졌다.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물속에 풍덩 빠진 것같이.
지나칠 정도로 입을 놀려대던 레드릭의 머리가 사라졌다. 분수처럼 피를 뿜어대는 머리 잃은 몸이 춤을 추듯 비틀거리다가 내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쓰러져 가는 몸을 따라 내 시선도 같이 밑으로 떨어졌다. 레드릭의 머리가 내 발 옆을 뒹굴었고 감전이라도 된 듯이 발작하는 몸은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어… 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꺼억. 숨이 뒤로 넘어갈 것 같다. 아무리 입을 크게 벌려도 폐부까지 산소가 들어오지 않았다. 내 손에도 레드릭의 피가 진하게 번져있었다.
레드릭의 목소리, 바람 소리, 말발굽 소리.
그러나 이제 들리는 거라곤 바람 소리뿐이다.
홀린 듯이 고개를 들었다. 웬 남자가 도살장에서나 쓰일 법한 흉흉한 칼을 들고 말 위에 서있었다. 칼끝에서 핏방울이 비처럼 흐르고 있었다.
남자는 복면 하나 쓰지 않고 얼굴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남자가 무얼 하려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안 돼…….”
손을 뻗었으나 남자가 더 빨랐다. 남자는 자신의 목에 칼을 박아 넣어버렸다. 그러곤 날 향해 웃었다.
또다시 솟구쳐 오르는 피를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게 젖어 들어갔다.
“누, 누가 좀 살려…….”
어둠이 짙게 깔린 휑한 거리. 덜덜 떨리는 목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어둠 속에서 마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로벤스디가의 문양이 박힌 마차였다. 로즈와 이야기한 후에 어둠 너머로 사라져버린 줄 알았었는데 실은 그 속에서 몸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마차는 물러나지도 다가오지도 않고 그 자리에 꼿꼿이 서있기만 했다. 그 존재를 나에게 각인시키려는 듯이. 계속 내 곁에 있었다는 걸 알려주려는 듯이.
* * *
쫓기고 있다. 검은 안개가 빠른 속도로 내 뒤를 바짝 따라잡고 있었다. 예리한 바람이 피부를 날카롭게 스치며 지나갔다. 목구멍이 터질 듯이 화끈거리고 이마 아래로 흐르는 땀은 눈을 적시었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거지?
두려웠으나 의문이 먼저였다. 미련하게 발을 멈춰 섰다. 등을 돌려 검은 안개를 마주했다. 검은 안개가 점점 몸집을 부풀려갔다. 안개 속에서 목 잘린 레드릭이 양팔을 휘저으며 나에게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다 너 때문이야, 이벨린!!”
“악!”
발작하듯 몸을 일으켰다. 끔찍했던 안개와 그 속에서 날 죽일 듯이 원망하던 레드릭의 모습은 다행히도 보이지 않았다. 시리도록 밝은 빛이 눈을 때렸다.
“이벨린! 괜찮아?”
빛에 적응된 눈이 서서히 뜨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의료실의 풍경이었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팔다리가 내 의지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찔거린다.
바들거리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이벨린, 이벨린! 진정해. 천천히 심호흡 해봐.”
양 손등에 따뜻한 온기가 포개졌다. 천천히 그러나 강하게 손을 붙잡아 내리는 손길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폴.”
“그래, 나야. 숨을 크게 들이쉬어 봐. 옳지, 좋아. 이제 천천히 내쉬어.”
“…어떻게 된 거야. 레드릭은?”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일단은 안정이 먼저…….”
“꿈일 거야. 내가 미쳐서 헛것을 보았다거나.”
“…….”
애가 타는 심정으로 폴의 입을 바라보았으나 끝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것이 부정의 의미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득해져 온다. 나를 두고 둥그렇게 원을 그려 선 사람들이 레드릭의 목을 쳤던 칼을 일제히 내 목에 겨누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서늘한 칼날의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살려줘, 폴.”
아무나 좋았다. 속이 시커먼 사기꾼, 아니 악마라도 좋으니 날 이곳에서 꺼내줬으면 했다.
“여기에 널 해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어디에 있든, 누구랑 있든… 그런 건 다 상관없어. 그 새끼는 기어코 내 발목에 족쇄를 채워 넣을 거라고!”
“범인은 자살했어. 목격자인 너한테 보복하는 일 같은 건 생기지 않아.”
“난 목격자가 아니야. 레드릭이 살해당한 건 다… 나 때문이야. 다음엔 로즈가, 애쉬가… 어쩌면 너까지도.”
“무슨 소리야?”
“세레즈 그 새끼가 다 쳐 죽일 거라고!!”
“…….”
악에 받쳐 소리쳤다.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올렸던 감정의 댐이 터져버렸다. 억눌러 왔던 공포, 두려움, 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것들이 재해처럼 쏟아져 간다.
“그러니까 날 좀 여기서 꺼내달란 말이야.”
“하아. 침착해, 이벨린. 천천히 얘기해 봐.”
폴의 손을 뿌리쳤다.
“안 믿을 거잖아. 말해도 안 믿을 거면서 뭘 얘기해!”
“믿어. 믿을게. 정말이야.”
“…….”
“무슨 말을 해도 괜찮아. 널 두렵게 만드는 게 뭐야? 응?”
폴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가 이야기할 수 있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눈앞이 뿌옇다. 폴의 손이 눈물방울을 훔쳐 가주었다.
온기가, 따스함이 필요했다. 환영이라도 좋으니 불안에 떠는 몸을 안아줄 누군가가 절실했다. 이미 손쓸 수도 없이 나약해진 정신이 무너지는 것은 아주 쉬웠고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비화의 상자가 희뿌연 재와 함께 아가리를 벌렸다.
“…세레즈 로벤스디. 내 처참한 불행은 그 새끼로부터 시작됐어.”
폴에게 전부 이야기했다. 그간 꽁꽁 감춰두었던 비밀들을 모두 털어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부터 로벤스디가 저택에 가게 된 일, 쌍둥이들, 휴겐트 로벤스디가 살해당하고 나는 저택에 감금되어 갖은 집착 어린 고문을 받은 것까지 전부.
이야기가 뒤죽박죽이고 반은 울음소리에 먹혀들어 갔다. 감정이 앞선 두서없는 이야기에도 폴은 비웃음 하나 없이 진지한 얼굴로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러나 완전히 믿는 얼굴은 아니었다. 불안정한 나를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서 경청하고 있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폴의 얼굴에 종종 의문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그는 나에게 되묻지 않았다.
“…레드릭도 세레즈가 죽인 거야. 내 말 안 믿기지? 사실 상관없어. 그냥 날 도와주기만 하면 돼. 여기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 제발.”
“이벨린.”
“그냥 웬 미친년 하나 살린다고 생각하고 날 도와. 여기도 저기도 그 새끼 눈이 달려있어서 살 수가 없단 말이야. 숨통만 조금 트이게 해줘.”
돈을 모아서 섬을 산다고? 완벽한 자유를 꿈꾼다니. 이렇게 철없고 허무맹랑할 수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섬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모으려면 못 해도 십 년은 걸릴 것이다. 그동안 세레즈가 가만히 손 놓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 계획도 어리석고 허점투성이지만 그걸 믿고 5년 동안 악착같이 노력했던 과거의 나도 참 미련하다. 콱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한심해 죽겠다.
자신의 날개가 밀랍인 것도 모르고 태양을 쫓아 멀리 날아오르려 했던 신화 속 인물과 나는 다를 게 없다. 결국 밀랍이 녹아 추락해 버릴 가련하고 허황되고 어리석은 모습이다.
혼란스러워하는 폴을 납득시키는 것은 진즉에 포기했다. 비루한 입소문으로 남겨질 희대의 미친년이 되어도 괜찮다. 나는 까마득한 높이의 낭떠러지 끝에 서있었다. 앞에선 세레즈가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고 있다. 더 이상 물러날 곳 같은 건 없었다.
한숨을 크게 내쉰 폴이 마른세수를 하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내가 널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죽여줘.”
“뭐?”
“살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어. 이벨린 로벤스디는 죽어야 돼.”
“내가 너를 살해하기라도 하라는 소리야?”
폴은 마치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것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폴의 팔뚝을 잡았다. 힘 풀린 손이 자꾸만 미끄러져 내린다. 폴은 당황해하면서도 내 손을 꼬옥 마주 잡아 주었다.
“잘 들어, 폴. 이건 내 마지막 기회야. 그리고 내 이야기를 전부 들은 너는 꼭 나를 도와야 해.”
“죽이는 건 못 해. 남을 시킨다고 하더라도 안 돼.”
헐떡거리는 숨을 진정시키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나도 진짜 죽고 싶진 않아.”
“그럼…….”
“이벨린 로벤스디가 죽은 것처럼 보이게 도와줘.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려 노력했다. 반대로 폴의 몸은 점점 느슨해져 갔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응. 세레즈 로벤스디에 관한 건 믿지 않아도 돼. 미친년 취급해도 괜찮다고 얘기했잖아.”
“후우. 지금 너무 머리가 복잡한데. 일단… 알았어, 이벨린. 자세한 건 우리 내일 이야기하자.”
“시간이 많지 않아.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죽어버리고 싶어.”
“생각을 좀 정리해야 돼. 일단 쉬어. 너 많이 지쳤어. 내일 해 뜨자마자 다시 올게.”
폴이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며 일어섰다.
“폴, 밖에 나가서 절대 나랑 친하다는 듯이 굴지 마.”
“…그것도 로벤스디 공작 저하 때문이야?”
말해 뭐 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폴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진짜 미친놈 같다. 네 말이 왜 이렇게 진짜 같지, 이벨린?”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중이니까.”
폴은 드는 생각이 많은지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긴 침묵 끝에 다른 화제를 꺼내왔다.
“혹시 걱정할까 봐 얘기하는 건데, 로즈는 기숙사 방에 있어. 의료실에도 못 오니까 알아둬. 의원들이 네 안정을 위해서 출입 자체를 통제시켰거든. 널 처음으로 발견한 게 나라서 나만 보호자 입장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거고.”
아, 로즈.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마음 같아선 이곳을 출입 통제를 시킬 게 아니라 로즈의 기숙사 방을 완전히 봉쇄해 버리고 싶다. 더는 허튼짓 못 하도록.
로즈의 얘기를 들으니 자연스레 연상되는 인물이 하나 더 있다. 갖은 오물들로 뒤섞여 있던 정신이 잠시나마 본래의 궤도를 찾은 느낌이다. 내가 또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많이 놀랐을 텐데.
“애쉬는……? 혹시 걔가 내 상황을 알까?”
“아아.”
돌연 폴의 안색이 희게 질려갔다. 회상하듯 무언가 떠올리는 것 같더니 이내 진저리를 친다.
“왜 그래, 애쉬가 무슨 사고라도 쳤어?”
“사고, 사고인가. 애쉬 카인드로퍼가 사고 친 건 아니고. 교수님들이 엄청난 짓을 벌이셨지.”
미간을 찌푸리며 뺨을 긁적이던 폴은 “오늘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있네.” 하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데?”
“그런 장면은 태어나서 처음 봤어. 장담컨대 죽을 때까지도 못 볼 진귀한 광경이었지. 정문 앞에서 너와… 쓰러진 너를 발견하고 그 소문이 교수님들 귀에 들어가자마자 아카데미가 소란스러워졌어. 현장을 수습하기 위해 나간 교수님들도 많이 계셨지만 절반 정도는… 애쉬 카인드로퍼한테 몰려가시더라.”
“애쉬한테? 어째서?”
폴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유까지는 모르는 것이다.
“하필 애쉬가 있는 곳이 널 업고 있는 내 근처였어. 정면에서 본 애쉬 카인드로퍼의 눈은 완전히 맛이 간 사람처럼 보였어. 얼마나 섬뜩하던지.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게 되더라니까.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어. 애쉬 카인드로퍼가 내 쪽으로 한 발자국 다가오는 순간 갑자기 굉음이 터지는 거야. 놀라서 뒤를 보니 교수님들이 거대 몬스터를 포획할 때나 쓸 대포 모양의 아티팩트를 카인드로퍼한테 날려 버리더라.”
“…거짓말.”
“믿기 어려운 건 이해해. 나도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 않았으니까.”
이어지는 폴의 말은 삼류 희곡 속 영웅의 무용담 같았다. 거대 몬스터 토벌용 아티팩트를 정통으로 맞은 애쉬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서있었고 교수들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무자비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폴의 말에 의하면 거의 폭격 수준이었다고 한다.
폭격의 여파로 피어오르는 잔재들이 애쉬의 몸에만 달라붙지 않고 부유했다. 마치 녀석의 몸 주변에 보호막이라도 생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고 폴은 그때의 일을 곰곰이 되짚어가며 얘기했다.
어마어마한 광경과 굉음에 소스라치게 놀란 폴은 몸에 힘이 풀려 업고 있던 내 몸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때 폭격에도 무덤덤하던 애쉬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공격이 들어갔다.
그리고…….
“…애쉬는 어떻게 됐어?”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는데 얼굴에 생채기 하나 나있지 않더라니까. 그냥 기절한 것 같아 보였어. 근처에 있는 마법학 교수님한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여쭤보니까, 카인드로퍼 군은 이 정도론 끄떡도 없으니 소란 떨지 말라고 하더라.”
머리가 멍해져서 해야 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교수들은 왜 애쉬에게 공격형 아티팩트를 쏘아댔던 걸까. 그 상황에서 쇼라도 보일 생각이었나.
떠오르는 가정 중에 설마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지난번, 내가 쓰러졌을 때 아카데미에 온갖 재해를 일으켰다던 로즈의 말을 연관시켜 보자면 이번에도 애쉬가 또 무슨 기괴한 마법을 부릴지 몰라서 기절시켜 버린 것이라는 결론이 난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쓰러졌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아닐 거야. 그건 자의식 과잉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고를 칠 만한 녀석은 아닌데.”
“응?”
“아, 아냐.”
폴이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 잡으며 다른 손으로는 등을 받쳐주었다.
“여하튼 지금은 쉬도록 해. 내일부터는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들이닥칠 거라 정신없을 것 같으니까.”
폴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고 침대 위로 몸을 늘어뜨렸다. 이 정신으로는 잠이 올 것 같진 않았지만 멀거니 앉아있다고 해서 딱히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폴이 방의 빛을 차단시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들어차니 수천 개의 눈알이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웠던 상체를 벌떡 일으켜 소리쳤다.
“불 켜줘!”
주위가 환해졌다. 스멀스멀 기어 나왔던 눈알들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 남아있는 거라곤 당혹으로 가득 찬 폴의 갈색 눈동자뿐이었다.
“놀랐구나. 미안해.”
“좀 예민해져서 그래.”
“그럼 이대로 해놓고 갈게. 무슨 일 있으면 테이블 위의 종을 흔들어. 의원들이 근처에 있으니까 바로 달려올 거야.”
어두워진 것은 10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 사이에 식은땀이 맺혀있었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내일 해 뜨자마자 올게. 눈 뜨면 내가 있을 거야. 지금은 푹 자.”
“그래.”
할 말을 다 마쳤음에도 폴은 한동안이나 의료실에 남아있었다. 내가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중에도 꽤 오랫동안 서있었다.
시간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졌다.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나를 확인하고 나서야 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기점으로 나는 눈을 떴다.
폴의 말과는 다르게 나는 그가 오기 훨씬 전부터 눈을 뜬 채였다. 긴 시간 동안 감아 내리지 못한 눈꺼풀은 무거웠으나 그 무게가 견디기 어려워 눈을 감는다 한들 해소되는 것은 없었다. 온갖 상념들이 떠돌아다녀 심장을 거세게 두드리기만 했을 뿐이다.
* * *
막 동이 터 오르기 시작할 즈음 칼같이 의료실 문이 열렸다.
폴도 내 상황과 별반 다를 것은 없어 보였다. 흰자위가 붉게 물든 것을 보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그의 모습이 훤하다.
다친 곳도 없건만 이곳저곳 몸 상태를 꼼꼼하게 물어보던 폴은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
“내가 정말로 괜찮아 보여?”
폴은 입을 다물었다.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한 내가, 폴과 정상적인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이성을 붙잡고 있으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미안해. 가장 힘든 건 널 텐데.”
“그래, 맞아. 지금 너무 힘들어. 어제 내가 한 말을 하룻밤 사이에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게 본론이잖아.”
“그래서 대답은?”
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다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는 눈치다.
만약 폴의 입에서 거절의 말이 나온다면 그땐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나를 보고도 매정하게 손을 뿌리친 폴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갈지도 모른다. 궁극적으로 그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제발 그런 구차하고 지질한 짓만은 하지 말자, 이벨린.
폭주할지도 모르는 감정을 컨트롤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숨을 짧게 끊어 쉬었다. 신체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기분이라도 들어야 제어가 될 것 같다.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러쥔 손목에 실린 절박함은 숨길 수 없었다.
“이전에 약속했었잖아, 너랑.”
의아함에 눈썹을 찌푸렸다. 폴이랑 약속 같은 걸 한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되짚어봐도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사귈 당시의 감정이나 추억 같은 것도 가물가물한데 약속 같은 것이 기억날 리가.
폴의 말이 끝나지 않았기에 되묻지 않고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개교기념 파티에서 네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겠다고.”
“…….”
“설령, 네가 했던 말들이 전부 거짓이었더라도 상관없어. 생각해 봤는데 미친놈 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더라.”
폴은 얼마간 뜸을 들이다가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기도 하고.” 하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
진심으로.
손에 힘이 풀렸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았다.
이것과는 별개로 폴이 도와준다고 얘기한 것만으로 환희에 찬다거나 깊은 안도감이 생겨나는 건 아니다.
단지 단단한 껍질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았을 때 비웃음을 사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놀랍긴 했다. 그 대상이 여느 귀족들과 다르게 편견이 없는 폴이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생아이자 가문에서 내쫓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닐 수 있었던 거였겠지.
* * *
아카데미는 침체되어 있었다. 생명을 앗아가는 싸늘한 겨울의 그것과도 닮아있었다. 세상을 뒤덮는 흰색의 정경과 어울릴 법한 분위기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오색의 단풍이 만발한 계절이었다. 잔잔하게 깔려있었던 여름의 포근함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빗줄기가 아니었더라면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풍경이었을 것이다.
매달려 있던 단풍잎들이 빗줄기에 쓸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은 구둣발이 수차례 그것을 짓밟고 지나간다.
검은 상복을 입은 행렬이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 비에 옷자락이 축축이 젖어가는데도 발걸음은 분위기에 걸맞게 느리고, 무거웠다.
레드릭의 시신은 호엔슈프 가문의 영지에 묻혔다. 끔찍하게 살해된 레드릭의 일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으며 아카데미는 거센 비난을 피해 가지 못했다.
각국의 귀족, 왕족, 하물며 이 나라의 황자가 다니고 있는 아카데미 근처에서, 그것도 재학 중인 귀족 자제가 살해당한 일은 세간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펜테리온 황립 아카데미를 졸업했다는 배경은 실로 어마어마한 스펙이었으므로 섣부르게 전학 가는 경우는 없었지만 드물게 전학을 결심한 귀족들도 없진 않았다.
아카데미의 경비는 그날을 기점으로 쥐새끼 한 마리도 통과 못 할 만큼 삼엄해졌고, 황실 측에서 임명한 아카데미의 대표가 호엔슈프 가문으로 직접 찾아가서 호엔슈프 자작 부부를 위로했다. 황제 폐하도 이 일을 언급하며 유감을 표한 것이 신문에 실렸다.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레드릭의 살인 사건은 그 화제성에 비해 너무도 쉽게 종결되었다. 레드릭을 살해하고 자살해 버린 범인은 고아 출신의 연고지도 불분명한 사내였다. 깊게 수사해 보려고 해도 나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한 정신병자의 잔인한 소행으로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비는 한동안이나 그치지 않을 것 같다. 기숙사 방 침대에 멀거니 걸터앉아 창문 밖으로 우수수 쏟아지는 빗방울을 구경했다.
레드릭의 장례가 끝나고 폴과 한 번 더 만남을 가졌다. 내 죽음을 위장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폴은 생각보다 나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폴의 가문인 크란츠 가문은 무역으로 많은 재화를 쌓았는데, 선조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서 깊은 가문답게 펜테리온의 무역은 크란츠 가문이 꽉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가문이나 고위 관직에 올라와 있는 관리들이 그러하듯 벌어들인 돈을 효과적으로 불리기 위해선 불법과 비리가 관례처럼 자행되어 왔는데 크란츠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밀거래하는 상단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고 중개 수수료를 받는 등 나아가는 관리 통솔하에 있는 밀거래 상단도 있었다.
폴이 가문의 이면을 서슴없이 털어놓길래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리를 하나 싶었다. 내 비밀을 하나 깠으니 자기도 하나 까겠다는 건가.
아, 맞다. 이전에 약학 조별 과제 때 구하기 어려운 씨앗을 대량으로 구해다 준 것이 떠올랐다. 이제 와서 그걸 유세 떨려는 것은 아닐 테고…….
그러나 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밀거래 상단 중에 타국의 사람들을 밀입국시켜 주는 브로커가 있어. 네 가짜 신분을 만들어 줄게.”
거기까지는 전혀 바라지도 않았고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인데 예상외의 너무도 큰 수확이었다.
폴은 타국에서 펜테리온으로 밀입국하는 사람은 있어도, 펜테리온에서 타국으로 넘어가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오는 것도 되는데 가는 게 안 되겠냐면서 자신감을 내비쳤다.
“다만 시간이 조금 필요해. 많이는 아니고 한 나흘에서 일주일 정도. 그때까지 잘 버틸 수 있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이토록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시간인지 지금에서야 알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으나 폴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을 버텼는데 고작 일주일, 아니 짧으면 나흘을 못 버틸까.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우리의 계획은 이러했다. 타국으로 떠날 신분과 이동 수단이 마련되면 레드릭의 죽음을 비관하는 유서를 남기고 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마침 며칠 내내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강의 물살도 거세졌다. 지독한 먹구름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일주일 정도는 강의 물이 많이 불어있을 것이다. 시신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자살한 다음 날 폴이 의도적으로 유서를 발견하여 아카데미에 알리면 끝이다. 난 그때쯤이면 이미 타국으로 건너는 배를 타고 있을 것이다.
“이거 하나만 알아둬. 두 번 다시 펜테리온으론 돌아오지 못할 거야.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하고. 정말… 괜찮겠어?”
바라던 완벽한 자유는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지만 세레즈의 시선 아래에 속박되어 있는 것과 타국에서 숨죽여 사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1초의 고민도 없이 후자를 택할 거다.
“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어.”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출석만은 반드시 했던 내가 레드릭의 죽음 이후론 단 한 번도 수업에 나가지 않았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기숙사 밖으로 나가면 여러 종류의 시선들이 일제히 꽂혔다. 동정, 측은, 혐오, 호기심.
이 중 혐오 어린 시선은 레드릭이 살해당할 당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벨린 로벤스디가 거기 있지만 않았어도.’, ‘왜 네가 죽지 않고 호엔슈프 가문의 장남인 레드릭이…….’ 하는 말이 들려온다.
사회적으로도 사교적으로도 레드릭의 위치는 입지가 있었고 나는 바닥 중의 바닥이었으니 저들이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이해해 버렸다. 게다가 레드릭의 죽음의 원인은 나 때문인 것이 맞으니 대놓고 돌을 던진다고 하더라도 울분을 토할 뻔뻔함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 * *
“선배.”
움찔. 하마터면 우산을 놓칠 뻔했다. 빗소리 때문에 듣지 못한 척,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선배!”
모든 걸 다 내던지고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문득문득 떠올라서는 내 마음을 헤집어 놓았던 그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속에 내리꽂혔다.
절박하게 불러대는 것을 모른 척하기가 힘들었다. 당장 녀석의 뺨을 쥐고 다친 곳은 없냐고,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 충동을 참아 내렸다.
세레즈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자꾸만 뒤를 돌아보려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내가 기숙사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 녀석, 애쉬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애쉬만 보면 단단히 쌓아 올렸던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꿈도, 마음도 모두 버리고 떠나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어진 관계는 모두 잘라버려야 했다.
“이벨린.”
팔이 붙잡히고 억센 힘에 몸이 돌아갔다. 애처로운 빛을 띤 얼굴과 마주했다. 애쉬는 우산도 없이 굵은 빗줄기를 맞고 서있었다. 발치에 굴러다니는 검은 우산이 애쉬가 내팽개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모르는 척해요.”
녀석의 손에서부터 축축이 젖어오는 팔목이 냉기를 이어받았다. 빗방울이 몹시 찼다. 놀란 마음에 황급히 우산을 애쉬 쪽으로 씌워주었다. 졸지에 나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아, 이게 아닌데.
“못 들었어.”
애쉬가 내 허리를 당겨 우산 안으로 걸어 들어오게 만들었다. 좁은 우산 안에서 몸이 틈 없이 붙어버렸다.
“…….”
녀석의 눈이 짙은 색으로 물들며 가라앉았다. 잡힌 허리에 힘이 가해졌다. 더 이상 맞붙을 곳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당겨지는 허리 탓에 발이 애쉬 쪽으로 한 발 움직였다. 다리가 얽혀 들어갔다.
“이거 놔.”
의도한 것이었지만 내 자신도 놀랄 정도로 목소리가 냉랭하게 나갔다. 애쉬의 얼굴이 굳어간다.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혹시 선배 쓰러졌을 때 바로 찾아가지 못해서 그래요? 그건 사정이 조금 있었어요. 그때…….”
“그런 거 아니야.”
“그럼요? 요즘 수업도 안 나오시고,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요. 일부러 피하는 사람처럼.”
“요즘 많이 심란해서 그래.”
“그 마음, 어떻게 하면 괜찮아져요? 제가 뭐 도와드릴 건 없어요?”
“그냥 날 좀 혼자 있게 해주면 돼.”
애쉬의 이마가 어깨 위로 떨어졌다. 밀어내기 위해 손을 올렸으나 애쉬가 다시 한번 허리를 강하게 당긴다. 녀석은 말이 없었다. 빗소리가 유독 우렁찼다.
“…그것만 말고. 그것만 빼고요.”
녀석이 말할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어깨 위로 잔잔하게 퍼져갔다.
“왜?”
“내가 선배를 못 보고 어떻게 살아.”
팔팔 끓는 주전자가 엎어진 것 같다. 명치서부터 따끔한 것이 퍼져나간다. 빗물이 뚝뚝 흐르는 손을 말아 쥐었다. 등을 토닥여 줄 것만 같았기에.
“실없는 소리 들어줄 기분 아니야.”
애쉬가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얀 얼굴에 눈 주위만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 경황이 없어서 그런 거죠?”
“…….”
“제가 질렸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팔 풀어.”
“더 노력할게요. 잘할게요. 선배가 기라면 기고, 제 돈도 다 가져다 쓰셔도 돼요. 옆에 있게만 해주세요.”
녀석의 목소리에 점점 울음기가 섞여 들어갔다. 내 마음이 갈기갈기 조각나고 있었다. 이렇게 슬프게 우는 녀석을 두고 모진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극적이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도, 애쉬를 위해서도 우리는 여기서 그만 끝내야 한다.
“놔.”
“싫어요. 죄송해요. 이거 놓으면 선배 이대로 가버릴 거잖아. 나 그럼 또 어떻게 버티라고. 얼마 만에 본 얼굴인데!”
“너 질린 거 맞아.”
“…….”
“황자씩이나 되는 애가 날 좋아한다길래 우월감에 조금 데리고 다녔는데, 이제 재미없다. 그만하자.”
투둑, 투둑.
우산을 때리는 빗줄기 소리가 묵직했다. 나를 향해 욕을 퍼붓고 있는 것같이.
<그놈을 책임져야 하는 이유>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