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그놈과 춤추지 못한 이유 (2) (15/42)

7. 그놈과 춤추지 못한 이유 (2)

“손이 그래서 춤 신청도 못 하겠어.”

“멀쩡했어도 나랑은 춤추기 힘들걸. 아는 곡이 없거든.”

“진짜 단 한 번도 사교댄스 수업을 들은 적이 없어?”

“일학년 때 멋모르고 신청했다가 학점 망한 이후론 없어.”

“괜찮다면 나중에라도 알려줄게. 리듬만 익히면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그래. 내가 괜찮다면 말이지.”

짝지은 커플들이 음악에 맞춰서 일제히 발을 굴렀다. 동그랗게 부푼 오색 드레스들이 홀을 다채롭게 메웠다.

즐기기 위한 요소들이 부족함 없이 갖춰져 있음에도 자욱한 먼지가 들어찬 잿빛 도시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건조한 눈으로 홀을 둘러보았다.

2층에서 교수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발견했다.

저기 가서 얼굴 도장이라도 찍고 와야지.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던 샴페인을 내려놓았다.

한 잔에 몇백 루덴은 하는 것일 텐데.

아까운 마음이 들어 그냥 눈 딱 감고 입안으로 털어 넣어 버릴까 싶다가도 정신 못 차리고 해롱해롱거릴 모습이 그려져서 포기했다.

한 발자국 발을 떼려는 찰나 교수들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마법학 교수였다. 묵례하는 나에게 손을 보이곤 씨익 미소 짓는다. 다 아니까 굳이 이쪽으로 안 와도 된다는 뜻이었다.

저는 마법학 교수님만 뵈려는 게 아닌데요. 그 옆에 군사학, 제국학, 약초학 교수님들도 있잖아요.

무시하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 데 그곳에 애쉬가 나타났다. 로제타와 함께.

교수들은 두 사람을 열렬히 환영하며 샴페인을 건넸다. 교수들의 입은 쉬지 않고 무수한 질문들을 쏟아내었다. 차분히 대답하는 두 사람에게 애정이 듬뿍 담긴 과한 리액션이 뒤따른다.

2층으로 향하던 발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저들과 나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단단한 유리 벽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사실 교수들의 테이블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랬다.

…뭐, 먹는 게 남는 거지.

빈 접시를 들고 비싸 보이는 음식만을 골라 담았다. 맛이 없어도 꾸역꾸역 입에 욱여넣었다. 레드릭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니야?” 참견해 오는 게 귀찮았다.

아, 좀 가세요.

양 볼이 터질 정도로 고기를 쑤셔 넣은 내가 음식물을 채 삼키지도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나 이거 먹고 의료실 갈 거야. 파티 끝날 때쯤 다시 만나자.”

“왜. 같이 가자.”

“눈이 있으면 주위를 좀 둘러봐. 너랑 말 한마디 섞고 싶어서 안달인 애들이 불쌍하다, 야.”

내가 맹렬히 음식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레드릭은 옆에서 샴페인만 깔짝거렸다. 집중해서 먹고 있는데 누가 쳐다보면 소화 안 된다고. 좀 가라.

아직도 하릴없이 내 옆에 앉아있는 녀석을 향해 한마디 더 던져주었다.

“파트너라고 해서 계속 붙어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너도 훗날의 인맥 관리를 위해서 노력이라는 걸 좀 해봐.”

내가 할 소리는 절―대 아니었지만 그만큼 레드릭이 귀찮았다.

그때 구원처럼 레드릭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따분하게 여기서 뭐 해. 다들 너 어디 있냐고 난리야.”

잘 왔어! 데니안. 얘 좀 데려가라.

“이벨린, 레드릭 좀 빌려 가도 돼?”

“마음껏. 충분히 쓰고 파티 끝나기 전에만 돌려주렴.”

레드릭이 내 이름을 불렀다. 왜, 뭐.

“고마워. 깨끗하게 쓸게. 가자!”

데니안이 억지로 레드릭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혹시나 내가 필요하면 바로 얘기해. 이 근처에 있을 테니까.”

응.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

나는 녀석이 조금이나마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레드릭이 한숨을 쉬고는 터덜터덜 데니안을 따라간다.

드디어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될 수 있었다. 레드릭이 있을 때도 가릴 것 없이 음식을 먹어댔지만 지금은 조금 더 많이 욱여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의지가 불타올랐다. 부른 배를 무시하고 왼손의 포크를 힘주어 잡았다.

다 먹을 거야. 자다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원 없이 먹을 거야!

* * *

우욱. 오바이트가 쏠렸다. 누군가 배를 찌르면 음식물을 전부 게워내 버릴 수준이다.

부른 배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벽을 짚어가며 겨우겨우 중앙 홀을 빠져나왔다.

사람의 위가 이 정도로 늘어날 수 있구나. 새삼 감탄하며 볼록 튀어나온 윗배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중앙 홀에서부터 의료실까지는 거리가 꽤 됐으므로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걸어갔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붕대를 푼다. 의료실에 들러서 힐링 받는 것도 번거로웠는데 그것도 이제 끝이다!

중앙 홀에서 멀어질수록 주위가 한산해졌다. 북적거리는 공간에서 벗어나니 숨통이 트인다. 먹은 것이 많아서인지 소화가 다 되기도 전에 의료실 앞에 도착했다.

“문이 열려있네?”

늘 잠금장치로 잠겨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처럼 내부가 훤히 보일 정도로 개방된 상태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문 닫는 걸 깜빡했나.”

살짝 의아했으나 크게 고민할 거리는 아니어서 냉큼 안으로 들어섰다.

이때 불순한 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호흡이 많이 섞여있고 앓는 듯한 그…….

“아앙!”

깜짝!

의료실 바닥에 웬 남녀가 질펀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옷을 전부 탈의한 남자는 등을 바닥에 대고 여자의 골반을 양손으로 쥐었고 그 위에서 여자는 열심히 허리를 움직여댔다.

히익!

나는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고는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아니! 대낮에, 그것도 의료실에서!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무슨 짓이야! 문은 또 왜 열어놔?!

따지고 싶은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꾹꾹 눌렀다. 내가 왜 피해 줘야 하는지 모르겠네, 정말. 붕대 풀어야 하는데!

“아, 아응! 앙! 좀, 더, 으응.”

“후욱. 조, 좋아! 아으. 최고야!”

입이 아니라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폭을 크게 하여 살금살금 뒤로 걷고 있는데 등 뒤로 단단한 것이 툭! 하고 부딪혔다.

“읍!”

입을 막고 있어서 다행이다. 저 남녀는 본인들의 행위에 빠져 내 미약한 소리를 듣지 못했다.

벽인가 싶어서 고개를 돌렸는데 웬걸, 뜻밖의 인물이 내 뒤를 지키고 있었다.

“…폴 크로우?”

남이 떡 치고 있는 생생한 현장에서 전 남친을 만났다.

폴이 입을 떼려는 순간 나는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고 눈으로 이야기했다. 일단 나가. 여긴 더 이상 상처를 치료해 주는 의료실이 아니야. 저들의 성욕은 어떻게든 치료되긴 하겠지만.

“아힉! 흐응, 아, 좀 더 세게, 으응!”

뒤늦게 사태 파악을 한 폴도 얼굴을 구겼다. 나를 따라서 순순히 문밖으로 빠져나간다. 민망한 신음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의료실 앞에서 멀뚱히 서있었다.

폴이 뺨을 긁적인다.

“오랜만이네, 이벨린.”

“어. 상황이 조금 엿 같긴 하지만.”

“붕대 풀러 온 거야?”

“그럴 목적으로 온 거긴 해.”

저 남녀가 없었더라면 난 얌전히 오른손을 내주고 있었을 것이다.

“너 다쳤을 때 몇 번 찾아갔었는데.”

“로즈한테 들었어. 꽃다발도 사다 놨더라. 고마워. 의외였어.”

폴의 귀가 붉게 물들어갔다. 코 밑을 한 번 만지고 시선을 여기저기로 옮기던 폴이 크흠, 작게 헛기침을 했다.

“사실 네가 여기로 들어가는 거 보고 따라온 거야.”

“할 말 있어?”

“꼭 그건 아니고. 손은 좀 괜찮아졌나 해서.”

“아, 이젠 멀쩡해.”

우리가 이렇게 어색한 사이였던가. 교제하고 있을 당시 폴은 꽤 수다스러운 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할 말이 뭐가 그렇게 많은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부터 하나 빠짐없이 나에게 줄줄이 다 이야기했었다. 가끔은 그의 이야기가 흥미롭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귀찮았다.

그런데 지금은 묘한 어색함이 감도는 침묵이 대화를 끊어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이 들어설 때마다,

“하아앙! 나 가, 갈 것 같아!”

“후욱, 욱! 내 자지 맛있어? 어때! 흣!”

“쫄깃. 읏. 짝짝, 달라 붙, 어, 응, 아!”

적절하지 못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소리를 듣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어떤 개소리라도 좋으니 뭐라도 주절댔으면 좋겠다.

“저 사람들… 일찍 끝날 것 같진 않아 보이네.”

그 말엔 나도 동감했다.

오른손에 감겨있는 붕대를 허망하게 내려다보았다.

오늘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또다시 하루를 기다리긴 힘들었다. 붕대 안이 근질거리고 손도 비누로 빡빡 씻고 싶었다. 머리를 한 손으로 감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매일같이 왼쪽 어깨에 쥐가 나서 아침부터 별 생쇼를 해야 했다.

나는 왼손으로 붕대 끝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혼자 하게?”

“별수 있나. 어차피 오늘 풀려던 거니까 내가 해도 괜찮겠지.”

“한 손으론 힘들 거야. 소독도 해야 하고. 잠깐만 기다려.”

그러더니 폴이 용감하게 의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잠깐 열린 틈 사이로 신음이 우렁차게 들려왔다.

폴은 저들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고 손에 무언가를 쥔 채 다시 의료실 밖으로 나왔다.

소독약이랑 깨끗한 거즈, 가위다.

“손 줘봐.”

우리는 의료실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내밀어진 폴의 손 위로 붕대가 감긴 오른손을 얹었다.

“냄새 많이 날 텐데.”

“아파서 그런 건 괜찮아.”

과연… 괜찮을까?

폴은 망설임 없이 가위로 붕대를 잘랐다.

툭.

꾀죄죄한 붕대가 바닥으로 떨어져 갔다. 시원한 공기가 오른손에 닿는 것이 낯설었다. 폴이 능숙하게 소독약을 들었다.

“우욱.”

폴은 멀쩡했다. 이것은 내 입에서 나온 소리다. 역한 냄새가 공기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 손이건만 당장에 댕강 잘라버리고 싶다.

“우우욱.”

“괜찮아?”

난 네가 괜찮은 게 신기해!

구리구리한 향이 코 안으로 깊숙이 스며든다. 거부감에 헛구역질이 튀어나왔다.

와아, 진짜 죽겠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나는 방금 전, 허용 가능한 기준치를 초과할 정도로 음식을 흡입했다는 것이다. 그래, 그건 흡입 수준이었다. 헛구역질이 지속적으로 나오다가 미약한 음식물들이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안 돼!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손은 몸뚱어리에 착실히 붙어있었고 빨리 저 소독약이라도 들이부어 주면 좋을 것을 폴은 걱정하느라 그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즉 저 구린내가 자꾸만 내 비위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우우욱!”

“이벨린?”

억지로 꾹꾹 삼켜 보았지만 내 몸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부피감 있는 무언가가 가득 들어차고 숨조차 틀어막았다. 겨우겨우 입 밖으로 쏟아내는 것만은 막아 내고 있는데,

“우욱!”

스퍼트를 박찬 구린내가 다시 한번 헛구역질을 유발시켰다.

“웨에에엑…….”

은하수를 보았다. 내 발밑에 찬란하게 깔리는 드넓은 은하수를.

오늘 먹었던 것을 전부 게워내고 말았다. 전 남친 앞에서. 한번 터져 나온 토사물은 끈질기도록 쏟아져 내렸다. 이 상황에서도 눈치 없는 신음은 계속 잔잔히 들려온다. 내 토사물이 폴의 신발 밑창을 적시고 멀리멀리 퍼져 나가고 있었다.

“웨엑, 우욱.”

오른손은 욕 나올 정도로 구릿한 냄새가 나고 입과 바닥엔 보기 흉한 토사물이 한가득이다.

다 뱉어내고 더 이상 나올 게 없자 쪽팔림과 수치스러움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포, 폴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지? 나를 향해 욕설과 함께 바락바락 소리 지른다고 해도 뭐라 할 말이 없다.

“괘, 괜찮아. 이벨린.”

“차라리 욕을 해.”

“사,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폴은 말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했다. 폴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의 귀티 나는 구두를 바라보았다. 토사물 한가운데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가만히 쪼그려 앉으며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져들었다. 폴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서있기만 했다.

“아! 으응… 나, 가, 갈 것, 아! 아아앙!”

“흐아앗!”

저 빌어먹을 커플이 드디어 쾌락에 정점에 섰다.

* * *

이마에 맺힌 땀을 바람이 쓸어가 주었다. 내가 흩뿌려놓은 아까운 것들(토사물)을 치우기 위하여 열심히 물걸레질한 덕에 팔뚝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폴은 팔자에도 없는 전 여친 토사물 치우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간혹 가다 폴의 볼이 불룩하게 튀어나오고 우욱―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본 척했다.

고집스럽게 소독해야 한다는 폴 덕에 깨끗하게 소독된 오른쪽 손이 원망스럽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런 썩은 내 나는 신체의 일부를 치료해야 할 의료계 종사자분들에게 진심 어린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나와 폴은 뒷정리를 마친 후, 밖에 나와 나란히 걷고 있으면서도 딱히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신발 밑에서부터 풀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파트너는?”

폴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흠흠, 헛기침하는 소리가 뒤늦게 따라왔다.

“지금쯤 친구들이랑 놀고 있을걸. 파티 끝날 때쯤에 다시 만나기로 했어.”

“그렇구나.”

단비 같던 짧은 대화가 허무하게 끝났다. 폴은 조금이라도 말을 붙여보려고 부단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넌?”

“나, 나?”

새삼스러운 질문도 아니건만 폴이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리제 알테어라고… 알지? 저번에 너랑 2점 차이로 차석 했던 애. 무슨 사이는 아니고, 이번에 사교댄스 수업에서 파트너로 만났었거든. 난 급한 볼일이 생겼다고 잠깐 자리를 비운 거라…….”

레드릭의 말처럼 이번 개교 기념 파티의 파트너는 모두 사교댄스 수업에서 다 정해졌었나 보다. 폴이 말한 리제 알테어가 누구인지는 대강 머릿속에 그려졌으나 나랑 2점 차이로 차석이 되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었다.

“너무 자리를 오래 비운 거 아니야? 어서 가봐야겠네.”

“으, 응.”

폴이 주사 맞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파티에 폴을 데리고 다닐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중앙 홀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폴을 재촉했다.

“내가 가는 쪽은 반대편이야.”

“응. 오랜만에 이야기했는데 조금 아쉽다.”

“오늘은 정말 미안하고 음… 고마웠어.”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너 같으면 신경을 안 쓸 수 있겠니. 폴이 당장에 중앙 홀로 달려가서 ‘이벨린 로벤스디가 지 손 냄새 맡고 토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고 놀고 있는 거야?!’ 하면서 깔깔 비웃는다고 하여도 할 말이 없었다.

“입이 근질거리면 소문내도 돼.”

“날 얼마나 하찮은 놈으로 보고 있는 거야.”

“아니, 보통… 이런 사건은 떠들고 싶어 하니까.”

폴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여기저기에 널 좋아한다고 떠들어대긴 했었지.”

“아아. 그래, 뭐. 그때처럼 소문내도 괜찮아. 1년만 버티면 졸업이니까 상관없어.”

“그런 뜻으로 얘기한 건 아냐. 그냥…….”

“그냥?”

우물거리던 폴이 입술을 한 번 꾸욱 다물었다가 떼었다.

“우리의 추억을 얘기하고 싶었어.”

“추억이랄 게 있나.”

어색하게 웃고 있던 폴의 얼굴에 미묘한 균열이 생겼다. 말실수한 건가.

“넌 언제나 바빴으니까 내가 귀찮기도 했었을 거야. 그런데 가끔은 네 입장을 조금 더 이해해 줬더라면 우린 그때보다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들어.”

“지난 일인데 뭘 후회까지.”

“지난 일이니까. 지난 일이라서 그래.”

아. 그래, 하며 멋쩍게 목덜미를 긁어내렸다. 얜 갑자기 왜 진지해지고 난리야.

폴이 전보다 더 깊게 웃어 보이며 목소리를 한 톤 높였다.

“오늘처럼 도움이 필요하면 또 얘기해. 네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 수 있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내가 언제 혼자 끙끙 앓았어?”

“나 그래도 너랑 1년 동안 교제했던 사람이야. 밥값 없어서 며칠 내내 굶기도 하고, 교재 못 사서 남이 버린 거 주워다 쓰고, 교복 해졌을 땐 맞지도 않는 천 대어다가 꿰매 입고 그랬잖아. 다 로즈가 말해 줘서 알았던 거지. 나한테는 한 번도 도와달라고 얘기한 적도 없었으면서. 나름 남자 친구인데 그 정도도 못 도와주게 하니까 자괴감 비슷한 것까지 들었다고.”

“예전부터 혼자서 하는 게 익숙해서……. 자괴감까지 들었을 줄은 전혀 몰랐네.”

“아무튼 이젠 그러지 마. 내가 남자 친구도 아니지만 그때 못 해줬던 거 다 도와줄 테니까.”

폴의 갑작스러운 호의에 웃으며 되물었다.

“네가 왜?”

“그러게, 내가 왜. 그냥 그러고 싶어.”

그냥 지나가듯 툭 던지며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을 어설프게 도와주면서 우월감과 본인의 아량 넓은 선행에 취하려는 귀족 고유의 같잖은 동정심 같은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런 것이라면 돈이라도 왕창 달라고 얘기했을 텐데.

“내가 어지간히 불쌍했나 봐?”

장난스럽게 받아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게 아니…….”

“네 마음 잘 알았어. 무슨 일이 생기면 꼭! 폴, 너한테 부탁할게. 늦겠다. 어서 가봐. 여기서 밤을 새울 순 없잖아.”

부정하려던 폴은 이내 몸에 힘을 빼고 고개를 끄덕였다.

“꼭이야.”

“거 참. 알았어. 꼭.”

약속하듯이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려주자 그제야 폴이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럼 다음에 또 봐!”

중앙 홀로 뛰어가는 폴의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 같다. 늦기는 정말 늦었는지 바람처럼 쌩하니 날아가 버린다.

* * *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어디에 가있으면 좋을까. 드넓은 아카데미의 내부가 지도를 보고 있는 것처럼 둥둥 떠오른다.

일단 내 기숙사 방은, 아니 내가 머물고 있는 제2여자 기숙사 건물 자체가 제외되었다. 특이하게도 학생들은 자기 방에서 파트너랑 엎치락뒤치락하면 될 것이지 꼭 남의 방에서 섹스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것도 아카데미 내에서 가장 기숙사비가 저렴한 제2기숙사 건물들을.

값이 싸니까 막 다뤄도 된다는 거야, 뭐야.

억울해서 몇 번 하소연했으나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의 개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방값이 가장 비싼 방에는 오히려 얼씬도 하지 못하겠네? 하는.

예전 같았으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비싼 방이라고 해봤자 로즈의 방 정도가 생각났을 테지만 그건 내가 머물고 있는 방에 비하면 조금 더 낫다는 것이지 최상위급은 아니었다. 최상위급이라 하면 아카데미 정문에서 가장 가깝고, 중앙 홀에서는 가장 먼 제5기숙사 건물 중 꼭대기 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거기엔 애쉬의 방이 있다. 방학 동안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바로 그 방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목적지가 구체적으로 정해진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왜 진즉 이 생각을 못 했지? 유리 천장에 갇힌 것처럼 ‘제5기숙사 건물은 함부로 들어가면 안 돼. 왜냐고? 무진장 비싸니까!’ 하는 관념이 박혀있었다. 더불어 괜히 거기에 발을 들여놨다가 생트집 잡고 늘어지는 높으신 귀족 자제가 있으면 어쩌나 하는 짜증 나는 불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애쉬의 방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아니나 다를까, 제5기숙사 건물은 한산했다. 학생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중앙 홀 근처에 비하면 한적하기 그지없다.

안락한 쉼터를 생각하다 보니 금세 애쉬의 방 앞까지 도착했다. 파티 기간 동안의 교칙상 방문은 잠가 놓을 수 없었기에 손잡이가 부드럽게 돌아간다.

달칵.

환기를 위해서인지 창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그리고 방 안은 아주 훌륭할 정도로 고요했다. 창문을 닫으니 외부 소음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주 완벽해!

내 방인 양 익숙하게 재킷과 목도리를 걸어두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이렇게 좋은 곳을 발견할 줄 알았으면 교재라도 한 권 들고 올 걸 그랬다.

뒤늦은 아쉬움을 밀어내고 눈을 감았다. 폭신한 침대에 파묻힌 채로 잠에 빠져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 * *

꼬르륵―

웬만한 알람 시계 소리보다도 우렁찬 배곯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얼마나 잔 거지.

눈을 떴음에도 사위가 캄캄하여 보이는 것이 없었다. 찌뿌둥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곤 침대 위를 엉금엉금 기어서 빠져나갔다.

아주 희미하게 보이는 내부와 감각을 따라 걸으며 창가를 찾았다. 커튼을 걷자 달빛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저 멀리 보이는 중앙 홀이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는 것을 보아 아직 파티는 한창인 것 같았다.

“아, 배고파.”

“먹을래요?”

“앗, 깜짝이야!”

등 뒤에서 들리는 여자 목소리에 점프하듯 몸을 떨었다. 휙, 뒤를 돌아보니 나보다 작은 체구의 실루엣이 보인다. 실루엣의 정체를 안 것은 바로 그다음이었다.

“로제타 공주?”

“자, 줄게요.”

로제타는 자기 얼굴만 한 호두 파이를 나에게 건네고 있었다. 새것은 아니었고 몇 입 먹은 모양새다.

나는 로제타 공주를 지나쳐 방 안에 불을 밝혔다. 로제타 공주가 나를 졸졸 따라 걸으며 계속해서 호두 파이를 들이밀고 있었다.

“…먹던 거 아니에요?”

“불쾌한가요?”

얼마나 맛있게 먹었으면 입가에 다 묻히고 먹냐.

티슈를 뽑아서 로제타 공주의 입을 벅벅 문질러 주곤 입가에 묻어 나온 부스러기를 보여주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하던 로제타 공주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내 손에 든 티슈를 빼앗아 등 뒤로 감춰버렸다.

“어두워서 그래요.”

“불도 안 켜고 뭐 했대요?”

“당신이 자고 있었잖아요.”

“날 위했다는 건지, 탓을 하는 건지……. 그리고 전 당신이 아니라 이벨린이에요.”

“저도 여기선 공주가 아니에요, 이벨린.”

“아… 그렇네요, 켈스타니아 양.”

“그냥 로제타라고 해요.”

로제타는 예의 감정이 없어 보이는 낯으로 이야기했다. 잘 빚어놓은 도자기 인형 같은 모습이다.

펑! 퍼엉!

밖에서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돈이 남아도는지 그 비싸다는 폭죽을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아낌없이 터뜨리니 신기할 것도 아니었다.

한창 무르익을 때네.

로제타가 갑자기 호두 파이를 테이블 위에 던져놓고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창가에 양손을 짚고는 고개를 뒤로 꺾어가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색으로 펼쳐지는 화려한 폭죽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한 나라의 공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폭죽 하나에 참 유난이다 싶었다.

“폭죽 좋아해요?”

“아뇨. 시끄러워서 별로.”

언행 불일치잖아. 이건 또 무슨 황당한 대답이야.

침대에 걸터앉으며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목 빠지겠어요.”

방금 시작된 폭죽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즉 로제타도 창문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여간 특이한 애야.

시선을 거두려는 찰나에 ‘탁!’ 하는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고개가 돌아갔다. 바닥에 구두를 벗어 던진 로제타가 창문턱을 밟으며 올라서고 있었다.

“뭐 하는……!”

머뭇거릴 새도 없이 로제타의 몸이 밖으로 기울어져 갔다. 있는 힘껏 발을 굴려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나풀거리며 환영처럼 사라져간다. 그 안에 숨어있던 새하얀 발이 눈앞에서 멀어지려는 찰나,

“잡았, 다!”

여태껏 푹 쉬었던 오른손이 로제타의 드레스 밑단을 아슬아슬하게 잡아챘다.

“오늘이 아닌가.”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로제타는 감정의 고저 없이 평온한 말투였다. 환장하는 건 나 혼자였다.

팔의 힘줄이 다 끊어질 것 같은 아찔함을 느끼며 왼손을 뻗어 그녀의 발목을 잡아챘다. 이를 악물고 위로 끌어 올리려는데 잡은 위치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나까지 함께 떨어질 것만 같았다.

“윽! 미친 거예요?!”

“분명히 반짝반짝한 밤하늘이었는데.”

로제타는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렸다.

그 순간 내 몸이 앞으로 쏠려갔다. 서늘한 밤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어 왔다.

“내 쪽으로 손 뻗을 수 있겠어요?!”

로제타도 정신을 차렸는지 내 말을 따라 손을 뻗어왔다. 그러나 잡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긴박함을 억지로 삼키며 최대한 차분하려고 노력했다. 바로 옆에 길게 늘어진 창문 커튼이 보였다. 그것을 이로 물어오자 ‘드르륵’ 소리와 함께 딸려왔다.

내 앞까지 도달한 커튼을 머리로 밀어 밖으로 빼내었다. 로제타가 쉽게 잡아챌 수 있을 만한 기장은 아니었으나 내 손을 잡는 것보다는 가능성이 있었다.

“커튼 잡아요, 빨리!”

로제타가 힘껏 뻗은 팔이 부들거렸다. 하얀 손가락이 커튼 끝자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땀이 찬 내 손바닥 아래서 발목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

“안 돼…….”

죽을힘을 다해 한 번 추켜올리자 일순 로제타의 몸이 끌어당겨졌고 곧이어 커튼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로제타가 잡은 것이다.

두두둑―

커튼이 뜯겨 나가고 있었다.

“절대 놓치지 마요! 꽉 잡아!”

로제타의 발목을 놓자마자 커튼이 맹렬히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황급히 그것을 잡아 오른쪽 손목에 감아버렸다.

“힘들겠지만 내 손을 잡을 수 있을 때까지 올라와야 해요!”

늘 무표정하기만 했던 로제타도 얼굴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하얀 손이 아주 조금씩 커튼을 타고 위로 올라왔다.

“좋아요!”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로제타의 손목을 잡아챘다. 로제타도 내 손목을 감싸왔다.

로제타가 아직 커튼을 붙잡고 있는 다른 손을 아래로 당겨서 위로 올라오려는 순간 나도 몸을 끌어 올렸다. 로제타의 손이 드디어 창턱에 닿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뒷덜미를 잡고는 안으로 끄집어 당겼다.

풀썩.

“하아, 하…….”

“정신 나갔어요?! 후우. 뛰어내리긴, 왜 뛰어내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후들거리는 팔로 셔츠의 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로제타는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폭죽이 한창이었다.

“꿈에서… 반짝거리는 밤하늘을 봤어요. 내가 하늘을 보면서 떨어졌는데 오늘이 아니었나 봐요. 이런 느낌이 아니었어.”

꿈? 일전에 애쉬가 한 말이 불현듯 생각났다.

‘공주는 신들의 예언을 꿈으로 꿔요.’

애쉬가 서대륙을 통치하는 폭군이 된다나 머라나. 당시에도 믿지 않았지만 오늘 로제타의 행동을 보니 그 신탁인지, 예지몽인지 하는 꿈은 개꿈 중에서도 가장 질 나쁜 개꿈이 틀림없다.

“꿈은 얼어 죽을. 나까지 같이 뒤질 뻔했잖아요!”

로제타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왔다.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너무 윽박지른 게 아닌가 싶었지만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이벨린은 죽지 않아요. 떨어지는 건 나 혼자.”

“뭐요?”

“꿈이 보여줬어요. 반짝거리는 밤하늘, 이벨린 그리고 밤하늘 너머로 추락하는 제 자신. 그래서 오늘인 줄 알았어요.”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심장이 쿵쿵 뛰고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데 이런 허무맹랑한 말까지 들어줄 여유는 없었다.

“그래요, 알았어요. 근데 다음부터는 이런 짓은 하지 마요, 좀!”

“꿈이 보여준 건 반드시 이루어져요. 그것은 필연적인 것. 절대 피할 수 없어요.”

“네에. 그럼 저 없는 곳에서 꿈을 꾸든 춤을 추든 알아서 하세요. 괜히 말려들게 하지 말고.”

“꿈에 이벨린이 나왔기 때문에…….”

“아, 알았어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로제타는 절대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확고했다. 무슨 놈의 고집이 저렇게 세.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어.

“제 말을 믿지 않는군요.”

“멀쩡한 사람을 투신하게 만드는 꿈이라면 안 믿는 게 좋아요.”

자리에서 일어나 물잔이 놓여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컵 안에 물을 가득 채워 그것을 거침없이 들이켰다.

“황자님을 좋아하세요?”

“푸우욱!”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턱 밑으로 줄줄 흐르는 물을 닦아내며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맥락이에요.”

“황자님은 이벨린을 좋아합니다.”

“…알아요.”

공식적으로 애쉬의 정혼자는 로제타였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애쉬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목 안이 까끌까끌했다. 방방 떠있었던 공기가 돌변하여 피부를 압박해 오는 것 같다.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어요. 왜 그 같은 사람이, 왜 당신 같은 사람을.”

묘하게 신경을 긁는 말에 한쪽 눈썹이 찡긋 올라갔다. 그러나 로제타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기에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이번에 당신이 쓰러진 걸 보고서야 알았어요. 당신 하나 때문에 황자님은 폭주하셨고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당신뿐이라는걸. 제가 아무리 의문을 갖는다고 해도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관계라는걸요.”

“…그래서 로즈한테 애쉬가 마탑에 갇혀있다는 정보를 흘린 거예요?”

“네. 황자님을 막을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었으니까요.”

“대단한 꿈이네.”

“모든 건 신께서 정해 놓으신 필연이고 저는 그걸 꿈으로 보는 것뿐이죠. 제 꿈에 이벨린이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우리의 이런 만남도 다 정해져 있었던 거예요.”

꿈, 필연, 신.

아까 했던 말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었다.

진지하기만 한 로제타를 앞에 두고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대놓고 비아냥거림에도 로제타는 표정 한 번 바뀌지 않았다. 적당히 맞춰주고자 가볍게 질문했다. 웃음이 섞여서 진실로 궁금해 보이진 않았다.

“꿈에서 제가 뭘 하던가요?”

“말할 수 없어요.”

이렇다 할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맥이 빠졌다. 하지만 장황한 철학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것보다는 낫긴 했다.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황자님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라는 거예요, 이벨린.”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네요.”

“당신에게 달렸어요.”

말을 해줄 거면 똑바로 하든가. 생략이 지나치잖아. 앞뒤로 뚝뚝 잘라먹은 말을 듣고 내가 뭘 어떻게 하라고.

더 이상 이야기가 길어지지 않길 바라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걸어놓았던 목도리를 둘러매고 재킷은 팔뚝에 걸었다. 우스운 차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드러나 있었던 목이 뒤늦게 인지되었다.

아, 키스 마크. 로제타가 다 봤겠네.

멍청하게 단추까지 다 풀어놓았던 제 자신을 힐책했다. 그래서 좋아하냐고 물어봤던 건가?

“호두 파이 가져갈게요.”

차갑게 식어버린 호두 파이를 입안에 욱여넣으며 방을 빠져나왔다. 더 이상 로제타와 같은 공간에 있기가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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