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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놈이 토라진 이유 (4)

의료실에서 깨어난 지 이틀 만에 나는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애쉬는 내가 기숙사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의료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내 손가락질 하나에도 말귀를 척척 알아듣는 영특함을 보이며 아주 훌륭하게 간호해 주었다.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었던 ‘황자’라는 신분이 불시에 튀어나와 시종과 주인 같은 이 처지를 비난하였으나 언제 또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아볼까 싶어서 다시금 무의식으로 날려버렸다.

“그런데 너 수업 안 가냐?”

“정학 먹었어요.”

“뭐어?!”

“선배, 목 다쳐요. 어제도 계속 기침하셨잖아요.”

“지금 기침이 문제야? 정학이라니! 너 그게 나중에 얼마나 큰 불이익이 될……. 아, 너는 취업 걱정 없지? 큼흠. 여하튼! 나중에 네가 자식 낳으면 ‘아빠는 황립 아카데미에 다닐 때 정학도 당해 봤단다.’ 하는 게 얼마나 쪽팔리는 일이겠어.”

“자식한테 쪽팔리는 일을 먼저 말하진 않을게요. 그러면 됐죠?”

“되긴 뭐가 돼!”

“선배는 제가 정학 먹은 게 싫으세요?”

애쉬가 무구한 얼굴로 물어왔다. 본인이 처한 상황인데도 남의 일을 얘기하는 것처럼 가벼운 어투였다.

“당연한 소리를 해.”

그제야 애쉬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아, 그럼 취소해 달라고 할게요.”

“여기가 동네 시장 바닥이냐? 체계도 없이 말이면 다 되게?”

“다 돼요. 선배가 원하는 거면 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선배는 빨리 낫는 데만 신경 써주세요.”

애쉬가 호언하니 바람결에 나뭇잎이 흩날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법이건 질서건 녀석 앞에선 맥을 못 쓰는 것 같다.

내가 쓰러진 직후부터 수도 없이 의료실로 드나들었을 로즈가 여느 때와 같이 수업이 끝난 후 의료실로 찾아왔다.

그러나 내 등을 받치고 밥을 떠먹여 주고 있는 애쉬를 발견하고는 평소 같으면 서슴없이 들어왔을 의료실 안으로 발걸음하지 못한 채 돌이 되어 굳어버린 모습이었다. 로즈의 동공이 애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의료실 내부 이곳저곳을 퐁퐁 튀어 다녔다.

“이, 이벨린. 괜찮아 보이네……. 얼굴 봐, 봤으니까 마음이 놓인다. 나는 이만 가볼게.”

로즈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의료실 문이 닫혔다. 애쉬는 로즈가 나간 자리에 시선 한번 던지지 않고 오로지 내 입에 수프를 떠먹이는 것에만 집중했다.

애쉬의 지극정성인 간호 덕분인지 몸은 빠르게 회복되어 갔고 기숙사에서도 별문제 없이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오른손에 칭칭 감긴 붕대는 몹시 불편했지만 다 내 탓이려니 하는 속 편한 생각으로 짜증이 솟구치는 마음을 억눌렀다. 왼손으로 생활하는 것에 어떻게든 적응해 보려 애썼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글씨는 진짜 못 쓰겠네.”

왼손으로 펜을 들고 필기하던 와중에 손등이 욱신거리며 쥐가 나버렸다.

데구르르―

결국 펜이 책상 위를 구르고 나는 주무르지도 못하는 왼손을 툴툴 털며 통증이 나아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어느 정도 통증이 가시고 다시 펜을 잡아 들 즈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벨린, 나야 로즈. 들어가도 돼?”

“응.”

로즈보다 마리가 먼저 내 방으로 쫑쫑 뛰어왔다. 통통한 털 뭉치가 다다닥― 작은 발소리를 내며 내 의자 밑을 뛰어다니더니 로즈가 침대에 걸터앉자마자 로즈의 발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똥그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엄지손가락으로 뺨을 쓸어주자 눈을 감으며 손가락에 고개를 기대는 모습이 언뜻 애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애쉬 생각이 왜 나는 거야.

쓸어주던 손가락이 멈춰있으니 마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양손을 가슴팍에 모으곤 나를 쳐다본다.

“마리, 이벨린을 귀찮게 하지 마.”

로즈가 마리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익숙하게 배를 어루만져 주었다. 마리가 익숙한 로즈의 품에서 편하게 몸을 늘어뜨리며 새액― 잠에 빠져들어 갔다.

“이거 레드릭이 가져다주래. 결석했을 때 강의의 필기를 전부 구할 순 없었지만 어느 정도 도움은 될 거라면서.”

“와, 진짜야? 군사학이랑 고대어는 강의 시간에 시험 힌트를 많이 줘서 걱정했었는데 한시름 덜었어. 레드릭한테는 직접 고맙다고 얘기할게.”

진심이었다. 강의 진도가 어느 정도 나갔는지에 대해 물어볼 만한 동급생이 없었기 때문에 꽤 골머리를 썩고 있던 참이었다. 로즈가 수업을 제대로 들었을 리 없으니 그 ‘동급생’의 기준에 들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였고.

로즈가 건넨 한 권의 노트에는 각 강의별로 수업 시간에 교수가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 적은 듯 날리는 글씨체가 꼼꼼하고 자세하게 내용을 기록해 두었다.

나중에 밥이라도 한번 사야겠어. 30루덴짜리로.

“애쉬 카인드로퍼와는 계속… 그렇게 지낼 거야?”

로즈가 요즘 들어 애쉬 이야기를 부쩍 꺼내오기 시작했다. 한숨 어린 숨이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로즈,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 그런데 애쉬는 나쁜 애가 아니야. 분명히 뭔가 오해가…….”

“난 오해는 하지 않았어, 이벨린. 네가 잠들어있을 때 애쉬는 네 앞의 애쉬가 아니었다고 말했잖아. 전혀 딴 사람이었어. 언제 또 돌변할지 몰라. 나는 네가 다치지 않기를 원해.”

“애쉬가 나를 해친다고? 달에 토끼가 산다는 말이 더 믿을 만하겠다.”

비꼬려고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반응에 로즈가 스커트 자락을 힘주어 쥐었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이벨린.”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위험한 녀석이었다면 내가 먼저 눈치챘을 거야.”

“그럼 이번 파티에 애쉬와 함께 참석할 거야?”

“파티?”

“개교기념일이잖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귀찮은 게 또 시작됐다.

황립 아카데미는 개교기념일을 기점으로 이틀간 교내에서 파티를 연다. 넓은 아카데미 안 전부가 연회장이 되어 교복을 벗어 던지고 개인이 준비한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채로 먹고 마시는 별 특별할 것 없는 파티다.

모든 강의는 휴강. 아침 댓바람부터 음악 소리가 교내에 울려 퍼지며 파티의 시작을 알린다. 전교생 모두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교내를 활보하는데 조금만 해가 어두워질라치면 여기저기서 신음성이 터지곤 했다.

강의실이건 기숙사건 물조차 반입을 금지시키며 강의실에 대한 예의와 존중 어쩌고 하면서 야단법석을 떠는 엄격한 마법학 실기실에서도 섹스하는 학생들이 난무하였다. 조용한 곳을 찾으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몇 번이고 민망한 꼴을 봐야만 했다. 심지어 내 기숙사 방에서까지도.

아차차, 말에 어폐가 있었다. 전교생 모두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무리에서 완벽히 제외된 사람이었다. 드레스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원피스 한 벌 없는 나로서는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파티에 입고 갈 여벌의 옷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그 때문에 교복을 벗고 예쁘게 치장할 수 있다는 만족감 같은 건 느껴 볼 새도 없었다. 파티 당일 날에도 교복을 입고 있는 나를 보고 로즈가 제 옷을 빌려주었는데, 키가 큰 로즈의 옷을 입고 나니 오히려 더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다음 해부터는 그냥 교복을 고수했다.

“왜 대답이 없어. 너 정말! 파트너를 애쉬로 정할 거야?”

“로제타 공주가 있는데 내가 왜. 내가 애쉬랑 파티에 참석하면 어떤 피곤한 소문들이 따라붙을지… 상상하기도 싫어.”

로즈게 그제야 안심한 듯 흥분했던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그럼 이번에도 파트너 없는 애들 중 아무나 만나서 데려가게?”

“그렇겠지.”

이 개교 기념 파티의 귀찮은 점은 사치스러운 옷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과 공부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점뿐만 아니라 반드시 파트너를 정해서 데려가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는 것이다. 학교가 섹스를 권장하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규칙일 수 없다. 말로는 원활한 교우 관계를 위한 친목 도모 차원 어쩌고 하지만 내 귀에는 개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여자? 남자?”

“아무나.”

“그 아무나 소리. 저번처럼 이상한 남자애 데려갔다가 위험한 일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개소리로 들리는 이유에는 합당한 일화가 있었다.

파트너를 정하지 못한 애들 중 가장 소심해 보이고 말수가 적은 남자애에게 같이 파티에 가자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녀석도 사람이 없는 곳을 선호하기에 나와 어느 정도 성향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자마자 옷을 벗고 달려들기에 있는 힘껏 주먹으로 코뼈를 내리쳐 주었다.

그놈이 피를 줄줄 쏟으면서 하는 말이,

“너도 이러려고 나한테 파티 같이 가자고 한 거 아니었어?!”

다. 파트너 하면 바로 섹스로 연결 짓는 뇌 구조의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발상이었다. 지극히 건전한 사고를 가진 나는 그런 뜻은 전혀 아니었으므로 그 자식에게 욕을 한 바가지 쏟아부어 주고는 자리를 떴다.

그 강간 미수범 자식이 파티장에서 여자에게 코뼈가 부러졌다는 사실이 몹시도 수치스러웠는지 나한테 맞았다는 소리는 일절 하지 않고 계단에서 굴렀다는 둥 주위에 변명해 대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치료비를 청구하지 않아서 어찌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번엔 고환을 터뜨려 주겠어.”

“…이벨린, 이번에는 나랑 같이 갈래?”

“됐어. 너도 즐겨야지. 나랑 같이 다니면 따분하고 지루하기만 할걸.”

“하지만…….”

“걱정 안 해도 돼. 뭣하면 레드릭이나 데니안한테 물어보지, 뭐.”

내 완강한 거절에 로즈는 하는 수 없이 “응.” 하고 대답했다.

한참을 말이 없던 로즈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겨우 꺼내는 말이 너무 생뚱맞아서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면 폴한테 얘기해 봐. 아마 흔쾌히 파트너가 돼줄 거야.”

“내 걱정 해주는 건… 정말 고마워.”

그런데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라는 말은 생략하기로 했다.

* * *

지진이든 태풍이든 여하튼 무언가가 쓸고 간 게 맞긴 맞는구나. 허리케인이 직격타를 때린 것 같기도 하고.

로즈의 말이 막연하게만 느껴졌는데 막상 눈으로 처참해진 아카데미 건물들을 볼 때마다 재해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뒤늦게 실감되었다.

잔디의 흙은 다 뒤집어져 있고, 간판들도 다 떨어져서 건물 외벽이 휑했다. 깨진 창문을 보수하기 위한 인력이 건물마다 열댓 명씩은 붙어있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 눈에는 난장판처럼 보이는데 그때 당시에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기조차 꺼려졌다.

“이 동상은 참 쓸데없이 굳건하네.”

내 동상은 흠집 하나 없이 오히려 광택이 번쩍번쩍하게 났다.

“자기 얼굴 감상할 시간도 있는 거 보니 아픈 건 이제 괜찮아졌나 보네.”

“감상은 얼어 죽을.”

데니안이 낄낄 웃으며 내 황금 동상을 두드렸다.

“수업 늦겠어, 빨리 가자. 아, 그런데 밥은 먹었어? 붕대는 또 언제 푼 거야.”

“너 지금 누구보고 말하냐?”

나를 등지고 선 데니안이 황금 동상을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아, 이쪽이 이벨린이었구나.”

“죽고 싶냐, 진짜.”

“장난이야, 장난! 표정 풀어. 그 손으로 어떻게 죽이려고 그래.”

“아직 왼손은 멀쩡하거든.”

툴툴 턴 왼 손등으로 데니안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데니안이 과장되게 아픈 척을 하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얼굴에 웃음기나 떼고 하든가.

곧 강의가 시작될 시간이라 “간다.” 하고 짧게 인사했다. 동상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았는데 데니안이 황급히 뛰어와서는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사람이 다쳤는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잘만 떠드는 거 보니 다 나은 것 같네.”

“아니, 아직도 아파. 호 해줘.”

데니안이 내 얼굴 쪽으로 자기 가슴팍을 들이밀었다. 끝날 줄 모르는 녀석의 장난에 진심으로 명치를 세게 가격해 줄까 고민했다.

데니안이 콧소리를 내며(본인 스스로가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진심으로 역겨웠다.) “빨리…….” 하자 머리 대신 몸이 먼저 반응했다. 팔꿈치로 내리찍을 곳을 정확히 확인했다.

“악!”

“뭐야. 나 아직 안 쳤는데.”

가깝게 달라붙어 있던 데니안의 몸이 나가떨어졌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녀석이 바닥을 구르며 흙먼지가 내려앉은 돌바닥 위에 주저앉았다. 본인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를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녀석을 치지 않았다. 내 팔꿈치는 아직 접히지도 않은 상태였다.

“괜찮아요?”

머리 위에서 들리는 동굴처럼 깊고 낮은 목소리에 목 뒤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나보다는 쟤가 좀 아플 것 같은데.”

익숙한 목소리. 애쉬다.

“선배, 칠칠치 못하게 왜 저런 걸 달고 다녀요.”

저런 거? 칠칠치 못해?

방금 전까지 데니안의 팔이 올려져 있었던 어깨 위를 애쉬가 조심스럽게 털기 시작했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어있다는 듯이.

강박처럼 내 옷을 털어대는 손을 잡아채곤 녀석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푸른 달을 담은 눈꼬리가 휘어졌지만 평소의 미소가 아니었다. 손끝이 얼어붙어 버릴 만큼 싸늘했다.

“정학 풀렸어?”

화제를 바꾸었다. 데니안을 일으켜줄 수도, 애쉬에게 사과하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내 머리가 그건 불난 집에 기름 붓는 짓이야! 하면서 혀와 몸을 필사적으로 뜯어말리고 있었다.

“형님한테 말해 뒀으니까 곧 풀릴 거예요.”

“그래. 빨리 풀렸으면 좋겠다.”

처음이었다. 애쉬를 앞에 두고 할 말을 머릿속에서 짜내야 하는 느낌은.

시간이 무척이나 더디게 흘러갔다. 우리 주위로 시선들이 몰리는 건 둘째 치더라도 자꾸만 내 신경은 애쉬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뒤쪽의 데니안에게로 쏠렸다.

“끝이에요?”

“어?”

“제가 빨리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요?”

“…….”

“선배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요, 지금.”

지금 이 자리가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애쉬가 꼴도 보기 싫어졌다거나 하는 의미는 절대적으로 아니었다. 단지 애쉬가 평소와 다른 모습이라 조금 당황했을 뿐이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떠안고 있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웃음으로 치장하고 있는 얼굴은 얇은 유리막처럼 너무도 아슬아슬해 보인다.

“강의 시간에 늦겠어. 병결에 지각까지 있으면 이번엔 수석 자리 내줘야 해.”

“같이 가요. 데려다드릴게요.”

“그냥 네가 나랑 같이 가고 싶은 거잖아.”

“맞아요. 강의실 앞까지만 같이 걸을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안 돼. 정학당한 놈이 강의실 앞에서 얼쩡거려서야 되겠어?”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안 된다면, 안 돼.”

옅게 걸려있던 미소가 애쉬의 발끝으로 추락했다. 형형한 기운을 내뿜는 애쉬를 애써 무시하고 데니안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멍청하게 앉아만 있다간 진짜 지각한다.”

“…선배.”

“나중에 봐. 나 수석 놓치면 안 되는 거 너도 알잖아.”

움찔거리는 애쉬의 손을 뒤로한 채 강의실로 향했다. 평소답지 않은 애쉬에게서 도망쳐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 * *

아카데미는 파티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일주일 뒤면 파티가 시작된다. 벌써부터 파트너를 정한 학생들도 있고, 옷을 어떻게 입어야 가장 잘나 보일지 고민하느라 수업 시간 내내 골머리를 썩이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루 이틀 전에 파트너를 정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할 즈음 이름이 불렸다.

“손은 이제 좀 괜찮아?”

레드릭이었다. 노트 필기를 해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도 해야 하고 저 녀석도 나에게 여러모로 물어볼 말이 많은 것 같았다. 곧 마주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데니안을 마주할 때보다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거추장스러운 붕대만 빼면.”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조심해.”

“이 정도면 다 나은 것 같은데. 붕대 풀어서 보여줄까? 냄새날 테니까 코 막고 물러서 있어.”

레드릭이 붕대 쪽으로 가져가는 내 왼손을 잡아 제지시켰다. 분위기를 풀어보려 농담한 것인데 잡힌 왼손이 욱신거릴 정도로 아파왔다.

“내 왼손도 못쓰게 할 셈이야?”

“미안.”

“따라와. 나 수업 끝났으니까.”

레드릭이 장난칠 기분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나도 실없는 농담 같은 건 집어치우기로 했다.

우리는 인적이 드문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별다른 감상 없이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뭐가 묻고 싶은 거야?”

내가 말했다.

“네가 겪고 있는 것들.”

“다시 말할게. 왜 묻는 거야?”

레드릭이 허벅지 위에 놓은 손을 깍지 껴 잡는 것이 보였다.

“도와주려고.”

“그러니까 네가 왜.”

나도 모르게 레드릭의 옆얼굴로 고개가 돌아갔다. 녀석의 긴 속눈썹 아래에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었다. 그 안에 숨어있을 눈동자가 어떤 빛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지나칠 수가 없었어. 네가 로벤스디 저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여 버리겠다고 외치던 모습이 떠나질 않아. 네 앞에서 자살한 그 사람도… 아는 사람이었지?”

가려져 있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물음이 아니었다.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이었다.

“너한테 일일이 설명하고 있을 이유가 없는데.”

“말했잖아. 도와준다고.”

“도와줘? 네가 어떻게?”

“가문의 지분 때문에 공작 저하가 너를 죽이겠다고 협박이라도 하는 거면 치안관한테 얘기해서 보호받는 건 어때? 내가 증인이 되어줄게.”

“잘나신 공작 저하가 사생아 동생 좀 죽이겠다고 하는데 어떤 근위대가 하잘것없는 사생아를 보호해 줄까.”

“아니면 성당으로 가자. 추기경님께 이 사실을 알리면…….”

“잘못 짚었어, 레드릭. 오빠는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야.”

산 채로 가두고 싶어 하는 거지.

“그럼 도대체 뭔데. 왜 공작 저하는 네 앞에서 사람을 죽게 만들었고, 너는 또 왜 공작 저하를 죽이려고 한 건데.”

녀석의 간섭에 일순 짜증이 솟구쳤다.

왜 다들 죽지 못해서 환장한 사람처럼 끼어들려고 그래.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둬.

“그냥. 돈 한 푼 안 주고 아카데미에 방치한 이복 오빠가 미워서 죽이고 싶었어. 오빠가 날 위협한 건 내가 로벤스디 가문에 있을 때 오빠가 아끼던 패물들을 전부 훔쳐서 달아나 버렸거든. 거기엔 아버지 유품도 들어있었어. 내가 훔친 것들을 되돌려 놓으라고 그랬던 거야. 그것 외에는 아무 이유도 없어.”

“맙소사, 이벨린. 아버지 유품을……. 그것만이라도 돌려주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러니까 절대 끼어들지 마. 간섭도 하지 말고 궁금해하지 말고, 그 오지랖 넓은 걱정도 집어치워. 알겠어?”

“…….”

레드릭의 얼굴빛이 매초마다 휙휙 바뀌어갔다. 걱정에서 놀라움, 그리고 지금은 어째서인지 불안이 엿보인다.

그가 더 말을 이어나가기 전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 얘기는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 내 치부거든.”

“…아무리 화나더라도 유품은… 돌려주는 게 맞아.”

끝까지 멍청한 조언을 멈추지 않는다.

* * *

저물어가는 해의 미약한 빛을 받아내며 곧장 기숙사 방으로 향했다.

속이 답답했다. 얼음이 가득 들어찬 냉수를 단숨에 들이켜고 싶을 정도로 갈증이 일었다. 어느 곳에도 마음을 주지 못하고 뻔뻔한 거짓말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비참했다.

세레즈 로벤스디가 추악하고 더러운 살인마라는 사실을 외쳐도 믿어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대외적으로 반듯하고 청렴한 고위 귀족인 그는 세간의 평판이 좋은 것은 당연하고, 만일 그렇지 않더라도 그의 부패한 곳을 들춰낼 힘 있고 용기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그 어느 곳에도 얘기하지 못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로벤스디 가문 소유의 폐쇄 병동에 갇힐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정신병 환자라는 명목으로.

“씨팔, 그러니까 관심 좀 가지지 말란 말이야.”

로즈, 레드릭 그리고 애쉬가 세레즈를 언급할 때마다 그들의 목이 바닥을 구르는 모습이 떠오른다. 검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던 것이 요즘은 눈앞에 그려지는 것처럼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세레즈로 인해 내 주변 사람이 죽는 것만은 반드시 막을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영웅심이나 그들을 지키고자 하는 사명감이 강해서는 아니다.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내가 그 죽음을 목도하고도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세레즈 발아래에 고개를 조아리게 될 것만 같아서.

그런 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 * *

뭐! 파트너쯤이야 분명 쉽게 구할 수 있겠지.

하고 속 편한 생각을 했던 과거의 나를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지금쯤 아카데미 게시판에는 파트너를 모집하는 처량한 메모지가 붙어있어야 했다. 그러나 웬걸, 파티를 알리는 홍보지만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혹여나 홍보지 귀퉁이에 비슷한 말이 적혀져 있지는 않을까 해서 요리조리 훑어보았지만 손때만 잔뜩 타있을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로즈에게 같이 파티에 가자고 얘기해 볼까……. 아, 로즈 파트너 구했다고 했지. 아카데미 전교생 수가 홀수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내 메모지라도 붙여놓을까.”

주제에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 번도 내가 먼저 메모지를 붙여놓은 적은 없었는데… 지금은 동네방네 홍보해서라도 파트너를 구해야 할 판이었다. 파티에 참가하지 않으면 빌어먹게도 결석 처리가 되니 말이다.

“무슨 메모지요?”

“아,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고 다녀!”

애쉬가 애교 어린 웃음을 띠며 내 어깨에 이마를 비벼댔다.

“몇 번이나 불렀다구요.”

“야, 떨어져. 여기에 보는 눈 많아.”

애쉬만 들릴 정도로 읊조리곤 몸을 밀어냈다.

지난번에 데니안을 ‘저런 거’ 취급하면서 내동댕이쳐 버렸던 애쉬는 잠취를 감추고 다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 잘 듣는 강아지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사람 없는 데로 갈까요?”

“너, 수업은.”

애쉬의 정학 처분은 너무도 빠르게 취소되었다. 문제 학생이 있을 때마다 그에 대한 처분을 공공연히 발표했던 이전의 사례들과 다르게 애쉬의 정학 사실은 나를 제외하곤 아카데미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으며 그것이 취소됐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다.

“음… 끝났어요.”

“대답이 늦다?”

“진짜예요. 가요. 선배.”

“야, 잠깐…….”

애쉬가 뒤에서 등을 밀었다. 강하게 민 건 아니었어도 그렇다고 버티고 설 정도도 아닌지라 애쉬가 미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우리의 꼴이 퍽 우스워 보일 것 같아서 결국은 내 스스로 걷겠다고 소리쳐야 했다.

도착한 곳은 이전에 바 선생 사건 이후로 두 번 다시 발걸음하지 않았던 폐건물이었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비유가 아니라 리얼, 생바퀴벌레 커플 한 쌍을 어깨에 달고 다녔던 애쉬가 다시 이곳을 찾을 줄이야. 의외였다.

“불쾌하시죠? 죄송해요. 어딜 가나 사람이 한두 명씩은 꼭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너야말로 괜찮아?”

애쉬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응. 말 안 해도 알겠어.

그냥 공원 벤치에나 앉아있자고 권해 보았다. 딱 달라붙어 있는 것만 아니면 그다지 이상한 그림도 아니었다. 그러나 애쉬는 단둘만 있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다. 또 바 선생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내가 도와줄 순 없다고 못 박자 애쉬가 상처받은 눈을 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건물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갔다. 하얀 먼지 위로 두 쌍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혔다.

텅텅 비어있을 강의실 중 하나를 골라잡고 문을 열었다. 이음새가 어긋나 있었던지 삐걱거리는 소리가 괴이할 정도로 크게 들린다.

애쉬가 힘주어 문을 한 번에 열어젖히니 사이사이에 뭉쳐있던 먼지가 팍! 터져 올랐다. 그것들이 머리 위로 내려앉기 전에 내 얼굴은 애쉬의 가슴팍으로 안전하게 숨어버렸다. 뒷머리를 감싸 안은 큰 손이 아직 고개를 들지 말라는 듯 꾸욱― 눌러왔고 애쉬의 나머지 한 손은 먼지를 털어내는 듯 부단히 움직였다.

“이제 괜찮아요, 선배.”

“푸흡.”

“……?”

“넌 안 괜찮은 것 같은데.”

나를 감싸느라 정작 본인의 얼굴에는 회색빛 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줄도 모르는 눈치다. 머리를 자른 이후 어리숙했던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하고 막내 황자답게 얼핏 고결한 분위기까지 폴폴 풍기던 녀석이 먼지나 매달고 헤헤 웃는 폼이 이질적이었다.

아니, 찰떡같이 잘 어울리기도 하고…….

붕대가 칭칭 감긴 손으로 애쉬의 어깨를 짚으며 까치발을 들었다. 소매를 끌어 올려 얼굴에 앉은 먼지를 털어주는 동안 애쉬는 얌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머리카락에서 이마, 콧대 그리고 눈썹 위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주다가 녀석의 투명한 푸른 눈동자를 마주했다. 지저분하고 퀴퀴한 것들 투성이인 곳에서도 애쉬의 벽안은 심혈을 기울여 가공된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먼지를 털어내던 손이 멈추었다. 중독된 것처럼 애쉬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들어 올린 발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한참을 그렇게 붙어있었다. 이유도 없이. 애쉬가 내 허리를 잡고 몸을 내려주지 않았더라면 발목이 퉁퉁 불어서 통증이 일어나고 나서야 겨우 헤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선배, 저 예뻐요?”

“응. 예쁘네.”

“얼마나요?”

“먼지를 달고 있어도 예뻐.”

애쉬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렸다.

“그거 알아요? 제 얼굴에 홀려있는 선배 얼굴이 사람 환장하게 한다는 거.”

“……?”

“저 섰어요.”

“미친.”

애쉬는 금욕적인 얼굴을 하고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미소는 봄날의 벚꽃 잎이 흩날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해사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은데 참을게요. 선배는 지금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까요.”

나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애쉬의 바지춤으로.

억, 진짜잖아?!

터질 것처럼 부풀어있는 바지 앞섶을 보고 입이 벌어졌다.

“…선배, 유혹하지 마요.”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내가 언제?

“빨아줄 것도 아니면서…….”

“…….”

애쉬가 사선으로 고개를 틀었다. 마치 내 얼굴을 더 이상은 보고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이 녀석은 진성 변태임이 틀림없다. 키스도 몰랐던 햇병아리 애쉬는 진화를 잘못 거쳐버린 탓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변태가 돼버린 것이다. 그 진화 과정에 내가 있었다는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아무튼.

애쉬의 충격 발언으로 얼굴에 열이 모였다. 괜히 홧홧해지는 입 안쪽 살을 이로 깨물면서 당황스러운 이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혼자 자위라도 하고 있어. 난 환기 좀 시키고 올 테니까.”

강의실 안에 있는 모든 창문을 열었다. 자욱했던 먼지가 창문 밖으로 빨려 나가는 것을 보니 속이 시원하다.

“자위하는 거 봐주시면 안 돼요?”

“진짜로 하게?!”

진심으로 자위하고 있으라는 비상식적인 조언은 아니었다. 그냥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하라는 말을 놈이 민망하지 않도록 ‘나는 아무렇지도 않단다, 아가야.’ 하는 의미에서 던진 것뿐이다.

애쉬가 풀이 죽었다. 원망스럽게 나를 바라보는데 괜히 미안하기도 하면서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방금 하라고 했잖아요.”

“아니, 난 그게 아니라……. 하아. 넌 왜 아무 때나 세우고 난리야.”

“선배가 그런 표정을 짓는데 어떻게 안 세울 수가 있어요. 성 기능 불구자도 서게 될 거고, 없던 거라도 다 설 거란 말이에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진짜.”

말을 하면서 복받쳤는지 애쉬의 눈가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래는 내가 보기에도 아플 정도로 팽팽하게 커져 있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녀석은 내가 말하고 있는 와중에도 점점 흥분을 더해 가는지 눈을 질끈 감기도 하고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이리 와 서봐.”

애쉬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내 앞에 와서 섰다. 녀석의 바지춤에 손이 닿자 “흐윽!” 하고 신음 섞인 숨이 머리 위에서 터져 나왔다.

“옷 위로도 갈 수 있겠어? 여기 먼지가 많아서 전부 꺼내는 건 조금 안 좋을 것 같은데.”

버클을 풀고 바지를 골반에 걸쳐두었다. 드로어즈 위로 거대한 윤곽을 그리고 있는 페니스가 살아있는 것처럼 껄떡거렸다. 멀쩡한 왼손이 망설임도 없이 페니스를 쥐었다. 뜨거운 열기가 피부를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으흑… 선배.”

“도와주잖아.”

“잠깐, 잠깐만요.”

싸고 싶어서 곧 죽을 것처럼 굴던 애쉬가 내 손목을 잡아 멈추게 했다. 황급히 입고 있던 교복 재킷을 벗어 등에 걸쳐주었다.

“벽에 먼지 많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별걸 다 신경 쓰네.

흘러내리지 않도록 재킷을 단단히 여며준 뒤 내 목에 얼굴을 기댔다.

“하아, 선배 손 쓰지 마요.”

“그럼 어떻게 가려고.”

“허벅지 좀 붙여주세요.”

쿵.

애쉬가 몸을 강하게 붙여온 탓에 등이 벽에 닿았다.

이러려고 옷 입혀준 거였냐.

곧이어 허벅지 사이로 뭉툭하고 뜨거운 것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드로어즈는 또 언제 벗어 내렸는지 매끈하고 단단한 감촉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하아, 읏, 선배.”

“야, 이건 좀 이상하지 않아?”

“손 쓰는 것보단, 으읏, 나으니까.”

삽입 후 피스톤질을 하는 것처럼 애쉬가 허리를 움직였다. 덩달아 내 몸도 덜컹거리며 애쉬의 박자에 따라 흔들린다.

단단한 상체가 내 몸을 누르고 여유 없는 허리 짓은 강약 조절을 잊은 듯 광폭하기만 했다.

“읏, 으! 아, 애쉬!”

실제로 넣은 것도 아니건만 묘한 열기가 아래에서부터 치고 올라오고 다리 사이가 페니스에 비벼질 때마다 쾌락을 좇는 성감이 움찔거렸다.

“하아, 선배. 조금만 더요.”

애쉬의 입술이 목을 파고들었다. 살갗을 녹여 없애버릴 것처럼 집요하게 빨아대던 입술과 혀가 결국은 그것을 한입에 입에 넣고는 이로 깨물어 버렸다.

“앗!”

몸이 움찔 튀는 것을 애쉬가 상체로 억누른 후 다시금 목에 이를 박아댔다. 잡아먹히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두려움과는 다른 감각이 몰려들었다. 몽글몽글하게 퍼져오는 쾌감이 전신에서 돋아나기 시작했다.

내 골반을 쥐고 있던 손이 허리를 타고 올라와 가슴 밑을 지그시 눌렀다. 기다란 손가락이 거미줄처럼 퍼지며 봉긋하게 솟은 살을 한 손에 감싸 쥐었다. 한 손에 쥔 가슴을 원 그리듯이 둥글리며 누르다가도 유두가 있는 부위를 정확하게 찾아 손톱으로 간지럽게 긁어댔다.

“아, 으응, 하…….”

“키스해도 돼요?”

“흣, 더한 짓도 하고 있잖아.”

“하아, 씹…….”

여린 목을 지독하게 괴롭혔던 지나치게 붉은 것이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따뜻한 입맞춤이 아니라 뜨겁고 강한 침범과도 같았다.

입이 한계까지 벌어지며 녀석이 주는 타액과 혀를 모조리 받아먹었다. 쩝. 쩝. 질척거리는 소리가 야했다.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드는 페니스는 내 속옷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나도 녀석만큼이나 흥분하고 말았다.

무겁게 내리누르는 상체가 만족스러워서 녀석의 목을 강하게 껴안았다. 흡사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녀석의 허리 짓이 더욱 거세졌다.

“아악! 야, 읏, 아! 너무, 세…….”

“후우, 아, 이벨린.”

“아, 아, 읏! 잠깐, 으, 멈춰, 멈추라고!”

퍽! 퍽!! 퍼억―!

이건 진짜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거칠었다. 만약 삽입된 상태였다면 그대로 속 안 어딘가가 뚫려 버릴지도 모를 것이다. 아찔함을 느끼며 울부짖자 애쉬가 뚝뚝 끊기는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죄송해요.”

허리 짓은 다시금 얌전해졌다.

녀석의 목을 껴안은 채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애쉬가 내 등을 다정하게 쓸어주면서 입과 볼에 입을 맞춰댔다.

“너, 읏, 적당히… 안 할래?”

교복 치마가 올라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났다. 그 사이를 오고 가는 녀석의 페니스까지도. 쓸려서 아프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녀석은 미처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을 만큼 흥분해 있었다.

“선배만 보면, 참기가, 힘, 들어요.”

“내가 널 너무 오냐오냐, 아, 받아 줬나, 보다.”

“부족해요, 더 받아줘요.”

“으읏, 아, 아, 야, 또 빨라지지, 앗, 애쉬! 아…….”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등을 후려갈기자 애쉬가 우는 소리를 내며 다시금 속도를 줄였다. 적당히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애쉬 덕에 은근하고 나른한 흥분감이 찌릿찌릿하게 울렸다.

“으음……. 아, 하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을 속도의 피스톤질이라 애쉬에 맞춰서 나도 허리를 움직였다. 녀석이 길게 입맞춤하더니 만족스럽게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미친 듯이 박아대고 싶은 건 여전하지만… 이것도 좋네요.”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같이 허리를 움직였다. 폭발하듯 차오르는 쾌감이 아니라 간질거리며 점점 고양되어 온다.

“선배, 후우, 이번에, 파티, 저랑…….”

‘파티, 저랑’ 이 두 단어만 듣고도 애쉬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아차렸다.

“아니. 아, 으읏, 음…….”

“…선배?”

“너랑, 안, 간, 다고.”

애쉬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허리에 감긴 팔의 힘은 더욱 강해져서 더 이상 가깝게 붙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리가 더욱 좁아졌다.

“제가 잘못 들은 거죠?”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너랑 안 가.”

쾌락으로 젖어있던 벽안이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움찔.

너무도 선연한 변화에 본능적으로 발이 뒤를 짚었으나 닿는 건 단단한 벽이었고 그것이 없었다 하더라도 허리에 감긴 팔이 너무도 강하게 나를 붙들고 있었다.

“설마 그 자식이랑 가는 거예요?”

“그 자식이라니, 누구?”

“그 새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선배 옆에서 알짱대는 꼴이나 감히 선배 어깨에 더러운 손을 올리지 않나. 그 자리에서 대가리를 터뜨려서 죽여버리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고요! 선배가 싫어할 것 같아서!”

광기 어린 눈이 살의가 분명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데니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강박처럼 내 어깨를 털어대던 애쉬의 모습도 함께.

“…설마 데니안 말하는 거야?”

“그 새끼 이름 부르지 마요. 다정하게 불러주지 말라고요! 제발!”

애쉬는 불안해 보이기도 했고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전혀 그럴 것이 없는데도.

“데니안……. 그래, 네가 말하는 그 새끼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 새끼가 선배 옆에 있는 것도 싫어요. 쳐다보는 것도 싫고, 말이라도 걸면 달려가서 혀를 뽑아주고 싶어요.”

“너 참… 내가 싫어할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한다?”

애쉬는 거하게 충격 먹은 표정이었다.

“제가 이 정도밖에 안 돼서 죄송해요. 선배 옆에 있기에 너무 모자란 놈이라서 죄송해요. 그런데 저도 어쩔 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 새끼가 자꾸 선배를 쳐다보는데 어떻게 그냥 두고만 봐.”

“두고만 봐.”

“…….”

흥분해서 길길이 날뛰는 녀석에 비해 나는 한없이 덤덤했고, 또 단호했다. 뜨거운 열기를 뿜어대며 날아가는 녀석의 말과 다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무심할 정도로 냉랭하기만 했다.

“정확히 얘기해 두는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짓이 내 인생에 간섭하는 거야. 그 누가 됐든 용납 못 해. 애쉬, 선을 지켜. 네가 아무리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네 감정을 나한테 강요할 순 없어.”

처음에는 당황해서 못 본 척 넘어가 버렸지만 오늘은 피하지 않을 것이다. 아닌 건 아닌 거다.

일방적인 구속은 사랑이 아니며, 소유욕이라고 치부하기엔 난 물건도 아니었다. 애쉬가 나에게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눈과 입을 단속할 권리는 없다.

한기가 서린 냉혹한 말에 애쉬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분노, 불안함이 깃들었던 눈이 공허해진다.

“…죄송해요. 저 진짜 한심하죠.”

“…….”

전보다는 목소리에 힘이 풀려 있었으나 내뱉는 문장 하나하나를 짓씹으며 겨우겨우 참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선배 말이 다 맞아요. 그런데… 이 감정이 주체가 안 돼. 선배 때문에 하루에도 천국과 지옥을 몇 번이나 오가는 줄 알아요? 이 빌어먹을 심장이 내 말을 안 듣는다구요.”

“머리로 참아. 계속 참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내가 조금 더 단호하게 말하는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애쉬가 계속 이런 상태로 나에 대한 집착이 심해져선 안 된다. 언젠가… 애쉬는 나 없는 하루를 살아가야 할 것이고 나 또한 그럴 테니까. 인사도 없이 떠나진 않을 테지만 언젠가 끝은 분명히 있을 테고 우리는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훗날 그때의 애쉬도 나처럼 생각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꼭 레드릭이 아니더라도 난 이번 파티에 너와 함께 가지 않을 거야. 넌 로제타 공주랑 참석해.”

정말 별거 아닌 이야기인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애쉬가 다시금 끓어오르는 절망과 슬픔을 가득 매달고는 내 앞에서 표출하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한껏 죽여 이야기했다.

“선배 옆에 다른 새끼가 붙어있는 걸 제가 어떻게 견뎌요.”

“견뎌. 네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난 내 뜻대로 할 거니까. 받아들여.”

“선배.”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해. 계속 애처럼 굴면 피곤해서 너 못 만나.”

“…….”

역시나. 애쉬는 결국 애달픈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정말 싫다는 표정을 하고선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울렸다.

아아. 물렁해지면 안 되는데 여름철의 장마처럼 펑펑 눈물을 쏟으면서도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워서 안아주고 말았다. 너른 등을 토닥이며 잘했다고, 훌륭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울음이 어느 정도 잦아들 때까지 안아주고 있으려고 했는데… 이 분위기에 맞지 않은 뭉툭한 무언가가 내 아랫배를 찔러댔다.

하아. 이 자식 진짜.

“너 그만 좀 세워라.”

“…아까부터 흑, 안 죽고 있었던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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