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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놈이 토라진 이유 (3) (12/42)

6. 그놈이 토라진 이유 (3)

약학 조별 과제 팀은 사흘 만에 다시 모였다. 빈 강의실에 둘러앉은 우리는 각자가 조사해 온 자료들을 공유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모임이었기에 로즈는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최악이네. 건질 만한 내용이 없어.”

“워낙에 효능이 좋은 약초다 보니까 재배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제 실속을 채우려고 재배 방법을 공유하지 않더라고. 아르모네 약초는 아주 비싼 값에 팔리고 있으니까 말이야.”

“사실 교수님도 모르는 거 아니야?”

“그 말엔 나도 어느 정도 동감해.”

“그래도 데니안이 샘플로 쓸 아르모네 씨앗을 왕창 구해 와서 다행이네. 이것저것 동시에 실험해 보면 뭐 하나는 걸리겠지.”

데니안이 건네준 묵직한 주머니를 두드렸다.

“값도 값이지만 판매가 금지된 약초라서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어디서 이렇게 많이 구한 거야?”

레드릭이 물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구한 건 아니고 폴의 도움을 받았어. 녀석의 가문이 무역으로 유명하잖아. 레드릭 네 말처럼 펜테리온에서는 단 한 개도 구하지 못했을걸.”

폴? 폴이라면 그 폴 크라우를 말하는 건가. 아카데미 내에서 유일하게 사귀었던 내 전 남자친구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벨린이랑 사귄다고 해서 아카데미가 꽤 떠들썩했었지.”

“그다지 떠들썩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냐, 몰라서 그렇지. 너의 철옹성 같은 방어막을 뚫고 어떻게 연애했냐고 다들 난리가 났었어. 오래가지 못하고 헤어져 버린 건 너무 유감스러운 일이야.”

조별 모임 중에 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의외였지만 당황할 정도는 아니다. 부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티끌만큼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은 나에겐 전혀 특별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폴에게는 고맙다고 전해 줘.”

“얼마든지.”

우리는 다시 머리를 맞대고 아르모네 재배 방법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경우의 수가 너무도 많은지라 이야기는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결국 데니안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마디 외쳤다.

“아이씨! 그럼 독초 키우는 방법과 완전히 반대로 한번 해보자!”

전혀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반대라는 것이 또 애매모호했다. 토양과 거름, 햇빛, 물의 양의 반대는 어떻게 맞춰야 하는가? 빠져나갈 수 없는 미궁에 갇혀버렸다.

한창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재배 방법을 쥐어짜고 있을 때 로즈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 위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걷어낸 로즈가 내 얼굴을 뚱하니 바라본다.

“여기 어디야?”

“어디긴, 조별 과제 모임이지.”

“그건 뭔데.”

역시나 모를 줄 알았다. “나중에 차차 알려줄게.”라며 로즈를 타이르고 다시 논의에 들어갔다. 로즈가 내 책상 위에 놓인 씨앗 주머니를 만지더니 그것을 풀어버렸다.

“아르모네잖아?”

왁자지껄 떠들던 대화 소리가 로즈의 말 한마디에 잦아들었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로즈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런 것도 알아?!’ 하는 시선으로.

갑작스럽게 쏠린 시선에 로즈가 씨앗 하나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들 쳐다봐?

“그게 조별 과제야.”

“이걸로 뭘 하려고?”

“아르모네를 약초로 재배하는 게 조별 과제라고.”

로즈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고작 그걸 하려고 이렇게 조까지 짠다는 거야?”

“…….”

로즈를 제외한 우리 세 명은 누가 신호를 쏘아 올린 것도 아닌데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컹거리는 의자 소리가 요란했지만 로즈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이고도 은혜로운 말을 덮을 정도의 소음은 아니었다.

레드릭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재배 방법을… 알아?”

로즈는 뭘 그런 것을 다 묻냐는 식으로 여전히 얼굴을 구기며 답했다.

“다섯 살 때부터 해왔던 거야.”

* * *

누가 로즈를 둔하다고 입에 올리는가! (과거의 나다.)

로즈 님은 거룩하시며 은혜롭고 또 영민하시다!

로즈의 폭탄 발언 덕분에 우리는 황금 마차를 탑승하고 A+ 학점으로 전력 질주하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왜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프로와즈 가문은 약재를 능통하게 다루는 것으로 명명백백히 알려진 가문이었다. ‘프로와즈’라는 브랜드가 약재들 사이에서 최상위 약재로 취급받았고 다른 약재들에 비해 그 값이 월등히 높더라도 사람들은 프로와즈 가문에서 난 약재들을 구하려고 혈안이 되곤 했다.

그런 프로와즈의 차녀가 내 눈앞에 있었다!

우리의 리더는 이의 없이 로즈가 되었다. 그녀의 말을 따라 흙을 구매하고 화분을 골랐으며 날이면 날마다 장소를 바꿔가며 아르모네가 최상위 약초로 자라날 수 있도록 노력을 기했다. 약학 시간이 되면 로즈의 허락 없이는 숨도 쉬지 못할 것처럼 굴었다.

“로즈, 네가 내 친구인 건 정말 큰 행운이야.”

“그렇게 말해 주니까 좀 쑥스러운데.”

“아니야, 로즈. 네가 없는 약학 시간은 상상도 하기 싫어.”

“평소엔 내가 늘 너한테 도움을 받잖아.”

그 어떤 도움도 지금만큼 결정적일 수는 없을 것 같다. 단지 잠이 많은 로즈를 옆에서 챙겨주는 것 말고는 한 게 없었으므로.

약학 조별 과제라는 큰 골칫덩이가 쉽게 해결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는 매일같이 모여서 로즈의 지시를 따르며 아르모네를 살폈다. 데니안의 말대로 레드릭은 정말 배합의 신이었다. 로즈가 애매모호하게 “대략 이쯤.”, “적당히.”, “충분하다고 생각될 만큼.”이라고 이야기한 것만 듣고도 거름 배합을 척척 해나갔고 아르모네는 우리의 염원대로 착실히 자라주었다.

“이제부터는 분갈이가 중요해. 흙이 아무리 정화 기능이 있다고 해도 아르모네 뿌리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방대한 양의 독소는 모두 정화하지 못해. 그게 고이고 고여서 아르모네 잎까지 번지게 되는 거야. 음… 지난번에 샀던 부엽토는 모두 사용해 버렸는데…….”

로즈가 나를 보며 싱긋 웃음 지었다.

“부탁해.”

“응, 지금 다녀올게!”

충성! 로즈의 말이라면 절대 복종!

나는 기합이 바짝 들어간 투로 답했다.

레드릭이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게가 꽤 나갈 테니 자신도 함께 간다는 이유에서였다. 레드릭이 같이 간다고 하자 로즈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지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알았다고 답했다.

아르모네 재배에만 열을 올리고 있던 와중이라 로즈의 표정 변화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화원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크게 귀찮은 일도 아니었다.

“가자, 레드릭.”

해가 높이 떠있는데도 날이 제법 쌀쌀해졌다. 그러나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흙더미 위에서 씨름하던 와중이라 바람이 달게만 느껴진다.

농부의 삶이란 이런 것인가.

이마께로 흘러내리는 땀을 손목으로 훔치며 초가을의 정취를 즐겼다.

“적성에 맞나 봐?”

“A+가 없던 적성도 만들어주는 기분이야.”

“내년 약학 강의에서도 또 같이 조별 과제 할 수 있는 거야?”

“두 번 다시 듣지 않을 예정이야. 로즈가 있다면 한 번 생각해 볼 순 있겠지만.”

아르모네를 재배하면서 얻는 성취감이 짜릿한 것과 별개로 매일같이 조금씩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은 1분 1초가 금 같은 나에게는 몹시 아까웠다.

게다가 실상은 여유롭고 풍족한 농부의 삶이 아닌, 학점에 쫓기면서 강박처럼 화분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은근히 피곤한 일이고.

화원에 들러 곧바로 부엽토를 구매했다. 점주가 끙끙거리며 포대 자루를 들고 나왔는데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여 재빨리 받아들었다.

으윽.

팔이 빠질 뻔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무거운 무게에 나도 점주처럼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이리 줘.”

“이, 이 정돈 괜, 끄윽, 찮아.”

그렇다고 냉큼 레드릭에게 줘버리는 건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운동을 조금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부엽토를 고쳐 안았다.

그러나 레드릭이 내 품 안에서 손쉽게 부엽토를 가져가 버렸다. 한 팔로 안아 든 레드릭은 나와 다르게 안정적인 자세였다.

아, 역시 자존심 상한다.

“내가 괜히 따라온 게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그럼 난 여기 왜 온 거야?

반대로 의문을 품으며 내가 먼저 화원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어딘가 낯익은 남자가 화원 바로 앞에 떡하니 서있었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그 남자와 몸이 부딪힐 뻔하여 반사적으로 반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섰다.

“저기요?”

흰자위가 많이 드러나는 눈이 큰 남자는 시체처럼 피부색이 창백했다.

오싹.

기시감이 느껴지는 소름이 손등에서부터 돋아났다. 나는 홀린 듯이 남자의 눈에 시선을 박아두고 있었다.

“길 좀…….”

솨아아―

뜨겁고 질척한 것이 분수처럼 얼굴에 튀기 시작했다. 팔뚝만 한 식칼을 단숨에 자신의 옆 목에 박아 넣은 남자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그것을 뽑아냈다.

툭.

식칼이 바닥에 떨어졌고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방대한 양의 피는 내 몸과 주변을 공포로 적셔갔다.

“꺄아아악!”

삽시간에 비명이 터졌다. 그러나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메마른 땅 위에서 퍼덕거리는 물고기처럼 사지를 떨고 있는 남자만을 바라보았다.

로벤스디가의 시종이다.

분명히 기억한다. 나를 고문했던 비열한 악마 새끼들 중 한 명이 틀림없었다. 그로테스크하게 팔다리를 꺾어가며 경련하는 남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까무러치면서도 크고 퀭한 눈은 날 향해 있었다.

죽음이 완전히 드리운 그 순간까지도.

내 안의 껍질이 한 꺼풀 벗겨졌다.

“이벨린, 괜찮아? 씨발, 이게 무슨 일이야.”

뚝. 뚝.

머리카락을 타고 남자의 더러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른쪽 눈이 피 때문에 제대로 뜨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랫입술이 터지도록 강하게 짓씹으며 두 눈을 부릅뜨려 노력했다.

진득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화원 밖으로 나오니 눈에 보이는 세상이 모두 색을 잃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모여든 사람들의 목소리도 물속에서 떠드는 것처럼 웅웅―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고 잿빛 거리는 사막 위의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초점이 제대로 맞춰지지 않는다.

두근. 두근. 두근.

두려움일까, 분노일까. 나 스스로도 명확하게 판단 내릴 수 없는 감정이 몸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발견했다. 무채색 향연 가운데에 홀로 붉은빛을 띠고 있는 세레즈를.

그는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손짓했다.

‘불쌍한 이벨린, 많이 두렵니? 내 품으로 오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제멋대로 떠들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죽어. 네 옆에 있는 놈도, 너와 인연이 닿았던 모든 것들이 다.’

“세레즈!!”

죽여! 죽여야 해. 저 새끼를 내가 죽여야지만 이 처참하고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어! 세레즈를 죽여야 비로소 모든 게 끝나! 반드시 내 손으로!

숨이 목 끝까지 턱턱 차올랐다. 호흡이 제멋대로 튀어 나가고 눈은 보이지도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피에 푹 젖은 남자의 식칼을 줍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가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피 웅덩이 위를 한 번 굴렀다.

“꺄악! 저 사람 왜 저래?!”

“누가 좀 말려봐요!”

바닥을 더듬어 날카로운 금속의 감촉을 찾아내었다. 서둘러 무릎을 세워 일어났다. 분명히 피 웅덩이에서 식칼을 꺼내 들었는데 자꾸만 피가 흘러내렸다.

“이벨린! 정신 차려!!”

“죽여야 돼. 내가 저 새끼를 죽여야 끝나. 안 그럼 다 죽어.”

“손에 힘 풀어. 그거 당장 놓으라고! 씨발 진짜, 이러다 네 손 썰리겠어! 이벨린!”

팔꿈치 밑으로 떨어지고 있는 피는 내 것이었다. 칼날을 쥔 내 손바닥에서부터 흘러나온 피.

상관없었다. 세레즈를 죽이는 데에 손 하나 불구 되는 것 정도면 양호하다.

다시 세레즈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내 옆으로 살짝 빗겨나가 있었다. 옆에선 레드릭이 내 손에서 칼을 어떻게든 떨어뜨려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레즈의 입매가 차갑게 굳어 내렸다. 그의 소름 끼치는 무표정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다.

“안 돼…….”

세레즈는 다시 나를 보더니 전조도 없이 뒤를 돌아 인파들 사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멈춰, 안 돼!

쫓아가야 한다. 또 무슨 짓을 벌이기 전에 여기서 저놈 목을 따놔야 돼.

“꺄악!”

비틀. 비틀.

분명히 제대로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가 자꾸만 내 몸에 부딪혔다. 세레즈는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데 나는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이벨린, 정신 차리라고. 이벨린!”

어느 순간 먹구름 낀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레드릭의 얼굴이 덧씌워진다. 녀석이 입을 크게 벌려가며 나한테 뭐라고 소리치고 있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사실 듣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오늘 세레즈를 죽이는 것에 실패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 * *

넌 취미도 없니?

혹자가 주말 내내 도서관에만 틀어박혀 있던 나에게 물었다.

취미. 나에게 취미랄 게 있는가. 별거 아닌 질문인데 그날따라 세계의 미스터리한 난제처럼 밀려왔다.

지금 당장 취미라고 떠올릴 만한 게 없으면 다른 사람들은 어떤 것을 취미로 삼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우선 요리. 그건 나한텐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야. 그렇다면 오페라 감상은? 비싼 티켓값과 공연 시간 내내 멀뚱히 앉아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무척 아까워 죽겠어. 전혀 즐길 수 없다는 뜻이지.

좋아. 운동은 어때? 음. 시간에 쫓겨서 매일 뜀박질하게 만드는 그거라면 절대 아니. 꽃꽂이나 모형 조립하기, 인형 모으기, 쇼핑하기는? 전부 땡땡땡. 다 비싼 돈 주고 해야 하는 것들인데 내가 마음 놓고 즐길 수나 있겠어?

아하,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나는 지금 취미를 가질 여유 따위는 없는 것이다. 시간도 돈도 없는 나에겐 다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는 취미조차 허락되질 않는구나. 답을 찾았더니 이제 속이 시원하다!

자, 그럼 하나 더. 그렇다면 난 취미라는 것을 언제 마음 놓고 즐겨볼 수 있을까?

뻔하잖아. 세레즈로부터 벗어나게 된 이후부터지.

그런 날이 정말 올까? 그간 잠잠하던 세레즈가 다시 미친 방법으로 접근해 오는데 그게 가능이나 할까?

그러니까 빨리 돈을 모아야 해. 지금보다 더 악착같이 벌어야만 해. 나만 알 수 있는 작은 섬을 사서 혼자 떠나자.

혼자?

응. 혼자.

정말 혼자여도 괜찮겠어, 이벨린?

* * *

몸이 부유하고 있었다.

나팔 부는 아기 천사들이 둥실둥실 그네를 태워주었다. 몸을 맡긴 채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데 괴팍한 나팔 소리가 신경을 긁어대었다.

‘뿌우! 삐익!’거리는 나팔 소리만 없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잠자리였을 텐데. “시끄러워. 그만 불어!” 소리쳐도 아기 천사들은 자신의 나팔 소리에 대한 프라이드가 대단한지 더욱 힘껏 불어댔다.

아니! 불지도 못하는 나팔을 왜 들고 다니는 거야?! 차라리 장식으로 써!

아기 천사는 배에 힘을 가득 주고 볼이 터져라 나팔을 불며 내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

지금 이거 해보자는 거지? 야! 갖고 와! 내가 더 잘 불겠다. 당장 이리로 가지…….

“…고 와!”

삐이―

뭔가 달랐다. 막혀있던 길을 뚫고 쉰 소리가 튀어나왔다. 칼칼한 느낌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었다.

“…….”

삐익!

나팔 소리가 또 들렸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내 숨소리만 겨우 들릴 정도로 주위가 조용했다.

아기 천사 놈들이 이제 포기했나?

잠시간 귀를 기울였으나 들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벨린! 괜찮아? 정신이 좀 들어?!”

빼액― 팽!

아, 또 나팔 소리.

저 신경을 거스르는 나팔의 주인을 찾아서 족쳐 놔야겠다는 생각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우거진 붉은 숲이었다.

삐이이익―!

나팔 소리와 함께 붉은 숲이 한 번 들썩이더니 익숙한 얼굴을 드러냈다.

“로즈?”

깜짝이야!

그녀는 손수건으로 자신의 코를 힘껏 풀어대며 펑펑 눈물을 쏟고 있었다.

패앵!

아, 저게 그 빌어먹을 소리였구나.

맥이 빠지며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나, 알아보겠어?”

“으응.”

목소리가 듣기 싫을 정도로 쩍쩍 갈라졌다.

“물! 여기 물 좀 줘.”

로즈가 내 머리를 받치고 입술에 컵을 대주었다. 미지근한 액체가 입가를 적시고 목구멍을 부드럽게 타고 흘러가니 살 것 같다는 표현이 절로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흐윽. 물도 제대로 못 마시는 것 좀 봐.”

로즈가 자신의 손수건으로 내 입가를 꼼꼼하게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축축하니. 너 아까 실컷 코 풀던 그거 아니야……?

당장 치우라고 몸부림치려는 찰나에 의원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만 했다. 의원들이 내 두 눈을 까뒤집고 입을 벌리게 한 뒤 맥까지 짚어본 다음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특별한 이상 없이 무사히 회복되신 것 같습니다. 자상이 깊어서 뼈가 드러날 정도였는데 다행히 신경을 건들진 않아서 최악의 상황만은 피했습니다. 정말 신께서 도우셨어요. 충분히 휴식을 취하시고 당분간 오른손은 사용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네, 고마워요.”

약 한 달간은 정기적으로 힐링을 받아야 한다기에 정해진 시간과 날짜에 맞춰서 의료실을 꼭 들르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런데 그 시간이 하필 아르바이트하는 시간과 겹친다. 젠장. 게다가 손이 이래서야 반죽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에휴. 벌써부터 걱정으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로즈, 나 좀 일으켜줘.”

얼마나 누워있었던 건지 몸에 힘도 잘 들어가지 않았을뿐더러 한 손밖에 사용을 못 하니 앉는 것조차 버거웠다. 로즈의 도움으로 상체를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데니안이랑 레드릭도 있었네.”

녀석들은 곧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침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문가에 서있었다.

“왜 거기 있어?”

“자제 못 하고 안겨들까 봐. 혹시나 우리가 잘못 건드려서 상처가 터지면 어떻게 해.”

푸하!

배려가 깃든 엉뚱한 고민에 웃음이 터져 나와 버렸다.

“왜 웃어! 우리는 진지하단 말이야!”

“아픈 사람은 웃지도 못하냐?”

“…그건 아니지만.”

데니안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 얼마나 누워있었던 거야?”

“이틀.”

“이트을?! 맙소사! 수업은 어떻게 됐어?! 내 학점 어떻게 해!”

머리가 번쩍 튀었다. 결석은 학점에 무척이나 치명적이다. 아무리 내용 증빙이 되는 병결이라 하여도 동일한 점수대의 학생이 있으면 병결이 없는 학생을 A+ 주지 있는 학생을 A+ 주지 않는다. 결석만큼은 반드시 피하고자 열이 40도가 넘는 날에도 네발로 기어서 강의실에 들어갔던 나였다.

그런데 무려 이틀이나 결석해 버리다니! 환장할 노릇이네, 진짜!

“지금 학점이 중요해?!”

“어! 나한테는 그게 제일 중요해!”

“1등 못 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냐?”

“그 귀신보다 내가 더 간절할걸!”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려니 켁켁 기침이 나왔다.

그사이 레드릭이 나와 데니안 사이를 막고 섰다.

“이벨린.”

“케헥, 응?”

아이고, 목이야. 따끔거리는 목을 주무르며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목 위를 손으로 꾹꾹 누른 후 물까지 마신 다음에야 겨우 진정되었는데 그동안 레드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불렀으면 말을 해.”

“…아니야. 나중에 따로 얘기 좀 해.”

레드릭이 복잡한 눈을 하고선 “쉬어.”라고 짧은 인사를 건네고 나가 버린다.

“야, 레드릭!”

데니안이 그를 다시 불러 세웠지만 레드릭은 돌아오지 않았다.

레드릭이 왜 저러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멀쩡히 부엽토를 사러 갔던 내가 대뜸 피를 뒤집어쓰고 죽이네 마네 하면서 난리를 떨었으니 적잖이 충격받았을 테지.

그러나 내가 한 행동에 대하여 일일이 해명하고 그를 달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만약 레드릭이 내가 왜 그랬는지 끈질기게 추궁한다면 어려서부터 정신병이 있었다고 둘러대면 되겠지. 악귀가 보이는 질 나쁜 정신병이.

“데니안, 난 괜찮으니까 레드릭한테 가봐.”

“됐어. 네가 무사히 일어난 걸 보고 안심돼서 몰래 질질 짜러 간 게 분명해. 괴한으로부터 널 지키지 못해서 자책하는 거라고.”

괴한?

내가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그래, 확실히 괴한이었긴 하지. 데니안이 말하는 괴한과 조금 차이가 있다면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한 것일 뿐, 나에겐 가벼운 타박상 하나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오른손의 상처는 순전히 나 혼자 칼을 잡고 난동 부리다가 생겨난 것이라는 걸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내가 곤란한 질문에 피곤해하지 않도록 레드릭이 나를 배려하여 둘러댄 것이 틀림없었다.

“조용히 쉬고 싶어서 그래.”

데니안이 꺼림칙한 눈으로 로즈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정말 로즈만 있어도 괜찮겠어? 하는 의미였다.

내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데니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나는 이만 빠져줄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불러. 아무 일도 없으면 부르지 말라는 소린 아니야.”

데니안도 나가 버리니 순식간에 의료실이 휑하니 비어버렸다. 먹은 게 없어서 그런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신을 다잡기 위해 천천히 의료실 안을 둘러보다가 작은 협탁 위에 꽃다발이 하나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혹시 그 녀석이 가져다 놓은 건가 해서 로즈에게 물었는데 들리는 이름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폴이?”

“너 피떡이 된 채로 데니안한테 업혀 오고 나서 소문을 듣고 폴이 찾아왔어. 꽤 충격 먹은 표정이더라. 지금은 아무 사이 아니더라도 예전 여자 친구였는데… 폴도 엄청 놀랐을 거야. 치료가 다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앉아있다가 나갔어. 네가 잠들어있는 사이에 저렇게 꽃다발도 사다 놓고.”

“별일이네.”

로즈가 은근하게 눈을 빛냈다.

“이제라도 다시 잘해 보려는 거 아닐까?”

“나랑 연애하면 자주 만나지도 못할 텐데. 퍽이나.”

“아르모네 씨앗도 폴이 준 거라며. 너랑 같은 조라고 하니까 냉큼 구해다 줬다는데?”

“끼워 맞추지 마. 원래 데니안이랑 친했다고 하잖아. 정말 만에 하나 폴이 그런 마음이라고 하더라도 난 연애 같은 거 할 생각 없으니까 부추기지 말고.”

“치, 시시하긴.”

침대 옆에 나있는 창문의 커튼을 슬쩍 들어 올렸다. 하늘은 지나치게 푸르렀다.

“저, 로즈.”

내 안색을 살피고 있던 로즈가 곧바로 대답했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는데… 입술을 몇 번 들썩이다가 겨우 뱉어냈다.

“여기에 또 다른 사람은 온 적 없어?”

“다른 사람이라니?”

“뭐… 애쉬 카인드로퍼라든가.”

“아! 왔었지. 걔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

“혹시 걔가 나 쓰러진 직후의 모습을 봤어?”

제발 애쉬가 보지 않았기를 바랐다. 다른 사람은 다 보더라도 애쉬에게만은 그런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 바람은 로즈의 말 한마디로 가볍게 부서져 내렸다.

“데니안 다음으로 아카데미 내에서 가장 먼저 봤을걸.”

“…….”

“데니안이 의료실 침대에 널 내려놓자마자 네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부르면서 울고불고. 어휴, 피 칠한 네 몸에 들러붙어서는 제발 눈 한 번만 떠달라고 애원하더라. 그 모습이 너무 절절해서 가슴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그리고?”

“그 이후론 진짜 전쟁이라도 난 게 아닌가 싶었어. 아니, 전쟁 통도 그때보다는 평화로웠을 거야. 의원들이 들어오자마자 애쉬가 멱살을 틀어잡고 못 살리면 다들 죽여버릴 거라고 얼마나 무섭게 소리를 쳐대는지 완전히 딴 사람 같았어!”

로즈가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몸을 설레 털어버렸다.

“의원들이 온 힘을 짜내서 힐링을 퍼붓는데도 네가 정신을 못 차리니까 애쉬 카인드로퍼는 급기야 폭발. 온갖 재해가 우리 아카데미 안을 다 휩쓸고 갔던 것 같아. 지진이며 태풍, 온갖 새들이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자살해 대지……. 그런데 신기한 건 딱 네가 있는 이 건물만 고요하더라니까. 그게 불과 이틀 전의 일이야.”

로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허무맹랑한 괴담도 이것보다는 현실성 있어 보인다. 그러나 로즈의 안색이 진실로 겁에 질린 사람처럼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애쉬는 어떻게 됐는데?”

“황성에 잡혀 들어갔어. 아카데미 안에서만 몰아쳤던 기이한 자연재해는 마법 실험 중에 아티팩트 하나를 잘못 건드려서 일어난 사고라고 일단락됐고. 애쉬는 지금 마탑에 갇혀 있다는데, 애쉬 카인드로퍼 한 명을 제어하는 데에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이 애를 먹고 있나 봐. 애쉬가 그 정도로 강한 마법사인 줄은 정말 몰랐어. 마치 인간들을 징벌하는 신… 같았다니까.”

“오버하기는.”

“오버 아니야!”

펄쩍 뛰는 로즈를 뒤로하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꾸욱 눌렀다. 억울해하던 로즈가 놀란 토끼처럼 폴짝 뛰어서 내 옆에 다가와 섰다.

“어디 아파?”

“아니야. 그냥 머리가 조금 복잡해서 그래.”

“…내가 괜한 말을 한 건가 봐.”

“알려줘서 고마워. 로즈, 그런데 애쉬한테 내가 깨어났다는 걸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켈스타니아 양한테 말하면 가능해. 마탑에 관한 얘기도 켈스타니아 양이 전해 준 거였거든.”

“로제타 공주가 왜?”

“음…….”

의외의 이름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니 정신을 못 차리겠다. 로즈가 검지로 입가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게, 왜 나한테 알려줬을까?”

반문하는 것을 보니 답을 듣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로즈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어 내니 로즈가 다급하게 변명을 시작했다.

“내가 무신경한 게 아니라, 그땐 너무 경황이 없어서 차마 그 생각까지는 못 했었어!”

“이해해.”

“네가 깨어났다는 이야기는 반드시 켈스타니아 양한테 전해 놓을게.”

대단한 중책을 떠안은 것처럼 로즈가 주먹을 쥐며 말했다.

이틀 내내 잠만 잤는데도 피로가 몰려온다. 하품을 뻐끔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본 로즈가 뭐라도 먹어야 한다면서 내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댔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잠들 일은 없을 것 같다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고집스러운 눈이 내 말을 믿을 것 같진 않아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애쉬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마음이 착잡해져 간다. 로즈 앞에선 태연한 척했지만 마탑에 갇혀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안 그래도 마음 약한 애가 내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녀석에게 뭐라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사실 아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다. 그냥 없던 일로 치부하고 싶을 뿐이다. 분노로 정신을 잃고 망가진 나라는 존재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적어도 애쉬에게만은.

“켈스타니아 양이 애쉬한테 네 이야기를 전하면… 애쉬는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오겠지?”

순간 로즈가 내 생각을 읽은 줄 알았다. 다 끝난 줄 알았던 애쉬 이야기가 또 튀어나올 줄이야.

“내 소식을 들어서가 아니라, 학점 때문에라도 곧 돌아오겠지.”

‘모든 사람이 이벨린같이 생각하지는 않아…….’라며 잔소리할 줄 알았는데 로즈는 입을 꾹 다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낯빛이 어두워서 혹시나 내가 잠든 사이에 또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로즈?”

“애쉬 카인드로퍼가 무서워졌어.”

“그 울보가?”

“네가 못 봐서 그래. 애쉬가 이곳에 있는 동안 난 어깨 한 번도 제대로 못 펴고 땅에 고개만 박고 있었어. 혹여나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대로 콱 목이 졸려서 죽을 것 같았다고.”

“그럴 일은 없었을 거야.”

“너는 몰라. 애쉬가 아카데미로 돌아올 거라는 사실이 너무 공포스러워.”

로즈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내 손을 잡았다. 로즈의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다.

“네가 애쉬와 가까이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

“진심으로 충고하는 거야. 애쉬 카인드로퍼는 위험해.”

* * *

로즈의 성화에 못 이겨 잘 넘어가지 않는 묽은 수프를 억지로 바닥까지 싹싹 긁어가며 다 먹은 뒤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차가운 어둠이 깊숙이 스며든 후였다. 타는 듯한 갈증으로 숨을 쉴 때마다 마른기침이 튀어나왔다. 비몽사몽한 정신에 시야도 완전히 어둠에 적응하지 않은 상태라 물잔 하나 찾는 것조차 버거웠다.

더듬더듬 협탁을 짚어가며 손끝에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닿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히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손가락 사이로 얽혀 들어갔다.

“선배, 잠깐만요.”

“애쉬? 읍…….”

커다란 손이 목 뒤에 파고들더니 살짝 들린 얼굴 위로 입술이 맞닿았다. 놀라서 벌어진 입술 틈을 타고 간절히 바랐던 물이 조금씩 스며들어 온다.

생명수를 받아먹는 것처럼 애쉬가 흘려보내 주는 물에 매달렸다. 혀를 집어넣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녀석의 입안을 샅샅이 훑기까지 하면서.

“더 줘.”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더욱 강하게 맞부딪쳤다. 마주 잡은 손이 얼얼할 정도로 애쉬가 마주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물이 이렇게 단 것이었나. 입을 통해 받아먹는 물에 약이라도 탄 건지 자꾸만 갈구하게 만들었다.

“더.”

나의 몇 번의 요구에도 애쉬는 거절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입술을 부딪쳐왔다.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컵에 남아있는 물이 없는지 다시 닿아온 입에선 받아 마실 게 없었으나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의 입속에 머물러 있었다.

질척하게 젖은 소리와 간헐적인 숨이 어둠에 덧입혀져 갔다. 곧 죽을 사람도 아닌데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뜨거운 숨결이 욕망을 숨기지 않고 짙은 향을 만들어냈다.

“하아, 선배. 제가 얼마나…….”

녀석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어 보았다. 붕대가 칭칭 감긴 손이라 녀석의 피부를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애쉬가 내 손에 뺨을 묵직하게 기대었다.

“언제 온 거야?”

사실 어떻게 온 거냐고 묻고 싶었다. 정말 마탑에 갇혀 있었는지도,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닌지도.

“만약 선배가 이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저도 따라 죽으려고 했어요.”

녀석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둠에 적응이 된 눈은 애쉬의 애처롭게 일그러진 얼굴을 거짓 없이 담아내었다.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붕대에 스며들어 가니 녀석이 이번엔 내 뺨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애쉬.”

“세계가 무너져도 선배가 쓰러진 것보다는 절망적이지 않을 거예요.”

“나 이제 괜찮아.”

“그날 제 심장은 터졌고 온몸의 피가 다 말라 버렸어요. 선배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몰랐던 아둔한 머리를 박살 내버리고 싶었어요. 제 두 눈으로 제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뇌수를 봐야만 할 것 같았다고요. 당신 없이 이제 와서 내가 어떻게 살라고 그런 꼴로 나타나. 제발 나한테 그러지 말아요, 제발.”

제발, 이벨린.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눈물을 쏟으며 내 품속으로 파고드는 애쉬를 보고 깨달았다. 이 아이와 내가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인간이 신의 뜻을 헤아릴 수 없고 민물고기가 바다의 크기를 감히 가늠할 수 없듯이 녀석이 나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내 마음으로는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우리의 감정에는 간극이 존재했다. 정도에 따른 아득히 먼 간극이.

“이렇게 멀쩡히 너랑 이야기하고 있잖아.”

“알려주세요. 괴한한테 습격당했다는 거짓말 말고요. 선배가 이틀 동안이나 깨어나지 못했던 것도 외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 원인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러니까 저한텐 숨길 생각 말고 전부 말해요. 섬으로 떠난다고 말하는 거나 이전에 기차역에서 세자르 로벤스디를 보고 동요하셨던 거, 그리고 자해하고 쓰러졌던 일까지 전부! 전 알아야겠어요.”

애쉬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무겁게 심장을 짓눌렀다.

“…기차역에서 세레즈를 봤어?”

“선배가 보고 있는 걸 제가 못 볼 리 없잖아요.”

모를 줄 알았다. 그때 당시에 애쉬는 세레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고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었다.

아니, 그뿐이던가. 어두운 그림자처럼 늘 내 뒤를 따라다녔던 ‘로벤스디 가문’에 대한 이야기도 애쉬는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었다.

녀석은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단지 모르는 척해 줬을 뿐.

나는 애쉬에게 어디까지 털어놓을 수 있을까.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로벤스디의 가주가 세레즈로 바뀌면서 혼외 자식이었던 내가 내쳐졌다는 것이다. 흔한 이야기다. 충분히 독식할 수 있는 가문의 지분을 이제껏 얼굴 한번 보지 못했던 배다른 동생에게 나눠 주기 싫은 것쯤이야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일이기도 하고, 실제 사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애쉬도 이 정도로만 알고 있겠지. 그 안에 숨겨진 더러운 비밀은 알지 못한 채로.

내 어머니의 죽음과 세레즈가 관련 있다는 것, 로벤스디 가문의 말썽쟁이 쌍둥이를 자살로 위장하여 살해한 것, 나의 아버지이자 세레즈의 아버지이기도 한 휴간트 로벤스디를 살해한 것, 가문의 고용인들과 함께 나를 학대, 감금하고 내치기는커녕 사이코처럼 집착한 것.

이 추악한 이야기들을 애쉬에게 전부 다 이야기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

갈등은 봄의 끝자락처럼 짧았다.

녀석을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다.

지금껏 보아온 애쉬의 성격상 자기 일보다 내 일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질 텐데 이 이야기들을 털어놓은 순간 녀석은 걷잡을 수도 없이 세레즈와 나 사이로 말려들고 말 것이다.

절대 그렇게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이다.

애쉬가 청량한 여름의 한가운데에 서있길 바란다. 제국사 점수 때문에 골치 아파하고, 바퀴벌레를 보면 무서워서 벌벌 떨기도 하고, 휴양지의 바닷가에선 마음 편히 물놀이도 하면서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제국의 막내 황자로 남아있길 바란다.

광기에 희생당한, 피로 얼룩진 늪에 빠져있는 건 나 혼자면 족하다.

생각이 명확해지고 나니 머리가 가벼워졌다. 심장은 아직도 철근에 짓눌리고 있는 것처럼 답답했지만 애쉬와의 재회가 너무도 급작스러워서 그런 것일 거다.

잡힌 손을 빼내어 천천히 애쉬의 뺨을 쓰다듬는데 피부에 맞닿는 녀석의 온기가 델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다. 환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나 자존심 센 거 너도 알잖아. 우연히 이복 오빠를 만나자마자 나를 저택에서 내쫓았던 일이 떠올라서 그랬어. 열받고, 자존심 상해서.”

“…….”

“섬으로 떠나겠다고 한 건 말이야, 돈 벌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 그랬어. 새벽 늦게까지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다가 해가 중천에 뜰 때에서야 겨우 잠에서 깨어나는 하루를 보내고 싶어서. 필연적으로 마주쳐야 하는 사람도 없고, 발 닿는 곳이 내 침대라도 되는 양 대자로 엎어져서 누워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장래 희망이 한량인 나에겐 꿈만 같은 곳이잖아.”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는 동안 애쉬는 내 품속에서 얼굴을 묻고 있기만 했다.

차라리 잘됐어. 지금 애쉬의 눈을 본다면 몇 번이나 같은 말이 버벅거리면서 튀어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네 말처럼 괴한한테 습격을 받은 게 아니야. 그놈이 내 앞에서 갑자기 자살한 거지. 눈앞에서 사람이 피를 뿜으면서 죽어가는데 누가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겠어. 그 사람이 자살하는 데 사용한 칼을 치워 버리려고 하다가 멍청하게 손도 다쳐버린 거고. 다 자존심이 세서 그랬어. 내 정신력이 그만큼 약하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거짓말한 거야. 그게 뭐라고.”

마지막 문장을 이야기할 때에는 자조적인 웃음을 섞었다. 내가 듣기에도 부끄러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어투였다.

“…나 선배 믿어요.”

“안 믿으려고 했다는 것처럼 들린다.”

“다른 사람들이 다 맞는다고 해도 선배가 아니라고 하면 전 선배 말을 믿을 거예요.”

“그래도 한번 고민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도 그냥 믿을게요. 선배는 저한테 거짓말하지 않을 거라는 걸 믿을게요.”

“…….”

“내일 당장 펜테리온이 지도상에서 사라질 거라고 해도, 여름에 눈이 온다고 해도, 제 이름이 애쉬 카인드로퍼가 아니었다고 말해도 그게 선배가 하는 얘기라면 무조건 다 믿을 거예요.”

“그건 더 이상 믿음의 범주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요, 선배.”

“으, 응.”

“방금 선배가 한 말은 왜 이렇게 믿고 싶지 않죠?”

“…….”

“어차피 전 믿는 것밖에 할 수 없지만 왜 자꾸 선배가 숨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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