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놈이 토라진 이유 (1)
고백에도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보다는 애쉬가 딱히 내 대답을 듣고자 안달하지 않았으므로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애쉬는 다른 의미에서 침울해져 있다. 과외를 할 때만큼은 눈을 빛내며 나한테 집중하다가도 책을 덮을 때가 되면 유독 심하게 칭얼대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방학이 곧 끝나가요, 선배.”
“저런, 안타깝구나.”
“시간이 흐르는 게 너무 끔찍해요. 이제 선배랑 단둘이서 이렇게 얼굴 보고 수업하는 것도 못 하게 되는 거잖아요.”
“내일 테스트 한 번 더 볼 거야. 마지막 테스트니까 첫 단원 내용 복습 제대로 하고 와.”
“선배… 공부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어요…….”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 오늘 저녁 메뉴는 뭘 먹을지, 사회 이슈나 제국 내 정세, 흥행하는 오페라 가수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도 싫어요. 선배는 조금도 아쉽지 않으세요?”
“그래도 어쩌겠어. 얼싸안고 엉엉 눈물이라도 터뜨려야 하나. 만약 그런다 하더라도 방학은 끝나, 애쉬.”
애쉬가 동심이 산산이 깨져버린 아이의 표정을 하고선 눈물을 글썽였다. 냉혈한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 테이블을 탁 치며 애쉬에게 “뚝!” 소리쳤다.
애쉬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악물고 코를 씰룩댔지만 차오르는 맑은 눈물방울은 의지를 배반한 채 볼 아래로 떨어져 갔다.
어휴. 이 모습이 한심한 게 아니라 안쓰러워 보이다니. 나도 문제다, 문제야.
“방학이 끝난다고 해서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
“…선배는 수업도 가실 테고, 과제도 있으실 테고, 친구들도 만나실 테고……. 전 뒷전으로 밀려나겠죠?”
“너도 수업, 과제, 친구가 있어.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애쉬.”
“달라요! 다르다구요. 전 언제나 선배가 일 순위인데.”
…언제부터. 따지고 보면 우리가 본격적으로 말문을 트게 된 시점은 이번 방학부터였다. 고작해야 두 달 남짓한 시간인데 마치 몇 년을 그래왔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우스웠다.
“알았어, 알았다고. 이제 그만 뚝 해. 종종 얼굴 보러 갈 테니까.”
“정말, 정말이죠? 저 진짜 맨날 선배만 기다릴 거예요.”
“그러진 말고.”
작게 이야기했으나 용케도 알아들은 애쉬가 더욱 울상을 지어 보였다. 망했네. 그를 달랠 생각으로 두 팔을 벌렸다. 애쉬가 기다렸다는 듯이 쪼르르 다가와 바닥에 무릎을 대고 내 가슴께에 얼굴을 비벼댔다.
“헤어지는 거 싫어요, 선배.”
“누가 보면 나 타국으로 유학 가는 줄 알겠다.”
“저도 따라갈 거예요.”
이 말이 나올 줄 알았지. 비벼대는 녀석의 머리를 얌전히 쓰다듬어 주다가 어느 정도 울음이 멎을 즈음 머리에서 녀석의 어깨로 손을 내렸다.
“자, 이제 그만 진정하고 자리로 돌아가.”
“…못 가요.”
“애쉬.”
“갈 수 없어요, 선배.”
“왜 이렇게 애같이 굴어.”
유독 끈질기게 달라붙는 탓에 조금 엄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움찔이라도 했을 텐데도 애쉬는 요지부동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였다. 하는 수 없이 잡고 있던 애쉬의 어깨를 강제로 밀었다.
“아아! 아파요!”
“……?”
녀석이 머리를,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내 가슴께에 닿아있는 머리카락 부근을 부여잡으며 고통 어린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내 옷이 밀어내는 녀석의 머리를 따라서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머리가 꼈어요, 선배.”
가지가지 한다, 정말!
“아, 선배. 너무 당기시면…….”
“가만히 있어봐. 뭐가 좀 보여야 풀 거 아니야.”
셔츠 단추에 금발의 머리칼이 넝쿨처럼 칭칭 얽혀있었다. 이것을 빼내려고 요리조리 돌리고, 잡아당겨 봐도 오히려 더 얽히기만 할 뿐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를 어쩐담.
“그냥 자르세요.”
애쉬가 결연하게 이야기했다. 두피와 바짝 붙어 있는지라 만약 애쉬의 머리칼을 자르면 마치 땜빵이라도 생긴 것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것을 풀어보려 부단히 애썼으나 아프다고 외쳐대는 애쉬의 목소리만 높아질 뿐이었다.
“아파요, 선배.”
하는 수 없이 가슴에 애쉬를 달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가위를 들었다. 싹둑. 한 번의 가위질에 애쉬가 떨어졌다. 안 그래도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으로 뭉쳐있으니 폭탄이라도 맞은 듯한 모양새였다.
“선배, 옷이…….”
애쉬가 놀란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단추쯤이야 다시 달면 돼.”
애쉬의 머리칼 대신 단추를 잘라버렸다. 가슴 앞섶이 벌어졌지만 이미 볼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에 민망함은 적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선배, 저 지금 또 반한 것 같아요.”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녀석의 사고는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늘 엉뚱한 방향에서 튀어 올랐다. 애쉬가 감동 어린 목소리로 “선배…….” 하며 부르는 것이 왠지 섬뜩한 기시감으로 다가왔다.
“동상 세우면 죽는다.”
“…….”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나 보다.
“이리 와 앉아봐. 안 되겠어.”
애쉬는 말 잘 듣는 영특한 대형 견처럼 성큼성큼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저놈의 머리, 오늘 내가 사달을 내버려야지.
애쉬의 엉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니 녀석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아직도 애쉬의 머리카락에 얽혀있는 단추를 가위로 조금씩 잘라내고 손으로 풀어 떼어내었다.
“머리 잘라 주시게요?”
“싫어?”
“선배가 해주시는데 싫을 리가요.”
만져주시는 거 기분 좋아요.
애쉬가 들뜬 목소리로 얘기했다.
남의 머리를 잘 자를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은 없었지만 저놈의 더벅머리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냥 길이만 짧게 다듬는다 생각하고 가위를 들어 망설임 없이 녀석의 눈부신 금발을 잘라냈다. 사각. 머리카락이 떨어져 간다.
어느 정도 바닥에 소복이 쌓일 즈음엔 조금 더 대담해져 열심히 가위질했다. 녀석은 제 머리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에 대한 건 아무래도 좋은지 그저 내 손에 가만히 머리를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머리숱이 많고 길면 쥬디퍼 황자님께도 좀 나눠 주지 그래.”
“아아, 형님 머리.”
애쉬는 이제야 떠올랐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쥬디퍼 황자는 하루하루 벗겨진 머리 때문에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텐데…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선배가 걱정하니까 더 되돌려놓기 싫어지네.”
“걱정이 아니라 동정이야.”
“뭐든 저 말고 다른 것들이 선배의 관심을 받는 게 싫어요.”
“황송해야 하는 거냐?”
“선배.”
애쉬의 목소리가 부루퉁해졌다.
“알았어, 알았어.”
적당히 맞장구쳐준 후 머리 자르는 것에 집중했다. 한동안 대화가 없었다는 것도 잊을 만큼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길었던 머리가 짧아지고 녀석의 하얗고 매끈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가 내가 보기에도 꽤 그럴싸했다.
탁.
테이블 위에 가위를 내려놓고 피부와 옷 위로 쏟아진 머리를 툴툴 털어주었다.
“나 봐봐.”
애쉬가 일어서서 스스로 몸을 조금 털더니 이내 반듯하게 미소 지으며 어때요? 물어왔다.
“어…….”
잘생겼네, 많이.
온통 머리 모양에만 신경 쓰느라 애쉬의 얼굴이 드러나는 줄도 몰랐다. 녀석의 외모는 위험할 정도로 빛났다. 날렵한 선들과 유려한 이목구비가 가림막도 없이 드러나는 것이 몹시도 치명적이었다.
마치 저 녀석 혼자만 다른 차원의 존재가 아닐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사실 머리카락을 그토록 길렀던 건 이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의 외모를 조금이나마 숨기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괜한 짓을 한 걸까.
“머리가 가벼워져서 이상해요. 저, 별로예요?”
녀석은 진심으로 자신의 상태가 괜찮은지에 대해 재차 물어오고 있었다.
“…나나 되니까 너랑 이렇게 어울려주는 거야.”
왜 이런 비뚠 말이 나갔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상태로 밖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시선만 마주치면 금방 심장을 두근거릴 사람이 널리고 깔렸을 텐데.
애쉬는 내 말에 공감하며, 그리고 정말 감사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마워요, 선배. 전 정말로 선배밖에 없어요.”
마음 한구석이 따끔한 통증을 일으켰다.
* * *
애쉬의 간절한 애원에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갔고 어느덧 방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날도 단 하루를 남겨놓은 시점이 되어버렸다. 집으로 돌아갔던 학생들이 하나둘 기숙사로 들어오니 고즈넉했던 밤의 기숙사가 재회의 재잘거림으로 수다스러워졌다.
로즈가 돌아왔다.
하나로 묶어서 틀어 올린 굵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로즈의 작은 얼굴보다 더 거대하여 보는 내 목덜미가 묵직하게 아파왔다.
혹여나 로즈의 목이 불시에 꺾여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으나 로즈는 그 큰 머리카락을 이고도 싱글벙글 웃으며 나에게 안겨왔다.
“보고 싶었어, 이벨린……!”
“방학을 제대로 보냈나 봐, 피부가 새카맣게 탔잖아.”
“그 정도로 많이 탔어? 이번 방학은 다른 때보다 유독 여행을 많이 다니긴 했는데……. 아! 레일블루의 바다는 정말 아름다웠어! 나도, 로이 씨도 평생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니까.”
“그곳에서 살게 되면 주방장은 꼭 새로 구인해.”
“얘는 참. 맞다, 웨일턴의 내 별장은 어땠어? 혹시 특별한 일이 있었다거나 그런 건 없었어?”
로즈가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특별한 일… 있기야 있었지. 애쉬랑 거사를 치르게 된 까무러칠 만한 일이. 그러나 로즈에게 그 ‘특별한 일’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로즈에게서 무성욕자가 아니냐며 질타받던 내가 방학 기간 동안 제국의 막내 황자님의 동정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는 절대.
“좋더라. 고마워, 덕분에 기분 전환이 됐어.”
“음… 그것뿐이야?”
“뭐가 더 필요해?”
로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바라보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니, 이벨린 네가 잘 쉬었다면 그걸로 됐어.”
설마 애쉬와의 일을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어떻게…….
로즈는 나에게 줄 기념품이 잔뜩 있다며 가방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기념품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로즈의 수상쩍은 반응에 찝찝함이 불쾌하도록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지 다시 물어봐 볼까.
그러나 이미 지나가 버린 화제를 다시 끄집어내기에는 이미 로즈가 풀어놓은 기념품들이 너무 많았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해 버린 뒤였다.
어느덧 기념품들이 방 안을 가득 채우다 못해 내 양팔 위까지 가득 쌓일 즈음 로즈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아차, 이벨린. 정문에 황금상이 하나 생겼던데… 처음엔 잘못 본 건가 했어. 그런데 이름이나 얼굴이 아무리 봐도 너 같은…….”
와르르.
위태롭게 감싸 안고 있던 기념품들이 처량하게 아래로 떨어져 갔다. 다행히 깨질 만한 것들은 없었다.
“하, 시팔.”
“이벨린? 갑자기 과도는 왜 꺼내 들고……. 엇, 어디 가는 거야? 아직 한참 남았는데, 이벨린!”
내가 미쳤지. 개강하기 전에는 어떻게든 그것을 없애 버렸어야 했는데. 애쉬에게 정신이 팔려있다 보니 완전히 그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아니, 익숙하게 여기고 있었다. 내일이면 더 많은 학생이 기숙사로 돌아올 것이다. 수치사하기 전에 오늘 밤에는 반드시 그것을 없애버리고 말리라.
그러나 내 계획을 한발 앞서 눈치라도 챈 건지 경비병들의 수는 배로 늘어나 있었다.
그 영양가 없고, 명예롭지 않은 황금상의 경비를 강화하긴 왜 강화하냔 말이야!
이미 내 얼굴을 알고 있는 경비들 중 몇이 내가 과도를 들고 황금상을 향해 전력 질주하자 가볍게 내 몸을 제압하여 끌고 나갔다.
“이것들아!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좀 지우게 해줘!”
내 처절한 외침은 그들에게 있어 소리 없는 아우성이나 마찬가지였다.
* * *
어김없이 새 학기가 시작됐다.
각자의 설렘과 포부를 가지고 아카데미에 들어선 학생들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이질적으로 질린 낯을 하고 섰다. 왜냐면―
“이야! 애쉬 카인드로퍼에게 밥값을 무려 30루덴이나 쾌척한 이벨린 로벤스디 아니야? 이거 이거, 만나 뵙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닥쳐.”
기숙사 밖으로 나간 시점부터 수업이 모두 끝나 다시 돌아갈 때까지 이 조롱을 듣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교, 친분 따위의 인간관계 형성에 무척이나 비협조적인 나에게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몰린 적은 처음이었다.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내뱉으면서.
개중 몇은 나의 냉랭한 반응에 멋쩍어하며 돌아갔으나 지금처럼 끈질기게 놀려대는 놈들도 더러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깐죽거리는 이 기름칠한 갈색 머리 놈이 가장 집요하다.
이름이 뭐였더라……. 렌딧?
“나도 언제쯤 너한테 밥 한번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런데 30루덴짜리 식사가 있긴 해? 도대체 그 귀하신 황자님께 어떤 식사를 대접한 거야?”
“궁금하면 그 황자님한테 직접 물어봐.”
“황자님한테 말 붙이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그놈이 물러 보이긴 해도 조금만 친해지려고 다가가면 그때부터 위압감이 장난 아니라니까. 살살 웃으면서 들러붙는 애들 쳐내는 말투가 엄청 살벌해. 누가 귀하신 핏줄 아니랄까 봐.”
“애쉬가? 그건 네놈 열등감에서 나오는 편견이겠지.”
렌딧이 펄쩍 뛰며 항의했다.
“아니야! 애쉬 카인드로퍼가 신의 총애를 받는 건 아닌가 할 정도로 잘난 건 사실이긴 해도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는다고! 너무 높은 산은 오를 생각도 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튼, 열등감에서 나오는 편견이 아니라 애쉬 카인드로퍼는 진짜…….”
“됐어. 여기서 너랑 의미 없는 토론을 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호수에 있는 금붕어 밥이나 주지 그래, 배고프면 너도 좀 주워 먹고.”
양팔까지 써가면서 억울함을 토로하던 렌딧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내 앞을 막아섰다.
뭐야, 안 비켜?
“어우,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어차피 할 일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우리 교수님들이 하나같이 고지식하긴 하지만 개강 첫날에 과제를 낼 정도로 꽉 막히진 않았는데……. 설마 벌써부터 시험공부를 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아무리 수석이라고 해도…….”
“맞아. 시험공부 해야 돼.”
“그러지 말고 밥이나 같이 먹자. 나도 그 30루덴의 식사 대접 좀 받아보자. 싫으면 뭐, 내가 끝내주는 레스토랑에 데려가 주는 거로 바꿔도 되고.”
‘오늘의 메뉴’의 30루덴짜리 밥이 그렇게나 먹고 싶을까.
끈질기게 달라붙는 렌딧을 향해 손사래를 친 후 몸을 돌렸다. 녀석은 포기하지 않고 내 옆을 졸졸 따라붙으며 귀찮게 굴었다.
아우, 한 대 쳐줄까 보다.
실은 곧 베이커리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대외적으로 아르바이트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이 거머리 같은 녀석을 떼어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로벤스디 가문에서 버려진 것도 뭇사람들의 동정과 더불어 비웃음을 사고 있는데 하물며 황립 아카데미에 다니는 공작 영애가 서민들이나 하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온갖 가십거리에 치이다 못 해 종내에는 베이커리를 관두게 되는 끔찍한 사태까지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눈치가 없어? 지금 나는 너랑 같이 있기 싫다고 티를 내고 있잖아. 30루덴짜리 식사는 아카데미 정문에서 바로 보이는 화원 옆 샛길 안의 허름한 레스토랑에서 팔아. 가서 맛을 보든 요리를 배우든 뒤지든 알아서 하라고.”
렌딧이 푸핫!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모습에 내 표정은 숨길 수 없이 일그러져갔다.
“너야말로 눈치가 없는 거 아니야? 내가 정말 고작 그 30루덴짜리 밥을 먹으려고…….”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렌딧의 목소리가 완전히 묻혀버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차라리 잘됐다 싶어서 서둘러 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다가 렌딧에게 손목이 붙잡힌 순간 진심으로 짜증이 나서 얼굴을 와락 구겼다.
“벌써 가게? 나 아직 말 안 끝났는데.”
“끈질긴 새끼.”
“영광인걸.”
잡힌 손목을 털어내려고 하는데 일순 내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생겼다. 본능적으로 위를 바라보니 시원하게 드러난 유려한 이목구비가 보였다.
애쉬다. 방학 내내 질리도록 봤을 얼굴인데 조금 생소하게 느껴졌다. 머리가 짧아진 탓에 그런 것은 아니었고 조금… 화나 보인달까.
퍼억.
애쉬가 렌딧의 손을 잡아 뜯듯이 떨쳐냈다. 렌딧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욱신거리는 손목을 부여잡으며 애쉬를 보았다.
“선배, 오늘 저 처음 봐주시는 거 알아요?”
녀석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 오늘 선배가 기숙사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당장 안겨들고 싶은 것도 꾹 참았는데. 웬 이상한 놈이 선배 손이나 붙잡고 있고.”
듣고 있던 렌딧이 욱하여 “이봐” 했지만 애쉬는 대꾸하지 않았다. 애쉬는 한 번 내리 참듯이 호흡을 가다듬고는 얘기했다.
“…저 많이 서운해요, 선배.”
애쉬의 손끝이 움찔거린다. 녀석이 상처받은 얼굴로 처연하게 나를 내려다보는데 그 시선이 너무도 서글픈 것이라 내 마음이 콕콕 찔리는 통증을 일으켰다.
조금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애쉬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슬퍼하는지에 대한 타당한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녀석이 그런 감정을 나 때문에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형용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싸여들었다.
“애쉬.”
부르며 다정하게 안아 줘야겠다…라고 생각할 즈음,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벨린 로벤스디랑 언제부터 저런 사이가 된 거야?”
“황자 스캔들이다. 맙소사, 로벤스디 영애랑? 믿을 수 없어!”
황자 스캔들. 애쉬. 그리고 로벤스디.
가십거리 만들기 좋아하는 목마른 눈들이 나와 애쉬를 향해 있었다. 애쉬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눈치이나 나는 아니다. 신경 쓰여 미치겠네!
내 이름 뒤에 붙은 ‘로벤스디’라는 성이 애쉬와 엮이는 걸 바라지 않고 그로 인해 세레즈의 귀에 애쉬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 싶다.
게다가 난 때가 되면 모습을 감추고 홀연히 떠나버릴 몸이다. 아무도, 세레즈도 찾지 못하는 외딴 섬으로. 그러니 애쉬와 내가 엮이는 건, 그의 기억에 내 흔적이 남는 건… 싫다.
애쉬와 함께 방학을 보내는 동안에, 아니 어제까지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였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듯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칼날이 되어 이상과의 경계를 구분 지었다.
움찔.
애쉬를 향해 벌려지던 팔이 허공에서 멈췄다. 애쉬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난 어색하지 않게 손을 거둬들이지 않고 녀석의 등을 짝!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방학 때 빌려 간 책은 내일 돌려줄게! 그렇게 아끼는 건 줄 몰랐네. 이렇게 찾아오기까지 하고.”
“…….”
“안 더럽히고 깨끗하게 잘 읽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애쉬.”
“…선배.”
“그럼 난 배 아파서 먼저 가봐야겠다. 사실 아까부터 참고 있었거든.”
애쉬가 뻗은 손보다 내가 물러서는 것이 더 빨랐다. 렌딧이 뒤에서 얄궂게 웃고 있는 것이 불쾌하여 욕이라도 쏟아부어 줄까 고민했다.
그러나 앞에 선 애쉬의 얼굴이 너무도 비참하게 일그러져 있었기에 욱하던 마음도 바다 밑으로 쓸려 내려가 버렸다. 녹록히 젖은 심장을 겨우 붙잡고 등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단정하게 잘린 애쉬의 머리칼이 예뻤다. 그의 드러난 얼굴이 무척이나 고혹적이고 아름다워서 절로 감탄 어린 찬사를 내뱉고 싶었다. 칭찬해 주고 싶었다. 누가 잘라줬기에 이렇게 예쁘게 변해서 온 거냐고. 그러면 애쉬가 웃으며 “선배요.” 하는 수줍은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둘만 남아있었던 방학은 끝났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아카데미 안에는 세 가지의 화젯거리가 식을 줄 모르고 열기를 더해 갔는데 첫 번째는 정문 앞에 떡하니 놓인 ‘이벨린 황금상’이었고, 두 번째는 애쉬의 바뀐 헤어스타일, 세 번째는 로제타 공주의 편입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핫한 이슈는 바로 애쉬의 바뀐 헤어스타일이다. 애쉬는 삽시간에 아카데미 내의 나아가 펜테리온의 공식적인 대표 미남(이전에는 이목구비 확인이 어려웠으므로 비공식적 미남이었다.)으로 명명되었다. 애쉬의 행동은 머리카락이 잘리기 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으나 녀석을 대놓고 쫓아다니는 귀족 영애들이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일전에 빌려 가지도 않은 책을 돌려주겠다며 자리를 황급히 벗어난 것에 대해 애쉬에게 해명이라도 하고 싶은데 감시관처럼 따라붙는 영애들 때문에 접근 자체가 어려웠다.
학생들에게 둘러싸인 애쉬를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30루덴. 약학 조별 과제 나랑 같이 하는 거다?”
“너 이름이…….”
“데니안.”
“아, 그래. 데니안, 그런데 조별 과제를 왜 너랑 같이 해야 하는 거지?”
정원의 벤치에 앉아서 명화와 같은 애쉬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는데 웬 껄렁껄렁한 놈이 와이셔츠 단추를 세 개나 풀어헤친 채로 내 옆자리를 점령했다.
“그야 넌 머리가 좋고, 난 교수에게 예쁨받고 있으니까.”
“그 바위 같은 헴멜 교수한테?”
“그렇지.”
데니안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내일 당장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헴멜 교수는 거름의 비율이 어떠니 하면서 고지식한 말을 내뱉을 것만 같은 무감정한 사람이었다. 약초 말고는 도무지 아무 관심도 없는 무기질 그 자체. 그런 헴멜 교수가 마음에 들어 하는 애제자라니 귀가 솔깃 움직였다.
“그런데 네가 헴멜 교수의 귀염둥이라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믿지?”
“저번 학기에도 시험을 죽 쒔는데 A+는 아니더라도 A까지는 받았어. 나보다 약재 실습을 더 잘한 동기는 B에 그쳤지만. 자, 어때. 이런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A+는 우습지도 않겠지?”
확실히 그렇다. 나는 못 하면 되게 하라, 라는 신조로 무식하게 교과서를 달달 외우는 편이라 이론적으로는 약학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지만 실습만 들어가면 번번이 사소한 실수를 내고 말았다.
그런데 저 녀석의 애제자 버프로 그 실수가 무마된다고 치면 나에게도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좋아. 그런데 조별 과제는 최소 네 명이 해야 하잖아. 참고로 나는 아는 사람이 없어. 로즈 프로와즈 말고는.”
“마지막 한 명은 내가 구해 볼게. 마침 딱 맞는 녀석이 떠올랐거든. 그놈은 배합의 천재라고.”
“신용은 안 가지만 알았어.”
로즈는 어리벙벙하긴 해도 시키는 일은 곧잘 하는 편이었고 데니안 저놈은 말했듯이 특SS급 버프를 소지하고 있으니 양팔 벌려 환영할 인재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놈은 그냥 머릿수 맞추는 정도로만 생각하지 뭐.
의도치 않게 데니안과 약학 조별 과제에 대해 한참을 떠들던 와중에 문득 옆얼굴이 따갑다는 생각을 했다. 고개를 돌리니 애쉬가 냉랭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 또 이런 상황…….
불편한 기시감이 들었다. 우리 둘의 시선이 왁자지껄한 가운데에 적막처럼 내리꽂혔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나였다. 영애들이 슬슬 애쉬의 시선을 따라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 수업 시간에 하자, 데니안.”
“벌써? 뭐, 그래. 시간은 많으니까. 너랑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 이벨린.”
데니안을 지나쳐 기숙사 쪽으로 걸었다. 걷는 내내 뒤통수가 따끔거려 왔다.
<그놈을 책임져야 하는 이유>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