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그놈이랑 가까워진 이유 (3) (9/42)

5. 그놈이랑 가까워진 이유 (3)

한결 누그러진 태양 빛임에도 목과 등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황량한 공터에 쭈그려 앉아 긴 나뭇가지를 흙바닥 위에 끄적였다.

드류에드, 포르칸, 자폴리아타…….

먼바다 건너에 있는 수많은 섬의 이름들이 공터를 빽빽하게 채워갔다.

그것만으로도 벅찼다.

이 감옥에서 탈출한 뒤 갈 수 있는 곳이 이렇게나 많다니. 써 내려간 섬의 이름들 중 몇 개는 순전히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아니, 실은 대부분이 그렇다.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보잘것없는 작고도 초라한 나만의 천국이었으니… 이름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이벨린.”

소름 끼치는 음성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놓쳐버렸다. 검은 구둣발이 적어놓은 섬 이름들을 차례차례 짓밟으며 다가온다. 머리 위까지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또 이름 짓기 놀이를 하고 있었던 거니?”

검은 구두가 ‘안트라스’를 벅벅 비비며 지워버렸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섬이었는데.

일자로 다물린 입술을 억지로 끌어 올리며 세레즈를 마주 보았다. 나처럼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칼이 태양 빛을 받아 어둡게 반짝이고 있었다.

“글 쓰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려고요.”

“아무 뜻도 없는 글은 도움이 되질 않는단다. 하지만…….”

세레즈가 내가 놓았던 나뭇가지를 손수 쥐여주며 구역질 나는 미소를 지었다.

“너에겐 이런 글공부가 어울리는구나, 이벨린.”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 순종적인 여동생, 자립할 수 없는 나약한 여인.

세레즈가 바라는, 그렇게 되도록 만들고 있는 비참한 존재가 지금의 ‘나’였다.

속으로는 놈의 머리통을 생으로 씹어 먹으며 입안에서 터지는 놈의 비명을 듣길 원했지만, 내 몸은 세레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허억! 앗, 아악……!”

발작하듯 잠에서 깨어나 고개를 쳐들었다. 목 뒤에 무리가 갔다. 근육이 욱신거리며 뻣뻣한 통증이 느껴진다.

“괜찮으세요?”

애쉬가 재빨리 손을 뻗어 목을 주물러주고 나서야 놀란 근육이 점점 진정되어 갔다. 그러나 이번엔 무릎이 욱신거렸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테이블 아래를 쳐버렸는지 가지런히 놓여있던 교재가 테이블 밖으로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고 펜은 바닥을 뒹굴었다.

“응.”

머쓱한 것을 숨기고 태연하게 바닥에 떨어진 펜을 집어 들었다.

아씨, 민망해 죽겠네.

오늘 수업은 진도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간 배웠던 내용들을 토대로 테스트를 진행했다. 나와의 수업에서 치르는 첫 테스트인 만큼 애쉬는 긴장했으며 테스트지를 받자마자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며 그것을 풀어 내려갔다. 누가 보면 아카데미 입학시험이라도 치르는 줄 알겠다.

사각거리는 펜 소리와 창문 너머로 스며들어 오는 따스한 햇볕에 몸이 노곤해지고 나도 모르는 새에 눈이 감겨버렸다.

…그리고 꼴사납게 발작이나 하면서 깨어나 버렸고.

스읍. 입가에 침도 흥건하다. 손등으로 축축한 입 주변을 문지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애쉬에게 풀이는 전부 끝냈냐고 물었다.

“이제 막 다 풀었어요.”

라고 답했으나 바싹 말라버린 잉크가 시간이 꽤 오래 지났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머쓱함에 헛기침을 하고 채점에 들어갔다. 거침없이 오답을 표기하는 내 펜을 두려움과 긴장감이 섞인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애쉬의 모습이 꼭 매 맞기 직전의 열 살짜리 꼬마 아이 같다.

“최근에 배운 건 다 맞았는데, 첫 단원 내용들은 오답이 몇 개 있네.”

보강해야 할 부분들을 체크한 뒤 애쉬에게 테스트지를 건넸다. 받아드는 애쉬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만점이 아니어서일까, 그의 눈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잘했어. 사실 남들은 1년 동안 배울 내용을 넌 한 달 반 만에 다 배워버린 거야. 그리고 첫 단원은 너도, 나도 갑작스러운 과외에 경황이 없어서 심도 있게 수업을 못 나갔었잖아. 복습으로 다루던 주제도 아니었고.”

“…위로는 괜찮아요. 아무래도 과외 시간을 더 늘려야겠어요. 이렇게 가다가는 진도를 나가면 나갈수록 이전에 배웠던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말 거예요.”

“아니야, 굳이 과외를 받지 않아도 너 혼자서 충분히…….”

“도와주세요, 선배. 저 이번 시험에서 꼭 만점 받고 싶어요. 연장된 수업의 과외비도 정확히 지불할게요.”

잠으로 나른했던 머리가 기계처럼 위잉―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그란 시간표 안에 공부, 아르바이트, 과외 그리고 먹고 자는 것 따위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는데 그것이 영차영차 소리를 내며 추가된 과외 시간에 대한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비좁아 죽겠는데 또 무슨 과외야? 하는 투정이 들리는 것만 같다.

어디 보자. 마법학은 아직 위험한 부분이 많아서 섣부르게 공부량을 줄여선 안 될 것 같고, 윤리나 고대어 같은 경우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복습하는 식으로 시간을 메우고 있었으니 이곳에 할애되는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고 식사와 수면 시간이 조금씩 자리를 양보해 주면 여유롭게 추가 과외를 진행할 수 있겠다.

동시에 두둑해져 가는 잔고가 떠올라 광대가 씰룩씰룩 경련했다.

“애쉬, 누누이 말하지만 내 하루는 온갖 일정들로 꽉 채워져 있는 바람에 무척이나 바쁘게 돌아가고 있어. 너한테는 단순히 ‘과외를 조금 늘려야겠네…….’ 정도의 가벼운 생각으로 치부될 수 있는 시간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무척이나 아깝고도 귀한 시간의 낭비인 셈이야. 그러니까…….”

“…과외 시간을 늘리는 건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

“아니,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의 넘쳐나는 학구열을 높이 사 친히 과외 시간을 늘려 주겠다는 말이야.”

“선배…….”

애쉬가 감동 어린 소리로 나를 불렀으나 나는 꽤 쿨해 보이도록 손바닥을 들어 녀석의 말을 막았다.

“대신 과외 시간은 내가 정해. 말했듯이 없는 시간을 쪼개서 겨우겨우 마련한 거니까. 만약 너랑 내가 일정이 맞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추가 과외는 없는 이야기가 되는 거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만약 애쉬가 “아, 그때 저 다른 일이 있는데요.” 하면 또다시 머릿속에서 열심히 시간표를 조절한 다음에 “아이구, 그래? 그럼 이때는 어때?” 하고 다른 시간을 권유했을 것이다.

그러나 협상을 할 때 초반부터 저자세로 나가면 최대의 이익을 얻지 못한다. 턱을 조금 들고 있던 상태에서 슬쩍 눈만 내려 애쉬를 살폈다.

곧바로 “네! 좋아요!” 할 줄 알았던 애쉬가 오랫동안 답이 없자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너무 세게 나갔나?

“…감동이에요, 선배. 절 위해서 이렇게까지. 전, 정말 저는… 흡.”

“…….”

“못 본 걸로 해주……. 흐읍.”

“너 우냐?”

애쉬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눈물을 참으려 부단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아니, 왜, 왜 우는 거야!

“전, 정말 복 받은 후배예요. 선배 같은, 좋은 흑, 선생님을 만나고……. 그게 너무 벅차서, 흐윽…….”

애쉬가 눈가를 벅벅 비비며 눈물을 짓이겼다.

당황하여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협상이니 최대의 이익이니 생각하던 내가 분리수거도 되지 않을 쓰레기가 되는 기분을 여실히 느끼고 있는 중이다.

“애, 애쉬, 일단 진정하고 고개 좀 들어볼래?”

덥수룩한 머리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거 언젠가 내가 확 잘라 버리든가 해야지, 원.

녀석의 앞머리를 정확하게 5:5로 갈라 쫙 넘기자 애처로운 물방울을 그렁그렁 단 채 눈가가 붉게 물들어있는 벽안이 보였다. 우스꽝스러운 머리 스타일에도 녀석의 모습은 세상의 모진 풍파 속에서도 오색의 아름다운 꽃잎을 피워내는 한 떨기의 꽃처럼 보일 뿐이었다.

“언제든 크흡. 부르면 갈게요, 선배.”

“그래.”

여러 말로 달랠 것도 없이 그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여주니 애쉬의 울음은 금세 멎어갔다.

하여간 진짜 특이한 놈.

정해진 과외 시간이 끝나고 책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애쉬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맞다. 애쉬, 너 내일 오후 늦게 시간 돼?”

나와 같이 책을 정리하던 애쉬의 몸이 돌처럼 경직되었다.

갑자기 왜 이래?

“혹시, 데이트…….”

“헛소리 마. 너랑 내가 데이트할 사이는 아니잖아.”

“…몸을 섞은 사이이긴 하죠.”

화악.

애쉬의 입에서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차오른 열기를 느꼈다.

몇 번 눈을 껌뻑이니 일자로 다물려있던 애쉬의 입이 느리게 움직였다.

“괜히 기대해서 죄송해요. 전 언제든 시간 괜찮아요.”

애쉬가 불러온 상념은 쉬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일주일 전 녀석의 기숙사 방에서 밤새도록 신음을 내질렀던 일이 바로 어제 일처럼 그려진다.

그렇게 서로 죽고 못 살 것처럼 덤벼들어 놓고 데이트라는 말에 헛소리하지 말라니. 저 순수한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진짜 쓰레기가 맞다.

스스로에 대한 자아 성찰로 머리가 지끈 아파오는 바람에 관자놀이를 검지와 중지로 꾸욱 누르며 이야기했다.

“별건 아니고, 과외 시간을 조금 늦추려고.”

“저녁에는 베이커리 가는 거 아니셨어요?”

“아, 하루 뺐어. 매년 그래왔던 거라 사장님도 이해해 주셔. 너한테는 미리 말 못 해서 갑자기 과외 시간을 없애버리는 건 좀 그렇고, 시간만 뒤로 당기려고.”

“무슨 일이신데요?”

애쉬의 말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답했다.

“어머니 기일이야.”

* * *

아카데미 정문에서 5분 정도 걷다 보면 갖가지 화분들이 길거리를 장식하고 있는 화원이 있다. 그 앞을 지날 때면 오색의 꽃들과 푸르른 향이 마치 내 옷자락을 쥐고 화원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어여쁜 것들의 유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칙칙하고 좁은 샛길로 쌩 하니 들어가 버렸다. 곰팡내가 푹푹 풍기는 허름한 레스토랑 ‘오늘의 메뉴’로.

기분 탓이 분명하지만, 나의 무관심함에 꽃들도 더 이상 내 발목을 붙잡지 않고 다른 손님들을 향해서만 환히 꽃잎을 피워내기 바빴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화원 앞을 지났고 꽃들은 나를 유혹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정말 별일이지만 평소처럼 있는지도 모를 좁은 샛길로 발걸음하는 것이 아니라 화원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누가? 바로 나 이벨린이 말이다.

대뜸 화원에 들어간 것도 놀라운 일인데, 펜 한 자루를 살 때에도 꼼꼼하게 가격표를 살피며 성능이고 나발이고 가장 저렴한 것들만 고르던 내가 오늘은 온전히 꽃의 색과 모양에만 집중한 것도 참 별일이다.

내 눈에 가장 화려하고 예쁜 것들을 손가락으로 콕콕 가리켜 가며 점주에게 “다발로 포장해 주세요.”라고 했다.

“카타리나 장미랑 지니아, 달리아라니. 받으시는 분은 여름의 주인공이 되시는 기분이겠어요.”

빨간색, 노란색, 주황색 꽃들 중에 뭐가 장미고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점주의 손아래에서 잎사귀가 잘리고, 흩어져있던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투박한 신문지 안을 촘촘히 채우는 것이 마법처럼 느껴질 정도로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담긴 꽃들이 너무도 화려하여 딱딱하고 고지식한 신문지 안의 활자가 감각 있는 패턴처럼 느껴지도록 둔갑하니 저절로 엄지손가락이 척 들어 올려진다.

점주가 하하 웃으며 꽃다발을 내게 건넸다.

“어디 꾸준히 가시는 곳이라도 있나 봐요? 매년 이맘때쯤 꽃을 사 가시길래요.”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고작 1년에 한 번 들르는 것뿐인데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하긴, 매일같이 이 앞을 지나가는데 오히려 모르는 게 이상한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시기까지 알아보는 건 역시 좀 의외다.

“네. 그렇죠, 뭐.”

“애인이랑 기념일이시려나. 요즘은 여성분들도 많이들 꽃 선물을 하더라고요. 보통 여기서 꽃 사 가시는 여자 손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애인이 하나같이 연하이던데, 우리 손님 애인도 연하 아니세요?”

“어머니 기일이라서 사는 거예요.”

“…….”

“무덤에 갖다 바치려고요.”

넉살 좋게 떠들던 점주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점주가 어버버거리는 사이에 싱긋 웃어 보이며 꽃값을 지불하고 나왔다.

터덜, 터덜.

손아래에 있는 꽃다발이 발걸음을 따라 흔들린다. 꽃대에 철심을 박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7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머니의 죽음이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나는 아직 7년 전 어머니의 생일날에 머물고 있다. 지금은 기일이 되어버린 그날에.

사실 화원의 점주에게 거짓말했다.

“무덤은 무슨, 무덤이 어딨어.”

로벤스디 공작가에서 거두어 간 어머니의 시신이 어디에 안치되어 있는지 아는 바가 없다. 물어볼 사람도 없고 답해 줄 사람도 없는 게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무사히 ‘안치’되고 있기나 한 건지. 조각조각 도륙되어 짐승의 먹이로 흩뿌려진 건 아닌지 하는 불경하고도 끔찍한 가정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리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선 세레즈가 나 엿 먹으라고 보낸 어머니의 치아가 그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지 않은가.

어머니의 사진 한 장, 유품 하나 가지고 오지 못했고 세레즈가 보내온 치아만이 어머니의 유일한 흔적이다. 그나마 있는 치아마저도 보고 있으면 생전의 어머니를 추억하는 애틋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레즈에 대한 분노가 더 크게 작용되어서 기숙사 방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놓고는 꺼내지 않게 되어버렸다.

즉 나는 어머니의 기일에 애도할 만한 물건도, 장소도 없는 처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기일이 되면 그녀를 위한 꽃을 샀다.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뒤집는 것 같다가도 허무의 세계에 빠져든 것처럼 텅 비어 버리기도 한 불안정한 상태로 걷다 보면 아무도 찾지 않는 잊혀진 땅에 서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잊혀진 땅이라니……. 내가 생각해 놓고서도 실소가 터져 나왔다. 미처 알지 못했던 거룩하고도 대단한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네.

실은 이전에 애쉬와 바퀴벌레 사건으로 두 번 다시 발걸음하지 않았던 구 건물 뒤편으로 들어가다 보면 조경이 단조로운 산책로 하나가 나온다. 너른 잔디밭 사이에 나있는 돌길 끝에는 작은 언덕이 하나 있었는데 벤치도, 티테이블도 하나 없이 정돈되지 않은 잡풀만이 무성한 외로운 언덕이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됐다. 잊혀진 땅 같다고. 답지 않게 감성적인 감상이었다.

어머니 기일이 될 때면 습관처럼 이곳을 찾아왔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되어 보이는 이곳은 내 삶의 처절하고도 비참한 전환점이 된 그날을, 그때의 해묵은 감정을 추스르기에 가장 적막한 곳이었으므로.

또 하나. 이 언덕에는 윗부분이 댕강 잘려 밑동만 남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우습게도 그것이 비석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나무에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곳에 밑동만 남은 채 홀로 덩그러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건진 알지 못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궁금해할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무도 내가 매년 이곳에 들르는 이유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을 테지.

다른 사람들이 으레 묘비 앞에 꽃다발을 놔두는 것처럼 밑동만 남은 나무 앞에 신문지 포장지로 둘둘 만 꽃다발을 놓았다. 나무를 등 받침 삼아 꽃다발 옆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매년 ‘오늘’의 날씨는 왜 이리도 좋은지. 햇볕이 강하게 얼굴을 때렸다.

이 나무는 왜 햇빛을 가려줄 잎 하나 자라있지 않은 걸까.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겉으로는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얌전히 눈만 내리감았다.

덤덤한 슬픔, 무력한 그리움이 일상처럼 피부 위에 덧입혀졌다.

밑바닥으로 끌려가는 감정을 애써 지워내고자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숨만 내쉬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 수 있으니까.

그래, 어느 순간이었다. 규칙적으로 내뱉어지는 호흡과 짙은 색을 몰고 온 눈꺼풀 안쪽이 느껴지는 것은. 나른해진 몸 안으로 묘한 이질감이 스며들었다.

벌써 해가 졌나. 그렇게 오래 잔 것도 아닌데 끈질기게 얼굴 위로 따라붙었던 햇볕이 걷혀있었다.

아, 과외!

몽롱한 와중에 애쉬가 생각나 눈을 번쩍 떴다.

“…꿈인가?”

애쉬가 손차양을 만들어 내 이마 위를 가리고 있었다.

“감동인데요. 제 꿈 꾸셨어요?”

“언제 왔어?”

“제 꿈 꾸신 거예요? 그렇죠, 선배 꿈속의 저는 어때요? 멋있어 보이나요? 아, 그러면 좀 싫은데……. 지금의 제가 조금 더 멋있어 보였으면……. 이제 제 꿈 꾸지 마세…….”

“아무 꿈도 안 꿨으니까 조용히 해.”

언제는 꿈을 꾸지 말라고 하더니, 막상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고 하자 애쉬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뭐 어쩌라는 건지.

도통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애쉬를 뒤로하고 좀 전의 물음을 다시 꺼냈다.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스토커냐?”

녀석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답하지 않았다.

진짜 스토커야 뭐야.

딱딱한 나무에 등을 푹 기댄 채로 이야기했다.

“난 진짜 신고하니까 지하 감옥에서 구더기 섞인 수프 먹고 싶지 않으면 처신 잘해.”

스토킹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스토킹(?)으론 지하 감옥에 가지도 않을뿐더러 구더기 섞인 수프도 다 옛날이야기이다. 게다가 어화둥둥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제국의 황자님을 누가 지하 감옥에 가둘 수 있을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허무맹랑한 말을 듣고도 애쉬는 내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절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햇빛 가리개라고 여겨지는 것도 전 좋아요.”

지하 감옥과 비슷한 맥락으로, 어느 누가 황자님을 햇빛 가리개라고 생각할 수 있겠냐.

실없는 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애쉬의 동공이 커지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바뀌었다.

“아침에 아카데미 밖으로 일찍 나가신 건 확인했는데, 생각보다 금방 들어오시더라구요.”

“…생각보다 본격적인 스토킹이잖아?”

“아, 제가 쫓아가거나 그런 건 아니고, 선배 동상 근처에 서있는 경비한테 물어봤어요.”

이번엔 동상이 아니라 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건가.

텅 빈 아카데미에 오고 가는 사람이 적으니 내 출입 정도야 당연히 그들 눈에 띄었을 테고 물어보기만 하면 쉽게 답해 주었을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

“선배 어머님께서 꽃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애쉬가 내 옆에 놓인 꽃다발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꽃다발을 손끝으로 툭 치며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금방 시들어 버리는 건데 왜 좋아하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 어머니는 길가에 피는 흔한 들꽃이라도 한번 발견했다 싶으면 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곤 했어. 내 눈에는 다 똑같은 꽃인데 계절마다 꽃들은 뭐가 이렇게 다르고 다양한지. 계절마다 꽃에 대한 설명을 들어주는 것도 곤혹스러웠다니까.”

애쉬가 웃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곤혹스러웠던 기억치고 즐거워 보이시네요.”

복에 겨운 투정이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애쉬는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기일인데 왜 아카데미에 남아 계세요? 어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된 거예요? 같은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돼서 편했다.

애쉬는 그저 차양을 만든 손을 거두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얼굴 위에 한 줌의 햇빛도 닿지 않게 하리라는 의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보살핌. 익숙했던 것이나 이제는 생소하게 돼버린 아늑하고도 편안한 그것. 나쁘지 않았다. 예의상으로라도 팔 아프지, 그만해도 돼, 하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왜인지…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이어서 그런지 잔뜩 어리광을 피우고 기대고만 싶었다.

그래서 평소엔 잘 하지 않던 자조적인 말이 툭 튀어나왔다.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놀랐다.

“이곳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아. 흘러가지 못하고 튕겨 나가 버린 것처럼.”

나같이. 내 시간은 어머니가 살해당한 그날 이후로 완전히 멈춰버렸다. 그날의 지독한 불행과 절망이 내 몸 안에 멈춰 서있다. 그래서 본능처럼 이곳을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에 얽매인 나는 결코 나아갈 수 없다는 걸 자각하기라도 하는 건가.

“아뇨, 착실히 흘러가고 있네요.”

“무슨 소리야. 4년 전에도 여긴 이 밑동만 덩그러니 남아있었어.”

“뿌리가 썩지 않았잖아요. 이 나무는 사계절을 전부 지내고 있어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뿐이에요.”

“…….”

“한파를 이겨내고 봄의 새잎을 만났고, 여름엔 무르익었고 가을에는 옷도 갈아입었을 거예요. 뿌리가 썩지 않았으니까 곧 새 줄기도 자라날 테지요.”

애쉬가 웃으며 나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아주 훌륭하게 나아가고 있네요.”

애쉬의 몸에서부터 초록의 빛 방울들이 톡톡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탱글탱글한 빛 방울들이 점점 많아지더니 무리 지어 흘러나왔고 그것들이 나무 밑동을 타고 올라가 잎으로 변했다. 무성한 나뭇잎이 울창하게 돋아났다.

여름날과 아주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분명 초록의 생기 있는 빛으로 번쩍거리던 것들이 점점 색이 옅어지더니 노란색으로 변하다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가을의 단풍처럼.

그것들이 내 머리 위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하얀 빛무리가 나타나 눈처럼 나무 위에 소복이 쌓여갔고 종내에는 옅은 분홍빛으로 바뀌어 설렘은 담은 봄날의 벚꽃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젠 확실히 보이죠?”

욱신. 심장이 아파온다. 잡아 쥐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로. 화려한 빛무리보다 애쉬의 얼굴에 더… 눈이 갔다. 왜지. 너무도 찬란해서 바라보기가 힘들었음에도, 장님이 된다고 하더라도 녀석을 눈에 담고 싶었다.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선배가 그렇게 봐주시니까 저 지금 엄청 부끄러운 거 알아요?”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데?”

“감동받아서 당장이라도 키스해 주고 싶은 눈으로.”

“감동은 무슨.”

틀렸어. 네 녀석한테 완전히 홀린 눈이었을걸.

애쉬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작 이런 거로 선배한테 키스 받기는 역시 무리겠죠.”

“그런데 너… 오늘따라 예쁘다.”

애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정말이요? 저 예뻐요? 얼마나 어떻게 어디가 예뻐 보여요? 네?”

“…….”

입가에 퍼지는 환희의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재차 물어왔다. 대단한 말도 아닌데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기뻐하는 녀석을 보고 있으니 괜히 내가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저 더 열심히 예뻐 보일 테니까 답해 주세요, 선배!”

“…….”

무시하기로 했다. 말을 잘못 꺼냈어.

애쉬를 지나쳐 발그레한 분홍 잎을 달고 선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종알거리던 애쉬가 입을 다물고 내 옆에 나란히 선다. 뺨에 닿는 시선을 무시하기가 힘들다.

내 얼굴 위에 한참을 머물러있던 애쉬가 말했다.

“좋아해요.”

우스운 타이밍이었다. 분위기도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 뜬금없는 고백이라니.

고개를 돌려 녀석을 보니 해사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위태해 보였다. 가득 차있던 감정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넘쳐버린 것처럼 본인도 모르게 내뱉어버린 것 같았다.

“알아.”

덤덤하게 흘러나온 고백에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 고백에 태연할 수 있었던 건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대놓고 티 내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선배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많이요.”

욱신.

아무래도 병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원인은 눈앞의 저놈인 것 같고.

“그건 몰랐네.”

“정말 많이 좋아해요.”

“응.”

애쉬의 고백에 내 대답은 성의 없이 짧았다. 승낙도 거절도 아닌 애매한 대답에도 애쉬는 기분 좋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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