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놈이랑 가까워진 이유 (1)
‘그런’ 일이 있었지만, 나와 애쉬의 관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찌 보면 수업의 일환이었으니 당연한 건가.
…하지만, 어느 누가 그런 식으로 성교육을 해주겠어.
애쉬는 그쪽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라서 그럴 수 있겠다고 치지만 나까지 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애쉬에게 달려들 줄이야. 내가 그렇게도 욕망에 약한 인간이었나 하는 회의감까지 든다.
쉽게 사랑에 빠지는 로즈는 이성 관계에 있어 돌부처 같은 나에게 무성욕자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때의 나는 ‘정말 그런가?’ 하고 스스로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하고 있었기에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단호하게, 절대 ‘아니!’라고 외칠 수 있다. 무성욕자는 얼어 죽을. 헐떡거릴 정도로 좋았던 그 기분을 아직까지도 잊지 못한다.
“…제 말 듣고 계세요, 선배?”
“어?”
툭.
쥐고 있던 펜을 놓쳐버렸다.
애쉬가 웃으며 그것을 다시 손에 쥐여준다.
“지금은 저랑 함께하는 시간이니까 저한테만 집중해 주시면 안 될까요?”
“까불고 있어. 어제 잠을 못 자서 그래.”
“왜 잠을 못 주무셨는데요?”
“질문은 그만. 하려던 말이 뭔지나 얘기해.”
애쉬가 내 안색을 빤히 살피고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내일은 집엘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형님이 급하게 부르셔서요.”
“…집이라고 하면.”
“아, 황궁요.”
누구는 황궁 구경 한번 해보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저놈은 제집 드나들 듯이… 아, 그래. 집 맞지.
적잖은 거리감이 느껴져 의자째로 살짝 뒤로 움직였다.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조금 이동했을 뿐인데, 애쉬가 갑자기 의자를 테이블 쪽으로 바짝 끌어당겨서 전보다 우리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럼, 내일 수업은 못 하겠네.”
“네… 언제든 보충받을 수 있으니 아무 때나 불러주세요. 이른 새벽이라도 괜찮으니까…….”
“그때는 내가 안 되거든? 내일 수업을 언제 채울지는 조금 고민해 본 다음 말해 줄게.”
애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제가 없는 동안 무료하실까 봐 몇 가지 준비한 게 있는데요.”
“……?”
“손을 좀…….”
한 손을 내밀자 애쉬가 내 손등을 받쳐 들고 손바닥 위에 준비해 온 물건들을 하나둘 올려놓기 시작했다.
“이건 제 기숙사 방 열쇠를 하나 더 복사한 거예요. 침대도, 책상도 더 넓으니까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사용해 주세요. 그리고 이건 오페라 티켓인데 요즘 제국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에요.”
“「불멸의 태양, 헤밀턴 6세」……. 황제 폐하시잖아?”
“아바마마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에요.”
위인들의 생애를 그려낸 오페라 작품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존해 있는 황제에 관한 오페라는 처음이다.
현 황제 폐하가 제국민들의 사랑과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것은 신문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일 줄이야…….
“2막에서는 제 모습을 연기하는 배우도 등장해요. 진짜 저는 아니지만… 그래도 딱히 일정이 없으시다면 안 보시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요.”
“내가 꼭 하루에 한 번은 널 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까지 해. 그리고 이건 뭐야?”
손바닥만 한 작은 액자 속에 알맞게 끼워져 있는 애쉬의 상반신 사진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선배는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분이시니까 제 사진이라도 세워놓고 수업을…….”
“안 치우냐?”
“죄송해요! 사실 그건 제 바람이고요, 선배가 싫으시면 안 그러셔도 돼요.”
“네가 허락 안 해줘도 그럴 일 없어.”
“네. 사진은 가지고만 계셔 주세요. 부탁드려요.”
내가 무료할까 봐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이 우스웠다.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흘려버린 건 기껏 준비한 것들이 하나같이 애쉬 녀석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다.
애쉬의 이마에 콩! 하고 꿀밤을 먹여주고는 테이블 위에 늘어져 있던 책들을 정리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복습이나 열심히 해.”
“벌써 가시게요? 저희 내일은 하루 종일 못 보는데, 조금만 더 같이…….”
“아르바이트 가야 돼.”
내가 일어서자 애쉬가 덩달아 따라 일어서며 눈을 빛냈다. 녀석이 말을 하기 위해 호흡을 먹는다.
“따라오지 마.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방해받는 기분이니까. 멀리서 지켜보지도 마.”
“…….”
애쉬는 벌어졌던 입술을 앙다물고는 축 처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녀석이 더 졸라대기 전에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말을 잘 듣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 고집이 세단 말이지.
얼떨결에 같이 들고 나와 버린 열쇠와 티켓 그리고 사진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어 버렸다.
셋 다 쓸 일이 없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티켓은 요즘 흥행하는 공연이라 하니 비싼 값에 되팔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조심조심 꺼내어 구겨진 부분을 쫙쫙 펼쳐 놓았다.
열쇠와 사진은 내 기숙사 방 책상 위에 던지듯이 올려놓고 곧바로 베이커리로 향했다.
* * *
“아이고, 어깨야.”
나이 칠십 먹은 노인처럼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반죽하느라 잔뜩 굳어버린 어깨를 주무르며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내일은 과외도 없으니 빈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으려나. 아카데미 과목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마법학 공부를 하는 것이 베스트겠지. 도서관에 들러서 마법학에 관한 서적을 더 대여하고 간 김에 거기서 주야장천 공부나 해야겠다.
“참 재미없는 인생.”
헙. 내가 한 말이 맞나?
본능처럼 튀어나온 한탄에 입을 막아버렸다.
오로지 세레즈에게서 벗어나 내 삶을 살겠다는 목표 하나만 가지고 달려왔던 내가 그 과정에서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왤까? 어째서 이런 생각을…….
길게 고민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이유를 쉽게 알려주었다. 애쉬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듯이 5년 동안 똑같은 일상을 반복했는데 애쉬라는 불청객이 끼어들어 버렸다.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견고하게 쌓아놓았던 나만의 장성(長城)을 제멋대로 헤집어 놓았다.
세레즈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단단히 세워놓았던 것들이 허물어지자 바다가 보였고, 별이 보였고, 넓은 세상이 보였다. 그것을 알고 난 뒤 다시 벽을 세워 놓으려니 안락함보다는 지독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난, 내가 만든 감옥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알아도 벗어날 수 없어, 아직까지는. 세레즈 그 새끼가 언제 어디서 나타나 내 발목에 족쇄를 채울지 모를 일이니까.
혐오스럽게 웃는 세레즈의 낯이 떠오르자 말랑말랑해졌던 마음이 다시금 차갑게 굳어갔다.
“괜한 소음에 잠시 정신이 팔린 것뿐이야.”
톡! 톡!
마음을 다잡기가 무섭게 또다시 소음이 들려왔다.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소리에 망설임 없이 창문을 벌컥! 열었다.
탓!
“아!”
너무 망설임 없이 열었나.
애쉬가 던진 돌멩이에 이마를 정통으로 맞았다.
“헉! 죄송해요, 선배!”
욱.
따끔거리는 이마의 고통을 느끼며 바락! 소리 지르고 싶었으나, 야밤에 언성을 높이는 무례한 짓으로 기숙사에서 쫓겨나고 싶진 않으므로 꾹 참아 내렸다.
그러나 애쉬는 대낮의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크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크게 다치신 건 아니죠?! 왜 대답이 없어요, 선배!”
나는 머리 위로 크게 엑스 자를 만들었다.
“네?! 괜찮지 않다고요?! 선배! 저 올라가도 되죠?! 올라갈게요!!”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그 입 좀 닥치라는 뜻이었는데 왜 해석이 그렇게 되냐!
나는 열심히 머리 위로 엑스 자를 흔들어 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들렸다.
만약 사감한테 들키기라도 한다면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야겠다.
“선배! 이벨린 선배!”
…잡아뗄 수 없게 됐다.
럭비라도 하는 것처럼 기숙사 복도에서 다급하게 내 이름을 외치는 애쉬 탓에 결국 나는 방문을 열어 그의 뒷덜미를 확 잡아채서 뒤로 내팽개치듯이 끌어당겼다.
쾅!
재빨리 문을 닫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애쉬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입 좀 닥쳐, 애쉬.”
애쉬가 놀란 눈을 하고선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다행히 사감이 내 방까지 올라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애쉬의 입에서 손을 조심스럽게 떼었다. 그런데 이번엔 녀석이 내 뺨을 감싼다.
“뇌진탕 오신 거 아니에요? 머리가 어지럽거나 기억이 나질 않거나 그러진 않죠? 설마 제가 누구인지 잊어버렸거나…….”
애쉬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린다.
“너 때문에 멀쩡하던 골이 울릴 지경이니까 제발 떨어져.”
“고, 골이?!”
“괜찮아. 괜찮다고!”
와락.
애쉬가 내 몸을 끌어다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선배가 잘못되면, 전…….”
“놔, 이 자식아!”
야밤에 이게 무슨 생쇼야?
미련 없이 품에서 벗어나자 애쉬가 허공에서 손가락을 쥐었다 펴며 아쉬운 티를 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이 시간에, 굳이?”
“지금 아니면 안 돼요.”
애쉬가 내 손목을 당기었다. 울적했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물기를 지우고, 별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동공 안에 반짝 빛이 새겨졌다.
그의 순수한 기쁨에 나는 오히려 목덜미가 뻐근해진다. 좋지 못한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이 분명하다.
“그럼 영원히 말하지 마.”
촉.
따뜻하고 말캉거리는 것이 내 입술에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이게 무슨…….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방금 내가 당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애쉬의 목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불시에 벌어진 짧은 베이비 키스에 눈이 크게 뜨인다.
놀란 것은 애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죄송해요. 선배가 너무 아픈 말만 해서…….”
“…….”
애쉬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죄송해요.”
분위기가 묘해졌다.
콩닥콩닥.
진하게 키스를 나누었을 때보다 심장이 더 세차게 뛰는 이유는 뭘까.
우물쭈물하고 있는 애쉬와 벙쪄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 어색함에 손끝이 까끌까끌하다.
그냥, 자연스럽게 넘기자.
“됐고, 그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저랑 같이 가요.”
“어딜?”
“저희 집에요.”
“…….”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랑 떨어지는 건 너무 괴로워요. 그냥 같이 가요.”
입맞춤의 여파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애쉬는 또 내 정신을 크리티컬로 공격하는 말을 내뱉었다.
내가 지금 제대로 알아들은 거 맞아?
“…너네 집엘, 그러니까 황궁으로 가자는 말이잖아.”
“네!”
매일 퍽퍽한 호밀빵만 씹는 소시민의 마음도 모르고 애쉬는 마냥 좋은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애쉬의 가슴팍을 밀어내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단호하게 외쳤다.
“싫어.”
“선배도 기숙사에 남아있는 것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실 수 있어요.”
“마음이 편하질 않아.”
“내 집이다, 생각하시고…….”
“내 집 아니야. 너도 빨리 돌아가, 나가.”
“네?! 어렵게 선배 방에 들어왔는데 구경도 못 해보고, 선배, 잠깐, 잠깐만요. 너무 냉정하게 밀지는 말아주세요.”
안 가! 미쳤다고 거길 가?! 내가 지금 거길 가서 황족들 틈바구니에서 도대체 뭘 할 거야. 순진한 막내 황자 꼬드겨서 과외랍시고 수업료나 왕창 뜯어냈다는 것이 까발려지면 출세고 뭐고 앞길 꽉꽉 막혀 버린다고!
절대 안 가!
* * *
…처절하게 가지 않겠다고 몸부림쳤던 것과 다르게 나는 황궁의 번쩍번쩍한 복도를 애쉬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과외비 따따블에 출장비까지 얹어준다는 애쉬의 달콤한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두둑해질 지갑을 생각하며 몹시 들떠 있었다만… 황궁을 두 눈으로 보니 돈에 부풀었던 마음이 쪼그라들고, 으리으리한 황궁과 절도 있게 예를 갖추는 시종들 기세에 몸이 위축되었다.
와서는 안 될 곳을 와버린 것 같아.
“선배가 황궁에 와 계시다니. 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요!”
애쉬가 들떠서 소리치자 뒤에서 열을 맞추어 걷고 있던 시종들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애쉬, 잠깐만 귀 좀.”
평소 같았으면 손에 잡히는 곳 아무 데나 끌어내려 몸을 가까이 붙였겠지만, 황궁의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 앞에서 귀한 황자님 몸을 막다루는 그런 멍청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애쉬가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래도 귀에 대고 이야기하기에는 거리가 있어 결국 애쉬의 어깨를 잡고 발뒤꿈치를 들어 올려야 했다.
“허억.”
시종들 무리에서 불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왜일까 싶어서 애쉬의 어깨너머로 살펴보려는 찰나 애쉬가 얼굴을 들이밀어 시야를 막아버렸다.
“왜 그러세요?”
그의 천진한 질문에 궁금증 같은 건 훨훨 날아갔다.
“나한테 극존칭 쓰지 마. 같이 있어서 좋다 어쩐다 이런 말도 하지 말라고. 괜히 오해할 수 있잖아.”
“오해라니. 무슨 오해를 한다는 거예요?
“우리 관계에 대한 오해.”
“음… 저한테는 좋을 것 같은데요.”
“아니, 전혀 좋지 않아. 너 지금 내 출셋길 막히는 엄청난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건 아니?”
“그런 걸 왜 걱정해요. 제가 있는데.”
“…….”
“제가 선배 앞날까지 다 책임질 테니까, 선배도 저 끝까지 책임져 주셔야죠.”
나는 세상에 판을 치고 있는 검은 비리를 고발하고 정의 실현에 앞장서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다만 지금 내가 죽기 살기로 공부하는 것은 가진 재력이 없고 창창한 출세 가도를 달리게 해줄 인맥이 없어서다.
그런데 지금 이 녀석이 내 직업을… 보장해 주겠다고 하는 건가? 소문으로만 들었던 낙하산?!
스읍. 군침이 흐른다. 저놈은 황자야. 권력의 중심이라고.
나는 평소에 애쉬를 대할 때보다 얼굴 근육을 최대한 이완시켜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쿡. 크흡. 푸하하하!”
애쉬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조금씩 빠져나가더니 못 참겠다는 듯이 복도가 울리도록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갔다.
미친놈, 왜 저래?
내가 인상을 구기고 서있자, 애쉬가 번지는 웃음을 가다듬고는 다시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죄송해요. 선배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 말 하지 말랬잖아. 뒤지고… 아니, 괜히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잖니.”
“선배는 참 솔직해서 좋아요.”
내가 솔직하다고?
놈은 사람을 볼 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속으로 혀만 쯔쯔 차줄 뿐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등골이 싸해지는 기분은 뭘까. 애쉬가 방긋 웃으며 막아서고 있는 탓에 주위를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안 비켜?
말이 목구멍 바로 밑까지 차오르려 하는데, 애쉬가 웃었던 소리보다 배는 더 크고 힘찬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애쉬 카인드로퍼 펜테리온!”
화들짝!
죄지은 것도 없는데 발끝이 떨어질 것처럼 몸이 떨렸다. 애쉬는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선 나에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그러곤 드디어 애쉬가 몸을 돌려서 막고 있던 내 앞을 열어주었다.
히익!
시종들이 모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길을 터놓고 있었고 그 사이로 몸에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건장하고 단단해 보이는 풍채의 중년 남자가 성큼성큼 우리 곁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반면 옆에서 보폭을 맞추어 걷고 있는 여자는 키가 작은 편에 속하는 나보다도 아담해 보였는데 남자 옆에 있으니 그 대비 효과가 엄청났다.
그뿐만 아니라 여자의 옷 밖으로 드러난 볼살은 너무도 하얗고 통통하여 러블리한 느낌을 주었다.
즉, 서로 다른 존재가 나란히 걷고 있었으나 둘은 마치 원래가 하나였던 것처럼 조화롭게 보이기도 했다. 외적으로 비슷한 점이라곤 도무지 찾을 수 없었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뛰어난 미남미녀라는 것.
난 저들을 알고 있다. 저분들은 날 모르시겠지만.
몇 번이고 뵌 적이 있다.
물론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고 신문에서!
두 남녀가 나와 애쉬 앞에 걸음을 멈추고 섰다. 풍겨오는 위압감이 엄청나다. 분명 같이 눈, 코, 입 달리고 밥도 먹고 똥도 싸는 사람일 텐데 왜 이렇게 다른 차원의 존재같이 느껴지는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예를 갖추었다.
“펜테리온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 황후마마를 처음 뵙습니다. 로벤스디 공작가의 장녀 이벨린 로벤스디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이벨린. 우리 아들과는 꽤… 사이가 좋은가 보네요.”
처음이었다. 가문 이름을 듣고도 당황해하지 않는 사람은. 내가 로벤스디가에서 버려진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고도 개의치 않아 하는 사람은.
아카데미에서야 워낙 유명했으니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이들도 익히 소문을 듣고 모르는 척해 주기도 했지만 이렇게 연고가 전혀 없는 사람을 처음 만나 소개하는 과정에서 당황하거나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정말 처음이었다.
황후이신 레비아 올슨 펜테리온이 품위 있고 다정한 어투로 질문이 아닌 확신에 찬 말을 건넸다.
그렇게 절친한 사이는 아닙니다, 라고 말할까 하다가 그럼 너 여기까지 왜 따라온 거냐? 하는 소리를 들을까 봐,
“황자님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카데미 안에서는 후배인데도 배울 점이 많아서 저는 많이 의지하고 있는 편입니다.”
라고 둘러댔다.
두 분 아드님 짱짱! 역시 황족이라 그런가 나 같은 소시민들과는 달리 아우라가 남달라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허리가 숙여지고 황족의 손아래에서 보살핌을 받고 싶어 죽겠네!
…하는 의도로.
“저도 선배를 많이 의지하고 있어요.”
애쉬가 나를 바라보았다.
미친, 너는 거기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크흠. 흠. 그렇다고 해도, 눈이 많은 장소에서 키ㅅ…….”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우리 다 같이 차 한잔할까요?”
레비아가 헤밀턴 6세의 허리를 팔꿈치로 세게 치는 것을 보았다.
키?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일까.
앞장서는 황제 부부를 따라 걸으며 황제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이런 것까지는 기대 안 했는데. 꽤 좋네요, 선배.”
“부모님이랑 차 마시는 게 그렇게 좋았으면 고집부리지 말고 그냥 황궁에 들어가.”
“그럼 선배를 못 보잖아요.”
애쉬의 시선이 끈질기게 내 옆얼굴에 닿아있었다.
입 다물고, 정면 보고 걸어라.
눈빛으로만 쏘아봐 준 뒤 대꾸하지는 않았다.
* * *
드넓은 황궁을 걷고 또 걷고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오색의 꽃이 만개한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전면이 통유리창으로 된 백색 건물이었다.
타원형의 천장은 왜 이렇게 높은지. 마법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이 플라이(Fly)를 시전하며 날아다녀도 될 정도였다.
티테이블에 앉으며 정면의 황제 부부를 마주했다.
다소 어색한 분위기(어쩌면 나만)에서 배웠던 예절을 상기시키며 차를 홀짝거리고 있는데 애쉬가 손수건으로 내 입가를 닦아 내렸다.
“크흡…….”
하마터면 입안에 머금고 있던 홍차를 뱉어버릴 뻔했다.
“스콘이 묻었어요, 선배.”
“고, 고, 고마워.”
웃는 입과 다르게 눈으로는 쌍욕을 퍼부었다.
너 이게 무슨 망측한 짓이냐.
“영애, 우리 아들이랑은 만난 지 얼마나 되었나요?”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오다가다 몇 번 마주친 걸 만남이라고 쳐도 되는 건가? 영 꺼림칙하다. 딱히 대화를 나눠본 것도 아니고.
본격적으로 자주 얼굴을 보기 시작한 것이 이번에 과외를 맡게 된 것이었으므로 대충 그쯤을 이야기했다.
“이번 방학 때부터였습니다.”
“세상에, 얼마 되지 않았군요?”
“황자님이 워낙 사교적인 능력이 출중한 덕에 금방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아들이 사교적이라니.”
레비아가 한쪽 뺨을 씰룩거리며 애쉬를 바라보았다.
“애쉬가 이렇게 손님을 데려온 것이 처음이라 놀랐네요. 우리 아들이랑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선배랑은 매일 만나고 있어요. 어제는 밤늦게까지 함께 있기도 했고요.”
“애쉬?”
나 대신 애쉬가 꼬박꼬박 대답했다.
그런데 너 얼굴은 왜 붉히냐?
챙그랑―
은으로 된 티스푼이 찻잔에 부딪히며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혹시 ‘일’을 치르기 위해 야밤에 만난 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레비아의 말을 정확하게 들어버렸다.
일? 일?!
황제 부부를 알현한다는 생각으로 긴장해 있던 어깨가 다른 의미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내가 아르바이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가?
철없는 막내 황자를 아카데미에 방치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의문의 인물을 심어두어 감시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게다가 애쉬가 종종 만나던 사람이 나니까 당연히 내 뒷조사까지 끝마쳤겠지.
어쩐지… 로벤스디 가문의 이벨린이라고 말했는데도 태연하더라니! 황실의 정보력을 우습게 보면 안 되었다. 내가 너무 물렀어.
아르바이트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카데미에 알려지면 벌점을 맞는 것은 물론이고 방학 중에 기숙사를 이용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벌점이 쌓여있으면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장학생 후보에서 제외된다.
이럴 순 없어!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떨리는 손끝을 테이블 밑으로 숨기며 혼란으로 얼룩진 머리를 차분히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알리려면 진즉에 아카데미에 알렸겠지 왜 지금까지 눈감아 줬겠어. 내가 뭐라고. 그냥 저들에게 나는 스쳐 가는 바람과도 같은 거야. 전혀 신경 쓸 게 아니야.
그럼. 오히려 태연하게, 뻔뻔하게 굴자, 이벨린. 내 쪽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상대방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지도 몰라.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영애, 어제 혹시…….”
“네, 했습니다!”
“푸흡.”
레비아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래, 귀족 자제가 아르바이트라니. 컬쳐 쇼크를 당할 게 당연한 일이었다.
애쉬가 옆에서 입가에 주먹을 대고 쿡쿡대기 시작했다.
“일을… 자주 하나 봐요?”
“매일, 규칙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어제도 했고, 오늘은… 황궁에 있으니 하지 못하지만 내일도 할 예정입니다!”
“푸하하!”
애쉬가 허리를 숙여가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가 지금 곤란한 게 웃기냐? 어? 웃겨?
안 그래도 새하얀 레비아의 얼굴색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우리 때도 열렬했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참 대단하네요.”
“제가 그쪽으로는 유난히 성실한 편입니다.”
“부, 부인!”
“폐하, 제가 조금 어지러워서 그러는데 방으로 데려다줄 수 있겠습니까?”
레비아가 이마를 짚으며 헤밀턴 6세의 가슴팍으로 쓰러졌다. 하녀들이 레비아에게 몰려들었고 그녀는 헤밀턴 6세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대화를 따라가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네요. 우리의 깊은 대화는 다음을 기약해요. 그때는 나도 영애의 수준까지 맞춰서 마음을 가다듬고 올 테니.”
인사를 하려 입을 열자 레비아가 손을 들어 막아섰다.
결국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로 황제 부부가 사라지는 것을 멀뚱멀뚱 바라만 봐야 했다.
“…나 실수한 거 있어?”
“아니요, 전혀요. 오히려 너무 완벽했어요, 선배. 정말 좋아요.”
싸늘한 적막이 공간을 감싸고 있었으나 애쉬만은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여전히 웃음을 입 밖으로 흘리고 있었다.
* * *
얼떨떨했던 황제 부부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우리가 향한 곳은 쥬디퍼 제1황자가 머물고 있는 궁이었다.
“나까지 가야 해?”
“부모님이랑 마주치는 바람에 형님과의 약속 시간이 다 돼버려서요. 선배를 다른 곳에 데려다주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 부부를 만난 것은 정말 우연이었으니까.
넓은 아량으로 애쉬의 마음을 이해하기로 했다.
무장한 기사 네 명이 삼엄하게 보초를 서고 있는 황금으로 된 아치형 문 앞에 도착했다. 기사들은 애쉬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내가 왔다고 전해 주세요.”
혼자만 갑옷 위에 담적색 망토를 두르고 있던 기사 하나가 벌떡 일어나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중한 황금 문이 활짝 열리며 기사가 우리를(정확히 말하자면 애쉬를) 안내했다.
“애쉬, 너 이 새끼야……!”
기사가 문을 닫고 나가자 근엄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익숙한 욕설이 들렸고 어디선가 값비싸 보이는 쿠션 하나가 날아왔다. 내 얼굴 쪽으로 빠르게 날아오고 있던 터라 금박 자수 하나까지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오, 불 뿜는 용 자수. 멋진걸?
탁!
애쉬가 그것을 잡아채고는 다시 힘껏 던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억!” 하는 소리가 들린다.
“형님.”
쿠션을 던지고, 되맞은 쥬디퍼는 씩씩대며 애쉬를 노려보았다.
또다시 쿠션을 들어 올리려고 하기에 내 쪽에서 서둘러 인사했다. 애쉬의 이야기만 들어보면 살가운 형제지간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예상을 완벽히 빗나간 격한 환영 인사에 당황한 낯을 숨기느라 애를 먹었다.
“처음 뵙습니다, 펜테리온의 새벽 쥬디퍼 1황자님. 로벤스디 공작가의 장녀 이벨린 로벤스디라고 합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아름다운 영애. 초면에 실례했네요.”
쥬디퍼는 여전히 씩씩대면서 틀에 박힌 의례적인 인사말을 줄줄이 내뱉었다. 애쉬에게 정신이 팔려서는 정작 내 얼굴은 한 번도 보지 않은 채로.
그 덕에 나는 편하게 쥬디퍼를 관찰할 수 있었다.
애쉬가 헤밀턴 6세를 닮아 골격과 신장이 장대하다면 쥬디퍼는 레비아를 빼다 박았다. 특히 포동포동하고 하얀 두 뺨과 애쉬와 헤밀턴 6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는 체격이 그러했다.
그렇다고 해서 쥬디퍼의 키가 작다는 말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런데 한 가지. 레비아도, 헤밀턴 6세도 물려주지 않은 것 같은 유전자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쥬디퍼의 머리 색이 그러했다.
햇빛이 가장 찬란하게 발광(發光)하는 여름날의 정오처럼 애쉬의 금발은 여느 금발들과 비교하여도 눈에 띄게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헤밀턴 6세가 그런 것처럼.
그러나 쥬디퍼의 머리 색은 같은 금발이라고 하기엔 탐탁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노란 기의 채도가 조금 더 짙었고 흙탕물에 한 번 푹 담갔다가 나온 것처럼 잿빛을 띠기도 했다. 레비아는 휴양지의 바다와 같은 에메랄드빛의 풍성한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으니 레비아의 것도 아니다.
“중요한 일정도 전부 뒷전으로 미루고 곧장 형님께 달려왔는데 다정한 포옹도 없는 밋밋한 인사라니요. 서운합니다, 형님.”
“포옹?! 포옹은 얼어 죽을. 손등만 스쳐도 치를 떠는 녀석이.”
“겁이 많아서 예기치 못한 스킨십에는 잘 놀라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겁이 많다는 새끼가, 계단에서 넘어질 뻔한 찰나에 팔뚝 한번 잡은 것 가지고 찢어 죽일 기세로 형님을 노려보냐?”
“걱정 가득한 제 시선을 오해하셨나 봅니다.”
애쉬와 쥬디퍼는 알 수 없는 말을 연신 주고받았다. 영양가 없는 한참의 실랑이가 이어졌는데 펄펄 날뛰는 쥬디퍼와 달리 애쉬는 거대한 호수의 잔잔한 물결처럼 차분하기만 했다.
언뜻 듣기에 애쉬의 행동을 가지고 두 사람이 다른 입장을 내세우고 있는 것 같은데… 쥬디퍼의 말은 내 공감을 이끌어 내기에 역부족이었다. 애쉬가 누구를 찢어 죽을 기세로 노려보다니. 수전노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골든벨을 울리는 것처럼 말이 되지 않는 헛소리였다.
힐끗, 시선을 들어 애쉬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을 마주친 애쉬가 혼곤하게 미간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형님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눈에 보이는 건 뭐든 비뚤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어요. 초코 머핀을 먹어도 왜 이렇게 초코 맛이 진하냐며 언성을 높이는 스타일이죠.”
실제로 쥬디퍼는 빈말로도 성격이 좋다고는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로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렸다. 붉어진 얼굴 위의 콧구멍에선 불길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애쉬가 내 손목을 잡고는 등 뒤로 내 몸을 가리곤 섰다. 애쉬의 손이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녀석의 엄지손가락이 손목 안쪽을 훑고 갔다.
“급하게 입궁하라고 하신 이유가 이런 시시한 말싸움이 그리워서 그런 거라면, 역시 형님이십니다. 주검이 되어 흙 속에 파묻힐 때까지 어울려 드리죠. 굉장히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이 새끼, 독이 바짝 올랐구만. 아카데미에 꿀이라도 발라놨냐? 편지를 서른 통이 넘도록 보내도 꿈쩍 않던 놈이 방학 중 기숙사 사용을 전면 금지시킨다고 하니까 이제야 얼굴을 비추네. 아우님이랑 대화 한번 하기가 이렇게 어려워도 될 일입니까? 예?!”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쥬디퍼가 구구절절 쏟아냈던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고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기숙사 사용 전면 금지’라는 말만 떠돌 뿐이다.
뭘 금지시켜? 방학 중에 기숙사를 닫아버리면 나같이 허울만 귀족인 서민은 어디에 있으라고?! 전교생 중에 갈 곳이 없는 학생은 나 한 사람뿐일지언정, 그 한 사람이 ‘나’이기에 방학 중 기숙사 사용 전면 금지라는 것은 절대 이루어져서는 안 될 일이다!
애쉬가 황궁으로 발걸음 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영문도 모른 채 길거리에 나앉을 뻔했다.
“공부하느라 편지 확인이 늦었던 것뿐이에요.”
“공부?!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한번 보면 천장 무늬까지 세세히 기억하는 네놈의 괴물 같은 머리…….”
“형님, 그게 본론입니까, 아니면 아우를 타박하는 겁니까?”
쥬디퍼가 큼큼 헛기침했다. 색이 짙은 금발을 손바닥으로 꾸욱 눌러 이마 가까이에 붙인다.
“로제타가 올해로 열여덟인 건 알고 있겠지?”
“네.”
“로제타가 이번에 펜테리온 황립 아카데미로 편입학을 신청했어. 타국에 와서 적응하기 힘들 테니까 네가 곁에서 많이 도와줘야 할 거야.”
“고작 그 얘기를 하려고 저를 부르신 겁니까?”
“고작이라니! 야, 인마. 로제타는 너랑 약혼한 사이야!”
입이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람.
저 둘이 말하는 ‘로제타’라는 인물이 그 ‘로제타 비온 켈스타니아’가 맞는 거겠지……?
켈스타니아는 펜테리온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울퉁불퉁한 산맥 하나만 넘으면 당도할 수 있는 이웃 나라이기도 하면서 펜테리온의 종속국이기도 했다.
정치, 외교, 군사적 측면에서 펜테리온의 간섭을 받고 있는 형세이지만 켈스타니아의 백성들은 여느 종속국들이 그러하듯 자치권을 주장하며 반기를 드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지리적 요인으로 봤을 때 서쪽으로는 야만족 ‘볼타나’와 지대가 맞닿아있고 동쪽으로는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어있는 ‘메신’의 국왕이 호시탐탐 켈스타니아를 노리고 있으며 북쪽의 바다 건너서는 바이킹들이 노동력과 식자재 조달의 목적으로 켈스타니아를 식민지 삼으려는 기세가 형형했다.
그나마 켈스타니아가 자국의 국기를 성 위에 꽂을 수 있는 것은 펜테리온의 간섭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만인이든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어있는 황제든 바이킹이든, 감히 펜테리온을 건드는 낮은 승률의 도박은 하지 않았다.
켈스타니아의 왕족들은 종속국의 입장을 큰 반발심 없이 받아들였으며 해가 바뀌는 첫날마다 펜테리온의 황성에 들러 예를 갖춘 인사를 올리려 입성하는 것을 체모가 상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때마다 온 각지의 신문 헤드라인은 생뚱맞게도 켈스타니아 왕가의 첫째 공주 로제타의 얼굴을 담아내기 바빴다.
홍조가 어린 뽀얀 뺨에 솜털이 보송하게 솟은 그녀의 피부는 마치 깨끗한 복숭아를 연상시켰고, 쌍꺼풀이 짙은 큰 눈망울은 밤하늘의 청초한 보름달을 담은 것처럼 은색으로 반짝였다. 가슴께까지 넘실대는 물빛 머리칼이 너무도 진묘하여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기도 했다.
자타 공인 미(美)의 극치라고 칭송받는 로제타는 켈스타니아인은 물론 펜테리온을 조국으로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유명 인사였다.
그런데 지금 그 로제타 공주와 저 어리벙벙한 애쉬 카인드로퍼가 약혼한 사이란 말이야?
아니지, 아니야. 따지자면 종주국의 황자인 애쉬의 신분이 월등히 높고 어린 나이에 손쉽게 대마법사의 칭호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있지만… 으윽.
로제타는 벽 너머의 인물같이 느껴지고 애쉬는 부르면 쪼르르 달려오는 강아지 같은 느낌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로제타가 더욱 손해 보는 약혼 같았다.
물론 현실은 그것이 절대 아님을 알고 있다…….
등을 보이고 서있던 애쉬가 몸을 돌려 내 양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귓바퀴에 촉촉한 입술이 살짝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걸음마도 못 떼던 시절에 부모들끼리 마음대로 성사시킨 약혼이에요.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말은 마친 애쉬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답을 애원하는 것처럼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애쉬에게 뭐라 말을 해줘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무슨 염려를 한단 말이야? 문제가 될 건 또 뭐고.
“뭐, 그래.”
네 사정이니까, 네가 알아서 하겠지.
내뱉는 순간 명치 위쪽이 따끔하게 아파왔다. 손으로 그 부분을 슥슥 쓸어내렸다.
“야, 인마. 내 말 듣고 있어?”
애쉬가 다시 등을 돌린다.
“형님, 앞으로 이런 일로 저를 부르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다음엔 정말 크게… 응석 부릴 거예요.”
애쉬의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음성이 낮아진 것 같다. 그러나 말하는 투는 퍽 다정하여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너… 로, 로제타가 뭐가 모자라서 그러냐? 너 같은 놈한테 목매는 로제타가 불쌍하다.”
“그러니까 저 같은 놈한테 그만 관심 꺼… 거둬 달라고 잘 말씀 좀 해주세요.”
“지금껏 다른 남자 한번 안 만나고 너만 바라본 애야. 그런데 넌 로제타가 매년 보내는 진귀한 보석이며 약재며 동물들은 거들떠보기나 하냐? 로제타가 하도 안쓰러워서 일전에 자리 한번 만들어 줬더니 이상한 마법이나 걸어서 자리를 엉망으로 만들고 말이야! 너 때문에…….”
쥬디퍼의 말끝이 떨려왔다. 물기 어린 소리로 변질되어 갈 즈음에 말이 뚝 끊겼다. 쥬디퍼는 입가에 주먹을 쥐고선 숨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동자가 먼 산을 바라보듯 이 공간 안에 머물고 있지 않다.
무슨 일이길래 말을 잇지 못하는 걸까?
쥬디퍼는 복받쳐 오는 울음을 연신 참아 내리다가 습관처럼 짙은 금발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것이 쥬디퍼의 손길에 따라 너무도 쉽게 움직였다. 왼쪽으로 틀면 왼쪽으로, 앞으로 당기면 앞으로.
아, 저건…….
“가발?”
가발을 만지던 쥬디퍼의 손길이 꽝꽝 언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이 정확히 내 얼굴을 향한다. 쥬디퍼의 눈은 가을날의 산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부터 풍기는 매서운 기세보다 괜히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이마 뒤로 훌쩍 넘어가 버린 가발에 더욱 주의가 쏠렸다.
쥬디퍼의 이마가 훤히 드러나 조명을 오롯이 받으며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린다. 반질거리는 넓은 이마를 내놓고 무표정한 낯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코미디 그 자체였다.
푸흡. 웃음 섞인 호흡이 묵직하게 입안에서 터졌다.
그러나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깔깔 웃어젖히는 미련한 짓을 할 수야 없었다.
참자. 참아야 해. 슬픈 생각. 그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생각을 하자. 아버지의 탈모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어느 청년의 비극적인… 아니야! 이게 아니야!
쥬디퍼가 씨근거리며 가발을 움켜쥐었다. 그 덕에 관자놀이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이 위로 쑤욱 딸려 올라가 그의 매끈한 두피가 새초롬하게 드러났다.
“어머님께서 위독하시다는 낭설로 로제타와의 자리에 너를 불러들인 것은 내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잘못한 게 맞아. 그런데 너는 웬만한 핑곗거리 가지곤 눈 하나 꿈쩍 안 하니까 어쩔 수가 없었어! 그렇게 무모한 거짓말까지 하면서 자리를 마련해 줬으면 내 가상한 노력을 불쌍히 여겨서라도, 먼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로제타를 봐서라도 어울려주는 척이라도 해야지 내 금 같은 머리카락을 전부… 재로 만들어 버려?!”
어떤 사람들은 화나면 손에 잡히는 건 무엇이든지 집어 던지는 경향이 있다. 쥬디퍼도 그 부류인가 보다. 그런데 하필 잡고 있는 것이 본인의 가발이라니.
쥬디퍼는 있는 힘껏 자신의 가발을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풀썩. 결 좋은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더니 반동으로 머리카락들이 공중에 솟구쳤다가 실크처럼 우아하게 내려앉는다.
그 모습과 대비되는 쥬디퍼의 반짝민둥머리는 어찌나 동그랗고 매끈한지 정수리에서부터 썰매를 타고 내려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극악무도한 잔인한 놈!”
이번 건은 확실히 애쉬가 심하긴 했다.
반짝민둥머리가… 아니, 쥬디퍼가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아앗, 눈부셔.
조명을 반사하고 있는 빛이 정확히 눈을 때렸다.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만 성난 입매와 대비되는 평온한 민둥머리가 자꾸만 내 허파를 건드려댔다.
참아. 참으라고!
“영애, 초면에 굉장히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꼭 대답해 주었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제3자의 눈으로서 제 상황이 어떻게 보이시는지요?!”
“…두, 두상이 예쁘시네요.”
파들거리는 입가를 꾹꾹 누르며 힘겹게 이야기했다.
“감사합니다. 허나 그런 얘기를 들으려고 한 게…….”
애쉬가 팔을 들어 더욱 가까이 다가오려는 쥬디퍼를 막아섰다.
“형님, 저랑 로제타를 이어 주려다가 머리카락까지 전부 날리셨으면서도 또 제 앞에서 로제타 이야기를 꺼내시는군요.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뭐?! 그거야 로제타가 가여우니까…….”
“정말 그것뿐입니까? 타국의 공주는 가엽고 같은 배에서 태어난 동생의 의사는 무시해도 될 정도로요?”
“…….”
“형님도 이만 솔직해지세요.”
“…난 로제타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러니까요. 그게 참 이상하네요. 친동생이든 자신의 몸이든 내던지고서라도 종속국 공주의 행복을 바라는 게요. 그렇죠?”
“로제타를 단순히 종속국의 공주로만 치부하지 마.”
“제 마음과 형님의 마음이 다른데 어떻게 생각하는 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
애쉬가 막아선 틈을 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와씨, 웃겨 죽을 뻔했네.
자못 진지한 형제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나는 다른 세계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터져 나오는 폭소를 감내한 자신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잘했어. 훌륭해! 나 자신, 넌 뭘 해도 될 애다.
“그래, 내 눈에는 저 영애가 숱한 여인 중 하나로만 보이는 것같이 말이야.”
쥬디퍼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눈을 마주 보고 있기에 뭐라도 말을 꺼내야 할 듯싶어 입을 뻐끔거리는데 애쉬의 널찍한 등이 쥬디퍼의 얼굴을 가려버렸다.
딱히 할 말도 없었는데, 나로선 좋을 일이다.
“들어올 때부터 부서질까, 흠집이라도 날까 애지중지 감싸고도는 걸 모를 줄 알았냐? 아니, 네놈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지. 네 거라고 여기저기에 공표하듯이 도장 찍고 다니는 거야?”
“틀렸어요, 형님. 제가 선배 거예요.”
“…….”
애쉬가 선배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이 공간에 나밖에 없다.
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그의 등을 두드릴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듣자 하니 로제타 공주와 황족 형제의 사랑의 짝대기는 얽히고설켜 쌍방향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쥬디퍼는 로제타에게 연심을 품고 있지만 로제타를 위하여 그녀가 사랑하는 애쉬와 잘되기를 바랐다. 자신의 머리털까지 날려가면서.
참… 사랑 한번 지독하다.
저들에게는 꽤나 진중한 문제일지는 몰라도 공기와 같은 존재감으로 경청만 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단순 흥미만 유발시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데 자꾸만 그 치정 싸움에 왜 내 이야기가 나오냐 이거야.
끼어들까 말까 고민하던 와중에 쥬디퍼가 혹시 나와 애쉬의 관계에 대해 오해라도 할까 싶어 결국 애쉬의 등을 두드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내 행동을 제지하려는 듯 애쉬의 말이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공중에서 손이 멈췄다. 애쉬의 눈은 뒤통수에 달려있지 않으니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 수 없을 텐데도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형님, 저한테 엄한 여자 갖다 붙이지 말아주세요. 주인은 따로 있으니까요.”
쥬디퍼의 말이 시간을 두고 늦게 흘러나왔다.
“…내가 로제타의 행복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지금의 너는… 잘 알겠네.”
“글쎄요. 전 미련하게 한쪽의 행복만을 원하는 건 아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