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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놈이랑 해버린 이유 (2) (5/42)

4. 그놈이랑 해버린 이유 (2)

먼지만 쌓여있어야 할 우체통에 붉은 편지봉투가 이질적으로 꽂혀있었다.

잘못 배송 온 걸까? 누구지?

우체통 앞에서 한참이나 선 채로 고민했다. 별것이겠냐는 생각으로 꺼내 들 수도 있겠지만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난밤 꿈에 엄마가 살해당했던 날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와서였을까.

불온한 기운이 아침부터 내 주위를 맴돌았다.

세레즈인가.

엄마의 치아를 모조리 뽑아 편지로 받아볼 때의 충격이 어제 일처럼 생경했다.

이번엔 또 뭘까. 제발, 제발, 오배송된 편지이기를 바라며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꺼내 들었다.

이벨린 로벤스디 귀하.

내 이름이었다. 그러나 눈에 익은 필체와 로벤스디 가문의 것이 아닌 실이 잔뜩 긴장했던 내 몸을 맥이 탈 풀릴 정도로 이완시켜 주었다.

“로즈잖아.”

봉투를 뜯어 기숙사 방으로 향하는 동안 편지를 읽어 내렸다.

공부벌레 이벨린! 방학은 알차게 보내고 있니? 하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누구보다 방학을 잘 활용하고 있을 거야. 내 말이 맞지?

로즈의 방방 뛰는 하이톤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편지 내용의 대부분은 로즈가 방학이 주는 달콤한 ‘시간’을 얼마나 흥청망청 소비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침대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든가, 타 영지로 여행을 다녀왔다든가, 기념품으로 줄 것이 잔뜩 생겼으니 기대하라는 말도 있었고 프로와즈 저택의 주방장이 요리 학원을 등록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다른 주방장을 고용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권유가 떠올랐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로즈는 바로 다음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아무리 맛없는 음식이라도 로이 씨가 만들어주는 것이 좋거든. 내가 한 입 먹고 평가해 주기만을 기다리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어떡하지, 이벨린?

…너 미각을 잃었구나.

진심으로 로즈의 혀에 애도하는 마음을 표했다.

사실 작년에 프로와즈 저택에 갔을 때부터 주방장과 로즈 사이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로즈가 이제 와서 제 마음을 깨달았다고 해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로즈는 구구절절 방학 동안 있었던 일을 적어 내리다가 편지지 끝자락에 본론을 적어두었다.

아차!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빠뜨릴 뻔했네! 이벨린, 너를 우리 가문의 별장으로 초대할게. 이번에 아버지가 웨일턴에 내 별장을 새로 지어 주셨는데 나도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야. 아카데미 기숙사 안에서만 있으면 너무 답답하지 않아? 별장 바로 앞에 바다도 있으니 기분 전환도 할 겸 놀러 와.

아, 초대한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별장엔 아무도 없어. 네가 별장으로 올 즈음이면 나는 로이 씨와 함께 무작정 서쪽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거든. 조금 불편하겠지만 그 별장엔 시종인들도 아직 배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참고해 줘! 그런데 이벨린은 오히려 그편이 좋지? 음식과 술은 채워져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쉬고 먹다 오도록 해, 이벨린!

봉투가 묵직하다 싶었더니 별장의 약도와 열쇠가 딸려 나왔다.

열쇠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별장이라고?”

마침 베이커리 사장님이 휴가를 떠나 오늘부터 사흘간은 아르바이트를 가지 않아도 되었다. 남는 시간에 부족한 마법학 공부를 하려고 했었는데…….

힐끗 눈동자만 굴려 정면을 보았다. 책이 가득 쌓인 칙칙한 원목 테이블이 오늘따라 지겹게 느껴진다.

“바다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데.

확실히 바닷바람 맞으면서 정신 차리는 것도 좋을 것 같고, 황홀한 경치를 즐기며 조용한 곳에서 공부하는 것도 여러모로 괜찮게 느껴졌다.

게다가 술과 음식이 가득 쌓인 곳이라니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손바닥 위에 놓인 열쇠를 힘주어 쥐었다.

“간다.”

* * *

고민은 길지 않았고 애쉬의 기숙사 방으로 찾아가 녀석에게 통보했다.

“나 여행 갈 거니까 앞으로 사흘 동안 찾지 마.”

“선배?!”

“돌아와서 밀린 수업 제대로 다 할 거니까 과외비는 똑같이 지불하면 돼.”

“가다니요? 저를 두고 어딜 가세요.”

애쉬가 허리를 잡아 오며 매달려 왔다. 나는 황급히 그의 머리를 세게 밀었다.

“야, 떨어져. 너 함부로 내 몸에 손대지 마!”

애쉬와의 키스 이후 놈의 스킨십이 지나치게 의식되어서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유사 성행위를 해놓고선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가기엔 그… 농도가 너무 진했다.

머리를 좀 맑게 하고 마음을 다잡아서 돌아오자.

“선배, 제가 잘못했어요. 가지 마세요. 제발요.”

“야, 누가 들으면 오해해. 안 떨어져?!”

애쉬가 훌쩍거리며 마지못해 허리에 감았던 손을 풀었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어디라고 따라와.”

“어디든지 따라갈래요.”

“헛소리 말고 복습이나 해놔. 테스트해서 하나라도 못 맞히면 혼날 줄 알아.”

쾅!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을 벙긋거리는 애쉬를 등지고 문을 닫아버렸다.

녀석이랑 한번 입씨름이 시작되면 끝을 모르고 꼬리에 꼬리를 물기 때문에 그냥 무시해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지금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을지도… 아이 씨, 무시하자. 무시해.

* * *

별장으로 떠나기로 마음먹은 이후부터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방으로 돌아가 책과 옷가지 등의 짐을 간소하게 꾸려 가방 안에 넣었고 기차역으로 가서 웨일턴행 기차표를 끊었다. 피서를 떠나는 사람들이 기차역에 빼곡하게 모여있었다. 철새처럼 떼로 몰려드는 인파에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했다.

친절한 안내판 덕에 무사히 티켓 박스를 찾았고 웨일턴행 차표는 넉넉했으므로 자리를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머지않아 기차 출발 시각이 되자 승강장으로 발을 옮겼다.

생각지도 않던 충동적인 여행이어서인지 내가 기차를 타러 와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기도 하면서 즐겁기도 하다. 애쉬 덕에 지루한 일상은 아니었지만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듯 일정한 일과표를 따라 매일 움직이는 것은 그다지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오늘과도 같은 의외의 일탈은 나를 설레게 만드는 데에 충분했다.

굉음과 함께 검은 연기를 뿜어대며 기차가 코앞까지 달려왔다. 곧 멈출 기차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들뜬 마음을 강하게 바닥으로 내리 처박는 음산한 불쾌함이 기관지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뭐야.

깜빡, 깜빡.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수많은 인파 사이로 소름 끼치는 검은 인영 하나가 나를 사로잡는다.

커헉.

목이 졸리는 기분이다. 숨이 껄떡대며 뒤로 넘어가고 도저히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오질 않는다.

…세레즈!

그가 있었다. 검은 머리를 깔끔하게 이마 뒤로 넘긴 그가 인파 사이를 가로질러서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5년 만에 본 그는 머릿속에 남아있던 모습과 단 한 치의 변화도 없이 똑같았기에 환각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피부를 관통하는 역겨움과 두려움은 외면할 수도 없이 생생하다.

어떻게 여기에……!

끼이이익!

기차가 멈춰 섰는데도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빙하에 갇힌 것처럼 전신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는 태양의 열기를 머금은 듯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머리 위로 김이 내뿜어지는 것 같다.

점점 그가 가까워진다.

시팔, 움직여! 움직이라고! 여기서 벗어나란 말이야!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은밀하게 숨통을 조여 온다. 기회를 봐서 한 번에 목을 물어 목숨을 끊어놓기 위해서.

세레즈가 손만 뻗으면 나를 잡을 수 있을 만큼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끔찍한 손이 나에게 뻗쳐 온다.

“선배! 놓치겠어요!”

쿠웅!

“…….”

손목이 붙잡혔다.

그런데 세레즈의 것이… 아니야?

하얗고 긴 손가락이 나를 힘주어 잡으며 끌어당기고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그가 가는 대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가까운 곳의 2등석 칸 안으로 그를 따라 들어갔다.

“애쉬?”

“기차 놓칠 뻔했잖아요.”

“이게 어떻게 된…….”

심장의 떨림이 아직까지 멈추질 않는다.

피부 위를 날카롭게 스치는 아찔한 시선에 황급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쿠웅.

절벽으로 떠밀린 것처럼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졌다.

세레즈가 정확하게 내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검은 눈으로. 그의 입술이 비릿한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나를… 아니, 누구를 보는 거야.

세레즈의 살짝 어긋난 시선 끝에는 애쉬가 닿아있었다.

…안 돼.

어머니의 죽음, 쌍둥이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수많은 시종인들의 죽음. 숱하게 스쳐 지나가는 싸늘한 시신들이 머릿속을 무참히 짓밟아 놓았다.

창틀을 부여잡은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잔뜩 힘을 주었다.

저 새끼를 내가 죽여야지만……!

창문을 깨뜨리고 나갈 작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드르륵.

커튼이 닫혔다. 순식간에 시야가 차단되고, 커다란 손이 내 뺨을 감싸 쥐며 부드럽게 내 고개를 돌렸다.

“나, 여기 있잖아요.”

“…….”

“보고 싶어서 무작정 따라왔는데… 혼내 주지도 않을 거예요?”

마법같이 폐부에 가득 들어찼던 불쾌함이 빠져나가고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애쉬 녀석의 얼굴을 본 순간,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내 가슴속에 들끓었던 살의가 심해 저 너머로 가라앉았다.

“하아…….”

아직 얼떨떨한 기분은 그대로였지만 이성을 잃을 만큼 감정적으로 동요하던 것은 사라졌다.

“…어떻게 온 거야?”

“계속 뒤에 있었는데 전혀 눈치 못 채시더라고요.”

방금 네가 어떤 위험한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해?

녀석의 천진한 웃음에 열이 오른다.

이 답답하고 멍청한 녀석아.

애쉬가 세레즈의 시야에 들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세레즈의 손에서 목숨을 잃는 그 절망적인 순간을 또다시 겪고 싶진 않다.

행여나 녀석이 나 때문에 위험한 일에 말려드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 섞인 걱정이 차올랐다.

애쉬의 말에 답하지 않고 쏘아보기만 하자 녀석이 풀이 확 죽어서는 내 손등을 조심스럽게 툭툭 건드린다.

“…….”

“선배의 작은 뒤통수가 들떠있는 게 너무 귀여워서 알은체할 생각도 못 했어요. 죄송해요.”

“따라온 것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야.”

아카데미에 입학하고부터 5년의 시간 동안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던 세레즈가 왜 갑자기 나타났을까. 질 나쁜 우연일 뿐일까. 정말 그뿐일까.

“그럼 저 선배랑 계속 같이 다녀도 되는 거예요?”

내 속도 모르고 애쉬는 꼬리를 세차게 흔드는 강아지처럼 눈을 빛내었다.

쯔, 혀를 한 번 차 둔 뒤 눈을 감고는 의자 시트에 몸을 푹 기대버렸다.

덜컹. 덜컹.

등 뒤로 규칙적인 흔들림이 느껴진다.

“조심해, 애쉬.”

속삭이듯 얘기했다. 감은 눈 위로 그림자가 덮여오는 것이 느껴진다.

“제가 뭘 조심해야 할까요?”

답하는 애쉬의 뜨거운 입김이 내 입술 위를 덮쳤다. 눈꺼풀을 반 정도 떠올리니 아니나 다를까, 푸른 눈동자가 묘한 빛을 띠며 나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

“네? 선배.”

감흥 없이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애쉬가 고개를 조금 옆으로 틀며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입술이 스쳤다.

빠악!

망설이지 않고 애쉬의 뒤통수를 내리쳐 버렸다. 그 반동으로 나와 놈의 입술이 촉, 부딪쳤다. 야릇해져 가던 분위기는 단번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수업 시간 아니다. 웨일턴에 도착하면 깨워. 조금 잘 테니까.”

애쉬가 한쪽 손으로는 얼얼한 뒤통수를 쓰다듬으면서 다른 손으론 제 입술을 어루만졌다. 얻어맞은 주제에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술 사이로 웃음을 실실 내뱉는 꼴이 꼭 바보 같기만 하다.

“푹 주무세요, 선배.”

놀란 마음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던지라 졸리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은 또렷하기만 했다. 애쉬와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심적으로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었고, 잠시 생각을 정리할 필요도 있었기에 잠을 자겠다고 둘러댄 것이다.

세레즈…….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아직도 세레즈에게 붙잡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갇혀있는 중이다. 아카데미 입학은 성공적인 도망이 아닌 잠깐의 도피일 뿐이다.

실제로 나는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하여 아카데미를 꼭 다녀야만 했고, 돈이 없었기에 죽기 살기로 공부하여 수석의 자리를 유지해야 했다. 이 삶을 그 어느 누가 자유라고 말하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지금은 아카데미 학생 신분이라 세레즈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졸업한 순간 놈이 어떤 식으로 내 발목에 족쇄를 채울지 모를 일이었다.

진짜 도망은, 졸업한 이후부터 시작될 것이다.

힘을, 권력을 쟁취해야만 한다. 그 녀석이 함부로 나를 대하지 못하도록. 억지로 끌고 가서 저택 안에 가둬두지 못하도록. 내 자리를 굳건히 만들어 둬야만 한다.

…그리고 떠날 것이다.

완벽한 자유, 내 삶을 위해서.

* * *

“선배, 도착했어요. 이벨린 선배.”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감은 눈이 천천히 뜨인다. 관자놀이 옆에 닿는 딱딱한 감촉이 의아했다.

창틀은 아니고…….

“이제 내려야 돼요.”

애쉬의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은은하게 들려왔다.

아, 녀석의 어깨를 베고 잠들었었구나. 분명 하나도 졸리지 않았었는데. 내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었던 놈이 어느새 내 옆에 와서 어깨를 대줬는지도 모르겠다.

입가로 흐르는 침을 닦고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칸 밖으로 나가니 기차 안이 썰렁하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내렸나 보네.

늦장을 부린 만큼 빠르게 걸어 나갔다.

* * *

“와, 덥다.”

웨일턴이 바다를 끼고 있는 남쪽 지역이라 그런지 습도와 기온이 수도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땀이 송골송골 맺혀온다.

더운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애쉬 녀석도 열심히 손부채질하면서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눈가를 찌푸렸다.

“선배, 제가 손에 땀이 나서 그러는데 셔츠 단추 하나만 풀어 주시겠어요?”

“숙여봐.”

“감사합니다.”

녀석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자 정면에 목 바로 아래까지 단단히 매어진 셔츠 단추가 보였다.

지독하게 더워 보이네.

단추를 풀어주기 위해 팔을 드는데 가방이 걸리적거린다. 애쉬가 그것을 냉큼 받아들고 나서야 꽉 매인 단추를 손쉽게 풀어낼 수 있었다.

“저희 목적지가 어디인가요?”

“…너 그것도 모르고 따라온 거야?”

“알려주시지 않으셨잖아요.”

애쉬가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도대체 내가 어디로 갈 줄 알고 무턱대고 따라온 거야.”

“어디든 좋아요. 그곳에 선배만 있다면.”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솔직한 제 감정을 터놓고 말하는 것이 분명한 어투였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의 애착에 헛웃음만 흐를 뿐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로즈가 동봉해서 보내주었던 약도를 꺼내었다. 애쉬가 옆에서 그것을 같이 살펴보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아…….” 소리를 낸다.

“라즈니아 해변 근처네요. 거기라면 저도 알아요. 형님 따라서 몇 번 가본 적이 있거든요.”

애쉬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척척 옮겼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내 가방이 경쾌한 리듬을 타며 흔들린다.

정말 아는 게 맞는 걸까?

의심이 들었지만 너무도 확신에 찬 모습이었기에 군말 없이 녀석의 뒤를 따랐다.

몇 발자국 앞서 걷던 그가 휙, 뒤를 돌아 나를 보더니 다시금 쪼르르 달려와 내 옆에 선다.

“같이 가요.”

“가고 있잖아, 같이.”

“나란히 걷고 싶어요, 선배랑.”

“참 쓸데없는 로망이 많네.”

“설레잖아요, 함께 걷는다는 거. 선배는 안 좋아요?”

푹푹 찌는 더위에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감정이었다. 저 녀석 혼자 봄의 꽃밭 위에 누워있나 보다.

“더워 죽겠는데 헛소리야.”

“아…….”

턱 아래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헉헉, 진짜 무지하게 덥네.

그러나 애쉬는 더위에 강한 편인지 단추 하나 풀어준 것치고는 땀 한번 닦지 않고 잘만 걸어 다닌다.

문득 애쉬를 바라보니 땀으로 번들거리는 나와는 달리 피부가 무척이나 보송했다. 내 시선을 느낀 애쉬가 조금은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곤 나를 내려다본다.

“뭐야.”

“죄송해요, 많이 더우시죠?”

“말이라고 해?”

애쉬가 내 정수리에 손을 얹더니 살포시 눈을 감았다 떴다. 순간 애쉬의 손바닥 아래에서부터 시원한 기운이 거센 물줄기처럼 파아앗!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발끝까지 찬 에너지가 가득 들어찼다. 놀랍게도 타는 듯한 갈증마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너 이 새끼…….”

이런 좋은 마법이 있었으면 진작 걸어줘야 했을 거 아니야! 지 혼자만 시원했다 이거지?!

“거의 해제하지 않고 매일 걸어두고 있는 마법이라… 잠시 잊어버렸어요. 죄송해요, 선배.”

애쉬는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데구루루 굴리고, 걸어준 마법 덕에 더 이상 땀도 흐르지 않건만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연신 내 이마를 꾹꾹 눌러 닦았다.

“치워!”

팔로 그것을 쳐내곤 애쉬에게 물었다.

“마법 때문에 덥지도 않으면서 단추는 왜 풀어달라고 한 거야? 똥개 훈련 시키냐.”

“제가 감히 그럴 리가요!”

손사래를 쳐가며 그가 억울한 빛을 내보였다.

“그냥… 답답하잖아요. 태양도 눈 부시고.”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정확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저도 알았는지 애쉬가 헤실 웃어 보인다.

그래, 됐다, 됐어. 그다지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가 주었다.

다시금 상쾌해진 애쉬의 발걸음을 따라 내 가방이 녀석의 손아래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 * *

“기대 안 했는데, 생각보다 좋네. 바로 앞에 바다도 보이고.”

사실 생각보다가 아니라 상상 이상의, 엄청 엄청 만족스러운 별장이었다!

작은 오두막 별장을 생각했는데 바다 바로 정면에 떡하니 세워진 3층짜리 저택이 나와서 심히 놀라고 있는 중이다.

프로와즈 가문의 재산이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이야기는 얼추 들었지만 이런 저택을 로즈의 개인 별장으로 쓸 수 있을 정도인 줄은 몰랐다.

로즈, 너 다시 보인다. 우리 우정 영원히. 포에버.

두 눈이 휘둥그레진 나와 다르게 애쉬는 지극히 평온하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무덤덤할 정도다. 이까짓 게 뭐? 하는 것처럼. ‘아니야, 우리 집이 더 잘살아!’라고 과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애쉬의 눈에는 정말 별거 아니게 보이는 것이다. 마치, ‘이 정도 별장이야 다들 열 개씩은 가지고 있잖아?’ 하는 것처럼.

“이 방이 제일 넓네요. 잠은 여기에서 자는 게 좋겠어요.”

“그래.”

“짐 풀어둘게요.”

“어, 알아서 해.”

2층에 방 하나를 잡은 애쉬가 내가 싸 온 짐을 열심히 정리하는 동안 나는 식료품 관광에 나섰다.

그래, 이건 관광 수준이었다. 전 세계의 소스들을 다 모아놨는지 벽장 한 칸에 온갖 소스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돼지 한 마리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크기의 소시지와 대농의 밭이라고 착각하게 만들 만큼의 채소들이 빼곡하게 자리했다.

그러니까 축약하자면…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았다.

음식 구경에 넋을 빼놓고 걷다 보니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좁은 문 하나가 보였다.

여긴 또 뭘까?

문을 열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난다.

아, 여긴 그곳이다.

“와인 창고.”

확신은 사실로 다가왔다. 각지의 와인들이 어쩜 이렇게 예쁘게도 놓여있는지. 오늘 아주 내 혀가 호강하는 날이겠구나.

당장 한 병을 골라 들고 코르크 마개를 열고 싶은 것을 참았다. 나중을 위해서. 더 큰 즐거움을 위해서.

다시 위로 올라오니 어느새 짐 정리를 다 마친 애쉬가 창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있었다.

“뭐 해?”

“바다 가요, 우리.”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황금빛 모래사장과 에메랄드 물결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이긴 한다.

그런데 난,

“공부할 건데.”

바다가 예쁘긴 하지. 크고, 시원해 보이더라. 그런데 난 그걸 바라보면서 공부하려고 했던 거지 그 속으로 들어갈 계획 같은 건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쉽잖아요.”

애쉬가 성큼 걸어와서는 내 정수리 위에 손을 얹었다. 전신을 감싸고 있던 찬 기운의 베리어가 순식간에 걷힌다.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그럼 발만 담가봐요, 우리. 네?”

투명한 빛으로 일렁이는 바닷물이 시원해 보이긴 했다. 애쉬의 안내 덕에 생각보다 별장을 빨리 찾은지라 정해 두었던 공부 시작 시간까지는 여유가 조금 있었다.

잠깐 나갔다 올까. 애쉬가 내 망설임을 눈치채고 뒤에서 어깨를 잡아 천천히 밀기 시작한다.

“선배 공부할 때는 방해 안 할 테니까, 지금은 우리 둘이서 조금 즐겨 봐요.”

썩 내키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내뱉은 말 때문에라도 마지못해 끌려나가는 척 꾸며냈다.

* * *

그러나 직접 바다를 눈에 담은 순간 그것마저도 잊어버릴 만큼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망설였던 순간이 후회될 정도로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투명하고 깨끗한 에메랄드빛 물결이 철썩이며 육지 위로 쓸려 왔고 광활한 해수면 위는 보석 가루가 흩뿌려진 것처럼 반짝거렸다.

“선배, 수영할 줄 알아요?”

“아니.”

“그럼 절 꽉 잡고 계셔야겠네요.”

“발만 담글 건데 무슨 상관… 으앗!”

애쉬가 내 양 무릎 뒤쪽에 팔을 집어넣더니 단 한 번의 동작만으로 거뜬히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높아진 시야에 기겁하며 애쉬의 목에 매달리듯이 붙어버렸다.

“뭐 하는 짓이야?!”

“그냥 발만 담그는 건 너무 섭섭하잖아요.”

“하나도 안 섭섭하거든?! 아악! 야!”

애쉬가 나를 안고 힘차게 달리며 그대로 바닷속으로 돌진했다.

풍덩!

차가운 바닷물이 전신에 끼얹어지자 온몸의 신경들이 전부 깨어난 것처럼 예민해지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애쉬가 손바닥으로 바닷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닦아주며 웃는다. 애쉬 또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턱 밑으로 바닷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다 젖었잖아!”

“시원하죠, 선배?!”

“얼어 죽을! 이거 놔, 안 놔?!”

“어, 어어, 그렇게 움직이면 후회할 텐데.”

애쉬의 어깨를 퍽퍽 쳐가면서 힘껏 발버둥 쳤다. 녀석의 몸이 불안하게 갸우뚱거리다가… 또 한 번 풍덩.

“으악!”

“푸하하. 선배! 그러기에 후회한다고 했잖아요.”

애쉬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처음 물에 빠졌을 때보다 거하게 머리부터 고꾸라졌다.

애쉬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내 눈가를 엄지로 살살 닦아내었다.

이 자식이 진짜…….

홧김에 그의 가슴팍을 힘껏 밀어버렸다. 방심하고 있던 애쉬가 어어― 소리를 내더니 공중에 안쓰럽게 나부끼는 팔이 무색하게도 그대로 뒤로 넘어가 버렸다.

“푸흡!”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얼굴 위에 들러붙은 채로 일어나니 마치 바다에 사는 물귀신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까불지 말란 말이야.”

의기양양하게 말을 내뱉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째 애쉬의 눈빛이 묘하게 고집스럽게 변했다.

위험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야, 야야, 다가오지 마.”

그러나 애쉬의 장난기를 막아서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애쉬가 내 허리를 잡은 채로 힘을 주어 함께 뒤로 넘어갔다. 또 풍덩.

오기가 생겨서 짜디짠 바닷물을 나보다 녀석이 한 방울이라도 더 먹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계속해서 엎치락뒤치락 서로의 몸을 빠뜨렸다. 웃음기 어린 짜증과 통쾌한 웃음소리가 출렁이는 물결 사이에 조화롭게 섞여든다. 불순한 잡생각 하나 끼어들지 못하고 오로지 애쉬의 얼굴에 물을 뿌리거나 장난을 치는 것에만 집중했다.

한참을 물속에서 시간을 보내니 문득 체력이 현저하게 뚝― 떨어져 왔다.

하아. 하아.

이젠 손바닥으로 바닷물 한 줌 푸는 것조차 힘들다.

“이제 그만 나가요. 감기 들겠어요.”

이렇게 걱정 없이 웃어 본 게 얼마 만일까.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찬찬히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을 돌이켜보니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론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나도 이렇게 순수하게 즐거워서 웃을 수 있구나, 하고.

뻗어 오는 애쉬의 손을 맞잡고 물속에서 힘겹게 발을 떼어 육지로 나왔다.

“에취!”

별장에 다다르자 기침이 튀어나온다. 설마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릴까.

“선배, 잠시만요.”

빨리 들어가서 샤워도 하고 포근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싶어 죽겠는데 애쉬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러곤 전에 한 번 그랬던 것처럼 내 정수리 위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솨아아―

내 옷 속에 스며 들어가 있던 물이 수증기가 되어 공기 중으로 날아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옷이 바싹 말려졌다.

“감기 걸리시면 안 되니까요.”

“야… 너 이런 마법도 할 줄 알아?”

“선배한테 도움이 된다면 뭔들 못 하겠어요.”

“너 마법 하나는 진짜 내가 인정……. 잠깐만.”

나의 보기 드문 칭찬에 애쉬의 눈이 기대에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가, 멈칫하는 내 입술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해 보인다.

“내가 저번에 비 맞고 네 방 갔을 때, 그때는 왜 이런 마법 안 걸어줬어?”

애쉬가 한쪽 눈썹을 움찔거렸다.

“…이 마법이 사실은 마력 소모가 굉장해서 아무 때나 사용하지 못해요. 또 그때는 컨디션이 안 좋기도 했고…….”

“그래? 하긴 언제 어디서든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건 나 같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불공평하긴 하겠다.”

“마법이 만능은 아니니까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마력이라고는 콩알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나는 시험에 출제되는 마법의 기본 지식, 그러니까 역대 대마법사는 누가 있고 어떤 전쟁에서 어떤 마법사가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마도구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것들 말고는 아는 바가 없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실전 마법’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내가 마법을 쓸 일도 없을 텐데 마법의 시전 방법이라든가 하는 것을 알아둬서 뭣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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