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그놈 때문에 기겁한 이유 (3/42)

3. 그놈 때문에 기겁한 이유

나, 이벨린 로벤스디. 아니, 이벨린은 끈기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악착같지는 않았다.

로벤스디가로 입적되기 전, 그러니까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적만 해도 펜테리온국의 지도를 바탕으로 한 지루하고 따분한 만 개의 퍼즐 조각을 다 맞출 수 있는 끈기는 있었지만 그 퍼즐 조각을 맞추기 위해 목숨을 걸진 않았다. 절반 이상 맞춘 퍼즐이라 해도 여차하면 뒤엎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난 그 누구보다 악착같이 살고 있다. 퍼즐 조각 따위를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위해서. 아버지를 죽이고 로벤스디가의 주인이 된 세레즈 로벤스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벨린, 넌 목을 쭉 빼놓고 온종일 나만 기다리며 살게 될 거야.”

“…….”

“내 관심이 없으면 말라 죽어버릴 거야, 가엾게도.”

“…미친 새끼.”

그는 나에게 이상할 정도로 집착이 심했다. 그리고 나를 말 잘 듣는 개로 길들이고자 했다.

식사할 때에도 세레즈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메뉴를 원하는 양만큼 먹어야 했다. 식사를 거부하는 날에는 시종들이 의자에 내 팔과 다리를 묶고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하여 음식을 밀어 넣었다.

제대로 씹히지 않는 음식물이 통째로 목 속으로 꿀떡꿀떡 넘어가고, 도저히 몸이 받아들이지 못해 게워내도 세레즈가 그만하라고 명령할 때까지 나는 억지로 음식을 받아먹어야 했다.

세레즈가 나이프질 할 때마다 스테이크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벨린, 지금을 기억해. 억지로 먹으면 맛이 없잖아. 그렇지?”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세레즈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그 새끼는 매일 아침 6시마다 내 방으로 찾아와 창문을 열고 이마에 키스했다. 그리고 난 그가 내 이름을 불러야지만 눈을 뜰 수 있었다.

“이벨린.”

먼저 깨어나 있거나 억지로 눈을 뜨지 않으려고 하면 어김없이 시종들이 찾아와 나를 고문했다. 성인 한 명이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독방에 나를 가두고 그 안에 수십 마리의 수탉을 가득 채워 넣었다. 닭 털에서 나온 작은 벌레들이 내 전신에 옮겨 붙어선 꿈틀거리고, 시뻘건 닭의 눈알들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물도, 음식도 허락되지 않는 독방에서 나흘간 갇혀있었다. 살기 위해 닭 목을 비틀어 피를 마시며 버텼다. 한 시종이 문을 열자 내가 죽인, 혹은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린 닭 사체가 우르르 쏟아져 내렸고 나 또한 비틀거리며 독방을 빠져나왔다.

피와 악취를 덮고 있는 나와 다르게 세레즈는 세련된 정장 차림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이마 위로 넘겨 드러난 이목구비가 웃는 형상을 띠었다.

“이제 일어나야 할 아침이 언제부터 시작되는지 잘 알겠지? 이것도 기억해, 이벨린. 늦잠은 좋지 않아.”

저 새끼를 죽여 버려야겠다는 생각에 바닥에 널브러진 닭 모가지라도 잡고 안간힘을 다해 휘둘렀지만 헛수고였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을뿐더러 웬 시종 놈이 그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아이야, 나와 이벨린 사이를 막아선 안 되지.”

세레즈가 눈짓하자 모여있던 열 명의 시종들이 모두 제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 막아선 남자 시종의 전신에 칼을 박았다.

풀썩.

순식간에 난도질당한 시종이 내 앞에서 쓰러져 갔고 그 뒤로 미소 짓고 있는 세레즈가 서서히 드러났다. 그는 굳어버린 닭 피가 묻은 내 뺨을 천천히 쓸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 우선 씻고 식사부터 하자, 나의 이벨린.”

나는 이 사이코 새끼한테 점점 잠식당하고 있었다. 반항하기 위해 발버둥 치면 발버둥 칠수록 그는 나를 사지로 끌고 들어갔다. 극한의 상황에서 결국 내가 그에게 도와 달라 손을 뻗을 때까지.

세레즈를 죽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몰래 숨겨두었던 포크로 목을 찌르려고도 했었고, 아침에 내 방 창문을 여는 순간을 기회 삼아 추락시키려 등을 떠밀기도 했으며 세레즈의 방에 불을 지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무력으로 가볍게 제압당하거나 이 끔찍한 저택 안에 우글우글 모여 살고 있는 시종들의 감시 탓에 살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나는 한없이 약하고, 힘도 없었고, 가진 것도 없었다. 싫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정말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도망쳤다.

자존심 상하지만. 번듯한 보복 한번 못 해보고 달아난 것이 몹시 분하지만, 살기 위해 도망쳤다.

아니, 도망치는 중이다.

높디높은 로벤스디가의 담벼락을 야밤에 넘어섰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랬다가 두 다리가 잘릴 뻔한 이후로 그런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척, 포기한 척 굴었다. 말 잘 듣는 개새끼 흉내이건, 착하고 조신한 여동생 흉내건 시팔, 뭐든 다 했다.

얌전한 내 모습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세레즈의 행동은 점점 도를 지나쳤고, 그 새끼가 입술을 비벼올 때는 면상을 갈겨놓고 싶은 것을 안간힘을 다해 꾹 참았다.

1년이 조금 지날 즈음 나는 그에게 조금씩 요구하기 시작했다. 공부하고 싶어. 많은 책을 읽고 싶어. 내 실력을 테스트해 보고 싶어. 오빠에게 부끄럽지 않은 동생이 되고 싶어.

난 세레즈 앞에서는 적당히 멍청한 척했다. 오늘 가르쳐준 것을 다음 날 기억하지 못하고,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모르는 그런.

그리고 방에 돌아와선 아침 6시가 되기 전까지 미친 듯이 공부했고 세레즈가 들어올 시각이 되면 이불을 덮고 곤히 자는 척했다.

이 짓을 수도 없이 반복하여 책을 통째로 머릿속에 달달 외우게 될 즈음 황립 아카데미 신입생 시험이 열렸다.

세레즈는 당연히 내가 낙방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말했다. 그냥 재미 삼아 보고 오라고. 그리고 저녁엔 맛있는 것을 먹자고.

“응, 다녀올게.”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마부가 문을 두드려 무슨 일이냐고 물을 정도로 꺽꺽 웃어댔다. 그리고 눈물이 터져 나왔다.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이 병신 사이코 새끼야.

황립 아카데미는 지도 반대편의 먼 영지에서도 테스트를 보러 올 만큼 명망 높은 곳이기도 하며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곳이다.

먼 곳에서 오는 수험생들을 위해 결과 발표일까지 교내 기숙사는 개방되었고, 합격 발표가 이루어진 후에 불합격자들은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합격자들은 선택 여하에 따라 기숙사에 남아 입학식까지 생활할 수 있다. 입학식 이후에는 모두가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고.

나는 보란 듯이 수석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이 말은 곧 등록금을 전액 지원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고 빌어먹을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세레즈라도 황실에서 운영하는 황립 아카데미에까지는 손을 뻗지 못했다.

게다가 입학식 당시의 나는 열여덟 살이었으므로 제국 기준에서 미성년자도 아니다. 보호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내 의사를 스스로 결정해도 되는 나이.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한다고 결정한 이상 그 무엇도 나를 억지로 끌어낼 수 없었다!

세레즈가 로벤스디 가문 마차에 앉아서 창문 너머로 황립 아카데미 정문 안에 있는 나를 뚫어져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은 무척 인상 깊었다.

나는 그 순간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굴며 웃어젖혔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수군거리더라도 괜찮았다. 난 정말 미칠 만큼 즐거웠으니까. 저 세레즈가 제대로 한 방 맞은 듯한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세레즈는 나에게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버티고 버티다 결국은 나가떨어져서 로벤스디가의 저택, 세레즈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 * *

퍼억!

걷어찬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전기가 지이잉 올랐다.

저 망할 황금 동상.

한 번 더 걷어차 주려는데 멀리서부터 경비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시팔, 걸렸다.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 겨우 경비를 따돌리고는 곧바로 애쉬를 찾아갔다.

오늘은 애쉬와 약속했던 과외의 첫 수업일이다.

녀석은 자신의 기숙사 방에서 과외 수업을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 황실 소속의 아카데미이니 따지고 보면 이사장 아들인 놈의 기숙사 방은 넓고, 안락하고, 근사했지만… 내가 사용하는 기숙사 건물과 정반대 편에 위치해 있었다.

“날도 덥고 다리도 아픈데 언제 거기까지 가겠니.”

단호하게 얘기하자 “그럼 선배의 방으로…….”라는 헛소리를 하길래 귓가의 파리를 쫓듯이 손을 휘저어 버렸다. 내 프라이빗한 공간은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란다.

그럼 어디가 좋을까. 도서관, 빈 강의실 등등의 후보들이 나왔지만 강의실은 간혹 졸업반 선배들의 스터디가 있거나, 보충 수업이 진행될 가능성이 있는지라 매번 빈 곳을 찾기가 번거로워 탈락이었고 도서관은 과외하기에는 부적합한 장소였다.

그렇다고 도서관의 야외 테라스로 나가자니 햇볕이 따가워서 우리 둘 다 탄 감자가 되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거리도 가깝고 빈 강의실도 넘쳐나는 버려진 구 건물이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기숙사 바로 뒤편에 있는 건물인데 마법 과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실기실이 부족한 체술 과목을 위하여 건물을 개조하려 한 곳이었으나, 모 귀족의 기부금으로 도처에 새로운 체술 실기 건물이 지어져 버린 탓에 버려진 구 건물이 되었다.

구 건물 안은 안개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먼지가 자욱했다.

애쉬와 약속했던 장소의 강의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니 그가 웃으며 나를 반기었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꽤 오랫동안 열어뒀는지 강의실은 한결 쾌적하다.

“선배, 오셨어요?”

애쉬의 목소리가 퍽 상큼하여 더 울화가 터진다.

너, 이 새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놈의 멱살을 휘어잡아 끌어내렸다.

“저 꼴사나운 동상을 철거하든지, 네가 나한테 철거당하든지. 선택해.”

“네? 철거를 왜…….”

“쪽팔려 죽겠으니까 저 동상 좀 어떻게 해보라고!”

녀석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아……!” 소리를 내었다.

그래, 너 같음 안 쪽팔리겠냐?

“죄송해요, 생각이 짧았어요. 선배의 위용이 조금 더 잘 나타나려면 아무래도 크기가 더 커야 됐는데……. 다섯 배 키워서 제작해 놓겠습니다.”

“너 미쳤냐?!”

“그것도 마음에 안 드신다면 선배 이름으로 한 학술관을 세울게요. 확실히 동상보다는 감사패 같은 느낌이 나으니까요.”

“어딜 봐서 감사패 같은 느낌이 나는데!”

환장하시겠다.

따져 물으면 물을수록 놈은 더욱 엄청난 대답을 했다. 아예 30루덴 단위의 화폐를 생산하여 그곳에 내 얼굴을 박아 넣겠다고까지 한다.

경악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결국 두 손으로 놈의 입을 막아버렸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졌다. 논리가 통하지 않는 인간과 싸우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녀석은 여전히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채였다.

“책이나 펴.”

황금상 위에 시멘트를 발라버릴 계획을 세우며 자리에 앉았다.

이벨린, 황금상은 잠시 잊자. 과외비만 생각하는 거야. 돈만, 돈만, 돈만.

내 앞으로 착착 쌓여갈 고액의 현금 다발을 생각하니 정신이 점점 맑아져 갔다. 10초 전만 해도 한 구석 쥐어 박고 싶었던 애쉬의 얼굴이 갑자기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인다.

애쉬가 허리를 곧게 펴고 책상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제국사는 흐름이야. 시험 범위만 바짝 공부하는 것보다는 전반적인 인과 관계를 파악해 가면서 공부하는 것이 좋아. 기억에도 훨씬 잘 남고 이해도 빠르게 될 거야. 공부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각해.”

“넵!”

건국 초기부터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나갔다. 책의 빈 공간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녀석을 이해시키려 부단히 노력했다.

다행히도 애쉬는 알아듣는 것이 빨랐다. 진도는 막힘없이 술술 나갔고, 오늘 배우려고 했던 분량을 넘어서기까지 했다.

정해 놓았던 페이지 수가 한참을 넘어섰네.

열심히 설명하던 것을 멈추고 잠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자 목이 칼칼하게 아파 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크흠.

작게 헛기침하자 애쉬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유리 물병을 건넸다. 보온 마법이 걸려 있었던지 손끝에 유리병이 닿는 순간 아찔한 찬 기운이 퍼진다.

보온 마법을 오래 유지하려면 꽤 많은 양의 마나가 소모된다고 하던데… 저놈은 괴물인가?

“카밀러 차예요. 목 아프실까 봐 챙겨왔어요.”

“어, 고마워.”

한 모금 입에 넣자 고유의 꽃 향이 은은하게 퍼지며 달짝지근하고 시원한 맛이 느껴졌다. 꿀꺽꿀꺽, 여러 번 삼키니 묵직했던 병의 무게가 확연히 가벼워진다.

“하아, 시원하다.”

입가를 닦으며 유리병을 다시 건넸다.

목도 축였겠다, 다시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무언가가 자꾸만 내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애쉬는 분명 정면에 있건만 나는 사선 아래,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애쉬의 오른쪽 어깨 쪽으로 눈이 갔다.

저게 뭐야?

검은 물체가 애쉬의 어깨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꿈틀?

“선배, 제 어깨에 뭐가 묻었나요?”

“야, 움직이지 마.”

“네?”

그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려 하자 그 검고 작은 것이 푸드덕 날개를 꺼내려 했다.

“애쉬!! 가만히 있어. 절대 죽어도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죽여버릴 거야!”

애쉬의 어깨 위에서 바 선생 한 쌍이 정답게 더듬이를 맞대고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 한 쌍이.

커플들을 보며 ‘이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라고 어디서 주워들어나 봤지 진짜 바 선생 커플이 내 눈앞에 있을 줄은 몰랐다!

웬만한 충격에도 끄떡하지 않는 나이지만 바 선생은 예외이다. 저 쓸데없이 윤기가 좔좔 흐르는 검은빛하며 긴 더듬이, 그리고 가냘픈 다리들. 혐오감으로 따지자면 예술 점수 기술 점수가 모두 100점 만점인 바 선생을 누가 태연히 바라볼 수 있겠냔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양인 애쉬는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고개 움직이지 마! 아악! 날려고 하잖아,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그러나 애쉬는 내 처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정통으로 두 쌍의 눈과 마주쳤다. 바 선생 커플과의 역사적인 첫 대면이었다.

“…선배, 이게 뭐…….”

“침착해, 침착해, 애쉬 카인드로퍼.”

“…선배… 저…….”

애쉬의 손끝이 발발 떨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하얀 얼굴이 아예 창백해져서는 제발 살려달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간다. 내가 쫓을게. 가만히.”

방금까지 열심히 공부했던 책을 들고는 굳어있는 애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나 영악하고 영리한 바 선생은 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쉽게 눈치채 버렸다.

푸드득!

바 선생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처럼 날개를 푸드득거렸다. 나한테도 소름 끼칠 정도로 크게 들렸는데 애쉬의 귀에는 얼마나 끔찍한 굉음으로 찾아왔을까.

아니나 다를까, 애쉬는 이성을 놓고 말했다.

“선배!!”

애쉬가 갑자기 자신의 셔츠를 뜯어내었다. 툭! 툭! 소리와 함께 단추가 떨어져 나가며 바닥을 구른다.

애쉬가 상반신을 드러내 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진정해!”

“선배!”

애쉬가 오른쪽 어깨에는 바 선생 커플을 매달고 상반신을 훤히 내놓은 채로 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뭐야, 이 끔찍한 형상은!

나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쳤다. 양팔을 벌려 오며 달리는 애쉬는 흡사 변태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악! 오지 마!”

“떼 주세요! 떼 주세요!”

구 건물을 빠져나가 쨍쨍한 햇볕 아래에서 달리고 또 달렸다. 뜬금없는 추격전에 아카데미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우리 둘에게 쏠렸다. 동상을 지키고 있던 경비들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나를 보고 바짝 긴장했다.

나는 두 눈으로 그들에게 외쳤다.

‘도와줘요! 바 선생 커플이 날 쫓아와요!’

경비들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내가 동상을 휙 지나쳐 가니 곧바로 경계를 풀어버린다.

아니!! 진짜 나(사람)보다 나를 본뜬 동상이 더 중요하다는 거야?!

무척이나 서글픈 현실에 입맛이 썼다.

* * *

“선배……!”

우리는 한참이나 달리고 또 달렸다. 결국 둘 다 숨이 받쳐 기어가는 수준으로 속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터덜터덜.

“하아, 하아.”

“선배.”

“그만 불러. 하아, 좀.”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내가 먼저 멈춰 섰다.

애쉬가 내 뒤까지 졸졸 쫓아와서는 내 소맷귀를 잡아당긴다.

“없어졌어요……?”

그렇게 달렸는데 당연하지.

볼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다행이다.”

덥수룩한 애쉬의 머리가 땀에 젖어서는 보기 사나울 정도로 뭉쳐있었다. 나야 앞머리도 없는 짧은 단발머리이니 귀 뒤로 넘겨버리면 시원해질 일이지만 애쉬는 얼굴 위로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다닥다닥 붙어있다. 보는 내가 더워질 정도로.

팔을 들어 올려 애쉬의 금발을 이마 위로 쓸어 넘겼다.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와 코 선이 꽤 남자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수에 찬 것처럼 살짝 젖어있는 푸른 눈동자를 꽤 오랜 시간 동안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애쉬도 눈을 피하지 않았기에 순간 나는 아름다운 명화를 보고 있는 것이라 착각했다. 그가 눈을 한 번 깜빡일 때까지.

“제 머리, 땀 때문에 축축할 텐데.”

“내 손바닥도 만만치 않아.”

애쉬의 머리를 여태 부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살짝 민망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러곤 다시 그의 머리를 헤집어 놓았다.

더럽게 잘생겼네.

애쉬가 내가 해주었던 것처럼 머리를 한 손으로 넘겼다.

“뛰면서 생각해 봤는데, 역시 제 기숙사 방이 좋겠어요.”

바 선생을 또 만나는 것보다야… 조금 멀더라도 나도 그편이 낫다고 판단되었다.

“그래.”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선 웃었다.

“내일 또 봐요. 제 방에서.”

* * *

바 선생 사건 이후로 우리는 애쉬의 VVVIP 기숙사 방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첫날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애쉬의 기숙사 방을 찾아갔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하녀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길래 방을 잘못 찾은 줄 알았다.

“아, 눈부셔.”

얼마나 쓸고 닦았는지 방이 번쩍번쩍 광이 났다. 햇빛에 반사된 얼음판같이 바닥이 빛을 내었는데 발을 잘못 헛디디면 넘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

우리는 첫날에 비해 큰 사건 사고 없이 무난하게 수업을 이어나갔다.

아, 사소한 문제라면 애쉬가 나를 자꾸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선생님 아니다.”

“하지만 선배는 선배라고 하기엔 너무 근사하신걸요.”

“그런 의미 없는 호칭은 필요 없어. 존경할 거면 돈으로 해.”

애쉬는 다음 날 거액의 수표를 건넸다. 2주 치 용돈을 당겨 받았다고 한다.

제국사 수업에 물이 올랐는지 애쉬가 수업 시간을 연장해 달라고(과외비와 수업 시간은 비례한다.) 떼를 쓰기에 결국 베이커리 아르바이트 시간을 절반으로 줄였다. 알려주는 대로 스펀지처럼 지식을 쏙쏙 빨아들이는 녀석 덕분에 나도 가르치는 재미가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가끔 이놈이 들으라는 수업은 안 듣고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열심히 책을 보며 설명하는 척하다가 휙! 하고 고개를 들면 애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책을 보았다.

“내 얼굴에 바 선생이라도 묻었어?”

“…아니요.”

“집중해.”

소소한 해프닝은 언제나 벌어졌지만 그런대로 평범하게 과외 수업을 진행하던 중에 사고가 하나 터졌다. 그것도 아주 민망한 사고가.

* * *

그날은 장대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대낮인데도 먹구름 탓에 저녁처럼 사위가 어두웠다. 우산이라는 것이 분명 비를 막아주기 위해 발명된 것일 텐데… 어째서인지 바람을 타고 빗방울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애쉬의 방 안에 들어섰을 때의 나는 이미 비에 푹 담가져 버린 상태였다.

“선배, 괜찮으세요?”

“좀 씻어야겠다.”

바닥에 빗물을 뚝뚝 흘리며 태연하게 녀석의 방에 딸린 샤워실로 들어갔다. 애쉬가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시해 버렸다. 이 꼴로는 수업이고 뭐고 자리에 앉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찝찝하니까.

“아무거나 갈아입을 옷 좀 줄래?”

“제 옷을요?”

“벗고 나올 순 없잖아.”

“…….”

화악!

애쉬의 목덜미가 눈에 띄게 붉어졌다.

너무 입방정을 떨었나.

녀석이 우왕좌왕하며 옷장 앞에서 난리 치다가 아예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상반신을 밀어 넣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에서 쿠당탕! 하며 좋지 않은 소리가 났다.

당황해하는 애쉬의 반응 탓에 괜히 아무 생각 없던 나까지 껄끄러워졌다. 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정말 옷도 없었으니… 뺨만 긁어 대며 샤워실 문 앞에 서서 애쉬를 기다렸다.

“제 옷은 다 너무 커서요, 우선 이 가운이라도 입고 계실래요?”

척 보기에도 새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왼쪽 가슴팍에 금실로 장식되어 있는 황가의 문장이 자꾸만 신경 쓰인다.

“이거…….”

“황족들만 입을 수 있는 가운이라서 증표처럼 새겨 넣은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나름 좋은 원단을 사용한 거라 살갗에 쓸리지도 않고 입을 만할 거예요.”

…입을 만할 뿐이냐? 다른 사람이었으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면서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파들거리는 손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가운 밑으로 양손을 숨겼다.

최대한 빨리 씻고 나가야지.

…했던 것과 다르게 따뜻한 물을 맞으니 몸이 녹진하게 풀어졌다. 손발이 퉁퉁 부을 때까지 샤워하다가 탈수증상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미치고서야 겨우 샤워실을 빠져나왔다.

비에 젖은 옷과 속옷은 열심히 빨아 안에 걸어두었고 품이 넉넉한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내가 입으니 아슬아슬하게 땅에 끌릴 정도로 가운은 컸다. 소매는 몇 번을 접어 올렸는지 모른다.

“다 씻으셨어요?”

“응, 고마워. 아차, 안에 내 속옷 널어 뒀으니까 너무 놀라지 마.”

“…….”

“놀란 것 같네.”

애쉬의 눈이 내 얼굴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 하며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수업하자.”

이날 수업은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물기 때문인지, 창밖을 두드려대는 빗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터질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는 저 녀석 때문인지.

어떻게든 꾸역꾸역 정해진 진도까지는 다 나갔으나 평소처럼 후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수업을 마쳤으니 곧바로 돌아가야 하는 게 맞았지만 지금은 그러기도 힘들었다. 아직 옷이 마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턱을 괴고 맞은 편의 애쉬를 바라보았다.

“굳이 여기 앉아있을 필요 없어. 침대에 누워있든지 여하튼 편하게 있어. 난 옷 마르면 바로 갈 거니까.”

끄덕이는 고개와 다르게 애쉬는 요지부동이었다.

“네가 거기에 있으면 내가 불편하다니까.”

“그럼 선배가 침대에서 편하게 있으세요. 전 여기에 앉아있을 테니까요.”

“머리도 안 말랐는데 무슨.”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끼익.

의자 밀리는 소리와 함께 애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수건 한 장을 가지고 내 뒤에 섰다.

“제가 말려 드릴게요.”

내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애쉬가 수건을 펼쳐서 머리를 조심스럽게 닦아내었다. 손이 워낙 커서인지 내 뒤통수가 한 손에 잡히는 것이 느껴진다.

거절하려고 했으나 적당히 시원하게 머리를 마사지하고 부드러운 수건의 감촉이 나름 좋아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애쉬가 이마를 살짝 뒤로 밀며 자신의 손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애쉬에게 완전히 의지하며 몸을 늘어뜨렸다. 꼼꼼하게 머리카락을 닦아내는 손길에 점점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때 애쉬의 목소리가 편안한 자장가처럼 울려 퍼졌다.

“실은, 선배가 머리 자르는 거 본 적이 있어요.”

의외의 말이었다. 잠에 취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언제?”라고 웅얼거린 것 같긴 하다.

애쉬는 용케도 내 말을 알아듣곤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1년 전에요.”

아아, 그날.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날을 맞추어 세레즈가 편지 한 통을 보냈는데 내용은 없고 조약돌 같은 사람의 치아가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어머니의 것이었다. 일전에 빗길에 넘어져서 앞니가 깨진 적이 있었는데 많이 보던 그 앞니가 보였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기숙사 건물 앞에서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가 들끓었다.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미치도록 한심했다.

멍청하게 눈물만 흘리고 있는 꼴이라니. 이가 갈리고 화염을 삼킨 듯 속이 타올랐다.

…세레즈!

이 분노를, 폭발하는 감정을 표출하고 싶었다. 세레즈에게.

눈이 반쯤 뒤집힌 채로 주위를 살폈다. 제 주인의 교복 밑단에 튀어나온 실오라기를 잘라주고 있는 시종의 가위를 빼앗아 들고는 그 자리에서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렸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졌지만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 들리지도 않았다. 세레즈와 같은 이 저주받을 검은 머리카락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한 가닥도 남기지 않고 빡빡 밀고 싶었지만 가위로는 한계가 있었다.

두상이 다 드러날 정도로 짧게 잘라버린 후 그것을 모조리 주워 담아 세레즈에게 보냈다. ‘나는 더 이상 로벤스디가 아니고 네 개도 아니야, 빌어먹을 새끼야.’라는 뜻으로.

“그날 선배가 제 시종의 가위를 빼앗았잖아요.”

아, 그게 너였니?

“선배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지만, 굉장히 화난 것처럼 보였어요.”

실제로 그랬으니까.

“그리고, 멋있었어요.”

“…….”

“진짜 멋있었어요. 반해 버릴 정도로.”

네가 또라이가 맞긴 맞는구나.

머리를 말리는 애쉬의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적당히 기분 좋게 어루만지고, 목소리는 위험할 정도로 나긋하다. 이렇게 하면 내가 잠에 안 들고는 버틸 수가 없잖아.

까무룩. 어둠이 찾아왔다. 현실과 꿈의 경계선에서 어렴풋이 애쉬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그날 전 선배한테…….”

* * *

허리가 뻐근하게 아파왔다. 고개가 옆으로 떨어지려 하자 따뜻한 것이 내 뺨을 잡고는 받쳐주었다. 그 온기가 썩 마음에 들었는지라 나도 모르게 뺨을 비벼댔다.

뭐지? 기분 좋아.

구름 속에 파묻혀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으움…….”

“선배, 일어나셨어요?”

좋은 목소리. 유치한 생각이지만 천사가 귓가에서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것만 같다.

“선배?”

천사가 부르는 호칭치고는 썩 이질감이 있네. 마치 애쉬 그 녀석이 부르는 것처럼…….

“애쉬?”

“네, 저예요.”

번쩍! 눈이 떠졌다. 내 뺨을 받치고 있는 따뜻한 것은 애쉬의 손이었고 천사 어쩌고 생각했던 것도 애쉬의 목소리였다.

아뿔사, 얼마나 잠들었던 거지?

창밖을 보니 어슴푸레한 저녁 같던 하늘이 이제는 완전히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왜 안 깨웠어?”

“주무시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이셔서…….”

행복해 보이기는! 잠깐, 그럼 자는 동안 내내 머리를 받쳐주고 있었던 건가?

아니나 다를까, 애쉬가 손을 몇 번 털며 한쪽씩 번갈아 가면서 주무르기 시작했다.

에이 씨,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줘봐.”

“……?”

“손, 줘보라고. 주물러줄 테니까.”

“안 저려요.”

“거짓말은.”

자꾸만 내빼는 애쉬의 손을 확 낚아채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

어라? 오랫동안 앉아있던 탓인지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몸이 갸우뚱 기울어진다.

어, 어…….

붕붕 허공에 손을 휘저어 봤으나 이미 늦었다.

철푸덕 소리와 함께 몸이 넘어갔다. 그것도 애쉬 녀석을 깔고 넘어가 버렸다. 애쉬가 나를 받쳐주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함께 기울어져 버린 듯했다.

“서, 선배!”

“아윽, 미안하다.”

“그것보다 손 좀 치워 주시겠어요……?”

“어?”

손이 좋지 못한 곳으로 떨어져 버렸다. 하필, 그곳. 애쉬의 두 다리 사이로. 내 손이 닿은 곳에 과녁이 있다면 정중앙을 딱 맞혀버린 것같이 아주 정확히 짚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잘 느껴졌다. 녀석의… 페니스가.

“…….”

“…….”

떼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의문이 들었다. 이 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커져있었던 거지? 내가 비를 쫄딱 맞고 왔을 때부터? 속옷을 벗고 가운만 입었을 때부터?

머리가 핑핑 돈다.

“…선배.”

그가 울음을 참는 것처럼 목소리를 내며 불렀다.

“너, 섰어?”

녀석의 키만큼이나 거대한 페니스는 나를 심히 당황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애쉬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만큼은 아니었다.

“안 섰는데요.”

“미친.”

…이 녀석은 다리 사이에 흉기를 품고 있었다.

* * *

스물세 살이나 먹어놓고 성(性)에 대해 ‘난 아무것도 몰라요.’ 할 만큼 무지한 편도 아니었고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물론 딱 한 번뿐이지만.

내 처음이자 유일한 ‘한 번’의 상대는 마법학 수업을 같이 들은 적 있던 크로우 남작가의 장남 폴 크로우였는데, 공공연히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소문내던 놈이었다. 그놈의 끊임없는 대시와 주위의 등쌀에 밀려 반년가량 사귀었었고 나의 바쁜 일정 탓에 헤어지고 말았다.

당시에 아카데미 동기들이 농담처럼 주고받던 말에 따르면 폴의 페니스는 큰 편에 속한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사귀던 당시에 폴은 다정했으나 첫 경험 때만큼은… 난폭했다.

강제적으로 관계를 이어갔다는 말은 아니고, 당시의 폴은 끊임없이 괜찮다며 나를 달랜 것과 다르게 아래는 얻어맞고 있는 것처럼 아팠다. 으레 말하던 오르가슴은커녕 좋은 기분이라곤 1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애쉬 그 녀석은…….”

방망이를 아래에 쑤셔 넣는 기분일 거야, 으으.

손에 닿았던 페니스의 감촉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의 페니스를 쥐었던 대로 손을 말아보았다.

화들짝.

“무서운 새끼네, 이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차후 애쉬와 잠자리를 갖게 될 사람이 조금 측은해진다. 얼마나 아플까. 뭐, 내 알 바는 아닌지라 걱정은 금방 훌훌 털어졌다.

“애쉬 녀석 많이 당황했었지.”

녀석의 귀가 유독 붉게 물들어 있었던 것이 손아래의 감촉과 함께 떠올랐다.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그 순간… 애쉬의 모습이 야하다고 생각했고 조금 더 괴롭혀 주고 싶다는 불순한 충동까지 들었었다. 애쉬가 곧 흐를 듯 눈물을 방울방울 매달고 내 이름을 부르지만 않았어도 아마 조금 더 짓궂은 장난을 쳤을지도 모른다.

“이, 이벨린 선배. 제발요.”

피식.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눈가를 벅벅 비볐다.

하, 이제 그만 생각해야지.

벌써 잠잘 시간을 훌쩍 넘겨버리고 말았다. 내일 하루도 일정을 무사히 소화해 내기 위해선 지금 자지 않으면 컨디션이 위험했다.

그러나 꿈속에서까지 애쉬가 검붉은 방망이를 들고 내 뒤를 졸졸 쫓아왔기에 결국 잠을 설치고 말았다.

* * *

대지 위로 무자비하게 쏟아졌던 비가 그치고 물웅덩이만이 곳곳에 생겨났다. 완전히 장마가 지나간 것은 아니어서 무거운 구름은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하늘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온은 괜찮았다. 햇볕도 가려지고 적당히 공기도 서늘하여 외출하기에 나쁘지 않은 날이다.

“오늘은 밖에 나가서 하자.”

찰나의 쾌적함을 놓치기에는 썩 아까운 마음이 들어 애쉬를 데리고 근처 정원으로 나갔다. 고상한 귀족 자제들의 티타임을 위한 곳이었기에 티테이블이긴 하지만 어찌 됐든 책을 놓을 만한 테이블도 마련되어 있어서 수업하기엔 어려움이 없었다.

“날씨가 정말 좋아요, 선배.”

“먹구름밖에 없는데.”

“선배랑 있으면 여름은 여름대로 좋고, 겨울은 겨울대로 좋을 것 같아요.”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워. 책 펴.”

“네, 선생님.”

“선배.”

“네, 선배…….”

녀석은 늘 그렇듯이 수업하는 내 말을 지나칠 정도로 집중해서 들었다.

문제는 나였다. 내가 집중되질 않았다. 지난밤 꿈에서 내내 애쉬에게 시달렸기 때문일까. 테이블 밑으로 내려가 있는 내 손이 자꾸만 녀석의 페니스를 쥐었던 모양대로 변해 갔다.

이런 미친.

사실 날씨는 핑계였다. 애쉬의 밀폐된 방에서 놈을 마주 본 채로 수업에 온전히 몰입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정원으로 끌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녀석에게 성적으로 동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서지 않은 상태로 그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충격적이라 머릿속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몇몇의 소심한 남자들은 자신감 회복을 위하여 아래에 보형물을 끼기도 한다던데… 애쉬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까지 들었다.

“선생님, 계속 같은 곳만 읽고 있는데요.”

“아.”

문장 하나에 검은 잉크가 여러 번 칠해져 있었다.

“중요해서 그래. 절대 잊어선 안 돼.”

“아래의 자료를 참고하시오.”

애쉬는 문장 위에 별표를 세 개 그렸다.

이 새끼, 일부러 이러나.

떠오르는 잡생각을 지우려고 부단히 노력한 결과 방금과 같은 실수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의 페이스를 되찾은 이후로부터는 거침없이 진도를 나갔다. 책에 ‘그 내용’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드네리오 공작은 서른여섯 명의 첩을 두었는데, 한 밤에 열두 명의 여인을 품을 정도로 정력이 …….”

…라는 문장과 함께 드네리오 공작의 그림이 실렸다. 밤의 마왕이라 불리는 별명 때문인지 그의 성기는 유독 크게 묘사되어 있었다.

젠장할.

“…선배?”

“크흠, 흠.”

진짜 집중 못 하겠네.

나는 황급히 페이지를 넘겨버렸다.

“아직 다 안 읽으셨는데요?”

“중요한 내용 아니야.”

“그래도 궁금한데…….”

“시간 낭비야.”

애쉬가 긴 손가락을 테이블 위에 톡톡톡 두드리면서 침울하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궁금해요. 밤에… 어떻게 하셨길래 책에까지 실리신 건지.”

놈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바로 답하지 못하고 금발의 머리카락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벽안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애쉬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머리카락이 쏠리며 푸른 눈이 완전히 드러난다.

“네? 선배.”

“별것 없어. 그냥… 되게 만족을 잘 시켜줬나 보지.”

“만족을 잘 시켜주다니, 어떻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나도 만족해 본 적이 없는데.

“나중에 저승에서 만나면 여쭤봐.”

애쉬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그럼 저승에 갈 때까지는 영원히 모르겠네요. 저도, 잘하고 싶은데.”

하얀 백합 꽃밭에나 어울릴 것같이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저런 말을 하니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

놈은 맞는다고 확신이라도 주려는 듯 굳이 한 번 더 콕 집어 얘기했다.

“선배가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지.”

“…….”

갑자기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냐?!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이 무색하게도 분위기는 점점 야릇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건지 몰라요.”

가십거리를 다루기 좋아하는 신문사에서 말하길 귀족이 아닌 평민들은 보통 열여덟 정도에 동정을 뗀다고 하고 귀족들은 그것보다는 조금 빠른 열여섯, 빠르면 열세 살부터 동정을 뗀 자들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스무 살이나 먹은, 그것도 황족이라는 놈이 동정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저도 잘하고 싶어요. 열심히 배워서 선배를 만족시켜 드리고 싶어요.”

뭐, 뭐뭐, 뭐라고?

이건 진짜 내가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할 것이다.

아니면 내가 음란마귀가 껴서 녀석의 말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든가. 이를테면 요리… 같은 걸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너, 지금 네가 무슨 말 하고 있는 건지 아는 거야?”

“모를 수가 있겠어요?”

“…아니, 넌 몰라.”

테이블 위에 머물던 애쉬의 손이 내 쪽으로 다가와 펜을 쥔 내 손가락을 쓸었다.

“알아요. 그러니까 가르쳐 주세요.”

“…….”

“열심히 배운 다음에 선배를 만족시켜 드릴게요.”

“…요리라도 해주려고?”

애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로 웃는다.

“요리는 언제든지 해드릴 수 있어요.”

“그럼…….”

“섹스해요,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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