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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놈과 내가 엮여버린 이유 (2/42)

2. 그놈과 내가 엮여버린 이유

“…….”

“…….”

녀석은 아침부터 오해를 사기 딱 좋은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물에 푹 젖은 꼴로 기숙사 건물 앞 정원에서 흙과 풀을 골고루 묻힌 채 가쁜 숨을 연신 내뱉고 있었는데 젖은 채로 다 풀어 헤쳐진 와이셔츠 사이로 드러난 판판한 살갗 위에는 붉은 자국들이 군데군데 찍혀 외설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아침 먹은 것이 소화가 안 돼 정원을 한 바퀴 거닐려던 계획을 날려버렸다. 저놈을 앞에 두고 산책하다간 어제 먹은 저녁까지 배로 얹혀버릴 것이다.

젖은 머리칼 사이로 애쉬의 눈과 정통으로 마주쳤지만 나는 보지 못한 척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아카데미를 떠난 이 시점에 왜 저 모양 저 꼴로 여기에 쓰러져 있는지는 의문이었으나 괜히 말 한번 잘못 걸었다가 몹시 귀찮은 일에 말려들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난 못 본 거야. 아무것도 못 봤어.

괜히 구름 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는데 애쉬의 시선이 아주 끈질기게 내 옆얼굴로 따라와 붙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도와줘요.’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누구세요?’

눈을 피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돌리려는 찰나에 애쉬가 갑자기 발작하기 시작했다.

“아악, 읏!”

움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는데 녀석의 짧은 비명에 그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디 많이 아픈가?!

놀라 애쉬를 바라보자 녀석의 집요한 눈과 다시 마주쳤다. 마치 내가 다시 돌아볼 줄 알았다는 듯이. 기다렸다는 듯이.

기쁨인지 설렘인지 모를, 여하튼 긍정적인 기운의 광채가 선 애쉬의 눈동자를 보니 왠지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가 몸을 바닥에 마구 비비며 고통 어린 신음을 흘렸다. 여전히 눈은 나를 향한 채로.

“아악, 윽. 제, 제발. 어떻게 좀…….”

돈이든 권력에 대한 발판이든 득이 되는 일이 아니라면 쓸데없이 시간과 힘을 낭비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지만 내 눈앞에서 사람이 이렇게 몸부림치고 있는데 아무리 나라고 해도 도의적으로 모르는 척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에이 씨!

애쉬에게 달려가 잔디밭 위에 무릎을 꿇고 그를 살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 있겠어?”

남들 다 아는 기본적인 응급 처치 상식 외에는 의술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애쉬의 상태를 파악한 후 전문가에게 내용을 전달할 생각이다.

애쉬가 내 손을 잡으며 숨을 헐떡였다.

“…러워요. 하윽.”

“어지럽다고?”

그의 손가락이 얽혀든다. 힘주어 맞잡은 손이 굉장히 뜨겁다.

“아니…….”

“일단 천천히 숨 쉬어봐.”

애쉬가 급기야 내 허벅지 위로 몸을 늘어뜨리며 자신의 가슴팍을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으악! 왜 이래?

퍼억!

너무 놀란 나머지 그를 밀어내고 복부를 걷어차 버렸다. 애쉬가 바닥을 구르면서도 다시 몸을 마구 잔디밭 위에 비볐다.

녀석의 괴이한 몸짓에 정신이 아득해져 간다.

저 미친놈, 뭐 하는 짓이야?

“아흑! 윽, 가, 간지러워요!”

“…간지럽다고?”

애쉬의 벽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다가 관자놀이를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빨갛게 물든 상체와 흠뻑 젖은 몸, 그리고 우는 얼굴까지.

아아, 정말 오해하기 딱 좋은 그림이다.

나는 애쉬가 행여나 또 내 몸에 가슴팍을 비벼댈까 봐 차마 가까이 다가가진 못하고 다섯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물었다.

“너, 너무 간지러워서 흑. 연못에도 담가보고 아악, 아무리 긁어도…….”

“응, 알았어. 대충 알겠다.”

네가 또라이라는 것을.

연못 주위의 꽃들이 엉망으로 짓눌려 있었다.

“애쉬, 조금만 기다려. 사람을 불러올 테니까.”

“가, 가지 마…….”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올 거야. 조금만 버텨.”

“흐윽.”

“힘들어도 버텨.”

“…….”

힘차게 발을 움직여 가장 가까운 사감실로 향했다.

방학이라 하여도 졸업반들은 졸업 시험에 대비하여 아카데미에 남아 공부하는 것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의료진은 늘 아카데미 안에 상주해 있었다. 귀하신 귀족 자제들만 다니는 황립 아카데미 내 어디서든 안전사고가 발생하여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말이다.

* * *

사감이 연락을 취하자 의원들이 달려왔고 애쉬는 무사히 이송될 수 있었다.

“서, 선배.”

“좀 놔줄래?”

그 과정에서 애쉬가 내 옷자락을 절대로 놓지 않아 나까지 동행하게 돼버렸다. 녀석이 굳이 옷을 놓지 않더라도 애쉬는 자신의 상태를 온전히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함께 가야 했던 것은 맞지만.

* * *

의원 여섯 명이 온갖 과학적 의술과 마법을 사용해 가면서 오랫동안 정밀하게 애쉬를 진찰했다. 위험하고 큰 수술을 집도하는 것처럼 의원들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저들끼리 주고받고, 치료하고 간혹가다 낭패 어린 낯빛을 띠기도 했다.

혹시 황자가 잘못되어서… 같이 있었던 나에게 불이익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괜히 초조해져 왔다.

의원 중 한 명이 나를 돌아본다.

“모기에 물렸습니다.”

“심각한 건가……. 네?”

식은땀까지 줄줄 흘려가면서 한참 동안 진찰과 힐링을 퍼부어 대더니 하는 말이 고작 모기에 물렸습니다, 이것뿐이야? 그 정도 말은 나라도 할 수 있겠다!

“북대륙 쪽에서 몰려온 모기인데 몸통에 푸른 줄이 있는 것이 특징이죠. 한번 물리면 물린 곳이 붉게 변하고 감내하기 어려운 간지러움을 유발합니다. 도련님께서 운이 나쁘게도 모기떼에 걸려 버렸습니다. 펜테리온에서는 보기 드문 종인데…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물어놨으니 고통과도 같은 간지러움으로 많이 힘드셨을 겁니다.”

타 대륙 모기떼를 만난 너도 참 너다.

새하얀 물수건을 이마 위에 올리고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는 애쉬를 보았다.

“이제 괜찮아진 건가요?”

“한숨 자고 나면 다 좋아지실 겁니다. 긁은 부위에 상처가 덧나지 않게 이 연고만 꼭 발라주시면 됩니다. 추후 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방역할 테니 이만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시길 바랍니다, 아가씨.”

“네, 감사해요.”

의료진이 애쉬의 몸조리에 관해 몇 마디 주의 사항을 덧붙이고는 방을 나갔다.

* * *

애쉬는 여전히 내 옷자락을 붙든 채로 색색 숨을 내쉬며 단잠에 취해 있었다. 의자를 끌고 앉아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냈다. 벗은 상체 위로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목부터 배꼽 아래까지 찍혀있었다.

다행히 내가 걷어찬 곳에 멍 자국은 안 생겼네.

황자님의 귀하디귀한 옥체를 상하게 한 것이 트집 잡혀서 출셋길이 가로막힐까 봐 내심 불안했었는데 안심되었다.

“자, 내가 연고 발라줄 테니까 나중에 걷어차인 곳 아프다고 치료비 청구하지 마.”

애쉬는 자느라 내 말을 듣지 못하겠지만 나는 분명히 의사를 전달했고 애쉬는 거절하지 않았다.

검지 위에 크림 같은 새하얀 연고를 짜서 그의 가슴 위 붉은 자국에 살살 발라주었다. 못 해도 서른 개는 넘는 자국에 쯔쯔 혀를 차가며 열심히 연고를 발랐다.

“으, 으음…….”

“뒤척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선배?”

유리알 같은 투명한 벽안이 드러난다. 애쉬는 퍽 당황스러워하며 눈을 댕그르르 굴리더니 자신의 가슴 위에서 부단히도 움직이는 내 손가락을 뒤늦게 의식했다.

“뭐 하시는…….”

“보면 몰라? 약 바르고 있잖아.”

“그러니까 선배가 왜 발라주시는 건가요?”

어이없게도 수줍음이 묻어나는 질문이었다.

“공짜 아니야, 치료비 받을 거야.”

“아아, 네.”

장난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확연히 시무룩해졌다. 딱히 달래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므로 그냥 내버려 뒀다.

연고를 바른 손가락이 배꼽 아래로 점점 내려가자 애쉬의 단단한 복근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뭘 이렇게 긴장하고 있담.

슥슥―

“읏.”

“간지러워?”

“…조금요.”

“어쩔 수 없어. 참아.”

힐끗 보니 애쉬의 잡티 하나 없는 뽀얀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가?

서둘러 끝내 줘야겠다는 생각에 조금 더 거침없이 연고를 발랐다. 가로로 길게 물린 자국이 있어 검지로 그 부분을 살살 쓸면서 바르자 그가 갑자기 무릎을 세우며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선배.”

“참으래도.”

이번엔 손가락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렸다. 단정하게 메어있는 버클을 중심으로 물린 자국이 반 틈 정도 튀어나와 있었다.

바지 속으로 벌레가 들어간 건가. 어떻게 물린 거야?

흐음, 이를 어쩐다.

조금 고민하다가 상처가 덧나는 것보다는 낫지, 라는 생각으로 주저 없이 버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자, 잠깐만요!”

“환자는 가만히 있어. 흉 지는 것보다는 낫잖아.”

“제가 하면 안 될까요?”

“그 빨개진 얼굴이나 어떻게 하고 얘기하지?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것 같구만.”

“…이건 아파서 빨개진 게…….”

더 이상 애쉬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달칵.

버클을 손쉽게 풀어냈다. 애쉬가 앓는 소리를 낸다.

아픈가? 고개를 돌린 채 손등으로 입을 막고 있는 모습이 묘하게… 흠흠. 이상한 생각 말자.

바지를 조금 내려 연고를 발랐다.

스윽. 스윽.

애쉬가 자꾸만 몸을 움찔움찔 떠는 바람에 연고가 다른 곳으로 삐져 나갔다. 짜증 나서 그의 허벅지를 꾸욱 누르자 별안간 녀석이 상체를 일으키며 내 어깨를 황급히 잡았다.

“여, 역시 제가 하는 게 낫겠어요.”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숨을 몰아쉬는 애쉬의 기세에 나도 바지 안쪽에 들어가 있던 손가락을 꺼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뭐.”

애쉬의 손에 연고를 쥐여주었다.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자신의 손 위에 놓인 연고를 감동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선배는 친절하세요.”

“돈 받을 거라니까.”

“당연히 드려야죠. 얼마나 드리면 합당한 지불을 한 게 될까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고맙다고 느끼는 만큼.”

농담을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쉬도 이제 괜찮아진 것 같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물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벌써 점심시간을 훌쩍 뛰어넘지 않았는가. 저녁에는 아카데미와 가문 모르게 4년 전부터 줄곧 해온 베이커리 보조 아르바이트가 있다. 오전부터 아르바이트 전까지는 내내 공부에 매달리려고 했었는데 완전히 꼬여버렸다.

황립 아카데미 안에서도 가장 좋은 1인실인 VVVIP룸의 푹신한 고급 침대 위에서 태평하게 두 다리를 뻗고 있는 애쉬를 보니 속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난 갈게.”

“잠시!”

“할 말 있어?”

“…그건 아니지만.”

“나는 시간 낭비하는 걸 제일 싫어해. 푹 쉬어, 애쉬.”

탁.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 * *

“하아, 방학 첫날부터 이게 무슨 일이야.”

오늘 할당량의 공부를 끝마치려면 애쉬에게 쏟았던 시간만큼 자는 시간을 줄여야 했다. 이 말은 오늘만 조금 피곤하면 되겠지,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날 컨디션에까지 악영향을 미쳐 평소보다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로 공부하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첫 단추가 어긋나 버렸어. 새로 산 예쁜 다이어리의 첫 페이지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놈.”

아무것도 묻은 것이 없는데도 괜히 옷을 툴툴 털었다. 더 이상 저놈과 엮이지 말기를 바라면서.

* * *

신은 나의 편이 아니다.

대체적으로 내 삶은 행운과 다소 거리감이 있다.

어머니의 생일상을 다채롭게 꾸며줄 생화를 깜박하고 사지 않은 것부터, 됐다며 만류하는 어머니를 두고 시장에 뛰어갔다가 오니 그녀의 머리통이 공처럼 바닥을 데구르― 굴러다니던 것까지.

떨어진 장미 꽃잎이 뜨거운 피 아래로 스며들고 투명한 눈물이 그 위에 쌓여 완전히 핏속으로 푹 잠겼다.

평생을 모르고 살았던 아버지라는 작자가 찾아와 어머니의 차가운 몸을 빼앗아 가고 로벤스디 공작가에 나를 입적시켰다. 한 명의 오빠와 두 명의 쌍둥이 동생이 생겼는데 오빠는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쌍둥이 동생은 나를 노골적으로 혐오했다.

쌍둥이 동생에게 나는 좋은 놀잇감이 되어주지 못했다.

서늘한 와인 창고에 일주일 동안 가둬놓거나 내 식사에 가죽이 벗겨진 생쥐를 담가 두는 유치한 장난을 칠 때면 한밤중에 그들의 침실로 찾아가 나 또한 그에 상응하는 장난을 쳐주곤 했다.

침대 주위에 날 선 가시의 밤송이들을 깔아 놓는다거나 어떨 때는 짜증이 솟구쳐서 나무 몽둥이를 들고 덮고 있는 이불을 미친 듯이 내려치기도 했다.

내 장난에는 대가가 따랐다. 시녀장이 훈육해야 한다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 나를 가둬놓고 옷을 벗기고, 때리고, 걷어찼다. 한 번에 다섯 곳에서 발길질을 받았으니 못 해도 그 방에 있는 사람은 최소 다섯 명이었을 것이다.

로벤스디가의 시종들은 다 쌍둥이 놈들처럼 제정신이 아니었다. 감정이 없는 꼭두각시들 같았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 아니라 진짜 죽을 것 같은 놈들.

쌍둥이들은 나를 어떻게 골려줄까 하는 생각으로 늘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내 신경이 온종일 쌍둥이에게 쏠리는 것은 아주 당연했다.

그 애들은 아주 작정한 것인지 내 목이 졸리도록 줄을 걸어 개 끌듯이 마구잡이로 저택 밖을 뛰어다녔다. 세상이 노래지고 정신이 아득해질 즈음 걸려있던 두꺼운 밧줄을 풀었다.

거친 기침과 질척한 타액이 흘러나오면서도 저 새끼들을 어떻게 족쳐줘야 할까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데 눈앞에서 정원의 꽃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았다. 쌍둥이들이 염산을 들고 시시덕거리며 그것을 내 머리 위에 쏟아부으려고 하고 있었다.

저 정신 나간 새끼들이.

몸이 후들거려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정말 꼼짝없이 죽는구나, 했다.

잔뜩 충혈됐을 눈으로 쌍둥이를 노려보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게일, 제레미. 그만해.”

깔깔거리던 녀석들은 오빠인 세레즈가 등장하자마자 바지에 오줌을 쌀 기세로 발발 떨더니 염산을 저 멀리 내팽개치고 달아나 버렸다.

세레즈는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내 턱을 잡아 올렸다.

“날 봐야지.”

“…….”

“저 애들은 신경 쓰지 마. 자꾸 반응해 주니까 더 짓궂게 저러는 거야.”

“…….”

“무시해.”

무시할 수준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으나 목이 아파와 신음을 내는 것도 힘들었다. 세레즈는 새하얀 손수건으로 내 입가를 닦아주고는 자리를 떴다.

그날 이후 쌍둥이들은 세레즈가 있을 때는 얌전한 척 굴었지만 그가 자리를 비우면 또다시 악동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놈들의 오두막 아지트에 날 가둬놓고 불을 질렀을 때는 정말 타죽는 줄로만 알았다. 활활 타오르는 검붉은 불길 속에서 세레즈가 나타났고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가스에 중독된 나는 풀썩 쓰러졌다. 언뜻 정신을 차렸을 땐 그가 나를 업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의식이 돌아온 후 몸이 회복됐을 땐 쌍둥이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머리 위에 뿌리려던 염산을 꿀꺽 삼키어서.

슬프지는 않았지만 놀랍기는 했다. 그 독기 어린 놈들이 자살이라니. 내가 입은 검은 상복처럼 검게 타버린 놈들의 오두막 아지트를 의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무시하라고 했잖아.”

세레즈가 다가와 옆에 섰다.

“슬프지는 않았어요?”

왜 이 말이 튀어나왔는지 이성적으로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감이 시키는 대로 입을 열었을 뿐이다.

세레즈가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나한테는 죽일 놈들이지만 오빠한테는 동생이니까요.”

“오히려 너무 쉬웠어. 걔들은 말을 참 잘 듣거든.”

세레즈의 말뜻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쌍둥이들은 스스로가 염산을 먹은 것이 아니라 세레즈의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받고 그것을 삼켰노라고. 저자가 그 애들을 죽였노라고.

오싹.

몸에 소름이 끼치고 태어나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머릿속에서 두려움에 온갖 욕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태연한 척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의 나약함을 절대로 들켜선 안 될 것 같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는데 세레즈가 내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이젠 나만 신경 써.”

“…전 저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요.”

“그건 안 되지, 이벨린. 넌 나 없이는 살지 못하게 될 텐데.”

“어째서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넌 나만 바라보고 살게 될 테니까.”

쌍둥이의 장례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아버지이자 로벤스디 공작인 휴간트가 살해당했다. 목이 댕강 잘린 채로.

나는 그가 죽어있는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어머니 생일상에 올려두었던, 흰 밀로 구운 원통형 빵과 늘 먹던 양배추 수프, 버섯, 건포도, 완두콩으로 구운 파이가 로벤스디가의 화려한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고 진득하게 퍼져 오르는 핏물 위로 장미 꽃잎이 길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머리를 발로 툭툭 차면서 핏물 위에 군림하고 있는 세레즈가 나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때, 절망스럽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촛대를 들고 무작정 그 새끼에게 휘둘렀다.

뾰족한 장식에 살갗이 뜯기면서도 그는 웃었다. 망가져 가고 있는 것은 나였다.

* * *

톡! 톡톡! 톡!

신은 나의 편이 아니다.

대체적으로 내 삶은 행운과 다소 거리감이 있다.

아르바이트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내가 밀가루 반죽을 하는 것인지 밀가루가 나를 반죽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주물럭대고, 기숙사에 도착해 씻자마자 못다 한 공부를 했다.

어슴푸레하게 동이 터올 즈음 겨우겨우 끝마쳐 잠든 지 약 세 시간이 지났을 시점이고 기상 시간까지는 30분 정도가 더 남았다.

그러나 빌어먹게도 나는 지금 눈을 떴다.

창문 밖에서 들리는 규칙적인 소음에 인상을 쓰며 걸어갔다. 까마귀가 부리로 창문을 쪼는 것이라면 그것을 잡고 멀리 내던질 수도 있을 만큼 짜증이 났다.

창문을 열자 내 뺨 옆으로 작은 돌멩이 하나가 휙― 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

“서, 선배! 맞지 않으셨어요?! 괜찮으시죠?!”

애쉬였다.

눈으로 온갖 쌍욕을 해준 뒤 다시 창문을 닫았다.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자마자 다시금 창문이 톡톡 소리를 낸다.

쿵! 쿵!

바닥을 세게 울리며 거칠게 창문을 열었다.

“뒤지고 싶어?! 아침부터 왜 난리야!”

기숙사 4층에서도 보일 정도로 녀석이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흔들었다. 종이 같은 건데…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크게 흥미를 끌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알고 싶지도 않고.

나는 그냥 남은 30분의 잠을 더 자고 싶을 뿐이었다.

“서, 선배! 드릴 게 있어요!”

“30분 뒤에 와. 그때 아침 먹으러 나갈 거니까.”

다시 창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으나 톡톡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피곤했던 만큼 잠에 쉽게 빠져들었고 잠깐의 쪽잠 뒤에는 애쉬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 * *

간단히 얼굴에 물만 묻힌 뒤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밖을 나서는데 눈에 익은 금발이 정수리를 내보인 채 얌전히 앉아있었다.

“애쉬.”

이름을 부르자 녀석이 벌떡 일어선다. 갑작스레 높아진 눈높이에 조금 당황했다.

그래, 이놈 장신이었지.

“아까는 깨워서 죄송해요. 마음이 너무 급해서.”

알기는 아는구나.

목 아래까지 단정히 잠겨있는 단추가 눈에 띄었다. 여름이라 날씨가 후덥지근한데 덥지도 않나.

아차, 어제 그 상처는 좀 괜찮아졌을까?

단순한 호기심에 손을 위로 뻗어 애쉬의 단추를 세 개 풀었다. 애쉬가 놀라며 흐읍! 소리를 냈지만 딱히 나를 밀어내진 않는다. 검지와 중지를 셔츠 사이에 걸고 당기자 그의 옷깃이 넓게 벌어진다.

“몸 좀 숙여봐.”

말은 참 잘 듣지.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삐그덕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어제는 붉게 올라왔던 자국들이 옅은 분홍색같이 변해 있었다. 척 보기에도 많이 호전된 상태다.

“연고 바르고 있지?”

“네!”

애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아, 저, 드릴… 게 있어서요.”

“난 받을 거 없는데.”

“병원비요!”

그가 푸른 하트 스티커로 마감한 분홍색 봉투를 수줍게 내밀었다. 보아선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내 표정이 썩어 들어간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어린아이들이 으레 그러듯 고생하는 어른들에게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서 내미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병원비는 장난이었으니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이런 편지를 받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로즈가 봤다면 연애편지 아니겠냐며 호들갑을 떨어 댔을지도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가져가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의 심장 박동이 여기까지 쿵쿵 울릴 정도로 잘 들렸으므로 차마 모질게 내치기가 힘들었다.

대충 반응해 줘야지.

무심하게 봉투를 뜯어내자 봉투 사이즈보다 조금 작은 종이 한 장이 팔랑거리며 나왔다.

편지가 아니잖아?

그것의 정체를 보자마자 이맛살을 구겼다.

“…뭐야, 이거?”

“제가 용돈을 받는 처지라서요.”

생전 본 적도 없는 금액이 종이 한 장에 써있었다. 0이 도대체 몇 개인지 헤아리기도 힘들다.

그래서 생각했다. 가짜 돈이구나. 왜, 어린아이들이 게임할 때 쓰는 그 가짜 장난감 돈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자세히 보면 볼수록 꼭 진짜 같다. 수표에 찍힌 도장 하며 은행명, 서명까지 모두 진짜 같다. 혹시 몰라 그것을 들고 햇빛에 비춰 보았다.

“허억!”

위조지폐 방지를 위한 숨은 그림이 드러났다.

이, 이거 진짜야? 정말?

눈을 크게 뜨고 지폐를 들어 올리니 그가 송구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카데미만 졸업하면 더 많이 드릴 수 있어요…….”

“아, 아니, 잠깐, 잠깐만. 이게 용돈이라고? 정말?”

“…부족하시면 다음 주에 더 드릴게요……. 다음 주에는 형님한테 말해서 조금 더 많이 받아볼 테니까…….”

한 달 용돈도 아니고 일주일 치야?!

너무 놀라서 뒷목 잡고 쓰러질 뻔했다. 내 가문이 로벤스디라고 하여도 동전 하나 지원받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가문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빈곤한 소시민이다. 이 정도 돈이면 집 한 채는 거뜬히 살 수 있겠다!

예상치 못한 너무도 큰 금액에 손이 덜덜 떨려왔지만 애써 그것을 감추었다.

크흠, 흠!

“그래, 내 오전 시간을 다 날려 먹고 너의 치료에만 몰두했던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 하지만 어린 네가 무슨 돈이 있겠니. 이 정도면 됐어.”

“선배는… 정말 친절하세요.”

“언젠가 애쉬 너도 이런 친절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렴.”

“네!”

횡재했다. 대박 횡재!

티끌처럼 모여가던 재산의 수준이 갑자기 훅 높아졌다. 신이 드디어 내 안타까운 인생사를 보듬어주기 시작했나 보다!

애쉬가 준 수표를 품 안 깊숙이 밀어 넣고는 그 위를 두 번 두드렸다. 아가, 편히 쉬고 있어. 내가 곧 은행에 가서 현금 다발로 바꿔줄게.

큰돈을 벌었다는 기쁨과 동시에 애쉬와 엄청난 빈부의 격차를 느꼈다. 나는 몇 년을 한 푼 안 쓰고 열심히 모아야 벌리는 돈을 저놈은 일주일마다 용돈으로 받고 있었다니. 세상은 넓고 또 깊었다.

“선배, 식사는 어디서 하시게요?”

내로라하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다니는 황립 아카데미이다 보니까 식사는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가문 소속의 요리사들이 24시간 따라붙으며 모시는 아가씨, 도련님들의 식성에 따라 음식을 바친다는 뜻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전담 요리사 같은 사치를 부릴 처지가 되지 않았으므로 아카데미 근처의 값싼 레스토랑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저녁은 아르바이트하다 보면 퍽퍽한 호밀빵 정도야 실컷 먹을 수 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오늘의 메뉴’에서.”

“메뉴를 먼저 정하고 식사를 하신다는 건가요?”

“아니, 가게 이름이 ‘오늘의 메뉴’야.”

아카데미 정문을 기준으로 5분 정도 걷다 보면 갖가지 화분으로 길거리를 장악하고 있는 화원 옆에 조그마한 샛길 하나가 나있다. 엉키고 설킨 녹의 줄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길이다.

좁고 허름한 샛길 안에는 간판도 없는 레스토랑이 하나 있는데 메뉴판에 ‘오늘의 메뉴!’라고 쓰여있는 음식 하나만 팔았다. 그래서 다들 ‘오늘의 메뉴’라고 부른다(사실 다들이라고 해봤자 그 가게에 드나드는 사람은 나 말고는 본 적이 없다).

가게 내부는 그 골목길과 썩 어울리게 낡은 냄새를 풍겼다. 모양과 크기가 다른 원목 테이블이 세 개 놓여있었고, 장마철에는 접시 위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거나 가게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삐그덕거리기도 했다. 어젯밤 사이 그 가게가 무너져 버렸다고 해도 크게 놀랄 일이 아닐 정도다.

내가 이 위험천만한 레스토랑을 찾는 것은 단 하나였다. 모든 음식 가격이 30루덴이라는 것. 늘 먹는 빵 따위가 아니라 드물게 육류가 나와도 가격은 동일했다!

게다가 맛도 썩 나쁘지 않다. 가끔은 음식에 소금을 실수로 쏟았나 싶을 정도로 짜기도 하고, 상한 음식으로 조리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쉰내가 폴폴 풍기기도 하지만 정말 가끔이다(게다가 프로와즈 저택의 요리에 비하면 ‘오늘의 메뉴’는 산해진미나 다름없다).

애쉬를 지나쳐 걷자 녀석이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밖에서 사드시는 분은 처음 봐요.”

“쫓아오면서 구경까지 할 일이야?”

“아니에요! 구경이라니…….”

“같이 먹겠다는 생각이면 접어두는 편이 좋아. 메뉴가 하나라서 고르지도 못하고 알레르기가 있는 재료가 들어가도 입 다물고 주는 대로 먹어야 해.”

“전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어요!”

…진짜 같이 갈 생각이었어?

음식 냄새보다 강한 눅눅한 곰팡내가 후각을 자극하는 것을 느끼면 학을 떼고 도망갈 것이 분명했다. 로즈가 호기심에 레스토랑 앞까지 따라왔다가 외관을 보고 그대로 뒷걸음질 쳤던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 이벨린!” 따위의 망언을 하면서. 프로와즈가의 요리는 잘만 먹는 애가 참 유난이지.

애쉬를 보고 어깨를 으쓱해 준 뒤 묵묵히 걸었다. 화원 옆의 샛길로 빠져 들어가니 익숙한 ‘오늘의 메뉴!’ 메뉴판이 눈에 보인다.

어디 보자, 오늘은… 피시 앤 칩스(Fish&Chips)다.

감자, 옥수수, 감자, 옥수수, 감자 그리고 옥수수를 반복하던 메뉴에서 감자+생선이 추가되었다. 대구나 명태의 흰 살을 밀가루 반죽에 묻혀 튀긴 것일 뿐이지만 지긋지긋한 구황 작물에서 벗어나 다른 메뉴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꽤, 아니 아주 많이 만족스러웠다.

“왜 메뉴판을 쓰다 말았지……. 오늘 휴업인가 봐요.”

그러나 내 옆에 있는 놈은 아니었나 보다.

놈의 말은 대꾸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었기에 가볍게 무시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허둥지둥 따라오던 녀석이 가게 입구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몰랐는데 가게 천장이 꽤 낮았다.

애쉬가 본능적으로 어깨를 앞으로 약간 말며 엉거주춤 한 상태로 내 뒤에 선다.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쿵! 쿵!

레스토랑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창문 위에 껴있는 먼지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급작스러운 울림에 뒤에 있는 놈이 고개를 휙휙 돌리며 주위를 살피더니 내 소맷자락을 은근하게 당겼다.

“…무너질 것 같아요.”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걱정 마, 그럴 일 없어.” 따위의 대답을 기대했던 건지 애쉬는 다급하게 내 팔을 잡아당기더니 이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피식, 무서워서 놀라는 꼴 하고는.

하지만 정말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가게였기 때문에 아니라고는 정말 말 못 하겠다.

쿵! 쿵!

땅을 울리는 소음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게의 주인이자 주방장인 클린(Clean) 씨다. 작은 키의 넙데데한 불곰 같은 클린 씨가 등장하자마자 가게가 꽉 들어차는 것만 같다.

클린 씨의 모습을 확인한 애쉬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녀석의 반응이 이해가 갔다.

그래, 지저분하지. 얼굴의 반을 뒤덮고 있는 정돈되지 않은 수염과 통통한 손가락 사이에 묻어있는 온갖 정체불명의 소스들, 게다가 하얀색 옷이었을 것이 분명한 앞치마는 노랗다 못해 갈변하고 있었다. 나는 클린 씨를 보고 사람은 이름을 따라간다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클린 씨가 숲 같은 수염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고는 묻은 소스를 쭉쭉 빨았다. 뒤에서 애쉬가 ‘우욱―’ 하는 헛구역질 소리를 내었다.

괜찮아, 요리할 때는 손 깨끗하게 씻더라. 내가 봤어. 진짜라니까?

눈빛으로 그를 달래준 뒤 낡은 테이블 중 출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언제든 구토가 나오면 튀어 나갈 수 있도록 애쉬를 배려한 것이다.

“애인이야?”

“컥!”

“얘가요?”

평소 같으면 내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자마자 주방으로 들어갈 클린 씨가 어째서인지 우리 쪽을 필요 이상으로 주시한다 싶었더니 고작 그런 게 궁금했나 보다.

하여간, 남녀가 같이 다닌다고 해서 꼭 애인 사이는 아닌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 걸까.

“아니야?”

애쉬가 양팔을 저어가며 대신 대답했다.

“학교 선후배 사이입니다.”

“저 손님이 누굴 데려온 게 처음이니까 애인이나 되는 줄 알았지.”

“아무도 여길 안 오려고 하는데 어떻게 데려와요? 얘는 좀 특이 케이스고.”

끄덕끄덕.

애쉬가 열심히, 열정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좀… 그렇습니다.”

그렇긴 뭘 그래. 내가 내뱉었는데도 칭찬인지, 욕인지 분간이 어렵건만 녀석은 잘도 받아들였다.

하긴, 욕이라 하면 이 식당에 자주 오는 나까지 이상한 부류로 속하게 되니 칭찬이라고 치자.

클린 씨가 주방에 요리하러 들어간 와중에도 가게는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위험한 소리를 내었다. ‘나 곧 무너진다. 곧이야. 지금? 아니면 지금?!’ 이렇게.

그 덕에 애쉬는 시종일관 사위를 살피며 내 쪽으로 손을 움찔움찔 뻗어왔다. 여차하면 내 손목을 잡고 바로 도망 나가려는 것처럼.

애쉬의 긴 팔이 한 번 더 나에게 다가오자 그것을 나이프 윗면으로 툭 쳐냈다.

“가게가 무너져도 꼭 너는 데리고 탈출할 거니까 긴장 풀고 있어.”

사실 모르지. 엇? 하는 순간에 우리 모두 썩은 나무통 아래에 깔려 있을지도.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애쉬의 행동을 멈추게 하기 위해 대충 내뱉은 말이다.

내 진짜 의도는 알지도 못하면서 애쉬는 퍽 감동받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 긴장으로 한껏 치솟아있던 녀석의 어깨에 힘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쉽기는.

요리는 금방 완성되었다. 접시 위에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고소한 튀김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이때부터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한마디 말도 없이 집히는 대로 음식을 입에 넣고는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짭조름한 생선 살의 맛과 달짝지근한 감자의 맛이 섞여 혀 위에서 쿵짝짝 쿵짝짝 왈츠를 추는 것 같다. 단짠단짠의 감동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탕! 탕!

빈 접시에 포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어느 정도 배가 부르자 애쉬의 그릇이 여전히 처음 나온 그 모양 그대로인 것이 보였다.

그가 내 눈치를 보더니 포크로 음식을 살짝 뒤적이곤 생선 살 하나를 콕 찍어서 먹었다.

아니, 먹는 시늉을 했다. 다시 내려놓는 포크엔 그 생선 살이 여전히 박혀있었다.

먹지도 않을 거면 왜 따라온 거야? 안 먹으면 자기만 배고픈 거지,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접시를 싹싹 비웠다.

“선배, 수염이…….”

“어?”

애쉬가 손을 뻗어 내 입가를 훔치더니 꼬불거리는 갈색 수염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클린 씨의 수염과 동일한 색이었다.

퉤, 퉤퉤.

수염을 떼어주고도 녀석은 한동안이나 나를 바라보았다. 지그시 관찰하는 것은 아니었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오물거리는 것이 꼭…….

“할 말 있어?”

“선배, 저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애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안 물어봤으면 서운해서 어쩔 뻔했니.

나는 계속 말해 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서로 부탁을 하고 들어줄 만큼의 사이는 아니지만 일단 들어나 보자.

“제 과외를 해주실 수 있나요?”

“없어.”

들어만 본다고 했지 해준다고는 안 했다.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1분 1초가 아까운 이 시점에 뭐, 과외를 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바, 바쁘신 거 아는데요. 그래도 선배 아니면 마땅히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요. 한 번만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네가 나 바쁘신 걸 어떻게 알아? 안다면 이런 부탁은 절대 안 했을 거야.”

“제국사 수업 해주실 선생님이 필요해요. 이번에 낙제점을 받아서요……. 아버지께서 다음 시험 때 전체 등수 10등 안에 못 들면 아카데미고 뭐고 때려치우고 황성으로 돌아오라고 하세요. 그런데 전 꼭 아카데미는 졸업하고 싶거든요.”

맹한 행동 때문에 저놈이 황자라는 사실을 자꾸만 잊어버린다. 저놈 입에서 나온 ‘아버지’라 함은 당연히 우리 황제 폐하를 뜻하는 게 맞겠지.

순간 머리가 휙휙 돌아갔다. 애쉬의 제국사 수업을 봐주고 녀석의 성적을 껑충 뛰게 만들어 주면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 차후에 황성 내 주요 관직에 면접을 볼 시에 “전, 애쉬 황자님의 아카데미 재학 시절에 제국사 점수를 올려준 이력이 있습니다.”라고 말은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들 관심이야 갖겠지만 “그래서 뭐.”라는 대답만 돌아올 것이다.

순간의 어그로를 끌기 위해 내 방학의 금 같은 시간을 녀석에게 할애해야 한다는 것은 수지에 맞지 않는다. 내가 엄청, 그것도 굉장히, 엄청나게 많이 손해라는 뜻이다. 더 이상 생각해 볼 것도 없다.

나는 검지를 척! 들고는 말했다.

“알 바 아니야.”

애쉬가 울듯이 애원했다.

“선배, 제발요. 5년 내내 제국사 수업 수석이라고 들었어요. 게다가 방학에 아카데미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다 졸업반 선배들뿐이고… 저에게 과외를 해줄 사람은 이벨린 선배밖에 없어요.”

“황성으로 돌아가서 과외를 받든지 해. 그리고 난 졸업반 선배들보다도 바쁜 사람이야. 알겠어?”

“…황성으로는 못 가요.”

녀석이 침울하게 말했다.

황성으로 가지 못한다니? 어느 신문에서도 막내 황자가 쫓겨났다는 기사가 걸린 적이 없다. 오히려 인재들만 다닌다는 황립 아카데미에서 마법 부문 수석을 꿰차고 있다는 자랑만 질리도록 실려있던 것을 알고 있다. 벌써 2년째 헤드라인에 걸리고 있는 기사다.

그가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 만한 소리로 작게 이어 말했다.

“…아버지랑 싸웠어요.”

뭐야, 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것 같은 대답은.

“아버지가 자꾸만 아카데미는 그만하고 황성 내 마탑에서 대마법사 칭호나 받자고 해서 좀 다퉜어요.”

미친. 이 새끼, 지금… 대마법사 자리를 뻥 차고 고작 아카데미 하나 졸업하려고 이러는 거란 말이야?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해도 대마법사까지 가려면 마탑에서 몇십 년은 썩어야 될 텐데! 그마저도 능력이 따라 줘야 되는 거고 아니면 그냥 마탑에서 늙어 죽는 게 부지기수인데!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지는 줄도 모르는 소리 하고 앉아있네!

아아 혈압이여, 내 안에 용솟음치는 열등감이여.

후하, 후하, 진정하자, 진정해.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바로잡고 물었다.

“아, 아카데미는 왜 졸업하고 싶은데?”

“졸업 가운도 입고 싶고, 졸업식 날에 꽃다발도 받고, 졸업장도 받고 싶어요.”

콰앙!

“선배?”

나도 모르게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고작 그딴 이유라니. 하아, 이 자식 정말 싫다. 다 가진 놈이 그걸 누릴 줄 몰라서 더욱 싫다.

“…다툰 건 다툰 거고 황성은 왜 못 돌아가?”

“아버지가 자꾸 역사랑 저는 맞지 않는다고 무시하니까… 이번엔 제힘으로 아카데미에 머물면서 제국사 시험을 만점 받아서 오겠다고 큰소리쳐 버렸어요.”

“전교 10등도 모자라서 만점을 받겠다고? 낙제점인 네가?”

“10등은 마지노선이고요, 만점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나 할까요…….”

어련하시겠어. 기가 찼다.

나는 생존을 위하여 죽기 살기로 공부하고 하루에 코피를 열댓 번 쏟아가면서 펜촉의 잉크로 답을 쓰는 건지, 흘러나온 피로 답을 쓰는 건지 분간이 안 될 때까지 열과 성을 다하는데… 저놈은 단순히 자존심 문제라니.

철부지 황자님의 치기 어린 반항에 어울려줄 생각은 새 모이만큼도 없다.

“자존심 싸움은 혼자서 하시고요. 말했듯이 난 바쁘신 몸이라 1분도 시간을 내어줄 수가 없어.”

“정말, 진짜 안 될까요?”

“정말, 진짜 안 돼.”

“선배 이동 시간에 졸졸 쫓아다니면서 배울 수 있어요. 절대 일과에 방해되지 않게 할게요.”

“아, 벌써 방해된다.”

“선배, 제발요.”

“조른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야.”

나의 철옹성 같은 수비에 애쉬가 드디어 전의를 상실했다. 풀이 죽어 눈꼬리가 강아지 꼬리처럼 추욱 처진다.

“…형님한테 과외비 빌려달라고 했던 것도 취소해야겠다. 선배, 죄송해요. 제가 괜히 시간을 뺏어서.”

“잠깐, 잠깐만. 뭐라고?”

“시간을 뺏어서 죄송…….”

“아니, 그 전에 뭐라고?”

“…형님한테 과외비…….”

눈이 번쩍 뜨였다. 공짜가 아니야, 돈을 받고 해?

오늘 아침에 치료비라는 명목하에 천문학적인 액수를 건네던 애쉬가 떠올랐다. 치료비는 단발성이지만 과외비는 어떤가. 과외가 끝날 때까지는 고정 급여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돈도 이 제국 내에서, 아니 대륙 내에서 제일 많을 놈이니 덤터기 씌워서 과외비를 많이 부른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어 보인다.

오오, 호갱이여. 이 얼마나 황홀한 울림인가!

침착하자, 이벨린.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한 것이 조금 민망하지만 잘 무마시켜 보자.

“하, 너 쥬디퍼 황자님께까지 손을 벌렸던 거니? 그 정도 열정을 보인다면 나도 무시할 수는 없지.”

“…형님한테는 그냥 지나가듯이 말했을 뿐…….”

“아니, 아니, 됐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정도 딱하고, 내가 아주 몹―시 바쁜 사람이지만 네가 하도 사정사정하니까 한번 고려는 해볼게. 물론 네 과외를 봐주면 내 계획에 엄청난 차질이 생기긴 하겠다만은…….”

“저, 정말인가요?!”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또 내칠 수도 없고. 하, 나는 너무 마음이 여려서 탈이야. 열심히 할 준비는 됐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신 과외비는 빼놓지 않고 받을 거야. 얼마를 준다고 한들 시간은 살 수 없는 거지만 말이야. 그래도 너도, 나도 마음이 편하려면 뭐라도 주고받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럼요, 맞는 말씀이세요!”

녀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힐끗 본 클린 씨가 중얼거렸다.

“남자친구가 아니라 강아지였네.”

중얼거리는 것치곤 목소리가 커서 나와 애쉬가 다 들어 버렸지만.

어찌 됐든 난 뜻밖의 일자리에 몹시 만족한 상태다. 자꾸만 광대가 올라가려는 것을 참아내느라 곤혹을 치를 정도였다. 애쉬 앞에선 최대한 곤란한 척해야 하니까.

* * *

“둘이 해서 60루덴.”

매대 앞에서 30루덴을 꺼내는데 애쉬가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사랑과 기침과 가난은 숨길 수 없는 법. 내가 돈이 없어 봐서 아는데 저 꼴은 빈곤한 자의 초조함과 일치했다.

‘설마 황자님이 30루덴도 없겠어?’라고 생각했다가… 일주일 치 용돈을 모조리 나에게 지불한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하는 수 없지. 거액의 치료비도 받았고 일자리까지 주었으니 30루덴 정도야 투자하는 셈 치고 대신 내어주지, 뭐.

“여기요.”

“…….”

음식값을 모두 지불하고 나오자 애쉬가 약간은 상기된 투로 얘기했다.

“처음이에요. 돈이 없어 본 적은.”

“와, 재수 없어.”

그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디딘 모험가처럼 이루 말할 수 없는 센세이션함에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돈이 없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구나! 너무도 놀랍고 신선한 충격이야!

애쉬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자신의 빈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내내 돈이 없어 본 자신의 기분을 주절주절 설명했다.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은 얘기였다.

“돈은 늘 공기처럼 주변에 깔려있는 줄로만 알았어요. 막상 없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쿵 떨어지고 등이 아찔해 오더라고요. 인상 깊은 경험이었어요.”

“네, 네. 황자님.”

“만약 선배가 없었더라면 전 어떻게 됐을지……. 나중에 선배한테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그때는 제가 꼭 도와드릴게요. 오늘의 선배처럼요.”

애쉬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 안에는 확고한 의지가 실려있었다. 참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유난을 떤다는 생각을 했다.

“뭘 그렇게 고마워해.”

“절 구해 주셨잖아요!”

“참나, 그렇게 고마우면 감사패라도 만들지 그러냐.”

“…….”

* * *

애쉬 카인드로퍼가 정상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했던 나는 장난 반 비아냥 반으로 던졌던 그 말을 두고두고 후회해야 했다.

애쉬 카인드로퍼에게 고작 30루덴의 밥값을 지불해 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황립 아카데미 정문에 나의 실제 크기를 본뜬 순금 동상이 세워졌다. 바람결에 풀럭이는 망토를 두르고 한 손은 허리에, 한 손은 30루덴을 꺼내 든 채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나의 황금상이.

제국 내에서 가장 실력 있고 유명한 조각가를 섭외하여 그의 정교한 솜씨 아래에서 동상과 나의 얼굴은 부정할 수도 없이 판박이였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래에는 친절하게 설명까지 써놓았다.

제국력 000년, 0월, 0일. 이벨린 로벤스디, 애쉬 카인드로퍼 펜테리온의 밥값을 흔쾌히 지불하다.

“…또라이 자식이.”

부들거리는 주먹을 불끈 쥐고, 내 얼굴과 이름이라도 알아볼 수 없도록 돌멩이로 마구 동상을 긁어댔지만 살짝 기스만 날 뿐 나를 알아보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참을 동상과 실랑이하다가 결국 아카데미 내의 경비들에게 양팔이 붙잡혀 질질 끌려가야만 했다.

“내 얼굴 내가 가리겠다는데 왜 이래!”

그깟 동상이 뭐라고, 얼굴에 기스 조금 낸 것 가지고 다음 날 동상 주위에 동서남북으로 보초를 서는 경비병들이 나타났다.

훗날 그 동상은 아카데미의 수호신처럼 여겨지며 학생들에겐 ‘자나 깨나 입조심. 실없는 농담도 다시 보자!’라는 교훈을 안겨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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