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굳게 감겨 있던 베이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사위는 고요했고, 일순 저 아래 잠겨 있던 정신이 돌아오며 그녀의 빽빽한 속눈썹이 들려 올라갔다.
혼몽한 기운에 젖은 연갈색 눈동자가 깜박이며 잠시 허공을 눈에 담았다.
베이지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묵직한 나무 냄새와 비에 젖은 풀 냄새가 코끝에서 맴돌았으나, 그저 눈앞에 놓인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간 허공을 응시하던 베이지의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갔다. 시야에 흐릿하게 들어차는 붉은 좌석과 그 위로 자리한 순백의 벽면을 느릿하게 더듬어가던 그녀의 눈동자는 이내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마차?
낯선 환경에 베이지는 더듬더듬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을 되짚어갔고, 이내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 마차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 어째서 멈춰 있는 것인지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정적만이 내리깔린 내부에 상념은 몸집을 불렸다. 정신없이 몰아닥치는 상황에 혼란하기만 하던 좀 전과 달리 조금 더 또렷한 현실이 베이지에게로 끼쳐 왔다.
후원에서 자신을 빼내 줬던 것마저 제 경계심을 허물기 위함이었을까. 단순한 선의조차 아니었던 걸까.
저도 모르게 하이어드와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보던 베이지는 또 헛된 기대를 품으려는 자신을 향해 작게 자조했다.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하이어드는 감옥에 갇혀 외부와 단절되어 있던 제게 처음으로 찾아와 준 상대임은 변하지 않았다. 편안함보다는 긴장감이 앞서기는 했지만, 그의 곁에 있으면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좋았다.
동시에 베이지는 하이어드가 자신을 배신하였음을 똑바로 인식한 지금에도 자신은 그에 대한 마음을 지워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맥이 턱 풀렸다. 비참했다.
기분은 널뛰기를 했다. 배신감이 치밀다가도 상실의 슬픔이 너무나도 커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도달하는 것은 비참함이라는 감정이었다.
이 모든 일을 겪었음에도 그를 털어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비참했다.
이제 자신은…….
목덜미에서 느껴지던 둔탁한 통증에 하이어드가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았음에 대한 안도감과 함께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음에 대한 공포심이 일었다.
마차로 이동 중인 것을 보니 자신은 제국으로 끌려가 처벌을 받을 모양이었다. 끌려간다기에는 포박되어 있지 않기는 했지만.
제국으로 끌려가면 제 앞에 벌어질 상황은 눈앞에 쉬이 그려졌다. 백성들을 속여 부와 권력을 취한 파렴치한으로 소개되어 제국민들의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 것은 괜찮지만…….
베이지의 눈앞에 대광장에서 보았던 하이어드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저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새까만 동공과 긴 입매 끝에 맺혀 있던 웃음기를 잊을 수 없었다.
만약 하이어드가 자신이 온 제국민 앞에서 손가락질받는 모습을 그때와 같은 눈으로 본다면.
축 늘어져 있던 베이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만은 안 되었다.
염치없다고 해도 좋았다. 그런 파렴치한 짓을 벌여놓고 창피함을 느끼는 거냐 손가락질당해도 좋았다. 이내 그들이 제 사지를 찢어 놓아도 좋았으니…….
하이어드의 앞에서만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저를 그런 꼴로 만들지 않았으면 했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베이지의 손끝에 차츰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상상일 뿐이나, 이대로 하이어드를 따라갔다가는 머지않아 현실로 닥쳐올 앞날이었다. 어떤 식으로 제국민들에게 비난받든 하이어드의 앞에서만은, 그의 앞에서만은 안 되었다.
고민과 결단은 짧았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가 저를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야 했다. 차라리 홀로 떠돌다 도착한 마을에서 돌을 맞아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적어도 제가 비난받는 모습을 하이어드는 보지 못할 테니까.
베이지는 곧바로 좌석에서 몸을 일으켜 문에 바싹 붙어 귀를 갖다 댔다. 섣불리 나갔다가는 대기하고 있던 기사나 돌아다니는 경비병에게 발각될 수 있었으니 미리 살피는 것이었다.
마차 문에 귀를 바싹 갖다 댔으나 베이지의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소리 하나가 없었다.
혹 제가 듣지 못한 것일까 조금 더 긴 시간 가만히 숨을 죽인 채 바깥을 살피던 베이지는 문손잡이를 꽉 그러쥐었다. 서느런 쇠의 감촉이 그녀의 감각들을 완전히 깨웠다.
지키는 이가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슬며시 문을 열어 아주 얕고 작은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자, 그녀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다름 아닌 청록빛으로 가득 들어찬 산속의 풍경이었다.
이곳이 어딘지보다, 여러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는 산속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베이지는 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구둣발 아래 밟히는 풀과 잔디가 바스러지는 소리를 들은 그녀는 미련 없이 구두를 벗어 던졌다.
긴장과 불안을 머금은 심장이 느리고도 묵직하게 뛰어댔다.
베이지는 한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 발바닥에 가끔 돌이 밟히기는 했으나 비가 온 탓에 촉촉하게 물을 머금은 대지는 그녀의 발을 보드랍게 감싸 주었다.
마차가 놓인 곳은 산속 한가운데 작게 난 평야였고, 이곳에 놓인 마차는 베이지가 타고 있던 마차 한 대가 전부였다.
일순 하이어드가 이곳에 저를 버리고 갔을 가능성을 떠올리던 베이지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랬다면 이곳까지 함께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베이지는 어렴풋하나 마차 안에 눅진하게 남아 있던 하이어드의 체향을 떠올리며 젖은 땅을 확인했다.
진흙길 위로 말발굽 자국이 나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몰아 찾아온 누군가가 하이어드와 함께 잠시 자리를 비운 듯했다.
베이지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말을 타고 자리를 비웠다면 꽤 먼 곳까지 갔다는 뜻일 테니까.
말발굽 자국이 난 방향 반대쪽을 향해 걸음을 튼 베이지는 미련 없이 발을 디뎠다. 이제 이 세상에서 그녀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하이어드의 앞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 것.
젖은 땅에 발자국이 남을 테니 하이어드가 제 흔적을 뒤쫓아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발자국까지 지워가며 이동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하다는 것을 알았다. 당장 그가 언제 돌아올지 몰랐으니까.
한 걸음 두 걸음 베이지는 조금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포근하게 발을 감싸주는 줄 알았던 진흙 길은 날카롭게 벼려진 풀 따위가 가끔 그녀의 맨발을 할퀴고는 했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풀 길을 밟는 퍼석거리는 소리와 산속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새가 퍼드득 날갯짓하는 소리가 전부였다.
적막함이 감도는 산속에서 베이지는 초조함과 불안감을 지우려 호흡을 가다듬었다. 빗물에 축축하게 젖은 산속에서 홀로 걸음을 옮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또 빗물을 쏟아낼 듯 우중충하게 먹구름이 뒤덮인 하늘과 언제 뒷덜미를 잡힐지 모른다는 사실에서 오는 긴장감이었다.
하이어드가 언제 자리를 비웠는지만 알아도…….
허황된 생각을 품으며 베이지의 걸음은 보다 더 빨라졌다. 여러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흐릿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만약 하이어드가 돌아오던 중이었다면?
이미 발각되었을 수도 있다.
만약의 경우였지만 그 가정은 뒤쫓기는 베이지에게는 더없이 중요하고 초조하게 들이닥쳤다. 그녀의 발걸음에 점차 다급함이 깃들며 하얀 맨발에 벌건 생채기가 하나둘 진하게 남기 시작했다.
일순 퍼드득, 새가 날갯짓하며 숲에서 날아서는 것이 베이지의 눈에 들어왔다. 큰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던 그녀는 작은 새를 눈에 담고서야 밭은 숨을 내쉬며 다시 발을 디뎠다.
하지만 베이지의 발걸음은 그녀가 한번 멈추어 서기 전과는 달랐다. 조심스레 내뻗던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는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새가 날아가는 소리와 함께 얕으나 분명하게, 베이지의 귓가에 잡힌 소리 때문이었다. 그녀는 착각이라 계속해서 되뇌면서도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다급히 걸음을 내디뎠다.
이 세상에 정말 신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신은 저를 믿지 않은 베이지에게 벌을 내리기라도 하듯 그녀가 가장 원하지 않던 바를 불러일으켰다.
들짐승과 산새들의 소리만이 울리던 산속에서 낮고 작으나 또렷하게, 말발굽 소리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조용한 산속은 그 작은 소리를 잡아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선명한 말발굽 소리를 담아낸 베이지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죽 타고 내렸다.
외진 산속, 그리고 속도를 줄이지 않고 저를 향해 점점 가깝고 거대해지는 땅을 울리는 묵직한 소리에 맞춰 베이지의 심장이 그녀의 턱끝을 치고 올랐다. 여러 소리와 뒤섞여 머리에서 울리기라도 하듯 한없이 큰 심장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둥둥 울렸다.
큰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길 뿐이던 베이지의 몸이 이내 그 작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그녀의 조그마한 발 아래 물 먹은 풀들이 짓밟히고, 그녀의 무릎까지 올라온 긴 수풀들이 하야스름한 다리를 불그죽죽하게 그어댔다.
하이어드에게 잡히는 것만은 안 되었다. 지금도, 지금도 비참해 죽을 것 같은데 그의 앞에서…….
가장 거대한 일념만이 베이지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베이지의 몸이 눅눅한 바람을 맞으며 산속을 가로질렀다. 하나 그녀는 원체 체력이 좋지 않은 편이었고 뜀박질도 그리 잘 하는 편이 아니었다.
푸르릉!
베이지의 귓가에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닿고야 말았다. 그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가빠지다 못해 감당이 버거운지 숨이 턱턱 차올라 벌어진 입가로 거칠게 새어 나왔고 흉부가 빠르게 부풀었다 꺼지길 반복했다. 한계에 다다른 다리가 무거웠다. 그녀가 느끼기에도 다리가 느려지고 있었다. 우레와도 같은 말발굽 소리가 바로 뒤까지 다다른 듯하더니…….
“아!”
뒷덜미를 낚아채는 거친 손길에 달려 나가던 베이지의 무릎이 푹 꺾이고 거대한 손바닥에 의해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달랑 들려 올라갔다.
말이 제 몸을 한껏 세우며 멈춰서고, 이내 베이지의 목덜미를 쥐고 있던 사나운 손길이 떨어져 나가며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베이지는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저 제 몸이 쓰러진 바닥만을 바라보며 가쁘게 벅차오른 호흡만 내쉴 뿐이었다.
베이지는 제 뒤에 묵직하게 내려앉는 하이어드의 발자국 소리를 귀에서 완전히 지우고 싶다는 듯 눈을 감았다. 보지 않았더라도, 제 뒷덜미에 닿았다 떨어지는 손길로도 충분히 그임을 알 수 있었다.
불과 어제 몸을 묻고 있었던 한없이 익숙한 나무 냄새였으니까.
말에서 내려 땅으로 발을 디딘 둔중한 걸음 소리는 바닥에 쓰러져 바들거리는 팔로 몸을 지탱하고 앉은 베이지의 앞으로 다가섰다. 이내 그녀의 코끝에 묵직한 체향이 스쳤다.
“구두 한 켤레만 남겨두고 가면.”
더는 봐 주지 않겠다는 듯 매서운 손길이 베이지의 턱을 낚아챘고 그대로 뼈를 으스러뜨릴 듯 강한 아귀힘에 붙잡힌 그녀의 살결이 곧바로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읏…….”
베이지가 고통에 신음하며 하이어드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턱에 힘을 주었다. 하나 그녀가 반항할수록 그의 악력은 강해졌다.
“거기에 좆 비비라는 소린가. 응?”
눈 떠, 씨발.
소름 끼치도록 낮은 음성이 저조한 기분을 온전히 드러내며 베이지를 겁박했다.
온기라고는 하나 없이 살을 엘 듯한 냉기가 배어 나오는 목소리에 베이지의 감긴 눈에 뜨뜻한 열기가 들어찼다. 이 와중에도 저를 희롱하는 하이어드의 태도에서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감겨 있던 베이지의 두 눈이 뜨이며 녹녹한 물기를 머금은 유리알 같은 동공이 드러났다.
“애브, 애브는…… 정말 죽이신 거예요?”
정말 그는 자신을 그저 놀잇감으로 여긴 것뿐이었을까.
애브의 안위를 확인하려는 베이지의 물음에는 아주 얇고 보잘것없으나 하이어드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었다. 애브는 직접적으로 마약 밀매를 주도한 이가 아니었기에 하이어드가 죽일 필요는 없었다. 제국법으로 처벌할 경우에도 애브는 사형 선고를 받을 만한 죄질을 가진 이가 아니었으니까.
베이지의 상앗빛 동공 속에 품어진 하이어드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눈을 뜨자마자 하는 말이, 그 새끼를 찾는 거라니. 이딴 말을 내뱉을 줄 알았으면 눈을 뜨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굳게 다물려 있던 하이어드의 턱뼈가 불거지고, 그의 잇새에서 미처 억누르지 못한 노기가 샜다.
“눈깔을 도려내 불구로 만들까 싶었는데.”
베이지의 턱을 쥔 하이어드의 손등에 거무죽죽한 핏줄이 돋아 올랐다. 쓸모없는 말만을 담아대는 이 작은 입을 으스러뜨리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그럼 그놈의 머릿속에 벌름거리며 물을 싸대는 네 보지가 그려질 것 아닌가.”
죽일 수밖에.
눅진한 노기가 얽힌 시꺼먼 목소리는 푹 꺼져 바닥을 길 듯 낮았다.
베이지는 하이어드의 입으로 그가 애브를 죽였다는 사실을 확인받자 발밑이 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정을 주지 않으려 했다고 해도 긴 세월을 함께한 이였다. 그저 낯만 익힌 시종이 죽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던 그녀에게는 감당하기 버거운 사실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향한 하이어드의 마음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저 저를 이용하여 공작가를 무너뜨리고 왕국을 집어삼키려 했다는 사실을 알았던 때의 충격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의를 위한 것이니 어쩔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염치없이 배신감을 느끼는 것에서 그칠 수준의 것이었다.
하나 구태여 죽여야 할 의무가 없는 애브를 벤 것은 하이어드가 제 기분이 내키는 대로 저지른 짓이었다. 자신의 감정 따위는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거기서 그가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는지가 드러났다. 알고 싶지 않았으나, 알게 되고 말았다.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고 올랐고 베이지는 더는 그것을 참아내지 못했다. 하얀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둥근 눈망울에 투명한 물이 그득히 고였다.
그리고 완전히 흘러내리지는 않았으나, 베이지의 눈꼬리에 눈물이 고여들였다는 사실만으로도 하이어드의 심사가 뒤틀리기에는 충분했다.
“그 새끼 때문에 우는 건가?”
질투에 눈깔이 돌아버린 하이어드의 입에서는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데려가 대접해 주겠다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발칙하게 도망을 왔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에 더해 제 손길을 피하려 버둥대는 꼴이 기분을 더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씹창냈다.
하이어드의 빈정거림을 받아내던 베이지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입을 열었다. 더는 홀로 감내하고 싶지 않았다. 벅찬 감정에 바르르 떨리는 붉은 입술이 그를 향했다.
“왜, 왜……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뭘.”
홀린 듯 질문을 던진 것이 무색하게 베이지의 입은 다시 굳게 닫혔다. 왜 저를 데려왔느냐고, 왜 저에게 이렇게 가혹하게 구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녀가 원하는 답은 하나였다.
하지만 하이어드에게서 원하는 답이 돌아올 가능성이 없었으니 베이지는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제가 원하는 그 대답 하나가 이토록 간절한데, 놀잇감으로 데려왔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 완전히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보다 더 떨어질 바닥이 없었음에도.
언제나 베이지의 세상에 무서운 것은 많았으나, 이토록 온 세상이 흔들리도록 두렵고 공포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당연했다. 다른 것들은 그저 본능적인, 단편적인 두려움에 불과했다면 이건 베이지의 세상 전부를 맞바꾸는 개념의 것이었다.
처음으로 원했고 처음으로 잠시나마 가져보았으며 처음으로 영원하기를 간절히 바라본 것이었다.
베이지는 애브가 하이어드의 손에 죽었다는 말을 들은 직후 이러한 질문을 던지려는 제가 혐오스러워 입을 보다 더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또 그런 침묵으로 일관하려는 베이지의 태도가 하이어드의 분노를 샀다.
“말해.”
위협적인 하이어드의 독촉에도 베이지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공허했다. 그토록 긴 세월 바랐던 것은 허상일 뿐이었으며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눈앞에 놓인 절대 얻을 수 없는 것 하나였다.
현실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모른 체 하이어드의 입에서 확답을 받는 걸 피하고 싶었다. 이렇게 모른 체하는 시간을 이어가고 싶었다.
“말하라고 했습니다.”
하이어드의 아귀힘이 강해지며 또 제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까는 베이지의 입을 억지로 벌리었다. 뼈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뻐덕하게 서고, 여린 살결이 짓무르며 그녀의 입 안 붉은 속살이 드러났다. 저 눈을 이로 씹어 들어 올려야겠다는 별 병신같은 생각이 뇌리를 지배했다.
한편 독촉을 받아내는 베이지의 시야에는 하이어드의 정복 끝자락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익숙하던 사제복이 아닌, 제국군 수장에게만 내어지는 정복이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이런 작은 곳에서부터 보여지고 있어 눈물이 조금씩 고여들던 그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물기로 그득해졌다.
눈물을 틀어막고 있던 둑이 터지자 눌러 놓았던 서러운 감정들이 몰아쳤다.
그를 지키기 위해 거리를 두려 하고, 그러다 그에게 희롱을 당하고, 그럼에도 그를 지켜주고 싶어 했던 스스로가 비참했다.
그가 너무나 미웠다.
베이지는 저도 모르게 말을 잇고야 말았다. 상아색 눈동자가 투명한 유리막에 휩싸인 듯 울렁거렸다.
“……저를 왜 데려오신 거예요? 직접 죽이려고? 그렇게, 그렇게 제가…….”
그렇게 제가 우스우셨나요.
베이지는 울컥 눈물이 치솟으려 하자 입을 다시 다물어 호흡을 고르고는 작게 말을 이었다.
“어떻게 저를 속이시니…… 쉽게도 속는 절 보며 재미있으셨나요?”
척척하고 끈적한 물기가 감도는 베이지의 목소리는 숨기지 못한 서러움을 품고 있었고 평소의 그녀처럼 또렷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베이지의 목소리를 담아낸 하이어드의 눈썹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쉽다, 쉽다라. 언제나 제 손길을 피해 발칙하게 고개를 돌려댄 주제에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인다. 제가 다 감내하고 봐주려 했건만.
“네가 할 말이 아닐 텐데.”
“그게 무슨…….”
“알면서도 속아주니 내가 천치로 보이던가?”
조심성이 없더군. 그런 대화를 나눌 거면 문은 똑바로 닫았어야지.
평온하기 그지없는 하이어드의 말에 오히려 놀란 건 베이지였다. 그녀의 상아색 눈동자가 그의 말뜻을 파악하려는 듯 잠시 좌우로 구르다 이내 크게 흔들렸다.
‘잘 감시하거라.’
그걸…… 그걸 들으셨던 건가.
베이지는 흔들림 하나 없는 하이어드의 낯을 마주하며 생각을 꾸역꾸역 이었다.
그럼…… 그럼 그때부터 자신이 그를 속이려 한다 오해하고 있었겠구나. 그럼 자신의 진심조차 그에게는 닿지 않았던 걸까? 모두 아버지의 명령 아래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던 걸까?
베이지의 도톰한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서러웠다. 그를 지키기 위해 불안함에 악몽을 꾸면서도 그와 거리를 두고자 애쓰고, 그 탓에 그에게 좋지 못한 취급을 받았던 과거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자신의 고생을 알아주기는커녕, 자신을 파렴치한이라 여기고 있었다니. 그 나름대로 속아주는 체를 하고 있었다니.
자신은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이렇게 농락당한 것일까.
그리고, 그리고…….
그럼에도 그를 마음속에서 떨쳐낼 수 없다는 사실이 서러웠고, 비참했다.
베이지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터졌다. 모진 일들을 겪으면서도 참아냈던 투명한 물줄기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말간 볼을 죽죽 내리긋고, 작은 흉부가 들썩이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흐, 윽…….”
별안간 서러운 아이처럼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하는 베이지의 태도에 하이어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상기된 볼을 타고 굵은 눈물방울들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녹녹하게 물든 모래색 속눈썹이 하얀 볼 위로 달라붙었다.
베이지는 하이어드의 얼굴 따위는 보지 못했다. 그저 저 속에서 치미는 억울함이 서러움과 뒤섞여 범벅이 되어 그 감정을 느끼는 데만 해도 빠듯했다.
“그, 그건…… 제가…… 지켜, 주려고…….”
“똑바로 말해.”
일전과 달리 달래 주기는커녕 험악하기 그지없는 하이어드의 언행에 베이지의 울음이 거세졌다. 그럼에도 그의 구겨진 눈썹은 펴질 줄을 몰랐다.
간신히 몇 마디를 뱉는가 싶었는데 징징 우는 탓에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씨발.
“저는, 저는 지켜주려고, 흡. 무서운데…… 두려운데도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읏, 흐으…….”
이어지는 베이지의 말에 하이어드의 입이 꾹 다물렸다. 새까만 동공이 방울방울 눈물이 맺혀 떨어지는 말간 볼 위에 닿고 그새 눈물로 범벅이 된 작은 얼굴을 한눈에 담았다.
“오해란, 흑. 말이에요……. 아버지께는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되니까, 제가 당신을…… 흡.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뭐?”
눈물에 젖어 흐릿하기는 했으나 베이지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나둘 쏟아내다 보니 서러움이 짙어졌는데 말을 내뱉을수록 눌러내려 왔던 감정들이 터지듯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울음이 거세졌다.
베이지는 제 감정을 쏟아내기에 급급해 조금 전까지 살을 엘 듯 시린 냉기가 머물러 있던 시커먼 눈동자가 그녀의 말 한마디에 사그라드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데 사제님은…….”
“하이어드.”
베이지가 눈물을 쏟아내는 와중에도 구태여 눈썹을 구기며 그 부분을 잡아낸 하이어드는 감당하기 버겁도록 눈물을 쏟아내는 그녀의 눈가를 엄지로 쓸듯 닦아냈다. 그리고 갑작스레 조금 온건한 분위기를 띤 그 의미 모를 손길에 베이지의 울음이 폭발했다.
“그런데, 흐. 흐으, 하이어드는 저를 놀잇감으로나 여기셨고…….”
이렇게 다정하다 느껴질 만한 손길을 건네었으니, 속절없이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또 여러 감정들 중 원망스러움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런데, 그런데, 흡, 이 모든 일을 겪었음에도…… 당신을 좋아하는 내가…… 너무 비참해요.”
가느다란 목소리를 흘린 베이지는 서럽도록 울었다. 하이어드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련하고, 이런 상황에서 고백을 쏟아내는 자신의 상황이 속상해서. 몰아치듯 겪은 사건들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모질고 아파서.
그리고 여기까지 말을 끝맺자 갑작스레 하이어드가 베이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베이지는 코끝에 닿는 판판한 가슴팍의 감촉과 콧속을 담뿍 파고드는 하이어드의 무거운 체향에 돌아가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가 그저 가만히 눈을 깜박이고 있을 때였다.
“왜 우는 거지.”
낮고 탁한 목소리가 베이지의 귓가를 적셨다.
“왜 우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또 희롱하는 듯한 목소리에 베이지의 입꼬리가 죽 내려가며 잠시나마 부풀었던 심장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렇게 자신을 놀리는 것이 재밌을까. 희망을 주었다 앗아가 절망하는 모습이 좋을까.
베이지는 의미 모를 하이어드의 말이 또 그의 말장난이라 여겼는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다물린 그녀의 붉은 입술이 우물대며 울음을 억눌렀다. 제 감정을 장난으로 치부하는 그가 너무 미웠다.
그리고 또 한 번 이어지는 하이어드의 목소리는 베이지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내가 가지고 놀았다고 한 적이 있었나?”
베이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의 모래색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겠지만, 이 상황에서 놓고 보자면…….
베이지가 순식간에 몸집을 불려 커다랗게 박동하는 제 심장 소리를 눌러내리며 하이어드의 품에서 몸을 떼 내려 했다.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제 생각이 착각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하이어드는 베이지를 자신의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에 휩싸인 그녀의 귓바퀴에 별안간 날카로운 이가 닿았다.
“아.”
“이용할 생각이었으면, 공작 앞에서 빠져 있는 척이라도 하려 했지 않겠습니까. 사리분별 안 되는 머저리마냥 뒤꽁무니만 쫓아다녔어야지.”
비아냥대듯 말을 잇던 하이어드의 목소리가 이를 끝으로 뚝 멎었다. 베이지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의 한쪽 눈썹이 들려 올라갔다.
제 모습이 자신이 비유한 그 머저리 새끼랑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베이지는 하이어드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듯 가만히 그의 목소리를 되짚고 또 되짚었다.
“그럼…… 그럼 제 침실에 있던 서류는.”
“서류?”
의미 모를 베이지의 말에 하이어드가 베이지를 제 품에서 떼어 내며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정말 모르겠다는 듯 구겨진 그의 콧잔등을 바라본 베이지는 모든 것이 제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럼…….”
애브는.
베이지는 끝말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기대감에 부풀었다는 사실에 서둘러 마음을 다잡은 것이었다. 애브의 이야기를 꺼내었다가 하이어드가 다시 좀 전 말한 모든 것이 한순간의 장난이었다 선언해 버릴까 두려운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포용력 넓은 이로 변모해버린 하이어드는 너그러이 베이지의 질문을 파악하고 답해 주었다.
“살려 보냈습니다.”
하이어드의 얼굴에는 영 내키지 않는 기운 따위는 없었다. 베이지가 울음을 쏟아내는 얼굴만이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찰 뿐이었다.
저 말고 다른 새끼가 울릴 때는 그토록 좆같더니, 제가 울리니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을 좋아하는 내가……’
하이어드의 굳게 다물려 있던 입매가 길게 늘어지고 저를 바라보는 베이지의 말간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래, 저를 좋아한다는데. 그래서 이 작은 눈에서 눈물을 쏟아냈다는데, 이 정도쯤은 알려줘도 좋았다.
그 말이 하이어드에게는 베이지가 저를 온전히 내어주겠다는 말로 들렸다. 이제 더는 품을 들이지 않고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이상하게 저 아래에서 바글거리던 기운이 가라앉아 있었다.
애브를 살려 보낸 이유는 하나였다.
유약한 베이지의 성정으로 보아 저 새끼를 죽인들 제게 득 되는 것이 없었다. 죽이면 빌어먹을 죄책감인지 뭔지가 베이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각인될 테고 저를 원망하는 눈길마저 받아내야 한다. 애브를 벤 순간 저를 바라보던 베이지의 눈길을 상기한 하이어드는 그를 대륙에서 추방하는 것을 택했다.
하이어드는 고개를 돌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관에게 턱짓했다.
“가져와.”
베이지가 다급히 고개를 돌려 옆을 확인하자, 그곳에는 말을 매어 두고 꽤 먼 곳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기사 하나가 있었다.
언제부터…….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베이지의 얼굴이 달아올랐고 그 모습을 목격한 하이어드의 턱에 심지가 섰다.
“제가 좋다 울 때는 언제고…….”
벌써부터 다른 사내놈과 바람을 필 생각이십니까.
베이지의 턱을 그러쥐어 제게로 단단히 고정한 하이어드는 부관이 내어오는 종이 한 장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혹 베이지가 믿지 못할까, 애브에게 받아 온 편지였다. 그저 눈으로 확인하게 해 준 후 불태워버릴 것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아주 너그러운 처사라 여겼다.
베이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손에 쥐인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 잠시 그녀를 내버려 두던 하이어드의 콧잔등이 찌푸려졌다.
그때 괄괄하고 뜨거운 손바닥이 베이지의 치마춤을 파고들었다.
“아…….”
갑작스럽게 허벅다리 안쪽의 여린 살결을 매만지듯 파고든 손길에 놀란 베이지가 급히 다리를 움츠렸으나, 하이어드의 거친 손바닥은 집요하게 그 속까지 파고들었다.
베이지가 편지의 존재에 몰두해 있는 사이 부관은 이미 하이어드의 명 아래 자리를 비운 후였다.
빗물에 젖은 풀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하이어드의 의중을 파악하려 고개를 든 베이지의 눈에서 남아 있던 눈물들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여린 살결을 긁어내는 까끌한 손길에 그저 몸을 내맡기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정말 그가 말한 것들이 제가 생각하는 그 뜻이 맞을까. 서로 다른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베이지는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하이어드의 입에서는 그 어떠한 구체적인 말도 되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베이지의 눈에 깃든 의심을 읽어낸 하이어드의 입매가 비틀리며 목소리를 쏟아냈다.
“그럼 어떤 새끼랑 살림을 차려 밥을 지어주려 했습니까.”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베이지는 어렵지 않게 하이어드의 말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전 베이지가 그녀의 침실에서 스치듯 말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하이어드가 그 말을 기억하고 되짚어주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가 입술을 사리물었다.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흑색 동공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베이지의 눈에 멎었던 눈물이 다시금 차올랐다. 멍했다. 자신이 제대로 된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채 지워지지 않은 의심이 뒤섞였다. 앓아 오던 것이 한순간에 풀려 버리는 상황은 그녀가 그 뒤를 따라가기 버겁게 만들었다.
베이지의 볼을 타고 내리는 유리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이어드가 고개를 내려 진한 눈물 자국을 훑어 올렸다. 시뻘건 덩어리가 눅눅하게 물길을 만들고 이내 그녀의 귓가로 가 닿았다.
“이렇게 울어서 전쟁귀가 잡아온 게 아닙니까.”
거무죽죽한 육욕이 깃든 저음이 베이지의 녹녹한 입속으로 삼켜졌다. 새카만 시선이 제게 몸을 내맡기는 작다란 여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여린 짐승한테는 길잡이가 있어야 할 듯했다. 지금까지의 삶이 그러했듯, 이제 제가 그 목줄을 쥘 차례였다.
또 다른 뱀이 아가리를 벌렸다.
베이지는 제 입속을 파고드는 하이어드의 눅진한 숨을 받아먹었다.
이것이 또 다른 뱀의 아가리일지라도.
베이지는 모른 체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는 안온함이었으니.
<검은 뼈>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