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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군의 수장으로 일컬어지는 티르헤모스 헤드온 백작은 본래 전쟁고아였다. 출신이 불분명한 그는 어렸을 적 이름을 지어준 이조차 알지 못했다.
대륙은 혼란했다. 빈민촌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검을 쥘 수 있는 나이가 채 되기도 전 칼받이로 전장에 내몰리는 판국이었다.
하이어드 또한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나이가 차 칼받이로서 전장에 나섰다.
하나 그는 살갗으로 마주하는 죽음의 공포가 두려워 맥없이 흐무러지는 여느 아이들과는 달리 그 상황 자체를 즐겼다.
빈민촌에서 나고 자란 마당에 몸싸움 정도야 어려울 것이 없었고 칼받이들끼리의 주먹질은 더욱 손쉬웠다.
우연히 몸조차 덜 자란 아이가 피비린내가 풍기는 전장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본 병사 하나가 기특하다며 칼을 쥐여 주었고, 그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그 쇠붙이를 내둘렀다.
제 손짓 한 번에 사람이 죽어나 가는데도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그저 식은 살덩어리를 보는 양 사체를 내려다보는 하이어드를 눈여겨본 장성급 인사가 그를 제 아래에 둔 것이 시작이었다.
하이어드는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매번 군의 선두에 나서며 전장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열 살에 칼받이로 전장에 들어서 십 년 가까이를 시체더미 속에 살았던 그는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스물이 조금 넘었을 무렵 황제로부터 직접 백작위를 하사받았다.
하지만 하이어드는 이 모든 일에 무감했다. 그 무엇 하나 그의 흥미를 끄는 것이 없었으며 그저 무료하고 덜 무료한 정도의 차이였다.
그나마 날붙이를 내두르는 것 정도가 그의 권태로움을 달래 주었으니, 살육에 몰두하며 지루함을 달래던 그에게 종전은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끝내 종전이 이뤄지고 대륙에 평화가 찾아오자 무언가 충족되지 않는 느낌이 그를 뒤덮었다. 피 냄새로 범벅된 전쟁 중에는 모든 생각을 지울 수 있었으나 이제 그마저도 내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지루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전쟁이 일어나려는 낌새가 보였다.
아트로테인 제국이 빛이라면 프라헨 왕국은 어둠이었다. 둘 모두 막대한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음이 같았으나, 범법적인 행위를 통해 왕국이 불려 나가는 부를 제국이 따라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프라헨 왕국이 마약 사업을 통해 날이 갈수록 몸집을 불려 나가는 꼴을 못마땅해하던 제국은 왕국으로 가 계획을 돕는다면 보다 높은 작위를 내려 주겠다며 그를 꼬드겼다.
그는 작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차라리 시키는 바를 행하는 쪽이 덜 따분할 듯해 그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를 택했다.
사제의 형상을 뒤집어쓰고 스논 공작가에 들어가 그들의 불법적인 만행의 증거들을 모으고, 헤이트리드 교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공작가를 무너뜨려 백성들의 민심이 혼란해진 순간을 틈타 전쟁을 일으키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그는 시키는 것을 잘 행하는 개였다. 수십, 수백 번의 전쟁에서도 충동 따위는 인 적이 없었으니.
하나 작은 몸 하나가 자꾸 그를 부추겼다. 충동질을 일으켰다. 건조하기만 했던 긴 생에서 충동질을 맛보게 된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구미가 당겼고 거리낄 것 없이 탐했다.
무료함에 택한 상부의 명령과 계획 따위보다 처음 맛보는 그 습한 구멍 하나가 더 귀했으니.
인형 같이 늘어져 있던 여체가 아래를 부딪칠 때만 내보이는 얼굴이 마음에 들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 어느 때도 무표정하던 얼굴이 다채롭게 바뀌는 것이 썩 마음에 찼다.
“아니요.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 뒤통수를 칠 줄 알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제야 아귀가 맞았다. 귀족 영애가 먼저 다가와 망설임 없이 제 처음을 내어주었던 것이. 그 뻔한 걸 속은 제가 천치 같기도 해 재미있었다. 발칙하기도 했고. 요부 같은 것이 진정 저를 홀렸다. 성공이었다.
그리고 기꺼이 속아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계획이 끝나 왕국을 먹고 나면 제 손안에 떨어질 것이었으니, 그때 곁에 두어 가지면 되는 일이었다.
“앞으로는…… 제게 오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기꺼이 속아주겠다는데 또 쓸모없는 말을 입에 담는 그 작은 입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저를 감시해야 하는 주제에 밀어내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짚어 보다 남는 것은 하나였다. 죄책감. 살을 맞대며 몸정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씨발…… 여려가지로.
계획적으로 접근했다는 말을 들을 때보다 더 좆같았으나 봐 주려 했다. 발칙하다 여기던 무감정한 낯이 다시 드리우기 전까지는.
마치 몸을 접붙인 적 따위는 없다는 듯 과거를 완전히 도려낸 사람처럼 의연한 낯으로 저를 상대하는 여자를 보자 속이 뒤틀렸다.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의 노기가 치밀었다. 이따위 기분을 맛본 것 또한 처음이었다. 제게 충동질을 일으키더니 아주 멋대로 가지고 놀았다.
겁박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저를 향한 공포스러운 낯 따위는 지금껏 수도 없이 마주했다. 그러니 이 여자가 그러더라도 상관없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기분이 더러워 그가 물러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신전에 볼일이 있어 방문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함께 돌아가려고…….”
“아버지께서…… 사제님과 함께 돌아오라 마차를 한 대만 내어주셔서요.”
한 번을 제 생각대로 움직여 주는 법이 없었다. 그날 저를 그렇게 무서워하더니 웬일로 대신전까지 걸음 한 것인지 잠시나마 의문을 가졌던 그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낯을 일그러뜨렸다.
제가 몰아붙이자 고분고분하게 몸을 내맡기는 것이 공작이 시켜 몸을 대주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워지다가도 작은 몸이 바르작대며 제게 안겨 오자 들끓던 불쾌감이 사그라들었다.
이 정도면 다 알고 이용해 먹는 것이 분명했다. 매번 가지고 놀아지면서도 저 하찮은 손에 쥐여주는 제가 더 병신같기는 했지만.
그날은 그렇게 정신도 못 차리고 저와 몸을 섞은 주제에. 성가신 절차들을 밟고 데리러 와 주었더니 눈앞에 펼쳐지는 꼴이 가관이었다.
저에게 안겨 올 때는 언제고, 제가 이루어준 일들을 좋아하기는커녕 충격을 받은 꼴을 보니 제 뒤통수를 치려 했다는 사실에 확신이 보태졌다.
꾹 닫힌 눈꺼풀은 들릴 생각을 않았다. 자신과 말조차 섞기 싫다는 듯 태연히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태도에 여태껏 느꼈던 감정들과는 결조차 다른 노기가 치밀었다.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라고 지껄인 주제에 미련 없이 눈을 감는 것이.
그 정도로 저와 함께 가는 것이 싫냐는 물은 따위를 던질 시간은 내어주지 않았다.
하이어드는 정신을 잃고 제 품으로 무겁게 늘어지는 베이지의 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뒤에 선 기사들을 향해 짧게 명했다.
“가지.”
이 여자는 가만히 있던 저를 건드렸으니 그에 마땅한 책임을 져야 했다. 그녀가 원하지 않더라도 이미 제 눈에 들어오고야 말았으니.
명이 떨어지자 공작저에 배치되어 있던 제국군이 일제히 병력을 거둬들이고 철수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