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14)

11

완연한 여름이 드리웠다. 하나 초여름의 녹음은 이내 몰아닥친 장마에 먹혀버리고, 며칠이 지나도록 잿빛 하늘에는 뿌연 먹구름만이 떠다닐 뿐이었다.

걸음을 옮기다 별안간 그 자리에 멈추어 선 베이지는 시선을 들어 재색 하늘 위로 맺힌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썩 좋지 못한 마음과 같이 흐린 날씨였다.

“아가씨.”

잠시 그 자리에서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베이지는 고개를 돌려 저를 부른 이를 마주했다. 제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애브였다.

베이지가 애브와 눈을 맞추자, 그의 녹안이 더디게 움직이며 뻥 뚫린 길을 눈짓했다. 어서 걸음을 옮기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애브의 시선은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베이지에게서 빗겨나가고 있었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애브는 얼마 전부터 자신의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애브를 모르는 이들이라면 마주했다고 여길 만큼 태연스러운 눈길이기는 했으나, 베이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

설마 그때 그 일 때문일까.

‘……더는 아가씨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확히 그다음 날부터였다. 짚이는 바는 있었으나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 일 탓이라기에는 애브가 느꼈을, 자신을 마주하지 못하게 될 만한 감성을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베이지는 생각을 멈추고 길을 트고자 제 앞에 선 애브의 뒷모습을 훑었다.

어찌 되었든 아버지에게 보고를 올리지만 않아 준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웅. 그때 웅장한 관악기 소리가 베이지의 상념을 깨트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틀자 광장의 건물 곳곳에 위치한 발코니에 일정한 간격으로 서 악기를 부는 시종들의 모습이 보였다.

시종들이 선 건물 뒤 진한 잿빛이 감도는 하늘을 바라보던 베이지는 이내 셰르몬 대광장 중앙, 가장 웅대하고도 첨예하게 빚어진 헤이트리드 신전 위로 시선을 끌어올렸다. 신전의 최상단에 뾰족하게 날이 선 첨탑이 그녀의 눈에 밟혔다. 신전의 경건함에 걸맞게 고결하기 그지없는 자태였다.

당일은 그간 신전을 위해 힘쓴 사제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교황이 직접 그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날이었다. 성제는 프라헨 왕국의 건재함과 왕국의 국교인 헤이트리드 교가 행사하는 권력의 위세를 알리기 위해 셰르몬 대광장에 온 백성들을 모아 놓고 더없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대광장은 이미 밤 사이 몰린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성사는 이른 아침부터 이루어졌는데, 늦었다가는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 쏟는 모든 노력은 공식 석상에서 원체 얼굴을 비추는 법이 없는 교황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함이었다.

타데오는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하여 영특한 자를 교황 자리에 앉히려 하지 않았다. 제가 휘두를 수 있는 조금 모자란 이를 원하였고, 그리하여 골라 앉힌 것이 지금의 교황이었다. 머리가 모자란 탓에 불가피한 자리에만 드물게 모습을 드러내도록 한 것인데, 그것이 오히려 교황의 성스러움과 숭고함을 부각시킨 모양이었다.

타데오가 주워온 또 다른 개에 불과한 교황의 정체를 알고 있는 베이지에게는 한낱 꼭두각시처럼 보일 뿐이었으나, 백성들에게 교황이란 국왕보다 고귀한, 가히 신에 가까운 존재와 다름없었다.

“아가씨.”

베이지가 또다시 걸음을 멈추자 애브가 다시금 그녀를 불렀다.

“아…… 죄송해요.”

제가 걸음을 멈추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베이지는 서둘러 다시 발을 디뎠다.

최근 이상해진 것은 비단 애브 뿐만이 아니었다. 베이지 또한 그러했다. 모른 체 하이어드와의 관계를 이어 나가기로 결심했다지만, 아무리 눈을 가린들 제멋대로 떠오르는 불안한 생각들은 그녀가 어찌 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은 그녀를 좀먹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안온함이라는 것을 가져다준 하이어드의 품에 안겨 있을수록 베이지는 그를 손에서 잃을 것이 보다 더 두려워졌다. 그리고 그 불안은 더없이 끈덕지게 그녀를 쫓아다녔다.

하이어드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는 데는 쓸모없는 그의 정체였으나, 감정을 인정하고 난 후에는 더없이 크게 들이닥치는 부분이었다.

하이어드의 정체를 모른다는 사실은 베이지에게 그를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을 가져다주었다.

베이지가 아무리 제 눈을 가리고 있다 한들, 그녀는 천치가 아니었으니까.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베이지가 건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자리를 안내했다.

대광장의 한 켠에는 성제에 참석하는 고위 귀족들을 위한 귀빈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성사가 이루어지는 신전이 가장 잘 보이는 건물의 발코니에 마련된 좌석이었다.

발코니로 들어서자 주위에 미리 착석해 있던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베이지에게 인사를 건넸으나, 곧 성사가 시작될 예정이었기에 그녀는 간단히 목례를 주고받는 것으로 인사치레를 끝맺었다.

당일 성제에는 스논 공작의 대리인으로서 참석한 것이었기에 베이지는 국왕 다음의 상석에 착석했다.

타데오는 국경 부근의 지역에서 볼일이 있다며 며칠째 수도에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백성들에게는 성대한 축제였으나, 그들에게는 그저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는 형식적인 행사에 불과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신전은 꽤 가깝게 느껴졌다. 즉일 성사를 받는 사제들 중 하나인 하이어드는 중앙 신전의 높이 솟은 시계탑 아래,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잘 닿을 수 있는 발코니에서 축복을 받을 것이었다.

베이지는 백색 융단으로 꾸며진 발코니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보았던 하이어드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더듬었다.

대신전에서 돌아오는 길에 하이어드와 마차에서 몸을 섞은 지도 벌써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베이지가 하이어드를 거부하기를 포기한 것이 무색하게, 그녀는 그와 얼굴을 거의 맞대지 못했다.

베이지는 이번 성제를 준비해야 하는 탓에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고, 하이어드는 성사를 앞두고 또 한 번의 정화 기간을 가지며 강제적으로 신전에 갇혀야 했던 탓이었다.

그리고 어젯밤, 오늘 있을 성제를 위해 공작저에 묵기로 예정되어 있던 하이어드가 베이지에게 찾아들었다.

새카만 어둠 속 제 몸을 짓누르는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묵직한 무게감을 느낀 베이지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불그스름한 입술을 길게 늘어뜨린 그의 얼굴이 그녀의 눈에 담겼다.

‘저를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까.’

정곡이었다. 하이어드가 저택에서 묵을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밤이 늦도록 잠에 들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이지는 너무 날카로이 사실을 짚어내는 하이어드의 놀림에 당황하여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베이지가 잠이 채 깨지 않아 잠기운이 눅눅하게 묻어나는 눈으로 하이어드를 올려다보자, 그가 낮게 웃으며 그녀의 아랫배를 더듬어 내렸다.

오랜만에 만난 것이 무색하게 하이어드는 몸을 맞대려 하지 않았다. 맞대려 하지 않았다기에는 멋대로 베이지의 몸을 희롱하기는 했지만.

하이어드는 그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제 손 아래에서 수차례 절정을 맞이하는 여체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하이어드가 베이지에게 손장난을 치던 도중, 그녀가 제 허벅지 아래 깔린 성기가 하의 위로도 뻐덕하게 솟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손을 뻗으려 했으나, 그마저도 그의 손길에 의해 가벼이 제지당했다.

‘오늘, 공작 대신 성제에 참석하신다 들었습니다.’

베이지가 절정의 여운에 절어 무지근하게 늘어지는 몸을 가누려 하고 있던 차, 둔탁한 저음이 그녀의 머리맡으로 놓였다.

베이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이어드의 물음에 긍정해 보이자, 그가 제 품에서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느리게 그러쥐며 짧게 일렀다.

‘제게서 눈을 떼지 마십시오.’

하이어드의 거친 손아귀 안에서 머리칼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던 것이 베이지가 떠올릴 수 있는 마지막 기억이었다.

베이지가 아침에 깨어났을 때 하이어드는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하이어드는 베이지가 그에게 순응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이후로 그녀를 희롱하는 듯한 언행을 일절 내보이지 않고 있었다.

분명 베이지에게는 좋은 쪽으로 바뀐 것이 분명한데도 그녀는 단순히 그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커다란 불안감을 느꼈다.

아무리 언행이 부드러워졌다 한들, 자신은 그의 정체를 모르는 한낱 남에 불과했으니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미련해.

베이지는 저 혼자 기대감을 품고, 실망하고, 불안해하는 꼴이 우스워 작게 자조했다.

정작 하이어드는 저들의 관계에 이름을 붙이는 일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을 텐데.

그때 웅, 다시 한번 살 떨리는 거대한 진동과 함께 웅장한 악기 소리가 대광장을 울렸다. 곧 성제가 시작될 것이라는 신호였다.

성제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널리 울려 퍼지자, 빽빽한 인파 속에서 바글거리던 소란이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대광장에는 소름 끼치도록 완벽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대광장을 그득히 메운 셀 수 없이 많은 인원을 단번에 잠재우는 종교의 힘을 관망하던 베이지의 눈이 탁하게 가라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던 머릿속이 더 더럽게 엉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베이지가 대광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개미 떼와도 같이 몰린 인파를 내려다보고 있던 차, 가장 높이 올라선 중앙 신전의 발코니에서 흐릿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귀를 찢을 듯한 함성이 터졌다.

발코니에 드러나는 인영의 정체를 눈으로 확인한 앞좌석에서 시작된 환호성은 뒤로 갈수록 그 기세가 보다 더 거세져 가며 한참을 몰아쳤다. 끓어오르는 함성은 살갗을 울릴 정도로 격렬히 진동했다.

교황은 모두가 신실한 신자나 다름없는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발코니 바깥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티끌 하나 묻어나지 않을 것 같은 순백의 천을 온몸에 휘감은 그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난간 앞에 멈추어 섰다.

교황이 저를 신처럼 숭배하는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자, 그의 손짓 한 번에 아래에서 환희가 들끓었다.

잠시 그들에게 즐길 시간을 내어주던 교황이 손을 내리며 입을 떼자, 그 작은 움직임을 잡아낸 백성들의 입이 단숨에 다물렸다. 고귀한 교황의 목소리를 귀에 담으려 저들의 숨소리조차 죽인 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조리 붙박였다.

“헤이트리드 님께서 당일 성제를 위해 걸음 해 주신 모든 성자분들의 순종함을 기뻐하십니다. 신께서 은총을 베푸시길.”

무게감이 느껴지는 교황의 목소리가 숨소리 하나 흐르지 않는 대광장을 가로지르고, 그의 목소리가 광장의 끄트머리까지 가 닿음과 동시에 우레와도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가벼운 축복을 담은 인사말을 시작으로 교황의 짧은 연설이 시작되었다. 연설이라기엔 교황이 어떤 말을 쏟아내면 백성들이 그에 호응하는 과정의 반복일 뿐이기는 했지만.

입에 발린 형식적인 말들을 신의 말씀이랍시고 전하는 교황의 연설을 감흥 없이 귀에 담아내던 베이지의 몸이 눈에 띄게 떨린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간 헤이트리드 님을 위해 몸을 바쳐 봉사해 온 사제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들에게 축복을 내리고자 합니다.”

축복이 내려질 차례였다. 축제와도 같이 성대하게 이뤄진 성제가 구실에 불과하다면 지금부터 진행될 성사는 성제의 본래 목적과 다름없었다.

스논 공작가를 위해 몸을 바쳐 일해 온 사제들에게 부와 권력을 내리는 것이었다.

사제들이 신전을 위해 해 왔던 바를 알리는 교황의 목소리 따위는 더는 베이지에게 닿지 않았다. 교황의 소개가 시작된 순간 발코니로 모습을 드러내는 기골이 장대한 사내 때문이었다.

……하이어드였다.

베이지는 발코니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낸 하이어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모습이 잿빛 하늘 아래 온전히 나타난 순간 인파 속에서 짧은 탄성이 터졌다.

그는 제게서 눈을 떼지 말라 했지만, 그가 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예식을 위해 사제의 예복을 차려입은 하이어드는 베이지는 물론 모든 이들의 눈을 뗄 수 없도록 했다. 일전 고해성사실에서 보았던 차림과 비슷했다.

교황이 몸에 두른 순백색 천과 달리 빛 하나 통과하지 못할 법하게 시꺼먼 예복은 그 특유의 분위기와 더없이 잘 어우러졌다. 장식 하나 없이 발치까지 길게 드리운 까만 천은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부각시켰다.

베이지의 사고가 멎었다. 베이지는 넋을 놓은 채 하이어드와 그의 뒤에 자리한 상앗빛 발코니, 그리고 흰 먹구름조차 사라져 온통 무채색으로 뒤덮인 하늘을 한눈에 담았다. 그 모든 장면들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본래 하나의 것이었던 것처럼.

교황의 말은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었으나 베이지의 귀에는 담기지 않았다. 회갈색 동공은 교황의 뒤에 선 사내의 모습만을 담고 또 담았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불과 어젯밤 하이어드를 보았음에도 꼭 오랜만에 그를 마주하는 것만 같았다. 꽤 오래 그와 몸을 섞지 않아서일까.

하이어드를 마음에 품고부터 베이지의 눈에는 그가 하루하루 다르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왠지…… 좋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뒤로 드리운 잿빛 하늘 탓일까.

베이지는 매일같이 실감하는 하이어드에 대한 마음과 같이 커지는 불안 탓에 피어오르는 괜한 기우인 것을 알았으나 완벽히 지워내지는 못했다. 불가항력이었다.

이상하게 술렁이는 베이지의 마음과 달리 성사는 착실히 진행되었다.

교황이 사제들의 노고를 나열하며 백성들의 앞에서 그들을 치하하는 말들을 끝맺자, 둥글넓적한 은그릇을 든 채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제 하나가 다가왔다.

그에 따라 하이어드와 또 다른 사제 한 명이 교황의 앞으로 가 섰다.

팔에 드리우고 있던 넓은 소매를 걷어 올린 교황이 손을 들어 은그릇에 담긴 성수를 손끝으로 찍어내며 축복이 시작되었다.

하이어드가 저보다 한참이나 작은 신장을 가진 교황의 앞에 고개를 숙이자, 늘 베이지의 목덜미를 간질이던 그의 검은 머리칼이 아래로 부드럽게 쏟아졌다. 빛 한 점 내비치지 않는 하늘 아래 까맣기만 한 그의 머리칼은 마치 비를 머금은 것만 같았다.

백성 모두가 저들이 그토록 받길 염원해 마지않는 축복을 내리는 과정을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주는 목소리가 하이어드에게 축복을 내렸다.

베이지는 작은 읊조림을 이어나가는 교황의 축복을 귓가로 흘려보내며 눈 한번 떼지 않고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축복의 과정 따위야 질리도록 보아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하이어드가 저 자리에 서 있는 장면이 몹시도 이질적이었다.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그가 정말 사제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이어드가 신의 종이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음을 확인한 순간, 베이지의 마음은 더 크게 술렁였다.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생각 탓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그를 향한 제 의심은 착각일 뿐이었고, 실제로 그는 사제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정말 사제일 수도 있지 않을까.

베이지의 심장이 그녀조차 그 뜻을 알 수 없게, 느리고 묵직하게 박동했다.

그가 정말 사제라면…….

베이지는 빠듯하게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감정을 눌러내리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하이어드가 정말 사제라면, 그는 권력을 탐하려 한 타락한 사제일 터였다. 사람을 죽이고, 부를 뒤쫓는, 베이지가 증오해 마지않는 아버지와 같은 부류의 사람인. 그녀가 증오해 마지않아야 하는 부류의 사람인.

그럼에도…….

베이지의 가슴에 스민 감정은 명백한 기대감이었다.

그가 정체 모를 자라 제 곁을 떠날까 불안해해야 하는 것보다…….

그때 성사가 끝났는지 하이어드가 움직임을 보였고, 그게 신호라도 되는 양 베이지가 생각을 끊어냈다. 그 뒤를 생각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베이지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려는 생각을 억지로 털어내며 식에 집중했다.

교황이 축복을 받은 사제가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시간을 내어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하이어드가 대리석 난간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걸어 나왔다.

축복이 끝나고 조금 웅성거리는 기운이 감돌던 사위에 또다시 짙은 고요가 내려앉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이목이 하이어드에게로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예의 그 무감한 낯으로 대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던 하이어드의 속눈썹이 느리게 들려 올라가더니 그 아래 자리한 꺼먼 동공이 정확히 베이지에게로 와 꽂혔다.

창에 목이 꿰뚫린 이처럼, 하이어드의 시선에 박힌 베이지의 숨 또한 멎었다. 그녀의 심장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아무리 귀빈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한들, 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 저를 짚어냈을 리가 없을 텐데도 베이지는 검은 시선이 제 몸을 선득히 휘감아 내리는 것 같다는 착각을 지우지 못했다. 저릿한 긴장감이 푹 팬 등골을 타고 내렸다.

그와 동시에 베이지는 한 가지 감정을 느꼈다. 더없이 뚜렷한 기쁨이었다. 참 단순하게도 베이지는 하이어드가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한 번의 헤맴도 없이 저를 찾아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베이지의 짧았던 환희는 이어지는 하이어드의 움직임에 의해 단번에 진창으로 처박혔다.

“아…….”

베이지는 저도 모르게 작게 침음했다.

일자로 굳게 다물려 있던 하이어드의 입술이 벌어지며 그의 입매가 길게 늘어졌다. 그 붉은 입술 끝에 내걸린 느른한 웃음기가, 멀리서 보아도 한없이 선명했다. 지금껏 단 한 차례도 보인 적 없던, 짙은 만족감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제게서 눈을 떼지 마십시오.’

어젯밤 그가 남기고 갔던 말이, 붉은 그의 입술 위로 가 맺혔다.

일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덜컥 치밀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어지러운 감정들이 베이지의 발끝을 타고 올랐다. 그녀는 올가미에 발이 걸린 짐승마냥 발끝 하나 까딱이지 못했다.

베이지가 저 아래에서부터 몰아치는 두려움에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중에도 하이어드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붙박여 있었다.

그가 자신을 보며 입매를 늘어뜨리는 것이 좋아야 하는데, 좋은 것인데. 분명 좋아해야 하는데.

베이지는 저를 얽어오는 시커먼 동공의 아래, 그녀가 깊숙이 눌러 두었던 것들이 표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천박한 언행과 암살자의 목덜미를 쉬이도 낚아채던 두툼한 손, 드넓은 등을 가로지르던 상흔이 뒤섞여 베이지의 시야를 혼탁하게 만들었다.

베이지는 불길하게 뛰는 심장을 다스린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손을 놓고 그저 버겁다는 듯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억겁과도 같은 짧은 순간이 지나고, 하이어드의 단정한 입매가 벌어졌다.

그리고 그는 확인시켜 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제 죄를 고백합니다.”

베이지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그녀가 품었던 의심이 옳았음을. 그녀의 몸에 수없이 입을 맞추었던 붉은 입술이 확인시켜주었다.

시커멓게 탄 듯 거뭇한 저음이 대광장 위로 내리깔렸고, 베이지는 눈을 감았다. 고요만이 감돌던 그 넓은 공간을 모조리 메워버릴 듯 거대하게 눌러 내리는 묵직한 부피감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검게 암전된 시야 속에서 베이지의 심장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저 저 아래 가만히 놓인 듯도 했다. 내려앉은 가슴에서는 생각보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지근하게 놓인 심장은 그저 무겁고, 또 무거울 뿐이었다.

안온함을 가져다주리라 믿었던 저 입술이 목을 움켜쥐고 숨통을 틀어막아 제게 죽음이라는 안온함을 가져다주려는 것만 같았다.

“어리석은 죄인인 저는 삿된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하이어드의 둔탁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푹 꺼져 들렸다. 그래서일까,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저음은 먹먹하게 베이지의 귓가를 스치고 아득하게 사라졌다.

“부와 권력을 가져다준다는 한 마디에, 스논 공작가에서 행하는 범법적인 행위를 도왔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도피하듯 눈을 감아 버린 베이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열기 어린 시꺼먼 눈동자가 여전히 그곳에 서서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혼탁해 그 속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하이어드의 시선에 단지 저 아래 놓여 있을 뿐이라 여겼던 심장에 꺼슬거리는 모래가 흩뿌려졌다.

가만히, 베이지는 하이어드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귓가를 울리던 모든 소리들은 꺼진 지 오래였다.

“선교라는 명목 아래 마약을 밀수출하고, 신전 개척 사업을 빌미로 타 왕국에서 약초를 재배하여 밀반입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제 죄가 잘못된 것임을 압니다.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하이어드의 눈은 여전히 베이지에게 붙박여 있었으나, 그의 엷붉은 입술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베이지는 나뭇가지에 꿰뚫린 꽃잎마냥 망연히 하이어드의 눈길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하이어드를 끌어내라는 교황의 호통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들리지 않는 듯도 했다.

때맞춰 지금까지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던 인파 속에서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대처하지 못하는 교황의 얼빠진 얼굴과 해명과 수습을 요구하듯 베이지에게 쏟아지는 귀족들의 시선,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울분에 찬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백성들. 이 모든 상황들이 베이지의 눈앞에서 어지러이 흩어졌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버석한 모래색 눈동자에는 오롯이 하이어드만이 담겼다. 그 역시 그렇듯이.

누가 지시한 것인지 하이어드는 머지않아 발코니 바깥으로 쏟아져 나온 사제들에게 포위당했고, 그는 반항 한번 하지 않고 제 몸을 내어주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베이지의 얼굴을 눈에 담은 하이어드의 입술이 선웃음을 흘리며 얕게 벌어졌고, 그녀의 망막에 길게 늘어진 그의 붉은 입꼬리가 새겨지듯 선연히 맺혔다.

베이지는 하이어드가 사라진 후에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가 부정하지 않자 거세지는 여론에도 그녀는 입을 떼지 않았다.

혼란했다. 폭동으로 인해 성제는 엉망이 되어버렸고, 사방에서 비명과 고함이 몰려왔다. 베이지는 사위를 어지럽히는 분주하고도 버거운 움직임을 바라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한 가지 사실만이 분명해졌다.

하이어드가 자신을 이용하고 배신했다.

언제부터, 왜, 그럼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여러 생각들이 맴돌았고, 이내 바스러졌다. 그런 중요치 않은 사실들보다 차츰 밀려오는 감정들에 잠식당한 것이었다.

가문이 무너졌다. 제 오랜 염원을 이루어주었음에 고마워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가 저를 이용했다는 사실 하나가 가슴에 단단히 틀어박혀, 전혀 기쁘지 않았다.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미우면서도 밉지 않았다. 그를 향한 본능적인 원망과 동시에 기대를 품은 제 잘못이라는 이성이 뒤섞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정말 제 집안이 무너지기를 바라왔던가?

베이지의 머릿속에 그제서야 원초적인 물음이 떠올랐고,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었다. 어머니가 바라 마지않던 것이었다.

결국…… 사명감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삶에 있는 거라곤 스논 공작가의 죄악을 끊어내야 한다는 그 사명감 하나가 전부라 그것을 붙잡고 매달리고 있었던 것뿐일지도 몰랐다.

정말로, 진실로 원하는 것을 갖게 되니 그런 사명감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 몫만 챙긴다며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당해도 좋았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저, 그저…….

꽉 다물린 베이지의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버리기를 염원해 마지않던 꼭두각시 같은 삶을 평생 영위하게 될지언정, 하이어드가 제 곁에 있었으면 했다. 있기를 바랐다.

그의 존재 단 하나를 바랐다.

평생 베이지 스논으로 살게 되어도 좋으니.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래서 하이어드의 정체를 모른 체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염치도 없이, 모른 척 처음 맛보는 이 안온함이 계속되기를 바라서.

끝내 찾아온 종말에 베이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굳게 감긴 그녀의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 * *

셰르몬 대광장을 기점으로 왕국 전체에서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국 내 마약 유통이 증가함에 따라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범죄율이 증가하고 있는 탓에 마약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미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상태였다.

길고 고되었던 전쟁이 끝나고 안정과 평화만을 위해 신을 믿었던 백성들은 왕국과 신전, 그리고 공작가가 왕국의 안녕에 일조하기는커녕 범죄를 주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분개했다. 평온하게 사는 것 하나만을 바라던 저들에게 자국이 범죄를 조장하여 혼란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배신감에 치를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종교 최고 권위자인 교황이 그 자리에서 발을 빼버린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하이어드의 고백을 부정하던 교황은 여론이 사그라들 생각을 않자 이내 모든 일을 왕국과 공작가, 그리고 하이어드가 주도한 바로 몰아가는 것을 택했다. 천치라 여겼던 교황이 중요한 순간에 등을 돌리는 바람에 위대한 신앙심 또한 더는 스논 공작가를 보호해 주지 않게 되었다.

혼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잔머리를 굴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교황은 그렇지 않아도 신께 계시를 받았다며 운을 띄웠다.

교황은 이 모든 것이 얼마 전 신탁을 받았음에도 가벼이 넘긴 제 탓이다, 며칠 전 헤이트리드 님께서 이 나라를 떠나 새로운 땅에 정착하라는 신탁을 내리셨다며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단번에 믿음을 떨칠 수 없었던 신도들 또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 교황의 잔머리가 성공한 것이었다.

종교는 그 어디를 가서도 살아남을 수 있기에 미리 운을 띄운 것이었다. 다른 국가에서 이미 그러한 제안을 받아왔기에 유혹에 넘어간 것일 수도 있었다. 그가 두려워하는 타데오마저 수도를 비운 상태였으니 더더욱 거리낄 것이 없었을 터였다.

결정적으로.

“제국과 맞닿은 국경 지역의 마을 성문이 지금 막 뚫렸다고 합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제국 측에서 국경과 인접한 지역의 성문을 부수고 쳐들어왔다. 전쟁의 신호탄이었다.

제국 측에서는 순순히 항복하는 자들에게는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완벽한 제국민으로 받아들여 그들과 같은 대우를 보장하겠다며 백성들을 회유했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군사력을 가진 제국군과는 맞먹을 수도 없는 왕국의 기사단은 우후죽순으로 무너졌고, 가뜩이나 범법 행위를 주도하고 있었다는 왕국의 행태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백성들은 왕국군이 무너지는 모습을 목격하자 너도나도 두 손을 들고 항복을 외쳤다.

제국군이 수도로 밀고 들어오는 속도는 비교할 수 없이 빨랐고, 왕국의 모든 지역들이 하나둘 점령당하기 시작했다.

왕국의 기사단이 나서 해명하려 해도 그토록 기피하던 혼란 속에 빠진 백성들은 이미 눈과 귀를 닫은 후였다. 막다른 길이었다.

여기까지 현 상황을 보고받은 베이지는 이쯤에서 하이어드의 정체를 가늠할 수 있었다.

제국의 사람이었구나.

언제나 두려울 것 하나 없이 굴었던 그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보고하는 기사의 입에서 그의 정체를 기어코 확인받고야 말았다.

“제국군의 수장인 티르헤모스 헤드온 백작으로 보여집니다.”

제국군의 수장.

베이지의 입에서 헛웃음이 샜다. 익히 들어오던 소문의 주체가, 전쟁귀라 칭해지던 그 남자가 하이어드였다.

전쟁터에서 일평생을 보냈다고 했던가. 왕국 내에 낯을 익힌 이가 없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일단 수도를 벗어나셔야 할 듯합니다.”

보고를 마친 기사가 동료들을 돕기 위해 급히 자리를 뜨고, 애브가 완전히 넋을 놓고 앉은 베이지를 향해 일갈했다. 하나 그녀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대광장에서 폭동의 여파에 휩쓸릴 뻔한 베이지를 부축해 공작저까지 데려온 것도 애브였다. 그가 그녀를 강제적으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직까지 그곳에 서 있을지도 몰랐다.

애브는 고작 사제 하나 때문에 정신을 놓고 앉아 있는 베이지를 말없이 내려다보다 짧게 일렀다.

“베이지. 배신당하신 겁니다.”

애브의 목소리가 베이지에게 확인 사살을 시켜주었다.

베이지는 애브의 말에 상처 입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진작 머리로 인정하고 이해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체감했다. 사실만을 일러주는 그의 말이 새삼 상처로 돌아왔다.

왕국이 무너져 간다는, 그 굳건해 보였던 스논 공작가가 무너져 간다는 사실을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보았음에도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을 넘어서 그저…… 싫었다. 다 싫었다. 기쁘지 않았다.

하이어드가 정말 자신을 이용한 걸까.

더없이 뚜렷한 증거들이 눈앞에 나열되어 있는 와중에도 터무니없는 희망을 가지는 것이, 꼭 서적에서만 보던, 사랑에 빠져 사리 분별조차 하지 못하던 미련한 여자 같았다.

애브는 제 말이 들리지 않는 듯한 베이지를 잠시간 내려다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후문에 준비된 마차를 타고 이동하실 겁니다.”

혹시 모를 경우를 항상 대비하던 타데오답게 도피처는 마련되어 있었다.

애브는 국경 부근으로 이동한 후 해로를 이용해 유일하게 마약 유통이 합법화되어 있는 데시트 왕국으로 이동할 것이라며 짧게 일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베이지에게서 이렇다 하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그 어떤 말도 통할 생각을 않자, 애브가 억지로라도 베이지를 일으키려던 차였다. 어느새 저택 앞까지 다다른 모양인지 멀리서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인 듯한 원성이 이곳, 집무실까지 와 닿은 것은.

그리고 그때, 애브가 앞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도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던 베이지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난데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이지는 곧장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베이지.”

애브가 베이지의 팔을 붙잡아 그녀를 불러 세우려 했으나, 베이지는 애브의 손길을 뿌리치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힘이 빠진 그녀의 다리가 꾸역꾸역 앞을 향했다.

그렇게 베이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그녀의 침실이었다. 무작정 제 침실로 들어선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침대 아래 주저앉았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녀의 어머니가 사용하던 침대 틀에는 보이지 않는 흠이 존재했다.

베이지가 손을 뻗어 더듬더듬 결을 따라 손끝을 옮기자, 그녀의 손끝에 작은 흠이 툭 걸렸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흠이었다.

베이지가 손톱을 끼워 넣어 당기자 틈은 의외로 쉬이 벌어졌다.

그간 비밀에 부쳐왔던 것이었으나, 이미 다 끝나버린 일이었기에 베이지는 뒤따라온 애브가 저를 보고 있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대로 서랍을 열었다.

“……하.”

그리고 드러나는 것을 확인한 베이지의 입에서 웃음이 샜다. 울음과도 같은 먹먹한 웃음이었다.

베이지는 제 손 아래 쥐어진 비어있는 상자를 허망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없다. 제가 지금껏 모아 두었던 스논 공작가의 범법 행위 관련 증거 서류들이 없었다. 단 한 장도.

베이지의 침실에 드나들던 이는 그녀를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하이어드.

베이지의 심장이 가쁘도록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애브조차 어린 시절 이후로는 제 침실에 함부로 드나들지 못했다. 자유로이 침실을 오갔던 이는 하이어드가 유일했으니 그가 저지른 일임이 확실했다.

육안으로 보이는 증거는 자신이 하이어드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 주었다.

이것을 위해 저와 잠자리를 이어가려 하셨던 걸까. 이것을 위해.

대체 언제…… 언제 가져가신 걸까.

최근 정신이 없어 확인을 하지 못했다. 자주 열면 틈이 벌어지기에 꼭 필요한 순간에만 확인하는 편이기도 했고. 하지만 분명 하이어드와 마차에서 몸을 섞은 직후까지는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어제뿐이었다.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상황에 베이지는 낙담했다.

아트로테인 제국 측에서 먼저 프라헨 왕국의 영토를 침략하려 했다는 사실은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있는 대륙법상, 그에 합당한 사유가 있지 않은 이상 처벌받아야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국에서 마약을 적극적으로 유통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그 서류가 있다면 제국은 책임을 묻지 않게 될 터였다.

자신이 하려 했고, 염원해 왔던 것을 하이어드가 이루어주었다. 통쾌해야만 했다. 해방감을 느껴야만 하는데…….

배신감이 들었다.

처음 하이어드와 잠자리를 가진 후 이상하게 그가 먼저 요구하게 되었던 일과 그동안 자신과 몸을 섞었던 일들이 모두 이것을 얻기 위해 계획된 일이었으리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설마 그는 자신의 마음조차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제가 그를 감싸줄 줄 알고…….

베이지의 눈앞에 페르몬트 거리에서 거리낌 없이 암살자를 죽이던 하이어드의 거대한 뒷모습이 밟혔다.

그렇구나. 그랬구나.

베이지의 다리가 꺾였고,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애브가 그녀를 붙잡아 지탱했다. 그녀는 그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거부할 정신도 없이 그저 버티기에 급급했다.

숨소리밖에 오가지 않는 고요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애브의 진한 녹안이 제 손바닥 위에 쥐여진 자그마한 손바닥 위로 가 닿았다.

“그 사제가 그렇게…….”

완전히 무너져버린 베이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애브가 입을 뗀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기색이 이는 듯하더니, 이내 무시할 수 없을 법한 높은 비명이 찢어질 듯 저택을 울렸다. 혼란의 소리는 베이지의 침실 부근까지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판단할 겨를조차 없이 짧은 순간이었다.

베이지와 애브가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본 순간.

쾅!

건물을 울릴 듯 강한 진동과 함께 견고한 베이지의 침실 문손잡이가 맥없이 떨어져 나가고 묵직한 나무 문이 아가리를 활짝 벌렸다.

경첩이 뜯겨나가며 너덜해진 문짝이 방안으로 느릿하게 넘어왔고, 쿵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쓰러진 문 위로 버석한 발소리가 얹어졌다.

“……하이어드?”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한 베이지의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지친 기색이 역력히 묻어나던 낯 위로 그녀가 느낀 놀라움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평소의 단출한 사제복 차림이 아니었다. 하이어드는 제국을 상징하는 백색의 문장이 가슴팍에 달린 까만 정복을 걸친 채였다. 완벽한 수장의 모습이었다.

정복을 차려입은 하이어드의 뒤로는 뿌옇게 그의 부하로 보이는 기사 여럿이 자리하고 있었다.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제국군의 정복은 하이어드와 더없이 잘 어울렸다. 기사들의 선두에 선 모습 또한.

베이지는 눈으로 목격하고 나서야 받아들였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저를 속인 게 맞구나.

베이지의 가슴이 푹 꺼졌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소란스러운 소음이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본관과 달리 베이지의 침실이 자리한 건물은 마치 완전히 분리된 공간에 놓인 것처럼 이질적인 고요만이 감돌았다.

그때 베이지의 시선을 받아내며 가만히 서 있던 하이어드가 눈을 내리깔았다. 시커먼 눈길이 느릿하게 베이지의 팔과 손을 움켜쥔 애브의 손으로 가 닿았다. 그저 영애와 그 호위의 접촉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감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다리를 뻗었다.

하이어드의 걸음 한 번에 쓰러진 문짝이 짓밟혔다. 흉포한 걸음걸이는 그의 기분이 몹시도 저조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베이지는 제게로 다가오는 하이어드를 바라보며 더듬더듬 생각을 이었다.

그가 왜 자신을 찾아온 걸까. 이미 취할 것을 다 취하고 이룰 것을 다 이루었기에 더는 제가 필요하지 않을 텐데.

설마…….

베이지는 일순 제 가슴 속에 치민 기대와 희망에 자조하며 차갑기 그지없는 하이어드의 두 눈을 마주했다.

모든 것을 잃고 무너진 저를 바라보면서도 무감하기만 한 저 시선에 제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온 대륙에 혼란을 야기한 자를 제국군의 수장으로서 처벌하기 위해 찾아왔을지언정 다른 뜻이 있지는 않을 텐데.

하이어드의 발걸음 소리만이 적막한 공간을 울리던 그때였다. 걸음이 멈추고, 집요하리만치 베이지에게만 붙박여 있던 그의 눈이 제 앞을 가로막은 자에게로 옮겨갔다.

자신을 가로막은 애브의 존재를 확인한 하이어드의 한쪽 눈썹이 구겨졌다. 감정 하나 깃들어 있지 않았던 까만 동공이 짙은 노기로 물들었다.

그런 하이어드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던 베이지는 저를 보호하듯 제 앞에 선 애브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잠시 그의 등을 바라보던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더니,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애브, 괜찮아요. 비켜서세요.”

짧게 명한 베이지는 다시금 하이어드를 바라보았다. 왜인지 보다 더 굳어든 그의 얼굴에 가슴께가 저릿했다.

설마 이제 제 목소리조차 듣기 싫으신 걸까.

어젯밤 드물게 상냥한 태도로 저를 대했던 하이어드의 모습과 겹쳐지자 서러움과도 같은 감정의 덩어리가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려 했다.

베이지는 애써 그 눅진한 덩어리를 삼켜내며 눈을 감았다. 더는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기사들을 대동하고 오신 걸 보니…….

범법자를 죽이려는 듯했다.

제국군은 대륙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하에 대륙법 중 중죄를 저지른 자들을 즉결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 하이어드의 손에 목숨이 흐무러지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베이지는 눈을 감고 제게 꽂힐 칼날을 기다렸다.

막상 눈앞에 닥치니 죽는 것도, 아니 죽는 것이 더 괜찮은 선택지 같았다. 죽음은 언제나 베이지에게 크게 두렵지 않은 것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더욱 그러했다. 본래도 삶에는 뜻이 없었을뿐더러 한 움큼 빛을 가져보았기에 더는 빛 없이 삶을 영위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듯 눈을 감은 베이지를 내려다보는 하이어드의 턱이 불거졌다. 그는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보였다. 그의 목울대가 한 차례 울렁이더니, 일갈했다.

“비켜.”

서느런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시렸다.

하지만 애브는 걸음을 비키지 않았다. 물러서지 않은 채 하이어드에게서 베이지를 보호하듯 섰다. 그리고 하이어드는 애브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짧은 순간이었다. 검집에서 냉기를 품은 시린 칼날이 빼어나오고, 그것이 제 앞에 선 자를 베어내리는 것은.

하이어드의 얼굴에 시뻘건 피가 튀었다. 일전 페르몬트 거리의 골목에서 점점이 튀었던 핏방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솟구치는 듯한 벌건 핏물이 그의 얼굴을 가로질렀다.

살점이 베어나가고 핏물이 튀는 소리가 공간을 울리자 그제야 감겨 있던 베이지의 눈꺼풀이 들려 올라갔다. 불과 수 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따라가기 벅차도록 변해 버린 눈앞의 광경을 담아내는 연갈색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지금 이게…….

베이지는 그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벌어진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뻐끔대고 버티듯 서 있던 그녀의 다리가 얕게 떨렸다.

베이지의 시야에서는 단단히 버티고 선 애브의 등만이 보일 뿐이었으나, 그녀의 정면에 선 하이어드의 얼굴에 튄 핏자국과 그가 들고 선 핏물 발린 장검이 그녀에게 직전 벌어진 상황을 알려주었다.

서슬 퍼런 장검에 맺힌 핏물이 침실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 위로 툭, 무겁고도 끈적하게 떨어지는 모습을 눈에 담자 현실이 베이지에게로 훅 끼쳐왔다. 정말 하이어드가 자신의 적이라는 현실이.

애브 또한 상당히 강한 자였다. 왕국의 기사단에 속한 기사들과 맞붙어도 손색이 없다 일컬어질 정도였으니까. 그런 그가 저렇게 손쓸 새도 없이 당했다.

정말…… 정말 제국군의 수장이었구나.

이어 정면에서 칼날을 받아낸 애브의 무릎이 꺾였다. 그저 받아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속도에 반응하지 못한 것이었다. 애브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는 일그러진 낯을 감추지 못했다.

일순 애브의 등허리가 휘고 두툼한 상체가 크게 들썩이더니, 이내 그가 울컥 시뻘건 핏덩어리를 토했다.

고통이 아닌 불쾌와 치욕으로 구겨진 애브의 얼굴을 짧게 내려다보던 하이어드는 핏물이 흐르는 검을 가볍게 털어내며 검집에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베이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베이지는 하이어드를 보고 있지 않았다. 흙색 눈동자는 그것만이 중요하다는 듯 굽어진 애브의 등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조금 발긋하게 물든 눈가는 생각에 근거를 보탰다.

하이어드의 각진 턱에 굵은 심줄이 섰다.

그리고 그때 곧 꺼질 듯 흔들리는 목소리가 흘렀다.

“애브까지…… 애브까지 베실 필요는 없잖아요.”

베이지는 애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읊조렸다. 물기가 밴 가느다란 목소리는 원망의 빛을 띠고 있었다.

베이지조차 애브를 벤 것에 대한 원망인지, 자신을 배신한 것에 대한 원망인지 알지 못했다. 하나 하이어드에게는 상황상 앞선 뜻으로 전해지기에 충분했다.

베이지가 내는 목소리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하이어드의 입에서 비린 웃음이 샜다. 숨기지 않으니 사람을 짓눌러 버릴 듯한 위압감이 버겁도록 강하게 그녀를 짓눌렀다.

하이어드가 지금껏 베이지에게 내보였던 그 어떤 모습들보다 날것 그대로의 그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순간이었음에도 베이지는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그저 원망했다.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를 잡아낸 베이지가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눈가가 보다 더 발긋해졌다.

웃는다. 저에게는 삶이 무너질 정도의 일인데 그에게는 우스운 일인가 보다. 문득 서로가 생각해 왔을 관계의 무게에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내보여주는 것만 같아 속이 문드러졌다.

그래서였다. 베이지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울분을 쏟아내듯 말을 내뱉었다.

“저만 죽이시면 되잖아요. 다른 이들은 제국민으로 받아들여 주겠다 하셨잖아요. 그 말은 지켜주세요. 어서 의원을…….”

애브를 위해 화를 내는 건지, 애브가 곧 죽을 듯 피를 쏟는 모습에 마음이 아픈 건지, 애브가 이 지경이 된 것에 제 탓이 커 죄책감을 느끼는 건지, 그 어느 것도 분명한 것이 없었다. 온통 혼란하기만 했다. 머리가 아팠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이렇게 만드실 수가 있으세요.”

베이지는 제가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인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머릿속에 있는 말들을 흘려보냈다. 하이어드를 원망하는 마음과 뒤섞여 그를 책망하는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베이지는 제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는 하이어드가 미웠다.

제 말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뜻일까. 무슨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했다.

베이지가 속에서 울컥 치미는 눈물 덩어리를 툭 뱉어버릴까 입을 다문 순간이었다.

“왜.”

손끝을 얼릴 듯 시리고도 둔중한 목소리가 공간 위로 내리깔렸다. 그 위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겹쳐졌다.

저거랑 붙어먹으려고?

시커멓고 괄괄한 음성이 베이지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베이지는 몸을 굳히며 몇 걸음 만에 제 바로 앞으로 다가온 하이어드의 시선을 받아냈다.

그렇다고 이런 말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긴장되면서도 더없이 기대했던 그를 마주하는 순간이었으나, 지금만큼은 그를 마주하는 것이 너무 버거웠다.

이런…… 그저 기분을 상하게 하는, 저들의 관계와는 상관없는 말은 지금 듣고 싶지 않았다.

그때 애브가 베이지에게로 향하는 하이어드의 발목을 잡아챘다. 하이어드는 애브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그의 손을 가볍게 털어내 검은 구둣발로 헤진 상처 위를 지그시 밟아 내렸다.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발질에 길고 깊은 상처가 벌어지며 벌건 핏물을 내뱉었다. 이 순간조차 검은 동공은 오롯이 베이지에게 붙들려 있었다.

평범한 이라면 베이자마자 정신을 잃었을 상처였다. 고통의 신음조차 내뱉지 않고 하이어드의 발질을 받아내던 애브의 생기는 완전히 꺼졌다. 짙은 녹안이 감기며 그는 더는 그들을 방해할 수 없게 되었다.

하이어드는 베이지의 시선을 모조리 받아낼 때까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서고 나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불과 한 걸음이었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붙잡아 올렸다.

“어떡하나. 이제 불구가 되었을 텐데.”

묵직한 나무 냄새가 베이지의 코끝을 달궜다. 하이어드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부옇게 흐려졌다.

“아래나 세울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지간히 잘 빨아야겠는데.

거무튀튀한 노기가 깃든 저음이 바싹 메말라 거칠게 갈라졌다.

도를 넘은 언사에 베이지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허공으로 축 늘어진 그녀의 손끝이 바르르 떨었다.

희롱의 말을 뱉는 것이 그에게는 그저 습관처럼 밴 것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아닌 것 같았다.

맞다. 마음을 조금이라도 내어준 이에게 이러한 희롱의 말을 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를 단순한 놀림감으로 여겼기에 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베이지는 저 좋을 대로 하이어드를 판단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자신은 그에게 그저 장난거리일 뿐이었구나. 소중하지 않았기에 소중히 대해주지 않은 것뿐이었구나.

비참했다.

코끝에 감도는 짙은 나무 냄새 탓일까, 그 끝에 뒤섞이는 피비린내 탓일까. 잘 눌러 내려왔던 서러움이 범람할 듯 밀려들었고 베이지의 둥근 눈망울에 눈물이 흥건히 고여 들었다.

하이어드에게 그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베이지에게는 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모진 손아귀는 그녀의 작은 턱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유리알같이 눈을 감싸는 투명한 눈물에 하이어드의 아귀힘이 강해졌다. 베이지의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샜다.

“놓아주세요.”

베이지가 제대로 벌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리어 거칠게 흔들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냥…… 그냥.”

죽이시면 되잖아요.

물기가 감도는 먹먹한 베이지의 목소리가 숨과도 같이 새어 나왔다.

저를 갖고 노는 게 그토록 재밌는 걸까. 제가 순응해 빠져드는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으셨을까. 그 모습을 그는 즐겼을까.

의심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마음을 열고, 의지하여 그에게 몸을 내맡기고, 더는 그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어버린 제 모습을 보는 것이…….

베이지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에 제대로 된 사리 판단조차 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하이어드의 팔을 떼어 내려 했다. 그녀는 제 턱을 쥔 그의 손을 양손으로 꽉 쥐어 있는 힘을 다해 끌어당겼다.

베이지의 얼굴만 한 거대한 손바닥이 그녀의 자그마한 두 손에 단단히 붙잡혔으나, 최선을 다한 그녀의 바르작거림에도 불구하고 하이어드의 손은 미동도 않았다.

베이지는 하이어드의 시선이 그를 밀어내려는 제 손에 닿고 있음을 알아차렸음에도 계속해서 그의 팔을 떼어 내고자 했다.

그리고 베이지가 스스로 힘에 부쳐 거친 숨을 내뱉은 순간 하이어드가 베이지를 제 품 안으로 그러당겼다.

씨발.

귓가에 맺히는 탁한 욕지거리와 함께 목 뒤에서 둔탁한 고통이 느껴졌고, 그대로 시야가 암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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