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14)

10

이른 오후부터 척척히 땅을 적시기 시작하던 가는 빗줄기는 어느새 땅에 물을 퍼붓듯 사납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메마른 알갱이들이 밟히는 흙길이었던 땅은 이미 빗물에 흠뻑 젖어 진흙 바닥이 되었고, 군데군데 괴어 있는 물웅덩이 위로는 빗방울이 번져 자잘한 파문이 일었다.

해가 질 시간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하늘에 먹구름만이 드리운 탓에 사위는 어둑했다. 푸르스름하고 냉한 기운만이 내려앉은 공간에 차가운 빗소리가 뒤섞였다.

축축하고 어두웠으며 참으로 서늘한 날이었다.

“스논 공작가, 외출로 기입해 주십시오.”

신전의 출입 명부를 관리하는 견습 사제에게 짧게 이른 하이어드는 빗속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며 제 손에 들려 있던 장우산을 펴 들었다. 우산살 사이의 검은 천이 판판하게 피며 그 위로 굵은 빗줄기가 퍼부어졌다. 방울이 쉼 없이 튀기는 듯한 빗소리가 그의 몸을 뒤덮었다.

거대한 체구에 맞먹는 검은 장우산을 손에 든 사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제복 위로 걸친 까맣고 긴 외투 끝자락이 짧게 흔들렸다. 젖은 흙바닥 위로 커다란 구둣발 자국이 남았다.

새카만 우산 아래로 반듯하게 잡힌 콧대와 붉은 입술이 드러났다. 컴컴한 빗속, 고작 그것만이 보일진대도 멀리서 보아도 그인 것이 구분 갈 정도로 뚜렷했다.

빗줄기 사이로 드러나는 긴 입매는 서느렇게 굳어 있었다.

그답지 않게 조금 예민하게 반응했던 접대 자리 이후로 타데오가 하이어드를 바라보는 눈길에서 묻어나던 의심은 확연히 짙어져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감시를 당하고 있는 본인은 그 사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물밑 작업은 끝난 상태였고, 의심한들 계획이 틀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상황은 뜻대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기분은 더없이 저조했다. 애초에 그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을뿐더러…….

걸음 한 번에 움츠러들던 작은 몸이, 자그마한 회갈색 눈동자에 빠듯하게 담겨 있던 공포가, 더럽게 저 아닌 다른 여자와의 잠자리를 주선해 주려던 그 하찮은 입술이 심기를 뒤틀었다.

고작 여자 하나 따위에.

날것 그대로의 행태를 한 무감한 낯 위로 선명한 감정이 떠오르려던 차였다. 눈앞에서 느껴지는 갑작스러운 기척에 하이어드가 시야를 반쯤 가리고 있던 우산 끝을 들어 올렸고, 그의 시선 끝에 시뻘겋게 충혈된 눈동자가 닿았다. 동시에 벼락같은 물세례가 그에게로 쏟아졌다.

“이 개 같은 사제놈들! 신은 씨발, 너네는 사람 새끼도 아니야. 어?!”

사위가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퍼붓는 빗줄기 속에서 흐릿한 남자의 인영이 드러났다. 가림막 하나 없이 따가운 빗발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쫄딱 젖은 생쥐 꼴을 한 남자는 평민으로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텅 비어버린 들통을 들고 선 남자는 목에 핏발이 설 정도로 계속해서 하이어드를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 냈다. 조금 전까지 빗물이 그득히 고여 있던 통이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악에 받쳐 있는지, 비 내리는 소리 속에서도 선명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우산살 끄트머리로 빗방울이 맺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까만 우산이 들리며 뿌연 빗줄기 새로 서느런 낯이 드러났다.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악다구니의 대상이 된 하이어드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균열조차 일지 않은 채 담담하기만 했다.

“아…….”

하이어드의 가라앉은 시선이 제 외투 끝자락으로 툭 떨어졌다. 급한 대로 우산을 기울여 얼굴로 쏟아지던 물세례를 막아내기는 했으나, 채 가리지 못한 외투 끝자락에 빗물이 튀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왕국에서 헤이트리드 교를 국교로 내세우고 있기는 하나, 그들이 하는 일에 의심을 품는 백성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들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이들이 신전에서 나서는 사제들에게 물벼락을 끼얹는 일은 드물지 않게 벌어지고는 했다.

남자는 이제 들통을 옆으로 던져둔 채 삿대질까지 해 가며 하이어드에게 욕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하이어드는 그런 남자를 느른하게 바라보다, 이곳으로 급히 뛰어오는 경비병들을 확인하고는 빗발에 조금 젖어버린 제 머리칼을 설게 쓸어 올렸다. 빗물에 젖어 숯과도 같은 검은 빛을 띠는 머리칼이 부드러이 넘어갔다.

“사제님! 괜찮으십니까?!”

금세 다가온 경비병 둘은 곧바로 행패를 부리는 남자의 양팔을 단단히 붙들고는 하이어드의 안위를 살폈다. 그 와중에도 포박당한 남자는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폭언을 퍼부어 댔다.

하이어드의 눈길이 쉴 새 없이 나불거리는 남자의 입 위로 고정되었다.

재갈이라도 물려야 할 것 같은데.

무표정했던 하이어드의 낯 위로 차츰 불쾌한 기색이 스몄다. 또 그 여자가 떠오른 탓이었다.

고작 물세례를 맞은 것뿐이었다. 평소였다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을 일이었음에도 저를 언짢게 했던 그 작은 얼굴이 겹쳐진 탓에 눅진한 노기가 몸에 들러붙었다.

잠시 남자의 처분을 고민하며 느리게 그를 훑어내리던 검은 시선은 이내 거두어졌다. 우산을 바로하여 눈을 가려버린 하이어드는 허울 좋은 말만을 입 밖으로 냈다. 헤이트리드 님께서는 용서를 미덕이라 하셨다며 남자를 달래 돌려보내라는 말이었다.

내버려 두면 계획에 도움이 될 놈들 중 하나였으니 풀어주는 편이 좋았다.

계획이 순조로이 진행될수록 이따위 기분을 맛보아야 할 날이 짧아지는 것이었으니.

지시가 떨어지자 경비병들은 정문 바깥을 향해 남자를 끌고 나갔다. 남자가 온몸을 버둥거리며 발악하는 산만한 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던 하이어드는 빗소리가 남자의 목소리를 뒤덮고 나서야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차가 대기하고 있을 정문 바깥으로 나선 하이어드가 신전 부지 주위로 쌓인 담벼락을 따라 까만 구둣발을 디디려던 순간이었다. 돌로 높다랗게 쌓인 담벼락 아래, 끄트머리에 장식이 달린 녹빛 우산을 쓴 자그마한 인영이 그의 눈에 밟혔다.

열댓 걸음 정도로 먼 거리에 선 인영은 퍼붓는 빗줄기 속에 흐릿하기만 했으나, 하이어드는 눈길 한 번에 쉬이도 그 인영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의 발걸음이 멎었다.

잠시간 그 자리에 미동도 보이지 않고 서 있었던 하이어드의 입술이 야트막이 벌어졌다.

“여기는 어떻게.”

* * *

잿빛 하늘 위를 가로지르듯 높이 솟은 대신전의 첨탑을 바라보던 베이지는 저도 모르게 제 발치 아래 고인 물웅덩이로 눈을 떨어뜨렸다. 우산 아래 자리한 덕에 파문이 일지 않는 물웅덩이에 그녀의 얼굴이 투명하게 비쳤다.

제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자신이 생각해도 뻔뻔했다. 제가 더는 몸을 섞지 말자고, 거리를 두었으면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놓고는 직접 찾아온 꼴이라니.

베이지는 이곳까지 찾아온 스스로가 염치없어 시선을 보다 더 아래로 내리깔았다.

제가 먼저 관계를 끊자고 해놓고 신전까지 찾아온 저를, 하이어드가 무어라 생각할까…….

페르몬트 거리에서 하이어드와 썩 좋지 못하게 헤어진 후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다음을 기약하고 자리를 벗어난 하이어드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베이지를 찾지 않았다. 내심 그를 기다리는 자신이 싫어 날들을 꼽아보지 않으려 하기도 했던 그녀는 끝내 날짜를 세고야 말았다.

하지만 하이어드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를 피해야 한다는 다짐도 동시에 들었다.

하이어드를 멀리해야 하는 베이지가 헤이트리드 대신전까지 찾아온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타데오의 명이 있었기에. 타데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뜻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사제 놈이 너에게 빠져 있기는 한가 보구나. 집사장에게 네 행방을 묻는다 하던데……. 아직 별다른 진전은 없는 것이냐?’

타데오에게 변경된 항로에 대해 짧게 보고를 올린 베이지가 집무실을 나서려던 차였다. 첫 당부 이후로 하이어드와 관련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던 타데오가 이를 입에 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일순 안면을 가로지르는 핏자국을 묻힌 채 자신을 바라보던 하이어드의 모습이 베이지의 머릿속을 가로질렀다. 그녀의 몸이 반사적으로 굳어 들었다. 짧은 순간, 혹 타데오가 그때의 일을 알고 떠보는 것은 아닐지에 대한 의구심이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때의 일을 아실 리가 없다.

긴장감에 잠시 몸을 굳혔던 베이지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송구스럽지만 아직 의심스러운 부분을 찾지 못했어요.’

베이지의 답에 노골적으로 실망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얼굴을 구긴 타데오가 혀를 차며 대꾸했다.

‘쯧. 그래, 지금처럼만 하거라. 여자에 관심 없던 놈이 너를 찾는 걸 보니 곧 정신도 못 차릴 지경이 될 듯싶으니.’

타데오의 말에 베이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작은 기대감이 그녀의 가슴을 문질렀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건가? 하이어드가 제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어떤 부분이?

기대감이 팽배했다. 그것도 잠시, 베이지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머리를 들이미는 기대감을 파삭 밟아버렸다. 발긋하게 달아오르던 그녀의 목덜미가 식었다.

그런 거였구나.

……바보 같았다.

타데오에게 말을 듣고 나서야 저와의 관계를 끝내려 하지 않았던 하이어드의 의도가 파악이 되었다. 그가 무엇이 아쉬워 저와의 관계를 이어 나가려 했는지 의아했었는데…….

뒤탈 없이 편히 여자와 잠자리를 하려는 이유 따위가 아니었다.

제게 빠져 있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그가 여자에 미쳐 있다는 인식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지켜보던 시선들을 무디게 만들고 그를 우습게 보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자신이 제 침실이 있는 건물에는 경비병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다고 일렀을지언정, 거리낌 하나 없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기탄없이 제 침실을 찾았다.

이것도 보여 주기 위함이었을까?

하이어드 또한 아버지가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숨김없이 집사장에게 제 행방을 물은 걸 보면 오히려 들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베이지는 앞뒤가 완벽하게 들어맞는 상황들에 눈을 감았다. 지금껏 떠올렸던 그 어떠한 가정들보다 가장 타당한 가설이었으나 거짓 없이 털어놓자면, 그녀는 이것만은 아니기를 바랐다.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하이어드와 살을 맞댔던 모든 시간들이 꾸며진 것이었다는 말과 다름없었으니까.

베이지가 무의식적으로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보던 차, 타데오가 그녀의 상념을 깼다.

‘오후에 대신전의 창고를 확인하러 간다던데. 공작저로 돌아오는 길에 사제와 함께 돌아오면 되겠구나.’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타데오의 짧은 일갈에 베이지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가 두 번 말하게 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놀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타데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하이어드에게 겨눠진 화살촉을 무디게 만들기 위해서는 가야만 했으나…….

베이지의 눈앞에 온통 꺼멓던 하이어드의 뒷모습이 선명히 덧그려졌다. 꽤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더없이 선명한 장면이었다. 떠올리기만 하면 마치 그 순간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비린 피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그때의 압박감이 손끝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다음에 이야기하지.’

고작 일주일로는 부족했다. 아직 그를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껄끄럽다 못해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도무지 그의 앞에서 어떤 얼굴로 서 있어야 할지 아직 알 수 없었으니까.

그는 자신이 겁을 집어먹었으리라 생각했을까?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공포와는 정반대의 감정이 치솟은 탓에 겁 따위는 내던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애정과 같이 포근한 감정을 느끼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더욱이나 제가 찾아간다면…….

염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었다.

베이지는 하이어드를 만나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그려보다 자연히 치미는 수치심에 목덜미를 붉혔다.

좋지 못한 상황들만이 떠올랐다. 그의 말버릇으로 보아 제가 찾아가면 비아냥댈 것이 뻔했다.

‘그만두자고 하더니, 직접 찾아오신 겁니까. 왜, 보지가 달아서?’

구태여 듣지 않아도 귓가를 적시는 천박한 희롱에 베이지의 귓바퀴가 뜨끈한 열기를 머금었다. 하이어드가 내뱉은 말이 아님에도 상상만으로 이런 말을 생생하게 떠올리는 스스로가 창피스러웠다. 그와 함께 몸을 섞으며 경박한 말장난을 가까이하다 보니 자신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것 같았다.

베이지는 저도 모르게 상스러운 단어들을 떠올리는 것을 하이어드의 탓으로 돌려 버렸다.

사실 이런 말들도 다른 이가 입에 담았을 때는 그렇게 문란하게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베이지는 하이어드에게서 돌아올 반응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신전으로 걸음 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이곳까지 왔는지도 몰랐다.

하이어드에게 품은 마음을 깨닫고 난 후 처음으로 그를 마주하는 것이었다.

고작 일주일이건만, 그날 하이어드를 바라보았던 베이지와 지금의 그녀는 완전히 달랐다.

고작 감정 하나라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생소하게만 느껴졌던 그 마음은 날이 갈수록 불어만 갔다. 이성이 깨어 있는 순간은 물론 깨어 있지 않은 순간에도 감정은 언제나 존재했다. 뇌리 한 켠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자리를 뜨는 일 한 번이 없었다.

베이지가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은 그녀에게로 쉼 없이 몰아닥쳤다. 인정하기 전까지는 분명 눌러내릴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이성에게 동의를 받고 나니 담아 놓았던 공간이 터질 정도로 무섭게 몸집을 불려 나갔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온통, 꿈에서조차 하이어드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베이지는 그럴 의도가 없었음에도 그녀의 머리는 그를 마주했던 순간들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그리고 생각이 떠오를수록 마음은 더 커져갔다. 일주일 만에 감정은 베이지의 몸에서 완벽히 제 공간을 만들어 커다랗게 차지했다.

베이지는 처음 앓아보는 사랑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잠겼다. 아주 어릴 적 어머니의 사랑을 잠시나마 받아 보았던 때도 이러했을까, 그래서 어머니의 말씀 하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걸지도 몰랐다. 십수 년 가까지 곁에 존재하지 않았던 감정은 그녀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달았다.

베이지의 겉모습은 여느 때처럼 여상스럽기 그지없었으나, 그녀의 속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비교적 평온하던 지난 날들과는 날리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저 자신을 바보 같다 여길 정도로.

이렇듯 베이지는 늘상 하이어드를 떠올렸다. 드물게 꽤 긴 시간 공작저로 걸음 하지 않는 그를 보고 싶다는 생각 또한 짧게 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그를 마주하는 것을 바란 건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뻔뻔했다. 제가 몸을 섞지 말자고, 거리를 두었으면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으면서 직접 찾아온 꼴이라니.

다만…… 높다랗게 솟은 신전의 첨탑을 막상 목전에 두자 마음이 둘로 나뉘는 듯했다.

그가 오지 않기를 바라놓고, 그가 오기를 바라기도 했다. 며칠 만에 마주할 그의 얼굴이 조금은 보고 싶었기에.

정말 무슨 염치로.

그렇게 베이지가 복잡하게 얽히는 상념에 잠겨 초조하게 하이어드를 기다리던 때였다. 익숙한 저음이 그녀의 머리맡에 쏟아진 것은.

“여기는 어떻게.”

둔탁한 저음은 언제 허공으로 흩어졌냐는 듯 단숨에 빗소리 속으로 삼켜졌으나, 베이지는 그 은연한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우산으로 제 몸을 가린 채 땅만 바라보고 있던 회갈색 눈동자가 위를 향했다.

하이어드의 정적인 낯에는 놀란 기색이 옅게 묻어나 있었다. 그의 짙은 눈썹 끝이 구겨졌다.

베이지는 제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얼굴을 하고 있는 하이어드를 마주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놀라실 만도 했다.

둔탁한 빗소리가 두 사람을 휘감았다.

하이어드를 목전에 두자 베이지의 머릿속은 더 새하얗게 샜다. 베이지는 고개를 숙인 채 하이어드에게 건넬 말을 고르다 포기하고 말았다.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먼발치에 선 그를 바라보았다.

흘리듯 살폈던 조금 전과는 달리 베이지의 소극적인 시선이 하이어드의 얼굴을 완벽히 담아냈다. 며칠 만에 제대로 마주하는 그의 얼굴이었다.

웅장하고도 첨예한 신전을 배경으로, 뿌옇게 부서져 내리는 빗속에 발치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걸친 채 까만 장우산을 쓰고 서 있는 하이어드의 모습은 비현실적이었다. 시선이 붙박일 수밖에 없었다.

흔한 결점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훤칠한 얼굴인 것은 알고 있었다. 처음 공작저를 방문했던 날부터 모두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도 모자라 그 이후로도 하인들이 하이어드의 외모에 대한 예찬을 나누는 것을 베이지 또한 종종 들을 정도였으니까.

여느 귀족들도 그에게는 견줄 바가 못 된다고 했었던가…….

그럼에도 베이지는 자신이 하이어드의 얼굴에는 대단한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고 여겨 왔었다.

분명 그러했는데…….

베이지는 부서지는 빗속에 선 하이어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시간 하이어드를 바라보던 베이지는 그의 입술이 움직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하이어드가 무어라 말을 꺼낼지 몰라, 급히 막아내려 했으나 그가 목소리를 내는 것이 더 빨랐다.

“베이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베이지의 심장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이제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조차 저를 휘두른다.

베이지는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하고 넋을 놓았다는 사실에 당황하면서도 몰아닥치는 현실에 바삐 머리를 움직였다.

상상 따위는 소용없었다. 눈앞에 하이어드를 두자 스스로가 낯짝이 두껍다는 생각만이 뇌리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베이지의 눈길이 다시금 하이어드에게 닿았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인 듯했다. 역시 어처구니가 없으시겠지…….

베이지는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녀는 몸을 섞자 꼬드겨야 하는 상황에 처하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입을 열었다.

“그것이…… 다름이 아니라, 신전에 볼일이 있어 방문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함께 돌아가려고…….

베이지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작아졌다. 귓가를 어지러뜨리는 빗소리와 뒤섞여 더욱 불명확해지기만 했다. 평소 아무리 당혹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말끝을 분명히 하는 편인 그녀답지 않게.

잘 전달되었을까?

혹 하이어드가 제 말을 듣지 못했을까 다시 그의 얼굴을 확인한 베이지가 몸을 움츠렸다. 하이어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베이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답지 않게 사람을 깔고 짓뭉개는 그 특유의 압박감조차 흘리지 않고 그저 가만히. 평소와 달라 더욱 감정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 반응을 지레짐작하여 언짢음으로 받아들인 베이지가 입술을 깨물고는 변명처럼 몇 마디 말들을 더 읊조렸다.

“그, 아버지께서…… 사제님과 함께 돌아오라 마차를 한 대만 내어 주셔서요.”

그리고 베이지의 말 한마디에 고요가 내려앉아 있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가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살얼음이 낀 듯 시린 공기가 두 사람을 휘감았다.

어느새 서늘하게 굳어든 하이어드의 낯에는 작은 감정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감정을 내비쳤던 직전과 달리 완벽히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은 생명 없는 조각상과도 같아 소름 끼치도록 인위적이었다.

하나 제가 처한 상황에 눈이 먼 베이지는 빗소리와 자신의 목소리만이 부서지는 정경 속, 보다 더 매서운 적막이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제 변명을 하기에 급급했다.

베이지는 하이어드가 자신이 타데오에게 꼼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김에 그것을 핑계로 대려 했다. 이렇게 둘러대면, 하이어드는 자신이 타데오의 말을 거역하는 것을 두려워해 피치 못하게 이곳에 왔다고 생각할 테니까.

어쩌면,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해 주실지도 몰랐다.

베이지는 작은 희망을 안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이렇게 얼굴 부딪힐 일을 만들게 되어서…….”

시선을 떨어뜨린 채 흐린 목소리를 내던 베이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이어드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다음부터는 이렇게…… 저희만 남게 되는 일은 없도록 할게요.”

조금의 떨림을 안고 있던 베이지의 음성은 끝으로 갈수록 또렷해지다 이내 더없이 선명히 끝맺어졌다. 마치 지금 내뱉는 말이 그녀가 정말로 원하는 바인 것처럼.

말을 이을수록 어쩌면 제가 이렇게 몰염치하다며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이어드는 타데오가 감시의 목적으로 자신을 보낸 것을 모르는 상황이었고, 어차피 함께 공작가의 일을 진행하다 보면 피치 못하게 부딪힐 일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잠자리를 가지는 관계를 끝내자고 했지 아예 얼굴조차 맞대지 말자고 한 것은 아니었기에, 지금 같은 경우는 제가 지레 겁을 먹어 과장되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베이지는 제 할 말을 끝내고서야 머뭇거리다 시선을 들어 하이어드의 얼굴을 살폈다. 그새 조금 더 짙게 내려앉은 어둠에, 새까만 장우산의 그림자가 그의 높은 콧대를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며 그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베이지가 눈에 힘을 주며 하이어드의 얼굴을 보다 더 선명히 담으려던 차였다. 그녀의 시선에 유일하게 밟히던 그의 길고 붉은 입매가 벌어졌다.

“아…… 공작이, 시켰다?”

고저 없는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이 건조했으나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진하기도 했다. 시커멓게 탄 재와도 같은 검은 시선이 베이지를 훑어내렸다.

베이지는 그제야 하이어드의 심기가 그리 좋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의문도 잠시 그녀는 금세 수긍했다. 미처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다.

왜 몰랐을까. 자신이 원할 때는 피해놓고 필요할 때 다시금 찾아온다 여길 수도 있었던 거였다.

제멋대로라고 생각하실 수밖에…….

베이지는 일단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몸짓 한 번에 둘 사이를 휘감은 정적이 보다 더 짙어졌다.

무거운 정적은 꽤 길게 이어졌다. 그 긴 시간 동안 까맣고 집요한 시선은 베이지에게 붙박여 떨어지지 않았고 그녀 또한 그 시선에 붙들려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베이지는 하이어드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섣불리 그 어떠한 말도 꺼내기가 어려웠다.

하이어드를 멀리 두려는 것도, 타데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그의 말을 따라 하이어드를 만나러 온 것도. 모두 베이지 나름대로 하이어드를 지키려 행한 것들이었으나 표면적으로는 제멋대로인 행동에 불과했고 지금 당장은 그녀가 그의 신세를 지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가 저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도 당연했다.

입속에서 말을 고르던 베이지가 돌고 돌아 다시 미안하다는 뻔한 말을 내뱉으려던 순간이었다. 까만 구둣발이 단번에 거리를 좁혀왔고.

“죄…….”

베이지의 시야 윗부분을 흐릿하게 차지하고 있던 녹빛 우산 끄트머리가 튕겨져나갔다. 따갑도록 굵고 거센 빗줄기가 그녀의 몸을 덮쳤다. 귀 끝을 먹먹하게 두드리던 빗소리가 순식간에 현실로 닥쳐오며 우레와도 같은 빗소리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베이지의 길고 빽빽한 속눈썹이 빗물에 젖고 그녀의 시야가 뿌옇게 물들었다.

베이지는 급작스럽게 돌아가는 상황에 따라가지 못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빗물이 고인 진흙 바닥을 나뒹구는 우산 두 개를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금 제 시야를 가로막은 거구의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제게 화가 나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그의 것까지.

“왜…….”

내리꽂히는 빗발에 붉게 물든 베이지의 입술이 벌어지고 금방이라도 빗소리에 묻힐 듯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리디여린 베이지의 음성에 하이어드의 입매가 길게 늘어졌다. 빗물에 흠뻑 젖은 그의 입술이 붉었다.

“이렇게 해야…….”

의심을 사지 않을 게 아닙니까.

비 내리는 척척한 소리와 한데 뒤섞인 먹먹한 저음이 베이지의 몸을 삼켰다. 그녀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었다.

빗물에 젖어 한없이 검게 물든 하이어드의 까만 머리칼 끝에 매달려 있던 빗방울이 그의 창백하리만치 말간 볼 위로 떨어져 내리는 장면이 베이지의 시야에 담긴 순간, 포악한 손길이 그녀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사납게 퍼붓는 물줄기가 마차 지붕을 날카롭게 내리찧는 빗소리가 마차 안을 그득히 채웠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억센 빗소리 탓에 마부는 마차 뒤 칸에서 이는 소란스러운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문이 닫히는 것만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채찍을 휘둘렀다. 말이 높고 긴 울음을 토해내는 소리와 함께 둥그런 마차 바퀴가 진흙을 밟고 굴러가기 시작했다.

“읏!”

강제적으로 마차 안으로 밀어 넣어진 베이지의 작다란 몸은 거칠게 내던져졌다. 이어 가느다란 여체 따위야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깔아뭉갤 수 있을 법한 육중하고도 커다란 몸이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하이어드의 투박한 손바닥이 순식간에 베이지의 드레스 아래 자락을 들추고 여린 살결을 밀어 올리며 깊숙이까지 파고들었다. 그의 손바닥은 차디찬 빗물에 푹 젖었음에도 뜨거웠고, 물기가 어린 탓에 매끈한 그녀의 허벅지 위를 쉬이도 밀고 올라갔다.

베이지의 다급한 손길이 제 아래를 파고드는 하이어드의 굵은 팔뚝을 힘껏 붙들었다.

상황이 돌아가는 바가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자신은 함께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혹시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허락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신 걸까.

이대로 넋을 놓고 있다가는 어찌할 도리도 없이 먹혀버릴 것만 같아서, 베이지는 상황 파악을 그만두고 하이어드를 밀어내려 그의 팔뚝을 양손으로 꽉 그러쥐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그만두자고 말씀드렸잖아요…….”

초조함이 묻어나는 베이지의 목소리가 서둘러 거부의 뜻을 내비쳤다. 하나 그녀가 보내는 신호들에도 그녀의 허벅지 살을 밀가루 반죽 문대듯 느릿하게 뭉그러뜨리는 손길은 멎지 않았다.

하이어드는 얼마나 힘을 준 것인지 하얀 뼈마디가 비칠 정도로 바짝 힘이 들어간 베이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흘긋 내려다보고는 다시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의 입가에서 웃음과도 같은 푹 꺼진 숨이 샜다.

“왜.”

베이지의 여린 허벅지 안쪽 살을 꽉 움켜쥐고 있던 거친 손바닥이 허벅지 살을 그러모으듯 그녀의 다리를 죽 타고 올랐다. 살결이 뭉개지며 잡힌 부위 위쪽으로 도톰하고 부드러운 허벅지 살이 톡 튀어 올랐다.

“흐읏!”

하이어드의 손길이 예민한 허벅지를 죽 타고 오름과 동시에 아랫배가 경련하는 쾌감이 일자 베이지의 몸이 반사적으로 떨렸다.

“한번 대주려고 온 게 아니었나?”

보지에 좆질 당할 걸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흉흉한 저음이 베이지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노골적인 비아냥에 그녀의 손끝이 말려 들어갔다.

하이어드가 평소 내뱉던 말들과 특별히 다를 것 없는 언사였다. 하지만 베이지의 가슴에는 날카로이 와 꽂혔다. 타데오가 시킨 것이 하이어드가 칭한 것처럼 정말 잠자리가 맞았기에 당당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제 발 저려 입술을 즈려문 베이지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하이어드를 밀어내려 그의 팔을 힘껏 쥐고 있던 그녀의 손아귀 힘 또한 약해졌다.

그리고 급격히 고분고분해진 베이지의 태도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하이어드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흘렀다.

“공작의 말을 이따위로 잘 들으시는 줄은 또 몰랐습니다.”

다리 벌리려고 왔다니 쑤셔 드려야지.

허벅다리 안쪽을 파고든 하이어드의 손이 느리게 움직이더니, 굳은살이 박인 그의 엄지가 베이지의 가랑이 옆 옴폭 팬 접합부를 꽉 눌러 올렸다. 깔깔한 손끝이 여리고 민감한 부위를 쑤시듯 문질러 올리자 그녀의 다리가 퍼뜩 튀었다. 오랜만에 닿아 오는 그의 손길은 그녀에게 더없이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흣!”

베이지의 다리가 떨리든 말든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그녀의 허벅다리를 강하게 눌러 내린 하이어드의 손가락은 사타구니의 골을 타고 내리다 이내 속옷 아랫면을 들춰 올렸다.

제 속옷 속을 파고드는 굵은 손가락의 감촉에 하이어드의 팔뚝을 붙든 베이지의 아귀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하이어드의 엄지에 베이지의 까끌한 음모와 그 아래 자리한 뭉클한 음순이 걸려들었고, 하이어드가 음순을 걷어내듯 밀어젖히자 온종일 돌아다닌 탓에 조금 눅눅한 기운이 묻어나는 습지가 그를 맞았다. 물기가 감도는 야들한 음부의 감촉에 그의 바지 앞섶이 눈에 띄게 부풀었다.

하이어드는 뭉글한 소음순을 몇 차례 짓눌렀다. 무르기 그지없는 살이 굵은 손가락에 의해 무자비하게 짓눌리며 형체가 이리저리 비틀렸다.

씨발. 보짓물에 채 젖지도 않았으면서 빌어먹게 노긋했다.

하이어드의 손길이 거칠어질수록 베이지의 호흡은 더욱 가빠져 갔다.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이제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

쾌락을 퍼 날라줄 살점은 건드리지 않고 그 주위만을 배회할 뿐인데도 이따끔 아래에서 간질거리는 쾌감이 올라오자 베이지는 저절로 새는 신음을 막기 위해 말을 멈추고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녀의 호흡이 가빠지며 얕은 흉부가 들썩댔다. 그저 제 아래에서 그의 손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버거운 것일지도 몰랐다.

하이어드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팔이 파고든 베이지의 드레스 자락이 불룩불룩 솟고 빗물에 축축하게 젖은 사제복 소매가 그녀의 허벅지를 긁었다.

그때 음순만을 가지고 놀던 하이어드의 손가락이 그새 발기한 베이지의 벌건 살점 위를 스치듯 훑어 올렸다.

“흡!”

아랫배를 내리치듯 퍼뜩 뛰는 쾌감에 베이지의 하얀 다리가 반사적으로 좁혀들었고, 마치 베이지가 다리를 오므릴 것을 예견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하이어드가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잡아챘다.

“흐…… 아, 흣.”

조금 전 가벼이 스친 정도는 장난질에 불과했다는 듯 하이어드의 반듯한 손가락이 베이지의 부푼 음핵을 무자비하게 짓이겼다. 공알은 습한 기운이 감돌기는 하나 아직 애액이 묻지 않아 말라붙어 있었다.

하이어드는 그 덕에 평소였다면 질액에 흥건하게 젖어 미끄러지듯 그의 손끝에 머리를 퉁기며 벗어났을 뻘건 돌기를 마음껏 짓누를 수 있었다. 동그랗고 빨간 살점을 비벼끄듯 내리누르자 베이지의 입에서 채 막지 못한 신음이 튀었다.

“흐으, 그, 응! 그만…….”

고통스러웠다. 쾌감이라기에는 고통에 가까운 자극이었다.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치미는 쾌감에 베이지가 다리를 그러모아 자극을 줄여보려 애썼으나 소용없었다. 베이지가 아무리 버둥거려보아도 하이어드에게 붙들린 다리는 조금도 달싹이는 법이 없었다.

“제, 제발…… 흣.”

계속되는 자극에 베이지의 입이 조금씩 벌어지며 그녀의 몸에 힘이 빠져나가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음핵을 압박하던 하이어드의 엄지가 촉촉한 골을 더디게 타고 내리더니 물을 질금질금 뱉는 물구멍을 턱 틀어막았다. 억센 그의 손가락이 질구를 둥글게 훑자 좁은 구멍이 끔뻑대며 조르륵 물을 흘렸다.

“보지는 축축한데.”

열에 말라버린 듯한 뜨거운 손가락이 물구멍을 얕게 쑤시듯 두드리자 젖은 구멍이 움찔거리며 무의식적으로 하이어드의 손가락을 빨아당겼다 뱉었다.

“아…….”

찰나의 순간이기는 하나 제 손끝을 빨아먹는 도톨하고 눅진한 점막의 감촉에 하이어드의 도드라진 목울대가 느리게 부풀었다 꺼졌다. 사제복 하의 속에 갇힌 좆대가리가 옷감에 대고 자위질이라도 하려는지 멋대로 꺼떡이며 머리를 치댔다. 저릿한 쾌감이 그의 좆뿌리를 근질였다.

“자지 쑤셔달라 난리네.”

하이어드의 짧고 탁한 숨과 함께 마차 좌석에 뉘여져 있던 베이지의 몸이 순식간에 들렸다.

한순간에 베이지의 시야가 뒤집히며 하이어드의 손에 일으켜진 그녀의 등이 마차 등받이에 턱 부딪혔다.

“아!”

갑작스러운 상황에 베이지가 매달리듯 하이어드의 팔을 그러쥐었다. 하이어드는 겁도 없이 제게 오롯이 의지하는 여자의 조그마한 손을 한번 내려다보고는 그 여자의 다리를 친히 벌려 주었다. 이어 그가 물 먹은 드레스를 걷어올렸다.

베이지는 빗물을 머금어 묵직한 드레스 자락이 들려 올라가며 차갑게 식은 치맛자락이 제 허벅지를 긁는 감촉을 느끼고서야 자신의 다리가 더 벌어질 수도 없이 한껏 벌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지금, 무슨…….”

베이지의 입에서 맥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베이지는 자신이 한껏 다리를 벌려 만들어진 공간 아래 무릎을 꿇고 자리 잡은 장성한 사내의 몸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베이지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그녀의 쩍 벌어진 다리 사이, 밀지를 덮은 천 위를 집요하게 응시하며 그 위를 검지로 두어 번 갉작이던 하이어드의 고개가 들려 올라갔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부닥쳤다. 육욕이 빠듯하게 들어차 한층 진한 빛을 띠는 하이어드의 시선이 닿자, 베이지는 비를 머금어 사늘하게 식은 공기가 제 허벅지를 죽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살갗에 옅은 소름이 돋아 올랐다.

그리고 마치 베이지의 몸에 끼쳐 오른 소름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뜨겁고 괄괄한 손바닥이 서느런 그녀의 허벅지를 감싸듯 짚었다.

“다리 사이에서.”

하이어드의 손바닥과 같이 달궈진 그의 숨이 베이지의 허벅지로 내려앉았다. 이어지는 그의 행동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하나 하이어드는 베이지가 경악스러운 눈길로 저를 보든 말든 그녀와 눈을 맞춘 채 천천히 새하얀 허벅다리 위로 제 얼굴을 묻었다. 비에 흠뻑 젖어 촉촉하게 뭉친 그의 까만 머리칼이 그녀의 흰 허벅지 위로 쏟아지며 차가운 물길을 남겼다.

“보지밖에 더 빨겠습니까.”

열기를 품은 푸석한 숨과 함께 뽀얀 허벅지 위로 하이어드의 누진 입술이 내려앉았다.

하이어드가 베이지의 허벅지 살을 빨아 먹기라도 하듯 크게 아가리를 벌리어 그녀의 살을 입 안 가득 삼켜 당기자, 연한 살이 그의 입 안으로 딸려 들어가며 부드럽게 늘어졌다.

“흣……!”

이어 하이어드의 새빨갛고 두툼한 혀가 살결이 움푹 팰 정도로 허벅짓살을 강하게 누른 채 위로 죽 훑어 올리자, 자르르 다리를 타고 오르는 쾌락에 그녀의 허벅다리가 잘게 떨렸다. 고작 혀로 쓸어 올리는 것뿐인데도 허벅지 살 아래가 울리는 듯한 쾌감이 일었다.

귓가에는 여전히 마차 지붕을 두드려대는 세찬 빗소리가 가득했으며 좌석을 짚은 두 손바닥에서부터는 마차가 덜컹거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베이지는 절로 신음이 새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물을 머금어 묵직해진 드레스는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드레스 자락은 배꼽께까지 말려 올라간 채 그 아래 자리하고 있던 가느다란 두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고작 다리가 드러나는 정도였다면 좋았을 텐데…….

베이지는 자신의 두 다리 위를 짓누른 묵직한 하이어드의 팔을 바라보다, 한계치까지 활짝 벌어진 자신의 다리, 그리고 그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새까만 머리통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차가 조금씩 흔들릴 때마다 까맣고 작은 머리통이 덩달아 움직였고, 뭉글한 혀 또한 그녀의 허벅지에 침을 바르며 미끄러졌다.

“흐…….”

아래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쾌감에 좌석의 검은 가죽을 짚고 있던 베이지의 손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아직 상황을 회피하기를 포기하지 않은 그녀의 시선이 분주히 움직이다 자신의 복부에 뭉쳐져 있는 드레스 끝자락에 가 닿았다.

이걸 다시 덮어 내리면…….

베이지는 눕다시피 늘어져 있던 몸을 조금 세웠다. 동시에 하이어드의 손에 붙잡혀 있던 허벅지가 죽 뒤로 빠져나갔고, 다리를 빼앗긴 그의 짙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베이지는 그조차 보지 못하고 제 다리를 가리는 데 급급했다. 그녀는 서둘러 드레스 자락을 잡아 내리려 손을 뻗었다. 바스락거리는 천이 들려 올라갔다.

“아…….”

하지만 베이지는 계획을 실행조차 해 보지 못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옷자락을 두 손 가득 그러쥔 채 그녀의 손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대로 내렸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깨달은 것이었다.

하이어드의 얼굴은 얕은 곳에 머무르고 있지 않았다. 베이지의 다리 깊숙한 곳에 제 머리를 밀어 넣은 그의 얼굴은 살짝 들어 올린 드레스 자락에 가려져 그녀의 시야에는 밟히지도 않았다.

이미 하이어드가 베이지의 음부 부근까지 제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탓에 옷자락을 내렸다가는 그의 얼굴까지 함께 그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었다.

그건…… 안 됐다.

베이지는 곧바로 생각했던 바를 포기했으나 하이어드는 진즉 그녀의 생각을 읽은 후였다. 그녀의 허벅지에 바싹 붙어 움직이고 있던 검은 머리통이 고개를 들자 빗물이 채 마르지 않은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빗물을 먹어 평소보다 더 시커메진 하이어드의 머리칼은 그의 하얗고 높은 콧대 위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촉촉한 머리칼 끝으로 고여든 빗방울이 새하얀 볼 위를 느리게 타고 내리는 모습은 더없이 색스러웠다. 타액으로 반들거리는 그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고, 원색적인 저음을 흘려보냈다.

“다리 사이에 제 머리를 끼고 있는 걸로는 부족하셨나 봅니다.”

아예 품기라도 할 생각인가.

하이어드가 손을 뻗어 베이지의 허연 넓적다리 사이에 자리한 속옷 한가운데를 지그시 눌렀다. 그녀의 치구를 감싸듯 뒤집어진 그의 중지는 정확히 질구 위를 짚었고, 그녀의 물구멍은 그곳이 구멍 난 자리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손길에 따라 푹 패며 빈 공간을 드러냈다.

하이어드는 얇은 속옷 너머 제 손끝에 닿는 말캉한 애액 덩어리의 감촉을 느끼고는 베이지의 아랫구멍에 보란 듯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신축성이 없는 천이 그의 손가락과 함께 구멍으로 딸려 들어가며 그녀의 음순과 고불한 음모가 빼꼼 튀어나왔다.

좌석에 툭 얹어져 통통해진 허벅다리 사이의 까만 구멍에서 고부라진 음모 몇 가닥이 모습을 보이자, 그 천박하고도 육욕적인 광경에 하이어드의 허벅지에 길게 놓여 있던 그의 자지가 딱딱하게 몸집을 불리며 그 모양을 더 또렷이 했다.

그 순간 마차가 크게 덜컹였다.

“으응……!”

놀란 베이지가 손아귀에 쥐고 있던 드레스 자락을 놓고 급히 등받이를 쥐었고, 동시에 하이어드의 손가락이 그녀의 구멍을 쑥 밀고 들어갔다.

베이지의 질구는 오랜만에 찾아오는 하이어드의 손가락을 잘도 받아먹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속옷이 찢어질 지경까지 한껏 늘어나며 삽입되었고, 낯선 이물질을 삼킨 구멍은 우물대며 입구에 꽂힌 것을 꽉 조였다.

“씹어 대기는.”

하이어드는 간만에 느껴 보는 축축한 보짓구멍 속을 즐기듯 두어 차례 구멍 속에 중지를 흔들어 대더니 미련 없이 손가락을 빼냈다.

“흡.”

그리고 예고 없이 굵은 것이 제 아래에서 빠져나가자 베이지가 반사적으로 아랫배 조이며 숨을 삼켰다.

베이지가 숨을 채 고를 새도 없이 하이어드는 그새 속옷 너머로 그녀의 보짓물이 밴 자신의 손가락을 그녀의 허벅지 위로 닦아내듯 문질렀다.

“빨아줄 필요도 없게 물이 흥건한데.”

하이어드의 손가락에 박인 굳은살 위를 한 겹 감싸고 있던 점도 있는 애액이 미끌거리며 베이지의 살결 위로 발렸다. 하나 미끈거림도 잠시, 묻어 있던 질액이 다 닦여 나가자 본래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던 거친 감촉이 그녀의 살갗을 긁기 시작했다.

베이지는 하이어드의 시선을 피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고작 그의 손가락이 허벅지 위를 오가고 있을 뿐인데도 맞닿은 부위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무언가를 모른 체하려 했다. 그와 몸을 접붙이며 남녀의 정사에서 오는 쾌락을 알게 된 이후로 그녀의 몸은 작은 희롱에도 빠르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신체 반응이었다.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으나, 그에게 자신이 정말 몰염치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아 치미는 수치스러움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수치스러웠다. 마치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를 받아들이고 환희에 떠는 제 몸이.

“그건…….”

베이지는 무어라 변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이어드는 애초에 베이지의 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는지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다시 보드라운 허벅지 위로 제 입술을 묻었다. 무른 입술이 매끈한 살갗 위를 부비다 빨갛고 온습한 덩어리를 빼내어 그 위를 핥아 올려 진한 물자국을 남겼다.

베이지는 끊기지 않는 자극에 몸을 움츠리면서도 꾸역꾸역 말을 이으려 했다.

“신체적인, 흣, 반응이니까요.”

이렇게 몸을 내맡기다…… 제 마음이 보다 더 커져 숨길 수 없게 되면 하이어드가 의심을 사게 될 것이었다.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사제님, 제발……. 이런 건, 그만했으면 해요.”

베이지가 구태여 꺼낸 말에 그녀의 허벅지를 쥐고 있던 하이어드의 아귀힘이 강해졌다. 그의 메마른 손등 위로 두툴한 핏줄이 돋았다. 저 작은 입은 도통 제 마음에 차는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좆 물리기 전에 입 좀 닫지.”

하이어드의 숨결이 베이지의 허벅지 위로 와 닿는 것과 동시에 그의 발음이 뭉그러졌다. 그의 투박한 턱뼈가 벌어지며 매끈한 볼이 푹 꺼졌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 안쪽 여린 살을 제 벌건 자신의 볼 점막에 닿을 때까지 흡입하고는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입안에서 빨아먹듯 살덩어리를 굴려댔다.

베이지의 다리 사이에서 울리는 쩔걱거리는 습한 소리는 멎을 생각을 않았다.

베이지는 제 말이 통할 생각을 않는 하이어드를 내려다보며 이를 사리물었다. 검은 머리통이 다리 사이를 오가는 장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정말로 싫으냐면, 거짓말이었다. 싫을 수가 없었다.

하이어드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깨닫고 처음으로 그를 마주하는 날이었다. 일전에도 어렴풋이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던 감정일 터인데, 마음을 인정하고 하지 않고의 차이는 뚜렷이 나타났다. 고작 그에 대한 마음을 인정했다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짙은 쾌락이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가 제게 닿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빠듯하게 차오르며 거부하기 힘든 쾌감이 몰아닥쳤다.

처음에는 거부의 뜻을 내비치려 힘이 바짝 들어가 있던 베이지의 다리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하이어드가 힘을 줘 벌리자 조금 더 빠듯하게 벌어질 정도로.

그 빈틈을 알아차린 하이어드의 손바닥이 베이지의 허벅다리를 타고 오르더니 순식간에 봉긋한 엉덩이를 그러쥐었다. 후부드러운 엉덩잇살을 터뜨릴 듯 움켜쥔 굵은 손가락 사이로 몽글한 살이 툭 튀어나옴과 동시에 그가 그녀의 하체를 제게로 죽 끌어왔다.

“아!”

갑작스레 몸이 앞으로 밀려 나가자 놀란 베이지가 황급히 등받이를 짚었으나 무소용했다. 하이어드의 힘에 비해 가볍디가벼운 베이지의 몸은 거침없이 미끄러져 내리며 단숨에 좌석 끄트머리까지 끌어당겨졌다.

베이지의 엉덩이가 좌석에서 떨어져 하이어드의 허벅지 위로 내려앉으려던 찰나, 그가 그녀의 다리를 높이 치켜들었다.

“흡!”

지탱할 곳이 사라진 베이지의 몸이 푹 꺼지고 그녀의 상체는 좌석에 거의 눕다시피 흐무러졌다.

금방이라도 마차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릴 것만 같은 자세에 베이지가 덜컥 겁을 집어먹든 말든 하이어드는 한 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치켜든 채 다른 한 손을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기어코 제 손가락 끝에 그녀의 얇은 속옷을 걸어들인 그는 그대로 그 천 쪼가리를 끌어내렸다.

“잠, 잠시만요…….”

베이지는 제 아래에 붙어 있던 속옷이 떨어져 나가고 이내 찬 기운이 자신의 습지로 몰아치는 것을 느끼고 급히 하이어드를 제지하려 했다. 하나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가 할 수 있는 바는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의 손길에 의해 이리저리 늘어나며 자신의 다리를 타고 내리다 종내 발목에 걸쳐지는 천의 감촉을 느끼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왜…… 흐읏.”

“보지 빠는 데 방해되거든.”

친히 베이지의 속옷을 벗겨내 준 하이어드는 이 외의 목적은 없이 순수하다는 듯 등허리를 받쳐 다시 그녀를 좌석에 고이 앉혀 주었다.

목적을 상기시켜주는 하이어드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고 제 몸의 안전에 갈급하던 베이지는 돌아온 안정감을 느끼며 서둘러 몸을 한껏 뒤로 물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려 했다.

“아!”

하지만 베이지의 몸은 또 그녀의 의지를 배반하고 하이어드에게로 죽 딸려 나갔다. 다시금 베이지의 엉덩이를 낚아챈 하이어드의 손길이 거칠게 그녀를 당겼고, 단번에 좌석 끄트머리까지 끌려온 그녀의 하체가 그의 코앞에서 쩍 벌어졌다.

베이지의 가랑이 사이가 하이어드의 눈앞에 가림막 하나 없이 훤히 드러났다.

시뻘겋게 익은 하이어드의 손등에 더덕더덕 붙은 두툴한 핏줄이 꿈틀대며 베이지의 하체를 단단히 고정했다.

“지금 뭘 하시는……!”

베이지는 하이어드가 제 다리를 활짝 벌려버렸다는 사실조차 깨달을 틈이 없었다.

또 한 번 끌려가며 크게 흔들린 몸을 겨우 가눈 베이지는 제 아래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급히 손을 뻗었다.

헛손질이었다.

자신의 속옷을 낚아채기 위해 베이지가 손을 뻗자마자 하이어드가 제 손을 뒤로 물리며 간단히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무기력하기 그지없었다. 짧은 순간에 제 속옷을 빼앗아오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해 버린 베이지는 망연자실하게 하이어드가 하는 꼴을 바라볼 뿐이었다.

벗겨낸 베이지의 속옷을 뭉치듯 손아귀 속에 쥐고 있던 하이어드는 보란 듯 그녀의 앞에서 천 덩어리를 펼쳐냈다. 손가락이 굵은 탓에 섬세하지 못한 손길로 제 손에 비해 한참이나 작은 천 쪼가리를 펴낸 그는 그녀의 외음을 덮고 있었을 부위를 들춰냈다.

하이어드는 조금 전 축축한 질구에 먹혔던 부위인지 동그란 모양으로 조금 진한 색을 띠는 부분 위로 제 엄지를 눌렀다. 천이 늘어나며 상앗빛 원단 위로 그의 손가락이 툭 튀어나왔다.

하이어드는 젖은 천이 제 손가락을 감쌈에 따라 손끝에서 느껴지는 습기가 만족스럽다는 듯 베이지의 속옷에 제 손가락을 몇 차례 쑤시다 그것을 입가로 가져갔다.

긴 입매 사이로 시뻘건 덩어리가 빼어져 나오고, 이내 눅진한 살덩어리가 베이지의 속옷을 훑어 올렸다. 천에 조금 묻어 있던 그녀의 애액이 그의 혀에 점성 있게 달라붙었고, 그가 혀를 떼어 내자 타액인지 애액인지 아니면 두 개가 섞인 것인지 모를 액체가 빨간 살덩어리에 붙어 길게 늘어지다 뚝 끊겼다.

“그걸 왜…….”

베이지는 저도 모르게 원망하듯 읊조리다 이런 제 반응을 하이어드가 더 기꺼워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더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왜. 속옷 말고 보지 빨아달라고?”

하긴. 보지에서 물이 솟기는 하지.

하이어드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서린 베이지의 얼굴이 썩 마음에 차는지 입매를 길게 늘어뜨리며 일어섰다. 그는 비에 젖어 눈꺼풀을 스칠 정도로 무지근하게 내려앉은 머리칼을 설게 쓸어 넘기며 그녀의 복부에 말려 있는 드레스 자락 위로 들고 있던 속옷을 던졌다.

뭉쳐진 속옷 덩어리가 옷자락 위로 턱 내려앉는 소리가 울리고, 그 뒤로 하이어드가 빗물을 흠뻑 머금은 제 외투를 벗어 내는 소리가 퍼졌다. 이어 물을 잘 뱉어내지 못하는 재질의 외투가 둔탁하게 마차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베이지의 눈길이 소리를 따라 진흙과 빗물이 뒤섞인 더러운 마차 바닥으로 가 닿은 찰나, 모래알이 밟히는 자근거리는 소리가 다시금 그녀의 시선을 가로챘다. 하이어드가 무릎을 꿇는 소리였다.

베이지는 제 가랑이 사이에 무릎을 꿇으며 그새 조금 오므라든 다리를 다시 벌리려 드는 하이어드의 강한 아귀힘에 의해 맥없이 다리를 벌리어야 했다.

“아니…….”

베이지는 힘이라고는 전혀 묻어나지 않는 형식적인 거부의 말을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베이지는 일순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손을 뻗어 제 허벅지 위로 얹어진 하이어드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그의 손을 떼어 내려는 그녀의 손길은 참으로 유약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저를 몰아붙일수록 모른 체 몸을 맡기고 싶은 욕심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한두 번 정도 더 몸을 섞는 것 정도야 문제 될 건 없었다. 타데오 또한 하이어드와 몸을 섞기를 종용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베이지는 한두 차례 더 제 몸을 허락하고 나면 자신이 하이어드를 끊어낼 수 없음을 알았다. 이러한 관계가 지속되면 제 감정은 보다 더 크게 부풀어 오를 테고, 이런 식으론 이 감정을 숨길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해가 될 것이 분명한 관계였다.

자신은 어찌 되든 괜찮았다. 하이어드가 저 때문에 위험에 처하게 될까 무서운 것뿐이지.

일순 베이지의 눈앞에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던, 타데오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하이어드를 밀어내려는 그녀의 손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크게 정을 준 이들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이 사라질 때마다 베이지는 매번 상처 입었다. 그런데 이번에 타데오의 칼날 아래 놓인 이는 그런 낯만 익힌 사이에 불과하던 이들이 아닌 하이어드였다.

그를 잃는 것은…….

하이어드를 잃는다는 생각만 해도 숨통이 턱 틀어막혔다. 잃기 두려운 감정을 넘어 공포마저 느껴졌다. 잃을 수 없었다.

“저는…… 싫어요.”

더 이상 이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붉고 도톰한 입술 새로 희미하게 흘러나온 베이지의 고운 음성이 둔탁하고 따가운 빗소리와 뒤섞였다.

베이지의 목소리에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거리던 하이어드의 손길이 소리 없이 멎었다.

싫다. 지금껏 안 된다는 거부의 말은 내뱉었을지언정 이렇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기분과 의사를 입 밖으로 낸 적이 없던 베이지였다. 처음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제 마음을 표현한 것은.

그런데 드러낸다는 것이 고작 싫다, 따위의 하찮고 쓸모없는 말이라니.

베이지는 거부의 뜻이 묻어나는 제 말에 하이어드가 움직임을 멈추자 혹 자신의 말이 통한 것인가 하는 희망을 품었다. 동시에 제가 바란 것임에도 막상 그가 행위를 그만두자 어쩔 수 없이 아쉬움이 들이닥쳤다. 모순되는 자신의 두 감정에 그녀가 조소하던 차였다.

“읏.”

베이지의 허벅지를 그러쥐고 있던 하이어드의 아귀힘이 급작스레 사나워졌다. 부드러운 허벅지 살을 뭉개다 못해 그 아래 자리한 얇은 뼈마저 으스러뜨릴 듯한 억센 손아귀 힘에 그녀의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샜다.

베이지의 신음성에도 하이어드의 모진 손길은 거둬지지 않았다.

하이어드는 말없이 제 손등 위로 겹쳐진 베이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를 밀어내려 하는 발칙하고 볼품없이 작은 손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대주러 왔으면 곱게 안기지.”

감출 수 없이 묻어나는 흉흉한 기운과 뒤섞인 걸걸한 저음이 무겁게 내리깔렸다.

제 손등 위로 내려앉는 데워진 하이어드의 숨결에 베이지의 손끝이 움찔 떨렸고, 그녀를 달래듯 눅눅한 살덩어리가 뽀얀 살결을 느리게 훑어올렸다.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은 움직임이었다.

베이지는 도통 제 말이 통할 생각을 않는 하이어드의 태도에 입술을 말아물며 혼란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그를 밀어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도망갈 구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폐쇄된 공간이었다. 힘으로 우위를 점하기란 불가능하였으니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하이어드의 뜻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포기하지도 않고 베이지가 하이어드를 설득하려던 차, 또 달갑지 않은 말만 뱉어대는 작은 입이 열리자 하이어드의 턱뼈가 크게 벌어졌다.

“아!”

가지런한 치열이 베이지의 허벅지 살을 가득 베어 물었다. 굳게 다물린 이가 여린 살결을 가볍게 물고 떨어지자 그 반동으로 그녀의 살이 늘어지듯 흔들렸고, 하이어드의 이가 떨어져 나간 부위에는 그의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제가 남긴 잇자국 주위로 그새 발갛게 부풀어 오른 해끄무레한 피부를 확인한 하이어드가 엄지로 그 부위를 더듬었다. 제 손길에 또 떨리는 베이지의 몸을 알아차린 그가 허벅지를 매만지던 손을 그대로 밀어 넣었다.

복슬한 음모로 뒤덮인 베이지의 치구를 감싸듯 쥔 하이어드는 엄지를 아래로 밀어 내렸다. 굳은살이 박인 손끝이 쩍 벌어진 채 벌겋게 익은 속살을 모조리 내보이고 있는 음순 사이의 틈을 훑어 주었다.

“아래는 씨발, 물을 이렇게 흘리는데.”

싫기는.

하이어드가 제 엄지 끝에 묻어나는 진득한 질액을 보란 듯 베이지의 허벅지 안쪽에 쑤시듯 펴 바르더니 그녀의 하체를 제게로 보다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흐으…….”

하이어드의 거대한 상체가 굽어들고 그의 숨결이 베이지의 음부 위로 쏟아졌다. 데워진 숨이 녹녹하게 젖은 음순과 그 아래 뚫린 구멍을 간질이자, 그녀의 질구가 본능적으로 꿈뻑대며 빨간 속살을 내보였다.

베이지는 구경하듯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완전히 얼굴을 파묻은 새까만 머리통을 차마 더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감는다고 존재감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 다리 사이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였다.

하이어드는 베이지가 눈을 감든 말든 아랑곳 않고 검지와 중지로 그녀의 소음순을 가위질하듯 벌렸다. 촉촉한 애액이 밴 야들거리는 살이 벌어지자, 아직 서느런 기운을 띤 마차 안의 공기와 달리 뜨끈하게 익은 속이 드러났다.

바깥과 안의 온도 차에 허연 김이라도 내뿜을 듯 뜨겁고 번들거리는 음순과 그 아래 뚫린 보지 구멍을 구경하듯 바라보던 하이어드가 손을 떼어 내고 그녀의 엉덩이를 바싹 쥐었다.

“하…… 잡아.”

머리를 베이지의 아래에 처박은 채 짧게 일갈하는 하이어드의 목소리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말며 그의 머리칼을 그러쥐었다.

구렁이 같은 하이어드의 두꺼운 목이 뻗어나가고 그 위로 불거진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하이어드의 머리칼을 움켜쥔 베이지의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마차 안은 두 사람이 뿜어낸 열기로 그득했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바깥 풍경을 담아내던 마차의 창문은 하얀 김이 서린지 오래였고, 내부는 쏟아지는 비로 서늘해진 날씨 따위는 체감할 수 없을 만큼 달궈져 있었다.

어느새 공작저에 다다라 어느 정도 정돈된 길을 내달리고 있는 마차는 크게 덜컹이는 법이 없었다.

베이지는 바닥에 내리깔린 힘찬 말발굽 소리와 아직까지 세차게 마차 지붕을 두드려대는 빗소리, 그리고 제 머리 위로 쏟아지는 사내의 무거운 숨소리를 차례로 인식했다.

정사가 끝나고 좁은 구멍에서 갖은 물로 범벅이 되어 번들거리는 제 자지를 빼낸 하이어드는 자신의 한 팔에 내걸리다시피 축 늘어진 베이지의 몸을 내려다보다, 그녀의 몸을 뒤집어 제 몸 위로 얹었다. 아직 채 꺼지지 않은 열기를 품은 뜨거운 몸뚱이가 겹쳐졌다.

베이지는 하이어드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정사의 여운에 느릿하게 부풀었다 꺼지는 너른 흉곽에 노곤히 머리를 기댄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그저 가만히 하이어드의 손길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살을 부딪히는 것은 베이지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되돌아보면 이전에도 이성적인 호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오롯이 인정하고 나서 관계를 가지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아래에서 치민 쾌감은 가슴께까지 담뿍 적셨다. 이성 따위는 단번에 날려버릴 정도로.

제게 몸을 내맡기는 고분고분한 베이지를 바라보던 하이어드가 손을 뻗어 땀으로 젖은 상아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짧게 일렀다.

“이렇게 예쁜 짓만 하지.”

노곤하게 풀어진 귓가로 와 닿는 저음에 베이지의 심장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그저 고분고분한 제 태도가 잠시 마음에 찬 것이었다. 칭찬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사실을 알고 있는 그녀의 머리와 다르게 그녀의 심장은 제멋대로 뛰어댔다.

정사의 여운에 젖어 넋을 놓고 있던 베이지는 하이어드의 손길 한 번에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그녀는 말없이 입술을 감쳐물었다. 제 감정을 감추려 아래로 바싹 내리깔린 그녀의 촘촘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의지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베이지는 제 착각이었음을 깨닫고 말았다. 하이어드와 거리를 두는 것이 제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것이라고 착각했다.

의지 밖의 것이었다.

베이지가 생에 처음으로 속절없이 마음을 내어 준 상대의 존재는 그녀의 안에서 더없이 큰 자리를 차지했고 종내 완전히 그녀를 집어삼켰다.

하이어드는 강한 체하려 발악하던 한없이 유약한 자에게 찾아온 버팀목과도 같았다. 꿋꿋하게 홀로 황야를 횡단하다 처음으로 버팀목을 가지게 된 베이지는 어리석게도 온몸을 내맡기고 말았다.

그렇게 한 번을 의지하게 된 순간부터 다시는 홀로 살아나갈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버팀목을 잃은 나약한 자는 무릎이 푹 꺾여 다시 걸음을 내디딜 의지마저 잃은 채 그저 그 아득하고도 삭막한 공간에 영원토록 남겨지는 것이었다.

딱딱한 껍질을 두르고 있었을 뿐 그 속은 무르디무른 유약한 사람인 베이지는 이미 하이어드에게 마음을 내어 준 순간 무너진 것과 다름없었다.

베이지는 하이어드와 거리를 두어 그 없이 살아갈 바에야 그를 감싸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곁에 있고 싶어졌다. 그 없이는 살아나갈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속에서 험악하리만치 거센 욕심이 일었다.

아버지께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닐까.

이제는 과거의 자신이 나약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를 밀어낼 것이 아니라, 들키지 않도록 제가 잘 숨기면 될 일이었다. 자신만 처신을 똑바로 하면 되는 문제였는데.

하이어드를 계속 곁에 두기 위해서, 계속 그의 곁에 있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무모한 기분이 들었다.

베이지는 며칠 사이 조금 앙상해진 제 등에 닿는 하이어드의 단단한 가슴팍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너무나도 포근해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무모한 줄 알면서도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버렸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한 것 같았다.

베이지가 말없이 하이어드의 옷소매를 꽉 그러쥐었다.

그리고 그런 베이지의 움직임에 흘긋 시선을 내려 제 옷자락을 그러쥔 동그란 손을 확인한 하이어드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흐린 월광마저 닿지 않아 꺼멓게 그림자가 드리운 그 시선은 집요하게 자신의 작고 여린 짐승을 훑어 내렸다. 그악스러운 눈길은 무언가를 캐내듯 끊임없이 자그마한 몸을 파고들었다.

짧은 시간이 흐르고, 정사의 여운 탓인지 평소보다 느슨해진 그의 긴 입매를 비집고 노건한 목소리가 흘렀다.

“……앞으로 피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하이어드가 제가 생각하고 있던 바를 짚어내자 베이지는 놀라 몸을 굳히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지는 저를 입맛대로 다루는 하이어드가 그리 좋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모른 체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맛본 안온함과 포근함이 너무도 달아서.

베이지는 제 몸을 휘감은 안락함에 모른 척 몸을 맡겼다. 안온함은 그녀가 원한다고 쉬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이것을 택하기를 원했다.

* * *

“베이지.”

저택에 도착해 하이어드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린 순간이었다. 한없이 익숙한 음성과 함께 제 머리 위로 드리우는 우산 끄트머리를 알아차린 베이지가 시선을 들어 올리자, 여느 때처럼 베이지를 기다리고 있던 애브가 그녀를 마주했다.

투두둑, 우산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날카롭게 튀기는 소리가 베이지의 귓가를 어지러뜨렸다.

어느새 사위는 짙은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완연한 밤이 내려앉은 공작저는 고요하고도 적막했다.

어둠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베이지는 저를 부른 애브가 자신이 아닌 제 뒤에 선 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브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먼저 마차에서 내린 하이어드가 작달막한 하인이 높이 치켜든 우산 아래 서 있었다.

베이지의 몸이 절로 굳어들었다. 분명 애브는 얼마 전 페르몬트 거리에서의 일이 있었으니 적대하듯 그를 바라본 것뿐이겠지만, 마차에서 하이어드와 몸을 섞었던 그녀는 불안함을 느꼈다.

애브가 마차 내부를 메운 달궈진 공기를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베이지는 하이어드와의 정사로 인해 나른하게 풀어져 하느작거리려는 몸에 힘을 바짝 주고 똑바로 서려 했다.

애브에게도 숨겨야 했다.

하이어드를 감싸려 타데오를 배반하려 한 행위가 발각된다면 처음 저를 감싸 주었던 애브 또한 피해를 입는 것이었다. 때문에 애브는 당연하게도 하이어드와 자신의 관계를 반대할 것이었다. 애브가 어떤 돌발적인 행동을 취할지 모르니, 그도 모르게 해야만 했다.

베이지는 애브가 자신이 마음을 바꿔 하이어드의 곁에 있기를 택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애브는 진작 베이지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이어드를 눈에 담는 베이지의 몸짓 한 번이면 그가 알아차리기에는 충분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항상 베이지와 동행하는 애브가 함께 대신전을 방문하지 않은 데에는 타데오의 입김이 작용했다.

타데오가 시킨 일을 처리한 후 뒤늦게 베이지가 신전으로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애브는 속에서 치미는 조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들끓어 오르는 초조함을 눌러 내리며 곧장 정문으로 가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본인이 느끼는 감정의 이름도 알지 못하면서 그는 그렇게 하염없이 그곳에 서 있었다.

공작가의 문장을 품은 마차가 정문을 넘어서 저택의 부지로 들어서는 것을 목격하자 그제야 그 감정의 덩어리가 사그라드는가 싶었는데.

단순히 비를 맞았다기에는.

애브의 녹안이 빗물에 젖었다 마른 흔적이 묻어나는 베이지의 모래색 머리칼을 스치고, 하이어드의 팔에 걸쳐진 그의 외투로 가 닿았다. 검고 두툼한 외투는 넝마라 칭해도 될 법하게 진흙과 발자국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폐쇄된 공간에 머무른 두 남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챌 수밖에 없도록.

멎지 않는 빗소리만이 사위에 깔린 채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던 때였다.

“……더는 아가씨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노골적인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애브가 경고의 말을 꺼내자 하이어드의 굳은 입매가 길게 늘어졌다. 시종이 치켜든 검은 우산 아래, 반쯤 진한 그림자가 맺힌 얼굴 아래 자리한 그의 붉은 입매가 도드라졌다.

확실히 일전 회랑에서 마주쳤던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상황이 그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는 이상 나올 수가 없는, 우위를 점한 자의 태도였다.

그 느른한 미소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린 애브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던 감정들이 그의 날카로운 얼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간 그를 보아 왔던 이들이라면 직접 보고서도 믿기 어려워할 만큼 뚜렷한 감정들이었다.

반면 하이어드는 애브의 도발에 그 어떠한 응수도 하지 않았다. 애브의 생각이 맞다는 듯 부정하지 않고 적대적인 시선을 덤덤히 받아내던 그는 이내 무료해졌다는 듯 눈길을 떨어뜨렸다. 까만 동공에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자 부단히도 애쓰는 자그마한 여체가 담겼다.

하이어드는 시종에게서 우산을 앗아옴과 동시에 굵은 팔뚝을 제 여자의 허리춤에 감았다. 빗물 젖은 바깥 공기에 식은 두 몸뚱어리가 단단히 맞닿고.

“아가씨께서 힘들어 보이는데.”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하이어드의 녹녹한 입술이 베이지의 귓바퀴를 뭉근히 스쳤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베이지의 귓바퀴를 달궜던 하이어드의 성마른 숨결이 또 한 번 그녀의 귓가로 쏟아지자, 반사적으로 그녀의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얇다란 허리춤에 감긴 팔에 힘이 가해지고, 베이지는 그렇게 하이어드에게 이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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