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얼마 전부터 대륙의 변방에 위치한 바도르 왕국에서 효능이 강한 마약을 새로이 들여오기 시작했다. 아보리오는 지금껏 취급했던 마약들과 달리 그 효과가 상당히 즉각적이고 뛰어났기에 뒤탈이 날 염려가 없는 귀족들에게만 넘기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접대 자리도 잦아졌다. 그곳은 거래 한 번에 저택 한 채 값이 오가는 작은 사업장이었다.
모임은 주로 스논 공작저에서 이루어졌고, 바도르 왕국에서 아보리오를 재배하여 밀수입하기까지 큰 도움을 준 하이어드 또한 그 자리를 지켰다.
이번 밀수입에 가장 높은 공로를 세운 자가 하이어드였다. 그는 바도르 왕국에 헤이트리드 교를 널리 알린다는 뜻에서 신천 개척 사업을 펼쳤고, 그것을 빌미로 신전이 지어질 땅에 약초를 대량으로 재배하여 본국으로 들여왔다. 이렇듯 충직히 제 몫을 한 하이어드가 모임에 참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접대가 끝나갈 즈음이 되면, 하이어드는 흉측한 육욕을 품고 베이지의 침실로 찾아들었다.
처음 아보리오에 취한 하이어드가 베이지의 침대로 찾아들었을 때 그녀는 거부하는 기색 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이미 여러 차례 몸을 섞었던 터라 두 사람이 다시 관계를 가지게 되는 건 더없이 쉬운 과정이었고, 공작저에서 모임이 있는 날이면 두 사람은 자연스레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수차례 잠자리를 가지면서도 둘 중 그 누구도 저들이 무슨 관계인지를 언급하는 이가 없었다. 두 사람은 그저 함께 긴 밤을 보낼 뿐이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베이지는 푸르스름하게 퍼져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며 눈을 떴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아 어스름하게 침실로 내려앉은 새벽은 고요하고도 아늑했다. 그녀는 몸을 짓누르는 듯한 묵직한 감각들이 하나둘 돌아오자 가만히 슬그머니 어젯밤을 회상했다.
어제는 자리가 일찍 마무리되었는지 하이어드가 일찍 베이지의 방으로 찾아들었다. 아무래도 요 며칠 모임이 계속되었기 때문인 듯했는데, 그들이 지친 만큼 그녀의 체력 또한 바닥나 있는 상태였다.
더욱이나 정사가 시작되면 하이어드는 베이지가 아무리 애원해도 한 번으로 삽입질을 끝내는 경우가 없었다.
‘자도 된다고 했습니다.’
베이지가 있는 힘껏 하이어드의 팔뚝을 쳐대며 밀어내려 애써도 그는 성가시다는 듯 설게 대꾸하고는 추삽질을 이어 나갔다. 작은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거대한 체구를 차치하고서라도, 곱게 행위를 이어가지도 않으니 그녀가 잠을 이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이어드는 제멋대로 베이지의 작달막한 몸을 한 팔로 뒤집었다 제 위로 얹었다를 반복하며 색사를 즐겼고, 베이지는 정신을 잃을 수준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가 잠들고 나면 그는 홀로 관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어젯밤은 정말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듯했고, 베이지는 하이어드가 성기를 삽입하기 전부터 빌다시피 간청했다. 하이어드에 의해 간단히 묵살되기는 했으나 베이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관계 도중 다리를 벌리다 못해 기력이 다 닳아버린 그녀의 다리가 달달 떨리기 시작하자 그가 혀를 차며 애액에 불어버린 제 양물을 빼내어 주었다.
‘하…… 눈, 감지 마십시오.’
하이어드는 시뻘겋게 익어 핏줄이 더덕더덕 올라붙은 자지를 투박한 손길로 한 차례 쓸어 올렸다. 성기 표면에 달라붙은 질액을 주욱 짜낸 하이어드는 너더분한 애액들로 범벅이 된 시트 위에 몸을 축 뉘인 베이지를 내려다보며 홀로 자위질을 시작했다. 이미 그녀의 뱃가죽 아래에 정액을 두 차례나 싸재꼈음에도 그는 두어 번을 더 사정하고 나서야 베이지가 눈을 감도록 허락해 주었다.
하지만 그게 어디인가. 베이지는 충분히 만족하며 잠에 들었고, 덕분에 아침이 밝아왔음에도 그녀는 평소와 달리 조금 피로가 풀린 듯한 상태를 만끽할 수 있었다. 퉁퉁 불 때까지 빨린 가슴께에서 조금 얼얼한 느낌이 나기는 했지만.
어제의 일을 되짚어볼수록 정신이 점차 또렷해졌다. 눈을 느리게 깜박이던 베이지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녀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설마……?
별안간 제 옆에 자리한 묵직한 존재감을 알아차린 베이지가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그리 작지 않은 그녀의 체구의 두 배는 될 법한 사내의 몸이 자리해 있었다.
베이지는 제 시야를 꽉 메우는 너른 등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찬찬히 바라보았다. 새까맣고 부드러운 머리칼 아래 두툼하고 매끈한 목이 자리했고 일자로 쭉 뻗은 어깨는 뼈대가 도드라지면서도 그 위로 두두룩하게 엉겨 붙은 근육의 모양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 아래는 흰 이불이 걸쳐져 있어, 높이 치솟은 어깨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가 푹 꺼진 허리의 형체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처음이었다. 하이어드가 잠든 모습을 보는 건.
자신이 매번 정사 도중 정신을 잃고 아침에야 겨우 눈을 떴기에 몰랐던 것일 수도 있었지만…… 늘 관계가 끝나면 주변을 정돈하고 돌아가는 것 같았는데.
문득 어젯밤 처음으로 하이어드의 나체를 보았던 것이 떠올랐다. 자신의 손아귀 아래에서 딱딱하면서도 반드러웠던 살갗이 땀에 젖어 조금 습한 기운을 띠었던 감촉을 상기한 베이지가 저도 모르게 입매를 굳혔다.
치미는 부끄러움에 베이지가 살짝 몸을 틀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하이어드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얇은 이불이 흘러내리며 그의 널따란 등을 온전히 드러냈고.
“어…….”
시야 그득히 들어차는 것을 목격한 베이지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하이어드의 등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것은, 흉터였다. 근육이 붙은 어깻죽지부터 푹 팬 등골을 타고 내리는 모든 부위가 흉으로 가득했다. 칼로 벤 듯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를 가로지르는 상흔이 있는가 하면 무언가에 찔린 듯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깊이 팬 자국이 남아 있기도 했다.
흉 하나하나를 더듬어 보듯 더디게 시선을 끌어 내리다, 천으로 가려진 하이어드의 엉덩이골 부근까지 다다라서야 베이지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다시 위를 타고 올라 비교적 흉이 없는 편인 그의 어깨에 시선을 붙박아 둔 그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수없이 고문실을 드나들며 베이지도 어느 정도의 상처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어드의 등에 남은 상흔들은…… 지금 그가 살아있음이 기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한낱 사제가…….
등에 이런 흉터를 짊어지고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하이어드의 등을 눈에 담자마자 쿵 내려앉았던 베이지의 심장이 차츰 더 빠르게 박동하더니 이내 세찬 속도로 뛰어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멈추었다. 멈추려 했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이왕이면 자지 빨아서 깨워 줬으면 하는데.”
잠기운에 젖어 그 어느 때보다 더 걸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고요 속을 울렸다. 천이 바스락대는 소리와 함께 침대가 크게 울렁이며 하이어드가 느른한 손짓으로 제 이불 속을 들추어 주었다. 얇다란 이불이 들춰 올라가며 그 아래 자리해 있던 검붉은 자지가 드러났다. 아침부터 혈류가 몰려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가 이불이 만들어 낸 그늘 속에서 꺼떡대는 한없이 원색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들어가 보지.
입매를 길게 늘어뜨린 하이어드가 친히 제 이불을 들춰 자지를 빨 공간을 내어주었다.
베이지는 준비할 새도 없이 쏟아지는 희롱과 그런 장난질을 흘려대는 하이어드의 얼굴에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낯을 붉혔다. 잠기운에 묵직하게 젖어 보통 때보다 느슨한 인상을 풍기는 그의 얼굴이 경계심을 허물어뜨렸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 또한 막 잠에서 깨어나 무방비했던 터라 막을 새도 없이 감정이 흘러나간 걸지도 몰랐다.
순식간에 달궈진 베이지의 양볼에, 가볍게 희롱을 던지던 하이어드의 낯이 대번에 변했다. 베이지의 머리맡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욕지거리가 낮게 터지더니 거대한 손바닥이 그녀의 목을 낚아채 갔다.
어느새 우람한 체구를 일으킨 하이어드가 베이지의 몸 위로 제 몸을 겹치며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뭉클한 입술이 여린 살갗 위로 뭉개지며 축축한 숨결을 쌓아 올렸다.
베이지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야트막한 신음은 점점 거세어졌고, 이내 뜨겁게 달궈졌다.
마른 나무가 타고 남은 듯 시꺼먼 동공은 베이지가 자잘한 신음을 흘리고 거칠게 뒤흔들리다 끝내 애원하듯 울부짖을 때까지, 단 한 순간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 *
타데오의 집무실로 향하는 길, 복도를 가로지르는 베이지의 청량한 구두 소리만이 한적한 공간을 울렸다.
‘아가씨, 주인 어르신께서 집무실로 오라 이르셨습니다.’
저택으로 막 들어선 베이지를 맞은 건, 집사장의 입을 통한 타데오의 전언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프데오렌 항구에 들러 마약을 밀수출하는 데 사용될 선박들을 일일이 확인해야 했던 베이지는 해 질 녘이 되어서야 겨우 공작저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나름의 육체노동을 한 탓에 몸이 피로했으나 그녀에게는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베이지는 얌전히 발을 놀리며 타데오가 저를 찾을 만한 용건들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최근 타데오의 일이 바빠 그와 얼굴을 맞댈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베이지의 고운 눈썹이 살풋 구겨졌다. 그녀의 얼굴에 숨기지 못한 긴장감이 깃들었다. 타데오가 후원에서 메리엔의 목숨을 쥐고 흔들었던 일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아직은, 그와 얼굴을 맞대기만 해도 저 아래에서부터 각인된 듯한 공포심이 치솟았다.
타데오의 집무실 앞에 다다른 구두 소리는 서서히 느려지다 이내 멎었다. 집무실 앞에 멈춰 선 베이지의 낯 위로 의아함이 깃들었다.
……왜지?
언제나 육중히 닫혀 있던 문이, 웬일로 살짝 벌어저 그 틈새를 내보이고 있었다.
베이지가 잠시 상황을 살피고 있던 차였다. 별안간 무언가가 날카롭게 허공을 휘가르고 둔탁하게 꽂히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선득한 냉기가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모를 수가 없는 소리였다.
베이지가 뻣뻣하게 몸을 굳힌 사이에도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다트가 반복적으로 내리꽂히는 둔중한 소리에 그녀의 안색이 희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타데오는 생각을 정리할 때마다 다트를 던지고는 했다. 분명 외부적으로는 그러한 명목을 지니고 있었으나, 실상은 베이지를 조이기 위함이 목적의 전부인 때가 대부분이었다.
언제였던가, 처음은 타데오의 의견보다 베이지의 의견을 우선시한 하인의 죄를 묻던 때였다.
‘감히라도, 그놈을 옹호하려는 생각은 말거라. 토씨 하나 바꾸지 말고 정확히 털어놓는 게 좋을 거야.’
타데오는 베이지에게 그 하인과 있었던 일을 캐물으면서도 여상히 다트를 던지는 손길은 거두지 않았다. 마치 그 하인에게 저 날카로운 촉을 던지기라도 하듯, 다트가 매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몹시도 날 서 있었다.
그리고 겁에 질린 베이지는 어리석게도 제 본능을 거스르지 못했다. 눈물에 젖은 그녀가 하인을 감싸려 조금의 거짓이 섞인 말을 내뱉은 순간이었다.
‘아…… 아……!’
타데오는 그 즉시 곁에 서 있던 기사를 향해 손짓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하인의 목숨이 서걱 잘려나갔다.
‘네 탓이다.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은 네 탓이야. 네 말 한마디 때문에 죄 없는 하인 하나가 죽은 거란다. 다시는 내 앞에서 거짓을 늘어놓지 말거라.’
타데오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음을 쏟는 베이지의 앞으로 다가가 쉼 없이 속닥거렸다. 그녀가 정말로 그리 생각하게 될 때까지 잔학하고도 거북한 목소리는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 후로도 베이지를 추궁할 일이 있을 때면 타데오는 다트를 던졌다. 결과는 언제나 그의 뜻대로 흘러갔고 그녀에게 좋지 못한 방향으로 끝났다.
그러한 일들이 쌓여 다트 소리는 베이지에게 하나의 강박을 심어 주었다. 일종의 방아쇠와 같았다. 타데오가 다트를 던질 때면 그 앞에 선 베이지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긴장감에 뻣뻣하게 몸이 굳는 것이었다. 그 작은 소리는 베이지가 사실을 고하도록 몰아갔다.
머리가 자라서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타데오의 계산 아래 꾸며진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강박은 몸에 새겨진 후였다. 베이지는 속절없이 휘말릴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뾰족하게 벼려진 다트 소리를 목전에 둔 베이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버지께서…… 자신을 추궁해야 할 만한 일이 있었던가?
마땅히 감이 오는 것이 없었다. 하나를 제외하고는. 베이지는 머릿속을 스치는 그 하나의 생각을 애써 지워냈다. 목격자가 없을 것이기에 새어 나갈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혹시…….
저번처럼 제가 간과한 것일지도 몰랐다. 저택 곳곳에 타데오의 눈이 달려있음을, 자신이 간과한 것일지도 몰랐다.
베이지의 손끝이 발발 떨리기 시작했다. 마음을 다잡으려 했으나, 얼마 전의 공포를 완전히 극복해내지 못한 탓에 평소보다 더 심장이 뛰어댔다. 두려웠으나 타데오를 마주했을 때 의연해야만 했다.
베이지는 손을 꽉 맞잡은 채 작게 심호흡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아버지.”
베이지의 목소리에도 타데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방 안으로 한 걸음을 더 디디며 다시금 그를 불렀다.
“하멜턴에게 들었어요, 저를 부르셨다고.”
흰머리가 희끗하게 나기 시작한 타데오의 금발이 베이지의 눈에 밟혔다. 답은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이내 답을 듣기를 포기한 그녀가 문을 닫으려 손을 뻗던 순간이었다. 그 조심스러운 움직임은, 음습한 목소리와 함께 멎었다.
“애브에게 들었다. 요즘 그놈과 가깝게 지낸다고.”
단두대와 같이 날카로운 목소리가 베이지의 목 위로 떨어졌다. 동시에 그녀의 심장이 땅바닥으로 푹 처박혔다.
채 닫기지 않은 문이 삐걱대며 바깥바람을 들였다.
문손잡이를 향해 뻗어나가던 베이지의 손은 순식간에 핏기가 가셔버린 채 맥없이 허공을 휘저었다. 바닥으로 처박힌 그녀의 심장이 쉴 틈 없이 뛰었다. 심장은 귓속에서마저 달음박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섣불리 그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애브…… 애브에게 들었다고. 애브가, 어떻게 알고?
베이지의 낯빛이 파리하게 질렸다. 잠시 애브에게 들켰을 법한 상황을 되짚어보던 그녀는 그에 대한 생각을 털어냈다. 들킨 순간을 짚어 볼 때가 아니었다.
애브가, 애브가 무어라 보고했을까.
가깝게 지낸다의 뜻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없어 베이지는 우선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괜히 입을 열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그녀는 최대한 태연한 체를 하며 뒤를 돌아 타데오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도 베이지의 온몸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요동치고 있었다. 새겨진 공포와 반응들이 치솟으며 이성을 엉망으로 헤집었으나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여기서, 여기서 제가 무너지면 자신의 뒤에 선 하이어드까지 위험에 처하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이어드를 의심하고 있던 아버지였다. 그에 대해 어디까지 알게 된 것이며, 저에게 무엇을 추궁하려…….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타데오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리는 베이지의 안색은 보다 더 창백하게 식어 갔다. 아무리 얼굴에서 감정을 지우는 데 이골이 난 그녀라도 낯빛마저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혹 그가 제 상태를 알아차릴까, 불안함에 그녀의 속이 드글드글 끓었다.
다행히도 모르는 이가 보기에 베이지의 겉가죽과 행동은 여느 때의 그녀처럼 무감해 보였다. 타데오의 말에 놀란 이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감정의 동요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베이지를 관찰하듯 끈질기게 살피던 타데오가 시선을 떼어 냈다. 확인을 마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똑똑한 짓을 했구나. 피는 못 속여.”
살짝 엇나가 있던 베이지의 시선이 타데오의 등으로 가 박혔다. 그는 어느새 손에 쥐고 있던 다트핀을 다 던졌는지 탁상 위로 둔 상자에서 다시금 핀을 집어 들고 있었다.
똑똑한 짓……?
베이지는 타데오가 천천히 팔을 휘두르는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그의 생각을 읽기 위해 애썼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너도 느끼고 있었겠지. 그놈이 보통 놈이 아니라는 걸. 일개 사제라기엔…… 나랑 닮았더구나.”
타데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하이어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닮았다. 과거의 자신과 몹시도 닮은 놈이었다. 전쟁고아로 볼꼴 못 볼 꼴을 다 보며 길거리를 전전하다, 아득바득 위로 기어 올라왔던 과거의 저와 같은 냄새가 났다. 진창에서 나고 자라 그보다 무서울 것이 없는 자들이 풍기는 날것의 냄새가.
일전에 공작가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사제들은 창부를 눈앞에 들이밀기만 해도 허덕이며 모든 것을 내던졌다. 생전 처음 탐해 보는 여색에 미쳐 분별력이 사라지는 자들이었다.
전부 머리가 아랫도리에 달린 둔치들뿐이었는데…….
그놈은 여자를 품 안에 떠밀어도 눈 한번 깜박이는 기색이 없었다. 자신의 말에 불복종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겁을 먹는 것도 아니었다. 단 한 차례도 그 반반한 낯이 일그러지거나 동요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제게 복종하는 행동을 취하고 있었으나, 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소름 끼치게.
타데오가 불쾌한 듯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뒤를 밟아 보았는데…….”
곱씹어 보듯 말을 내뱉는 타데오의 숨소리 사이로 다트핀이 날아가 코르크 위로 툭, 꽂히는 둔탁한 소리가 섞였다. 그 작은 소리 한 번 한 번에 베이지의 정신이 막다른 곳으로 내몰렸다.
“털어서 나오는 게 없더구나. 놈이 나고 자랐다는 베리믈 지역의 신전에서 사제들의 증언까지 확보했는데…… 영 석연치 않단 말이지. 하필 카를로 백작의 양자라 섣불리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쯧. 타데오가 짧게 혀를 찼다.
신원이 분명하여 쓰기 시작했고, 의심할 여지가 없이 눈으로 보이는 증거 또한 존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왜 이리 거슬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은 날로 먹으며 이곳까지 올라온 것이 아니었다. 예감이 좋지 못했다.
때문에 선교에 제 딸을 동행시켰다. 쓸모라곤 얼마 없는 딸이 눈치 정도는 빨랐으니, 어느 정도 확언을 해 주기를 기대한 것이었다.
고작 그 정도를 기대한 것인데…….
‘아가씨께서 사제님과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아마……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시려는 듯합니다.’
이 정도로 잘 해낼 줄은.
자신이 보고 판단한 바를 전하는 애브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사무적이었다. 그간 일정이 바빠 테르무오네 왕국으로의 선교 건에 대해 애브에게 보고를 받지 못하던 중, 타데오는 어젯밤이 되어서야 겨우 시간을 내 그를 부를 수 있었다.
이렇게 흡족스러운 이야기를 전해 들을 줄 알았더라면 진작 애브를 불러들였을 텐데 말이다.
타데오가 몹시 만족스럽다는 듯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뱀과 같이 길쭉한 동공이 선득히 빛났다.
“답답했던 차였는데, 잘했다. 그런 쪽으로 접근할 줄은 몰랐는데.”
영특하구나.
타데오는 베이지가 하이어드와 몸을 섞은 일을 책망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는 이용할 수 있는 걸 이용하지 않는 쪽이 더 어리석다 여겼다.
오히려 여색에 무관심하던 그놈을 어찌 꾀어냈는지, 상이라도 내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색사에 무심하던 이가 여자에 빠졌을 때 어느 정도로 정신머리를 놓는지를 익히 알고 있는 타데오로서는 달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타데오의 눈이 칭찬을 해 주어도 감사하다는 대답 한 번을 하지 않는 버릇없는 제 딸에게로 옮겨 갔다.
유약하고 겁이 많아 행동하는 쪽으로는 영 쓸모가 없을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무어 더 알아낸 것이 있느냐?”
타데오의 날카로운 시선이 닿자 베이지는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균열 하나 일지 않은 채 의연해 보였으나, 속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는 물론이거니와 머릿속에서도 울려오고 있었다. 사위가 울렁였다.
이미 하이어드의 뒷조사까지 했을 줄은…….
베이지는 어느 정도 제 기우일 수도 있겠다 여기고 있었다. 저보다 감이 좋은 타데오가 하이어드를 계속 사용하고 있었으나, 혹 의심을 품었더라도 지운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털어서 부스럼이 나오지 않았던 것뿐이었다니.
심증만으로 카를로 백작의 양자를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당연했다. 저보다 더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타데오가 찾아내지 못했다면 실제로도 없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계시는구나.
베이지는 애브가 타데오에게 무어라 보고했는지 듣지 못했지만 타데오의 입을 통해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제가 하이어드를 감시하기 위해 몸을 이용해 접근했다고 보고한 모양이었다.
애브가 진실로 그렇게 믿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타데오는 애브의 말을 믿고 있었다. 사람을 믿지 않는 타데오가 유일하게 신뢰하는 이가 있다면 그게 애브였다. 사람을 믿는 게 아니라 주인을 물지 않도록 훈련받은 개를 믿는 쪽에 가깝다고는 해도, 신뢰는 신뢰였다.
그렇다면…….
베이지는 도톰한 입술을 달싹였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목줄기 아래에서 몇 번이나 소리를 가다듬고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아니요.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베이지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모른 척 애브의 보고에 편승하는 쪽을 택했다. 거짓을 내뱉는 이 순간에도 과녁에 깊은 구멍을 뚫는 다트핀 소리가 귓가를 찢고 있었으나, 그녀는 눈을 꼭 감고 거짓을 말했다.
타데오의 앞에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머릿속에 심어진 공포 탓에 심장이 터질 듯 뛰어대고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하지만 베이지는 이를 악문 채 끝까지 거짓말을 이어 나갔다.
“아직은…… 분명한 증거를 잡지 못해서요.”
노력한 덕에 베이지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묻어나지 않았다. 애브가 아니고서야 그녀의 살갗 위로 비죽 선 긴장감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었다.
의연한 겉과 달리 베이지의 속은 문드러지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듯 힘이 빠지는 다리에 바짝 힘을 주고 버텼다. 심장이 꼴딱대며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베이지는 알아낸 것이 있느냐는 타데오의 물음에 일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을 지웠다. 그녀는 사제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흉이 덕지덕지 붙은 너른 등을 눈앞에서 지워냈다. 사실을 말해야 하지 않겠냐며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을 지우고, 또 지웠다.
자신 또한 하이어드를 의심스럽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절대 타데오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혹 그가 진실로 그러한 존재더라도…….
베이지는 자신이 왜 타데오에게 거짓을 고하고 있는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이어드가 일전에 저를 구해 주었던 것에 대한 은혜를 갚으려는 행동인지, 단순히 자신 때문에 다른 이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게 싫은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다행히도 간만에 흡족한 기운에 휩싸인 타데오는 베이지의 입술이 옅게 떨리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잘 지켜보도록 하거라. 낌새가 느껴지면 즉시 전하도록 하고.”
“……네.”
베이지가 떨리는 입술을 사리물며 답했다.
그 후로도 타데오가 당부의 말과 특별히 주시했으면 하는 부분을 일렀고, 베이지는 보통 때처럼 간결히 대답만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장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의 존재를 알리며 자리는 정리되었다. 베이지는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집무실을 나섰다.
* * *
베이지는 집무실을 나서고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둑이 터진 듯 마구잡이로 새어 나오는 숨은 혼탁하고 가빴다. 자리를 벗어났음에도 여전히 격정적으로 뛰어대는 심장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머리가 다 자라고 아버지께 거짓을 고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뼈에 새겨진 공포를 꺾고 거짓을 내뱉은 경험은, 후련함보다는 불안감과 초조함을 가져다주었다.
제 거짓말이 들키면 어떡하지?
베이지의 세상에서 타데오는 신과 다름없었다. 그가 정해 준 대로 살아야 했으며, 그의 말을 어겨서는 안 되었고, 그에게 거짓을 뱉는 건 죄악이었다. 그를 거스를 때마다 수많은 목숨들이 스러지는 것을 목격하며 몸에 익혀진 바였다.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죽음은 무섭지 않았다. 제 죽음이라면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보란 듯 다른 이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이번에도 제 거짓말에 제 목숨이 아닌 하이어드의 목숨이 달려 있을 것이었다.
하이어드가…… 제 거짓말 때문에 위험하게 되면.
베이지의 얼굴이 파랗게 식었다.
그것만은 안 되었다.
머리를 장악한 공포는 시야를 좁게 만들었으나, 하나만은 선명해지도록 했다.
하이어드와 거리를 두어야 했다. 제 곁에 있으면 그가 의심을 살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제가 아무리 하이어드를 감시하기 위함이라는 거짓을 내뱉어도 머지않아 애브가 알아차릴 것이었다. 하이어드와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제 감정이 다른 방향으로 뚜렷해질수록 애브가 눈치채기는 쉬워질 터였다.
일단 저를 항시 호위하는 애브에게 저와 하이어드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가장 위험했다. 애브에게는 제 표정을 속일 수 없으니 낮에는 최대한 하이어드와 부딪힐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되었고, 밤에 만나는 것 또한…… 그만두는 게 좋았다.
일단 거리를 둔 후에…… 지켜보니 의심할 만한 부분이 없었다고 보고할 생각이었다.
베이지는 잘게 떨리는 두 손을 맞잡으며 주저앉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까만 눈꺼풀 위로 새빨간 상이 맺혔다. 끈적한 피로 범벅이 된 빨간 머리칼과 붉은 입술 주위로 말라붙은 검붉은 핏자국, 그리고 손톱이 다 뽑혀 불그죽죽한 속살을 내보이는 열 손가락까지. 평생 잊히지 않을 메리엔의 모습이었다.
코끝에 비릿한 피 냄새가 맴도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베이지는 치미는 구역질을 삼키려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 메리엔의 그런 모습을 본 것으로 충분했다. 자신 때문에 하이어드가 피해를 입는 것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와 말을 섞을 수 없는 것보다, 그게 더 싫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베이지는 그래도 아직은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아직은 무엇 하나 들키지 않았다. 제가 지킬 수 있었다.
베이지는 하이어드에게 말을 꺼낼 날을 헤아려 보았다. 헤아려 보았으나, 그녀에게 쥐여진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낮 시간에 그와 둘만 있을 자리를 만들기란 쉽지 않았고, 안전한 방법은 그가 밤에 제 침실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가 찾아오기를.
제가 끝맺는 날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어드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일말의 유예가 생긴 듯, 제가 정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길 것 같아서였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다음번에 하이어드를 만나게 되면 그와의 관계를 끝내야 했다. 하지만 베이지는 은연중에 그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타데오에게 둘의 관계를 들켜 추궁을 당한 당일 날, 거대한 인영은 여느 때와 같이 베이지의 침실로 찾아들었다.
베이지는 제 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무게에 잠결에도 끙끙 신음을 흘렸다. 숨이 막혀 앓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참, 문득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노곤한 잠기운에 젖어, 시야가 혼몽한 가운데 새까만 머리칼이 그녀의 눈에 밟혔다.
하이어드였다.
높게 뜬 달빛이 방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활짝 열어젖혀진 창문을 통해 옅은 봄바람이 잔잔히 불어 들어왔고, 그에 따라 시폰으로 된 커튼이 나부끼며 부드러이 흔들리는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가만히 누워, 천이 너울거리며 만드는 그림자를 응시하던 베이지의 감각이 점차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돌아온 것은 촉각이었다. 베이지는 아래를 빠듯하게 가르고 들어와 한 자리를 차지한 묵직한 존재감을 인지했다. 이어 가슴께에 물컹하고 뜨거운 덩어리가 이리저리 오가며 제 가슴 끝에 매달린 조그마한 살점을 퉁기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다음으로 소리가 돌아왔다. 쭙쭙, 무언가를 빨아 당기는 젖은 물소리가…….
베이지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에 반응하듯 달빛 아래 훤히 드러난 베이지의 젖가슴 위에서 느릿하게 들썩이던 검은 머리칼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까만 머리통이 느리게 들려 올라가며 땀에 젖은 머리칼이 살갗 위를 간질이듯 스치는 감촉이 올라왔다. 그 녹녹하고도 날 선 촉감에 발끝이 절로 오그라들었다.
이내 하이어드의 고개가 들려 올라가며, 아래로 축 늘어져 있던 부드러운 머리칼이 그의 이마 위로 올라붙었다.
뽀얀 달빛이 맺힌 얼굴은 더없이 선명했다. 툭 불거진 눈썹뼈 아래 깊숙하게 진 음영 탓에 가뜩이나 검은 눈동자는 빛 한 모금 들이키지 못하는 것처럼 새까맸다. 그것과 같은 까만 빛을 띠는 머리칼은 우뚝하게 솟은 콧대 위로 차분히 내려앉아 있었으며, 일자로 굳게 다물린 입매는 붉었다.
누군가가 세심하게 빚은 듯한 얼굴은 사정 직전에 다다른 모양인지 치미는 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베이지는 열락에 물들어 끝이 구겨진 하이어드의 눈썹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반듯한 콧날은 투명하고 점도 있는 막에 한 겹 휩싸인 듯 살짝 번들거렸고, 길고 새붉은 입술은 노골적으로 젖어 있었다.
그때 하이어드의 입꼬리 끝부터 턱 끝까지 길게 이어져 있던 물자국 끝에 맺혀 있던 타액 한 방울이 아래로 떨어지며 점성 있게 늘어지다 이내 뚝 끊겼다. 베이지의 가슴을 빠느라 채 삼키지 못했던 그의 타액이었다.
베이지는 하이어드의 입가를 윤이 나도록 적시고 있는 액체가 그의 타액뿐일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아직 그가 그녀가 깨어 있는 동안에 아래를 빨아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베이지는 다시금 눈길을 끌어 올려 하이어드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아직 조금 흐린 시야 사이로 비치는 그의 찌푸린 얼굴을 눈에 담다 보니 머지않아 그가 미약에 취한 상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도 모임이 있었구나. 그리고 오늘도 그곳에서 욕구를 풀지 않고 제게로 왔다. 다른 여자와 몸을 섞지 않고.
베이지는 이상하게 가슴이 빠듯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지금 제게로 올라탄 그를 밀어내야 했다. 이제 그를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데…….
하지만 자신의 침실이 있는 건물은 아무도 드나들지 않을뿐더러 이미 하이어드가 이곳까지 찾아온 상황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오늘만큼은, 한 번 정도는…….
“깨셨습니까.”
그때 희미한 열기가 묻어나는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하이어드는 제 입꼬리 끝에 닿은 베이지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보란 듯 긴 틈을 가르고 새빨갛고 축축한 살덩어리를 꺼내어 제 입술을 느리게 훑었다.
잠에서 깨어난 베이지를 마주하는 하이어드의 얼굴은 동요 하나 없이 여상했다. 하이어드는 제 어깨 위에 얹어져 있던 베이지의 허벅지 뒤쪽을 투박한 손길로 무지근하게 눌러 내리며 제 몸을 더 깊숙이 밀어 넣을 뿐이었다.
베이지의 아랫구멍은 이미 얼마나 물을 쏟아낸 것인지 하이어드가 제 불그죽죽한 살덩어리를 느슨하게 삽입하는 과정에서도 쩌걱거리는 물소리를 커다랗게 흘렸다.
“흐읏…….”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아래를 저릿하게 울리는 쾌감에 베이지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샜다. 굵고 딱딱한 성기가 잠든 사이에도 착실히 애액을 흘려댄 내벽을 쥐어짜듯 가르고 들어오자, 물을 머금고 있던 점막이 물을 찍 쌌다.
그 순간까지도 망설이던 베이지는 치미는 쾌감에 생각을 지워 버렸다. 베이지의 가느다란 팔이 하이어드의 목 뒤를 감았다. 그녀는 거부의 말을 내뱉지 않고 그를 모른 체 그를 받아들였다.
벌겋게 익은 좆대가리는 제 몸통을 사정없이 씹어대는 내벽을 달래듯 오돌토돌한 질구 부근에서 얕게 삽입질하는가 싶더니, 이내 좆 뿌리까지 단숨에 처박았다. 뭉툭한 귀두가 막다른 곳을 내리찧자 놀란 질벽이 파득 떨며 자지를 꽉 쥐어짰다. 제 속에 들어찬 덩어리를 빈틈없이 조인 내벽은 김이라도 새어 나오는 듯 뜨겁고 축축했다.
“하.”
베이지의 복부 위로 달궈진 신음이 쏟아졌다. 하이어드의 짙은 숨결에 그녀의 뱃가죽에 한기가 맺히는 듯했고.
“아!”
정확히 그 부위로 하이어드의 자지가 제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판판하고 흰 뱃가죽 위가 볼록하게 솟아오름과 동시에 베이지의 입에서 신음이 터지며 그녀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또 한 번 걸걸한 신음이 떨어졌다.
때리기라도 하듯 샅끼리 강하게 맞부딪혀 나는 색스러운 살소리와 함께 얇은 뱃가죽 위로 툭 튀어나온 좆머리가 매번 그 위치를 달리했다. 둥그런 귀두가 뱃가죽과 맞닿은 내벽을 괄괄하게 쑤석거리며 뱃가죽 위로 뭉툭한 것이 징그럽게까지 울룩불룩 튀어나오는 광경은 한참을 계속되었다.
그에 화대하듯 도돌도돌한 질 주름이 하이어드의 자지를 꽉 쥐어짜자 그의 치골 위로 얼기설기 얽혀 있던 핏줄이 펄떡 뛰었다.
“흣…… 후.”
좆뿌리에서 덩어리진 불알까지를 시큰하게 훑고 가는 쾌감에 사정감이 치민 하이어드의 흉곽이 크게 팽창했다. 육욕이 번들거리는 목울대가 내려앉고 쾌락에 흠뻑 젖은 그의 까만 속눈썹이 곱게 내리깔렸다.
하이어드는 베이지의 복부 위로 제 시선을 내렸다. 제가 여러 번 싸질러 놓은 끈적한 백탁액이 고인 하얀 배는 그 색이 한없이 옅어 정액과의 색 구분이 뚜렷이 되지 않았다. 야트막이 팬 배꼽까지 씨물이 들어차 있어 더욱 그랬다. 다만 배의 중앙은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곧 좆물을 싸지를 귀두였다. 그는 불룩 튀어나온 부위 주위로 달그림자가 져 좆대가리의 형상이 보다 선명히 도드라져 보이는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느릿한 손길로 그 위를 짚었다.
흣.
“흐으……!”
높고 낮은 신음이 한데 뒤섞였다.
하이어드가 자신의 성기가 불거진 뱃가죽 위를 뭉근히 누르자 진득하고 뭉클한 정액에 한 겹 쌓인 부드러운 살가죽 아래로 딱딱한 좆머리의 감촉이 그의 손끝으로 와 닿았다. 그가 거대한 손바닥으로 제 귀두를 힘줘 누르자 솟아 있던 부위가 뒤로 밀리며 움푹 팼고, 팬 공간으로 끈끈한 정액이 흘러와 고여 들었다. 한편 발발 달아오른 귀두가 제 뒤를 받치고 있던 내벽에 짓눌리듯 밀리자 한껏 예민해진 귀두가 그 녹녹한 점막에 더없이 강하게 휘감기며 황홀경을 맛보았다.
“아…… 씨발.”
베이지의 작은 몸속에 제 성기가 빠듯이 들어차 있는 것을 확인한 하이어드의 눈깔이 돌았다.
양어깨 위로 가지런히 얹어져 있던 베이지의 가느다란 다리를 들어낸 하이어드가 그녀의 두 다리를 모아 쥐고 제 왼쪽 어깨에 얹었다. 마치 사냥감의 다리를 낚아채듯, 한 손으로 얇은 두 발목을 틀어쥔 그는 양다리를 품에 안듯 남은 한 팔을 고불한 음모가 무성한 그녀의 치구에 바싹 붙이더니 작다란 하체를 단숨에 제게로 끌어당겼다.
“아읏……!”
베이지의 몸이 아래로 쑥 끌려 내려가며 좁은 구멍이 하이어드의 성기를 순식간에 뿌리까지 모조리 삼켰다. 질을 빡빡하게 메운 것으로도 모자라 자궁구를 빻을 듯 깊숙이 삽입된 살덩어리에 그녀의 발끝이 짧게 떨렸다.
베이지의 양다리를 한 어깨에 이고 단단히 지탱한 하이어드는 제 사타구니를 그녀의 허벅지 뒤편에 마구잡이로 때려 박기 시작했다. 그의 검고 고불거리는 음모가 그녀의 여린 허벅지 살을 할퀴고 짓누르며 발간 생채기를 냈다.
퍽퍽 허릿짓을 할 때마다 귓가로 내리꽂히는 살소리가 매질이라도 하는 양 흉폭했다. 젖은 살끼리 처덕거리며 맞부딪히는 소리는 끊임없이 울렸다.
“아! 읏, 하! 응!”
길쭉하고 두꺼운 성기가 확 조여든 질내를 꾸역꾸역 열어 끝까지 대가리를 비집고 파고들면 내벽에 붙은 물이 쭉쭉 짜지는 소리가 흘렀고, 긴 덩어리를 매단 하이어드의 샅과 베이지의 봉긋한 엉덩이가 맞붙을 때면 그녀의 질구로 흘러 나와 고여 있던 애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베이지의 신음이 거세짐에 따라 하이어드의 허릿짓이 보다 더 강해졌다. 꺼멓게 탄 숯 색과 같은 동공은 약 기운과 쾌락이 뒤섞여 이성이 지워진 듯 혼탁하면서도 베이지에게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 허연 살갗에 눅눅하게 들러붙는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집요하게 그녀의 얼굴을 좇았다.
베이지는 제 몸에 머무르는 온기가 마지막이라고 여기며 소중하게 보듬느라 그 꺼먼 시선이 보통 때와는 다른 빛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으, 하, 으! 응!”
베이지의 신음이 턱턱 튀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 가라앉아 있는 그녀의 목소리는 열기에 말라 더 높게 찢어지는 소리를 냈고, 그 목소리를 잡아낸 하이어드가 발정 난 개마냥 허리를 찧었다.
하…… 후, 흣.
실 한오라기 걸치지 않은 하이어드의 나체가 달 아래 드러났다.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무아지경으로 뜨거운 물구멍에 제 자지를 치대는 그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침대가 험하게 흔들릴 때마다 덩이지게 올라붙은 그의 등 근육이 움지럭댔고 뚜렷한 선이 서며 힘이 들어가는 모양대로 갈라졌다.
그때 땀방울이 새까만 목덜미를 타고 내리더니, 이내 일자로 깊이 팬 등골을 그어 내리듯 죽 미끄러졌다. 정사가 얼마나 길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방증은 더없이 육감적인 감각을 이끌어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자지가 물이 흥건하게 고인 물구멍을 들쑤시는 소리와 달뜬 신음 소리가 침실을 가득 메웠다. 가늘게 흘러 들어오는 봄바람은 그들의 땀과 열기를 식혀주지 못했다.
“아! 응! 하, 흐, 응……!”
베이지는 정신없이 신음을 흘렸다. 비교적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때에는 신음을 억누르는 편이었으나, 잠기운에 뒤덮여 흐릿하기만 한 머릿속은 제가 무슨 소리를 내는지도 모르도록 만들었다.
몽롱함과 쾌감이 뒤섞이자 종내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사방을 뒤덮은 밤이 모든 것을 감추어줄 것만 같았다.
쾌감이 치받아 오르고 제 위를 덮은 커다란 체구가 짧은 신음과 함께 방대한 좆물을 보지 속으로 내지르고 나서야 베이지의 정신이 맑게 돌아왔다.
“……하이어드?”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전보다 또렷함이 깃든 베이지의 목소리에 하이어드가 정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제 자지를 알아보시는 겁니까.”
성기 모양을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음에도 하이어드는 짓궂은 희롱을 던졌다. 베이지의 상체 위로 늘어져 있던 상체를 들어 올린 하이어드는 검지로 그녀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농락당했음을 알았지만 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 베이지를 놀리는 것이었다.
하이어드가 베이지의 구멍에 박혀 있는 제 좆 모양을 상기시켜 주기라도 하려는 듯 얕게 허리를 치대자 여전히 힘이 들어가 딱딱한 나무토막 같은 덩어리가 음문부터 배 속까지 이어진 긴 구멍을 느릿느릿 뚫고 오갔다.
배 속에 남은 잔열감에도 옅은 신음을 흘리던 베이지는 다시금 아래에서 저릿한 쾌감이 올라오자 손아귀 가득 쥐고 있던 이불을 더욱 강하게 그러쥐었다.
그리고 그때 길고 곧은 손가락이 베이지가 움켜쥔 이불을 빼앗아가더니 그 빈 자리에 제 것을 밀어 넣었다.
베이지는 말랑한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들어오는 딱딱하고 거친 손가락의 감촉에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한 번 더 몸을 붙였다가는 정사가 끝날 때까지 깨어 있지 못할 것이었다. 지금 말해야만 했다.
베이지가 조심스레 하이어드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거부의 뜻이 묻어나는 그녀의 행동에 그의 얼굴이 서늘하게 식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베이지는 목구멍 안에서 떨리는 목소리를 여러 번 가다듬고서야 겨우 입 밖으로 냈다. 다행히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묻어나지 않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는 건지 그녀로서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제가 그만두자고 말하면 곧바로 수긍할 텐데.
베이지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다음 말을 흘렸다.
“앞으로는…… 제게 오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내 고민해 보았다. 하이어드에게 무슨 핑계를 대며 관계를 정리하자고 말할지. 어찌 보면 제가 먼저 시작한 관계이기도 했고, 이런 일에 개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그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에게 댈 핑계는 하나뿐이었다.
“서로 혼기를 앞두기도 했고, 그…… 이런…… 잠자리만 하는 관계를 유지하는 건 서로에게 좋지 못할 것 같아서요.”
베이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구태여 이런 핑계를 대지 않아도 하이어드는 쉬이 납득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말을 꺼내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하니 어쩔 수 없었다.
베이지는 하이어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에게서 나올 답이 두려워서였다. 그가 쉽게 납득해도, 더 분명한 이유를 요구하며 납득하지 않아도 어느 쪽도 그녀에게는 좋지 못했으니까.
격한 정사 후 두 사람의 체온이 식고 차갑게 내려앉은 정적은 살갗이 에도록 시렸다.
짧은 침묵 끝에 붉은 입매가 벌어지며 묵직한 목소리가 고요와 같이 흘렀다.
“씹만 뜨는 관계.”
베이지의 말을 따라 하듯 잠잠히 뱉어진 말은 그곳에서 끝이었다. 목적 없이 흐르다 끊겨버린 문장에 베이지는 자신의 어떤 말이 하이어드의 심기를 거스른 줄도 모르고 다시금 입을 뗐다.
지금 그녀에게는 그의 기분을 헤아릴 정신 따위가 없었다. 의연한 체 이러한 말을 내뱉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충분히 버거웠다.
“사제님께도 좋은 인연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방 안에 내려앉은 침묵이 견디기 힘들어 베이지는 아무런 말이나 쏟아냈다.
베이지가 준비한 말은 처음의 두 마디가 전부였다. 사람과 관계를 맺고 끊어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베이지는 제가 쏟아내 놓고도 스스로가 상처 입어 손끝을 떨었다.
여타 종교의 성직자들과 다르게 헤이트리드 교를 숭배하는 자들은 가정을 꾸리는 것이 가능했다. 순결을 위해 무분별하게 색을 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더라도 대는 잇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이어드 또한 언젠가는 가정을 이룰지도 몰랐다. 아마 그라면 제가 원하던 그런 가정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베이지가 스스로가 만든 혼란 속에 가라앉으려던 때 한없이 정적인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두드렸다.
……아.
“지금 제게, 다른 여자에게 좆을 쑤시라.”
이 말씀이십니까.
급격히 낮아진 목소리는 귓가에 닿지 않을 듯 먹먹했고, 선득하였으며 고요했다.
“그리고 당신은, 다른 남자의 좆받이가 되겠다?”
무언가를 억누르듯 뭉개진 발음에서 좋지 못한 심기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베이지는 저를 얽어 들어오는 꺼먼 시선에 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꼈다. 숨이 턱 막혔다. 작은 몸은 상위 포식자를 눈앞에 둔 짐승처럼 얼어붙었으나, 이성만은 또렷했다.
베이지는 하이어드의 조금 상스러운 단어 선택이 제게 상처를 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단순히 그의 말버릇이, 몸에 깊이 박힌 습관이라 그런 것뿐이라 생각했다. 그는 잠자리에서도 언제나 저런 단어들을 썼지만 정작 행동은 그리 거친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베이지는 하이어드가 내뱉은 천박한 단어들을 저를 비꼬는 뜻으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좆받이라는 단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의미는 옳았으므로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베이지의 순수하기 그지없는 반응에 하이어드의 손등에 시퍼런 힘줄이 돋았다. 그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고 그 야트막한 틈으로 정적과도 같은 헛웃음이 샜다.
베이지는 그 알 수 없는 웃음에 몸을 굳혔다. 작은 빛 하나 반사되지 않는 꺼먼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음에도 하이어드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곧바로 수긍할 줄 알았던 그가 답에 뜸을 들이는 것조차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싫은데.”
“네?”
“싫다고 했습니다.”
끝이 뚝 떨어지는 목소리에서는 설득의 여지조차 보이질 않았다. 베이지는 저를 꿰뚫어 보듯 그악스럽도록 살갗에 달라붙는 시선을 받아내기가 버거워, 서늘하게 굳은 하이어드의 입매로 시선을 내렸다.
베이지는 저도 모르게 하이어드를 따라 입매를 굳혔다.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사고가 마비되었다. 그러면서도 묻고 싶은 말은 생각이 났고, 답을 듣고 싶지 않음에도 입은 움직였다.
“왜…… 왜요?”
머뭇거리는 얇은 음성이 울리고, 하이어드는 베이지가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지 입매를 길게 늘어뜨렸다.
“내가 들어줘야 할 의무는 없지 않나.”
난 당신 보지에 좆 쑤시고 싶은데.
참으로 직선적인 저음은 제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새하얗고 자그마한 여체를 훑어내렸다. 노골적인 육욕이 묻어나는 시선이었다.
베이지는 뜻이 모호한 하이어드의 답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제 몸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일까?
베이지는 자신이 되묻는다는 것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왜요?”
베이지의 말을 어떻게 알아들은 것인지, 힘이 바싹 들어가 있던 하이어드의 목울대에 굵은 핏대가 섰다.
“아, 씨발…….”
이어 으깨진 욕지거리가 살얼음과도 같은 위태로운 정적 위로 내리깔렸다. 채 억누르지 못하고 샌 듯 그 본연의 날것의 냄새가 무겁게 튀었다. 하이어드의 새까만 속눈썹이 한 차례 아래로 깔리고는 다시금 베이지를 향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가느다랗고 뽀얀 목으로.
“그냥 다른 새끼 좆이 받고 싶다고 하지.”
감추지 못한 비린 살기가 묻어나는 흉흉한 저음이 베이지의 얇은 목을 움켜쥘 듯 뱉어지자 그녀의 몸이 본능적으로 잘게 떨렸다. 그리고 그 떨림을 잡아챈 하이어드의 시선이 그녀의 몸을 짧게 훑었다.
작다란 짐승의 몸이 볼품없게 떨리는 꼴에 불거져 있던 하이어드의 턱뼈가 가라앉고 그의 흉부가 부풀더니 이내 무겁게 꺼졌다.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통보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코트를 걸친 하이어드는 짧은 말만을 남기고 그대로 문을 나섰다.
하이어드가 자리를 뜨고 방 안에 홀로 남은 베이지는 입을 꾹 다문 채 그가 사라진 문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적막이 깃든 침실에서 그가 남긴 묵직한 체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그의 존재를 냉정하게 끊어낼 수 없게 만드는 나무 냄새였다.
그가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제게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하이어드의 의중을 가늠해 보는 시간은 짧았다. 남은 것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와 거리를 둘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하이어드가 사라지고 굳게 닫힌 문 위로, 피가 범벅이 되어 후원에 쓰러져 있던 메리엔의 모습이 덧그려졌다.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