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환기가 불가한 탓에 지하실 내부는 벽에 밴 시체 썩은 내로 가득했다. 쿰쿰한 곰팡내와 피비린내가 뒤섞인 공기가 코를 아리게 했다.
평생 익숙해질 리 없는 낯설고 공포스러운 죽음의 냄새였다.
“똑바로 보라 하지 않았느냐.”
위엄이 깃든 묵직한 목소리가 베이지를 향했다.
꾸짖음은 익숙했다. 자신이 눈을 뗀 건 아주 잠시였으나, 제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베이지는 부들거리는 두 손을 꽉 맞잡고 아무런 대꾸 없이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작게 타오르는 촛불 몇 개가 컴컴한 지하실을 흐릿하게 밝혔고, 촛대를 타고 흰 촛농이 뚝뚝 떨어질 때마다 불길이 크게 일렁이며 사위를 흔들었다.
시야가 환히 트이는 매 순간, 지하실의 돌벽에 말라붙은 핏자국과 바닥에 널브러진 채 울부짖는 사내의 형상이 비쳤다. 좀 전 발가락 하나를 잃은 사내는 짐승의 언어를 구사하듯 알 수 없는 말소리를 끊임없이 토해냈다.
그 곁에 선 고문관은 멈추지 않고 또 한 번 팔을 들어 올렸다. 노르스름한 불빛은 아롱거리며 시꺼멓고 뭉툭한 칼날 위를 덮었고, 빛을 머금은 칼날은 또 하나를 잘랐다.
“으아악!”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매끈한 지하실 벽에 부딪혀 웅웅 반복적으로 베이지의 귓가를 내리쳤다.
베이지는 절로 움찔거리려던 몸에 바싹 힘을 주고 버텼다. 속이 꽉 막힌 듯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끅, 끄흑. 모, 모릅니다……. 정말, 정말입니다아…….”
온 얼굴이 눈물과 피로 범벅된 사내는 이미 성하지 않은 두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고개를 조아렸다.
베이지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며칠 전, 불시에 저택으로 타국의 기사들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경멸해 마지않는 아트로테인 제국의 기사들이었다. 다른 여타 왕국들은 고위 귀족들의 소비가 활발해 마약 밀반입을 묵인해 주었는데, 아트로테인 제국만은 고상한 체를 하며 각종 약물들을 엄격히 금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국가로 마약이 밀반입되었다는 신고를 받아, 조사 차 파견되었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아버지는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찾으려는 흔적이 저택에 존재할 리 없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고, 제국의 기사들은 의심의 화살을 겨냥한 대가로 꽤 큰 협상권을 지불하고 돌아가야 했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아버지는 곧바로 밀고한 자로 의심되는 이를 잡아들였다. 그 자가 바로, 제 앞에 엎드려 있는 이 남자였다.
그저 아는 남자라고 칭하기에는 삼 년이라는 꽤 길다면 긴 시간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베이지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이름을 내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남자는 곧 흐무러질 목숨이었다.
그때 남자가 별안간 베이지를 바라봤다. 마치 그녀의 생각이라도 읽은 것처럼. 까무룩 꺼져가던 그의 눈동자에 일순 작은 기대가 번뜩였다.
베이지의 연약한 성정을 익히 아는 남자는 표적을 변경하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제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본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부어 있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울음이 섞인 웃음이었다.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는 제 결백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발,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다리뼈가 으스러진 남자는 팔로 제 몸을 지탱해 엉금엉금 베이지에게로 기어 왔다. 핏물이 고인 돌바닥에 손을 짚는 찰박거리는 소리와 늘어진 몸뚱어리가 거칠게 끌려오는 소리가 잇달아 들려왔다.
그 누구도 남자를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곁에 선 그녀의 아버지는 즐겁다는 듯 웃으며 남자를 끌어내려는 고문관을 가벼운 손짓 하나로 만류했다.
“제발…….”
어느새 베이지의 앞에 다다른 남자는 구원을 바라듯 손톱이 다 빠져 흉측하기 짝이 없는 손을 뻗었고.
순식간에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그 손을 낚아챘다. 으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아악!”
베이지의 곁에 있던 그녀의 호위, 애브가 남자의 손을 무참히 비벼 밟은 것이었다.
다시 한번 찢어지는 비명이 지하실을 뚫을 듯 울렸으나 애브는 그의 손등 가죽이 까져 벗겨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 잔혹한 광경에 베이지는 덩달아 자신의 눈에도 차오르려는 눈물을 애써 삼켜내며 작게 침음했다. 그녀의 흙색 눈동자가 진하게 물들었고, 옅게 떨리는 어깨 탓에 그 위로 얹어져 있던 부드러운 연갈색 머리칼이 흐트러지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남자의 눈동자는, 진실로 결백해 보였다.
하지만 이곳은 진실의 정의가 때에 따라 변하는 곳이었다.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장소였다.
그런 지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저 남자의 잘못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베이지는 남자의 무고와 관계없이 이런 상황들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아무리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익숙해질 리 없었다. 인간으로서 용서받지 못할, 이런 끔찍한 일들이.
누군가 속을 헤집는 듯했다. 울렁거림이 시작되었다.
그때 이 모든 광경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던 베이지의 아버지, 타데오 스논이 웃음을 터뜨리며 제 딸을 불렀다.
“베이지 스논.”
베이지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였다. 그녀는 제 이름 뒤에 ‘스논’이라는 아버지와 같은 성이 따라붙는 것을 소름 끼치도록 싫어했다.
온갖 패악질을 일삼으며 한치의 죄악감도 느끼지 않는 이 집안이 제 이름, 제 일부라는 사실이 끔찍했다.
타데오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성을 붙여 딸을 부를 때마다 그녀의 이마에 미세하게 주름이 지는 것을 은근히 즐겼다. 한편으로는 아직까지 감정을 완전히 숨길 줄 모르는 건가 싶어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타데오는 이것도 한때라 여겼다. 이 고비만 넘기면 어엿한 후계자로 제 몫을 해낼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 딸이니까.
해내지 않는다면, 해내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자, 이제 네가 해 보거라.”
타데오는 얇은 입술을 길게 말아 올리며 말했다.
넋이 나간 베이지가 가만히 막대를 바라보기만 하자, 타데오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는 베이지가 벗어날 수 없도록 그녀의 손을 틀어쥐고 길고 단단한 막대를 쥐여 주었다.
“쯧. 장차 내 뒤를 이어 공작위를 물려받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직접 손에 쥐여 주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막대를 받아드는 베이지의 창백한 손이 바들거렸다.
최근 들어 아버지가 제게 직접 시키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하지만 몇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기는커녕 여전히 낯설고 두려웠다.
저항해 봤자 결국 그의 뜻대로 되리라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다른 일들은 이를 악물고서라도 그가 시키는 대로 하더라도, 도저히 사람을 때리는 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베이지의 정처 없이 흔들리는 상앗빛 눈동자가 타데오를 향하자, 그는 친히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막대를 휘둘러 주었다.
눈을 질끈 감아 암흑이 된 베이지의 시야에, 타데오의 뱀같이 수축한 동공이 잔상처럼 맴돌았다.
* * *
삼십 년 전만 해도 대륙 전역은 혼란기에 들어서 있었다. 순리처럼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이 끊이질 않았으며, 사람이 죽어 나가는 소리가 멎을 날이 없는 시대였다.
그리고 스논 공작가의 가주, 타데오 스논은 그 혼란을 잘 이용한 자였다.
고아로 태어나 길거리를 전전하던 타데오 스논은 야망이 넘치는 사람이었으며 그 야망을 이룩할 수 있는 머리를 가진 자였다.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라면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악이기도 했다.
타데오 스논은 저 아래 밑바닥부터 기어올라 와, 그 당시 제 3 왕자였던 헬튼 프라헨의 최측근이 되었고 끝내 반역을 통해 지금의 왕조를 여는 데 크게 일조했다.
새로운 왕조를 맞이하며 국왕은 왕권을 확고히 하고자 했고, 그를 위해서는 먼저 전쟁통에 텅 비어버린 국고를 메워야만 했다.
이 역시 타데오 스논의 수 아래에 있었다.
타데오 스논은 그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댐으로써 공작위를 하사받고 강한 권력을 차지했다.
그는 새 왕실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자금을 벌어들일 방법 또한 제시했다.
‘최근 대륙 전역에서 확산세를 보이기 시작하는 헤이트리드교를 국교로 삼으십시오.’
부러 전쟁이 잦아드는 시기에 맞춰 반역을 도모했기에 왕권이 교체된 지금, 대륙은 안정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신의 은총으로 종전이 이뤄지고 평화가 찾아왔다 믿고 있는 백성들에게, 즉위한 국왕이 그 신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부분을 내세워 왕권을 강화하고 혼란한 백성들을 한데 모은다는 명목이었다.
‘그리고 그 신을 이용해 자금을 벌어들이는 겁니다.’
신전을 이용한 마약 밀매 및 유통.
마약 밀매와 유통은 바닥부터 올라온 타데오 스논이 그간 돈을 끌어모았던 방법이었으며 앞으로도 그의 재산을 착실히 불려줄 수단이었다.
국왕은 성왕이 아니었기에 국고를 풍족하게 채워 준다는 타데오 스논의 제안을 마다하지 않았다.
국왕의 허락을 받아낸 타데오 스논은 교황 자리에 제 수족을 밀어 넣고 자금을 쓸어 담을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로도 일련의 모든 과정들이 타데오 스논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그렇게 이십여 년 후, 상황은 그 당시 국왕이 생각지 못했던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착실히 높아져만 가던 신권은 왕권에 위협적일 정도의 위치까지 올라오게 되었고, 그것은 곧 스논 공작가가 절대 권력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어느새 스논 공작가는 현 프라헨 왕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자, 왕권에 맞먹는 권력을 소유한 가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데오 스논은 만족할 줄을 몰랐다. 제가 일궈낸 공작가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바랐다. 그는 제 뒤를 이을 후계자에게로 두 눈을 고정했다.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 타데오 스논의 하나뿐인 핏줄, 베이지 스논.
베이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말씀을 잘 따랐다. 그녀에게는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
베이지의 기억 속 어머니는 항상 창백했다. 늘 병상에 누워 하루를 보내셨고 상태가 악화되면 면회조차 금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만큼은 지키고자 노력하는 분이셨다.
병약한 육체와 달리 속은 단단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베이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자, 그녀가 오롯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베이지는 그런 어머니를 지키고 싶었다.
어린 그녀가 어머니의 병명을 알 길은 없었으나, 도드라지는 특징 하나는 톡톡히 알고 있었다. 강한 통증을 동반한다는 것이었다. 진통제 없이는 숨 한 번 편히 내쉬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고통을.
이마저도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타데오는 베이지가 도망갈 수 없도록 그녀의 뒷덜미를 단단히 붙든 제 어머니의 고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도록 만들었다.
단 하룻밤, 이명이 맺힐 정도로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를 밤새 눈앞에서 마주한 다음 날부터였다.
그 후로 베이지는 아버지의 말씀을 잘 따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숨통을 틔워 줄 진통제를 얻기 위해서였다.
또래들보다 특출나게 똑똑해야 했으며, 가정교사가 주기적으로 내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가끔 뺨을 맞아야 했다. 고문실에 동행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비위가 약해 토악질을 몇 차례 하며 눈물을 쏟은 이후로는 몇 달에 한 번 기르던 동물들을 직접 죽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현 국왕의 동생이자, 공주였던 헤르아 프라헨은 정략혼을 통해 타데오 스논과 맺어진 여자였고, 이런 잔혹한 성정을 지닌 그를 진심으로 혐오했다.
헤르아는 베이지에게 누누이 말했다.
막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저런 자들은 천벌을 받아야 한다고. 너만은 저들에게 물들지 말라고.
마치 딸을 위해 악착같이 버티듯 가는 숨을 연명하던 헤르아가 끝내 죽음을 맞이하고, 베이지에게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저들은 벌을 받아야 했다.
베이지는 아버지가 벌이는 범법적인 행위가 많은 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이 온갖 죄악들을 고발하고 끊어내야 했다. 그들이 하는 짓은 악이었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이 사명감 하나가, 베이지를 살게 하고 있었다.
* * *
푸릇푸릇한 잔디를 밟으며 지상에 발을 딛자마자 베이지는 구석으로 가 헛구역질을 해댔다.
참관을 하는 날은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기에 입 밖으로 나오는 건 투명한 위액뿐이었으나 아무리 토해내도 여전히 속이 메스꺼워 참을 수 없었다.
베이지는 손에 잡히는 나무 기둥을 꽉 움켜쥐어 휘청이는 몸을 지탱했다. 눈앞이 온통 시뻘건 피로 물든 듯한 착각이 일어 속이 울렁거렸다.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나무를 강하게 붙든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희게 질려 있었다.
죽었다. 남자는 죽었다.
또 한 차례 머릿속에 훼손된 시체의 모습이 떠오르자, 일순 힘이 빠져버린 베이지의 손이 죽 미끄러져 내렸다. 거친 나무껍질에 긁혀 손바닥에 상처가 나는 줄도 모르고 그녀는 다시금 손아귀에 힘을 줘 나무를 잡았다.
온갖 무참한 일들이 벌어지는 고문실과 달리 바깥은 화창하기만 했다.
녹음이 우거진 숲속은 선선한 바람이 몰아치며 열기를 식혀 주었고, 간간이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과 퍼드덕 날갯짓하는 소리가 평화를 나르는 듯했다.
고문실은 스논 공작가의 사유지이자 저택 뒤쪽을 둘러싼 광활한 숲속에 위치해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기에 한없이 적막했고, 베이지의 숨이 터지는 소리만이 맴돌 뿐이었다.
베이지의 호흡이 차츰 안정되어 가고 있을 무렵, 뒤늦게 지하실을 빠져나온 타데오는 한심한 제 딸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작게 혀를 찼다.
저리 심성이 약해서 어디다 써야 할지. 이러니 제가 지도를 멈출 수가 없었다.
“다 끝나면 홀로 데려오도록 하거라. 지저분한 꼴은 정돈 좀 시키고.”
타데오가 뒷짐을 진 채 사라진 후 한참이 지나서야 구역질이 멎은 베이지는 힘없이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여느 때와 같이 건조한 목소리에, 눈을 감고 있던 베이지는 제 옆에 선 남자를 올려다봤다. 무감정하고 탁한 녹안이 묵묵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였더라.
베이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기억을 더듬었다, 애브를 처음 만났던 날이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제가 일곱 즈음이었던 듯했다. 아버지가 환락가를 거닐다 발견한 아이라며 그를 데려온 것이.
‘처음 뵙겠습니다.’
애브는 아버지가 데려와 기른 그의 개였다. 호위라는 명목으로 제 곁에 머물고 있으나, 실상은 감시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아버지께 보고하고 있으니.
“아가씨.”
베이지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자, 다시 한번 애브의 낮고 딱딱한 목소리가 울렸다.
베이지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염려가 아닌 독촉이라는 걸 알았다.
“가요.”
공복 상태에서 위액까지 게워냈으니 몸속의 기운을 다 뱉어낸 것과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나 베이지는 이를 악물고 등을 꼿꼿하게 폈다. 그녀는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최대한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보잘것없으나, 이것만이 그녀가 지금 당장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신념의 표시였기에.
좀 전 에브에게 명하던 타데오의 목소리를 상기한 베이지는 곧바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바스락거리는 잔디 위로 스치는 드레스 끝자락이, 채 굳지 않은 축축한 피로 더럽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