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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60화 (188/191)

60화

연회의 마지막 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아릴을 홀로 방에 내버려 둔 채 나왔다.

함께 연회장에 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언제 누가 조그만 아릴을 소매치기하듯 낚아채 갈지 모를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딜로스는 황제 부부와 한통속인 자들로 득시글한 연회장이 싫었다.

그래서 조금만 농땡이를 피우고자 정원을 밟았다.

연회장의 음악 소리가 희미해질 때까지 걸었더니 흰 가제보가 나타났다. 이딜로스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천천히 다가갔다.

그 커다란 가제보는 어릴 적 그가 황궁에 놀러 와 부모님과 술래잡기를 할 때면 늘 숨어들던 곳이었다.

이딜로스는 손을 뻗어 색이 벗겨진 가제보의 기둥을 만졌다.

“……관리를 잘하지 않나 본데.”

곳곳에서 방치한 티가 났다. 외지고 깊은 곳이라 관리조차 하지 않는 가제보의 모습에서 겉만 번지르르하게 챙기는 황실의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면모가 떠올랐다. 속이 메슥거렸다.

이딜로스는 느린 걸음을 옮겨 가제보 밑으로 들어갔다. 그곳 아래에서 술래를 맡은 아버지를 기다리며 올려다보는 하늘을 얼마나 설레고 아름답던가.

그 추억을 떠올리며 이딜로스는 어둠이 내려앉은 여름 밤하늘을 쓸쓸히 바라봤다.

완벽하게 차오른 달이 선선한 바람을 머금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꼭 누굴 닮았군.’

새하얗지만 조금 푸른 기가 도는 저 달만큼이나 새하얀 머리칼을 가졌던 여자.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그녀를 떠올려 보던 이딜로스는 문득 바스락대는 소리를 들었다.

“……?”

분명 방금 수풀이 부자연스럽게 부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딜로스는 일대를 천천히 둘러봤다.

그러다 발견했다. 낮은 숲 덤불 너머 조그맣게 튀어나와 있는 새하얀 머리를.

미심쩍은 마음을 가진 채 천천히 다가갔다. 그럴수록 그 새하얀 머리통을 더 숨겨 보려는 셈인지 두 손이 머리를 감싸 누르는 게 보였다. 그 안간힘 쓰는 광경이 어이없었다.

‘바본가. 그래 봤자 다 보이는데.’

이딜로스는 바로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일부러 기척을 죽인 채 그 여자의 몽글몽글하고 새하얀 머리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줄곧 생각만 하던 그 여자가 눈앞에 있다. 이딜로스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해 입술을 물었다.

“……하아.”

그가 갔다고 생각하는 건지 여자가 여트막한 숨을 터트린다. 머리를 누르던 손에도 힘을 빼는 것이 보였다.

이딜로스는 손을 뻗어 막 내리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거칠게 끌어 올렸다.

달빛을 닮은 머리칼만큼이나 은은한 향기가 한순간에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역시나 맞닿은 곳으로부터 또다시 아릴에게서 느껴지던 것과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그 부드럽고 맑은 느낌에 모든 사고가 충동으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네 정체가 뭔지 알아야겠어.’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제 라펠 핀만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손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런데 악쓰듯이 시선 한 번 마주치지 않는 그녀의 눈동자가 점차 젖어 드는 것이 보였다.

이딜로스는 거리낌 없이 그녀의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그렁그렁하게 물기가 고인 푸른색의 눈을 마주 보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울어?”

울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닌가. 한순간 밀려드는 경멸감에 그녀의 턱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지? 넌 내게 더할 짓도 할 거잖아, 안 그런가?”

그뿐 아니라 이미 그를 충분히 괴롭히고 있기도 했다. 틈만 나면 생각나고 신경 쓰이게 만들지.

하지만 이딜로스는 자신이 처한 그 멍청한 상황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정작 상대는 손댄 것 하나 없는데 이러고 있는 자신이, 그 상황보다도 더 멍청하게 느껴질까 봐.

이딜로스는 그녀를 잡아먹을 기세로 흉흉하게 노려봤다.

말해, 어서.

누가 시켜서 이러는 것인지. 황제인지 황후인지.

아니면 그 누구든……. 무슨 목적으로 내 눈앞에 알짱대는지 말하란 말이다.

어쩌면 악의가 없는 것처럼 굴다가 맹한 여자라고 방심한 틈에 돌변해 카델라로트를 위협할지도 모른다. 마멜라나 아릴을 공격하고 그를 협박할지도 모른다.

여태 그에게 접근한 이들 중 대다수가 그의 소중한 것을 노렸기 때문에, 눈앞의 여자라고 해서 다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벙어리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거지? 머릿속엔 처음 만났던 날 들었던 그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리는데.

이딜로스는 그녀의 턱을 움켜쥔 손을 내려 가느다란 목을 쥐었다. 그제야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 여자의 정체를 알아내야만 한다는 집념이 무섭게 소용돌이쳤다. 그래야만 더는 그녀가 생각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나, 나는,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

떨리는 목소리가 무척 애처롭게 느껴져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일부러 손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제 목을 틀어쥔 이딜로스의 팔을 붙잡았다. 한순간 그 신비한 기운이 더 많이 밀려들어 흠칫했다.

머릿속이 서서히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마저도 아릴과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이딜로스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그녀의 차림새를 훑기 시작했다. 그 맑은 기운을 느끼니 제가 얼마나 충동적으로 굴고 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난번과 다를 바 없는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떠봐야 하나?’

이딜로스의 얼음장 같은 시선은 다시금 그녀의 얼굴에서 멈췄다. 이딜로스는 그녀의 목을 쥔 손에 힘을 풀며 말했다.

“이렇게 하지. 널 황실 경비대에 넘기겠다.”

그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딜로스는 그 표정의 변화를 지켜봤다. 상당히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느껴지는 묘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그는 제법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는 무섭지 않으면서 황실은 무섭나?”

그 물음에 여자는 눈물을 펑펑 흘린다. 정말 황실이 보낸 자가 아니었던 건가?

잘게 떨리는 시선을 마주하자 굉장히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적이든 아군이든 일단 무단 침입자인 건 맞는데…….

확신을 얻어 내기 위해 그는 여자에게 선택지를 제시했다. 황실에 잡혀갈지 아니면 그가 시키는 대로 할지.

정말 황실의 편이라면 선택지로부터 위협조차 느끼지 못할 거다. 그들은 애초부터 이딜로스라는 존재가 황실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고 있을 테니.

첩자로 숨어든 것도 아니니 굳이 그를 선택해 가며 위험을 감수할 이유도 없을 테고.

그러나 그녀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냉큼 대답했다.

“시, 시키는 대로 할게…….”

이딜로스는 그녀의 목을 붙잡은 손을 곧장 거두었다.

……이 여자는 황실의 수하가 아니다.

좀 더 날을 세우고 끝까지 의심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딜로스는 썩 내키지 않았다.

그녀가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는 다른 의문만이 들 뿐이었다.

궁금했다. 이름이 뭔지, 어느 곳에서 지내며 무슨 목적으로 자꾸 제 눈앞에 나타나는 것인지.

그래서 충동적으로.

“내 파트너 역할을 해.”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다.

마침 그녀는 이용하기에도 딱 좋을 것 같았다. 황궁 연회에 가면 황후가 제게 여자를 붙이려 벼리고 있을 텐데 그녀를 데려가는 건 최고의 대안이었다.

그렇게 그녀를 이용하면서 최대한 옭아매어 그 정체를 캐묻는다. 비로소 마음에 드는 계획이 충동을 물고 완성되었다.

그로부터 일어난 모든 일은 믿을 수 없게도 그의 사고와 의식을 무참히 짓밟은 충동에 의한 것이었다.

마르젠로트에 데려간 것도. 그곳에서 가까이 다가간 것도.

홀린 것처럼 눈을 맞추었던 것도. 그러다 마찬가지로 홀린 듯 입을 열었던 것도. 제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조차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으로 돌아온 그녀의 산새 같은 목소리에 조금 정신이 들었다.

“난 네 이름 알아.”

“……뭔데?”

“이딜로스.”

한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황제가 시켜 그를 해하러 온 것도 아니면서 그의 이름은 왜 알고 있단 말인가.

감정이 이상한 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하자 이딜로스는 일부러 그녀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네 이름은 누가 불러 줘? 불러 주는 사람이 없으면 이상하잖아.”

그의 의도와는 전혀 대비되는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알면 알수록 이상한 여자였다.

“공작님이라고 불러라.”

“알았어.”

존칭으로 부르라는 것에 응하면서도 대답은 또 짧다. 정말, 이상한 여자.

제 이름을 묻는 질문에는 곤란한 낯을 하며 뜸 들인다. 그의 이름은 알고 있으면서 이상한 걸로 모자라 치사하기까지 한 여자였다.

“됐다. 말하기 싫으면 관둬.”

어차피 조금 이따가 직접 털어놓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녀를 데리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어찌나 길던지.

구두 한 번 신어 보지 않은 것처럼 대뜸 넘어지려 하질 않나, 초대장이 없질 않나……. 애초에 초대장도 없으면서 황궁에는 어떻게 들어왔단 말인가. 조금 성가신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연회장에 들어가 어린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를 보자 이상하게도 그러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늘 구역질이 치밀던 연회장이 처음으로 그다지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백모를 마주쳤을 때부터는 그녀를 조금 더 예의 주시했다.

백모는 처음에나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여자를 바라보더니 갈수록 아예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유치한 따돌림과 무시에 그녀가 백모의 사람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다.

이딜로스는 백모와 엘리네가 짜고 내뱉는 헛소리들을 흘려들으며 간간이 그녀를 살폈다.

미간을 찡그린 채 엘리네 헤르핀드와 황후를 노려보는 모습이 꼭 성난 고양이 같았다. 하마터면 그 모습에 웃음을 흘릴 뻔했다. 이상하게도 아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백모가 약혼녀 이야기를 꺼내며 엘리네를 들먹이기 시작했을 땐 제 팔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가서 엘리네와 춤이라도 추고 오너라.”

이딜로스는 엘리네 헤르핀드가 내민 손을 무성의하게 내려다보다가 다시금 시선만 흘겨 그녀를 바라봤다.

마침 그를 힐끔대고 있던 그녀의 불안한 눈빛과 마주하자 이딜로스는 그녀가 붙잡고 있던 팔을 풀어 버렸다. 그건 좋게 말하자면 계획이었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충동이었다.

이내 허리를 감싸 바짝 끌어당긴 여자에게서 은은한 기운이 향기처럼 밀려 들어왔다.

이딜로스는 놀라 토끼 눈을 하는 그녀의 표정을 한시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송구하지만 그러긴 힘들 것 같습니다. 제 약혼녀가 보고 있어 말입니다.”

그는 경악에 물든 일대를 내버려 둔 채 순식간에 카델라로트 공작의 약혼녀가 된 그녀를 데리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쫓아오지 못하도록 길을 배배 꼬아 가며 한산한 정원의 깊은 곳으로 갔다. 그제야 제대로 마주 보고 선 여자의 얼굴에 벙벙함이 가득했다. 그 어리바리한 표정을 보자 만족감이 차올랐다.

이딜로스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가 멀어지려 하거든 떨어진 거리보다 더 다가갔다. 타인을 경계하고 타인과의 접촉이라면 더욱 진저리 치는 그였으나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저 아릴과 비슷한 재주가 있다는 것이 신기해 더 닿고 싶었고 또 도망칠까 봐 놓치지 않았다.

“이제 어쩔 셈이지? 이래도 네 정체를 안 밝힌 건가?”

네 이름을, 나이를, 사는 곳을, 그리고 목적을. 그는 도피처가 사라진 여자를 두고 느긋하게 캐물을 작정이었다.

이러다 지난번처럼 이상한 힘을 써서 그를 기절시킨다 한들, 이미 그의 약혼녀가 된 이가 숨어 봤자 찾는 건 한순간일 터였다.

바보도 아니고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으니 부질없게 도망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테지.

미소 짓는 그의 눈빛에 승리감이 감돌았다.

그런데 갑작스레 그 여자가 자신을 밀치고 또다시 달아날 줄 누가 알았을까.

꽉 붙잡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 그녀가 미는 손길 한 번에 놓치고 말았다. 황당할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곧장 그녀를 쫓아 수풀을 파고들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그녀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숨을 만한 곳이라곤 없는데.

기가 차서 미칠 지경이었다.

“또 놓쳤군.”

거기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충동적인 행동의 부산물 같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약혼녀라니. 아무리 이용하기 위함이었다지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이딜로스는 여태껏 자신이 늘 이성적이고 냉정하다는 걸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는 아릴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돌아온 그의 방문 앞에, 가지런히 놓인 푸른색 드레스를 보자마자 그는 제 이성이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 농락하는 것도 아니고.’

다시금 이성이 충동에 짓밟혔다.

그 여자를 기필코 찾아내고 말겠다는 생각만이 그의 자존심을 꼿꼿하게 딛고 일어섰다.

“안셀.”

“예.”

“내가 지난번에 찾으라던 여자, 기억하나.”

“아…… 예. 기억합니다.”

“얼굴, 목소리, 추정되는 나이, 내가 본 모든 걸 알려 줄 테니 반드시 찾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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