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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58화 (186/191)

58화

이딜로스의 한마디에 주변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네의 수줍은 표정에 균열이 일고 황후는 충격스러운 표정으로 줄곧 없는 사람 취급하던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정작 나는 이딜로스가 말한 그 약혼녀가 누굴 가리키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또 이번엔 누가 이딜로스에게 들러붙은 걸까 기분이 나빴을 뿐.

고양이여도 약혼녀라는 게 대충 무엇인지는 알았다. 독서 중이던 마멜라가 종종 입에 올리곤 했으니 말이다.

나는 여기저기 홀리고 다니는 이 인간을 남몰래 째려봤다.

괘씸함에 허리를 감싼 손을 치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안 그래도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어 못 견디게 간지러웠다.

그때, 황후가 나를 가리키며 의심스러운 눈을 했다.

“……약혼녀라 했느냐?”

줄곧 무시당하던 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황후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그 무례한 삿대질은 명백히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방금 이 인간이 뭐라고 했지, 약혼녀?

어리둥절함을 느끼던 나는 곧 당혹스러움에 굳었다.

……설마 나? 날 말한 거야?

나는 황당함에 고개를 들었다.

‘내가 왜 약혼녀가 되는 건데? 이래도 돼?’

이딜로스에게 항의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말을 정정하기는커녕 도리어 내 뺨을 다정히 문지르며 남들 앞에서 사이좋은 행세를 했다.

그리고 곧 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내려 가까이서 속삭였다.

“이제 그 잘난 도주 실력도 여기서 끝이겠어. 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약혼녀로 눈도장 찍혔으니.”

마주 본 그의 얼굴에는 나를 향한 가소로움과 승리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다시금 황후에게 연기용 미소를 걸치며 말했다.

“늦었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제 약혼녀입니다.”

“……허. 약혼식도 올리지 않고?”

“이미 올렸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요.”

그가 은근하게 웃으며 왼손 약지에 끼우고 있던 반지를 보였다.

황후의 시선이 이딜로스의 손에 닿았다가 다소곳하게 모으고 있던 내 손에도 닿았다. 나 역시 내 손을 내려다봤다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나도 모르는 새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점원들이 끼운 거였나?

치밀하기도 했다. 그럼 처음부터 날 이러려고 파트너 삼았다는 거 아닌가.

황후와 엘리네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엘리네는 표정 관리가 안 되는지 바르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어머, 공의 약혼녀라는 영애는 수도에서는 본 적이 없는데, 실례지만 어느 가문의…….”

“피곤한가? 얼굴이 말이 아니군.”

엘리네의 말을 무시한 이딜로스가 갑작스레 내 뺨을 감싸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아주 짧게 내 입술에 머물렀다가 훑듯이 올라왔다. 그 일련의 행동에 이상하게도 열이 올랐다.

“나갈까, 자기야.”

곳곳에서 충격받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 역시 당황해 그의 금색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내 대답을 들은 이딜로스의 미소에 흡족함이 감돌았다. 이딜로스가 황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제 약혼녀가 피곤하다고 하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뵙지요, 황후 폐하.”

이딜로스는 허리를 감싼 손으로 아까보다 더 긴밀히 밀착해 나를 이끌었다. 뒤편에서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으나 내게는 그보다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이딜로스의 냄새가 가깝다.

이딜로스의 온기도 가깝다.

귀를 먹먹하게 때리는 내 심장 소리가 맞닿아 있는 이딜로스에게도 전해지면 어쩌지…….

고양이일 때는 이렇게까지 심장이 뛰지는 않았다. 인간의 몸이 이상한 걸까? 아니면 너무 긴장해서 그런 걸까.

뒤편에서 연회장의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웅성거림과 연주 음악이 부쩍 멀어졌다.

이딜로스는 여전히 내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나를 정원으로 이끌었다. 간간이 뒤를 살피는 것을 보니 누가 뒤를 밟기라도 하나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심장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어.”

“그걸 어떻게 알지?”

“그냥 소리로…….”

“그것도 이상한 재주군.”

그것도? 어리둥절하게 그를 바라봤다.

이딜로스는 조금 더 정원 깊숙이 들어간 후에야 나를 놓아줬다. 어느새 미소를 감쪽같이 감춘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쩐지 이딜로스의 눈을 마주 보기가 힘들어 눈을 피했다.

그러자 이딜로스가 내 얼굴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한순간 강제로 시선을 마주하게 되면서 당황해 뒷걸음질 치려 하자 이딜로스가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말했다.

“또 도망치려고?”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물러나려 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온 그가 흔들리는 내 눈을 바라봤다. 너무, 너무 가깝다…….

이딜로스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타인이라면 질색하면서. 원래 이렇게 밀착과 접촉을 좋아하는 인간이던가?

이딜로스는 느긋하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제 어쩔 셈이지? 이래도 네 정체를 안 밝힐 건가?”

대체 내 정체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거야?

차라리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싸늘한 목소리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부드러운 저음이었다.

“저기, 난…….”

그때였다. 불길한 느낌과 함께 머리가 핑 돌았다. 이 익숙하리만치 불쾌한 감각은 분명 고양이로 돌아가려는 조짐이었다……!

말을 하다 말고 굳은 나는 재빠르게 사고 회로를 굴렸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이딜로스를 밀쳐냈다.

내 급작스러운 반응에 그가 나를 놓친 순간, 나는 황급히 우거진 수풀 틈으로 몸을 날렸다.

“잠깐, 기다려!”

그가 나를 뒤따라 수풀로 들어왔다.

나는 조마조마하게 그를 지켜봤다. 나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이딜로스의 금색 머리칼이 보였다.

나는 숨을 터트렸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보송한 앞발로 나무를 꽉 붙잡았다.

바로 나무를 타고 올라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들켰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건 어쩌지…….’

나는 굵은 나뭇가지 위에 모아 둔 옷가지들을 바라봤다. 그러다 아래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시선을 내렸다.

“또 놓쳤군.”

이딜로스가 한숨을 내쉬더니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무슨 생각으로…….”

나는 이딜로스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이딜로스가 지금 방으로 돌아가면 내가 없는 걸 알게 되지 않나. 그를 추월해 가기엔 내 다리가 너무 짧았다.

‘아, 어떡하지……. 괜히 밖에 나와선.’

아니, 아니다. 엘리네 그 인간으로부터 이딜로스를 지켜 냈으니 그걸로 만족한다. 지금 이 상황도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야.

이딜로스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초조하게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지금 이딜로스가 여길 벗어나면 나는 곧장 나무에서 내려가 수풀 틈으로 달려서…… 가도 느릴 수밖에 없네.

‘그냥 밖에서 놀다 온 척할까?’

꼬질꼬질하게 나뭇잎과 흙을 묻히고 들어가면 그러려니 넘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한테 실망할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울상을 지은 채 주저앉았다.

‘내 원래 계획은 이딜로스가 위험에 처하면 ‘짠!’ 하고 나타나 멋있게 구해 주는 거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이게 다 계획에도 없이 인간이 되어 버린 탓이다.

여느 때와 달리 인간으로 오래 버텨 망정이지 아까 그 상황에서 고양이로 다시 변하기라도 했더라면 일이 얼마나 꼬였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한숨을 내쉰 순간이다.

뭔가가 아래로 풀썩 떨어졌다. 소리가 상당히 커서 우울하게 시선을 내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뭇가지에 걸쳐져 있던 구두 한 짝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미, 미, 미친!’

나는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던 이딜로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이미 걸음을 뚝 멈춘 상태였다.

이딜로스가 뒤돌아봤다.

나는 서둘러 다른 것들이 떨어지지 못하게 네 다리로 옷가지를 끌어안았다.

이딜로스가 풀밭에 덩그러니 떨어진 구두로 다가갔다. 그가 구두를 주워 들어 살피더니 주변을 두리번대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위는 보지 마. 제발……!’

이딜로스는 구두를 들고 황궁과 반대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위에서 구두가 떨어졌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이런 옷을 입고 어떻게 나무 위를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겠나.

나는 이딜로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온몸에 힘을 탁 풀었다.

‘돌아가자, 얼른.’

옷가지를 땅으로 먼저 떨어트린 후에 나무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아무렇게나 뭉쳐 입에 물었다.

서둘러 이딜로스가 머물던 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방문을 여는 이딜로스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문이 닫힐 때까지도 제 품에 들린 푸른색 옷가지에 닿아 있었다.

이딜로스가 테이블 위로 푸른색 옷가지들을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가 기가 찬 듯 웃음을 흘렸다.

“……하.”

나는 어둡고 아늑한 침대 밑에서 이딜로스를 지켜봤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조금 전, 입으로 옷가지를 물고 이딜로스의 창문 근처에 있던 나무를 타고 올라온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내가 나갈 때 창문을 열어 두지 않았으면 아마 난 못 들어왔을 거다.

이딜로스가 노려보고 있는 저 옷들은 어떻게 했느냐? 방에 들어오자마자 착착 개어서 문 앞에다 가지런히 내놓았다.

다행히 옷이 너무 부드러워 먼지조차 잘 묻지 않는 재질이었기에 저걸 들고 나무를 타고 떨어지고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다.

옷을 보다가 혀를 찬 이딜로스가 방 안을 둘러봤다.

“아릴?”

힘이 쭉 빠져서 대답하지 않았더니 그가 방 안을 돌아다니며 나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아릴, 어딨어. 아릴?”

“아옹…….”

그의 목소리에 불안함이 느껴지자 별수 없이 대답하며 침대 밑에서 나왔다.

나를 발견한 그가 안도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다 일어났어?”

“아옹.”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옅게 떠올랐다. 이딜로스는 나를 안아 들며 물었다.

“아무 일 없었지?”

“아옹.”

“……이상한 사람 못 봤고? 저 옷 두고 간…… 아니지. 넌 안에 있어서 못 봤을 텐데.”

나는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다행히 내가 감쪽같이 숨긴 모양이구나. 비록 인간인 나는 이딜로스에게 제대로 찍힌 모양이지만…….

나는 이딜로스의 품에 머리를 비비적댔다. 그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나를 쓰다듬었다.

“내가 널 오래 혼자 뒀지. 이제 나갈 일 없으니 같이 있어 줄게.”

* * *

다음 날 아침이 밝자 이딜로스는 짐을 시종들에게 맡긴 채 나를 안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온 것이다.

‘마멜라는 잘 지내고 있을까?’

나는 눈앞에 보이는 이딜로스의 소매 깃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딜로스가 나를 마차 안, 쿠션을 쌓아 둔 자리에 내려 두었다.

“잠시 갔다 올게.”

그는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덮어 쓰다듬다가 걸음을 돌렸다.

마차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대문 앞까지 따라 나온 황후와 대화하는 이딜로스가 보였다.

황후의 표정이 점잖지 못한 것을 보니 어제 일을 말하는 듯했다. 이딜로스는 표정에 듣기 싫다는 티를 역력하게 내며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끝나 갈 무렵에는 황후의 입 모양이 ‘마멜라’를 말하고 있는 것을 포착했다.

‘저 인간은 왜 저렇게 마멜라에게 집착하는 거 같지?’

나는 황후를 째려봤다. 마멜라를 괴롭히기라도 하려는 건가?

한창 속으로 황후를 견제하고 있는데 돌아오는 이딜로스가 보였다. 이딜로스는 창문에 붙어 선 나를 보더니 픽 웃었다.

나는 이딜로스를 기다리며 해맑게 울었다. 그런데 문득 그의 뒤편에 보이는 낯선 존재에 시선을 빼앗겼다.

커다란 황궁의 입구 앞, 멀찍이 떨어진 낯선 인간의 머리칼이 이딜로스의 색과 비슷했다.

‘저 인간은…… 설마 이딜로스의 백부?’

나는 한순간 등을 곧추세웠다. 이쪽을 보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황후에게서 느껴지는 것보다 더한 불쾌함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뭐지, 저 눈빛은? 텅 비어 있는 것 같아…….’

그럼에도 멸시가 명확히 느껴졌기에 더욱 기분 나빴다.

황제의 모습은 이딜로스가 가까이 다가와 문을 열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딜로스는 잔잔한 호수처럼 엷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돌아가자, 아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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