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2화 (183/191)

2화

낯선 곳에서의 세 번째 아침을 맞이했을 무렵. 나는 ‘아릴’이라는 것이 나를 부르는 말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날 데려다 밥을 먹여 준 그 소녀의 이름은 마멜라.

마멜라는 매일같이 내게 맛있는 밥을 주고 내가 잠들 때면 내 등을 느리게 토닥여 줬다.

‘이렇게 따뜻한 기분은 너무 낯설어…….’

어느새 나는 처음 느끼는 따뜻함에 경계심을 모조리 허물고 있었다.

소파에서 곤히 낮잠을 자던 나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마멜라가 손에 뭔가를 들고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괜히 하겠다고 나섰나 봐…….”

중얼거린 마멜라는 후회가 막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말했다.

“아릴, 아프면 말해야 해. 알았지?”

마멜라가 내 배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날 왜 이렇게 꽁꽁 싸매고 있던 걸까?’

헌 붕대가 옆에 쌓이자 나는 호기심에 고개를 빼 줄곧 갑갑하게 감싸져 있던 곳을 내려다봤다.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붕대에 가려 보이지 않던 그 자리에는 심하게 다친 상처가 있었다.

나는 다친 기억이 없는데 왜 저런 게 있는 거지?

충격에 마멜라를 바라보니 그녀도 나 못지않게 놀란 표정이었다.

“칼에 찔린 상처…….”

마멜라의 손이 잘게 떨렸다. 겁먹은 듯한 눈빛이었지만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의 표정은 곧바로 누그러졌다.

마멜라는 나를 치료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차근차근 말했다.

“아릴, 지난번에 널 치료해 준 수의사 아저씨가 적어도 몇 달은 지나야 완전히 나을 거랬어.”

특유의 잔잔하고 둥근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시 수의를 부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기가 조금 힘들어. 오라버니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거든.”

마멜라의 표정에 그림자가 졌다. 미세한 변화임에도 나는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라버니는 동물을 싫어해. 나도 이유는 모르는데 동물이 가까이 오기만 해도 기겁한다니까. 분명 옛날엔 강아지도 같이 키웠는데…….”

한숨을 내쉰 마멜라는 내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래서 난 널 잠시간 숨기려고 해. 적어도 네가 나을 때까지는.”

“아옹?”

“아릴이 너는 내가 데리고 왔으니까 나중에 널 소개하면 분명 좋아해 주실 거야.”

가볍게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녀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표정이 저렇게 다양하게 바뀌는 걸 보면 분명 맛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걸 거야.’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자 그녀가 내 코를 콕 눌렀다. 나는 깜짝 놀라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마멜라는 두 손으로 내 양 볼을 꾹 눌러 문지르며 웃었다.

“어서 나아, 아릴.”

“아가씨.”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마멜라는 큰 눈을 깜빡이더니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이야?”

“아르벵 선생님께서 오셨어요. 가 보셔야 해요.”

나를 힐끔 바라본 마멜라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알았어. 지금 나갈게.”

마멜라는 내 등을 가볍게 쓸어 주고는 일어섰다.

“아릴, 난 이만 가 봐야 해.”

이곳에서 지내면서 외워 둔 마멜라의 패턴 중 하나였다. 마멜라는 늘 이 시간에 방을 나서서 몇 시간 후에 돌아오곤 했다.

‘마멜라랑 떨어지기 싫은데…….’

마음 같아선 마멜라를 졸졸 따라가고 싶지만 몸 상태가 나빠 그럴 수가 없었다. 혼자 방에 남아 마멜라가 얼른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다녀올게.”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기류가 급격히 무거워졌다. 마치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아옹…….”

며칠간 이곳에서 지내면서 꽤 익숙해진 것 같았지만 여전히 마멜라가 사라지면 낯설기만 했다.

나는 물고기 인형에 고개를 푹 묻었다.

‘……오늘도 자다 일어나야 하나 봐.’

잠들었다 깨어나면 마멜라가 어느새 곁에 와 있곤 했다.

‘빨리 잠들었다가 빨리 깨어나는 거야.’

나는 물고기 인형을 껴안은 채 눈을 감았다. 다시 눈 떴을 때 마멜라가 와 있기를 바라면서.

* * *

제국의 상업계를 틀어쥔 거상 카델라로트 공작.

그가 손 뻗은 사업처 중 하나인 에쥴라로트(Ejyullaroteu)는 최고급 원목만을 취급하여 최상급 품질의 가구만을 판매하는 곳이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가게의 문이 열리며 훤칠한 남자가 나왔다.

흠 없이 광이 나는 구두, 구김과 노출 하나 없는 양복, 흐트러짐 없이 정돈한 금색 머리칼은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 하나 내려앉지 않을 정도로 단정함을 추구하는 매무새였다.

“잠깐 기다리시게, 카델라로트 공작.”

그의 걸음을 잡은 건 뒤편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카델라로트 공작은 성가신 듯 한숨을 살짝 내쉬곤 뒤돌았다. 멀리서 누군가 묵직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는 막 에쥴라로트와 거래를 성사한 서펜 후작이었다. 덥수룩한 갈색 수염이 난 후작의 곁에는 웬 고운 영애도 함께였다.

카델라로트 공작, 이딜로스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용건이 남았습니까?”

이딜로스의 눈빛에서 약간의 짜증스러움과 피곤함이 묻어났다. 누가 봐도 일주일은 족히 잠을 거른 사람이라 그를 종종 보는 서펜 후작도 흠칫했다.

후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린놈이 부모상 한 번 당했다고 다 산 것처럼 굴긴…….’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지만 후작은 사람 좋게 웃으며 그에게 친한 척을 했다.

“우리 사이에 왜 그리 딱딱하게 대하나. 꼭 용무가 있어야만 이리 보는 것도 아니고.”

우리 사이?

이딜로스는 비웃음이 나오려는 걸 용케 참았다.

그가 손 뻗은 사업과 계약을 맺은 사람 중 한 명일 뿐이면서 웬 생색인가. 누가 들으면 아주 친한 사이인 줄 알겠다.

카델라로트 공작은 저런 류의 사람을 혐오했다. 그를 필요로 할 땐 정겹게 굴면서 속으로는 그를 한없이 무시하는 위선자 같은 자.

하나 그는 입매를 끌어 올렸다. 일단은 사업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미소였다.

“서펜 후작의 말도 일리가 있군요.”

다행히 카델라로트 공작은 웃으면 인상이 달라지는 사람이었다. 아까의 위압감이 사라지자 서펜 후작은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흠, 그래. 자네가 웃어른의 말은 잘 들으니 다행이야. 그런데 공작, 수도를 내려가기 전에 내가 소개해 주고픈 사람이 있는데.”

이딜로스가 조용히 바라보자 서펜 후작은 옆에서 다소곳하게 있던 영애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여식인 르보네라네.”

이딜로스의 시선이 자연히 그녀에게로 옮겨 갔다.

르보네는 드레스 자락을 쥔 채 수줍게 인사했다.

“서펜가의 장녀, 르보네 서펜이라고 합니다.”

르보네는 살짝 고개를 들고 카델라로트 공작을 바라봤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그의 날렵한 턱선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선대 공작으로부터 작위를 물려받은 지 6년. 스물셋이 될 때까지도 약혼녀 하나 두지 않은 남자.

현재 황실의 유일한 후계인 이 남자는 혈통 면에선 단연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그에겐 약간의 하자가 있어 과거에만 해도 모두가 기피하는 추세였지만, 이제는 기꺼이 그 위험을 감수하고 도박을 해 볼 만도 했다.

<카델라로트 공작과 황실의 사이가 다시 원만해졌다더군. 황후 폐하께서 공작가에 얼마나 극진하시던지.>

아무렴 그와 결혼하면 얻는 것이 더 많을 테니.

일단 그 하자도 상쇄해 버릴 만큼의 눈부신 미모가 한몫하고 있지 않은가.

차림새만큼이나 단정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반갑습니다, 서펜 영애.”

르보네는 발그레 볼을 붉히며 말했다.

“명성이 자자한 공작님을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

르보네가 그의 반응을 살짝 살폈다. 이딜로스의 미소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여전했다.

르보네는 안도하며 준비해 온 말을 조곤조곤 꺼냈다.

“공작님, 들어보셨겠지만 저희 서펜 후작저의 정원에는 북방의 희귀 품종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다음번에 공작님께…….”

“서펜 후작.”

그가 말을 뚝 끊었다.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못한 르보네가 입도 다물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봤다. 그녀에게 짧게 머물렀던 시선은 사라진 후였다.

이딜로스는 여전히 웃는 낯을 띠며 친절을 가장한 무례한 어조로 물었다.

“소개가 끝났으니 가도 됩니까? 제가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닌지라.”

“저, 전하……!”

줄곧 그의 곁에 공기처럼 서 있던 측근, 안셀은 기함할 뻔했다. 웬 영애가 공작에게 관심을 표하는 걸 지켜보며 들러리처럼 있는 것도 힘겨운데 이 뒤처리는 그보다 더했다.

안셀은 황급히 상황 수습에 나섰다. 그가 서글서글 웃으며 서펜 후작과 그의 여식에게 말했다.

“하하, 한시도 지체하기 힘든 용무가 있어 그렇습니다. 서펜 후작님, 영애. 조심히 가십시오. 다음에 또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안셀은 그들에게 정중히 인사하곤 공작이 더 나불대기 전에 억지로 등을 떠밀어 마차로 갔다.

함께 올라탄 마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멀어지는 차창의 풍경에 당혹스러운 표정의 후작과 그의 여식이 보였다. 영애 쪽은 굴욕스럽게 얼굴이 일그러진 것 같기도 했다.

창문에서 시선을 뗀 안셀은 불편한 가슴께를 문지르며 말했다.

“전하, 왜 자꾸만 그리 매몰차게 구십니까.”

“그랬던가.”

“예! 전하의 평판이 바닥이란 건 알고 계십니까?”

“…….”

그는 대답 없이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아 버렸다. 품위만 버리면 아주 귀까지 파 버릴 기세로 듣기 싫다는 티를 팍팍 냈다.

안셀은 못마땅한 눈으로 이딜로스를 흘겨봤다.

공작은 사교성이 현저히 부족한 인간관계가 틀려먹은 사람이었다. 쌀쌀맞고 깐깐한 성품에 남들과는 쉽게 담을 쌓는 성격.

정작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아서 최측근인 안셀만 죽어났다.

용케 한숨을 참아 낸 안셀이 화제를 바꿔 조심스레 말문을 뗐다.

“전하.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건 생각해 보셨습니까?”

“지난번?”

가지런히 뻗은 긴 속눈썹이 걷히고 금색의 눈이 드러났다. 안셀은 그가 대화할 마음이 생긴 틈을 타 서둘러 말을 꺼냈다.

“예. 마멜라 아가씨께 친구를 만들어 드리고자 하는……!”

“안 돼.”

그의 단호한 반응에 안셀은 찔끔했다.

“……생각은 해 보고 대답하신 게 맞지요?”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일 텐데.”

“하지만 전하. 아가씨께서는 늘 혼자이시지 않습니까. 분명 적적하실 겁니다. 전하께서도 출장이 잦으시니까요.”

이딜로스의 표정이 식었다. 눈가가 살짝 구겨진 것이 누가 봐도 심기가 구려 보였다.

그는 차분해서 더 매섭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한들 뭘 믿고 친구를 붙이지? 친구라고 붙인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해코지를 하면 뒤늦게 후회하라고?”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예민한 반응이 날아왔다. 안셀은 애써 그를 설득하고자 말문을 뗐다.

“제가 잘 엄선을…….”

그러나 공작의 날 선 눈빛을 받자 나오려던 말이 목구멍으로 도로 넘어가 버렸다. 지금은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답인 걸까.

안셀이 조용해지자 이딜로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멜라가 외로울 거라고…….’

사실 그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여동생이 곁에 가족 하나 없이 온종일을 집에 박혀 있는데 외로움 한 번 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친구라는 선택지를 고려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믿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붙여 볼 법도 한데.’

그러나 황실이 건재하는데 믿을 만한 자가 과연 있을까.

그나마 외로움을 달랠 만한 상대를 고려해 보자면 사람은 역시 못 미덥고 동물 정도가 딱 적당할 듯한데…….

거기까지, 무심코 미친 생각에 이딜로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그건 좀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짐승은…….’

이딜로스는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하나 만들어 주지 못하는 못난 오빠라 여동생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0